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을 파악하고 작은 복수를 하다. -- >
"기분이 안 좋은가 봐?"
"응?"
"복수했잖아. 그런데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음. 솔직히 그래. 그냥 트렉을 봤을 때, 목을 자르거나 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그 자가 내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 줬다는 것이 좀 그러네."
"깔끔하지 못해서? 아니면 세진도 그들과 같은 악당이 되는 것 같아서?"
"악당이라. 하하. 그건 좀 그렇고. 악당보다는 인간적이지 못한, 비인간적인 행동이 아니었나 싶은 거지."
"그렇다고 트렉을 살려 줄 것도 아니었잖아. 그리고 정보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고. 뭐 트렉이란 그 인간이 살아온 삶이 좀 동정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와 그의 동생이 죽인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아? 그 중에는 라훌족도 있었어. 그나 그의 동 생은 죽어도 할 말 없는 자들이었다고."
자넷은 한 편으로는 자신들을 껍데기 인생이라 생각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서 살았던 드렉, 트렉 형제를 동정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저지른 수 많은 죄악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죄의 시작이 아무리 동정의 여지가 있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그들이 벌인 범죄 행각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지. 그럼에도 내가 트렉에게 심한 짓을 했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야."
"알았어. 이해해. 하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그건 네게도 좋을 것이 없어. 차라리 명상을 해. 그리고 네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뉘우치고, 정당했다면 죄책감은 털어 버려. 알았어?"
"그래. 그렇게 하자."
세진은 자넷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넷, 어리 녀석 요즘 뭐하고 있어?"
"아, 어리는 트렉이 가지고 있던 테멜 때문에 정신이 없어. 사실 그 때문에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너는 트렉에 미쳐있지, 어리는 테멜에 미쳐있지. 나만 할 일이 없었다고. 그래서 계속 에테르 수련만 했잖아."
"그랬냐? 미안하다. 사실 트렉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뭐 반성한다면 용서해 주지."
"그런데 어리 녀석은 테멜 가지고 뭘 한다는 거지?"
세진은 자넷과 함께 어리가 있는 중앙 홀로 향했다.
- 어서오세요. 세진님.
"넌 요즘 그거 가지고 노느라고 정신없다면서?"
세진이 어리 앞에 놓여 있는 테멜을 가리키며 말했다. 잡아온 트렉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게슈너를 잡아서 감금하기 위한 용도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이전에 세진이 갇혔던 것과 거의 비슷한 소형 테멜이고, 안에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테멜이란다. 몬스터가 나타나는 이유는 이 테멜의 코어가 몬스터 부족 코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 주황색 등급의 몬스터가 나오는 테멜이라면서요?
"트렉이 그랬으니 맞겠지."
-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응? 무슨 말이야?"
세진은 어리의 말에 조금 놀랐다. 트렉이 거짓말을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트렉은 온전히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그런 사람이 뭔가 거짓말을 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으음. 이게 제 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제가 이것 어떻게든 통제를 해 보려고 노력을 했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린 네가 이 테멜을 다룬다고? 지금 이곳 테멜을 네가 다루는 것처럼?"
- 에헴, 그렇게까진 아닌데요. 어느 정도 간섭을 할 수는 있다는 거죠. 다른 것은 몰라도 테멜의 구조를 변경하는 정도는 제 힘으로 가능한 것 같아요. 몬스터들은 어찌 할 수 없어도 말이죠.
"그런데 주황색 등급이 아니란 건 무슨 소리야?"
- 제가 차근차근 살펴보니까요. 이 안에 들어 있는 몬스터들의 힘이 무척 제한된 것 같아요.
"힘이 제한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약해졌다는 소리야?"
자넷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참견을 한다.
- 그러니까 저에게 에테르를 빼앗겨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좀 약해요. 지구에 있는 몬스터들 처럼요.
"응? 지구 몬스터?"
- 네. 그 정도로 약해요. 아마도 제가 이 테멜에서 에테르를 끌어 오는 것이 이유인 것 같아요. 제가 이 테멜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테멜의 에네르를 일정 부분 잠식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만큼 몬스터들이 약해지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이거 이대로 지구로 가지고 가도 될까 모르겠네?"
- 괜찮지 않을까요? 이 테멜은 제가 통제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몬스터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확신하냐?"
- 우웅.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당연히 안 되는 거지. 이 테멜을 가지고 갔다가 지구 몬스터들이 다양해지거나 혹은 강해지면 그걸 어떻게 하냐?"
- 하긴 그렇기는 해요. 그럼 어떻게 하죠? 이 테멜은?
"내가 들어가서 몽땅 정리하고 코어를 꺼내 올까? 그런데 그 코어는 부족코어가 되는 건가? 아니면 테멜 코어가 되는 건가?"
"아마도 양쪽 모두의 기능이 있지 않을까?"
자넷이 대답했다.
"그럴까? 그럼 이전에 어리가 흡수했던 것들 중에서도 부족 코어이면서 테멜 코어인 것이 있었겠군?"
"그랬을 걸? 왜?"
자넷은 갑자기 심각해지는 세진의 표정에 자신도 바짝 긴장을 했다.
"어리야 솔직히 이야기해야 한다? 알았지?"
- 어리는 세진님을 속이지 않아요. 어리는 세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슬퍼요.
"알았다. 그런 물어보자. 너 테멜 안에 몬스터를 만들어 낼 수 있냐? 아니 그런 능력이 생겼냐? 다른 코어를 흡수하면서?"
- 아니요. 어리는 그런 능력은 없어요.
