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먼지 쌓인 타지마할과 불청객 -- >
-그러니까 그 거버너와 탄제라는 사람들하고 발견한 테멜이라는 곳을 팔아넘기곤 곧바로 레트시로 돌아와서 복귀를 하신 거네요? 그래도 1년 넘게 계시다 오신 거란 말이죠?
"그렇지. 넌 순간이지만 나는 참 오래 있다가 온 거지."
- 그런데 각인이 안 된다고요? 세진님에게 직접 각인은 안 시켜 준다고 했담서요?
"아, 그거? 그렇지. 생체에테르바디가 있는 상태에선 본체엔 각인을 해 줄 수가 없다더구나. 이전에는 했었다는 데 아무래도 생체에테르바디가 생긴 이후에는 인류가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 생긴 모양이야."
세진은 헌터룸을 관리하는 시스템에서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
"생체에테르바디를 이용해도 코어 수급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일반인들을 초인으로 만드는 건 제한을 둔 모양이지. 그것 때문에 라훌헌터들도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다 행성으로 이주를 시키고 생체에테르바디를 줘서 헌터가 되게 하는 건지도 모르지."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아니, 그냥 내 생각이야. 정확히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내 몸에 여러 기술들을 각인해 달라고 했을 때, 거부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 하지만 생체에테르바디가 없는 상태에선 각인을 해 준다면서요? 그럼 그건 세진님 생각이랑 다른 거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우선순위의 차이 아닌가 싶어.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가르쳐준다는 뭐 그런?"
- 그런 걸까요?
"모르지."
- 그게 뭐예요. 모르다니요. 근데, 그래서 그 뒤엔 그냥 오신 거예요?
"아니. 일단 영구 회복 캡슐을 복용했지. 노화 방지가 되는 걸로 말이다.
문명 수준에 엄청 차이가 나지만 그건 일단 내 몸에만 적용이 되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리고 널 위해서 에테르 저장 장치를 사왔지."
- 에헤, 그러시구나. 그럼요, 이젠 세진님은 안 늙는 거예요? 그런데 언제 또 가실 거예요?
"신체 노화가 많이 줄어든다고 했으니까 잘 안 늙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가는 거야 우리 어리가 배가 고프게 되면 가야지. 이번에 사온 저장 장치를 다 쓰게 되면 말이다."
- 하지만...
"응? 뭐?"
- 아니에요. 그럼 이제부터 다시 타지마할 궁전을 만드는 건가요?
"음? 타지마할 궁전?"
세진은 어리의 말에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 네. 이제 절반 이상 만들었으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오래지 않아서 끝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서둘러서 만들어야죠. 선정씨에게 고백한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그랬어."
어리의 말에 대답하는 세진의 표정에는 넋이 나간 듯 했다.
- 왜 그래요? 세진님? 세진님, 정신 차려요.
"아, 괜찮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세진이 어리를 보며 중얼거린다.
- 뭐가요? 웃기면 웃어야지 표정이 왜 그래요?
어리가 세진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묻는다.
"여기 있는 타지마할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내 마음 속의 타지마할은 먼지가 잔뜩 앉았다.
하하하. 먼지가 잔뜩 끼었어. 하하핫."
세진은 혼자 목청을 높여서 웃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선정이란 여자를 잊고 있었지?'
'갈 때에는 잊을까 두려워했는데 어느 틈에 그것조차 잊고 살았단 말이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더니.'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나면 알겠지. 내 이상형인 그 여자를 보고 다시금 내 가슴에서 뜨거움이 끓어오르는지 아니면 식어 버린 마음에 변화가 없는지. 다시 보게 되면 알겠지. 그렇겠지.'
세진은 심선정을 다시 만나면 예전에 가졌던 그 갈망들이 다시 피어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기원했다. 단 하루 만에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여인을 잃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에 잠긴 세진을 이번에는 어리도 방해하지 않았다. 세진에게 심각한 고민이 있음을 늦게나마 알아 본 것이다.
선정은 시간에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일부러 몇 분 늦게 들어가는 짓은 이제부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조금 더 세진에게 곁은 내어 줄 생각을 하고 나온 길이었다.
