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리와 메르세데스 벤츠 680S 미니어처 -- >
세진이 다시 집에 돌아온 시간은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여섯시 무렵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아버지는 거실에서 책과 TV를 함께 보는 특기를 살리고 계셨다.
세진은 그런 부모님께 인사 후에 샤워를 하곤 곧바로 방에서 어리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어리, 말은 좀 많이 배웠나?"
- 한국어와 한글의 습득률은 90%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습득률이란 것이 100%가 될 수도 있나?"
-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아서 항상 변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100%란 이룰 수 없는 수준의 습득률입니다.
"하하하하. 제법인데? 좋아. 그럼 이제 우린 서로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된 거네?"
세진은 책상에 의자를 끌어다 붙어 앉으며 어리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그럼 말이야. 어리 너는 어떤 존재지? 그걸 먼저 알고 싶은데?"
- 세진님의 질문은 너무 포괄적인 질문입니다.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조금 범위를 줄여서 질문을 해 주십시오.
"아, 그런가? 그럼 말이지. 너는 프로그램이야 아니면 자의식이 있는 어떤 지능체야?"
세진의 질문에 어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런 어리의 반응에 세진은 어리가 평범한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 그 질문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만들어진 존재이며 규정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한계가 설정되지 않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어려운데? 일단 만들어졌단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성체인 거고?"
- 제 자신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세진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뭐 좋아. 어차피 우리 인간도 자기가 자길 모르고 평생을 사는데 굳이 그걸 따질 이유는 없겠지. 자,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하자. 어리 너는 내가 너를 음, 뭐라고 할까? 구했다? 아니면 되살렸다? 아니면 작동시켰다? 뭐 그랬다는 건 인정하지?"
- 물론입니다.
세진님은 제가 모실 주인님입니다.
"응? 주인?"
- 만들어질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제게 규정된 것입니다. 저를 깨우는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그래. 하하. 그것 참. 그럼 나는 굉장한 보물을 얻게 된 거네?"
- 저를 보물로 생각하신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좋아. 어리. 그럼 이제부터 우리 서로를 좀 더 알아가도록 하자. 일단 어리가 나에게 속해서 나를 돕는다고 했으니 난 그 말을 믿을 거야. 솔직히 믿지 않아도 무슨 다른 도리가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거든. 어리를 어디 버리고 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 제가 세진님에게 봉사하는 것은 절대불변입니다.
걱정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고맙다. 안심시켜줘서."
세진은 진심으로 어리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속하게 된 것이 고마웠다.
어리가 어떤 존재이건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 도움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가 만들어진 목적이 테라포밍이라고 하던데 맞아?"
세진은 어리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이 작은 어리가 행성을 테라포밍할 수 있다는 건지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 가능성의 문제라면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전제 조건은 장구한 시간의 흐름입니다.
"쉽게 말해서 무지무지 오래 걸린다는 말이지? 그거?"
- 그렇습니다.
"되기는 한다는 말이구나?"
- 저는 에테르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에테르가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저는 자원을 수급하여 행성 테라포밍을 완성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하구나. 어리."
세진은 새삼 어리의 능력에 감탄했다.
- 죄송하지만 주인님이신 세진님께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응? 실망?"
세진은 갑자기 등으로 차가운 뭔가가 기어가는 듯한 불길함을 느꼈다.
- 그렇습니다. 저는 목적에 맞게 만들어졌지만 그에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이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정보? 어떤 정보를 말하는 거지?"
- 제가 가장 필요한 것은 저에게 자원을 수급해 줄 탐사 및 채집 로봇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행성에 덩그러니 너 혼자 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너를 도울 로봇이 필요하겠지."
- 그 로봇을 비롯해서 이후로 단계를 밟아가며 만들어야 할 모든 로봇과 시설에 대한 설계도가 없습니다.
띠잉!
세진은 어리의 말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다시 이야기 해 줄래? 뭐가 없다고?"
- 제가 만들어 낼 것들의 설계도가 없습니다.
"그럼 지금 어리 네가 만들 수 있는 건 뭔데?"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세진이 물었다.
- 현재 제작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설계도가 없습니다.
"그,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하하.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설계도가 없다는데 말이야."
세진은 잔뜩 부풀어 올랐던 허파가 한순간에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으며 책상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세진은 자신이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 세진님?
"왜?"
어리의 부름에 답하는 세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 긍정적인 소식도 있습니다. 설계도는 없지만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능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저 컴퓨터라는 통신 장비를 이용해서 적당한 설계도를 구하고, 그에 알맞은 재료를 얻을 수 있다면 작은 물건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제 기능을 이용하면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작게 축소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의 기술을 기반으로 뭔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세진님은 이 지구를 테라포밍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세진은 길게 이어진 어리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씩 의자에 구겨 넣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리의 말대로라면 아직 희망은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세진이 지구를 테라포밍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좋아. 그렇단 말이지? 음 그럼 일단 자동차를 하나 만들어 볼까. 어리의 성능을 알아봐야 하니까 시험작으로 말이지."
- 자동차를 실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제작 가능한 크기는 제 몸체 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 입니다.
