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23화 (23/298)

< -- 조기 축구와 어리의 상관관계 -- >

- 일 해야 한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방으로 들어온 세진에게 어리가 말을 걸었다.

- 그런데 재료는요? 가지고 오셔야 제가 작업을 하죠.

"아, 그렇지. 홈피 생각만 하다가 그걸 잊었네. 알았다.

가지고 오마."

- 빼먹지 말고 다 가지고 오세요.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뭐 만들 차례지?"

세진이 공방으로 되돌아가려다 말고 어리에게 물었다. 무얼 만들지에 따라서 준비해야 할 재료가 다른 것이다.

짜잔, 오늘은 전혀 새로운 걸 만들 차례죠. 그 이름하여 알렌네스! 두두둥!

"알렌네스? 그 오토바이 커스텀?"

- 노노노. 오토바이 No. 모러사이클 OK?

"장난치면 나 화낸다?"

- 알았어요. 아무튼 오늘 만들 건 알렌네스가 2000년대 들어서 커스텀해서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에요. 이건 정말 순수 소장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연락이 온 거였죠.

"그러니까 그쪽에선 다른 회사들처럼 힘들게 만든 물건을 부수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 네. 아마도요.

세진은 어리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세진은 어리가 만드는 미니어처에 대해서 상당한 애정이 있었다.

세상 누구도 만들지 못하는 명품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걸 사간 곳에서 완전 해체해서 결국 고철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합금과 유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미니어처를 주문한 회사들이 많다는 것을 세진도 알고 있었다.

미니어처의 가격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니어처 하나에 5억 이상을 부르는 것은 거의 그런 이유라고 세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세진이 그러하듯 미니어처의 가치만 놓고 그 가격을 지불한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이번에 만들 것은 순수 소장용일 가능성이 높다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좋아. 그런데 설계도도 함께 왔던가?"

- 처음에는 사진만 왔었는데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메일을 보냈더니 대외비라면서 설계도도 왔어요. 뭐 어차피 커스텀이란 것이 수작업이라도 기존 부품의 개량인 경우가 많으니까 설계도가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지만요.

"그래도 대외비는 대외비니까 보고 바로 지워. 외부 유출이니 뭐니 하는 소리 안 듣게."

- 당연하죠. 이미 삭제했답니다. 기억은 오로지 저에게만 있는 거어죠. 호호홋.

어리의 말투에 장난기가 묻어난다.

여전히 기분이 좋은 상태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세진이다.

"잘 했다.

그럼 기다려라. 가서 재료 가지고 오마."

- 네 세진님.

세진은 다시 공방으로 나와서 구석에 쌓아놓은 자루들을 살폈다.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다. 모두가 고물상에서 싼 가격에 사온 것들이다.

물론 어리를 생각해서 이것들은 다시 깨끗하게 씻고 닦아서 어리에게 준다. 워낙 까탈을 부리니 신경을 써야 하는 거다.

어리 곁에 붙어서 세진이 주로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다.

그래도 세진에게 어리는 최고의 조력자다. 또 성격이 바뀐 이후로 더 정이 깊어지는 것 같아서 변한 어리가 더 좋다고 느낄 때가 많은 세진이었다.

세진은 자루들 중에서 알렌네스라고 꼬리표가 붙어 있는 것을 집어 든다.

'내가 이걸 언제 준비를 해 뒀을까?'

세진은 요즘 너무 정신이 없다면서 머리를 흔든다.

무더운 여름에도 세진은 공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미니어처 주문을 받아 만들고 또 에테르 로드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중에 지하 창고도 몇 번 갔다 왔다. 아무래도 수련 진도가 막히면 석판의 내용을 참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리에게 석판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내용을 세진이 직접 다 불러주고 그림 같은 것도 모두 설명을 해 주면 가능할 거라고 해서 일찍 포기하고 말았다.

석판의 내용을 곧바로 어리가 읽어 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세진에 대한 대기업들의 관심이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건 세진의 예상처럼 어리가 만든 합금과 유리에 대한 비밀을 어느 기업에서 밝혀냈기 때문이었다.

