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28화 (128/298)

< -- 자넷의 엉큼한 꿍꿍이와 골품제 -- >

"민감한 이야기지만 여기 라훌족들은 한 가지 풀지 못할 응어리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 그게 뭔지 알아?"

자넷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지. 라훌 족이 태생적으로 인형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박탈감. 그리고 그런 탓에 스스로 인형의 조각이라 생각하고 영혼이 없다고 여기는 거. 그거지."

"그래 잘 아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다르거든? 성골은 두 부모가 모두 진체였으니 완전한 영혼을 지녔다고 믿어. 그리고 진골은 반쪽의 영혼을 지녔다고 믿지."

"영혼의 반쪽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그런 건 일단 나중에 이야길 하고 지금은 여기 라훌들이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래. 계속해 봐."

"완벽한 영혼의 성골과 영혼이 반쪽인 진골이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될까? 그 아이들은?"

"흐음. 결국 그렇게 되면 조금 더 영혼의 완성으로 갈 길이 열리는 거야? 그렇게 믿겠네?"

"맞아.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의 후손들은 더 나은 영혼을 가지게 된다고 믿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가 바로성골이야.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는 진골이 3대를 이어서 성골과 맺어지면 비로소 그 아이도 성골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그것 참. 그것 때문에 진골들이 성골에게 매달리는 거로군?"

"응. 맞아. 그래서 진골도 그냥 진골 위로 세 등급의 진골이 있지. 그 가장 높은 등급의 진골은 성골과 맺어지면 성골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들을 말해."

"재미있네. 재미는 있는데 난리가 난 거네? 그 귀한 성골께서 이곳에서 유저 헌터에게 죽었으니 말이지."

"그래. 상징적으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는 알 수 없어. 아마도 그들은 나서지 않고 어떻게든 하부 조직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할 거야. 보기보다 그 조직은 안전주의라서 말이지. 복수를 하기는 해도 성골, 진골은 나서지 않고 그 아래에서 알아서 하게 하는 거지."

"그 하부 조직이란 놈들도 어떻게든 진골을 거쳐서 성골 자손들을 낳기 위해서 충성하는 놈들인 거야?"

"아, 그런 이들이 이끄는 단체인 거지. 아주 선별적으로 대상을 영입하거든. 그래서 다음 대에 진골에게서 아이를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로 이용하는 거지."

"무섭군.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니 어떻게 스스로 영혼이 없다고 믿을 수가 있지?"

"그거야 그렇게 교육을 받고 또 그런 믿음이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지."

"무슨 소리야?"

세진은 자넷이 작은 목소리로 한 말에서 뭔가 섬뜩한 느낌을 받고 되물었다.

"믿음이 현실을 만들어. 라훌족은 점점 수명이 짧아지고 있고, 또 돌연사가 늘어나고 있어."

"그래? 그런데 그게 뭐?"

"영혼 때문이야. 영혼이 없다고 스스로 믿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면 영혼이 몸을 떠나지. 그렇게 죽는 거야."

"야, 무섭잖아. 그럼 라훌족들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는 말이냐?"

"응. 그래.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지. 그래도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이들에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거든. 스스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 벌어지지 않는 일이란 거지. 또 그런 것 때문에 잘못된 믿음이 더 신뢰를 얻게 되기도 하고 말이야."

"설마 진짜로 영혼이 있고, 없고 그런 건 아니겠지."

"바보. 네가 그랬다면서 어리에게, 영혼이 깃들 그릇에는 영혼이 자연스럽게 깃들게 된다고 말이야."

"그랬지."

"그 말이 맞아. 다만 믿음이 있어야지. 그렇게 믿는 곳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 야. 돌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곳에서만 돌에 영혼이 깃들어. 그런데 사람에게만 영혼이 깃든다고 믿으면 당연히 사람에게만 영혼이 있는 거지. 동물이나 나무나 산이나 돌이나 바위나 강이나 호수나 그런 것에는 영혼이 없다고 믿으면 그곳에 있던 영혼도 떠나고 말아."

"그래서 그런 믿음 때문에 라훌족의 몸에서 영혼이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거 그럼 여기서 종교라도 만들어야 하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규정 위반이어서 말이지. 하면 안 되는 거거든."

자넷이 투덜거렸다.

