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92화 (92/298)

< -- 귀국, 석성가의 각성자 그리고 두 여자의 간지럼 증세 -- >

세진 일행의 마지막 관광지는 티티카카 호수였다. 붉은 절벽 바위에 새겨진 스타게이트를 세진이 꼭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세진은 그 스타게이트에서 세진이 가지고 있는 듀풀렉 게이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타게이트에서 세진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절벽에 새겨진 흔적들 보다는 잉카의 초대 황제 아무르 무르가 스타게이트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황금원반에 더 큰 가치가 있었으리란 것이었다.

절벽에 새겨진 커다란 문은 실제로 안쪽으로 에너지가 흐를 기묘한 통로들이 바위 안에 핏줄처럼 뻗어 있었지만 정작 가장 핵심이 될 부분은 황금원반을 끼워 넣었다는 원형 홈에서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아니야. 아니야. 듀풀렉 아니야. 그리고 어리는 그 스타게이트라는 차원문이 세진이 가지고 있는 듀풀렉 게이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라고 했다.

사실 세진이 보기에도 뭔가 달라 보이긴 했다.

'또 다른 형태의 게이트가 존재했던 건가? 그럼 이건 내가 가는 그 행성 연합이란 곳과는 상관이 없는 다른 우주로 통하는 이동 통로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세진의 생각은 단지 짐작에 그칠 뿐, 확인을 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어리가 티티카카 차원문의 형태를 제대로 기억해 뒀으니 이후에 헌터룸에 가면 조금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절벽에서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세진은 조금 맥이 빠졌지만 대신에 다른 일행들은 티티카카 호수에서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한껏 관광객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 후에 세진 일행은 페루를 떠나기 위해서 다시 수도인 리마로 돌아왔다.

"우리 정부는 박세진씨과 그 일행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세진 일행은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에 페루 정부의 공식적인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진은 별로 달갑지 않은 초대를 받고 말았다.

페루 정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권유를 페루에서 뿌리치지 못했던지 미국 정부의 관리가 세진 일행을 찾아 온 것이다.

"남미에서 활동을 하셨으니 북미에도 잠시 들러서 도움을 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 미국도 2등급 몬스터 영역 때문에 곤란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미국 대사관 직원이란 노란머리는 세진 일행이 공항으로 가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 달라 청해서 호텔에서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곤란한 나라는 한 두 곳이 아니지요. 그리고 내가 비록 이곳에 내 사람들만 데리고 오긴 했지만 우리 친구들의 뜻에 따라서 페루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 일행을 붙잡는다고 해도 친구들의 동의가 없으면 우리가 미국으로 가는 일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2등급 천공기를 만드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친구들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진씨의 친구들도 세진씨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세진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곁에 있는 김혜인 박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박사님,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저 말은 협박인 것 같은데요?"

"맞아요. 뜻대로 하지 않으면 세진씨를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세진과 김혜인 박사의 대화는 한국어였고, 그 때문에 대사관 직원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나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 나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아주 성공적으로 협박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협박은 나를 겁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친구들을 겁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리고 난 그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났지. 내가 협박을 받았으니 말이야.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고 말이야. 아, 너희 식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던가?"

세진은 그렇게 말하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대사관 직원은 눈만 똥그랗게 뜨고 뭔 소리냔 표정이다.

"세진씨, 저 사람 한국어 모르는 것 같은데 이대로 가도 되요?"

"처음에야 나도 예의상 영어를 써 준 거지만, 협박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제가 저 사람을 배려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서 가기나 하죠. 가서 일행들과 일정을 의논해 봐야겠습니다. 뭐 녹음을 했거나 말거나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하지만 보아하니 녹취를 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페루 정부에서 특별기를 준비한다고 했지만, 상대가 미국이라면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몇 명과 미국의 절반 정도를 바꾸는 셈 치자고요."

세진은 걱정스런 김혜인 박사의 말에도 태연하게

'우리가 죽으면 미국 절반 정도는 날아갈 겁니다.'

라는 뜻의 말로 위로를 해 줬다. 물론 김혜인 박사는 전혀 위로를 받지 못했는지 얼굴빛만 하얗게 변했다.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나? 응? 정중하게 초대를 해서 데리고 와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거기서 하는 말이 뭐? 곤란해져? 누가? 그 자가? 아니면 너희가? 응? 응?"

세진에 대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CIA 남미 총괄 지부장은 호텔에서 돌아온 부하를 앞에 두고 갈아 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부하를 세진에게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미에서 미국의 힘은 막강했다. 사실 남미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또 국가 정부가 미국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남미의 마약 조직이나 갱단이나 부유한 거부들을 움직이는 것은 미국이었다.

그러니 남미에서 오래 생활한 직원이 세진을 대할 때에도 그런 우월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행동한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이 뭔지 알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미국의 절반을 날려버리겠다는 말이었어. 알아? 그게 무슨 뜻인지? 응? 넌 지금 미국에 엄청난 적을 만들어 놓고 왔다는 소리야. 응? 알아들어?"

지부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기 위해서 관자노리를 꾹꾹 누르며 손을 저어서 부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되자 잠시 후에 도청 불가능한 회선인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통화를 시작했다.

"스미습니다. 네. 그들을 미국으로 끌어 들이는 것은 작전대로 실패했습니다. 당연히 불쾌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 위해서 일부러 그런 성향의 직원을 보낸 것이니 말입니다. 이제 계획대로 그 쪽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 작전을 진행하게 되면 그것이 미국과 관계된 것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후 미국에 대한 프렌드의 공격이 시작되면 우리 CIA가 그 원인을 찾으려 할 것이고, 제가 그 쪽을 도운 것을 알아내게 될 것입니다. 네, 저의 안위도 문제지만 그 쪽의 타격도 심대할 것임은 분명합니다."