세진은 그 특허를 누가 가지고 갔는지 모르지만 무척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리가 그 조합식을 정리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에 깊이 집착하는 성격이 못되는 세진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선 빨리 잊자는 생각으로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서 더운 날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어리의 조합법은 가능성에 비해서 경제성이 없어서 그 조합법을 알아낸 후에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어리가 물질을 분해하고 합성하는 수준이 지구의 수준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는 탓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진이 만든 미니어처는 높은 가격에 꾸준히 팔렸다.

상품성이 좋은 것도 있지만 일반 구매자를 가장해서 주문하는 회사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진의 미니어처에서 새로운 합성 물질을 찾아내는 작업과 함께 정교한 미세 공정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관심을 주는 정도였기 때문에 세진의 생활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어리 공방에는 기본적인 공작 기계에서부터 정밀 가공을 위한 기계까지 제법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었고, 세진은 그런 기계 작동방법을 익히면서 조금씩 어리의 일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세진이 하는 일은 대부분 커다란 틀을 만드는 정도라서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세진이 하지 못할 작업은 밖으로 외주를 주면 거의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크고 단순한 것들은 그렇게 외주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 중에서 외부로 팔려나간 것은 없었다. 그것들은 어리와 세진이 연습 삼아 만드는 것들로 완성 후에는 다시 분해해서 재료로 쓰곤 했다.

이후에 큰 작품을 만들기 위한 대비인 셈이다.

- 세진님, 우리 쉬어요.

한창 그라인더로 쇳덩이를 갈고 있는 세진의 이어폰에 어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곁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몸을 털어 내며 어리의 방으로 향했다.

"또 무슨 심술이냐? 갑자고 쉬자고 하는 이유가 뭐야?"

- 에, 세진님 미워. 어리 밥 주세요. 배가 고파요.

"응? 벌써?"

- 벌써라니요? 제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그러는데요. 그게 다 에테르를 잡아먹는다고요. 잘 아시면서 왜 그래요.

"그래. 그건 알지만. 이제 저장 장치도 두 개 뿐이야. 이번에 주고 나면 하나만 남는다는 말이지."

- 어엉, 그러면 안 돼요. 세진님 어서 가서 에테르 구해 와요. 네?

"야, 아직 두 개 남았다니까?"

- 하지만 불안하다고요. 저 죽기 싫어요. 히잉. 세진님. 에테르 떨어지기 전에 다시 많이 구해 올 거죠? 네? 네? 그렇다고 해요. 안 그러면 나 일 안 할래요. 최대한 아껴서 쓸 거예요. 말도 안하고, 일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 할래요.

"너 지금 나 협박하냐?"

- 히힝, 정말 저 무섭단 말이에요. 에테르 다 떨어지면 그러면... 흐아앙! 어떻게 해요? 세지니임!

"허휴, 이건 뭐 애를 하나 키우는 것도 아니고. 뚝! 어서 뚝!"

- 흐엉. 뚜욱! 흑흑.

세진은 어리의 반응에 머리가 아팠다.

어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을 아버지의 조기 축구 사건으로 완전히 잃어버리고 새로운 성격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성격이 형성될 때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에테르 부족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공포였다.

에테르가 떨어지면 외부 충격을 방어하지 못해서 어리 자신이 파괴되어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어리의 성격을 바꾸고 감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코드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에테르 부족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세진도 어리의 이런 모습을 두고 심하게 야단을 칠 수도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는 아이에게 무슨 야단을 친다는 말인가.

"어리야. 걱정하지 마라.

아직 두 개나 남았어. 자, 일단 이거 하나 먹고, 이거 하나는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자. 응? 남은 것까지 어리가 먹게 되면 내가 곧바로 에테르 구하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 하지마안, 에테르 다 닳을 때까지 세진님이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네?

"전에 이야기했잖니. 내가 에테르를 구하러 가는 곳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건 상관없다고 말이야. 여기 시간은 아주 잠깐만 지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 걸어가는 정도의 시간만 지나는 거지.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 그거 정말이죠? 믿어도 되는 거죠? 어디에도 그게 가능하다는 이야긴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도 믿어도 되죠?

