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을 파악하고 작은 복수를 하다. -- >
"크하하하. 이거 분명히 우리가 공격 받는 상황 맞지? 응? 그런 거지?"
새로 나타난 인물이 대검을 등에서 떼어 내며 피시지에게 물었다.
"보시면 모릅니까? 복면을 한 놈들이 우릴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오오오, 좋아. 좋아. 난 또 검이 하나 쑤시고 들어오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이런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지? 하하핫."
"크음."
"어엇, 뭔 일이래? 전쟁이야?"
"와, 전쟁이다. 전쟁. 그것도 습격이야 복면을 한 놈들이."
"그러네? 그래서 우리 치프가 저렇게 신이 난 거야?"
그런데 목청을 높여서 웃고 있는 사내 옆과 뒤로 새로운 인물들 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시지는 그들까지 테멜에서 나오자 완전히 긴장을 풀어 버렸다.
펄커스의 그의 친위대가 나타난 이상, 이곳에 있는 복면인들은 무사히 도망가기 어려울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펄커스는 대인전을 무척 즐기는 헌터인 것이다. 평소엔 대련을 주로 하지만 이렇게 실제 상황이 되면 더없이 기뻐 날뛰는 인물이 퍼커스였다. 간혹 생체 에테르바디의 목숨을 걸고 헌터들과 내기 결투를 하기도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비밀로 숨겨오고 있는 펄커스의 괴벽이었다.
'마스터 중급. 그런 치프와 익스퍼트 최상급에서 마스터 초입의 친위대가 나섰으니 상황은 끝이지.'
피시지가 그렇게 여유를 찾는 중에, 이제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친위대들이 사방으로 뛰쳐나가며 칼질을 시작했다.
"크악!"
"아악, 내 다리!"
"컥! 무, 무슨..."
순식간에 십여 명의 땅바닥을 굴렀다. 애초에 생체 에테르의 차이가 극명하니 방어를 무시하고 사지를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잘린 팔다리는 쉽게 복구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회복 캡슐을 먹었다고 해도, 그런 상처가 짧은 시간에 나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 너는 나 좀 보다."
펄커스가 복면인들의 리더를 향해 곧바로 달려갔다.
콰과광! 카강!
펄커스는 곧바로 리더를 압박했다. 마스터 중급의 펄커스를 복면인들의 리더는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몇 합 만에 튕겨져서 땅바닥을 굴렀다.
"젠장! 펄커스!"
"오호? 나를 알아? 그 복면 뒤의 얼굴이 궁금해지네?"
"철수! 철수! 모두 알아서 살아남아!"
펄커스가 여유를 부리는 순간 복면 리더가 소리를 지르면서 맹렬한 속도로 전장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펄커스는 리더를 향해 달려들던 걸음을 멈췄다.
도망가는 놈을 굳이 따라가서 잡을 정도로 부지런한 펄커스가 아니었다. 대인 결투를 좋아하지만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놈에게 흥미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안 잡나?"
순간 주크가 펄커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응? 잡고 싶으면 니가 가서 잡아. 그리고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너 나 알아? 응? 나 펄커스야. 내가 레트시에 왔을 때, 넌 엄마 뱃속에도 없었을 거야. 이 자식아!"
그리고 돌아온 것은 펄커스의 호된 대꾸였다. 주크는 순간 주눅이 들어서 움찔 하고 말았다.
"모두 모아. 모아서 심문을 해! 어떤 놈들이 우리 트레이브를 건드린 건지 확인하고, 이참에 그 놈들을 모두 박멸해버린다."
"와아! 알겠습니다. 치프."
"맡겨 주십시오. 치프."
펄커스의 말에 그의 트레이브 멤버들이 모두 환호성을 올렸다. 한동안 심심하지 않을 일거리가 생긴 것이다. 지겨운 몬스터 사냥이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하는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는 것이다.
"죽은 놈은?"
"우리가 죽인 놈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된 거지."
