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68화 (68/298)

< -- 할 일 많은데 또 뭐? -- >

'안면이 있는 사람은 모두 동원을 하려는 것일까?'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김혜인 박사와 정진이 경호원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그렇군요. 김박사님. 하지만 요 근래에도 몇 가지 물건들을 주문하셨지요. 직접 얼굴은 못 봤어도 거래는 계속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제겐 단골 고객님이시죠."

"단골 고객이라구요?"

김혜인 박사는 세진의 평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화가 난 표정이다.

"흥, 어쨌거나 제가 찾아 온 이유는요."

"일본 이야기라면 안 듣는 걸로 하죠."

세진은 김혜인 박사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사람 말은 좀 다 듣고 이야기를 하세요."

"아, 미안합니다. 요즘 워낙 일본 때문에 시달려서 말입니다."

세진은 자신이 좀 급했다는 생각에 일단 사과를 했다. 이렇게 했으니 이후로 다시 김혜인 박사가 일본 이야기를 꺼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제가 요즘 연구 파트를 다른 곳으로 옮겼어요. 사실 스파이 곤충 로봇은 이제 어느 정도 완성이 된 거니까요. 거기다가 그건 대량 생산을 할 것도 아니니 필요할 때마다 세진씨에게 주문하면 될 거고 말이죠."

"아쉽군요. 김혜인 박사님의 설계도는 우리에게도 꽤나 유용했는데 말입니다."

세진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저, 다른 연구 한다구요. 그래서 여기 온 거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거란 말이죠. 이제 못 보게 되었다고 인사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이에욧."

"아, 그런가요? 그럼 이번에도 저희에게 부탁하실 것이 있습니까?"

"흠흠. 그래요. 제가 이번에 맡은 것은 동력기관의 설계에요. 그것도 요즘 말이 많은 에테르 코어를 이용한 동력기관이죠."

"아, 그렇군요. 기계 공학을 전공하셨다니 딱 좋은 연구로군요."

"맞아요. 아실지 모르지만 에테르 코어는 매우 특별해요. 사실 그에 대한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요즘은 에테르 코어를 다른 물질과 섞는 합성에도 진전이 있는 걸로 알아요.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핵심은 에테르 코어가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걸 연구하는 쪽에 제가 합류를 한 거예요."

"하긴 그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에너지 변혁의 시대를 맞겠군요. 그런데 가능성은 있답니까?"

"사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라도 변형이 가능하면 어떻게든 그 효율을 올려서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 연구원들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인도에서 만들었던 반발력을 이용한 방법에서 시작을 했지요. 하지만 그 쪽은 좀 문제가 있었어요. 가능성은 있지만 그리 효율이 높지 않았고, 자주 수행자의 기운을 불어 넣어 줄 필요가 있었죠."

세진은 김혜인 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에 조금 획기적인 성과가 있었어요. 그 에테르 코어로 불을 만들어 낸 거죠."

"불이라고요?"

"네.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불이 솟아나는 거죠. 사실 그건 세진씨의 천공기에서 파생된 것이긴 하지만요."

"천공기를 보고 만들었다고요?"

"맞아요. 우리 연구원들은 에테르 코어의 에너지가 일정한 경로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천공기가 바로 그 예가 된 거죠. 에테르 코어를 올려놓으면 그 에너지가 천공기에 숨어 있는 수많은 경로를 따라서 움직이면서 어떤 형태로 변형을 일으키는 거라고 파악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식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결국 약간이지만 성과를 낸 거죠."

"대단하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세진은 역시 사람들의 저력은 무시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도 어떻게든 실험을 계속해고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뭐, 대단할 것도 없어요. 그냥 우연이니까요. 어쨌건 그래서 기본적인 연구 방향은 정해졌어요. 에테르의 가공이 그런 식으로 가능하다면 이제부터는 에테르를 가공할 어떤 것이 필요하죠. 그것은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마법진과 같은 거지만 그런 유치한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그래서 지금은 그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에요."

"마법진이라. 마법진."

