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회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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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으로 설계된 도라산역 뒤로 북한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붉은색 글씨가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철마는 달린다.
예전 경의선이 끊어진 상태에서 남북 대치가 극심하게 이어질 때, 지금은 없어진 월정리 폐역사에 세워진 녹슨 기관차가 있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남북을 잘 오고 갔을 증기 기관차는 세월의 풍상에 그대로 강타당해 반쯤은 삭아 없어졌다. 그 옆에 놓인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글귀가 담긴 팻말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로 심하게 삭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고속철도로 경의선이 복원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 행사를 위해 도라산역에 초청된 일반인들 중 감격에 젖어든 이들이 많았다. 참가 신청이 워낙 많아서 추첨으로 선정된 이들이었는데, 주로 철도를 파고드는 마니아들이 많았다. 여기에 따로 초청된 이산가족들도 있었다.
이산가족들은 예전부터 금강산에 모여 살도록 남과 북이 배려를 했기에, 더는 애틋한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각자의 고향 방문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의선 복원 행사 후에는 뭔가 특별한 발표가 있을 것 같았다.
유재원의 경우 정부 초청 VIP였기에 특실에 바로 탈 수 있도록 플랫폼에서 1호차 자리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여기에는 남북한 철도 사업을 하는 업체들의 대표나 사장들도 초대되어 있었다.
거기서 유재원은 살짝 동떨어진 상태다.
왕따를 당한다는 건 아니고, 유재원에게 뭔가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은데 어려워서 다가오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냉혹한 사회에서 각자 거느린 기업의 크기가 곧 존재감이었는데, 다른 이들과 유재원은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광명역에서 출발한 신의주행 KTX 열차가 도착합니다.
“KTX가 들어옵니다. 여러분, 플랫폼에서 안전한 곳으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행사 안전요원들이 분주하게 플랫폼을 정비했다.
남는 게 사진이라면서 사방에서 사진을 찍던 이들은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뒤로 물러섰다. 2분쯤 지났을 때, 남쪽에서 쌔끈한 최신형 KTX 열차가 들어왔다.
KTX-이음이었다.KTX-산천의 파생형으로 남북한 철도 연결을 대비해서 성능을 향상시킨 모델이었다. 이음이라는 모델명도 끊어진 철도를 잇는다는 의미와 함께 경의선을 통해 오랜시간 단절되었던 남북한의 새로운 교류가 시작된다는 걸 내포하고 있었다.
KTX-이음의 디자인도 완전히 달랐다. 21세기 중반까지 먹힐 만큼 미래지향적이어서 철도 마니아들 사이에 인기였다.
덕분에 시야에 들어왔을 땐 실지렁이처럼 얇게 보였던 KTX-이음은 순식간에 커지면서 도라산역 플랫폼에 진입했다. 선두의 동력 차량에는 대통령 탑승을 의미하는 봉황기와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곧이어 정차가 완료되자 KTX의 문이 열리고 먼저 탑승해 있던 사람들이 내려섰다.
정 대통령이었다.
정 대통령은 12호 칸에 있었다. 그러니 플랫폼 맨 뒤쪽에 내려선 것이었고 그곳에는 실향민들이 있었다. 비록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없지만,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었다. 이분들과 한 분씩 악수를 나누면서 서서히 앞쪽으로 오는 식이었다.
악수와 환담을 주고받는 데 10분쯤 걸렸다. 물론 유재원이 맨 마지막이었다. 이어서 정 대통령은 준비된 단상으로 가서 상기된 표정으로 기념사를 시작했다.
기념사 분량은 짧았고, 내용도 경의선이 복구가 되어 기쁘다는 것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행사는 이곳 도라산역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KTX-이음이 도라산역에 들어올 때 울렸던 안내 멘트 그대로 사리원을 지나 개성을 거쳐 평양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북한의 김정남 위원장과 함께하는 성대한 개통기념식과 아울러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는 것이다.
이후 김정남도 함께 KTX-이음에 올라 신의주역에 도착하는 게 오늘 개통 행사의 마무리였다.
기념사를 마친 정 대통령은 다시 열차에 올랐다.
유재원도 뒤를 따라서 정해진 자리에 앉았는데, 취향 저격의 1인석이었다.
-잠시 후, 우리 KTX-이음 열차는 개성역을 지나갑니다.
도라산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개성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최고 속도를 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고, 새로 깔린 철로는 승차감도 아주 좋았다.
