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기 축구와 어리의 상관관계 -- >
"독립을 하겠다는 말이냐? 이제 와서?"
"이제 와서라기보다는 제 나이도 있고 하니 혼자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일을 하기 위해서도 개인 공간이 필요하고 말입니다."
"돈 좀 모아 뒀냐? 전에 이야기했지만 우리 돈 없... 엌."
"쓸데없는 농담 그만 해요. 그래 아들. 준비는 된 거니?"
'저렇게 말씀하시지만 결국은 노후 자금은 못 준다는 말씀이시겠지? 아무튼 내 부모님이지만 저럴 때에는 무섭다니까.'
세진은 부창부수 부모님의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두 분의 아들로 살아온 것이 벌써 몇 해던가.
"네. 어느 정도 자금은 있습니다. 회사에도 사표를 썼고, 구리 쪽에 적당한 집도 알아습니다.
허락만 하시면 바로 계약할까 합니다."
"구리? 그 쪽에 집을? 그거 사는 거냐? 아니면 전세?"
"구입할까 합니다. 아버지."
"오, 그거 좋다. 나중에 내가 은퇴하면 우리하고 집을 바꾸는 건 어떠냐? 아무래도 거기가 공기도 좋고 그렇... 아악. 꼬집지 좀 마!"
"근데 아들, 대출은 얼마나 받을 거냐? 내가 주지는 못해도 필요하다면 은행 이자보다 조금 싸게 빌려줄 수는 있는데?"
'어머니, 아들 상대로 이자놀이까지 하시렵니까?'
"괜찮습니다. 이번에 좀 들어온 돈이 있습니다.
세진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우리 아들이 어디서 그렇게 돈을 벌었을까? 봉급이라고 해봐야 빤한 데 말이지. 으응?"
"하하하. 어머니 제가 방에서 뭐 좀 만든다고 했잖습니까. 그게 제가 혼자 만든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 공이 크게 들어간 건데 이번에 그걸 몇 개 팔았습니다.
세진이 어설프게 웃으며 설명을 한다.
"그 상자에 들어 있던 거 말이니? 열어보지 말래서 안 보긴 했다만 그게 돈이 되는 거였어?"
'어리가 다 말했거든요? 어머니 그거 보시고 웬 장난감을 사다 모았다고 혀를 차셨다면서요?'
"그게 아주 정교하게 만든 물건이라서 굉장히 가치가 높은 물건이거든요. 분업 형식으로 일을 나눠서 하는 건데 제가 최종 마무리를 하고 판매를 맡아서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공이라고 가지고 나가셨던 그게 그 물건들을 만드는 공구함인 거죠."
"그 장난감 자동차들 비싼 거였니?"
'안 보셨다면서요?'
세진은 금방 들키는 어머니의 거짓말에 살짝 한숨을 쉰다.
"후우, 진짜 차만큼 비싸죠."
"저, 정말?"
"그 공이 그걸 만드는 공구함?"
아버지는 어리를 축구공으로 여긴 것이 많이 걸리는 듯 다시 확인을 한다.
"말이 공구함이지 실제론 중요한 장치들을 보관하는 거죠. 최종 점검을 위한 전자 기기도 들어 있고요."
"그, 그러냐? 그거 미안하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축구공인 줄 알고..."
세진의 아버지는 문과 출신이고 평생 서류만 만진 사람이라서 전자기기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는데다 일종의 두려움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기 축구에 들고 나가서 찼던 그 공 안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니 내심 켕기는 것이 많은 상황이다. 그래서 말까지 조금 더듬고 있었다.
"당신 그랬어요? 왜 그랬어요? 아들에게 중요한 물건을... 호호홋. 그래 아들. 그래서 너도 배당을 좀 많이 받았겠네? 아들 방에 상자가 열 개는 넘게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네. 그래서 그걸로 이번에 집을 사기로 한 겁니다. 어머니."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남은 돈은 없는 걸로 합니다.
'
"아드을, 그렇게 벌었으면 엄마 아빠 맛난 것도 사 주고, 옷이나 구두, 지갑 뭐 이런 거도 사 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니?"
