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960화 (960/1,007)

936회

인피니티(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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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 벌써 가을이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대한민국의 최고 이슈는 일성그룹 최현희 명예회장의 사망이었다. 일성그룹의 2대 승계자였던 최현희는 신경영이란 슬로건을 통해 대한민국의 보통 재벌에 지나지 않았던 일성그룹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와 금성에 밀렸던 일성이 최현희 체제인 8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90년대에는 대기업 순위에서 1위를 찍기도 했다.

그렇지만 IMF라는 파고는 견디지 못했고, 그가 가장 애착이 있던 일성전자를 유재원의 ID 그룹에 넘겨야만 했다.

대신 최현희는 평생의 꿈이었던 자동차 산업은 지킬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천하의 일성그룹이 신생 ID 그룹과의 힘 싸움에 져서 주력 산업을 뺏겼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그렇지만 2014년 가을인 지금에 와서는 신의 한 수로 재평가되었다.

일성자동차는 일성그룹의 계열사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는 계열사였고, 미래 산업의 상징과도 같았다. 덕분에 일성자동차의 주가는 주당 200만 원을 넘어설 정도였다.

최현희 명예회장의 공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성자동차 다음으로 일성그룹의 성장을 주도하는 게 일성통신이었는데, 이동 통신 분야 역시나 최현희 회장의 전략적 선택으로 진출된 분야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IMF 때만 해도 일성통신은 일성전자의 부재감을 채우기 위해 진출한 사업으로만 인식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이동 통신 시장은 실패할 수 없는 사업이지만, 일성통신은 사람들의 기대 그 이상으로 성공했다.

옴니아라는 자체적인 스마트폰 제작으로 전 세계 중저가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자체 제작이긴 해도 안드로이드 호환 스마트폰으로서 AP와 통신 모뎀, 램과 플래시 메모리 같은 핵심 부품은 모두 ID 그룹에서 공급받았지만, 그래도 똑같은 부품을 공급받고도 제조사에 따라 성능과 완성도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옴니아는 안드로이드 호환 스마트폰 중에서는 최상급 가성비를 자랑했고,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와 동유럽, 남미에서 크게 선전하면서 2013년 연간 1억 대 판매에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일성통신이 일성자동차의 시가총액을 뛰어넘는 것이 시간문제로 보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호재가 터지면서 일성자동차가 한 번 더 치고 올랐다.

-셰브롱, 슈퍼 차지 시스템 전면 개방.

일성자동차처럼 덩치가 큰 기업도 펄쩍 뛰게 만든 호재는 셰브롱의 슈퍼 차지 시스템의 전면 개방이었다.

100% 전기로만 가는 자동차는 성공하기 불가능하다는 자동차 업계의 통념을 라이트닝 볼트가 박살을 내 버린 다음부터 기존 자동차 업체들도 전기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래자동차도 마찬가지였고, 일성자동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는 배터리였다.

우수한 배터리가 전기자동차의 처음과 끝이었다.

거기서 ID 그룹은 수십 년은 앞선 기술력이 있었다. 리튬 이온 배터리까지만 해도 일본 업체들이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핵심 기술을 가진 산요전기가 ID 그룹의 소유였다. 이후 전고체 배터리가 나왔고, 지금은 3세대까지 발전했다.

ID 그룹이 쉽게 쉽게 신제품을 내놓으니 다른 배터리 업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까지도 전고체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건 ID 그룹과 금성의 합작 법인인 LG이노텍과 기술 지원을 받은 산요전기뿐이었다.

그렇기에 기존 업체들은 리튬 이온 배터리 내장 방식의 전기차를 생산해야 했다. 성능부터 가격까지 무엇 하나 라이트닝 볼트를 넘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셰브롱 슈퍼 차지를 통해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것보다 빠르게 배터리를 교환하고, 전성비도 기름값보다 훨씬 저렴한 유지비를 자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셰브롱에서 라이트닝 볼트에만 제공했던 슈퍼 차지를 전면 개방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성자동차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신청했다.

다른 전기자동차 업체와 기존 완성차 업체들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내장형 배터리를 교체형으로 바꾸는 데 드는 비용보다 슈퍼 차지에 들어가는 게 훨씬 큰 이득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자동차 업계 전체가 모두 하겠다고 나섰는데, 셰브롱 측에서는 배터리 재고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순번을 정해서 차근차근 지원 업체를 확장하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숨에 전 세계 모든 자동차 업체에 슈퍼 차지를 개방하게 되면 배터리가 부족해서 시스템이 마비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전기자동차가 생산되고 움직이려면 배터리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걸 가지고서 셰브롱 주유소에서 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슈퍼 차지 시스템이 작동된다.