"음, 하지만 라훌족 스스로 만들어내는 종교는 문제 없는 거 아닌가? 이를테면 새로운 철학자나 현자가 나타나서 라훌족의 사상을 이끄는 거지."

"재미있겠네? 하지만 헌터룸의 관리자들이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음, 예배당을 만들자. 이동식 예배당."

"테멜로?"

"당연하지. 그리고 그 안에서 선교사들을 양성해서 퍼뜨리는 거야. 교리는 간단하지 영혼의 그릇에는 영혼이 자연스럽게 깃든다. 믿음은 없던 영혼을 불러와서 대상에 깃들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뭐 이런 정도를 정리하면 되겠네."

"그런다고 믿을까?"

"하하하. 있잖아. 증거가."

"증거?"

"어리."

"아, 어리.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어리를 내보이면 가능성이 있단 말이네?"

"어차피 사이비라도 상관없어. 그걸로 무슨 이득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라훌족에게 유리한 교리를 펼치면 믿고 싶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걸 믿고 의지하려고 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영혼이 없다고 믿는 것 보다는 있다고 믿는 것이 좋지 않겠어?"

"호호호. 재밌겠다. 음. 낮에는 라훌족의 정치 지도자, 밤에는 베일에 싸인 종교 지도 자. 멋져. 아주 멋있어. 호호홋. 나 그거 할래. 내가 하고 싶어."

자넷이 손까지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스스로 라훌의 종교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이다. 조금 전까지 헌터룸 관리자들이 알면 곤란하다고 하더니 그 말은 까맣게 잊은 모습이다.

세진이 엉뚱하게 즉흥적인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꺼내면서 잠깐 주의를 돌려놓기는 했지만 이후에 며칠 동안 자넷과 세진의 관계를 자연스럽지 못했다.

어떤 경로를 통했건 고백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세진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진과 자넷은 사는 세상이 너무 달랐다.

세진이 잘 알지 못하는 자넷의 신상이나 그런 것을 모두 제외하더라도 일단 고향이 무슨 나라나 대륙의 차이가 아니라 행성, 우주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가까운 이웃 나라거나 먼 코쟁이 나라거나 다른 나라의 배우자를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은 세상을 사는 세진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 자신이 외국 사람과 만나서 짝을 이룰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 세진이었다.

그런데 나라나 민족도 아니고 행성과 종족이 다른 여자친구라니 기겁을 할 일이다.

그럼에도 세진이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또 자넷이 그리 싫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행성 자체가 다르고 서로 연관이 없는 우주라는 사실 때문에 자넷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지만, 또 그래서 부담이 없기도 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그 자체를 원한다는 느낌이어서 좋은 면도 있었던 것이다.

자넷의 배경이나 지위가 대단하다는 것을 아는 세진이지만 지구에서 그걸 이용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만약 자넷과 사귀게 된다고 하면 정말 사람만 보고 사귀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다가 지구와 이곳 사이의 시간 왜곡 현상도 세진의 갈등을 부추겼다.

지구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더라도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 자넷과의 만남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자넷과 세진 사이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고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세진은 타의에 의해서 자넷 문제를 깊이 고민할 여유를 잃고 말았다.

칸엘리가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전 하파트를 처리한 직후에 한 번 찾아와서 독대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칸엘리는 부하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홀로 세진을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혼자서?"

"게슈너씨 당신에게 확인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전에 말씀하셨던 그 문제입니까?"

세진은 칸엘리가 하파트와의 싸움에 끼어들었냐고 묻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었다. 그저 그랬을 것 같으냐고 되물었을 뿐이었다.

칸엘리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세진은 마음대로 생각해도 상관없지만 무슨 보상 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쓸데없는 소문이 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도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그때 세진이 했던 말 어디에도 하파트와 칸엘리의 싸움에서 세진이 칸엘리에게 도움을 줬다는 뜻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칸엘리는 몇 번이나 세진과의 대화를 곱씹어 보다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맞습니다. 게슈너씨 나는 당신의 확답이 필요합니다. 나와 하파트의 싸움에서 당신이 간섭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 마지막 일격을 주고받을 때에 하파트의 마스터 블레이드가 사라진 것이 당신 때문입니까?"