세진은 창문 가까이 있는 탁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놓고 뭔가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선정은 그런 세진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세진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자, 활짝 웃으며 세진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미안해요. 늦었어요."
"아니요. 안 늦었습니다. 제가 일찍 나왔죠. 그런데 피곤하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퇴근하고 곧바로 온 거잖습니까?"
"괜찮아요. 매일 오가는 길인데요, 거기다가 회사에서 운행하는 출퇴근 버스가 있어서 갈아탈 필요도 없고요. 내려서 집에 갈 때는 걷거나 마을버스 타면 되는 걸요. 거기다가 이 카페는 회사버스 정류장과 가깝기도 하고요."
선정은 오늘따라 자신이 말을 많이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별로 그러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변명을 하며 이유를 찾아보려했지만 혼자 생각에 잠겨서 세진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라 다시 세진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선정의 눈에 비친 세진이 뭔가 이상했다.
'뭐지?'
선정은 세진이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세진이 선정에게 뭔가 달라 보였다.
"아, 네. 다행이네요. 그럼 차는? 아, 아직 식사 전이죠? 차는 식사 후에 마시기로 하고 우선 굶주린 배부터 채우러 갈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세진은 예전과 다름없이 선정에게 이런 저런 배려를 하며 또 주도권을 쥐고 일정을 진행해 나가려 한다. 겉으로 표시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이 세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긴 하네요. 그럼 우리 가까운데 가서 회 먹을까요? 그러면서 간단하게 한 잔 하고요."
"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술? 괜찮겠어요?"
"어머나, 세진씨 저한테 술을 얼마나 먹이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간단하게 먹으면 되잖아요."
"그, 그런가요? 하하하. 제가 술을 자주 먹지는 않는데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마실 때에는 두주불사라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죠. 그게 뇌리에 남아서 그런 겁니다. 선정씨처럼 좋은 사람과 먹으면 엄청나게 많이 먹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하핫."
세진이 뒷머리를 긁으면서 그렇게 변명을 하는데 선정은 그런 세진의 모습에서도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이전에 없던 뭔가가 세진이란 사람에게 생긴 것 같았다.
'아닌가? 있었던 것이 없어진 걸까?'
선정은 이상하게 편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딱 꼬집어서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이어서 스스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 세진을 만날 생각을 하다가 잠을 설친 탓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세진의 변화를 자신의 탓을 여기고 넘어갔다.
세진은 선정을 이끌어서 마을 입구에 있는 횟집으로 갔다.
서울에서 구리를 지나는 대로변에 있는 횟집은 주로 차를 끌고 온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횟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을 먹는 이들은 대부분 대리운전을 부르던가 아니면 근처 모텔에서 밤을 보낼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세진과 선정처럼 근처에 집이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모텔을 노리고 온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이곳의 진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도 남녀가 쌍을 이뤄서 찾은 이들이 많다.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남녀는 탁자를 마주하고 방바닥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시끌시끌하다.
세진은 그런 분위기를 선정이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 선정에게 물었다.
"많이 시끄럽네요. 괜찮겠어요? 이런 분위기?"
"네. 좋잖아요. 활기도 넘치고요."
의외로 선정이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세진은 선정을 데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석을 챙겨 서로에게 건네며 쑥스러워 웃는 일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선정씨 회 좋아하나 보죠?"
"네. 전 고향이 여기라서 회를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회사 생활 하면서 회식하고 그러는데 언제나 고기만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부서별 회식에서 횟집을 갔는데 그게 그렇게 맛이 있더라고요. 그 뒤로는 아는 사람들 끌고 횟집 다니면서 골라 먹고 그랬어요. 어려서도 부모님이 횟집 같은 곳에는 안 데리고 가셨거든요. 대학 때엔 먹기도 한 것 같은데 맛을 몰랐고요."
"그래요? 그럼 여기도 와 봤겠네요?"
"네. 집에서 가까우니까 가끔요."
"여긴 어때요? 선정씨가 내린 평가로는요?"
