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탈예거와 프루토 게슈너 공방전을 벌이다. -- >
세진은 납치한 사람들을 테멜 안에 감금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심문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티던 이들도 자신들이 테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항을 포기했다.
죽고 사는 것은 온전히 세진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탈예거가 나와 자넷을 납치하라고 시켰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디로 끌고 가려 했나?"
"레트시 북부에 탈예거님의 안가가 있습니다. 거기로."
"다른 건?"
"절대 죽여서는 안 되다는 것과 팔은 온전히 붙여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다리는 잘라도 된다는 소리군."
"저희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자넷은?"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된다고 했습니다. 인질로 가치가 없으면 어차피 죽을 거라고."
"같은 라훌인데 어째서 이런 일까지 벌이지?"
"탈예거님, 아니 탈예거는 욕심이 많습니다. 레트시에선 제일 실력이 뛰어난 라훌 헌터기 때문에 많은 라훌족들의 그에게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가 라훌족에게 자선도 베풀고 해서 인기가 좋은 걸로 아는데?"
"그렇지만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이들에겐 단호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익사업에 관여하여 상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슈너님은 탈예거님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 상인들을 동원해서 끌어 들이려다 실패하고 난 후에 강압적인 수단을 쓰려고 한 것입니다."
"공존은 어려운 자로군. 더 할 말 없나?"
"사, 살려주십시오."
심문을 받던 사내는 게슈너에게서 죽음을 읽었는지 떨리는 음성으로 호소했다.
"미안하다. 고통은 주지 않겠다."
"제, 제발. 크르륵!"
하지만 세진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정하는 이의 목에 단검을 꽂았다. 그는 짧은 신음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으음. 후안 패거리 이후로 이곳 데블 플레인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인가?"
세진이 테멜로 잡아들인 세 명의 포로 중에서 이번에 죽은 자가 마지막이었다. 셋 모두 세진의 단검에 목이 뚫려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한 가지 일을 마무리 지었다는 생각이 들자, 세진은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은 그들이 떠올라 잠시 침울해졌다.
= 마음이 편치 않으세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어리의 인형이 곁에 와서 말을 건다.
"아, 뭐. 그렇지.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마음이 편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놓아줄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탈예거를 처리한 후에 놓아줄까도 생각을 했지만, 테멜에 대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도 살려둘 수가 없었어."
= 맞아요. 하고 싶다고 다 하며 살 수는 없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은 법이에요.
"응? 어리 네가 어쩐 일로 그런 말을 다 하냐? 굉장히 어른스러운데? 곁에 자넷이 있냐?"
= 헹! 역시나 안 통할 줄 알았다고요. 맞아요. 자넷이 한 말이에요. 하지만 저도 그런 말 할 수 있어욧. 어리가 토라진 듯이 목소리를 뾰쪽하게 냈다.
"그래. 알았다. 어리도 충분히 그런 소리 할 수 있지. 우리 어리도 점점 크고 있으니까 말이다."
= 맞아요. 어리도 성장하고 있어요. 네에.
억지스런 세진의 인정이지만 그래도 어리는 세진의 말이 마음에 든 듯이 목소를 부드럽게 한다.
"어서 와. 그리고 마음 쓰지 마. 그들은 그들이 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어리의 인형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세진은 중앙 홀에 도착했고, 중앙 홀에서 어리와 함께 있던 자넷이 세진을 위로하며 반겼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큰 상처가 되지도 않았어. 내 손에 죽은 이들이 한 둘도 아닌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다행이네. 자, 그럼 이제 어쩔 거지? 탈예거란 사람이 레트시에서 제법 영향력이 큰 것 같은데 말이야. 이미 이야기 했지만 우리 상점에 납품하던 이들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어. 아마 그것도 탈예거의 짓이었을 거야."
자넷이 그 동안 게슈너 상점에 물건을 납품하던 장인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을 언급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지만 세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쉽게 대답을 못했다.
"그게 좀 문제가 있어. 탈예거의 세력이 작은 것이 아니라면 나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거든? 당장 탈예거나 나를 잡자고 나서면 이길 수 없는 상대니까 말이야. 세력도 무력도 아직은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니까 말이지."
"흐응. 레트시에 탈예거의 반대 세력은 없는 걸까?"
"물어봤는데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있다면 유저 헌터 정도지."
"유저 헌터들은 라훌들의 문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잖아."
자넷은 그 쪽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우리 상점의 문제라면 좀 다르지 않을까? 유저 헌터들도 내 장비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잖아. 물건을 사는 사람도 많고 말이야. 아예 이참에 라훌족에겐 물건을 안 판다고 한 번 질러 볼까?"
"응? 무슨 소리야?"
세진의 말에 자넷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에 습격을 당했는데 습격한 사람들이 라훌들이었다. 그리고 배후에 큰 세력가가 있는 것 같다. 이러니 우리 게슈너 상점에서는 앞으로 라훌들에겐 물건을 팔지 않겠다. 이렇게 나가는 거지."
"그럼?"
"일단 유저 헌터들이 좋아하겠지. 우리 상점의 물건을 쉽게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라훌들은 나를 먼저 손가락질 할 테고 말이야. 하지만 그 이유가 누군가 나를 납치하려 한 때문이고, 상점에 물건을 납품하던 이들도 납품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탈예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게 될 거고, 여론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겠지."
"에에,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꽤나 시간이 걸릴 텐데? 그 동안 우린 어떻게 해? 낮에는 몰라도 밤에는 계속 습격을 할 수도 있는데? 살아남을 자신 은 있는 거야? 탈예거가 직접 나설지도 모르는데?"
