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귀국, 석성가의 각성자 그리고 두 여자의 간지럼 증세 -- >
귀국 역시 전격적이었다.
페루 정부의 도움을 얻어서 외부에 알리지 않고 곧바로 비행기를 탔고, 중간 경유지에서도 세진 일행은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오니 세진 일행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에 리마에서 일어난 에테르 EMP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으로 인터넷에 오르내렸다.
세진 일행이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을 때, 어리가 CIA남미 지부 건물에 외벽에 붙어 있던 잠자리에게 명령을 내려 작동을 시킨 것인데, 아무리 작은 폭발이라도 잠자리 한 마리 정도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분해를 해 버릴 정도의 파괴력은 있어서 잠자리가 들킬 염려는 없었다.
- 아마도 우리가 했다는 것을 그들도 알 거예요. 다만 그것이 미국이 벗들을 협박한 때문이라고 생각을 할 지 아니면 벗들에서 석유 카르텔을 감지하고 경고를 한 것으 로 생각할지는 알 수 없어요.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 그럼 세진님이 공식적으로 나서시는 것이 좋죠. 간단하게 석유 카르텔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벗들이 불쾌하게 여기더란 말씀을 전하시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렇게 할까?"
- 서로가 불편한 감정을 가질 일이 없었는데 석유 카르텔에서 벗들에 대한 도발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기며 이에 대한 해명을 바란다는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세진은 그렇게 해서 간단한 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어리가 말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었는데,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지 말라.'
는 경고가 들어 있는 것이 조금 다르다면 다른 내용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성명을 발표하고는 2등급 몬스터 영역에 대한 의뢰도 카르텔의 도발 때문에 잠정적으로 중단한다는 선언도 있었다.
그래서 세진 일행은 어리 공방에서 이런 저런 소소한 취미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들기 전까지 말이다.
"석성가의 사람이라고요?"
석성 그룹은 한국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선두에 있는 거대 기업 그룹이었다.
"그렇습니다. 이산하, 이강토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를 찾아 온 이유가 뭐지요?"
세진은 갑자기 찾아와서 면담을 요청한 젊은 패거리를 거실까지 들인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들 여덟 명이 전부 각성자들이었던 까닭이다.
각성자 여덟이 무리를 지어 찾아왔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김혜인 박사와 정진이 경호원은 4층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만약을 위한 대비인 셈이다. 그 대신에 세진의 뒤쪽에 떡배와 김형일, 선도일이 제각각 편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떡배는 부엌 식탁 끝에 의자를 돌려놓고 이쪽을 보고 앉아 있고, 선도일은 열심히 찻잔을 나르고 있다.
김형일은 세진의 뒤에 바로 붙어 서서 뭔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이다.
"모르시겠지만 저희는 모두가 각성자들입니다."
이산하가 조금 희미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모르시겠지만이 아니라 아시겠지만이라고 해야지요. 세 명은 육체 능력을 얻었고, 네 명은 포스 공격 능력을 얻었군요. 그리고 거기 여성분은 특이한 각성자인 모양이네요. 저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로군요.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세진은 이산하, 이강토를 무시하고 제일 끝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물었다. 세진의 반응에 이산하와 이강토라고 했던 둘은 물론이고 나머지 여섯 명도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진이 그들의 능력 타입을 한 번에 알아맞히고 또 그 구성 숫자까지 정확하게 맞힌 것에 놀란 것이다.
"네? 네. 전 한미리라고 해요. 저는 에스퍼 능력을 지니고 있어요. 일종의 정신 초능력이죠."
세진이 모르겠다고 말한 여성이 놀라선지 순진해선지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의 능력을 밝힌다.
"아,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각성자를 보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네? 네. 반갑습니다."
한미리는 세진의 인사에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산하와 이강토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 둘을 무시하고 한미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아, 미안합니다. 각성자를 많이 보지 못했는데 새로운 타입을 봐서 조금 흥분을 한 모양입니다."
세진은 한미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이산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산하와 이강토는 형제로 보였는데 이산하가 나이가 더 많은 것을 겉으로 봐서도 알 수 있었다.
꼬독! 꼬독! [이산하, 이강토. 석성가의 직계. 회장의 손자. 이산하가 회장의 5남의 장남으로 32세. 이강토는 3남의 차남으로 26세. 각성자가 된 사실은 국정원에서도 근래에 파악했으며 석성에서 곧바로 미확인 각성자들을 모아서 앞에 있는 여덟 명의 팀을 만들었음. 1등급 이면 공간에서 실전 훈련을 수차례 진행한 것으로 파악됨.]세진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선도일의 폭풍문자가 도착했다. 세진이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공개한 것이 아니니 이산하 일행은 그 문자를 볼 수가 없다.
"괜찮습니다. 한미리씨가 흔하지 않은 타입이니 그럴 수 있지요."
이산하는 세진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강토는 뭐가 불만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꼬독! 꼬독! [이산하, 이강토는 서로 각성자 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 중임. 이강토가 노골적으로 주도권 다툼을 위해서 이산하와 대립하는 중.]세진은 또 다시 날아온 도일의 문자를 읽고 시선을 이강토에게 던졌다.