펄커스는 피가 튀는 싸움을 즐기지만 함부로 누굴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만약 누 군가를 죽인다면 그것은 공정한 내기를 통해서 생체 에테르바디의 생명을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라훌족의 생명을 끊는 것은 펄커스도 심사숙고 한 후에 결정을 하는 편이었다.
"빌어먹을 펄커스라니. 왜 그런 놈이 나타난 거지? 펄커스 트라이브 놈들이 테멜을 본거지로 쓴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던 모양이군. 운이 없었어."
복면인들을 이끌고 왔던 리더는 펄커스의 등장에 호되게 당한 후에 급하게 도망을 쳤다.
펄커스가 추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만약에 마음이 변해서 친위대를 풀기만 해도 자신은 위험한 상황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 좋은데 이건 너무 조루란 말이지."
그는 자신의 능력을 한 단계 이상 증폭시켜 주는 비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탈예거의 비기를 조직의 마스터들이 다시 연구하고 조합해서 만들어 낸 비 기였는데 아직 연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상태에서 증폭을 시키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적들이 자신을 익스퍼트 최상급을 판단했으니 확실히 성공적인 실험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크윽. 속이 많이 상했군. 요양을 좀 오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역시 마스터는 마스터란 말이지?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엉망이 되어 버렸... 커억! 누, 누구? 크아악!"
"알아서 뭘 하게? 반가워. 트렉. 너 트렉 맞지?"
"모, 못질? 알프론? 크아악."
"못질을 알프론만 한다는 오해는 하지 마. 나는 알프론이 아니야. 참, 내가 쓰는 못은 좀 특별해. 이건 에테르 코어를 갈아 넣은 거라서 몸 안에서 에테르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지. 어때? 좋지? 응?"
트렉의 등 뒤에서 단검을 찌른 것은 세진이었다.
그는 복면인들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저 어리가 전해주는 대로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복면인들이 주크와 피시지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에 테멜 밖으로 나와서 직접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복면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체형이 너무 눈에 익은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그리고 결국 그 복면인이 트렉이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테멜에 갇혀 있을 때, 고문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트렉이 복면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 나타난 것이었다.
세진은 트렉이 펄커스에게 당하고 도망을 칠 때에 테멜로 들어가서 어리에게 트렉을 따라가게 했다. 날개가 달린 날도마뱀은 어렵지 않게 트렉를 추격했고, 마침 트렉이 휴식을 취할 때에 나무에 내려앉은 날도마뱀에서 세진이 나와서 트렉의 등에 단검을 꽂은 것이다. 한번 단검이 꽂힌 상황에서는 에테르 운용이 어려운데 그 뒤를 이어서 몇 개의 단검을 더 박아 넣었으니 트렉으로선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 트렉. 나는 너를 꼭 만나고 싶었어. 그러니까 우리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응? 좋지?
"크으윽. 누, 누구냐? 게슈너?"
"아, 맞아. 게슈너. 그게 내 이름이야."
"왜? 왜? 내게 이러는 거지? 아니 날 어떻게 알지?"
"생각해 봐. 내가 누굴까? 응? 그 동안 너와 네 동료들이 한 짓을 잘 생각해서 나를 기억해 봐. 기억에 없다면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도 기억을 해 봐. 그래야 할 거야. 아니면 너는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참, 너도 회복 캡슐은 먹었지?"
세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트렉의 멱살을 잡고 어리의 테멜 안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트렉에게 지옥의 문이 열렸다.
트렉은 자신이 게슈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과 드렉이 게슈너 혹은 게슈너와 연관이 있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을 하긴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게슈너가 트렉 자신에게 그렇게 강렬한 증오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트렉은 처음 드렉과 함께 살인을 했던 기억부터 차근차근 기억을 되살렸다.
테멜 안에 만들어진 고문실은 특별한 장소였다.
