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에게 차이고 구멍에 빠지고 -- >
"씨팔, 개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뭣 때문에? 지랄 마라. 난 그냥 나야. 세상이 망하건 말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라고. 망하는데 몇 백 년은 걸린다며?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냐? 어차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거면 된 거야. 나 죽은 후에 세상이 어떻게 되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고."
세진은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지금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는 지금 지하 깊은 곳에 만들어진 공간에 와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어쩌다가 맨홀 뚜껑 열린 곳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래, 이해해 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진이 와 있는 지하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지하라면 그건 이야기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세진은 팔목에 걸려 있는 아니 이제는 문신처럼 남은 팔찌를 노려봤다. 그것의 이름은 듀풀렉 게이트. 그것도 아주 최고의 기능을 가진 버전으로 만들어진 게이트 생성기란다.
듀풀렉 게이트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뭐 일단 마법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작은 문제가 있지만 래도 그것만 전제가 될 수 있다면 다음 이야기는 쉽다.
마법에는 차원의 틈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서 창고로 사용하는 고차원적인 방법이 있다. 보통 그것을 아공간이라고 하는데 듀풀렉 게이트는 그 원리에서 시작된 돌발변수의 발명품이다.
마법으로 아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 열린 공간이 차원의 틈이 아니라 우주의 어느 한 지점이 된 것이다. 거기서 듀풀렉 게이트란 것이 생겨났다.
이쪽에서 아공간을 열었는데 저 멀리 있는 행성의 일정 공간을 창고처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일순간에 이쪽 행성에서 저 쪽 행성으로 건너 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원리로 탄생한 것이 듀풀렉 게이트라는 개념이란다.
그리고 세진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는 벽조목 팔찌 따위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지구상에 누군가 던져 놓은 듀풀렉 게이트 생성기란 소리다.
문제는 그 생성기를 작동시키는 에너지가 지구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없었던 에너지가 생겨서 세진이 납치를 당하듯이 이름도 모르는 행성의 지하에 떨어진 것은 그 듀풀렉 게이트 생성기가 작동을 했다는 말이다.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셈이다.
그런데 세진이 세상이 망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는 또 뭘까?
그것은 이곳 지하 창고에 와서 세진이 얻은 지식의 석판들에서 얻은 정보들 때문에 나온 소리다.
엉뚱한 장소에 떨어진 세진이 그래도 어떻게든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사태를 해결해 보겠다고 설치다가 발견한 새로운 공간에서 그는 몇 개의 석판들을 발견했고, 그 석판들을 손에 쥐는 순간 엄청난 정보들이 머리에 주입되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공짜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을 마다할 세진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한 번 당해보니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 싶어서 석판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석판의 내용들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가진 팔찌가 듀풀렉 게이트의 생성기라는 사실과 그 생성기가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목걸이로 착각하고 샀던 그 나무구슬 같은 시동 장치, 그리고 세상에 널리 퍼진 에테르 에너지가 있어야 했던 것인데 목걸이의 구슬은 직접 잡아 뜯었으니 봉인이 풀려서 시동장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지구에 전에 없었던 에테르 에너지가 널리 퍼져 있었기에 듀풀렉 게이트가 작동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진이 발광을 하듯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
없었던 에테르 에너지가 지구상에 생성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인 거다.
에테르 에너지는 코어라는 것에서 생성이 된다.
아니 코어라는 것이 어떤 행성에 자리를 잡으면 그 행성이 지니고 있는 고유 에너지를 잡아먹고 에테르 에너지로 바꾼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 코어는 그 에테르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를 번식시켜서 그 행성 전체의 기운을 에테르 에너지로 바꾸고 에테르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지금 지구에는 이미 그 코어가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테르가 대기 중에 있을 까닭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세진이 발광을 하는 것이다.
"괴물들이 나오거나 말거나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딱 보니까 아직까지 그런 소리는 없었어. 그럼 아직 등장을 안 했다는 소리고 에테르가 일정 수치를 넘어서게 되면 전자기를 이용한 모든 것이 먹통이 된다고 했는데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럼 앞으로 몇 백 년은 괜찮을 거야."
세진은 약간은 현실 도피를 하고 있는 중이다.
지구에 몬스터들이 등장하게 된다는데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에 주입된 지식을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이 사실이란 것은 어느 정도 믿고 있으니 말이다.
그걸 믿자니 지구의 상황이 위험하고 또 그걸 받아들이자니 세진 자신이 뭔 짓을 해서라도 지구를 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책임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세진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는 것이다.
"지랄.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죽어야 한다면 그러라고 해. 나 죽은 다음 문제니까."
세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실연까지 당한 마당에 그딴 것이 뭐가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살짝 끼어든 것이다.
아니라고 해도 실연의 충격은 꽤나 컸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