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17화 (17/298)

< -- 어리와 메르세데스 벤츠 680S 미니어처 -- >

띠리리리릭.

그러자 작게 들리는 묘한 소리와 함께 둥근 공처럼 생긴 어리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옆으로 누워서 평면이 위로 향하고 곡면이 바닥을 향한 모양으로 변했다.

"우와, 놀래라.

세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은빛의 쪼개진 원형 반구 두 개가 눈앞에 있다.

띠디디디딕 띠딕.

그런데 그 평면 위에 몇 가지 선택 사항이 올라온다. 하지만 세진은 그게 뭘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아아, 이거 글씨지? 응? 그래 글씨 맞지? 뭐 우주 공용어라고 하는 그거."

진은 평면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면서 탄성과 짜증을 동시에 풀어냈다.

일단 평면 위에 나타난 것이 세진이 알고 있는 글자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지만 알기만 할 뿐 읽어서 독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짜증을 유발한 것이다.

아랍의 꼬불꼬불한 글자를 보면 '아, 저거 아랍에서 쓰는 글자다.

'라고 알 수 있지만 절대 읽어서 독해를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라고? 내가 이런 글씨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띠리릭 띠릭.

"뭐라고 떠들어? 니가 그런다고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냐? 한국말 있잖아. 국어. 한글. 훈민정음. 그 좋은 글자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몰라? 세종어제훈민정음 국지어음이 이호중국하여 여문자로 불상유통일세 유민이 유소욕언하여도 이종부득신기정자 다의라 여위차민연하여 신제 이십팔자하노니 욕사인인으로 이습하여 편어일용이니라. 아,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세진은 머리를 툭툭 친다.

띠릭 띠리릭.

"야, 모른다고 몰라. 내가 기계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냐? 아니지 니가 생각은 또 무슨 생각. 아,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하지?"

- 이걸 어떻게 하지?

"엑! 뭐냐?"

- 엑! 뭐냐?

"그만, 그만해. 앵무새 놀이를 하자는 거라면 그만 두자. 그게 아니고 만약 니가 언어를 익히는 학습 능력이 있는 거라면 어디 한 번 해 보자."

세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자신과 어리를 번갈아가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세진, 너는 어리."

"다시, 나는 세진, 너는 어리."

세진이 다시 한 번 자신을 가리키며 세진, 기계인 어리를 가리키며 어리라고 했다.

- 나는 어리. 너는 세진.

"예스. 맞아. 바로 그거야."

세진은 나와 너를 구별하는 어리의 반응에 환호성을 올렸다.

- 너는 세진. 나는 어리. 예스. 맞아. 바로 그거야.

"맞아."

이번에는 세진이 에테르 저장 장치를 하나 꺼내왔다.

"이것은 에테르 저장장치."

- 이것은 에테르 저장장치.

"나는 세진, 너는 어리, 이것은 에테르 저장장치."

어리는 세진의 말을 반복적으로 따라했다.

이번에는 세진이 세 개의 에테르 저장 장치를 꺼내서 하나는 어리의 곁에, 하나는 자신의 앞에 그리고 하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두었다.

"이것, 그것, 저것."

세진은 세 개의 저장 장치를 거리와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지칭했다.

"이것은 저장장치. 그것도 저장장치. 저것도 저장장치."

- 이것, 그것, 저것.

그렇게 세진은 밤을 세워가며 어리와 기초 언어 수업을 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를 켜서 한국 영화 하나를 플레이 해 뒀다.

그렇게 세진은 연휴 마지막 날의 새벽에 잠이 들었다가 정오가 넘어서야 깼고, 깨어나서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이로움을 접했다.

- 세진. 기상했다.

"아, 그래.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난 거지."

- 잠에서 기상, 깨어남, 일어남. 비슷한 말.

"그래. 그렇게 볼 수 있지. 아무튼 어리는 대단하구나. 벌써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

- 어려운 말. 복잡한 말. 하지만 문자는 쉬운 말.

