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957화 (957/1,007)

933회

인피니티(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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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랑드 대통령의 전용기가 제주도로 내려오고 있던 그때.

미국 캘리포니아 샌 라몬에 자리한 셰브롱의 본사에서도 중요한 이야기가 진행 중이었다.

프레더릭의 별세 후 셰브롱은 크게 흔들릴 것이란 월 가의 예상을 뒤집고 이사회의장에 티파니, CEO에 리사 배리라는 새로운 투톱 체제를 완성했다.

프레더릭 체제에서도 어지간한 신생 기업 못지않게 혁신을 지속했던 그 움직임이 티파니 체제에서는 보다 가속화되었다.

석유 산업을 꽉 잡고 있는 세븐 시스터즈 중에서 가장 빠르게 전기 자동차에 대한 대책을 시작한 덕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운영되던 셰브롱의 주유소가 라이트닝 볼트와 손을 잡고 배터리 교환 시스템을 늘려나가면서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른바 슈퍼 차지 시스템이었다.

라이트닝 볼트의 본사가 자리한 제주도의 GS칼텍스에 처음 설치되었던 슈퍼 차지는 곧 태평양을 건너 실리콘 밸리에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슈퍼 차지 시스템은 전 세계 모든 셰브롱 주유소에 자리했고, 더 나아가서 오로지 전기차 전용 슈퍼 차지 시스템만 있는 스테이션이 도시 곳곳에 설치되었다.

“그, 결과 배터리 교환 수익이 가솔린 판매 수익을 넘어섰습니다.”

리사 배리 CEO의 발표에 이사회 회의가 진행 중인 공간에 감탄이 가득해졌다.

물론 셰브롱 그룹 전체에서 가솔린 매출액을 넘었다는 게 아니라, 셰브롱 주유소에서 발생하는 소매 매출 안에서만을 이야기했다. 셰브롱의 사업 영역은 주유소를 통한 직접 판매뿐만이 아니라 B2B의 비중이 더 컸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가솔린 매출을 배터리 교환 수익이 넘어섰다는 의미를 애써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매일매일 새로 팔리는 자동차 중에 최소 2/5는 전기자동차였고, 앞으로 전기자동차의 점유율은 더욱 확대될 거라는 예측이었다.

그렇게 팔리는 전기자동차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라이트닝 볼트의 자동차였다. 중국이 자체 내수 시장에서 전기자동차 보급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만들어 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반대로 90년대부터 전기자동차 보급에 힘을 썼던 ID 그룹과 셰브롱은 이제야 제대로 된 결실을 맛보는 중이다.

셰브롱 자체적으로 슈퍼 차지의 매출이 가솔린 매출을 뛰어넘는 시점은 2017~2018년 사이였다. 이걸 최소 3년이나 앞당긴 것이었으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건 당연했다.

매년 셰브롱으로부터 큼지막한 배당을 받아 가는 이사회로서는 너무나도 좋은 소식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해선 안 됩니다.”

거기에 티파니가 찬물을 부었다.

“네, 의장님의 말씀 그대로 여기에 안주했다간 언제 또 따라잡힐지 모릅니다. 특히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은 무섭습니다.”

티파니의 말을 받아서 발표를 이어가는 리사 배리는 간단한 제스처로 벽면에 띄워진 슬라이드 쇼를 넘겼다.

거기엔 중국의 공격적인 에너지 정책이 담겨 있었다.

중국은 아직도 리튬 이온 배터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신 무지막지한 생산 능력과 저렴함을 바탕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아직도 커다란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작년에 발표된 3세대 전고체 배터리의 셰브롱 납품량은 월 100만 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월 100만 개라고 하면 굉장해 보이지만, 전 세계를 커버해야 하는 셰브롱에겐 코딱지만 한 규모였다. 반대로 라이트닝 볼트 오너들은 누구나 3세대 배터리 팩을 원했다. 무게 대비 에너지량이 차원이 달라지며 배터리 팩 하나로 주행할 수 있는 거리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볼트의 기념비적인 1세대 뉴로 자동차는 배터리 팩 2개를 넣어야 400km를 주행할 수 있었다. 히터를 켜거나 에어컨을 켜게 되면 주행 거리는 더 짧아진다.

3세대 전고체 기술이 적용된 배터리 팩은 1개로 1,200km를 달릴 수 있다. 2개를 다 채우면 2,400km를 달린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연비를 자랑했다. 히터와 에어컨을 동시에 틀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량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셰브롱에서는 3세대 배터리 팩으로 교환하는 건 프리미엄 서비스로 가격을 조금 높였다. 1세대 배터리 팩의 교환 비용이 5달러였다면, 3세대 배터리 팩은 22달러였다. 3배도 아니고 4.4배가 오른 가격이었지만, 오너들은 모두 3세대 배터리 팩을 찾았다.