"뭡니까? 그 눈빛은?"
"눈빛이라니요? 나는 이강토씨가 얼굴 표정이 좋지 않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본 것인데 무슨 말씀이시죠?"
세진은 이강토의 도발적인 질문을 부드럽게 되받아 넘겼다.
"뭐하는 거냐? 이야기는 내가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이산하가 강토를 나무랐다. 이번에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기로 한 것이 자신임을 내세워 이강토의 태도를 꾸짖은 것이다.
"아,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참견은. 그냥 말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뭔?"
"박세진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삼가라고 했었다. 네가 이 자리를 망치면 그 책임을 내가 질 것 같으냐?"
"알았으니 일 보십시오. 저는 가만히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강토는 이산하에게 사과를 하진 않았지만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우리 형제끼리 사적인 대화가 좀 있었습니다."
이산하는 이강토에게서 시선을 돌려 세진을 보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세진은 기분이 살짝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산하의 말을 들으니
'우리 형제가 사적인 대화를 좀 했다. 그러니 그렇게 알아라.'
라는 뜻을 전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 말에는 전혀 사과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세진의 어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산하도 그런 세진의 태도 변화를 느꼈는지 잠시 이강토에게 시선을 주었다. 세진의 변화가 강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진은 그런 이산하의 모습에서 자신이 왜 이산하와 이강토에게서 불편함을 느끼는 지 조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애초에 배려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족속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석성가의 직계라면 그야말로 로열 블러드라고 불릴 인물들이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를 해 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세진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음. 동생의 태도가 박세진씨께 불쾌감을 드렸다면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이산하는 그렇게 사과를 했지만 결국 자신이 아닌 동생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형식이다.
"후훗. 됐습니다. 사과는 무슨, 겨우 그런 일로 사과까지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 다시 묻지요.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좋습니다. 개인감정은 덮어 두시는 걸로 알고 공적인 일을 하지요. 우리들은 그룹의 지원을 받아서 대몬스터 작전을 수행할 특수 전담팀으로 꾸려진 사람들입니다. 여기 여덟이 모두 한 팀이지요."
"그런데요?"
"그 동안 그룹의 지원을 받아서 1등급 몬스터를 상대하고, 그 이면 공간도 몇 차례나 처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1등급 보스 몬스터나 2등급 몬스터에 대한 경험도 쌓을 만큼 쌓았습니다."
"자랑을 하러 오신 것은 아니실 테고, 그 정도는 저와 제 팀원들이 수시로 하는 일인 건 아실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우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세진씨의 팀이 입고 있는 갑옷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타국에서 개발된 갑옷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 성능에서 세진씨의 것이 제일 뛰어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우리 팀이 쓰는 갑옷이라. 그 갑옷에 대한 정보가 제법 되는 모양이지요?"
세진의 시선이 도일에게 갔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갑옷에 대한 정보가 흘러 나갔다면 도일이 그의 스승과 동기들에게 준 정보가 새어 나갔을 확률이 제일 높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떡배가 동생들에게 자랑삼아 늘어놓은 말들이 정보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리저리 모이는 정보가 적지 않습니다. 석성은 한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손에 꼽는 대기업입니다. 정보를 다루는 이들의 실력이 어지간한 나라 수준을 뛰어넘습니다."
이산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세진 팀이 사용하는 갑옷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세진에겐 도발로 보였다.
'석성의 능력이 그 정도라고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남의 기밀을 그렇게 빼내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이란 자각 자체가 없는 거지? 그런 거지?'
세진이 이산하를 노려봤다.
"석성에선 남의 기밀을 모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이쪽에서 숨기고 싶은 기밀을 그쪽 정보부가 어떻게든 손에 넣게 되어 기분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그걸 들킨 이쪽 기분은 전혀 고려를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석성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석성맨의 자부심이 묘한 쪽으로 틀어진 것 같습니다만?"
세진이 이산하와 이강토를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둘은 뭔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안색이 조금 변했다.
"아,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정도의 정보라면 사실 그리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이어서 세진씨가 불쾌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지키지 못한 비밀을 누가 알게 되었다고 화낼 일은 아니란 소리군요. 뭐 맞는 말 같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다음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러니까 갑옷을 얻고자 저를 찾아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우리 석성에서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진은 이산하와 대화를 하면서 묘하게 자꾸만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이산하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세진이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제 할 말만 찾아서 하고 있는 것이다.
세진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뿔이 나기 시작했다.
= 피해. 피해. 경고, 경고. 재앙이 온다. 재앙이 온다. 똥개도 제 집 앞에선 반을 먹고 들어간다. 망했다. 망했다. 니들은 망했다. 어리 앵무가 거실을 날아다니며 묘한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어리 앵무에게 쏠린다.
떡배, 형일, 도일이 세진이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불쌍하단 표정으로 석성 특수 전담팀 요원들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