세진은 한참 칸엘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칸엘리씨와 하파트씨의 대결을 관람했을 뿐, 둘 사이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세진은 칸엘리에게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칸엘리는 빚을 지워두면 이후에 어떤 식으로건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인맥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칸엘리를 향한 라훌족들의 복수가 계획되고 있을 텐데, 하파트와의 일에 대해서 관계를 맺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그러니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흐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답을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나 칸엘리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 비록 생체 에테르바디의 목숨이라고 해도 그 가치가 절대 작지 않은데 그걸 극구 아니라고 하니 그렇게 믿을 밖에요."

칸엘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게슈너가 그 일을 했다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 일을 끝까지 그렇다고 우기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더더욱 싫다는 이에게 숙이면서까지 뭔가를 건네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해 주신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참, 아시는지 모르지만 이번에 죽은 하파트, 그 사람 평범한 마스터는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 라훌족들 사이에서 암중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세진은 칸엘리에게 그렇게 경고를 해 줬다.

사실 그대로 둬서 칸엘리가 당한다고 해도 세진이 안타까울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싸움을 할 거라면 그 성골인지 진골인지 따지는 놈들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조언이었다.

"그래요? 알았습니다. 참고하지요."

칸엘리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돌아갔다.

= 어째서 저 사람에겐 그렇게 말을 높이는 거예요?

어리가 어깨 위로 기어 오르면서 세진에게 물었다.

"저 사람 나이가 많잖아. 이곳 데블 플레인에서만 몇 백 년은 보냈을 걸? 그래서 그 정도 대우를 해 주는 거지."

= 헹, 하지만 세진님 다른 사람들에겐 거의 막말이잖아요.

"뭐 마스터잖아. 능력도 있고, 나이도 있고. 그래서 나도 막나가지 못한 거지. 괜히 적을 만들 이유가 없잖아. 지금 있는 적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말이야."

= 그런데 라훌족 골품제도 그거 믿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일까요?

"그렇게 배우면 그렇게 믿게 되어 있어.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고, 다른 것을 배울 기회가 없으면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참 단순하지. 그러다가 누군가 군중 속에서 홀로 일어나서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군 중들의 지지를 얻으면 그 때부터 변혁이 오지. 혁명이 오고, 또 피가 흐르지. 지구의 역사가 그랬으니까."

= 라훌족도 그렇게 될까요? 자넷이 사이비 종교를 널리 퍼트린다면서요? 그러면 영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될 거고, 골품제를 믿는 이들의 반발이 있을 텐데요?

"그런 말이 있지. 마른 들판에 들불처럼!"

세진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진이 생각하기에 라훌족들이 영혼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면 그만큼 새로운 교리는 잘 먹혀 들어갈 것이다. = 그런데요. 제가 영혼이 있다고 어떻게 믿게 할 거예요. 저를 보고 그냥 테라포밍 기계라고 생각해 버리면 안 되잖아요.

"생각해 봤는데, 네 모습 그대로 보이는 것 보다는 조형물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무슨 여신의 모양이나 그런 걸로."

= 우와. 정말로 사이비 종교를 만들려는 거예요. 어리는 여신이 되기 싫어요.

"여신이 아니라 우주 어딘가에서 넘어 온 사도 정도로 해도 되지. 아, 그 인형있지?"

= 뭐요? 제가 쓰는 그거요?

"그래. 그건 딱 봐도 무생물이잖아. 그런데 어리 네가 움직일 수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야길 하는 거야. 무생물에도 영혼이 깃들면 이렇게 움직인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움직이느냐. 너희가 움직이는 것도 모두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생체 에테르바디가 인형이라 영혼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어차피 그 안에 본체의 영혼이 옮겨와서 이곳에서 유희를 즐긴 거였다. 영혼 없이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을 것 같으냐? 결국 그들도 영혼이 옮겨 온 것이다. 그러니 너희 라훌족이 영혼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끄는 망언에 불과하다. 뭐 이러는 거지."

= 흠. 그건 좀 나은 것 같네요. 그렇게 제가 깨달음을 얻어서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여기에 잠시 들렀다가 가는 그런 영혼으로 하죠. 그거 재미있겠이요. 호호홋.

어리도 그 정도에서 양보하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세진은 빨리 이 세로운 흐름을 라훌족에게 퍼트려서 골품제를 신봉하는 라훌족을 뒤흔들어 놓아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야 타지난에게 접근할 틈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