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넷의 엉큼한 꿍꿍이와 골품제 -- >
"세진. 내가 재미있는 정보를 가지고 왔어."
자넷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중인 세진의 사색을 방해하며 말을 걸었다.
세진의 고민이 칸엘리에서 비롯된 것을 아는 자넷은 잠시 다른 이야기로 세진의 고민들 풀어줄 생각을 한 것이다.
"뭔데?"
세진이 고개를 들고 자네의 말에 반응했다.
"있잖아. 라훌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들이 있다는 거 알아?"
"특별한?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 죽은 하파트가 바로 그 특별한 라훌에 속하는데 말이지? 듣고 싶어?"
"야! 장난치냐? 그럼 안 듣고 싶겠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호호홋. 그렇지? 음, 그런데 이 정보 얻느라고 내가 무지 고생을 했는데 그냥 주긴 그렇고 나한테 뭘 해 줄래?"
"응? 해 주다니 뭘?"
"이를테면 선물이라거나 혹은 약속이라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이거 정말 어렵게 구한 정보라고. 그리고 그 가치도 엄청나! 그러니까 간단한 걸로는 안 된다고."
세진은 멀뚱하게 자넷을 바라본다.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다.
잠시 반나절 사이에 자넷의 뭔가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세진이다.
하지만 자넷이 뭔가 대단한 것을 알아왔다니 궁금하기는 하다.
"뭐데? 내가 알 수 없는 내용이니까 어디 자넷이 원하는 걸 한 번 이야기 해 봐. 그럼 들어보고 내가 응할지 말지 결정을 할 테니까 말이야."
"흐응, 그런 식으로 나한테 떠넘기겠단 말이지? 좋아. 뭐. 그럼 그렇게 하자. 음, 내가 원하는 건, 세진이 나를 오래 만나는 거야."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이제 타지난만 해결을 하면 고향으로 갈 거잖아. 그럼 나는 널 못 만나게 되는 거고 말이야."
"그런가? 그래서?"
"그러니까 세진 네가 나를 만나러 왔으면 좋겠다는 거지. 너 분위기가 딱 그렇거든. 이번에 가면 안 올 것 같은 그런 분위기야."
"야, 그건 아직 멀었지. 나 이 몸 말고 본체로 다시 수련을 해야 하거든? 그러자면 제이비아에서 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벌써부터 하냐?"
세진은 자넷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너, 세진. 아, 맞다. 너 아직 적응이 안 되어 있지. 그러니 이해할게. 하지만 이걸 알아 둬. 넌 다른 사람들과 달라. 달라도 아주 다르지. 너희 행성에서 너는 이제 규 격 외의 존재라고. 너 말이야. 그걸 알아야 해."
"무슨 소리야?"
세진은 자넷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잘, 들어. 일단 너는 수명이 엄청나게 길어. 그것도 아주 아주 길지. 너 회복캡슐을 먹었잖아. 그것만으로도 네 수명은 무지무지 길어진 거다. 거기다가 너 에테르 수련도 하잖아. 그렇게 되면 또 수명이 늘어나지. 이것만으로도 넌 너희 고향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가 된 거야. 그러니까 시간도 거기에 맞게 생각을 해야 해. 그게 기본이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네게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결론은 내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네겐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네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거네?"
"역시 세진은 이해가 빨라서 좋아."
세진은 잠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자넷의 요구는 너무도 쉬운 요구였다. 어차피 세진이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곳에서 흐르지 않는 것과 같다. 아무리 지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더라도 이곳에 오면 떠난 시간에 돌아온다. 그러니 자넷과의 약속은 그가 헌터룸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지켜질 수밖에 없다. 일부러 세진이 자넷을 피해서 만나지 않을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런데 세진은 갑자기 자넷이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좋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그런 건데?"
"응? 뭐가?"
"왜 너는 내가 너와 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데? 거기다가 고향으로 갔다가도 다시 네게 돌아오란 말은 그 의미가 상당히 심오하다고. 우리 고향에서 그런 말은 서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쓰지. 특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선 거의 그런 의미로 쓴단 말이지."
