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화 혹은 돌연변이? 그리고 김혜인 박사 -- >
"멋있어. 대단해. 엄청나!"
죽음과 공포의 거리로 바뀐 도쿄의 구석에서 헤이치 야시로가 연신 '스고이'를 외치고 있었다.
올해 스물이 된 헤이치는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가출을 해서 노숙자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됴쿄 곳곳에 그런 노숙자들은 넘쳐났다. 적당히 고물을 주워 팔거나 혹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커피잔이나 음료수잔 등을 수거해서 약정 금액과 교환하는 것으로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삶이 이어졌지만 헤이치 야시로는 그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끔씩 뭔지 모를 분노를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는 것 정도로 풀어내는 소심한 인간 군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도쿄사태가 일어나면서 헤이치는 먹고 사는 것도 힘겨워지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약탈을 다니며 끼니를 때웠다.
다른 도시로 가는 피난 행렬에 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낯선 곳으로 가 봐야 도쿄보다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갓파를 만나서 죽게 되더라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헤이치는 자신의 몸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 없이 건강해진 것 같았고, 쉽게 지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헤이치는 점차 약탈자 무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 헤이치 야시로에게 며칠 전부터 정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 안에 넘치는 어떤 힘이 밖으로 분출되며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생활과는 무관한 생활을 하면서도 만화에 탐닉했던 헤이치는 곧바로 그 힘을 적절하게 통제해서 사용하는 것을 연습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에 넘치는 기운을 날카롭게 뽑아내서 원하는 곳을 찌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힘이 매우 강력해서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낼 정도였다.
"스고이, 이거면 겁날 것이 없어. 거기다가 보이지도 않아. 나는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지도 못하잖아. 멋져. 멋져."
'도쿄를 작살낸 놈도 이런 힘을 지니고 있었을 거야. 보이지 않는 공격을 한 거겠지. 그리고 나보다 훨씬 강한 놈이야. 그 놈은 빌딩도 쓰러뜨릴 수 있었는데 나는 겨우 콘크리트에 구멍을 낼 뿐이야.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그놈들은 일본에 없어. 일본에는 나뿐인 거야. 아니지, 나 같은 놈들이 더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럼 힘을 길러야 해. 그런 놈들이 나타나도 내가 이길 수 있어야 해.'
헤이치 야시로는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고 여전히 약탈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데 애쓰기로 했다. 하지만 헤이치 야시로와 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주로 몬스터 영역에 노출이 된 사람들 중에서 몇 만 분의 일 정도의 확률로 그런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그 결과 가장 이득을 보는 나라는 역시 중국이었다.
몬스터 영역에서 사람들을 퇴거시키지 않은 경우가 많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몬스터 영역이 많은 중국이었기에 당연히 각성자의 수도 많았다.
그래서 각성자의 대한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왔을 때, 그 발원지 역시 중국이었다.
"이거 봤어요?"
감혜인 박사가 인터넷 각성자 뉴스를 들고 세진을 찾아왔다.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몬스터 영역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서 초능력자들이 생기고 있다는 이거요."
"에테르란 에너지에 반응하는 신체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지요."
세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하면서도 그 각성자란 사람들을 직접 만나 봐 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에테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테멜 공간을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천공기 대신에 이면 공간을 드나들 방법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런 사람, 우리나라에도 있었어요. 군인인데, 대전 연구소에 가끔 와서 실험을 했죠."
"네? 우리나라에요?"
세진은 김혜인 박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네. 그 사람은 힘이 아주 강했어요. 그 뭐라더라 무지막지한 총을 혼자서 들고 등에는 총알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세진의 시선이 곧바로 소파 끝에 앉아 있는 도일에게로 향했다.
꼬독! 꼬독! [군인입니다. 김박사님 말씀대로 힘과 지구력, 회복력이 무척 향상된 각성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첫 케이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그 공략팀의 중화기 담당이 그 사람입니다.]
"그 후로도 발견된 사람들이 있습니까?"
꼬독! 꼬독! [극비입니다.]
"극비라. 뭐 그렇다고 합시다. 지금 세계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면 우리나라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요. 다만 몬스터 영역에 노출이 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으니 우리나라엔 별로 없겠습니다. 워낙 통제가 깔끔하게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우리나라만 능력자 전력이 처지는 거 아닐까요?"
김혜인 박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각성자의 숫자보다는 이전부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수련 능력자가 더 강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세진은 슬쩍 도일을 보면서 말했다.
"수련 능력자요?"
"지금 막 생각이 나서 붙인 명칭입니다. 각성자와 수련 능력자. 각성자는 아실 거고, 수련 능력자는 무술을 익히거나 혹은 단전 수련을 하거나 무속의 능력을 지니거나 하는 경우를 말하는 거죠. 저는 그 쪽도 각성자에게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 알아요. 그런 사람들 대전 연구소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러네요. 그런 사람들은 각성자들이 나오기 전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었어요."
"그래도 각성자의 수가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중국은 대박을 맞은 거네요."
정진이 경호원이 거실 입구에서 듣고 있었던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소파로 다가왔다.
"야, 이 계집애야. 그게 뭔 꼴이야? 요즘은 운동도 안하더니 게을러지기까지 해서 그게 뭐야? 좀 씻고, 단정하게 다녀야지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좀 맵시 있데 못 입냐?"
"하암, 언니. 제가 그렇게 꾸며서 누구에게 보이라고요. 여기 이 두 둔치님들에게요? 아서요. 쓸데없는 낭비에요. 정말 필요할 때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 부시맨, 부시맨, 여자는 갈대다 머리가 갈대 머리다.
