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노트-5화 (5/298)
  • < -- 여자에게 차이고 구멍에 빠지고 -- >

    세진은 금요일 저녁에 여자에게 차이고 늦은 밤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옮겨져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이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비명과 함께 세진이 나타난 곳은 그가 사라졌던 바로 그 자리였다.

    덕분에 돌계단에서 구르느라 몸 여기저기에 적잖은 타박상을 입었다. 당연히 지나가던 사람들은 세진의 모습을 보고 취객 정도로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진은 온 몸을 두드리는 고통에서 자신의 경험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외박을 했다고 구박하는 어머니께 대충 술 때문이라고 둘러 대고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고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하지만 그것은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잔소리에서 벗어나서 뭔가 틀어지기 시작한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다시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세진은 토요일 밤을 보내고 일요일 낮을 보내고, 다시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하지만 세진은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메일을 이용해서 급한 일로 월차와 연차를 한꺼번에 신청한다는 통보를 하고 다시 방안에 처박혔다. 어머니는 그런 세진의 모습에서 아들에게 무슨 큰 일이 생겼다는 것을 느낀 모양인지 매번 끼니때가 되면 식탁을 다시 차려주는 것 이외에는 발걸음 소리도 조심하고 집안 청소조차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아들에게 무척 큰 일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든 아들이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어머니의 배려였다.

    그렇게 한 주를 방에서 뒹굴며 보낸 세진은 그 후로 다시 직장 생활을 착실하게 하기 시작했다.

    세진의 부모님은 그런 세진의 모습에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뭔가 큰 일을 겪은 듯 하지만 그래도 잘 적응해서 넘어가는 듯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진은 틈만 나면 자신의 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지나가버린 경험을 되새기고 있었다.

    "으아악. 돌대가리. 젠장! 멍청이!"

    세진은 스스로를 학대하다시피 머리를 쥐어박기도 한다.

    "뭐냐고 생각이 안 나잖아. 소설을 읽었는데 줄거리만 겨우 생각나는 수준이야. 으아악, 거기 있는 마법진이고 오러 호흡법이고 뭐고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제기랄!"

    그런 거다.

    세진이 이 이상한 지하 공간의 석판에서 주입받은 지식들이 흔적만 남고 모두 증발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그 석판은 세진에게 이런 저런 설명 한 번을 들려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세진이 천재도 아닌데 그 내용을 한 번 듣고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한 번 본 것으로 모두 기억해 낼 수 있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오러 호흡법의 경우엔 몬스터 사냥을 위해선 꼭 필요한 거라고 했는데, 그걸 도무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러니 세진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일인 거다.

    세진은 팔찌를 노려봤다.

    "이런 빌어먹을 깡통 같으니라고. 저 어리를 어쩔 거야? 응? 저 불쌍한 어리는 도대체 어쩔 거냐고?"

    세진은 다시 한 번 열을 내며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은빛의 물체를 손가락질 했다. 그러면서 팔찌에게 화를 내는 거다.

    세진이 들고 온 그것은 딱 보면 받침대 위에 공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다만 은빛 구체의 표면에 좁은 골이 이리저리 파여 있는데 그 모양이 세상의 어떤 구기 종목의 공도 닮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장식품으로 놓고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물건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장식품 이외에는 쓸 만한 용도가 없다.

    세진이 알고 있는 그것의 이름은 어리, 무슨 뜻인지는 세진도 모른다.

    그냥 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뒤에 여자에게 붙이는 어떤 호칭이 붙는다는 정도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어리양 정도 되는 호칭이다. 하지만 그건 이전에 저것을 가지고 있던 주인이 붙인 애칭일 뿐 어떤 의미가 있는 이름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저것의 이름 따위가 아니라 용도인 셈이다.

    저 어리의 용도는 그야말로 상상을 넘어서는 거창한 것이다.

    이름하여 테라포밍. 그것이 저 어리의 용도란다.

    테라포밍이 뭔지 모르는 이를 위해서 설명을 하자면, 어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인류가 거처할 수 없는 행성이 있다면 그곳을 인류가 살아가기에 적당한 환경으로 바꾸는 작업을 테라포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저 작은 어리가 바로 그 테라포밍을 위한 것이란 소리다.

    세진은 그런 석판의 내용을 읽고 나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듀풀렉 게이트에 납치된 기념으로 어리를 냉큼 들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리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는 에테르다. 지금 에테르 코어를 구할 수 없는 세진에게 어리는 그냥 근사한 장식에 불과하단 소리고, 그 때문에 지금 세진은 더욱 광분하고 있는 거다.

    그냥 웃기는 경험 한 번 한 걸로 끝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마법이니 오러니 하는 것도 설명만 한 번 듣고 말았고, 행성 개조라는 엄청난 목적으로 만들어진 어리는 에너지 고갈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아예 없었으면 모를까 있었고, 또 눈앞에 있는데 그게 손에 닿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세진이 거의 반쯤 눈이 돌아간 이유가 바로 그거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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