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훌족 장인 게슈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다. -- >
- 시작하실 도시를 정하지 않으셔서 이전에 계셨던 레트시로 시작 도시를 정했습니다.
세진이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우미의 전언이 귀를 울렸다.
세진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적응 연습을 했다.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세진은 이미 익스퍼트에 해당하는 에테르 로드 수련법을 익혔다. 하지만 지금 새로 받은 몸은 건강한 일반인 수준일 뿐이다. 당연히 하단전도 만들어져 있지 않고, 에테르 로드도 뚫려 있지 않았다.
세진은 일단 생체 에테르바디 보관소를 나가기 전에 하단전을 형성하는 일부터 하고 나가기로 했다. 지금 세진의 몸은 그대로 두면 결국 에테르 때문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 이전에도 몸에서 에테르 기관을 제거 했을 때에 우미가 그것을 걱정했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은 에테르 저장 공간인 하단전을 만들어서 에테르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력이라도 확보하는 것이다.
세진은 곁에 함께 놓여 있는 어리 앵무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테멜 안으로 들어갔다.
- 오셨어요? 세진님?
"그래. 그리고 잘 했다."
- 네? 뭐가요?
"우미 앞에서 어리 앵무를 움직이지 않은 거 말이야."
- 에에, 그거야 당연하죠. 저는 세진님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들키면 안 되는 것이에요.
"이번엔 또 뭐냐?"
- 컨셉인 것이에요. 세진님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 어마어마한 에텔론을 벌어들이는 멋진 세진님의 조력자인 것이에요. 어리는 뭐든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요. 생각을 해 보세요. 여기서 갑옷을 만들어서 판다고 생각을 하면 엄청날 것 같지 않으세요?
"확실히 그게 팔리긴 하겠네. 여긴 아무래도 물품 제작에 있어선 지구보다 떨어지는 면이 많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헌터들이 입는 갑옷도 특별 제작이 아니면 크게 좋은 것도 없지. 뛰어난 헌트들이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다는 갑옷이 아니고야 거기서 거기니까 말이야."
- 그러니까요. 세진님은 이 세상에 나타난 엄청난 실력의 장인이 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곳에 널린 에테르 코어를 모두 끌어 모으는 것이에요. 이 어리가 잔뜩 만들어 드리겠어요. 에헴.
"그래. 그건 좀 생각을 해 보자. 헌터룸에서 감시를 하고 있을 테니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문명의 전수는 금하고 있잖니."
- 그래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뭐가 되었건 말리지 않을 걸요? 이 행성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진 것인데 뭐라고 하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걸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테멜 안에서 만들어가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 테멜 안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지 않겠냐? 하여간 한동안은 여기서 수련을 하고 에테르 로드를 뚫고 하단전을 만들어야겠다. 그 후에 라훌족으로 살아가면서 상황을 봐야지."
- 그러면서 복수도 하시고요?
"당연하지. 이왕 이 몸으로 내려왔으니 복수도 해야지.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뭐하러 툴틱을 숨겨달라고 했겠냐?"
- 재미있겠네요. 라훌족 흉내를 내면서 라훌족 독립군을 찾아서 무너뜨린다니, 멋진 스파이물이 되겠어요. 호호호.
"그 동안 어리 너는 어리 앵무를 움직여서 생체 에테르바디 보관소를 벗어나도록 해라. 내가 보관소에서 나가는 것을 보여줘선 곤란하니까 말이다."
- 맡겨주세요. 어리는 잘 할 수 있어요.
"그래 수고해라."
- 네. 세진님.
세진은 새로운 생체 에테르바디에 에테르 로드를 뚫는 작업을 시작했다.
각인도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신체에 에테르 로드를 뚫는 작업은 이전에 한동안 사용하다가 에테르 기관을 제거했던 몸으로 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세진 자신의 몸으로도 해 봤던 일이다.