어리도 우주의 신비 구역에 해당하는 그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좀처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미 경험을 했잖니. 그러니 믿어도 된다. 분명한 사실이니까 말이야."

- 네에. 저 세진님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서 에테르 구해 오셔야 해요. 그, 그리고요.

"왜? 뭐?"

- 정말 코어는 가지고 올 수 없는 건가요?

"안된다고 하던데? 왜?"

- 화이트 코어가 있으면요. 그러면 그걸 이용해서 에테르를 언제든 충전할 수 있으니까, 물론 등급이 좀 되는 거여야 하지만요.

"그러니까 높은 등급의 화이트 코어가 있으면 따로 에테르 저장장치가 필요 없다는 거지?"

- 네에.

"하지만 네게도 이야기 했지만 헌터룸의 관리프로그램이 코어는 절대 줄 수 없다고 했거든? 그러니 그건 어렵겠다.

그건 네가 이해를 해야 해."

- 아, 알았어요. 그럼...

"응? 뭐?"

- 아니요. 아니에요. 세진을 말을 하다가 마는 어리의 뒷말이 궁금했지만 아니라는 녀석을 억지로 다그칠 수도 없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 그럼 우리 산책이나 갈까?"

- 정말요?

"그래. 비록 어리가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내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찍으면서 가면 되잖니. 그러면서 대화도 하고."

- 좋아요. 네. 세진님. 우리 놀러 가요.

세진은 금방 밝은 목소리를 내는 어리를 보며 확실히 어리의 정신 연령이 어린아이의 것으로 고정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진은 요즈음 산책 잦다.

얼마 전에 어리를 위해서 산책을 나왔다가 등산로에서 봤던 아가씨 때문이다.

공방에서 작업에만 몰두하다보니 외유가 거의 없는 세진에게 여자와 얽힐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세진의 청춘에 곰팡이가 끼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날, 세진은 등산로를 걸으며 어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명의 여자를 봤다. 그리고 세진은 그 중에 한 여자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하얀 얼굴에 짙은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완전히 세진의 이상형이었다.

세진은 독특하게 안경을 쓴 여자를 좋아한다. 거기다가 뿔테가 어울리는 미녀라면 아주 홀딱 넘어갈 정도다.

물론 외형적인 조건을 이야기할 때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하필 산책로에서 그런 조건의 여자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세진의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거기다가 세진은 그 여자들이 세진의 동네로 내려가는 것까지 확인을 했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그 여자와 함께 있던 여자의 얼굴만 몇 번 봤을 뿐이다.

그래도 세진은 오늘도 등산로를 찾아 걷고 있었다.

어차피 에테르 로드 수련도 해야 하는데 산책을 하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수련을 하면 운동과 수련을 모두 할 수 있는 일석이조에, 그 여자와 만날 수도 있으리란 기대도 할 수 있으니 새 한 마리가 더해지는 것이다.

- 오늘은 있을까요?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 그러게요. 그런데 그냥 그 친구라는 여자에게 물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뭐 친군지, 동생인지, 언닌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며칠 더 기다려 보고 결국 못 만나면 그 여자에게 물어봐야지."

- 우와, 세진님 그럴 용기가 있어요?

"내가 왜? 아니 어째 거기서 용기가 나와? 내가 그렇게 소심해 보여?"

- 하지만 지금까지 산책이나 하면서 여자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보통은 함께 있던 여자에게 물어도 벌써 물어봤을 시간 아니에요?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기가 없어서가 아냐. 그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거지. 함께 있던 여자에게 물어서 알아내는 것과, 이렇게 산책을 하다가 뜬금없이 만나게 되는 것은 정말 다르지 안 그러냐? 자 봐라!"

세진이 스마트폰의 렌즈를 한 곳으로 향했다.

- 우와, 발견했어요. 대단해요. 정말.

어리의 호들갑이 이어폰을 진동한다.

지금 어리는 스마트폰으로 등산로의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진도 그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거기에 세진의 이상형 그녀가 있었다.

여름 더위를 서늘한 그늘 밑에서 씻으며 여자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있었다.

세진은 그녀가 뭘 하고 있건 그저 가슴만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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