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29화 (129/298)
  • < -- 테카, 두라, 무라, 누라. -- >

    타지난은 심기가 불편했다.

    얼마 전에 하파트가 죽었다. 사실 하파트가 테카이긴 했지만 생식 능력이 없는 몸이라서 그들 속에서도 그리 대우를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하파트는 태어날 때부터 생식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몸을 치료하는 회복 캡슐로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데블 플레인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이곳 데블 플레인에선 회복 캡슐도 이미 문명 수준을 훌쩍 뛰어 넘은 혜택이라 그 이상의 수단은 쓸 방법이 없었다. 테카, 두라, 무라, 누라는 라훌의 계급을 구분하는 명칭이다.

    테카는 부모가 모두 온전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이, 즉 본체로 내려와서 활동하던 헌터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그래서 테카의 영혼은 온전하다. 그리고 두라, 두라는 본체와 생체 에테르바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반쪽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말한다. 또한 무라는 그보다 더 약한 영혼을 지닌 이들이다. 두라와 그 이하의 라훌이 만나면 무라가 태어난다. 그래도 무라는 영혼을 지녔다는 의미에서 누라에 비할 수는 없는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누라는 영혼 없는 라훌족을 이르는 말이고, 무라, 두라, 테카가 모두 멀리하는 이들이다. 다만 필요에 따라서 간혹 은총을 내려서 누라에게 무라의 자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걸 얻기 위해서 누라는 몇 대를 충성하며 때를 기다린다. 언젠가 그들의 자손에게 영혼이 조금이라도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요즈음 그런 절대적인 신분제도가 흔들릴 일이 생겼다.

    문제가 생긴 곳은 이번에도 레트시였다.

    레트시에서 알게 모르게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영혼은 그 그릇이 태어날 때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라훌들을 현혹시키는 이들이 있었다.

    "알아봤느냐?"

    "아직 실체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테멜 안에서 모임을 가지고 또 서로 토론을 한다고 합니다."

    "토론?"

    "그렇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토론이라니?"

    "기본 바탕은 그렇습니다. 라훌족 누구에게나 영혼이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어째서 그러한지를 서로 이야기하고 그 토론을 통해서 그 믿음의 허실을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영혼이란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란 쪽으로 확고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는 어떠하냐?"

    "네?"

    "너도 그들과 접촉을 하지 않았느냐, 너도 무라이니 온전한 영혼이란 말에 혹하지 않더냐?"

    "타지난님의 말씀대로 그렇습니다. 반의 반쪽 영혼을 지녔다는 것 보다는 온전한 영혼이 제게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충만한 자신을 가지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도 그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지난의 질문에 사내는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테카에 대한 당연한 태도였다. 테카를 속이는 것은 온전한 영혼을 속이는 것이고, 그것은 이후에 테카가 되기 위한 자신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무라는 두라나 테카의 물음에 한 치의 거짓도 섞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쿵! 대답을 하던 사내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상태에서 그대로 앞으로 무너졌다.

    "치워라."

    타지난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와서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내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타지난이 사내의 대답을 듣고 단호하게 손을 쓴 것이다. 영혼의 차이에서 오는 신분의 구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이를 가까이 두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기 전에 처리한 타지난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군. 지금까지 그렇게 막아오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어. 더구나 그 장소가 레트 시야. 그곳에 있던 세력들은 적잖이 꺾이고 잘려나가서 다른 도시에 비해서 세가 약하지. 또 선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흥분해 있고, 고무되어 있어. 자주 무리를 지어 모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마침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이 새로운 사상이 퍼지고 있다? 이건 도대체 누가 준비를 한 거지? 설마 네스토의 짓인가?"

    타지난은 라훌 독립군 내부의 다른 계파 중에 하나인 네스토를 떠올렸다. 네스토는 여러 면에서 온건파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유저 헌터들과의 조화를 강조하 는 이였다. 거기다가 가장 큰 문제는 네스토가 누라 출신이라는 것이다.

    테카와 두라, 무라라고 하는 이 독특한 신분제는 그야말로 은밀하게 세력을 키워왔다. 애초에 처음부터 대놓고

    '영혼 없는 껍데기와 달리 우리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거룩한 존재다.'

    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섰다면 그들은 이미 라훌족들 사이에서 멸종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차별을 쉽게 받아들일 라훌족이 아닌 것이다.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뿌리를 튼튼하게 하고 세력을 키워가면서 결국 지금 상황까지 왔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의 근간인 계급 분별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영혼? 모든 이들이, 모두가 온전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라훌족 누구나 영혼은 온전한 것이다? 그, 그 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이나, 그걸 또 믿는 것들이나! 이익!"

    타지난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알아봐라. 네스토가 움직였는지 알아보란 말이다. 네스토가 라하나 하파트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이번 레트 시에서 벌어지는 선거와 새로운 사상과 연관이 있는지도 알아 봐!"

    "알겠습니다. 테카 타지난님."

    문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타지난은 길게 기른 녹색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동안 매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네스토가 있기라도 한 듯이.

    유저 헌터 마스터와 라훌 헌터 마스터 사이의 싸움이 있었다고 레트 시의 선거가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후보들의 선거 유세는 계속 되었고, 그 합동 유세에서의 행동으로 인해서 표심도 묘하게 갈렸다.