세진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에테르 로드 수련을 이어갔다. 몸이 바뀌었다고 해도 정신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세진은 이미 익스퍼트 정신 능력자다. 에테르가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이지 에테르만 받쳐주면 곧바로 정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으음."
- 깨어나셨어요? 대단해요. 열 시간이 넘도록 앉아 계셨어요.
"그래?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소순환은 완성했으니까 말이다."
- 에테르 유저가 되셨다는 건가요?
"라훌족 수준으로 보면 이제 유저 초급에 들어선 거지."
-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일단 레트시에 자리를 잡아야겠지. 나는 다른 마을에 살다가 이번에 헌터가 되기 위해서 레트시로 온 라훌족이 되는 거지. 어떠냐? 괜찮은 설정이냐?"
- 좋아요. 마침 저도 레트시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에헷.
"들키진 않았고?"
- 괜찮았어요. 데블 플레인은 어둡잖아요. 밤에 움직였더니 저를 본 사람은 없었어요. 높이 날아 올라서 이동을 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움직여 봐야 하나?"
-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
- 세진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은 테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세진님이 들어간 곳과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오면 그 사이에 테멜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요?
"아, 그런가?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경우는 많을 텐데, 그걸 감출 수는 없잖아. 그러자면 이 몸에 있는 툴틱을 완전히 들어 내는 수밖에 없는데?"
- 그럼 그렇게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응? 뭘?"
- 아예 툴틱을 꺼내서 여기 테멜 안에 두는 거죠. 그리고 꼭 필요할 때에만 가지고 나가서 사용을 하시는 거예요. 어때요?
"아픈 텐데? 이거 피부 밑에 묻는 매립형이란 말이다."
-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불법일 텐데?"
- 세진님에게 툴틱이 없으면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불안한데? 다른 헌터들을 감시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도 있고 말이다."
- 그러니까 앞으로는 모습을 숨기고 다니셔야지요. 라훌족을 만날 때에만 간혹 얼굴을 보이시고 헌터들이 가까이 있을 때에는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해요. 혹은 변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여기서야 뭐 제가 만든 면구를 알아볼 사람이 있기나 하겠어요?
"여기가 더 위험하지 않겠냐? 실력있는 헌터들과 라훌헌터들이 널려 있는 곳이 여긴데?"
- 어쨌거나 그게 좋겠어요. 어서 툴틱을 빼 내세요. 올 때, 회복 캡슐 가지고 온 거 있죠? 그거 하나 쓰면 흉터도 안 남아요.
"그, 그래. 그렇게 해 보자. 속이려면 완벽하게 속이는 것이 좋겠지."
- 그런데 툴틱이 사용자와 떨어지면 기록에 남고 그러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 녀석 여기 들어오면 먹통이 되니까 괜찮을 거야."
- 일단 해 보죠. 나중에 문제가 되면 완벽하게 라훌족으로 변신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우기는 거죠 뭐.
"하하. 그래. 툴틱 떼어 놓지 말라는 소리를 직접 들은 적은 없으니 몰랐다고 하지. 한 번은 그래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세진은 곧이어 팔의 피부를 가르고 툴틱을 꺼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큰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진은 얼마 후에 스스로 자신의 팔을 가르지 못하고 어리의 인형에게 칼을 맡기고 눈을 감아버렸다. 어리는 그렇게 인형을 통해서 세진의 집도의가 되었다. 세진은 게슈너란 이름으로 레트시에 정착을 했다.
그는 라훌 헌터로 붉은색 등급의 몬스터를 잡아 에텔론을 얻고 그것을 모아서 레트시에 상점을 냈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것은 게슈너가 만든 갑옷과 무기들이었다.
판매는 라훌족을 점원으로 고용해서 맡겼고, 게슈너는 주로 제작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재료 수집을 위해서 사냥을 나갔다.
