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86화 (86/298)

< -- 어리의 기행과 그 희생자들 -- >

- 랄랄라. 어리는 이곳에선 최고인 것이에요. 하지만 어리는 움직이고 싶은 것이에요. 밖에선 앵무새로 지내지만 여기선 다른 모습을 하고 싶은 것이에요.

테멜의 중앙 홀에서 어리는 혼자 놀고 있었다. 그런 어리는 언제부턴가 테멜 안에서 자신의 몸을 대신할 매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어리는 여러 유형의 돌(doll)을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을 하는 것은 어리 앵무였고, 어리 앵무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찾은 자료를 테멜 안에 있는 어리가 에테르 감각을 이용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리 앵무 역시 테멜 공간 안에 있는 어리가 외부로 활용할 수 있는 에테르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 아, 이건 정말 멋진 것 같아. 으음. 이걸로 할까? 그런데 세진님이 좋아 하실까? 이대로 만들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어리는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붉은 색의 19 표시를 무시하고 인형 하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헐벗은 옷차림의 여자 인형은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얼굴을 붉혔을 것이 분명한 그런 용도의 인형이었지만 어리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 이게 제일 잘 만든 것 같기는 하지만, 도대체 안에는 어떻게 생긴 걸까? 실물이 없으니 알 수가 없네? 아, 도일의 스마트폰으로 주문을 해야겠다. 랄랄라. 어리 앵무는 곧바로 어리의 에테르의 힘을 빌려서 슬그머니 도일의 방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도일이 부엌에 있는 동안에 스마프폰 탈취를 포기하고 대신 도일의 방에 있던 노트북을 이용해서 구매 신청을 넣었다. 도일의 주민번호와 카드 번호 따위는 어리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기억의 소유자 어리는 이미 오래전에 도일의 비밀들을 훔쳐 놓았었다.

그 모든 것이 어리 앵무가 새라고 방심한 도일의 부주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어리다. 이틀 후, 세진은 거실에 앉아 있다가 도일이 택배 기사에게 상자를 받아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게 뭡니까?"

꼬독! 꼬독!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앞으로 온 택배인데 꽤나 큰데요?]도일은 세진이 보는 앞에서 방금 택배 기사가 배달한 커다란 상자를 개봉한다.

그리고 후다닥 상자를 닫는다. 하지만 이미 내용물은 도일과 세진이 모두 본 다음이다.

세진과 도일은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제가 시킨 거 아닙니다. 전 이런 거 시킨 적이 없습니다."

도일이 급하긴 한 모양인지 스마트폰 문자가 아닌 육성으로 변명을 한다.

"..."

세진은 말없이 도일을 보고 있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도일이 고함을 지른다.

"무슨 일인데 소리를 질러? 도일이? 세진님 이게 뭔 일입니까? 뭡니까?"

떡배가 1층으로 내려오다가 도일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온다. 도일의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지니 놀란 모양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일이 급하게 종이 박스를 정리한다.

"뭔데 그래? 응?"

떡배가 집요하게 도일이 숨기려고 하는 것을 풀어 보려고 애쓴다.

"하암. 아직 밥 먹을 때, 안 됐어요? 후암."

그 때, 정진이 경호원이 트레이닝 차림으로 내려온다. 밥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내려오는 사람이다. 이제 점심을 먹을 시간이란 소리다.

그 뒤를 김혜인 박사가 따르고 있다. 새벽까지 연구에 매진하다 잠든 박사를 정진이 경호원이 억지로 깨워서 끌고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두 여자가 나타나자 도일의 손이 더욱 바빠진다. 서둘러서 정리해서 치우려고 상자를 들어 안고 방으로 가려한다.

그 순간 어리 앵무가 나타난다.

= 택배. 택배. 상자가 왔어. 내 상자.

푸드드득. 푸드득.

어리 앵무가 거실을 날아다닌다.

"꺄아악. 너 저리 가지 못해? 응? 저리 가!"

정진이 경호원이 이리저리 어리 앵무를 피해서 거실을 뛰어다닌다. 정진이 경호원의 조류 기피증은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일씨 그게 뭔데? 응 좀 보자고."

그런 와중에 떡배는 집요하게 도일의 상자를 궁금해 한다.