자넷이 예상되는 문제들을 열거하며 난색을 표했다.
"잘, 피해야지. 그리고 정 급하면 불도 한 번 지르고 말이야."
"불을?"
"그래. 우리 상점에 우리가 불을 지르는 거야. 그럼 사건이 커지겠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하잖아. 그러니까 불이 나면 아주 재미있늘 거야. 안 그래?"
"그건 좋은 생각이네. 까짓 집이나 상점이야 다시 얻고 지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 몇 푼 하지도 않는 상점과 집이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가시 효과는 엄청나게 클 거야. 그렇지?"
"좋아. 좋아. 해 보자. 우린 날도마뱀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도망을 갈 수 있겠지."
- 하지만 어리는 좁은 굴이나 하수구 같은 곳으로 기어 다니는 거 안 좋아해요. 기분 나쁘다고요.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어리가 날도마뱀 이야기가 나오자 냉큼 끼어든다. 사실 어리의 날도마뱀이 아니라면 세진과 자넷의 안전은 보장하기 어렵다. 다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움직이는 테멜 덕분에 둘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리의 날도마뱀은 건물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거나 혹은 하수구 구멍이나 땅굴 같은 곳을 기어 다녀야 했다. 어리는 그걸 질색하며 싫어한다. 그럼에도 세진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그래. 어리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도 알지. 하지만 어쩌겠니. 네가 아니면 나와 자넷이 안전하게 숨을 방법이 없는데 말이다."
- 에에, 그건 알지만요. 쳇, 알았어요. 하지만 깨끗하게 씻어 줘야 하요? 알았죠?
"그럼 당연하지 씻고 말리고 향수도 뿌려주마."
- 흠흠. 좋아요. 약속이에요. 약속.
"누구냐?"
"알아서 뭐하게? 그냥 죽어!"
차카캉, 카강!
"이런 뭣 같은! 커억!"
"피햇! 아악!"
카르릉! 콰광! 콰과광!
"뭐냐? 무슨 일이야? 젠장 저 놈들은 뭐야?"
탈예거의 명으로 게슈너 상점으로 향하던 일단의 무리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의 습격을 받고 곳곳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후퇴! 후퇴해!"
"빌어먹을 놈들, 도대체 뭐야?"
"놓치지 마라. 모두 쓸어 버려!"
어둠 속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시체들을 수거하고 싸움의 흔적을 지웠다.
이미 싸움이 벌어질 때부터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깨어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밖으로 고개조차 내밀지 않았다.
헌터들의 싸움에 일반인아 나서봤자 돌아오는 것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 밖에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 헌터거나 혹은 라훌 헌터거나 상관없이 그들의 다툼은 일반 라훌족에겐 강 건너 불처럼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일 아침이 밝아도 누구 하나 이 밤에 있었던 싸움에 대해서 제 스스로 나서서 입을 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로 함께 살지만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헌터와 일반인들의 삶이다.
"누굴까?"
게슈너가 상점 문틈으로 밖을 확인하다가 물었다.
"알 수 없지만 하난 확실한 것 같네. 우릴 치려는 놈들이 있고, 또 그걸 방해하려는 놈들이 있다는 거."
"그런데 문제는 우릴 돕는 것 같은 그 놈들도 우리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게 문제요."
= 여기선 벌레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몰래 뭘 알아보는 것도 어려워요. 쳇 툴틱을 좀 더 연구해 봐야겠어요.
"그러다가 부수지 말고."
= 세진님. 어리를 홀수 짝수로 보지 마시라고요. 이미 툴틱 복사를 끝냈거든요? 그런데 복사만 했지 그걸 어떻게 활용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서 문제죠.
"무슨 소린데?"
= 제가 컴퓨터를 복사한다고 그 안에 깔려 있는 프로그램까지 복사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툴틱은 있는데 그걸 움직일 프로그램이 없다는 거죠.
"하긴 그것도 그렇겠구나. 여기선 스마트폰은 쓸 수가 없지?"
= 만들어도 그냥 박살이 나죠. 그런 전자제품은 여기서 쓸 수가 없다고요. 에테르를 쓰거나 혹은 생체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기가 아니면 거의 사용 불가능이에요.
"자꾸 딴 소리 하지 말고, 게슈너 어떻게 생각해? 둘이 싸웠다면 한 쪽은 탈예거 패거리 일거고, 남은 한쪽은 뭘까?"
자넷이 세진와 어리의 대화를 끊고 본래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적어도 레트시에는 탈예거에 정면으로 달려들 세력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 그런 세력이 나타났으면 두 중에 하나지."
"둘 중에 하나?"
"이미 있었는데 숨어 있던 암중세력, 혹은 다른 도시에서 들어온 새로운 세력."
"어쨌거나 우리에겐 여유가 생긴 거네?"
"당분간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 새로운 놈들이 탈예거를 막으면서 우리에게 접근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럼 집은 안 태워도 되는 걸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쨌거나 탈예거를 궁지에 몰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야."
"에구, 그렇구나. 결국 가게는 화마를 피할 길이 없구나. 불쌍한 가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들어가서 자자. 오늘은 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으니까."
"그래도 테멜에서 잘 거지?"
"당연하지. 경계는 우리 잠 없는 어리가 맡아 줄 테니까 말이야. 그렇지 어리야?"
=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어리가 세진님을 위한 든든한 경호원이 될 거예요.
"그래. 고맙다."
세진은 그렇게 어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넷과 함께 테멜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