세진은 그 짧은 시간에 말문을 어느 정도 튼 어리의 능력이 놀라웠고, 어리가 어떤 것에 대한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 저것을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리는.

그리고 어리가 세진에게 무언가 자의적으로 요구를 했을 때는 또 한 번 놀랐다. 어리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언어를 습득할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이다.

세진은 어리가 어떻게 컴퓨터를 쓸 수 있을지 궁금해서 허락을 했는데 어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컴퓨터의 화면 내용이 멋대로 바뀌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뭔가 수단이 있겠지만 그건 세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그걸 물어보기엔 어리의 언어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 그럼 수고해라."

- 어리는 수고한다.

'역시 아직은 제대로 된 대화가 어렵네. 뭐 곧 좋아지겠지.'

세진을 그렇게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특별한 볼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부족인 몸을 좀 움직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리고 이 지구에 에테르가 있으니 지하창고에서 얻은 세 가지 수련법 중에서 에테르 운용법은 배울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가까운 공원이나 산에 가서 해야지. 그래도 수련이면 입산수도 아니겠어?"

운동을 겸할 생각이라 그런 생각을 하며 세진은 두껍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세진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우이동으로 향했다.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으면 가볍게 등산을 즐기기에도 적합한 산이 북한산이다.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면 되는 거리라 부담도 없어서 선택에 망설임도 없었다.

"앞으로 운동도 좀 해야지. 회사와 집만 오가며 지냈던 몸이 많이 축났어."

세진은 주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한다고 할 때에도 젊은 것만 믿고 자신은 걱정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하지만 의체를 가지고 사냥을 하며 지내다가 정작 자신의 본래 몸으로 돌아오니 아쉬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헌터룸과 지하창고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또 집에 와서는 방과 거실만 오고 간 것이라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는데 어리와 밤을 새우고 잠시 자고 일어난 순간, 확실히 자신의 체력이 저질이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몸이 예전 같이 않다는 느낌. 그런데 그 예전에 바로 며칠 전이라면 그 괴리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생체에테르바디로는 커다란 바위도 번쩍번쩍 들어 올릴 수 있고, 어지간해선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데, 겨우 하룻밤 조금 무리했다고 몸이 뻐근하고 피곤한 상황을 닥치니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운동도 하고 몸의 건강을 위해서 에테르 운용법도 익히고 할 결심을 하고 나선 것이다.

세진은 얼마간 산길을 오르다가 정식 등산로가 아닌 쪽으로 슬쩍 빠져 들어갔다.

그 모습에 등산을 나왔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세진은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서 얼마간 있는 듯 없는 듯한 길을 따라 들어가다 결국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았다.

보아하니 이곳에도 선객이 있어서 간혹 찾아와서 쉬었다가 가는 장소인 모양으로 흙바닥을 고르게 다지고 등산로에 간혹 비치해 놓은 통나무 의자까지 옮겨 놓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주인이 없는 곳이니 세진은 잠시 빌려 쓰기로 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지하 창고에서 기억해 온 세 가지의 수련법을 떠올렸다.

그 중에서 가장 친근한 것은 아무래도 에테르 운용법이다. 그런데 이 에테르 운용법은 또 다른 수련법인 오러 로드 수련법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에테르 운용법만 익혀도 되지만 오러 로드와 함께 익히면 모든 면에서 탁월한 효과를 본다고 하니 세진으로서도 두 가지를 동시에 익힐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인 마법과 마법진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 두기로 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어리와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했는데, 그 기록을 남긴 사람도 입체 프린터를 이용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물론 그 기록 속의 입체 프린터는 세진이 생각하기에 요즘 나오기 시작하는 그런 저급한 수준은 절대 아니고, 감히 견줄 수 없는 기술로 만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세진은 어리가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은근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오러 로드와 에테르 운용법을 함께 익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원래 오러 로드는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신체를 성장시키는 수련법이었다. 그런데 기록자는 세상의 기운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에테르를 이용해서 오러 로드를 개척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들었다. 물론 이후에 어느 정도 경지가 되면 에테르 또한 변화를 겪으며 조금 더 근원적인 기운으로 바뀐다고 했지만 그건 세진이 넘보기 어려운 상급 수준에 설명되어 있는 내용이라 잠시 잊어도 될 일이었다.