그런데 이리저리 어리 앵무를 피하던 정진이 경호원이 도일을 방패로 삼아서 어리 앵무를 막아 세운다. 등 뒤에서 양 어께를 잡고 이리 저리 돌리는 정진이 경호원의 동작에 도일이 심하게 당황한다. 이 순간 도일은 아무래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한다.

그리고 그 예감이 들자마자 정진이 경호원이 도일의 몸을 양쪽으로 심하게 흔들고 도일이 안고 있던 상자가 떡배의 손에 끌려 나간다.

떡배에게 끌려가던 상자는 뚜껑이 열리면서 그 속을 훤히 드러내고 내용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눕는다.

일순 거실에는 정적이 흐른다.

"으아악, 이거 내가 시킨 거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로!"

도일의 비명이 그 뒤를 따른다.

모두의 시선이 도일에게 꽂혀 있다.

= 어리의 택배. 어리. 어리. 어리어리 둥둥.

어리 앵무의 뜻 없는 말소리만 공허하게 떠돌아다닌다. 어리 앵무는 진실을 말하건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봐라 도일씨. 나 좀 보지."

까뚝! 까뚝! [떡배씨가 무슨 일입니까?]도일이 떡배의 부름에 주차장으로 나갔다.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는 없잖아. 아, 도일씬 담배 안 피우지?"

까뚝! 까뚝! [네. 전 안 배웠습니다.]

"그렇지. 잘 한 거야. 나도 요즘은 별로 안 땡기는데 그래도 이야기가 심상찮을 때에는 필요하더란 말이지. 거 참, 습관이 무서운 거야."

까뚝! 까뚝! [뭐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건가요?]도일이 떡배가 심상찮은 이야기란 말을 하자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거기 말이지. 혹시라도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를 하란 말이지. 내가 지금은 이래도 아직 밑에 동생들이 수두룩하단 말이지. 그 녀석들이 관리하는 업소만 해도 몇인지 몰라. 혹시 이런 말 아나? 쭉빵 1%의 대부분은 업소에 있다는 말 말이야."

까뚝! 까뚝! [네? 무슨 말씀이신지?]도일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떡배를 바라본다.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도일이다.

"그 쓸데도 없는 요상한 인형 가지고 놀지 말고 내가 차라리 여자를..."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그거 제가 시킨 거 아니라니까요?"

도일이 이번에도 문자를 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아, 그려?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지, 그게 다음날 도일씨 방에서 머리색만 다른 것이 두 개나 더 발견이 되었는데 그건 어쩔려구 그러나? 뭐 변명이 되어야 나도 이해를 하지. 우리 집에서 누가 그걸 도일씨 방에 가져다 놓겠냔 말이지. 그것 참."

"어쨌거나 저는 아니니까 저한테 관심 두지 마십시오. 내 분명히 범인을 잡아서 요절을 내고 말 겁니다."

도일이 씩씩 거리면서 떡배에게 쏘다 붙이고 다시 거실로 모습을 감춘다.

"그게 참, 저러는 거 보면 정말로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럼 도대체 누가? 설마 세진님이? 아, 그건 아니겠지. 아니야."

떱배가 고개를 젓다가 고개를 들어 천정쪽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저 위에 사는 여자들이? 흐음? 간혹 그런 취향이 있다곤 하던데... 아니지 둘이 잘 붙어사는 걸 보면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뭐 개인 취향이니까 그건 뭐라 할 건 아니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죄 없는 도일씨만 불쌍하게 오해를 받게 되는 거 아닌가?"

떡배는 아직 반도 피우지 못한 담배를 입으로 가지고 가다가 어쩐지 역겨운 냄새에 손가락을 튕겨서 담배 불꽃을 털어 버리고 거실로 향하는 문을 통해 모습을 감춘다.

"누굴까요? 언니."

"뭐가?"

"그, 있잖아요."

"섹스 돌?"

"언니!"

정진이는 김혜인의 적나라한 표현에 화들짝 놀란다.

"뭘 그렇게 놀래? 그게 놀랄 일이야?"

"어쨌건요. 그거요 누가 그런 걸까요? 배달이 왔을 때에는 하나였는데 하룻밤 사이 에 셋이나 되었잖아요.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 몰라도 그게 가능해요?"

