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퀴벌레와 앵무새 사이에서 -- >
세진의 부모님은 잘난 아들 때문에 그 동안 쌓은 것을 모두 잃게 되었다.
직장은 물론이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나 동료, 이웃까지 다시는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어쩌냐? 괜찮은 거냐?"
그럼에도 세진의 아버지는 아들 걱정부터 했다.
"그럼요. 든든하게 지켜준다잖아요."
"하필 그런 걸 만들어서 이 난리가 나게 만드냐? 너무 작게 만들어서 그런 거라며? 차라리 한 두 배 정도 크게 만들지 그랬냐?"
비허용)선호작품 : 6226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이렇게 되서 어쩝니까?"
"괜찮다.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지. 사실 이제 쉴 때도 된 거고 말이다."
"호호호. 맞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괜찮으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이제 남은 인생 근심 걱정 없이 편히 살게 되었으면 고마운 일이지."
"그래. 아들.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원래 우리가 노후자금 모으면 그러려고 했어. 시골 가서 편히 살려고 말이다.
딱 원하는 대로 된 거지 뭐. 거기다가 우리 이름 바뀌는 건 신경도 쓰지 마라. 어차피 고아원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이 이름을 가지고 살아도 우릴 버린 부모님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는 그런 이름이니까 바뀐다고 해도 아쉬울 것도 없다. 새 출발 하는데 새 이름에 새 신분증까지 준다잖니. 우린 아주 좋다.
세진은 어머니의 말에 더욱 가슴이 먹먹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세진은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이 자기 탓이라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니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다. 그렇게 세진의 부모님은 자식과 오래 있지도 못하고 서둘러 추억들만 챙겨들고 몸만 떠났다. 부모님이 떠나고 사흘 후 어리 공방의 어리의 방.
서대철은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전해 줬고, 그것을 읽은 세진은 종이를 씹어 삼켰다.
부모님의 새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건가?"
"증거 인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가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든다니까. 쯧."
서대철이 혀를 찼다. 그리고 세진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자넨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 없나?"
"어차피 작업은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하는 일도 있지만 그건 아실 필요 없고, 또 제가 굳이 집을 옮길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 알려진 상황에서 말입니다."
"음, 자네와 손발을 맞출 사람이 있는데 여기로 출퇴근하기가 힘들어서 하는 말이네."
"설마 감시를 붙이는 겁니까?"
"경호를 하긴 하겠지만 자넬 만날 사람은 우리 연구를 도와주는 사람이네. 자네와 함께 일을 하게 될 파트너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이제 곧 사람이 올 테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게."
서대철은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진의 어리 공방에는 세 사람이 더 늘어났다.
그들은 어리 공방에 딸린 어리의 방 원목 탁자에 둘러앉았다.
"여긴 김혜인 박사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재원이지.
전자제어로 박사와 기계공학 박사로 두 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안녕하세요.
김혜인이에요."
김혜인은 하얀 블라우스에 감색 가을 코트와 스커트를 입은 짧은 커트머리의 미인이었다. 거기에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세진에겐 꽤나 눈길이 가는 여자였다. 그런데 안경을 벗으면 더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세진의 머리를 스쳤다.
안경을 썼는데도 그 매력에는 별로 혹하지 않고, 그 안쪽이 궁금한 여자는 처음인 세진이다.
"그리고 이쪽은 정진이씨. 김혜인 박사님의 근접 경호를 맡고 있지."
"정진이입니다."
단색의 상하 정장에 넥타이 없는 흰색 와이셔츠. 딱 봐도 경호원이라고 명찰을 달고 있는 것 같은 여자였다.
그럼에도 균형이 잡힌 몸매에 얼굴도 잘 생긴 여자였다. 그냥 스치듯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보이시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짧아서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여기 선도일씨. 이제부터 세진 자네와 함께 생활하게 될 사람이지. 다른 것은 몰라도 도일씨는 믿어도 되네. 위험한 순간 그가 자네 대신에 죽어 줄 사람이니 말이야."
"..."
정진이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선도일은 고개만 까딱 거리며 인사를 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180 정도의 건장한 체격에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는 선도일도 꽤나 미남이었다.
세진이 얼굴을 보고 사람을 뽑아 온 것은 아닌가 하는 헛생각을 잠시 할 정도였다.
"자, 그럼 김박사님 일단 세진씨가 해야 할 일부터 이야기를 하시죠. 이렇게 처음 만났다고 우리가 회식을 즐기며 웃음꽃을 피울 상황도 아니지 않습니까?"