그야말로 배터리 대란이었다.

오죽하면 셰브롱은 주유소 업계 최초로 예약 앱을 만들었다. 전 세계 셰브롱 주유소의 배터리 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예약을 걸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프리미엄 멤버십 서비스도 런칭했는데, 매월 유지비를 내면 예약 없이도 3세대 배터리 팩을 교환받을 수 있는 서비스였다.

3세대 전고체 배터리가 광범위하게 보급되면 사라질 서비스들이지만, 그 시점은 너무도 멀었다. 배터리를 원하는 곳이 너무나 많았던 탓이다. 문제는 생산 능력이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일단 3세대 전고체 배터리의 전극으로 그래핀이 쓰이는데, 그래핀의 수율을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충전재가 리튬에서 나트륨으로 바뀌었음에도 생산 원가가 더 올라간 이유가 그래핀 전극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존의 리튬 배터리가 치고 들어올 공간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브롱의 긴장감이 크진 않았다.

어차피 3세대 전고체 배터리의 생산량이 안정 수준에 올라오면 해결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대신 지금 프리미엄 맴버쉽 서비스로 높은 수익을 보고 있는 중인데, 지금의 수익률을 3세대 전고체 배터리가 대량으로 풀린 다음에도 유지할 수 있을지가 셰브롱의 당면 과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뭘 해야 한다는 거죠?”

누군가의 말에 리사 배리 CEO는 슬라이드를 다시 넘겼다. 그러자 두 개의 단어가 새롭게 나타났다.

-슈퍼 차지 오픈 서비스.

-스마트 그리드 파워 시스템 구축.

“오픈 서비스? 뭘 오픈하는 겁니까?”

“배터리 교환 서비스입니다. 슈퍼 차지 시스템은 현재 라이트닝 볼트의 차량에만 적용되고 있지요. 이걸 모든 전기차종에 제공한다면 우리는 전기자동차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도 지금의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리사 배리 CEO의 말에 회의실에 있는 이사들의 시선이 티파니를 향했다.

전기차 업계에서 라이트닝 볼트는 독보적 존재감을 자랑했다. 매년 수천만 대를 팔아치우는 점유율도 무지막지했지만, 유일한 배터리 교환식 전기차이기도 했다.

다른 전기차 업체들, 그러니까 테슬라, 루시드 모터스 리비안, 니콜라와 같은 미국의 신생 전기차 업체들이나 기존의 GM, 포드, 르노, 벤츠 등등의 메이저 업체들이 내놓는 전기자동차 모두 내장식 배터리였다.

교환식이 일반 가솔린 차량의 주유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배터리를 교환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교환식 카트리지의 설계부터 인프라 구축까지 대형 자동차 업체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셰브롱 역시 프레더릭의 전폭적인 지원과 유재원과의 합작이 아니었으면 현실성 없는 계획으로 여겼을 것이다.

“슈퍼 차지를 다른 전기자동차 업체에도 개방한다는 말이지요.”

이사회에 자리한 이들 모두가 단번에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했다.

지금 슈퍼 차지의 대상은 라이트닝 볼트의 차량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셰브롱 주유소의 글로벌 가솔린 매출을 슈퍼 차지가 능가했다는 것에 놀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 차지 서비스를 다른 전기차 업체에게도 열어준다면?

전기자동차 시장에서 충전 서비스를 독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하겠다는 업체는 많습니까?”

“애초에 이 제안이 테슬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이후 전기자동차 업체들은 물론 GM, 포드와 같은 완성차 업체들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전기자동차 업체들의 지상 최대의 고민은 배터리였다.

기존 자동차에서 제일 비싼 부품이 엔진이었다면, 전기자동차는 배터리였으니 말이다. 단적으로 라이트닝 볼트에서 판매 중인 3세대 뉴로 자동차의 가격은 2만5천 달러였다. 1세대는 2만 달러였는데, 두 번의 가격 상승이 있으면서 2만5천 달러가 된 것이다.

여기에 각종 개인화 옵션과 럭셔리 옵션, 퍼포먼스 옵션을 추가하면 할수록 가격이 크게 상승해서 5만 달러짜리 견적도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구매자 대부분은 기본 옵션인 2만5천 달러짜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아무도 2만5천 달러를 모두 자기 돈으로 내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연방과 주별로 전기자동차 구매 시 지원되는 보조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조금을 최대한 적용받는 사람이라면 1만 달러에 구매도 가능했다.