    자넷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하게 하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라훌들은 유저 헌터와 싸움을 할 때에 그 라훌 헌터 편을 들었던 이들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

    라훌족들은 유저 헌터들과 라훌족을 갈라놓고 서로 대립하거나 혹은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둘이 싸우면 당연히 우리 편을 위해 싸우는 쪽이 더 믿음직한 사람들이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주크 쪽에서 물밑 작업으로 그런 소리를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성향들이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자넷이나 게슈너는 아무래도 라훌들의 근본적인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라훌로 태어나 자란 이들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나올 것 같은데?"

    "몰라. 이전에는 아주 우세했는데 이젠 박빙이야. 아, 정말 미치겠네."

    자넷이 탁자에 엎어져서 한쪽 팔을 뻗어 그 위에 귀를 올리고 늘어졌다.

    세진은 그런 자넷의 모습을 보다가 힐끗 가슴선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시선을 피했다.

    요즈음 세진은 자꾸만 자넷에게서 여자의 느낌을 받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서른 중에서 몇 자리나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전까지 계획이야 20석 정도 차지하는 거였지. 그런데 지금으로는 10자리도 어려울지 몰라. 아흐흑. 미치겠네."

    "음, 그럼 슬쩍 신도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 보지 그래?"

    "그것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여야지. 솔직히 자넷 당에서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아직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이 없었거든."

    "한두 명, 끌어 들여서 자넷 당 전체는 아니어도 몇은 그 사상을 신봉하고 있다는 정도만 보여도 호응이 좋을 텐데?"

    "그럴까?"

    자넷은 세진의 말에 슬쩍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낀다. 종교와 정치는 원래 함께 해서 좋을 것이 없다. 하지만 자넷은 지금 라훌들에게 전파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 보자. 이대로 독립당 따위에게 밀리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참, 칸엘리 트라이브가 이번에 사냥을 갔다가 라훌들에게 제대로 당했다는 소리 들었어?"

    자넷이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세진을 보고 물었다.

    "여덟이나 당했다면서? 그래서 나도 조심하고 있어. 딴 짓은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하지."

    세진도 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몬스터 사냥을 하던 두 팀이 습격을 받아서 전멸을 했다고 했다. 한 팀에 네 명씩 균형 맞춘 팀이었는데 두 팀이 당해서 칸엘리 트라이브에서 이를 갈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있고, 이번에 다른 도시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제법 되는데, 라훌들이 많아. 그것도 이상해. 아무래도 그 암중 세력이 움직인 것 같아."

    자넷은 세진에게 조심하라는 의미로 정보를 전했다. 실제로는 독립군의 온건파 수장인 네스토가 레트 시로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서 타지난의 졸개들이 들어온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세진에게 이야길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충 라훌들이 많이 들어왔다는 식으로만 알려준 것이다.

    "선거 준비도 해야 하고, 거기에다가 밤이면 신도들을 모아서 집회도 해야 하고, 끼어드는 첩자들 골라내는 일도 해야 하고, 정말 바빠 죽겠다."

    자넷이 다시 팔을 뻗고 엎어진다.

    "야, 대부분의 일은 어리가 하잖아. 테멜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사람들의 성향을 분석해서 분리하고 또 적당한 집회장으로 분산시키는 일도 어리가 하는 걸로 아는데? 그 중에 제일 큰 집회도 어리가 이끌고 있고 말이지."

    "그렇다고 내가 노는 줄 알아? 나도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힘들어. 그것도 얼굴 안 들키려고 분장까지 해야 한다고. 그러는 넌? 넌 아주 손 놓고 놀고 있잖아."

    "경비대 데리고 하는 일이 어디 한 두가진 줄 아냐? 솔직히 내가 자넷 너 때문에 다른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 테러를 막느라고 아주 죽을 지경이다. 이것들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선거에서 불리할 것 같으니까 곳곳에서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놈들이 자꾸 늘어나잖아. 너희 자넷 당, 소속 후보들 보호하는 일도 장난이 아니다. 나도 바빠."

    "하아, 그렇지. 너 그래도 그 일은 잘 하고 있더라. 참, 선거 자금은 지원 안 해주냐?"

    "선거자금?"

    "그래. 선거자금."

    "야, 자넷, 벼룩의 간을 꺼내 먹어. 내가 너, 얼마나 부잔지 아는데 지금 나한테 에텔론을 내 놓으라고?"

    "흐응, 나도 여기 빈 몸으로 와서 너한테 봉급 받은 거 말고는 에텔론 없는데? 그거 지금까지 다 썼단 말이야. 그러니까 세진이 네가 좀 도와주라. 너 에텔론 무지 많이 벌었잖아. 너 그 에텔론이면 제이비아에 가서 몇 백 년은 놀고 먹을 수 있겠다. 응? 그러니까 좀 풀어 봐라. 응?"

    세진은 자넷이 슬쩍 탁자 앞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은근한 눈빛을 자신을 바라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좀...'

    "훗!"

    자넷은 그런 세진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요즘 간혹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을 발산해 보이곤 한다.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을 쓰는 세진을 보고 있으면 귀엽기도 하고 재미도 있는 자넷이다.

    '어떻게 기회를 한 번 봐야 하는데, 좀처럼 곁은 안 준단 말이지. 쳇.'

    자넷은 살짝 세진을 째려보다가 세진과 눈빛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탁자에서 일어나 상점 밖으로 나간다. 이제 날이 어두워졌으니 우주에서 온 위대한 철학자의 시종 노릇을 할 때인 것이다.

    사실 자넷은 변장을 하고 어리의 제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영혼만 이곳으로 건너와서 처음 만난 라훌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넷은 성공만 하면 나중에 라훌족의 성녀로 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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