"네? 네. 그렇군요. 어쨌거나 박세진씨 만나서 반가워요. 이미 소개했지만 김혜인이에요. 이거 보셨죠?"
김혜인은 자신의 노트북을 펼쳐서 화면을 띄웠다.
이전에 봤던 세일 주식회사에서 보냈던 설계도 중에 하나가 거기 있었다.
"벌레죠. 작은 바퀴벌레."
"맞아요. 그런데 이걸 만들 수 없다고 하셨다면서요?"
"그 설계도에 있는 가장 작은 부품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세진은 김혜인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0.4미리 정도 되죠."
"그런데 그 0.4미리 짜리도 홈을 파고 톱니를 깎고 구멍을 뚫어야하는 거죠? 그렇죠?"
"네. 맞아요."
"그래서 그건 0.4미리 부품이 아니라 0.02미리의 부품이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그걸 우리 팀원들에게 만들어 내라고 하는 건 불가능에 도전하란 소린데, 사실 도전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 끝날 도전인지는 알 수 없죠. 그래서 그런 경우 우리는 제작 불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최소로 0.1미리까지만 가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단위도 만들었다고 알고 있어요. 아닌가요?"
"맞습니다. 처음 선보인 메르세데스 벤츠가 그런 거였죠. 하지만 그건 일종의 광고용 모델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일주일에 만들 수 있다면 그건 2년이 걸려야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란 소리죠. 또 그만큼 실패도 많이 해야 하는 거고 말입니다. 설마 우리가 2년에 바퀴벌레 한 마리를 만들어 내기를 원하는 겁니까?"
세진의 질문에 듣고 있던 김혜인은 물론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서대철도 인상을 찌푸렸다.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시간과 노력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든다는 소리인 것이다.
"좀 더 인력을 투입하고 장비를 확충하면..."
"박사님!"
세진은 이어지려는 김혜인의 말을 끊었다.
"박사님은 스위스 시계가 왜 비싼지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그건 그 장인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마 우리 미니어처 같은 것을 다른 이들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장담하건데 세계를 뒤진다고 해도 우리 팀과 같은 팀을 구성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사람과 장비를 늘리면 그게 가능할 거란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군요."
"마치 박세진씨 팀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도 되는 듯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야 당연히 그러니까요. 아니면 김박사님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고, 제가 경호원과 함께 생활하게 되지도 않았을 테지요."
세진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으로 김혜인을 쳐다봤고, 김혜인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세진을 봤다.
서른이 되기 전에 벌써 박사 학위가 두 개나 되는 혜인이다.
당연히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진이란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자부심을 가진 듯 하다. 자신의 팀에 대해서 말이다.
"박세진씨도 어리 공방의 팀원이니 뭔가 하는 일이 있겠죠?
박세진씨는 어떤 것을 담당하죠?"
혜인은 세진이 어쩌면 단순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뭔가 손상이 된 것 같은 자존심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은 혜인이다.
"알려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작업을 같이 하려면..."
"작업은 주문서를 받으면 제가 알아서 진행을 합니다. 그리고 결과물이 나오면 이곳에서 김박사님께서 확인을 하시고 수정 사항이 있으면 새로 주문서를 수정해서 주시면 됩니다. 함께 할 일은 그것뿐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 언제 일을 해요? 그 때, 그 때, 확인을 하고 처리를 해도 늦을 텐데..."
"그게 싫으면 다른 제작자를 찾아보시면 됩니다.
설마 이런 방법으로 제 팀원들을 파악하려고 한 겁니까? 그럼 실망할 겁니다. 참, 한가지 더 확답을 드리죠. 이 바퀴벌레는 제작이 불가능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최소 0.1미리 단위까지 부품의 크기를 키우십시오. 그래야 제작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럼 바퀴벌레가 얼마나 커져야 하는지 알아요?"
김혜인이 세진의 말에 발끈하고 소리를 질렀다.
"부품을 줄이십시오. 그 작은 벌레에게 들어가는 부품이 뭐가 그렇게 많습니까? 정말 그렇게 세밀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모두 있습니까? 이런 작은 벌레는 동작의 정교함보단 간소화가 더 중요한 거 아닙니까?"
세진은 그렇게 김혜인에게 쏘아 붙였다. 조금 더 뛰어난것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세밀하게 한 것은 좋지만 아주 작은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부품들이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것이 이전에 어리와 세진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건 개선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
"뭐라고요?
지금 제 설계가 잘못되었다는 건가요?"
