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36화 (36/298)
  • < -- 먼지 쌓인 타지마할과 불청객 -- >

    심선정은 요즈음 만나고 있는 박세진에 대해서 생각했다.

    등산로에서 뜬금없이 나타나서 호감을 표시한 세진에게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이 끌렸던 것은 아니다.

    그거 거부감이 없었던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뭐하는 사람인가 싶은 호기심 때문에 카페에서 차 한 잔 하자는 말을 받아 들였던 거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같은 마을에 공방을 차려 놓고 수작업으로 만든 미니어처를 파는 사람이었다.

    참 독특한 직업도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걸로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의 공방 홈페이지를 방문하고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것 아닌 미니어처도 격이 달라지면 가격도 달라진다는 것을 정말 절실하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정확한 가격은 나와 있지 않고, 따로 개별적으로 협상을 한다고 되어 있지만 게시판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적어 놓은 액수는 선정의 상상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선정이 제법 잘 나가는 회계 법인의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녀의 연봉을 몇 년 모아야 할 액수가 미니어처 하나의 가격으로 오르내리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쨌거나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세진이라는 사람이 이전보다 훨씬 매력 있는 사람으로 다가왔다.

    사실 선정은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세진의 기세에 놀라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 한순간에 화르륵 타올라 버릴 것 같은 열기가 세진에게서 느껴졌다. 그는 마치 돌진하는 기관차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세진은 자신의 이상형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 아니냐고 도리어 반문을 했다.

    그는 선정에게 너무도 열정적이었다.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가슴 속의 열정은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것은 선정과의 잠자리 같은 육체적인 것에 대한 욕심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며, 만지고 싶어 하는, 세진은 선정에게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이였다.

    그것이 너무도 확연히 눈에 보여서 선정은 세진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사람도 좋았고 마음도 진솔해 보였다.

    하지만 작은 공방을 운영하는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진과 일부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면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리 공방의 홈페이지는 그런 선정의 생각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세진은 이전보다 훨씬 매력 있는 남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엄청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며 기대하라고 했을 때, 선정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대체 저 사람이 준비한다는 것이 뭘까?'

    '저 닿으면 데일 것 같은 뜨거움으로 내게 해 주려는 것이 뭘까?'

    '나는 그것을 받으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지금 그에게 두고 있는 거리를 조금은 줄여 줘야 하는 걸까?'

    선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남모르게 달아오르는 뺨을 손으로 비볐다.

    선정은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내일은 그 남자가 또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두근거리게 할 지 상상해 봤다.

    그는 단지 그 이글거리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선정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고, 더구나 그의 능력은 선정이 상상하던 이상의 삶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후훗."

    선정은 무릎을 끌어 앉고 앉은 자세에서 모로 쓰러져 침대에 뒹굴며 웃었다.

    세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조금씩 좋아지던 사람이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속에 있던 망설임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 정말이에요? 정말?

    "자, 봐라. 정말인지 아닌지."

    세진은 같은 말을 되묻는 어리에게 에테르 저장장치를 내 보였다.

    자기마치 10만 에테론짜리 저장장치다.

    - 우와, 우와, 나, 나 이거 먹어도 되요? 네?

    어리가 세진이 내미는 저장장치를 보고 잔뜩 흥분했다.

    "너 에테르 먹고 얼마 안 지났거든? 그런데 뭘 또 먹어?"

    - 그건 세진님이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건데요. 저 언제나 배가 고팠거든요?

    "그 말은 전에 줬던 걸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했는데 억지로 참고 있었다는 거냐?"

    세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 히잉, 그건 아니고요. 그런 거 있잖아요. 많이 넣어 둔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여유 공간은 엄청나게 많은 거요. 그러니까 꼭 더 필요하진 않아도 들어갈 공간이 많으니까 배가 고프다고 한 거죠.

    "그 말은 네가 활동하기엔 충분한 에테르였지만 그걸로 네 저장 장치가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말이냐?"

    - 빙고! 바로 그거라지요.

    "그럼 이거 한꺼번에 다 흡수하는 것도 가능하냐?"

    세진이 10만 에텔론을 주고 구입한 저장장치를 내보이며 물었다.

    - 그래야 해요?

    "응?"

    - 그냥 천천히 녹여 먹으면 안 될까요? 한 번에 흡수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히잉.

    "할 수는 있는데 때때로 먹고 싶을 때에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말이냐?"

    - 그렇죠. 바로 그 말이죠. 야금야금 조금씩이라도 에테르 먹고 있으면 정말 뭔가 충족되는 기분이라구요. 묘하게 좋은 거죠. 그런데 한꺼번에 먹어 버리면 아깝잖아요.

    "그래. 알았다. 필요하면 이야기해라.

    조금씩 먹도록 해 줄 테니까."

    - 에이, 왜 또 그러세요. 그냥 가까이 두시면 제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도 있고, 또 에테르가 많이 필요할 때에도 급하게 쓸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제 옆에 두세요. 네?

    "니가 에테르를 많이 필요할 때가 뭐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

    세진은 어리가 괜한 소리를 한다고 타박을 했다.

    - 그거야 지금까지는 에테르가 무지 모자르니까 아낀다고 그런 거죠. 하지만 이제 에테르가 제법 있으니까 쓰지 않았던 기능도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러자면 에테르가 많이 필요하니까 저장장치를 곁에 두라는 거고요.

    "응? 쓰지 않던 기능? 그런 게 있었어?"