"꺄악! 너, 너, 너. 내 곁으로 오지 말라고 했지? 응? 절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잖 아. 그런데 왜 틈만 나면 소리도 없이 곁으로 오고 그러는 거야? 가, 가. 가란 말이야."
어리 앵무가 정진이의 뒤에서 나타나자 정진이는 까무라칠듯이 놀라서 버버버벅 뛰어서는 김혜인 박사 등 뒤로 숨어서 얼굴만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이것아 저리 안 가? 머리에서 냄새까지 나잖아!"
"언니!"
그렇게 두 여자가 티격태격 하고 있는데 마침 손님이 찾아왔는지 벨소리가 울렸다.
"넌 올라가봐라. 그 꼴로 사람들 만나지 말고."
"이게 뭐 어때서? 기다려요."
정진이는 곧바로 씽크대에서 손에 물을 묻혀서 머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고무줄을 꺼내서 질근 묶었다.
그러자 깔끔하게 정리된 정진이 경호원의 모습이 탄생했다.
= 기적이다. 변신, 변장, 변형, 변태!
"그건 아니잖아. 변태는 또 뭐야? 변태가!"
정진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세진의 손에 올라가 있는 어리 앵무를 노려봤다.
그 사이에 도일이 현관으로 나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말을 하지 않는 도일 때문에 방문객들은 한참 머뭇거리며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대해그룹의 미래에너지 사업 본부장인 맹도강은 그의 수족인 황비서와 함께 어리 공방을 찾았다.
사실 맹도강은 로열블러드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자칭 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해그룹의 실질적인 지배층이 맹씨 일가고 맹도강은 그 중에서도 3세대의 리더로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살면서 고단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와서 결국 같은 세대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되었으니 나름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리 공방의 작은 건물 앞에서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한 맹수를 만나러 왔다가 자칫 성질이라도 건드리게 되면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를 일인 것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도일이란 젊은 사람이 문을 열고는 멀뚱하게 쳐다보고 서 있는 상황에서 잠깐 당황했지만 그 순간은 황비서가 나서서 해결을 해 줬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도일씨. 역시 좀처럼 말을 하지 않으신다더니 맞는 말인 모양입니다. 여기 이 분은 대해그룹의 미래에너지 사업 본부의 본부장님인 맹도강 본부장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비서 황아무개입니다."
"..."
"네. 저희가 찾아온 이유는 이곳에 계신 김혜인 박사님을 뵙고 새로운 사업에 대해서 협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기술만으로 사업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 본부장님께서는 에테르 코어라는 미래 에너지를 널리 보급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황비서가 구구절절 설명을 하려는데 선도일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입구를 열어준다.
선도일은 이들이 자신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에 있는 세진과 김혜인 박사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한 것이다.
물론 경호원이라면 그런 행동이 문제가 되겠지만 도일은 세진이 있는 곳에서 경호원 역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도일 자신은 가늠할 수도 없는 능력자가 세진이란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맹도강은 황비서를 데리고 현관으로 지나서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그와 황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지 않은 손님이지만 일단 내 집에 들었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겠지. 어서 오십시오. 박세진입니다."
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고개도 까딱하지 않은 단지 소개에 지나지 않는다.
"반갑습니다. 맹도강입니다. 대해그룹의 미래 에너지 사업 본부장 자리에 있습니다. 아, 김혜인 박사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황비서라고 불러주십시오. 황강대입니다."
김혜인 박사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없이 까딱 고개만 움직였다.
"자, 그리 앉으십시오. 보는 것처럼 뭐 그저 그런 집이라서 볼 것도 없는 곳입니다."
세진은 맹도강과 황강대에게 김박사의 반대쪽 소파를 가리켰다.
맹도강은 소파에 와서 앉았고, 황대강은 그런 맹도강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렇게 되니 김혜인의 뒤에 서 있는 정진이와 황대강이 서로 비슷한 위치에서 노려보는 상황이 되었다.
"듣자하니 김혜인 박사님께서 연구 중이신 에테르 코어 활용 기술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세진이 이야기의 서두를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대전에서 시연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는 장치로 에테르 코어에서 어마어마한 열기를 생산해 내고, 그것의 지속 시간 또한 굉장히 길 것으로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맹도강이 세진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까? 저야 뭐 김박사님께 거처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어서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김박사님의 연구는 원래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개인 연구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연구 내용에 대한 권리가 박사님께만 있다는 말이지요. 연구소나 정부에서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찾아 뵌 것이죠. 그게 연구소나 정부에 귀속되는 것이었다면 아무리 우리 대해그룹이라도 그걸 욕심내진 못했을 겁니다."
"아, 아시는군요. 뭐 당연한 일인가요? 그런데 맹 본부장님."
"네?"
갑자기 정색을 하고 자신을 부르는 세진의 목소리에 조금 긴장된 음성으로 맹도강이 세진을 본다.
"김혜인 박사님이 여기에 의탁한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연구가 이미 제 친구들과 연관이 생겼다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런데도 대해에서 우리 친구들의 일에 끼어들겠다고 하는 거 맞습니까?"
세진의 목소리에 까칠한 가시가 돋기 시작한다.
"하하하.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도울 일이 있으면 서로 돕자는 거지 우리 대해에서 욕심을 부리겠다는 뜻은 없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세상 일이 독불장군식으로 되는 일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맹도강은 태연한 얼굴로 세진의 말을 받아쳤고, 황비서도 표정 변화 없이 맹도강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