< -- 테카, 두라, 무라, 누라. -- >
네스토는 라훌 독립군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 해 온 원년 멤버였고 거대 계파 중에 하나인 온건파의 수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즈음 독립군의 활동에는 마뜩찮은 부분이 많이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펠릭스 계파의 강경한 태도였는데, 오래 전부터 그들은 유저 헌터들을 기습하거나 혹은 방해하는 여러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었다. 물론 그러다가 보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아서 초기에 독립군 조직이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자칫 라훌 독립군의 근간을 흔들리게 할 정도의 사건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고, 각자 계파를 이끌게 되면서 조금씩 펠릭스도 자기 소속을 아끼는 마음 때문인지 전혀 엉뚱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 여전히 주장은 강경하고 또 행사도 과격하지만 그래도 도를 넘어서는 일은 많이 줄었고, 규모도 작아졌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한 순간, 라훌 헌터 중에서는 몇 있지도 않은 라하가 실종이 되더니 이후에는 하파트가 유저 헌터에게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레트라는 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전에 탈예거를 죽인 일도 있고 해서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중이라 네스토는 제법 사건이 돌아가는 것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네스토가 직접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레트 시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철학이 레트 시에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네스토가 그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라훌족들 모두를 비관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훌족은 태생이 생체 에테르바디에서 태어났다는 원죄를 가지고 있었다.
만들어진 인형에게서 태어난 생명들. 아무리 그 생명들이 번성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시작이 그러하다면 제대로 된 생명이 아니라는 자괴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라훌족의 원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가르침에선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다른 접근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던 내용을 이야기하는 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라훌족들 모두가 분명히 말하기를 그 현자는 생체 에테르바디도 아니며 또한 라훌족도 아니며 그렇다고 에텔론 상점에 있는 점원과 같은 존재도 아니라고 했다.
그 현자는 실체가 없으며 오직 정신으로 존재하는데 만들어진 인형의 육체에 잠시 거하면서 이 데블 플레인의 라훌족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고 했다.
네스토는 그 내용에 대해서 몇 번이나 부하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 현자가 어떤 존재이건 그의 가르침이 라훌 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네스토가 은밀하게 레트 시로 들어왔다.
그것 때문에 타지난이 자신에 대한 깊은 의심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라훌족을 구원할 새로운 사상을 접하기 위해서 레트 시로 온 것이다.'현자의 가르침'은 종교적인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인 철학의 문제라고들 이 야기했다.
그 바탕에는 분명 영혼이라는 어떤 알수 없는 영역에 대한 문제가 깔려 있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현자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랐고, 그렇게 집회를 유도했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내가 증거로 여기 있는 것처럼 영혼은 때로 육체를 떠나서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혼은 홀로 존재하며 드러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들과 같은 존재들 사이의 금기이므로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합니다. 영혼의 격을 높이면 언제든 여러분이 저와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 기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시다. 나는 여기 와서 놀랐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라훌이라 부르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영혼이 없다고 여기는 것. 저는 그것에 놀랐습니다. 자 그럼 묻겠습니다. 생체 에테르바디를 이용한다는 저 유저 헌터들은 그 영혼은 본체에 두었을까요 아니면 생체 에테르바디에 두었을까요?"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인형이 넓은 홀의 중앙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그 인형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 인형이 현자의 영혼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생체 에테르바디를 사용하는 유저 헌터는 그들의 영혼을 생체 에테르 바디로 옮겨와서 유희를 즐기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먼 곳에서 인형을 움직이는 형태의 놀이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적어도 이곳에서 유희를 즐기는 이들은 그 생체 에테르바디에 영혼을 옮겨서 생활합니다. 물론 본체로 돌아가는 끈이 있어서 이쪽에 문제가 생겨도 본체로 안전하게 돌아갈 구명줄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혼을 가지고 생체 에테르바디에 왔다는 것입니다. 자,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오랜 갈등의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혼 없는 인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지니고 있는 부모, 조상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매번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현자의 이 말 한 마디에 감격에 겨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은 생식 세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혼은 부모의 영혼 조각을 반반씩 나누어서 자식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부모는 유전자를 물려주고, 이후에 교육을 통해서 순백의 영혼을 교육시킬 뿐입니다. 영혼은 제 스스로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적당한 그릇에 찾아드는 것입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오래 된 나무, 바위, 산, 강, 호수, 바다, 하늘, 날아다니는 새나 땅을 뛰는 동물이나 다리 없이 기는 것들, 그리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들까지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이 강해지면 결국 나무에도 돌에도 바위에도 강과 호수 등등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었습니다. 물론 서로 격이 다른 영혼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그럼 여러분의 그릇은 영혼이 깃들기에 부족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인 형에서 태어났기에 그릇으로 부족하다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영혼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린다. 여전히 듣기에 좋은 말이지만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믿어온 내용들이 그들의 사고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의심나는 것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꼭 영혼의 힘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에는 없지만 저 다른 행성에는 그런 인공지능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에텔론 상점의 점원들도 좀 더 발달한 인공지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들도 영혼이 있습니까?"