세진은 정말로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있는 연구원들에게 찬사의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탑을 쌓기 시작한 그들이지만 그 발상만은 칭찬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솔직히 천공기라는 이미 완성된 형태의 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연구죠. 그게 없었으면 사실 아직도 다른 나라들처럼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아까 그래서 불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을 했다고 했습니까?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세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호호, 그건 말씀드린 대로 우연이었어요. 우린 제일 먼저 에테르가 흘러갈 수 있는 통로에 대해서 연구를 했죠. 그리고 사실 그 통로의 재료는 몬스터 부산물을 썼어요. 물리적으로 그것들을 갈아서 분말로 만들어서 다른 물질과 섞어서 쓴 거죠. 어쨌건 그런 실험을 하다가 한 연구원이 묘한 그림을 그렸어요. 어차피 우리에겐 정해진 길이 없으니 괴발개발 그어 놓은 의미 없는 선들, 그러니까 만화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들이나 같은 것에서 출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묘한 그림에서 불이 생겼다는 겁니까?"

"우습지만 그렇게 된 거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비밀이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엄청난 사실이 뭔지 궁금했지만 세진은 묻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김박사의 태도가 완연히 드러나 있는데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김박사도 몬스터 패턴에서 에테르 도면을 그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비밀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런 작은 발상이 이후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연구 과정이란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럼 그 불을 만들었다는 그 그림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습니까?"

"에? 곤란한 거 아시죠?"

"그런 정도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이룩한 성과입니다. 곤란하면 안 보여 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이렇게 해요. 그쪽에서 가지고 있는 것과 교환하는 건 어때요?"

"먼저 보고 결정을 하죠.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야 교환을 하거나 말거나 할 거 아닙니까?"

세진은 교환이라는 김혜인 박사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저 쪽은 우연에 의한 산물이고 이쪽은 체계적인 연구 성과라면 서로 교환을 해도 이쪽이 훨씬 손해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교환을 하자고 나서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박사의 태도가 웃긴 것이다.

"조, 좋아요. 일단 보여드리죠."

김혜인 박사는 서둘러서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서 한동안 꿈지럭 거리다가 드디어  화면을 세진 쪽으로 돌려서 보여준다.

"이거에요."

세진은 화면을 보고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후우, 이건 뭐. 완전 낙서로군요."

세진은 한숨을 쉬고는 한쪽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리야. 가서 종이하고 펜 좀 가지고 와라."

= 심부름. 펜, 종이. 펜, 종이.

"어머?"

"꺄악!"

어리 앵무의 등장에 김혜인 박사는 호기심을 보였고, 정진이 경호원은 발밑으로 걸어온 어리 앵무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김혜인 박사의 등 뒤로 가서 섰다.

"뭐니? 경호원이 뒤에 숨는 경우가 어딨어?"

"언니는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저런 앵무새가 어딨어요? 심부름 하는 앵무새라니요. 저건 분명히 요괴일 거예요."

"하아, 넌 도대체 왜 새만 보면 그렇게 머리가 새가 되는지 모르겠다."

= 새머리. 어리머리. 저리가. 머저리. 머저리가.

"봐요. 저게 어디 보통 앵무새가 할 말이냐구요."

"도대체 저런 말은 누가 하는 거죠? 설마 세진씨가 가르친 건가요? 앵무새는 집안 사람들의 말을 보고 배우는 거잖아요."

=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어디를 가느냐.

종이와 펜을 물고 온 어리 앵무는 잠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다시 어리의 방으로 가버렸다.

"저 녀석은 방송 보면서도 말을 배우는 녀석이니 여기 사는 사람들 타박은 하지 마시고, 자, 이제 이거나 보십시오. 어리는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세진은 그렇게 김혜인 박사의 주의를 돌리고 종이 위에 뭔가 쓱쓱 그리기 시작한다. 김혜인 박사와 정진이 경호원이 그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음. 이게 뭐죠?"

완성이 되었다는 듯이 펜을 멈추고 자신을 보고 있는 세진에게 김혜인 박사가 물었다.

"보고도 모르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훗."

세진의 말에 김혜인 박사는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천재인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세진이 내민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이 뭔지 알 길이 없다.