그는 다른 라훌족 장인들과 달리 몬스터 사체를 가지고 방어구나 무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훌족 게슈너의 상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가 만든 방어구는 방어력이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에테르 코어를 이용하면 코어의 에테르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방어력이 상승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것은 무기도 마찬가지여서 무기에 에테르 코어를 장착하면 무기자체에 그 에테르 코어의 힘이 깃든다. 거기에 헌터들의 힘이 더해지면 무기의 위력도 상승한다.
사실 이런 무기들은 헌터들 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헌터들이나 제작이 가능한 것으로 좀처럼 그런 방어구나 무기는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없다.
"이거 좀 더 좋은 걸로는 못 만드나?"
"그러게 말이야. 딱 유저 수준에나 어울리지 익스퍼트만 되어서 별 소용이 없으니 원."
"그건 저 게슈너가 좀 더 연구를 해 봐야 한다더군. 어떻게 이걸 만들기는 했는데 아직은 붉은색 등급 에테르 코어나 겨우 버티지 그 이상이면 무기고 방어구고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 하는 말이지. 그게 주황색 등급 코어만 쓸 수 있어도 익스퍼트 헌터들에게도 도움이 되긴 할 게 아닌가 말이지."
"그야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쉽게 만들어지나? 게슈너도 고민중이라더만."
"근데 이 친구는 어디 간 거야? 점원들만 있고?"
"어디긴 작업장에 있겠지. 사냥 갔다는 소리는 없었으니 말이야."
"아니, 게슈너가 작업장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여긴 왜 온 거야? 오늘이 사흘에 한 번씩 물건 들어오는 날이잖아. 게슈너가 사냥을 나가지 않으면 사흘에 한 번씩 새로 물건을 상점에 채우잖아.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거고."
"그렇지. 그리고 오늘 물건 채우면 게슈너가 사냥가는 거지? 한 달에 열흘은 사냥을 다니니 이제 그 때잖아."
"사냥은 왜 다녀? 그냥 우리한테 몬스터 사체를 가지고 오라면 될 것을."
"에이, 그게 어디 그런가? 게슈너도 헌턴데 성장에 대한 열망이야 당연히 있는 것이지. 그래서 그 친구가 몸이 두 개라도 되었으면 하고 간혹 그런다더만."
"하하하. 그건 그렇지."
"그래도 그 재주로 물건들을 만드는데 시간을 더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사냥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게 걱정이긴 하지만, 게슈너가 그러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데. 거기다가 사냥도 꼭 혼자 다니잖나. 누구랑 같이 다니지도 않아."
"붉은색 등급만 잡고 있으니까 그래도 되는 거지. 게슈너도 새로 더 나은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 때 까지는 주황색 잡을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
"그건 다행이지. 아무렴."
게슈너의 상점은 오늘도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물건을 사는 이들은 대부분 초보 헌터들이다. 그들은 에테르 코어로 거래를 하는데 초보 헌터들의 방어구는 100에텔론, 무기는 200에텔론이다. 굉장히 비싼 가격이지만 일단 방어구와 무기를 모두 갖추기만 하면 혼자서도 붉은색 등급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게 되니 누구라도 에테르 코어를 모아서 장비를 갖추려 애를 쓴다. 하지만 초보들만 쓰는 물건을 파는 상점에 적잖은 중급 헌터들이 일수를 찍듯이 매일 같이 들러서 새로 나온 물건들을 확인하곤 한다.
혹시라도 등급이 높은 에테르 코어를 장착할 수 있는 장비들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게슈너 상점의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사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좀 더 나은 장비에 대한 열망으로 게슈너 상점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 게슈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상점 앞을 메우고 있던 이들 중에 누군가가 게슈너가 나타났음을 알렸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 게슈너가 어깨에 날개달린 파충류 한 마리를 올린 상태로 상점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뒤로 수레 한 대를 말이 끌고 오고 있다.
수레에 실린 것이 상점에서 판매할 물건임을 모두 알고 있다. 저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물건이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