"영혼이 있는지 어떤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현자님은 그것이 보인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정말 제게도 온전한 영혼이 있는 것입니까?"
"저도 좀 봐 주십시오. 제게 온전한 영혼이 있는지, 정말 그런지 알고 싶습니다."
대충 집회의 시작은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즈음이면 몇 번 집회에 참가했던 이들이 질문을 하는 이들을 끼고 앉아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 준다. 이미 몇 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현자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지 묻는 이들에게 단호하고 확실한 어조로 영혼이 있다고 답해 준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토론회가 아니라 종교 집회와 같은 분위기가 된다. 현자의 한 마디에 모두를 구원을 얻은 듯이 엎드려 절하고 눈물 흘리며 감격한다.
현자는 그렇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회 참석자들을 만난다.
"내게도 영혼이 있습니까?"
네스토가 가까이 다가온 인형 현자에게 물었다.
"있습니다."
현자를 그렇게 말하고 네스토 곁을 스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맑고 곧게 잘 정련한 영혼이로군요. 나중에 아시겠지만 삶은 바로 그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정련하고 다듬기 위해서죠.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후 영혼의 격에 영향을 줍니다."
인형 현자는 네스토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갔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네스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네스토가 그 시선을 거북해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네스토에게 말을 걸었다.
"현자님께서 따로 말씀을 전한 것을 보니 보통 분은 아니신 모양입니다? 저 분이 다른 이들과 달리 몇 마디 더 하시는 경우는 대부분 영혼의 수련이 높은 분들이지요."
"영혼의 수련이요?"
"네. 이후에 집회에 참석하시다가 또 기회가 생기면 소규모 집회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 현자님께서 따로 시간을 내서 소규모 집회에 나오시기도 하시는데 그 때에 말씀을 하시지요. 삶이 영혼에 투영되어 결국 영혼의 격을 높이거나 낮추거나 한다고 말이죠."
"그럼 착하게 살면 격이 높아진다는 겁니까?"
"현자님께선 그 대답에는 언제나 여지를 두시는데 영혼의 격은 어느 쪽으로건 높아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음과 양 등등 어디 세상이 한쪽의 단면으로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하지만 권하시긴 밝고 아름다운 쪽으로 격을 높이시길 권하시죠. 그것이 궁극으로 이르는 가장 느리면서 빠른 길이라고 말입니다."
네스토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영혼이 있다고 하는 확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만 그 현자가 정말로 영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어떤지 확인을 할 길이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사실 확인하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싶었다.
어차피 불가지 영역 아닌가. 알 수 없는 영역의 문제에서 이제 라훌족은 이전과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라훌족에게 긍정적인 것이라면 까짓 확인 따위 없어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네스토는 곧바로 부하들을 통해서 이 사상을 데블 플레인의 모든 라훌족에게 전파하겠다는 결심했다. 네스토의 행동은 곧바로 타지난에게 보고되었다.
타지난은 그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 테카의 몰락을 확정짓는 사상이었다. 당장 무슨 방법이건 수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을 받는 타지난이었다.
곧바로 테카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리 저리 연결된 인맥을 따라서 유저 헌터들의 툴틱의 도움을 얻어서 곧바로 테카 전체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만의 공간에 모여서 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회의를 이끄는 것은 테카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이었다. 그들은 타지난을 포함한 일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립군의 다른 계파인 펠릭스도 그 일곱 중에 한 명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서로 견재를 하는 듯 하면서도 또 돕고 지냈던 그들 사이는 같은 테카 계급이라는 관계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미 보고를 받았겠지만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 내용부터 확인을 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회의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우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테카가 다 모인 것은 아니지만 전체 회의에 참석한 테카의 수는 천 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들이 또 몇 명의 아내나 남편, 혹은 아들이나 딸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 실제로 회의에 참석한 테카들의 힘이 모이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회의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심각했다.
테카들은 그들이 믿어왔던 믿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현자라고 하는 이의 가르침이란 내용은 테카인 자신들도 솔깃하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랜 교육으로 스스로가 라훌족 중에서도 선택받은 위치에 있는 테카라고 배우고 익혀왔던 이들이지만 사실 그 근거는 다만 조상들에 대한 기록 밖에 없었다.
족보라고 할 수 있는 그 기록에서 조상들로부터 어떤 혈통을 이었는지 확인하고 그것으로 혈통의 순수성, 혹은 영혼의 완전성을 인정받으면 테카가 되는 것이다. 여기 모인 이들은 그렇게 테카가 되었고, 또 테카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밑으로 두라와 무라, 누라를 거느리고 그들을 종처럼 부리면서 살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