지부장의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서 제법 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배려를 해 주신다면 고마운 일이지요. 어쨌거나 미국에 대한 불쾌감을 지니게 되었으니 새로운 의뢰를 받아들일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 쪽은 우리 미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스미스는 전화를 끊었고 의자 깊이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함정으로 끌어 들이는 것은 성공인가? 하지만 겨우 2등급 이면 공간으로 그들을 들여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스미스는 자신을 통해서 복잡한 작전을 세우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계 석유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이들이 모두 모여 있는 카르텔이니 무시할 수는 없지. 그들이 움직이면 세상이 흔들려. 중동, 아프리카, 남미, 북미에 러시아, 중국, 호주, 유럽까지 모든 석유 메이저들이 동참하는 카르텔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그들이 접근할 때까지는 알지 못했을 정도니. 무섭지. 무서워.'

그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심복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감시만 철저히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간섭하지 마. 그들은 곧 떠날 거야. 중동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해도 우리 책임은 아니지. 프렌드가 나선다고 해도 우리를 만났던 것에 대해선 의심을 하겠지만 석유 카르텔은 드러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알고 신경을 좀 써."

"알겠습니다. 캡틴."

스미스는 신뢰하는 부하에겐 어지간한 것은 숨지기 않았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도 함께 의논해서 진행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진이 그 시간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석유 카르텔이란 소리를 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단어가 들어가 선 안 될 사람의 귀에 들어간 것을 그는 절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작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방금 그의 심복 바짓단 안쪽으로 기어 들어간 것도 몰랐고, 그 바퀴벌레가 세진 일행을 만나고 왔던 아까 전의 그 부하 바짓단에서 기어 나왔던 놈이란 것도 몰랐다.

어리가 조종하는 바퀴벌레는 세진을 협박했던 직원의 바짓단에 붙어 왔다가 이번에는 스미스의 심복에게 붙어서 CIA남미 지부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로서 어리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CIA남미 지부의 침투했다가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 성공. 성공. 키틴질 바퀴벌레는 역시 대단해. 안 들키고 목표 달성.

"어리야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있다는 거잖아. 이거 전에 에테르 코어를 우리 옆집에 가져다 놓은 놈들일 가능성도 있는 거지?"

= 가능성 높음.

"지금 너하고 나 밖에 없거든? 이 방에? 그러니까 평소처럼 하지?"

= 습관은 무서운 것. 평소에 잘 해야 함.

"그래. 그래. 알아서 해라. 그나저나 결국 석유 카르텔이란 말이지? 그런데 어지간하면 미국이 의심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이런 작전은 안 만들었을 텐데? 중동이라고 했으니까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뭐 이런 나라 중에서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를 내세워서 의뢰를 하겠지? 물론 미국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상황이면 미국 반대편이란 것에 혹해서 의뢰를 받을 가능성이 높고?"

= 맞음. 교묘한 심리. 성공 확률 높은 작전임.

"그런데 의뢰하고 해 봐야 2등급 이면 공간을 정리해 달라는 것일 텐데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아직 2등급 이면 공간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도 못했을 텐데?"

=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매복의 위험이 커짐.

"설마 이면 공간에 들어가는 다른 수단이 생긴 걸까? 천공기가 아니 다른 수가?"

= 다양한 각성자들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음.

"그것 참, 도대체 그 놈들이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석유 카르텔? 그 돈이 튀는  것들이 나한테 왜?"

세진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들과 갈등을 빚은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미친 것들이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시비를 걸지? 응? 한 번 해 보자는 거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놈이 두목이야? 워낙 석유 메이저들이 많으니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잖아. 어리야, 정보 좀 모아야겠다. 무슨 방법이 좋을까?"

= 위험. 포기, 후퇴.

하지만 어리는 아주 간단하게 대처 방법을 내 놓았다. 위험하니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가자는 이야기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괜히 중동으로 들어갔다가 문제 생기면 곤란하지. 정확한 정보도 없이 움직이다가 우리 팀이 다치거나 죽으면... 맞다. 어리 네 말대로 이대로 후퇴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또 놈들이 접근을 하겠지. 그러다보면 꼬리가 아니라 몸통을 잡을 수가 있을 테고 말이지. 그럼 흐흐흐."

세진은 그렇게 복수를 기약하며 일단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어리야. 거기 CIA지부 거기다가 에테르 EMP 한 방 날리고 가자. 그냥 가긴 억울하 잖아."

= 좋은 생각임. 사고가 나면 CIA 본부에서 감사가 나올 것임. 스미스는 곤란한 상황이 될 것.

"그래. 그렇게라도 일단 속을 풀어야지 그냥은 못 가지. 참, 거기도 에테르 감지기가 있을지 모르니까 잘 해!"

= 감지기 안 걸림. 감지기에 틈을 만든 것이 세진님임.

세진은 어리 앵무의 말에 슬쩍 먼 산을 보았다. 세상에 보급한 에테르 감지 장치의 허점은 그것을 만든 세진만 아는 것이고, 그 허점을 이용하면 세진은 어느 누구보다 자유롭게 에테르 EMP를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온전히 믿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이젠 알게 되겠지. 에테르 감지 장치만 믿고 있다가는 내 친구들에게 호되게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크큿."

= 음흉함. 세진님 무서워. 무서워. 잠자리 날아감. 날아감. 무서운 잠자리 날아감따뜻한 날씨에 맞게 곤충이 많은 리마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작은 상자를 들고 날아갔다. 멀리 CIA 남미 지부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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