하지만 세진의 바람과는 달리 직격탄을 던지는 어머니다. 이러면 세진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
최대한 손실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아하하. 어머니 왜 그러세요. 제가 여유가 되면 당연히 알아서 하겠죠. 어머니 아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여유가 없다? 하긴 다들 그러지. 여유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너도 세상 살아보면 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유가 생기는 때는 없더라.
봐라,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여유가 어디 있었니. 네 아빠가 벌어오는 쥐꼬리 같은 봉급으로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사는 게 그렇더라. 너 그래도 우리가 너 외아들이라고 얼마나 거둬 먹이고 입히고 했는지 알지? 응? 너 그 공을 무시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럼. 그럼. 이제 자식 놈, 결혼해서 며느리 봉양을 좀 받아볼까 했더니 덜컥 분가를 해서 따로 살겠다는 거 봐라. 우리가 아무리 우리 둘이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긴 했다지만 그게 말과 뜻이 같은 거였겠냐? 그런데 그걸 핑계로 분가를 하겠다고 저리 나서니 여보, 참 우리가 세상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그래요. 아들이 이럴 줄을 몰랐어요. 흐흑."
'어머니, 아버지 정말 왜 이러십니까. 연기 하시는 거 다 보입니다.'
쌍으로 아들 벗겨 먹기 작전을 굳이 의논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펼쳐 나가는 부모님이다.
세진은 살짝 한숨을 쉬고 그런 부모님을 달래기 위한 특별 대책을 머릿속에서 급하게 수립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제가 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다 아시면서. 그리고 제가 돈을 좀 벌었는데 어떻게 어머니 아버지를 잊겠어요? 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봄도 오는데 아버지 휴가에다가 어린이날에 주말까지 이용하면 시간 좀 내실 수 있잖아요? 그 때 여행이라도 가시라고 제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으응? 아들, 돈 좀 들 텐데? 또 그 땐 복잡하기도 무지 복잡하지 않을까?"
"국외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풀패키지로 하고, 거기에 봉투도 준비하겠습니다."
"커어엄. 그렇게 하겠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만, 그래도 네가 부담이 되는 건 아니냐?"
"큰 부담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세진은 절대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보이면 출혈이 더 커질 것이 분명한 것이다. 물론 이번에 미니어처 판매로 벌어들인 수입이 꽤나 많았다.
거기에 앞으로 계약이 되어 있는 미니어처도 상당히 남아 있었다. 이번에 회사를 그만두고 급하게 공방을 마련하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서 세진이 어리 곁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일의 대부분을 어리가 한다지만 어리를 보조할 사람이 꼭 있어야 했다.
어리에게 재료를 수급해 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어리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쓸 수가 없다.
가까이 있는 물건들은 에테르를 이용해서 움직일 능력이 있는 어리지만 그것도 근처 1미터 정도의 범위에만 해당이 된다.
그 이상 떨어진 것은 어리의 능력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에테르를 사용해서 물건을 다루는 것도 낭비라고 할 수 있다. 쓸데없이 에테르를 쓰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리가 무언가를 만드는 데는 적잖은 에테르가 소비된다. 그런데 그렇게 쓸데없이 에테르를 소비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세진이 어리의 보조가 되어야 일의 진행이 빨라지고 에테르 소비도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부터 외부의 시선이 몰리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면 그런 준비를 하는 것도 걸림돌이 많다고 여기는 세진이다.
될 수 있으면 부모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벌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구리 인근의 한적한 곳에 공방 겸 살림집을 마련하기로 했고, 거기에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한 방범장치에도 적지 않 투자를 계획하고 있었다.
[어리 공방(工房)]세진은 허리 어깨 높이의 담과 이어진 대문에 현판을 걸었다.