    - 있기야 있죠. 하지만 그게 에테르를 너무 먹으니까 세진님 가지고 계셨던 저장장치로는 어림도 없어서 말씀 드리지 않은 거죠.

    "그래. 그렇다고 치고, 그 기능이란 것이 뭔데?"

    세진은 어리가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기능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다.

    에테르를 많이 소비한다는 그것이 무엇일지 상상하느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 에헴, 제일 먼저, 자가 복구 기능이 있어요. 제가 합당한 에테르를 가지고 있다면 제가 어느 정도 훼손이 되더라도 복구가 되죠.

    "그거 좋은 기능이구나. 그럼 그 정도 에테르는 당연히 항상 예비로 남겨 둬야지. 음. 그래, 그건 꼭 모아 둬야겠다.

    그래야 우리 어리가 무서움을 덜 타지."

    - 정말이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되요? 세진님이 가지고 오신 저장장치 삼분의 일 정도는 모아 둬야 하는데요?

    "그, 그러냐? 그거 굉장하구나. 자그마치 3만 에텔론을 들여야 복구준비를 해 둘 수 있다니 말이다. 뭐 그래도 괜찮다.

    일단 빠른 시간 안에 흡수해서 저장해 두자."

    - 네에! 고맙습니다아. 세진님. 세진님은 정말 좋은 분이신 것이에요. 저는 세진님께 무지무지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 그래. 알았다. 그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다른 기능도 있냐?"

    - 있습니다.

    에테르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합니다.

    "응? 뭐? 뭐라고? 원거리 공격? 그게 무슨 말이야?"

    - 제 본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장치는 에테르를 이용한 본체 보호막입니다.

    그건 전에 조기 축구에서 사용했었습니다.

    "너 갑자기 말투가 왜 그러냐?"

    - 에테르 공격 장치는 냉정한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해서 사용을 결정해야합니다.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지금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평소엔 정신을 바짝 차린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이 하고 있는 거냐?'

    세진은 속마음을 절대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은근히 뒤끝이 있는 어리인 것이다.

    "좋아. 그럼 그게 어느 정도 위력인데?"

    - 제 본체를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내에 있는 대상을 타격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 그런데 그거 투사형이냐 아니면 발동형이냐?"

    - 그게 뭔지 설명을 해 주셔야 답변이 가능합니다.

    어리는 투사형이나 발동형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세진도 말을 해 놓고는 자기만 알 수 있는 개념이란 생각에 머리를 긁었다.

    세진이 투사형과 발동형에 대해서 어리에게 설명했다.

    투사형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을 쏘아내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고, 발동형은 범위나 지점을 선정해서 그곳에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집 밖에 있는 대상을 공격하면 투사형의 경우에는 그 목표까지의 중간에 있는 벽이고 뭐고 가로막는 것은 모두 뚫고 지나가야 공격에 성공할 수 있지만, 발동형은 가로막는 것이 뭐가 되었건 상관없이 목표한 지점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원래 데블 플레인에서 정신능력자들의 공격 방법을 분류할 때 쓰는 단어인데 그것을 어리에게 물었으니 어리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두 형태 모두 가능합니다만 발동형의 경우 에테르 소비가 두 배 정도 심합니다.

    세진의 설명을 모두 들은 후에 어리는 두 형태 모두 가능하다는 답을 내놨다.

    "어쨌거나 만약의 경우 침입자가 있어도 우리 어리가 모두 해결을 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 세진님의 명령에 따라서 인류 개체에 대한 말살까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지님께 위험이 닥치는 상황이 아니면 살인 명령은 자제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

    저는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능은 하지만 원하진 않는다? 좋아. 우리 어리가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지. 내가 도리어 우리 어리를 지켜야 하는데 말이지."

    - 정말이요? 정말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세진이 어리를 아낀다는 말에 어리는 단번에 말투를 바꾼다.

    "그래도 침입자가 있으면 제압하는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어리도?"

    세진은 그 틈을 타서 조금이라도 일을 더 시키려는 꼼수를 부린다. 지금도 공방에는 네콤인가 하는 시스템이 있지만 어리가 직접 감시를 하는 것이 너 나을 것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 에? 뭐 그런 거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에헴. 이 어리의 집은 당연히 어리가 지키는 거예요.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또 다른 기능은?"

    - 앞의 기능 때문에 필요한 건데요, 반경 80미터 정도를 탐색하는 기능이 있어요. 주기적으로 에테르 파장을 쏘아서 감시를 하는 기능이죠. 이건 에테르가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지만 이전엔 그나마도 에테르가 아까워서 쓰지 않았는데 이제 정말 필요한 기능이 되었어요. 이게 있어야 목표를 선정하고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좋구나. 그럼 이제 우리 어리가 이 집을 지키는 수호자가 된 거네?"

    - 그런 것입니다. 어리는 어리 공방의 수호신이 될 수 있게 된 것이에요. 멋진 일이에요. 어리는 어리 공방을 지킬 것이에요.

    "그래 그러려므나."

    - 그런데 세진님.

    "왜?"

    - 정말 그게 가능한 거였어요? 어리는 정말 놀랐어요. 세진님은 정말 어디 갔다 오신 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금방 나타나셨어요.

    "그러냐? 내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냐."

    - 그럼 정말로 오래 있다가 오신 거예요? 얼마나 있다가 오셨어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에텔론 많이 벌었어요? 네? 이야기 좀 해 줘요. 세진은 옛 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는 아이 같은 어리의 보챔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어리 곁에 의자를 끌어 놓고 이번 데블 플레인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