이렇게 최초로 장착되는 배터리는 자동차 오너가 슈퍼 차지의 보증 보험에 가입하고 빌리는 형식이었다. 나중에 폐차를 하면서 배터리를 반납할 수도 있고, 보증 보험을 갱신하면서 다른 모델로 이어갈 수도 있다.

물론 배터리를 분실하거나 파손, 분해, 개조 등 조작의 흔적이 발견될 때에도 보증 보험은 파기된다.

특수한 잠금장치가 되어서 슈퍼 차지의 교환대에 올라가야만 쉽게 풀리는 배터리 교환 장치인데, 파손과 분실을 신고하는 일이 제법 많았다.

배터리를 통째로 훔쳐 가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해 보는 작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업체도 전고체 배터리를 흉내 낼 수 없었다.

나트륨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지만, 그래핀 전극은 오로지 ID 그룹만의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도요타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전고체 배터리를 발표하긴 했는데, 성능은 ID 그룹의 1세대 전고체 배터리보다 더 떨어졌다. 게다가 대량 생산 체제가 잡히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한다.

하여튼 전기자동차가 출고될 때마다 새로운 배터리가 추가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생산 능력이 그 숫자를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면 개방은 하는데, 그 방식은 생산량에 맞춰 순차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개방의 순번은 당연히 셰브롱과 ID 그룹이 긴밀한 협의를 통해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최현희 명예회장이 별세하기 몇 주 전 1차 개방 업체가 발표되었다.

-테슬라, 시트로엥, 그리고 일성자동차.

이렇게 3개 업체였다.

탈락한 업체들은 난리였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계산을 했기에 이렇게 결과가 나왔느냐며 기준을 공개하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셰브롱은 아주 단순하게 대륙별, 규모별 안배가 있었다는 대변인 답변을 했다. 덤으로 2차 발표는 내년에 있을 거라고 발표했다.

3개 업체 모두 주가가 대폭등했다.

슈퍼 차지의 수혜로 전기자동차 매출이 급등할 거라는 시장의 예측 때문이었다. 실제로 예약이 내후년까지 가득 차 버린 라이트닝 볼트를 기다리는 데 지친 예비 자동차 오너들은 3개 업체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성자동차만 해도 블루볼트라는 전기차의 주문이 폭발했다. 그간 몇 주간 들어온 주문량이 이제껏 블루볼트의 누적 판매량을 가뿐하게 넘어설 정도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최현희 명예회장의 능력은 다시 한번 재평가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부친의 후광에서 나와 진정한 친정 체제를 완성한 최재영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호감을 가진 시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3대 승계를 이룬 최재영이 일성그룹을 잘 이끌어 나갈지 의문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최재영은 셰브롱 슈퍼 차지의 1차 라인업으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일성자동차가 선정된 덕에 큰 고비는 넘겼다.

반대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업체들은 날벼락이었다.

-조카님! 미래자동차가 탈락하다니요!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요.”

스마트폰 너머로 들리는 미래자동차 그룹 전재근 회장의 다급한 목소리와 달리 유재원의 목소리는 남의 일 보는 것처럼 태평했다.

실제로 유재원은 전재근에 대해 어떠한 친근감도 없었다.

전재근이야 조카님, 조카님 하면서 전명헌과 유재원의 인연을 강조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이 전재근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에게 전명헌은 진짜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전명헌의 아들들까지는 아니었다.

-‘그러게요’라니요!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유재원의 말에 전재근이 발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원에겐 그는 그냥 타인 그 자체다.

지금은 축구협회라는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은 전재준이 대표적인 트롤이었다. 92년 대선에서부터 욕심만 많은 무능력자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줬으니 말이다. 전재구나 전재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그냥 끊고 싶었지만, 전명헌을 생각해서 답을 내주었다.

“미래자동차가 1차 발표에서 탈락한 이유는 수소자동차가 크게 작용했던 모양이네요. 셰브롱은 회장님이 미는 수소 체계와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수소 체계가 문제였다고?