"왜 그리다 말아요? 그거 이거 베끼다가 만 거잖아요."

그런데 정진이 경호원이 불쑥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그러면서 가리킨 것이 김혜인 박사가 보여 준 화면이었다.

"아!"

김혜인 박사도 그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세진이 그려 준 것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제거한 불을 만들어 내는 에테르 활용 도안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쓸데없이 뭘 그렇게 더덕더덕, 쯧. 딱 지금 이것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괜한 에테르 소비만 일어날 뿐이죠. 당연히 수명도 줄어들게 될 테고 말입니다."

"수명이요?"

"그거 그리는 재료가 뭔지 몰라도 수명이 있을 겁니다. 제대로 만들어진 재료로 그렸으면 몇 백 년을 갈 거고 아니면 며칠 쓰면 날아가 버릴 수도 있겠죠."

'천공기를 만들 때에도 그런 원리가 들어가지. 한 번 쓰면 증발을 해 버리도록 하는데 말이지.'

세진은 굳이 그런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좋은 정보네요. 고마워요."

"뭐. 실험을 하다보면 금방 알게 될 문젠데 고마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 볼 일이 그거였습니까? 김혜인 박사님 전공과는 솔직히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 네. 그게 사실은..."

김혜인 박사는 한동안 뜸을 들였다.

"말씀하십시오."

"천공기가 필요하다네요."

김혜인 박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세진은 듣지 않아도 그것이 어디에 쓰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세진이 일본과 거래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드니까 정부에서 천공기를 가지고 일본과 협상을 하려는 수작이 눈에 뻔히 보였던 것이다.

"천공기라, 그걸로 밀어 낼 몬스터 영역이 몇 곳이 있었죠. 일단 포철 쪽이 급하긴 하죠? 그리고 대도시 인근에 있는 몬스터 영역들도 정리를 할 필요가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격은 어느 정도도 할 거랍니까?"

"네?"

"왜요? 필요 없습니까?"

"아니요. 필요하죠. 필요해요. 그런데 세진씨가 의외로 선선히 나오니까 도리어 이상하네요."

"어차피 천공기는 풀어 놓을 예정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고 에테르 코어를 함부로 다루다간 어떤 꼴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 뿐이죠. 더구나 우리가 만드는 천공기는 아마도 2급 몬스터 영역에는 구멍을 내지 못할 겁니다. 아직 거기까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민지 아시겠습니까?"

"더 위험한 몬스터 영역이 나타나면 결국 사람들이 살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리죠? 그 소린 많이 들었어요. 뭐 일반인들은 아직 실감을 못하는 모양이지만요."

"그래서 당해봐야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공기도 천천히 풀어 놓을 겁니다. 약간의 희생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우리가 세상 모두를 책임질 일도 없고 말입니다."

세진은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요. 어쨌거나 이번 사태는 해결을 할 수 있겠네요."

"넉넉하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써야겠죠. 알아서."

세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일부를 시마네 원전 쪽으로 돌리겠지. 어쨌건 발등의 불은 꺼야 할 테니까. 그리고 이후에도 일본은 계속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될 거다. 우리 쪽은 일체 대응도 하지 않을 테니 우리와 거래를 할 수 없는 그들의 선택은 다른 나라와 거래를 할 방법뿐이고, 그러자면 우리 정부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걸 잘 살리면 정부도 인정을 받을 거고, 그게 아니면 뭐, 정부도 볼 거 없는 거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세진은 그렇게 한 발 물러났다.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시마네의 원전은 한국에도 엄청난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진은 김혜인 박사가 돌아간 후에 도일에게 천공기를 일본인 손에 닿게 하는 순간 다시는 천공기 구경도 못하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모든 것은 이쪽에서 주도하고, 단 하나의 천공기도 그들 손에 닿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놈들인 것은 뻔히 아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애초에 손에 쥐어 주질 말아야 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원전 안까지라도 직접 들어가서 해결을 하라고 하세 요. 아니면 천공기 못 준다고 하고요."

세진은 그렇게 몇 번이나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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