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21화 (121/298)

< -- 마스터 라하와 마주하다. -- >

"흡!"

"조용. 조용. 버둥거리다가 이게 네 목을 잘라버리면 그걸로 인생은 종치는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 알지? 조용히 하자."

제이앤은 정신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하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등 뒤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입이 막히고 목 밑에 칼날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기는가 싶더니 곧바로 낯선 테멜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아악!"

시퍼런 칼날이 제이앤의 어깨를 찌르고 들어왔다.

"참아.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

누군지도 모를 사내의 목소리가 움찔 놀란 제이앤의 몸을 꽉 잡고 제약을 가한다.

그리고 이어서 몇 개의 칼날이 제이앤의 관절과 몸에 박혀 들어온다.

"영구 회복 캡슐은 복용을 했나?"

"아, 아니요. 전 아직..."

"그것 참, 아쉽군. 하파트의 수족이라서 그 정도 투자는 된 몸인 줄 알았는데 아니란 말이지? 뭐 그거야 별 상관이 없기는 하지. 자 그럼 가 볼까?"

사내는 제이앤을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이미 팔다리를 쓸 수 없는 제인앤은 사내가 팔을 잡고 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당탕탕!

"아악!"

"제, 제이앤?"

"알프론?"

제이앤은 던져지다시피 내동댕이쳐진 석실 안에 알프론이 이곳저곳 사슬에 관통된 상태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재회의 즐거움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너희들이 반갑게 인사를 나눌 시간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제이앤은 자신을 납치한 인물의 목소리를 향해서 고개를 들었다.

"게슈너?"

제이앤은 확신이 없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맞아. 게슈너. 내가 게슈너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반가워 제이앤."

"어째서 당신이? 왜? 어떻게?"

제인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무슨 이유로 자신과 알프론이 게슈너에게 납치를 당해야 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테멜을 이용한 납치가 쉬운 일은 아니다. 납치를 한다고 해도, 이후에 그 테멜을 옮기는 사람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납치범이 들어간 테멜을 옮기는 공범이 있기 때문에 테멜을 이용한 납치도 완전 범죄가 되기는 어렵다. 특히 레트 시의 번화가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쯤이면 제이앤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동료들의 수색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일정 지역을 봉쇄하고 테멜 수색을 벌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이앤은 날도마뱀의 몸을 하고 있는 어리가 이미 범죄 현장을 벗어나서 게슈너의 상점으로 돌아갔단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닌 날도마뱀의 몸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도 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어리의 장점을 이용한 납치 작전인 것이다.

오늘 제이앤과 알프론이 만나기로 한 것을 알고 한 사람씩 차례로 납치에 성공한 게슈너였다. 하파트에게 세뇌가 되어서도 둘 사이의 끈끈한 관계는 계속 이어져서 이곳 레트시에 와서도 둘은 간혹 따로 만나서 화끈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마침 오늘  그 약속을 잡고 나섰다가 일을 당한 것이다.

"후안은 잘 있나? 트렉도 그렇고 라하도 그렇고 후안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더군."

"후, 후안? 당신이 왜 후안을 찾지?"

알프론이 물었다.

퍽!

"커억!"

하지만 돌아간 것은 게슈너의 발길질이었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야. 한 가지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주마. 너희는 죽는다. 라하나 트렉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트렉은 모진 고문 속에서 고통 받다가 죽었고, 라하는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고 깔끔하고 고통 없는 최후를 맞았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트렉처럼 죽고 싶은지, 라하처럼 죽고 싶은지 선택을 하면 되는 거야. 참고로 알려주면 트렉도 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털어 놨다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거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굉장한 결심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게 후회로 남지 않기 를 바라겠다. 어차피 털어 놓을 거면 라하처럼 깔끔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후, 후안은 하파트님의 호위로 있어요. 그리고 그는 거의 의지가 남아있지 않아요. 이전에 사고를 당해서 뇌에 큰 상처를 입은 탓에 회복이 되어서도 기억을 많이 잃었고, 결국 하파트님의 충실한 호위가 되었어요."

"의지가 남지 않았다? 그럼 꼭두각시란 말인가?"

"우린 모두 하파트님의 뜻을 따르도록 정신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하파트님께 충성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죠."

"지금 이렇게 떠드는 것은 하파트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정보는 중요하지 않아요. 대수롭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배신이니 뭐니 할 것도 없죠. 하지만 질문에 따라서는 대답하지 못할 것들이 생길 거예요. 하지만 그건 우리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제이앤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게슈너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답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할 것인데 고문을 당해도 하파트님의 세뇌가 깨지지 않으면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고문은 강도가 높아질 것이고 고문과 세뇌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제이앤 자신이 겪을  고통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렸다.

"그냥 죽여 줄 수는 없나? 어차피 물어도 답을 하지 못할 것이 많다. 그러니..."

"나에게 인정을 바라진 마라. 알프론. 나는 네가 내 몸에 박아 넣었던 못질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내 못질을 몸에 박고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그런 소리를 하니까 말이야. 있다면 유저 헌터들 몇이 있긴 하지만 그들과 라훌족인 게슈너 사이에는 접점이 없거든."