개성역은 정차하지 않고 지나치는데, 역 플랫폼과 주변으로 한복을 입은 북한 사람들이 나와서 커다란 종이꽃을 흔들고 있었다.
김정남이 위원장에 오르면서 180도 바뀌고 있는 북한이었지만, 오늘처럼 큰 행사가 있는 날 사람들을 동원하는 건 아직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도시 근처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줄인 덕에 KTX 안에서 개성시의 전경을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많이 달라졌다.
높은 아파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북한도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아파트 선호가 대단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거 대책도 아파트 위주가 되었다. 여기에 새로 깔았다는 게 그대로 티가 나는 검은색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상당했다.
예전에는 차도에 차가 없고 소가 끄는 짐수레가 있던 게 북한이었는데, 지금은 180도 달라진 것이었다.
“아. 저기가 거기네.”
여기에 유재원은 남들과는 다른 시야가 있었다. 바로 증강 현실을 제공하는 AI 렌즈를 착용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랜드마크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성 스마트 종합병원.
특정 건물에 시선을 집중하면 0.1초 만에 건물의 이름은 물론이고 상세한 정보도 함께 떴다. 기억력이 남다른 유재원이라 필요 없을 것 같은 아이템이지만, 평소 쓰던 기억이 아니면 눈을 감고 집중을 해야 했기에 AI 렌즈는 유재원에게도 유용했다.
AI 렌즈는 개성시 외곽에 자리한 3층짜리 건물이 예전 김정남 위원장과 함께 문을 열었던 개성 스마트 종합병원을 제대로 인식했다.
ID 테크놀로지에서 진행하는 주요 사업인 인공지능 닥터가 대규모로 투입된 곳이니 당연했다.
층수는 3층에 불과하지만, 가로로 길게 만들어진 터라 병상의 숫자는 800개가 넘는 대형 종합병원이었다.
그런데 이게 일반 종합병원과 다른 점은 인공지능 닥터가 진단부터 치료까지 전담하고, 의사는 이를 보조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의료 인프라는 최악이었기에, 아예 기초부터 인공지능 닥터가 기본인 병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컸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개성시의 자랑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공지능 닥터의 진단과 치료 능력은 사람보다 우수했다는 게 누적된 치료 케이스로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외과 수술을 보조하는 로봇이 도입되면서 큰 수술도 개성 스마트 종합병원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완전히 배제된 치료 체계는 아니다. 치료 후 회복 부분에 있어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훨씬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이렇게 배치된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숫자만큼 ID 라이프 리워드가 제공된다. 대신 북한의 경우 물가가 한국의 1/10이라서 제공되는 리워드의 크기도 1/10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 성장 속도는 연간 12% 이상이었기에,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한국의 1/2 수준까지 올라올 것으로 예상했다.
KTX-이음은 개성시를 통과한 다음 다시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시속 360km에 도달했고, 그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평양까지 직행했다.
평양 도착도 금방이었다.
개성에서 출발한 지 불과 1시간도 안 되어 평양역에 다다랐고, 거기서 어마어마한 환영 인파를 만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따로 준비된 행사장에 있어야 할 김정남 위원장이 직접 평양역에 나와 한국에서 올라온 정 대통령과 손님들을 맞이했다.
쇼맨십이 있는 김정남은 KTX-이음에서 내린 정 대통령의 손을 맞잡고 번쩍 들었다. 타이밍이 아무래도 오늘을 상징하는 그림은 저 사진이 될 게 분명했기에, 유재원도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SNS에 올렸다.
잠시 후, 두 정상은 평양역 앞쪽 광장에 마련된 행사장에 올라 역사적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만나자마자 공동 성명 발표라는 건, 사전에 치밀한 협의가 수차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오늘 10월 1일은 끊어졌던 한민족의 대동맥 경의선이 이어지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병우 대통령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김정남 위원장은 10·1 공동 성명에 합의하였습니다.”
“10·1 공동 성명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그간의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합의한 평화 통일 실현을 위한 실질 조치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북남경제연합체를 구성하는 것에 우리는 합의하였습니다.”
정병우 대통령과 김정남 위원장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면서 10·1 공동 성명에 대한 배경 설명을 했다.
통일이라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 티가 역력했다.
그렇지만 당장 통일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평화 통일에 대해서는 이전의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이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미진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김정남 대가 되면서 북한의 개혁과 개방이 시작되었고, 경제 협력도 적극적으로 이뤄졌지만 그것이 통일을 위한 준비는 아니었다.