어리는 반으로 갈라져있던 몸을 붙여서 공 모양을 만들었다가 다시 갈라진 모양이 되며 말했다. 공 모양 안에 들어가는 크기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래도 차를 만드는 거야. 네 말대로 축소해서 만드는 거지. 그래 요즘 나오는 차는 설계도 구하기가 어렵고 복잡하니까 옛날 차, 초기 형태의 차를 만들기로 하자."
- 알겠습니다. 그럼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보를 찾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재료들은 제가 수급할 수 없습니다.
"좋아. 재료 목록을 뽑아. 그럼 내가 준비를 해 주지. 아, 혹시 모르니까 대체 할 수 있는 것이면 대체해서 구하기 쉬운 걸로 목록을 만들어 봐. 알았지?"
-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진님.
"그래. 일단 한 번 해보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너를 도울 수 있는 기계를 만들거나 해 보자. 뭐 그 전에 예산 확보부터 해야겠지만 말이지."
세진은 그렇게 어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을 먹으라는 어머님의 부름에 끌려 나갔다.
세진이 없는 방에서는 어리가 부지런히 컴퓨터 화면을 바꾸고 있었다.
세진은 회사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일의 대부분을 후임에게 맡겨두고 어리에게 집중했다.
사실 세진은 회사를 그만 둘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어리의 성능이 예상하는 것만큼만 나와 준다고 하면 회사에서 시간을 죽이며 사는 것보다는 어리를 통해서 얻는 수익으로 자신의 앞가림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전까지 회사란 세진에게 선택이 아닌 강요였지만 이젠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리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한 그 시험작으로 선택된 것은 지금 어리와 함께 만들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 680S이라는 자동차였다.
이것은 1928년에 나왔던 자동차로 아직까지 오리지널 자동차가 고가로 거래되는 명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의 미니어처를 만들어서 자동차 경매가 열린다는 곳에 보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동차의 외형이나 내부 구조는 어렵지 않게 컴퓨터의 사진이나 기타 모형을 통해서 확보했는데 문제는 엔진이나 세부 항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어렵게 외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실물 사진을 꼼꼼하게 찍어 보내게 했다. 매물로 나온 것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는데 그래도 바닥이나 내부는 어쩔 수 없이 유추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리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설계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은 맞지만 여건이 되면 실물을 통해서 역설계도 가능한 것이 어리였다.
세진은 그나마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진행된 메르세데스 벤츠 680S의 제작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들어섰다.
어리의 말로는 기름만 넣으면 본래 차가 할 수 있는 모든 동작을 하게 만들고 있단다. 물론 엔진을 이루는 금속의 재질 때문에 실제로 시동을 걸었을 때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런 이유로 엔진의 경우에는 본래 사용된 금속이 아니라 몇 가지 금속의 합금으로 내구성을 높여 새롭게 만들었다니 어쩌면 정말로 움직이는 재규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세진은 기대 중이다.
- 어서 오십시오.
세진이 방으로 들어가자 어리가 인사를 한다.
어리는 원래 공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다.
그 안에서 지금 메르세데스 벤츠 680S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진은 어리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에 대해서 어리는 조금 더 큰 것을 만들려면 어리가 부속을 만들고 세진이 조립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세진은 수 천, 혹은 수 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조립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뿐하게 거절했다.
물론 차를 조립한다고 해도 통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크면 그것을 어리가 만들 수 없다는 것도 문제여서 어리의 몸에 들어가지 못할 크기는 애초에 만들 생각이 없는 세진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 재료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 유리? 물론이지. 이 앞에 자동차 수리점에서 부서진 자동차 앞유리를 조금 떼어 왔지."
- 그것만으로 부족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알아. 이것도 있어. 여기 이거면 되지?"
세진은 어리의 투정에 유리가 들어있는 종이컵 안에 새끼손가락 길이의 금속 하나를 놓았다.
알루미늄 막대기였다.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찾아보니 보이지 않아서 고생 끝에 창문틀을 만드는 가게에서 구걸하다시피 얻어 온 것이다.
- 네. 세진님.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습니다.
"어제처럼 자동차 창문이 깨지거나 하진 않겠지?"
- 워낙 비율에 맞춰서 만드느라 유리의 두께가 얇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입니다. 그리고 세진님께서 차를 잡은 힘이 너무 강했습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그런 정도는 고려를 해야지. 아무리 축소 모형이라지만 어느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 하는 거라고."
- 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진님의 지침을 고려해서 작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리는 세진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어리의 몸체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그 안에 품고 있던 메르세데스 벤츠 680S가 모습을 드러냈다.
- 완성된 모습입니다. 어제 보신 것과 외형의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내구성을 조금 더 높였습니다.
세진은 눈앞에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 680S에 정신을 빼앗겼다. 어제도 이걸 보자마자 손으로 잡았다가 차체가 찌그러지고 유리가 깨지는 사고가 났다. 그래서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서 새로운 유리와 알루미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세진은 어리가 그것들로 어떤 합금이나 유리를 만들었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자동차 모형 보다는 그 합금들이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때문에 이후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예상은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예상은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