"회는 중간, 찌께다시 아, 밑반찬이라고 하죠? 그건 상급. 대신에 여기 막걸리는 최상급이에요. 양이 얼마 안 되는데 오늘은 우리가 일찍 왔으니까 있을 거예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설마 그 막걸리 먹고 싶어서 여기 오자고 한 겁니까?"
"호호, 막걸리가 다 좋은데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먼 곳에선 못 먹어요. 그리고 여기처럼 맛있는 곳도 드물고요."
"막걸리 먹고 취하면 어쩐다는 소리가 있는데 걱정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에요?"
선정의 커다란 눈동자가 뿔테 뒤에서 귀엽게 빛난다. 세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굳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느꼈다.
예전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정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얼어붙은 심장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닙니다.
그냥 그런 말이 있습니다. 하하하."
'막걸리 먹고 취하면 애비애미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다고 어떻게 내 입으로 이야길 하냐고.'
세진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그 사이에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선정과 함께 의논해서 광어와 우럭을 섞어 회를 시켰다.
"좀 양이 많지 않아요?"
선정이 둘이 먹기엔 과하게 시킨 것이 아닌가 하면서 세진에게 물었다.
"제가 지금 무지 배가 고프거든요. 그러니까 회로 배를 채워볼 생각입니다.
하하핫."
"네? 점심 안 드셨어요?"
"작업을 하다보면 가끔 끼니를 거를 때가 있습니다. 잊어버리는 거죠."
"아, 그렇군요. 그래서 오늘 그러셨다는 말이죠?"
"네."
"그래서 오늘은 뭘 만드셨어요?"
선정은 세진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이전에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같은 소품을 만든다고 듣고 지나고 말았는데 이젠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것들이 매우 고가에 거래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없던 관심도 생길 법한 일이다.
"작은 소품들에 들어갈 부품들을 몇 개 만들었죠. 아실지 모르지만 저희 공방에서 만드는 물건은 요만한 자동차도 시동이 덜리고 기어변경이 되고 그러거든요. 그러자면 안에 들어가는 부품들이 정말 정밀해야 하는 거죠. 대충 0.1미리 단위까지 정확하게 만듭니다.
사실 그 이하로는 좀 어려워서요."
손으로 미니어처 자동차 크기를 어림하며 세진이 설명을 한다.
세진은 사실 어리가 그보다 더 세밀한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처음 벤츠를 만든 이후로는 0.1미리 단위 이하로는 가공하지 말도록 이야기를 해 뒀다.
사실 그 이하로 만드는 것은 세진의 공방에선 불가능한 일이어야 하는 거다.
"어머, 그렇군요. 그게 시동까지 걸리고 그런 거였어요?"
"네. 만들기가 까다롭죠. 사실 저도 최종 마무리를 하는 거지. 저 혼자 만드는 건 또 아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직원인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
"아뇨. 직원이 아니라 이를테면 지분을 나누어가진 동업자 정도 될까요?"
세진은 이야길 하다 보니 거짓말을 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예전부터 내세우던 가짜 동업자들을 이야기에 등장시켰다.
선정은 어리 공방 홈페이지에 있던 수익을 전부 세진이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데 내심 아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정은 세진에게 조금 더 다가서기 위해서 이런 저런 질문들을 기분 나쁘지 않을 범위 내에서 물어 봤고 세진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선정의 질문에 참과 거짓을 섞어서 적절하게 대꾸하며 좋은 자리를 가졌다.
회와 곁들여 먹은 막걸리 때문에 차를 마시기로 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되었지만, 세진과 선정은 횟집에서 나와서 집이 있는 내골까지 어두운 길을 걸어 들어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들 이야기며, 가족 이야기, 직업에 대한 이야기와 미래의 삶이 어떠했으면 하는 바람에 대한 소견, 취미나 여가 활용에 대한 이야기까지.
두 사람은 걸으면서, 앉아 쉬면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그렇게 이전보다 좀 더 깊고 세세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길을 걸어 선정의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살짝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선정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진은 심장이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다시 뛰는 것에 대해서 감사했고, 선정은 다음에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냄새나는 막걸리는.
선정은 세진이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않은 것이 냄새가 심한 막걸리를 마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쓸었다.
현관 틈으로 세진이 공방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선정은 고양이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