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03화 (103/298)

< -- 자넷, 자넷이 찾아왔다! -- >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넷?"

- 아마도 역할 연기를 시작한 모양이네요. 앞으로 해야 할 역할에 맞는 성격을 부여하는 그런 거죠. 컨셉은 정신없는 실수 투성이 메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어머, 어리. 그건 아니야. 실수 투성이는 아니고, 그냥 망상병이 약간 있는 메이드 정도로 봐 주라고. 간혹 혼잣말도 하고 그러는 캐릭터 인 것이지."

- 그렇군요.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우리 앞으로 그 캐릭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아요.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뭐냐? 이 분위기는."

세진은 자넷과 어리의 묘한 동질감 형성에서 소외되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자넷과 어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게슈너의 상점에 새로운 점원이 들어온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점원이 여자인데다가 안살림까지 맡을 정도면 게슈너에게 관심이 있는 이들은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자넷이란 여자는 라훌족으로 헌터가 아닌 일반 라훌족이었다.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누가 물어봐도

'과거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라는 말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계속해서 과거를 알려고 하면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이유가 없다면서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넷이 아니라 상대가 곤란해진다. 자넷이 게슈너 상점의 판매를 총괄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 금방이었기 때문이다.

게슈너는 무슨 이윤지 자넷이란 여자에게 무한 신뢰를 보이며, 그녀에게 거의 모든  에텔론 관리를 맡겼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넷의 능력을 인정하고 수긍했다.

자넷이 온 이후로 게슈너 상점의 판매량이 월등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실 게슈너 상점의 물건은 언제나 없어서 못 파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자넷이 온 이후로 판매량이 늘었다는 것은 게슈너가 만드는 물건의 양이 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렇게 게슈너의 생산량이 늘어난 것이 모두 자넷이라는 여자가 머리를 잘 썼기 때문이란 소문이 나면서 자넷을 인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자넷은 게슈너가 만드는 물건들을 다른 대장간과 방어구 장인에게 의뢰를 했다.

방어구나 무기를 게슈너 상점에서 주문해서 받아 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물건을 게슈너에게 주고 거기에 게슈너만의 특별한 비법을 적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니 게슈너가 일일이 물건들을 만들던 것에 비해서 열 배는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단기간에 열 배의 매출 신장, 그것이면 자넷이 게슈너 상점의 총 매니저가 되는 것이 이상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넷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게슈너의 작업실로 들어와서 다시 테멜로 옮겨진 이후에 어리가 손을 보는 것이다. 그 물건들을 분해 재조립하면서 그 안에 마법진을 짜 넣고, 에테르 코어를 넣을 장치를 붙이는 것으로 작업이 끝나지만 어리는 그 물건들 하나하나가 모두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다. 찍어낸 듯이 일률적인 물건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작품임을 표시나게 하기 위해서 작은 흠집 하나라도 같은 것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쨌건 덕분에 세진은 에텔론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게 되어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고 다녔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꼭 마가 끼기 마련이다.

게슈너의 상점에도 점차 레트시 유지들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판매는 내 가게에서 한다."

"어허,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사겠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제 값을 주고 모두 사겠다는 말이지. 자네야 어디에 팔건 물건만 팔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이지. 자넨 지금 파는 가격으로 우리에게 팔고, 우리는 그것에 조금 더 이문을 붙여서 팔고 말이지. 그렇게 되면 굳이 상점을 자네가 유지할 이유도 없고, 사람들을 부리는 수고를 할 이유도 없지. 안 그런가?"

"내 물건은 내 가게에서 판다. 사고 싶으면 가게에서 사라."

"이익! 그러니 하는 말이 아닌가. 우리가 다 사겠다고."

"주문은 자넷에게 해라."

"주문이 아니라고. 거래를 하잔 말이지. 거래! 지금 게슈너 자네 일부러 우리를 놀리는 건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닐 텐데?"

한동안 같은 말이 오고가자 게슈너의 물건을 독점 판매하겠다고 찾아왔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안 판다. 앞으로 당신과 거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게슈너는 사내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앞으로는 물건 거래를 하지 않겠단다.

"이런 놈을 봤나. 지금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우리들이 마음을 먹으면 너 하나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레트시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이다."

상인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인물이 본색을 드러낸다.

"협박인가."

게슈너가 그 사내를 보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그렇겠지."

순간 게슈너의 디버프 기반 에테르가 사내의 머리로 올라가 응축되기 시작한다.

"내 물건을 가지고 옳지 않은 이득을 보려고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게슈너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의 음성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서늘한 느낌이 풍겼다.

"자네에게 손해가 아닌 일인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어딨단 말인가. 그것이 도리어 우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내 물건이 가치 이상으로 팔리면 손님의 불만이 내게로 온다. 당신들의 이익을 위해 내게 손해가 생긴다. 그걸 모르면 당신들은 상인이 아니다. 나가라."

게슈너의 손가락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상인들은 그런 게슈너이 태도에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게슈너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간다.

"컥!"

그런데 한참 붉어진 얼굴로 돌아가던 중에 상인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던 사내가 비명과 함께 몸이 굳으며 쓰러진다.

"엇? 왜 이러나? 응? 이보게? 이봐 정신 차려?"

"뭣들 하는 거야? 회복 캡슐 없어? 먹여? 어서!"

"나, 내가 하나 가지고 있네. 여기 이걸 먹이게."

"어서 어서."