알프론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슈너가 자신의 못질을 당했다는데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부터 즐겨 보자고. 질문과 답. 그게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내가 질문을 하고 너희는 성실한 답변을 하는 거지. 그 약속을 어기면 당연히 고통이 따를 거야. 물론 지금 이 시간은 그냥 간단하게 점검을 할 생각이니까 고문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너희가 세뇌되었다고 하니 그 수준도 파악을 해 볼 겸. 이런 저런 질문을 할 생각이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너무 성의 없이 대답을 하진 말아. 나중에 그게 화가 되어 너희를 더 괴롭게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세진은 그렇게 말하며 아주 간단한 것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그는 알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복수와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이앤과 알프론의 삶의 발자국을 짚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파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밝힐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뇌에서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그것이 금기라고 인식을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이 지는 의미를 제대로 모르면 하파트에게 해가 될 내용이라도 단편적인 것들을 툭툭 내뱉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세진이 고문을 하지 않더라도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한다.

알프론과 제이앤은 그런 식으로 세진과의 질답 시간을 가졌고, 세진은 의외로 세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 후안과 하파트, 타지난만 남은 건가요?

중앙 홀로 들어오는 세진에게 어리가 물었다.

"그렇지. 이젠 그들만 남았지."

- 잔가지는 모두 치고 몸통만 남은 거네요? 그런데 셋 중에 누가 제일 중요하죠?

세진은 어리의 질문에 한동안 답을 하지 못했다.

제정신이 아닌 후안? 자신의 몸에서 에테르 수련법을 빼낸 하파트? 하파트와 라하의 상급자인 타지난?

"글쎄? 생각해보면 갚아야 할 놈들에겐 모두 갚은 것 같기도 해. 나를 테멜로 끌고 들어간 녀석이 하파트가 아니라 라하였으니까 말이야."

세진은 겨우겨우 도망을 가다가 드디어 자살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가졌을 때, 자신을 기절시킨 것이 라하였다는 사실을 트랙과 라하에게서 확인을 했었다. 그렇게 되니 결국 원한을 가질 인물들은 모두 처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신이 나간 후안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나, 테멜에서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는 하파트와 타지난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이나 모두가 도가 지나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를 하기엔 그 동안 내 노력이 너무 아깝지? 간접적으로 라훌 독립군도 연관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어떻게든 하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후안과 하파트, 타지난을 그냥 용서할 수는 없잖아."

- 세진님이 그러시다면 그런 거죠. 어리는 세진님 편이니까요. 그래서 셋 중에 누가 제일 미워요?

"누가 밉냐고? 무슨 질문이 그러냐? 그거 꼭 초등학생 질문 같은데?"

- 흥, 원래 단순한 것이 심오한 거예욧.

"그랴. 그렇다고 하자. 그리고 미운 녀석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 후안 녀석이 제일 미운데?"

- 정신을 놓았다면서요?

"그렇다고 그 놈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죄는 영혼이 지은 거야. 그러니 육신의 훼손과는 상관이 없지. 난 놈의 영혼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믿어. 그 영혼을 외부로 발현하는 육체에 문제가 생겼을 뿐이지. 그러니 그 놈은 죄값을 치러야 해."

- 하지만 라훌족은 자신들에겐 영혼이 없다고 믿는데요?

"그게 멍청한 거지. 나는 우리 어리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왜냐면 어리는 영혼이 깃들기에 충분한 그릇이니까."

- 정말요?

"당연하지. 지구에선 바위나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한 바위나 나무는 신령스런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뭐 지구에 그 놈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면서 많은 신화나 전설들이 이상하게 꼬이고 있긴 하지만."

- 그러니까 그릇이 있으면 영혼이 자연스럽게 깃드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래서 어리도 그에 합당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고요.

"넌 영혼 중에서도 아주 등급이 높은 영혼이 깃들었을 거야. 우리 인간들의 영혼과 같은 등급일 걸?"

- 우헤헤, 고마워요. 세진님.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셔서. 그러니까 라훌족도 그럴 거라는 거죠? 모두들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 내 생각은 그렇다. 그 미친 타지난이나 펠릭스와는 다르지. 그 놈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라훌족이고 다른 라훌족과 다르다는 미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개소리일 뿐이지. 도대체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라하도 그런 모임이 은연중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지 자세힌 모르던데."

세진은 라하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라하는 정말로 세진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지 결국 죽기 직전에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큰 비밀 하나를 털어 놓고 목숨을 구걸했었다. 그래서 세진은 조금 더 쉽게 그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끝까지 마스터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세진은 그의 목숨을 취하는 것을 많이 망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세진에게 실망을 주고 죽었다.

라하가 마지막에 내 놓은 비밀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뭔가 라훌 독립군의 상층부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 그들 일부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라하는 세진에게 목숨을 구걸했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라하는 무너졌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뒷끝이 좋지 않은 세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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