"그럼 이곳 데블 플레인에 와서 테멜 코어를 흡수하면서 생긴 변화는 없냐? 뭔가 지구에서와는 달라진 것 말이다."
- 있긴 해요. 그거 있잖아요. 다른 코어를 흡수하면 조금씩 테멜 공간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요.
"그래. 그래서 어리 네가 테멜 공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잖아."
- 그런 어떤 정보가 늘었는데요 아직 그게 풀리지 않아서 알 수가 없어요. 그게 변화라면 변화죠. 지구에서도 정보가 쌓였고, 여기서도 그래요.
"둘 다 아직은 그 내용은 모르고?"
- 네에. 그렇죠.
"어머, 어쩌면 그 정보들이 테멜에서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닐까? 멋진데? 그럼 나중엔 어리가 이 테멜 안에 몬스터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야? 대단하다."
자넷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게 뭐 대다한 일이라고 그래? 생각 좀 하게 조용히 해 줄래?"
그런 자넷에게 세진이 면박을 준다.
"아니, 이게 얼마다 대단한 일인지 몰라? 어리가 몬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어쩌면 에테르를 이용해서 코어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응? 안 그래? 어리가 몬스터를 만들면 뭐로 만들겠어? 당연히 에테르로 만들겠지? 그리고 그 몬스터들 중에는 코어를 지닌 놈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그 코어도 결국 어리가 만드는 거잖아. 안 그래?"
"아, 그런 건가?"
세진은 자넷의 발상에 깜짝 놀랐다.
- 어리가 몬스터를 만들어요? 무리에요. 무리. 어리는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뭔가 코드가 풀리게 되면 어리도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에테르 코어에 대한 비밀이 조금이라도 풀리게 될지도 몰라. 우와 대단하다. 그 오랜 시간동안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코어의 형성, 몬스터의 생성, 그런 것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꺄아."
자넷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세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약에 정말로 어리가 테멜 안에 몬스터까지 만들 수 있게 되면 정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세진의 머릿속에는 보라색 등급 이상의 테멜 코어, 혹은 이면 공간 유지 코어를 흡수한 어리가 대륙에 버금가는 테멜 공간을 가지고 숱한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광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흠칫!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잘못하다간 행성 코어까지 삼키고 테멜 공간에 행성을 구축할 수도 있겠어. 아, 이런 그만하자. 망상도 이런 망상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세진은 살짝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깨웠다.
"아무튼 어리는 만약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내게 이야길 해야 한다. 테멜에 관해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알려야 하는 거야. 혼자서 이거 저거 해 보다가 나중에 이야기하고 하면 혼나! 알았지?"
- 어리는 알아들었어요. 세진님에게 이야기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리는 착한 어리에요.
"말은 잘 하는데 너도 간혹 잊어 먹고 그러잖아."
- 아니에요. 어리는 잊지 않아요. 다만 저장된 기억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가 있을 뿐이에요.
"아니, 넌 정보는 잘 기억하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쪽에선 문제가 있어. 사람처럼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면이 생긴 거야. 너 깜빡 깜빡 하기도 해."
- 어리는, 어리는 머리 나쁘지 않아요. 똑똑한 어리라고요!
"그만 놀려. 세진. 어리한테 왜 그래? 어리야. 넌 똑똑해. 그러니까 세진이 말에 상처받고 그러지 마라. 농담하는 거야. 농담."
- 그런 거죠? 맞죠? 세진님, 네에?
"어휴, 그래 맞다. 맞아. 농담이다. 농담."
세진은 어리의 어리광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일단 테멜 코어로 인한 어리의 변화가 가시적인 것이 아니니 잠시 미뤄두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어쩔 거야? 그 녀석들?"
"누구?"
세진은 자넷의 물음에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긴, 네 복수 대상이지."
"타지난 지파?"
"응. 그 녀석들."
타지난 지파는 라훌 독립군의 세 지파 중에 하나였다. 라훌 독립군을 지배하는 세 명 중에 하나인 타지난이 저번 세진의 납치를 주도했던 것이고, 그 타지난을 돕는 조력자들 중에서 라하와 하파트라는 이름의 마스터 두 명이 세진이 갇혀 있던 테멜에 함께 있으면서 세진을 관찰하고 결국 세진에게서 에테 르 수련법을 일부 얻어내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수련법으로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요즈음 라훌 독립군들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라훌이 헌터가 될 수 있다는데 누군들 마다할까?
당연히 미끼를 던지면 거의 100에 100이 걸려 올라오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타지난은 그것이 어떤 경로로 그들의 손에 들어왔는지 밝히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수련법을 라훌 독립군의 15인 위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보 개방을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타지난은 세진에게서 얻은 에테르 로드 수련법을 근거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면서 지금의 에테르 수련법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 중에 탈예거에게서 얻은 비기를 에테르 수련법과 연계해서 새로운 성과도 얻어내고 있는데 그것을 트렉도 익히고 있었다.
사실 세진도 그 방법을 듣고 실행을 해 보고 꽤나 놀랐다. 후유증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평소보다 월등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매력적인 일이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니 왜 그렇지 않을까.
사실 그 기술로 트렉도 저보다 상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던 피시지를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물론 후유증이란 것이 몸에 꽤나 무리를 주는 것이긴 하지만 세진처럼 회복 캡슐을 복용한 상태면 문제도 별로 없었다. 피로도가 높아지고 몸에 부담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이 문제고, 오래 지속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을 빼면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을 치거나 혹은 승리할 수만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후유증인 것이다.
그래서 세진도 그 기술을 세심하게 익혀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