그나마 한국의 공중파를 선별해서 북한에 방송하는 것과 포지티브 방식의 인터넷 개방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번 10·1 공동 성명은 평화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로드맵을 발표하고, 착실히 수행하겠다는 발표였다.
관건은 통일 비용의 최적화와 문화 차이에 대한 극복이었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이 독일의 통일 비용이었다.
독일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대가를 치르고 겨우 통일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서방 선진국이었던 서독은 통일을 위한 통일세를 신설했었는데, 통일 이후 30년이나 유지를 해야 했다. 이렇게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동독도 성장했지만, 아직도 동서의 경제 규모 격차는 상당했다.
그렇지만 독일의 경우를 한반도에 그대로 가져올 필요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의 통일 비용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폭증한 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순간 갑작스럽게 통일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계획 없이 하루아침에 통일이 되다 보니, 동독과의 경제 규모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고 이걸 세금으로 다 메워야 했던 것이다.
반면 북한에는 유전이란 치트키가 있었다.
여기에 전부터 한창 채굴을 했던 지하자원이 지금도 상당히 남아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의 전초 기지라는 타이틀도 있다. 북한에 웬 4차 산업혁명인가 싶겠지만, 개성에서 보았던 스마트 종합병원처럼 인공지능과 로봇의 도입 속도는 북한이 더 빨랐다.
한국이라면 여러 가지 법을 바꿔야 하는데, 북한은 소수의 결정으로 빠르게 추진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개성시의 스마트 종합병원은 이미 북한 전역으로 확대되는 중이었다. 마찬가지로 사법부터 행정까지 다양한 분야에 인공지능을 적용 중이었다.
이족 보행 로봇도 북한에만 300만 대가 넘게 보급되어 산업 곳곳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다. 대표적인 곳이 채굴 현장이었는데, 막장과 같이 극한의 작업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 아틀라스 로봇에게 최적인 일자리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농업과 중공업 분야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는 중인데, 아틀라스 로봇 한 대에 농기계 세트를 묶어 보급하면 그걸로 완전 자동화를 이룰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다양한 혁신을 동원해 북한의 경제가 한국의 70% 수준에 이를 때까지 독자적으로 성장한 다음, 통일이 이뤄진다면 독일과 같은 부작용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맺어진 각종 협약과 동맹이었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이었고, 북한은 중국과 동맹이 맺어진 상태다. 예전엔 주한미군도 통일 후 뜨거운 감자가 될 뻔했지만, 그나마 지금은 북한에도 소수의 미군이 주둔한 덕에 난제 하나는 풀린 상태다.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이전까지 맺어진 모든 협약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는 나라에 우선적인 협상권이 있을 것.
10·1 공동 성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이거였다.
분단 상황에서 체결되었던 각종 협약이 통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재검토한다는 부분은 한반도 주변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발표였다.
예전이었다면 한국과 북한이 이렇게 주변국에 강하게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통일에 동의한다면 우선적 배려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대로 보면 남북 통일에 반대한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당연히 이번 10·1 공동 성명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나라는 중국이었다.
북한을 미국에 대한 방파제와 지렛대로 사용하는 중국은 남북통일을 무척이나 껄끄럽게 여겼다. 말로는 평화 통일을 지지한다고 해도, 실제 통일을 위한 조치가 이뤄질 때마다 온갖 방해를 했다.
당연히 중국은 이번 10·1 공동 성명이 껄끄러웠다. 심지어 몹시나 불쾌함을 느꼈다. 미국에는 큰소리 치지 못하지만, 항상 얕잡아 보는 한국과 북한이 이렇게 나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중국의 대표 커뮤니티부터 펄펄 끓어올랐다. 북한이 어려웠을 때 유일하게 도와준 나라가 중국인데, 그 은혜를 잊은 게 너무나 배은망덕하다는 것이다.
급기야 한국과 북한 모두를 혐오하는 혐한 기류가 중국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수준은 중국 수뇌부도 당황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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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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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소원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때도 있었지요.
지금은 분단 상태로 계속 가는 걸 바라는 이들이 다수가 된 것 같네요.
저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현상 유지도 쉽지 않다는 게 문제네요.
북한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긴급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거든요.
그러면 조중동맹조약으로 중국이 자동 개입하게 되니 말이죠.
개인적으론 남북경제연합 정도가 최선일 거 같아요.
현실은 남북경제연합까지 가는 것도 힘들테지만~~!
암튼,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