때가 되면 돌로 만들어진 벽이 좌우로 열리면서 게슈너가 들어왔다. 그리고 차근차근 트렉의 몸과 정신을 갉아 먹었다.
게슈너는 서둘지 않았다. 게슈너는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게슈너는 그저 트렉의 몸을 훼손하고 또 눈빛으로 증오를 퍼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을 마치면 사흘이 되기 전에 한 번씩 회복 캡슐을 먹였다. 영구 회복 캡슐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트렉은 사흘에 한 번씩 회복 캡슐을 먹어야만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트렉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조차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언젠가 트렉은 자신과 같은 상황의 헌터를 테멜 안에서 고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특별한 경우긴 했지만 유저 헌터였고, 게슈너는 라훌족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트렉이었다.
트렉은 게슈너가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태어나서 게슈너에게 잡혀 들어올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게슈너가 돌아가고 홀로 고문실에 남아 있는 동안에도 트렉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이 빼 먹은 내용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며 게슈너가 원하는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트렉."
"게슈너!"
트렉은 게슈너가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것이 더없이 기뻤다. 드디어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 변화의 끝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트렉은 기뻣다. 영원할 것 같은 고통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트렉, 나는 실망했다. 너는 꽤나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넌 아직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잖아. 이건 정말 슬픈 일이야."
"아니야. 게슈너. 나는 모든 기억을 되살렸어. 하지만 어디에도 너와 관련된 기억은 없었어. 미안해. 정말이야. 난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하지만 한계야. 정말 노력했지만 게슈너 너에 대해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이해해줘."
트렉은 게슈너에게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게슈너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었고, 자신이 했던 수 많은 일들 중에서 게슈너가 증오를 품을 일로 연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아니 너무 많은 일들이 게슈너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지만 어떤 것도 확신이 없었다. 만약 그 일들과 게슈너를 연결시키면 게슈너가 도리어 더 화를 낼 것 같았다. 확실치 도 않은 일들로 게슈너의 아픔을 되살리는 것은 트렉 자신의 지옥을 연장하는 짓 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남은 것은 게슈너에게 사정하는 그것뿐이었다.
"하아, 안타까운 트렉. 너는 인생을 잘못 산 거야. 내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해 주지. 잘 들어."
트렉은 고개를 들고 게슈너와 눈을 맞췄다. 어쩌면 게슈너는 자비를 베풀어서 자신에게 평온을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행성에서는 말이야. 사물에 영혼이 깃든다고 믿어. 영혼은 영혼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깃들 그릇이 있으면 거기에 깃든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모, 몰라."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라훌족이 비록 생체 에테르바디라는 영혼 없는 껍질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하나의 생명이 되는 순간에 어디선가 영혼이 내려와서 우리에게 깃들었다고 나는 믿는단 말이지. 그 행성에서는 하물며 돌이나 나무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영혼이 깃들기도 한다고 믿어. 그런데 우리 라훌처럼 이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난 생명에게 영혼이 깃들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네게도 영혼이 있어. 이제 죽으면 너는 네 동생 드렉의 영혼을 만나게 될 거야."
"저, 정말일까? 우리 라훌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당연하지. 그걸 의심하지마. 이건 내가 너에게 죽음과 함께 주는 보상이야. 내가 네 동생을 죽였으니 이제 네게 동생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거야."
"내 동생? 드렉을? 게슈너 네가?"
"미안 이 몸은 게슈너지만 이전에는 세진이었어. 네가 나를 죽였지.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이는 데에 죄책감은 없어."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세진은 죽었어. 죽었다고."
"그래도 여기 있는 나도 세진이야.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젠 너는 네 동생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어디선가 새롭게 태어나겠지. 네 영혼을 따라서."
트렉은 세진의 말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세진은 그런 트렉을 지켜보다가 심장을 멈추게 했다. 트렉의 회복 캡슐 사용 시간은 조금 전에 종료 되었고, 멈춘 트렉의 심장은 다시 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