전기자동차라면 4만 달러에 달하는 일반 가솔린 차량의 퀄리티를 1만 달러에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제공되는 편의 옵션은 차원을 달리했다. 뉴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연간 수천만 대를 팔아치우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가능한 건 배터리 교환식이기 때문이다. 배터리 내장식이라면 자동차 가격으로 2만 달러는 상승했을 테니까.

테슬라 자동차 역시 이러한 포인트를 알아보았기에 슈퍼 차지 서비스를 자사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던 것이다.

셰브롱의 입장에서도 슈퍼 차지의 고객이 라이트닝 볼트의 오너들에 한정되어 있던 게 풀리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ID 그룹 유 회장님의 의중이겠군요.”

슈퍼 차지 규격은 라이트닝 볼트에서 설계한 것이었다. 그리고 슈퍼 차지에 제공되는 교환용 배터리 팩의 소유는 ID 그룹, 라이트닝 볼트, LG이노텍, ID 웨스팅하우스, 셰브롱으로 지분이 공평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참고로 ID 웨스팅하우스가 슈퍼 차지 시스템에 지분이 있는 이유는, 슈퍼 차지에 공급되는 전기가 ID 웨스팅하우스의 토륨 원자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고체 배터리도 충전을 위해서는 고압의 전기가 필요했는데, 토륨 원자로 덕에 그 어떤 발전소보다 싼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셰브롱의 지분도 20%로 제법 크지만, 나머지 80%는 실질적으로 유재원의 소유인 것이었다.

덕분에 이사회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이 다시 티파니에게로 모였다. 티파니는 그들을 보며 간단히 답했다.

“그이도 슈퍼 차지 플랫폼의 개방에 동의했습니다.”

유재원이 슈퍼 차지 플랫폼 개방에 동의한 건 복합적인 이유였다.

라이트닝 볼트에는 마이너스였지만, 크게 보면 전기자동차 업계와 배터리 업계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덤으로 중국의 리튬 이온 배터리 사업에 마침표를 강제로 찍어줄 수도 있다.

이것이 유재원이 그리고 있는 배터리 사업의 미래였다. 전고체 배터리에서도 리튬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굳이 나트륨으로 옮긴 것도 중국 견제의 측면이 절대적이었다.

“그럼, 끝났군요.”

이사회에서도 반대는 전무했다.

복잡하게 따질 것도 없이 플랫폼을 개방하는 것만으로 미래 자동차 시장의 배터리 부분을 싹쓸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스마트 그리드 파워 시스템은 뭐죠?”

자연스럽게 안건은 두 번째로 넘어갔다.

“슈퍼 차지 플랫폼 하나만으로 우리 셰브롱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2차 전지를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 기업입니다.”

셰브롱 주유소 1개 업소에 재고로 보유하고 있는 배터리는 최소 6팩이었다.

대도심에 자리해서 회전율이 빠른 업소의 경우에는 20팩 넘게 보유하기도 한다. 배터리 교체를 위해 자동차가 연달아 진입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전기자동차가 막 등장했을 때만 해도 배터리 한 팩을 고압 쾌속 충전으로 완충시키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3세대 전고체 배터리라면 완충하는 데 8분이면 충분하다. 그렇기에 여분의 배터리를 많이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사라졌다.

물론 조금 전 플랫폼을 개방한다고 결정했으니, 이용객들이 대폭 증가하는 건 자명하겠지만 충전 속도도 빨라지면서 많은 재고가 필요 없어졌다.

상식적으로 구식 배터리는 다 처분하고 모두 3세대 전고체 배터리 팩으로 완비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그렇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LG이노텍이 미국과 유럽에도 직영 생산 공장을 만들고 있다지만, 완공까지는 아직도 1년이나 남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추가 생산 라인이 완공이 되어도 배터리의 수요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고안된 사업이 스마트 그리드 파워 시스템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만, 요점은 배터리로 전기를 저장하고 있다가 전기 수요가 급등하는 시간에 높은 값에 팔겠다는 것이었다.

“에너지 스토리지 사업이군요. 타당성이 있습니까?”

슈퍼 차지 시스템의 개방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셰브롱 이사진이었지만 스마트 그리드 파워에는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전기의 가격이 너무도 저렴해서 채산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라면 있어야 할 캘리포니아 대정전도 토륨 원자로 덕에 일어나지 않으면서 위기감이 상당히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티파니와 리사 배리 모두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스마트 그리드 파워 시스템도 유재원과 먼저 상의해 봤던 사업이었고, 강력 추천이라는 답신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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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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