서둘러 일처리를 한 덕분에 5월이 가기 전에 이사를 마치고 정리까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일찌감치 아들 집을 구경하신다고 오셔서 이사 뒤처리를 해 주시고는 잘 해 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 가셨다. 월초에 보내드린 여행의 약발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세진이 꾸린 어리 공방의 구조는 서른 평이 조금 모자라는 살림집 옆에 창고 건물처럼 생긴 공방이 붙어 있는 모양이다. 그 공방은 살림집 거실에서 어리의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반대쪽 문을 열면 공방으로 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애초에 공방으로 통하는 방을 어리의 방으로 내어 준 것이다.
사실 공방 자체는 세진에게 별로 필요가 없는 공간이지만, 어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공방에 이런저런 제작 기구들을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정밀 가공이 가능한 수준까지 기구들을 채워 넣고 언젠가 어리가 만들지 못할 정도로 부피가 큰 부품은 직접 세진이 만들고 그 외에 작은 부품들은 어리가 만들어서 조립을 하는 방법으로 대형 물품의 제작도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공방에 기술자들도 고용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먼 날의 이야기다.
어쨌거나 지금은 세진과 어리 둘이서 운영하는 공방이고, 외부에는 세진과 팀을 이룬 사람들이 있는 걸로 알릴 어리 공방이 현판을 달았다.
"현판 달았다.
- 보여줘요. 보여줘요. 네? 세진님 보여주세요.
세진이 한 마디 하는데 어리는 수십 마디를 하는 것 같다.
세진은 어리가 보채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동영상으로 어리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어리와 세진이 통화를 하는 것은 무제한 요금제를 이용한 스마트폰 통화였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하다며 세진이 밖에 나갈 때에는 언제나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자고 조르는 어리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더니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그렇게 언제나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걸 해 달라고 얼마나 떼를 쓰던지, 결국 세진이 스마트폰 하나를 새로 개설해서 어리 곁에 놓아뒀다.
요즘 어리는 컴퓨터 보다는 그 스마트폰을 더 자주 들여다보고 있다.
더구나 가끔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꼬톡인지 깨독인지를 한다고 요란을 떨기도 했다.
그나마 자신의 정체나 세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미취학 어린이 노릇을 하는 것이 고맙다고 해야 할 세진이다.
- 멋져요. 어리 공방. 우와, 제 이름이 들어간 공방인 것이에요. 어리는 기분이 좋은 것이에요.
세진은 어리의
'것이에요.'
발언을 들으며 어리가 무척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턴가 어리는 기분이 좋을 때에 그 어말어미를 사용하곤 했다.
- 에헴, 이제 이곳은 이 어리의 집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세진님은 살림집의 주인, 공방은 이 어리가 주인인 것이에요.
"그래. 그래. 니가 주인이다. 사실 물건은 대부분 어리가 만드니까 어리가 주인인 거지. 맞다.
- 에헤, 고마워요. 세진님. 역시 세진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이제 현판까지 달았으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볼까?"
- 넵. 세진님. 이 어리도 준비가 다 되었어요. 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죠.
"그래. 그래."
세진은 다시 한 번 현판이 달린 대문을 보다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리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시키는 거지만 이번에 어리 공방에 대한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세진이었다.
하지만 그쪽으론 별로 재주가 없어서 외부 용역을 맡긴 상탠데, 그래도 거기 들어갈 사진이나 동영상, 소개 내용 같은 것들은 세진이 직접 작성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거기다가 어리도 홈페이지에 관심이 많아서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간섭을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그곳을 통해서 주문을 받을 생각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으래야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세진은 공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해서 다시 어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리의 방엔 중앙에 커다란 원목 탁자가 있고, 그 주변에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원목 탁자 위에 컴퓨터 화면과 스마트폰이 은빛의 어리와 함께 놓여 있었다.
탁자는 중세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었고, 원목이어서 무겁기까지 했다.
귀엽고 예쁜 것을 선호할 것 같은 어리가 택했다고 보기엔 정말 어울리지 않은 탁자지만 어리가 좋다니 세진도 아무 말 않고 사 준 물건이다.
어차피 어리는 그 외의 물건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서 방을 꾸밀 거라고 했으니 이런 정도의 투자는 아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