"쯧, 그러니까 니가 점점 새머리가 된다는 거야."

"왜요? 내가 뭘?"

"택배로 온 건 그렇다고 치지만, 밤사이에 두 개나 늘어난 인형을 보면 몰라? 그런 재주를 지닌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잖아. 세진씨 말이야."

"에? 그럼 그게 세진씨가 시킨 거란 말이에요?"

"무슨 생각으로 그걸 시켰는지는 몰라도 실험에 쓸 생각이었거나 뭐 그랬겠지. 그런데 그게 어쩌다 보니 중복 주문이 된 거야. 그 중에 하나가 도일씨에게 간 거고."

"그럼 다음 날 두 개가 나온 건요."

"그거야 세진씨가 남은 걸 몽땅 도일씨에게 넘긴 거지."

"네? 왜요?"

"응? 당연한 거 아냐? 이미 버린 몸인데 하나나 셋이나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세 진씨가 도일씨에게 몽땅 덮어씌운 거지."

"그런 걸까요?"

"응. 그런 거야."

김혜인 박사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고, 정진이 경호원은 김박사의 추리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뭡니까? 정진이씨. 왜 나를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보는 겁니까?"

"아니에요. 제가 뭘요?"

세진은 정진이의 불손한 눈빛에 기분이 상해서 어리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어리 앵무를 통해서 테멜 공간으로 넘어왔다. 이제 어리 앵무의 부리 속에 손가락을 넣으면 테멜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 어서 오세요. 세진님.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아주 못 살겠다."

- 에? 왜요? 제가 뭘요?

"지금 집안 분위기가 아주 엉망이야. 응? 서로 그 인형의 주인이 누군지를 놓고 의심하고 있다고. 이걸 니가 저지른 일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거야? 응? 이 사태를 어쩔 거냐고?"

- 우웅. 인형 하나 가지고 뭘 그런데요? 남자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건가요?

"야! 그게 용도가 그런 용도가 아니니까 문제지."

- 하긴 짝짓기 흉내를 내면서 발정을 푸는 용도로 쓰는 거니까 좀 민망하긴 하겠네요.

"그걸 아는 놈이 이런 일을 벌여?"

-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고요. 그냥 필요해서 주문을 했을 뿐인데요.

"나한테 의논이라도 하지 그랬어?"

- 세진님을 놀래 주려고 그랬죠.

"하긴 엄청 놀라긴 했지. 갑자기 테멜 안에 아가씨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 에헤헤. 잘 만들었죠? 거기다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자연스러워요. 뭐 여기 테멜 안에서만 그런 거지만요. 밖에선 이렇게 못 움직여요. 이 인형들은 이상한 곳만 섬세하고 관절 같은 건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고요. 갑옷의 관절을 적용해서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새로운 관절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세진님이...

"불가, 절대 불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형의 관절을 설계해 달라는 말은 못한다. 그랬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라고?"

세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후우, 너무 해요.

"시끄러. 너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냐. 이걸 어쩔 거냐고? 응? 너 당분간 반성의 시간을 갖도록 해. 알았냐?

- 히잉, 네에.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인형의 주인은 의외로 떡배가 아니냐는 쪽으로 의심의 눈길이 모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선입견이 무서운 거라고. 내가 전과자라고, 뒷골목 출신이라고 다들 그러는 모양인데, 내 지금까지 여자 손목도 제대로 못 잡아 본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랴?"

떡배가 그렇게 항변했지만,[[그래서 저한테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바람을 불어 넣고 그랬습니까? 동생들이 관리하는 업소가 많다는 둥, 상위 1% 쭉방의 대부분이 업소에 있다는 둥, 하면서 말입니다.]]도일의 스마트폰에서 나온 이 기계음이 떡배를 궁지로 몰았다.

"이러니까 억울하다는 거야. 내가 간다고 했나? 도일씨 데려다 준다고 했지? 그려. 맘대로 생각들 해. 나야 뭐 그 정도 오해를 받아도 암치도 않으니까. 봐봐. 이렇게 살도 쪘지? 딱 보면 그거잖아. 덕후. 그려 나 덕후야. 덕후."

떡배는 그렇게 삐쳐서는 며칠을 갔지만 그것도 시들해지고 인형 사건은 유야무야 묻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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