"그래서?"
"응?"
"내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이면 세진이 곤란한 거라고 있어? 고향에 혹시 결혼한 여자나 사랑하는 여자가 있기라도 해? 너 그런 여자 없잖아. 어리가 그랬거든?"
"아, 뭐 그거야 그렇지만."
세진은 어정쩡하게 대꾸를 하면서 어리에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지 않은 것을 살짝 후회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상관 없잖아. 그리고 사실 나 너한테 관심이 있어. 아직은 아니지만 너를 마음에 담을 수도 있단 말이지."
"야야야, 그거 좀 그렇잖아. 나는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이제 해 보면 되는 거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누군가 누구에게 그런 뜻을 직접, 혹은 은근히 보여주면 그걸 받은 사람이 또 그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그러면서 연인이 되거나 타인이 되거나 하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그 단계에 있다는 거네?"
"자꾸 이럴래? 보통 이 정도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야지. 내가 먼저 이야길 했는데 그걸 꼬치꼬치, 넌 도대체가 예의라곤 배운 적이 없는 거야? 나도 좀 부끄럽고 그럴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세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말았다. 사실 자넷이 부끄러워 한다거나 할 거 란 생각은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휴우, 그래. 일단 이 이야긴 여기서 그만하고, 내 요구는 일단 이야길 했으니까 그걸 들어주거나 말거나 하는 건 마음대로 해. 내가 가진 정보는 그냥 알려 줄 테니까."
자넷은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세진에게 라훌 독립군 내부에서 흐르고 있는 암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 그거 나도 알아. 라하가 죽기 전에 잠시 이야길 했었지, 하파트와 몇몇이 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 그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자신들을 다른 라훌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상이 있다고 했었어."
"흐응. 그것도 들었어? 하지만 누구 누군지는 모르지? 그리고 정확히 무슨 이유로 그런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자넷은 세진이 그들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자, 야금야금 조금씩 내어 주려던 정보의 한 자락을 더 풀어 주기로 했다.
"이유? 그것도 알아? 난 그게 제일 궁금한데?"
"음. 그래. 그거부터 이야길 하자. 예전에 이곳 데블 플레인에 초기 헌터들이 들어왔을 때, 헌터룸 관리자들의 규칙이 지금과 많이 다르진 않았어. 특히 생체 에테르바디의 소실은 꽤나 큰 문제였지. 그래서 남자들이 여성체 생체 에테르바디를 이용하거나 여자들이 남자의 생체에테르바디를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그럴 수도 있겠지. 자신이 쓰던 생체 에테르바디를 잃었다면 어쩔 도리가 없잖아. 새로운 몸을 만들 에텔론이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재미있는 것은 두 번째 생체 에테르바디 사용자들의 생존 확률이 훨씬 높았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세진은 자넷의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 번이라도 경험이 있었으니 두 번째는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하, 그거 재미있네? 많은 유저 헌터들이 성별이 다른 몸으로 활동을 했다는 소리잖아. 하하하."
"그래. 그래서 초기 인원들 중에서 많은 수가 자신의 생체 에테르바디를 두고서도 좀처럼 다시 접속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아니면 새로 자신의 성별에 맞는 생체 에테르바디를 만들어서 성장을 시키거나 했지. 아무튼 그 당시에 그래서 유저 헌터들 사이의 성적인 관계도 몹시 복잡했었어. 자신과 다른 몸, 다른 성별의 몸. 그래서 극도로 성적인 접촉을 꺼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내 것이 아닌 몸이란 생각으로 멋대로 굴리는 경우도 많았어. 그런데 그걸 인정할지 모르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좀 더 성적으론 망나니 기질이 있어. 그런데 그런 남자들이 여자의 몸을 가졌으니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베이비 붐이 생긴 거야?"
"호호호. 재밌는 표현이네? 맞아. 그렇지. 아기 폭탄이란 말이 맞을 정도로 아이들이 늘어났어. 헌터룸 관리자들은 그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지경이지. 아무튼 그랬어."