"일단 에테르를 느끼는 것이 우선이란 말이지?"

세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테르를 느끼기 위해서 살짝 눈을 감고 정신을 모았다.

이미 생체에테르바디를 쓰면서 1년 2개월, 그것도 하루가 36시간인 행성에서 그 기간 동안 에테르를 이용했던 세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보다 훨씬 농도가 떨어지는 지구 대기에 숨은 에테르를 세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감지해냈다.

그 순간 세진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겨우 잡은 에테르의 느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에테르를 몸 안으로 이끄는 의지를 일으켰다.

생체에테르바디에는 에테르 기관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의체를 만들 때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에테르를 모아서 높은 밀도로 만들어 보관하고 필요에 따라서 에테르를 내보내서 생체에테르바디가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라훌족에겐 그런 기관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서 재능을 타고 나는 이들은 에테르를 몸으로 받아들여서 몸에 축적하고 또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라훌헌터가 되어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오러 로드 수련법은 에테르 기관과 비슷한 것을 몸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수련법이다.

라훌족의 그것과도 다르고 에테르기관과도 다른 방법인 것이다.

원래는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일정 경로를 통해서 몸 안에서 순환시켜서 오러라는 에너지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오러 로드 수련법이다.

그런데 여기에 세상의 기운 중에서 에테르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석판 기록에 있는 개조된 에테르 로드 수련법이다.

물론 궁극에 가서는 오러 로드 수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일단 에테르가 풍부한 곳에서 익히기에 쉽도록 만들어진 수련법인 셈이다.

더구나 이것을 익히면 에테르를 이용한 여러 활용법들을 쓸 수 있으니 오러로 수련하는 것 보다는 유익한 면이 많다고 권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작은 에테르를 모아둘 수 있는 저장고를 만드는 일인데, 이것이 참 신기하게도 세진도 알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흔히 단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부분이 에테르 로드 수련법이나 오러 로드 수련법에서 처음에 저장고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 이후의 성장에 따라서 계속해서 저장고를 늘리게 되는데 그 역시 명치와 머리에 만들게 되어 있어서,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이라는 킬링타임용 글들의 설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오로지 상상에 의해 나온 설정이 아니라 오랜 역사에서 선인들의 사유에서 파생된 흔적들이라고 보면 무조건 웃어넘길 일은 아니라고 세진은 지하창고에서 석판을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세진의 몸 안에서는 에테르가 끊어질 듯이 이어지며 겨우겨우 초보적인 경로를 따라서 움직였다.

가장 간단한 운용임에도 세진의 몸 안에 로드로 표현되는 에너지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서 힘겨운 작업이었다.

마치 혈관 안에 실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제법 고통도 있어서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기초적인 수련법만은 확실하게 외우고 왔던 세진이라 그 약한 기운을 끈질기게도 잡고 늘어지며 결국 순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에테르는 세진의 몸에서 변화를 겪으며 세진의 신체에 적합하게 바뀌었다.

세진의 몸을 한 바퀴 돌면서 본래의 색을 잃고 세진에게 속한 에테르로 변한 것이다.

그러자 세진의 에테르는 갈 곳을 잃었다.

지금까지는 대기에 녹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젠 그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고, 세진의 몸 안에서 살아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세진의 에테르는 마치 제 갈 길을 알고 있다는 듯이 꼬물꼬물 움직여서는 세진의 단전 부근의 자리를 잡았다.

몸 안에 있음에도 집중을 해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에테르지만 이제 세진은 자신만의 에테르를 지니게 된 것이다.

"후아. 어렵네. 뭐가 이렇게 어려워? 진땀이 다 나네."

세진은 혼잣말을 하며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그래도 세진의 표정을 밝았다.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성취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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