"잘 되었죠. 그것도 너무 잘 되긴 했는데 현실성이 없죠. 만들 수가 없는 설계도 아닙니까? 만들지 못할 설계도가 완벽하면 어디 씁니까?"
세진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김혜인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혜인은 세진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씹었다.
사실 혜인이 욕심을 부린 것도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몇 개의 톱니를 빼면 움직임이 조금 단순해지긴 하지만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바퀴벌레의 배에 작은 바퀴를 다는 것을 설계한 것에 비하면 지금 설계도에서 수정을 해서 부품의 수를 절반으로 줄인다고 해도 실용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부품의 내구성을 생각해도 더 좋은 선택이다. 다만 혜인은 좀 더 뛰어난 완성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의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여기,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도."
세진은 노트북 화면의 설계도의 몇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곳들은 부품 열 개 중에 세 개는 빼도 되는 곳입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다른 것들의 크기를 키울 수 있게 되죠. 그건 또 내구성이 늘어나는..."
"됐어요. 그런 이건 어때요?"
혜인은 세진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새로운 설계도를 화면에 띄웠다.
"으음."
세진은 화면에 집중했다.
같은 바퀴벌레 설계도였지만 확실히 덜 복잡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건 전에 이야기한 그 작은 부품이 없는 것 같군요?"
"맞아요. 없어요."
"그럼 최소 부품이..."
"그쪽 계산 방식으로 하면 0.09정도 되죠."
"그럼 조금 더 크게 만들면 되겠군요. 바퀴벌레는 이보다 큰 것도 있으니까요."
"이익.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우리 규칙이 0.1 이하는 만들기 어려우니 만들지 말자거든요.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죠. 여기 있는 것들 전체적으로 10%정도 크기를 키우면 되겠네요. 그렇게 수정해서 작업 들어가죠. 그 설계도를 홈페이지에 주문서와 함께 넣어 주십시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들어가는 컨트롤박스하고 동력장치, 그리고 이걸 움직이는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그쪽이 비밀이 있는 것처럼 이쪽도 있는 거죠."
"그걸 어떻게 만드는지 묻는 것이 아니거든요? 일단 시험을 해야 하는데 그럼 그걸 가지고 와야 조립을 하죠. 그리고 여기서 실험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일단 한 세트라도 꺼내 놓고 가십시오."
이번에도 세진의 판정승이었다. 혜진은 예상했다는 듯이 코트 주머니에서 렌즈통 같이 생긴 것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겁니까?"
"맞아요."
"그런데 동력 장치가 안 보이는데요? 그리고 운용 프로그램은요?"
"운용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으로 보내드리죠.
스마트폰 앱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거니까요. 도청이나 영상촬영 같은 것도 그걸 통해서 하는 거죠. 물론 그 기기를 장착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그 연동까지 성공해야 연구가 끝나는 거예요. 그건 지금 작업 중이죠. 물론 벌레에 들어갈 동력 장치도 우리가 만들고 있어요."
아직 쓸모가 없다는 소리다. 바퀴벌레에 영상과 음성을 읽을 수 있는 장치와 그것을 송신할 수 있는 장치를 달아야 하는데 아직 연구중이란 소리다.
거기다가 동력 장치는 아직 만들지도 못했단다.
"정작 중요한것은 아직 준비도 안 된 상태란 말이군요. 그런데 벌레가 뭐 그리 급하다고 이러는 건지."
"거의 다 끝났..."
김혜인은 발끈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연구 진행 과정은 비밀에 속하는 것인데 홧김에 떠든 것이다.
"뭐 모두 함께 연구하는 사인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김박사님.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 주십시오."
서대철이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차라리 동력 장치의 설계도도 주십시오. 컨트롤 박스는 전자칩이니 그쪽에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동력 장치는 톱니가 들어가고 초소형 모터도 들어가는 건데 그쪽에서 만들 수 있습니까?"
"모터는 전자모터예요. 코일을 쓰지 않는 거죠. 그리고 톱니 정도는 우리도 어떻게든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설계도 줘 보시라고요.
이쪽에서 만드는 것이 빠른지 박사님 팀이 빠른지 보게 말입니다."
세진은 그렇게 요구했고, 결국 김혜인 박사는 동력장치의 설계도까지 꺼내놓고 말았다.
서대철 과장은 그 모습을 보면서 책상물림인 김혜인이 박세진과의 1차전에서 거의 완패를 했다고 판정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만날 일이 많은 두 사람이 조금은 더 사이가 좋아지길 바라기도 했다.
요원해 보이는 바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