"그런데?"
"아, 그렇게 라훌들이 태어나고 또 늘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긴데, 여기서 또 다른 형태의 라훌족이 존재하게 되었지."
"응? 또 다른 형태?"
"두 개의 생체 에테르바디를 잃어버린 유저 헌터들."
"응?"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였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몸체를 그대로 이용해서 헌터로 생활하거나."
"아, 그렇구나. 그런 이들도 있었겠어."
"그래. 생체 에테르바디가 아니라 본신으로 이곳에서 활동을 했던 이들이 낳은 아이들. 그들이 있는 거야. 겉으로는 전혀 표시가 나지 않지만 일단 생체 에테르바디가 아닌 본체가 낳은 아이들은 헌터룸 관리자들이 돌봐주지 않았어. 그 이유는 본체의 아이는 본체의 아이기 때문이야. 부모는 자식에 대한 양육의 책임이 있지."
"하지만 생체 에테르바디도..."
"그건 유희로 인정을 해 주지만 본체로 이곳에 온 이들은 유희가 아니니까 아이들도 유희로 취급할 수가 없는 거야."
"아, 그렇구나."
"여기서도 두 가지의 아이들이 나왔어. 부모 중에 한 명만 진체인 경우, 그리고 부모 둘이 모두 진체인 경우."
"이건 뭐 골품제도 같은데?"
"응? 골품제도?"
세진은 그렇게 되묻는 자넷에게 옛 신라의 골품제도를 설명했다. 성골과 진골과 육두품에 대한 이야기였다.
부모 모두가 진체면 성골, 한쪽만 진체면 진골, 그 아래도 세대나 혈통에 따라서 여섯 구분을 하면 될 것 같다는 설명에 자넷은 아주 그럴듯 하다고 놀라워했다.
"그래. 그럼 세진 네 말대로 성골과 진골이라 하자. 그런 이들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또 이들끼리 어울리게 된 거지. 물론 그러면서도 절대로 밖으로 정체를 알리진 않았어.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세력이 약한 상태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게 되면 결국 핍박을 받아서 사라지게 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거든."
"묘한 일이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대부분 실패자들이었어. 다른 이들은 한 번이나 두 번째에 모두 성공해서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은 두 번의 기회를 잃고 본체로 헌터 생활을 하며 진짜 목숨을 걸고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몹시 조심스러워진 거지. 그 성향이 그 자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거고."
"하하하. 그래서 그 성골과 진골들이 세력을 만들어서 독립군 안에 있다는 거네? 그럼 아직도 성골이 있나? 몇 대가 흘렀으면 성골은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아니. 성골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성골은 성골들끼리만 짝을 지었으니까 말이야. 거기다가 진골들이 성골을 워낙 잘 보호하고 있으니 성골은 최고의 환경에서 생활하며 성장하고 있지."
"이상하네? 진골이 왜?"
세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골들이 무슨 이유로 성골을 감싸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일종의 세뇌에 의한 거라고 볼 수도 있고, 종교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어. 그 때문에 이번에 문제가 심각해진 거지."
"문제?"
"하파트가 성골이거든."
"엑!"
세진은 하파트가 성골이란 한 마디에 비명을 질렀다. 방금 종교란 말까지 들은 상태에서 성골이 죽은 상황이 겹쳐지니 성전이니 뭐니 하는 종교 분쟁이 떠오른 것이다.
"그, 설마하니 성골이 죽었다고 그들이 모두 나서서 복수를 하고 어쩌고 하는 거야? 지금 그런 분위기야?"
"특히 타지난이 아주 난리가 났지. 그 역시 성골이거든."
"하아, 이건 뭐. 완전히 불개미 둥지를 건드린 꼴이네? 아, 이런 칸엘리가 내가 하파트를 죽일 때 도움을 준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 이야기가 타지난에게 들어가면 정말 난리가 나겠네. 젠장!"
세진은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