순수 2차 전지는 승용차에, 대형 출력이 필요한 건 수소 연료 전지로. 그것이 미래자동차의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수소는 셰브롱의 에너지 밸류 체인과 완전히 동떨어진 체계였다. 유재원의 말 그대로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셰브롱은 미래자동차를 키워서 에너지 시장에 잠재적 적군을 키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후 전재근은 유재원에게 앓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2차 라인업에 포함되는 걸 노렸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미래자동차보다 더 최악인 업체도 있었다.

-폭스바겐 그룹 주가 대폭락!

독일 자동차의 자존심 폭스바겐 그룹이었다.

-225유로 붕괴! 200유로 붕괴!! 180유로 붕괴!!

-끝없는 추락, 그 원인은 슈퍼 차지 연합으로부터의 배제.

-BMW와 벤츠도 위험. 독일의 자부심 자동차 산업. 이대로 무너지나.

디젤 게이트가 터질 때만 해도 망할 듯 보였지만, 결국 독일 정치권과 법원의 강력한 비호와 폭스바겐의 강력한 로비로 배상 금액을 최대한 축소하면서 무난하게 진행 중이었다.

디젤 게이트가 터졌을 때만 해도 160유로 선이 무너졌는데, 얼마 전에는 1주에 250유로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런 폭스바겐의 주가가 셰브롱의 슈퍼 차지 개방의 1차 라인업이 공개된 직후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1차 라인업에 포함되지 않은 건 예상했던 일이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슈퍼 차지의 작동 방식에 대해서 완성차 업계나 주식 시장은 어지간한 상세 리포트를 한 번씩은 받아 봤으니 말이다. 폭스바겐처럼 커다란 대형 완성차 업계에도 바로 적용시키기에는 무리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주가가 폭락한 것은 폭스바겐이 슈퍼 차지에 관한 그 어떠한 협상도 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배제되었다는 게 알려진 탓이었다.

셰브롱의 명분은 간단했다.

-합작 기업과 재판이 진행 중인 만큼, 재판의 결과를 확인하고 결정할 계획.

재판이라는 건 당연히 폭스바겐의 디젤 게이트 재판이었다.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던 폭스바겐이었고, 이에 대해 희생양으로 점쳐진 로버트 양이 미국 국회에서 폭스바겐의 밀러 CEO가 했던 조작 지시를 그대로 폭로했다.

그렇지만 로버트 양의 폭로는 폭스바겐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미 재판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기도 했고, 독일의 수사기관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폭스바겐이 망하면 독일 경제에 치명타가 되는 만큼 적당히 넘기자는 내부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밀러는 폭스바겐 CEO직을 사임했다.

심지어 디젤 게이트가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들도 많았다.

셰브롱에서 이 사건을 걸고넘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디젤 게이트의 시작은 유재원이었다. 폭스바겐 측에서는 일을 키운 유재원에 대한 억지 맞고소도 진행했다. 사건을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 발표해서 폭스바겐의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 재판도 디젤 게이트 사건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것들이 폭스바겐에 외통수로 작용한 것이었다.

디젤 게이트 재판이 최종심으로 마무리될 때는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고, 그때까지는 슈퍼 차지 시스템에 가입이 불가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1심 판결에 승복하고 상고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선순위에 들지는 불투명했다.

그러면 폭스바겐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체적으로 전고체 배터리를 만드는 것인데, 당연히 현실성이 없었다. 수십 년 연구한 업체들도 전고체 배터리의 기술적 난이도에 나가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관련 기술이 전무한 폭스바겐 그룹이 뭘 해 볼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모든 요소들을 따져 본 투자자들은 폭스바겐 그룹 주식을 내던졌다. 이것만으로도 대폭락을 일으킬 요소였는데, 여기에 더 큰 파도가 밀려왔다. 공매도 전문 헤지 펀드인 시트론 리서치의 참전이었다.

시트론 리서치는 현재 폭스바겐의 주가는 엄청난 과대평가이며, 미래 전기자동차 시대에 대한 대비가 완성차 업계에서 최악이라는 리포트를 내며 공매도 폭탄을 투하한 것이었다. 그러자 바다에서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들처럼 세계의 헤지 펀드들이 폭스바겐 공매도에 동참하면서 최악의 폭락을 기록한 것이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번 폭락이 유럽판 블랙먼데이의 시발점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폭스바겐 그룹 사건은 유럽이 4차산업혁명의 핵심 밸류 체인에서 배제되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와도 같았다. 하필이면 셰브롱의 발표는 금요일이었다. 주말동안 쌓이고 쌓인 공포심은 기관이나 투자자 할 것 없이 매도 버튼을 미친 듯 누르는 것으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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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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