난리가 났다. 갑자기 쓰러진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상태인 것을 알아차린 상인들이 급하게 회복 캡슐을 사내에게 복용을 시켰다. 그렇게 응급 처치를 하고 나서야 쓰러졌던 사내는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렸다.

"어찌된 일입니까? 왜 갑자기 쓰러진 겁니까?"

"너무 화가 나서 아마도 혈압 때문에 머리에서 뇌혈관이라도 터진 모양입니다. 그냥 아찔하더니 몸이 굳고 정신이 멀어지더군요."

"아,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하여간 그 게슈너란 놈 때문에 큰 일을 치를 뻔 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요. 일단 그 놈에게 물건을 대는 대장간과 방어구 장인들에게 납품을 중지하 라고 해야지요."

"하지만 쉽게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에게 재료를 제공하는 일도 우리가 합니다. 그러니 압력을 가하면 알아서 할 겁니다. 또 말을 안 들으면 재료를 끊으면 될 일이고요. 물론 그들이 보는 손해는 어느 정도 채워줘야 할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하고, 탈예거님께 말씀을 드려서 우리쪽 사람들이 그 놈의 물건을 사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그 놈의 물건이 너무 좋아서..."

"그 놈이 물건을 만드는 비법만 빼 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어쩌면 탈예거님께서 움직이실 수도 있지요. 워낙 이익이 큰 일이니 직접 나서실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 우리야 그 분 손발이 되어서 떨어지는 이문을 챙길 수 있을 테니 그리 나쁠 것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차라리 그리 되었으면 이렇게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 보다는 나은 일이겠지요. 탈예거님이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일을 주시고 하시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레트시의 라훌족 유지라고 할 수 있는 상인들이 입을 모아서 탈예거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탈예거가 게슈너를 어찌해 줄 것을 바라는 내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게슈너는 그 꼴을 먼 곳에서 남모르게 지켜보며 게슈너 상점에 레트시의 권력자들이 본격적으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후, 레트시의 깊은 어둠을 깨면서 일군의 사람들이 게슈너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찾아!"

"없어."

"여기도 없어."

"빈 침대뿐이야. 여자도 없어."

"이거 뭐야? 분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했잖아. 감시를 어떻게 한 거야?"

"어디 비밀 공간이라도 있는지 샅샅이 뒤져. 어서! 서둘러!"

열 명 남짓의 침입자들이 게슈너의 상점과 살림집, 그리고 작업실로 나뉘어서 빠르게 수색을 시작했다.

"컥! 흡!"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게슈너에게 제압이 되어서 테멜로 끌려 들어갔다.

그 사람이 있던 등 뒤 벽에는 날도마뱀 한 마리가 벽에 붙어서 날렵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게슈너는 테멜로 끌고 들어온 침입자의 몸에 강력한 디버프를 걸고 관절에 몇 개의 단검을 박아 넣었다. 이전에 알프론에게 당했던 못 박기 방식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몇 명 더 잡아 올 테니까 말이야."

= 알았습니다. 어리의 인형이 못이 박히고 밧줄에 묶인 침입자를 지키는 중에 게슈너는 다시 테멜의 출구로 달려가서 때를 기다렸다.

어리는 부지런히 날도마뱀을 움직여서 홀로 떨어진 침입자의 뒤로 접근하고, 그러면 게슈너가 테멜 밖으로 나가서 그 침입자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하나씩 적의 수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음? 이봐, 다들 어딜 간 거야?"

"뭐야?"

"어? 무슨 일이야?"

"몇 명이 없어졌다. 우리 말고 딴 놈이 있어. 숨어서 우릴 노리고 있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 열 명이 이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어. 그런데 우리 눈을 피해서 숨어 있다고?"

"딱 보면 몰라? 다 모여! 모여봐!"

낮지만 정확한 명령이 침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음성에 에테르를 실어 보내는 실력자가 있는 것이다.

"셋이 빈다. 세 명이 당했어."

"정말이야. 소리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지?"

"엄청난 실력자가 있는 건가?"

"어떻게 우리도 모르게 셋이나 당할 수가 있지? 이 좁은 곳에서?"

"철수, 철수해야해."

"그럼 없어진 놈들을 포기하잔 말이야?"

"그럼 어쩌자고? 숨은 놈도 없어진 놈도 흔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 찾을 거야? 이건 마치 테멜로 빨려 들어간 것 같잖아."

"설마? 소지용 테멜을 게슈너 넘이 가지고 있는 건가? 그 안에 게슈너를 돕는 놈들이 있는 거야? 그래서 그 놈이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게슈너가 테멜을? 지금 상황을 보면 가능성이 있다. 안 되겠어. 일단 철수하자.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 작전을 짜야 해.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래. 돌아가자."

"그렇게 하자. 이만 철수! 철수!"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것 같았지만 일곱 중에서 의견을 내 놓는 이들은 넷이 전부고 나머지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결정을 따르는 쪽이었다. 곧이어 게슈너의 상점에 침입했던 이들은 모두 모습을 감췄다.

게슈너의 상점과 살림집, 작업장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과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이 흐른 후, 한 사람이 게슈너의 집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데 게슈너는 어떻게 된 거지? 그 자넷이란 여자는? 이것 참 알 수가 없군."

사내는 이리저리 잠시 수색을 하는 듯 하다가 다시 담을 넘어 모습을 감췄다.

그런 모습을 처마 밑에 붙어 있던 날도마뱀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도 게슈너의 상점에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슈너와 자넷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상점에 출근한 점원들이 당황하며 주인과 자넷을 찾았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