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회
인피니티(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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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전부터 유재원과 각이 섰던 독일이었다.
-강인공지능의 코어 마인드에 인류 철학의 정수를 담는 것 환영.
-다만, 인문학 연구소의 주체가 영리 기업이라는 것이 문제.
-기업의 영리 활동의 하위로 철학이 부속되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음. 또한, 한국인만을 고용하는 데에 사상적 편중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
독일 뮌헨 대학 소속 마르쿠스 가브리엘 교수의 5페이지 분량의 성명을 3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쳇, 그러면 자기들이 먼저 좀 나서서 해 주든가.”
인공지능 골드가 이 세상에 등장한 지는 이제 곧 20년째가 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인공지능과 인류의 상생을 위한 철학적 연구는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많이 다뤄진 게 미래의 모습을 그린 영화와 소설 정도였다. 학문적으로는 진짜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도전 성공 이후에 논문이 좀 나왔는데, 강인공지능 완성에 도움을 줄 만한 건 없었다.
그렇기에 퀀텀 프로젝트의 성공이 시급한 유재원은 직접 인문학 연구소를 차렸건만, 다른 사람들에겐 뭔가 또 일을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문제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인문학 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한다고 해서, 세계의 인문학계가 얼마나 반응해 줄지는 미지수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논문을 보고 재현해 볼 수 있는 이과의 논문과 달리 철학 계열 논문은 아주 주관적이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걸 의심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학문이 철학이었기에, 논문 하나를 내서 끝장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완성도가 높은 논문이라도 즉각 진리로 증명되기가 불가능 때문이다. 억지로 시빗거리를 찾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끼워 맞출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르쿠스 가브리엘 교수나 여기에 동조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그냥 무시하는 게 답으로 보였다.
“차라리 인종 차별주의자로 대응해?”
유재원은 마음만 먹으면 ‘한국인’이라는 단어와 ‘사상적 편중’을 가지고 충분히 인종 차별로 이슈를 끌어갈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최후의 수단이지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냉정하게 따져 보면 우려의 시선도 충분히 가능했다. 한국 학계는 그야말로 고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점을 우려해서 유재원은 박사급 권위자들의 구성은 해외의 저명한 학자들도 최대한 스카우트 할 계획이었다.
한참 생각해도 좋은 수가 나오지 않을 때엔 차선책이 있다. 고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유재원 주변에는 세계 최정상급의 인재들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음, 이번엔 이분께 먼저 물어볼까?”
유재원은 스마트폰의 주소록을 띄웠다. 거기에서 a자로 시작하는 목록 중에서도 제법 상위에 있는 이름을 선택했다.
알프레드 집사님이었다.
비록 유재원과는 고용 관계였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알프레드 집사님이 주도했던 모나리자 복원 작업과 교환 작업에서 그 어떤 잡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를 증명했다.
복원 작업 중 중간에 정보가 샜다면 이렇게나 매끄럽게 완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의 한국 문화재 반환에서 미리 전문가들을 프랑스에 파견해서 검증을 하고, 포장을 하는 작업을 총괄해 준 사람도 알프레드 집사님이었다.
이제 남은 건 모나리자의 프랑스 반환이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올랑드 대통령이 직접 전용기를 타고 와서 모나리자를 가져갈 거라고 했다.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의 방한 이후 두 번째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이었기에, 정부에서도 긴밀히 준비 중이었다.
유재원에겐 문화재 반환을 두고 다이아몬드 반도체 물량을 어떻게 좀 손보려고 했던 것 때문에 비호감이지만, 그래도 제주도까지 와서 모나리자를 옮겨가는 건 높이 평가해 줄 만했다.
알프레드 집사님과의 화상 통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집사님, 잠깐 통화 괜찮나요? 집사님이나 우리 식구들 건강은 괜찮죠?”
-물론입니다, 마스터. 이곳 저택도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다.
알프레드 집사님의 반응은 여전히 정중했다.
티파니에겐 ‘아가씨’ 하면서 남다른 친근함을 보이지만, 유재원에겐 늘 마스터라고 하며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뮌헨 대학의 성명 때문에요.”
유재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철학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겁니다. 마스터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도 계실 테니, 그분들의 의견을 모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역시나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이 정도로 성에 차진 않았다. 문제의 완벽한 해결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유재원의 표정을 읽은 알프레드 집사님은 좀 더 강력한 의견도 제시해 주었다.
-이들도 마스터와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어 주시지요.
알프레드 집사님의 말에 유재원의 머릿속이 밝아졌다.
“오! 그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강인공지능의 코어 마인드 논문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응모를 받을 수 있고, 그들보고 제대로 된 걸 만들어 오라고 의뢰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논문 응모를 받으시고 나서 대상을 뽑으실 때, 따로 학계의 권위자들을 모아 검증단을 꾸린다면 마스터와 ID 그룹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걸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알프레드 집사님이다.
코어 마인드 논문을 응모 받는 것이나, 권위자들을 모아 검증단을 만드는 것이나 모두 좋은 아이디어였다.
여기에 이번에 신설될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도 참여해서 대결 구도를 만들어 낸다면, 기업이 철학에도 발을 뻗는다는 불필요한 논쟁은 피하면서, 학계의 적극적인 참여도 기대해 볼 만했다.
물론 이런 일에는 다 돈이 좀 들겠지만, 퀀텀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따진다면 충분히 투자할 만한 일이었다.
알프레드 집사님과 화상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바로 전략기획실과 비서실에 연락했다. 그러고서 본인의 톡톡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며칠 후.
-유재원 회장, 본인 SNS를 통해 철학계 우려 성명에 대한 답신 공개.
-강인공지능의 코어 마인드를 위한 논문 투고 받겠다. 학계와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평가할 것.
-투고 논문 검토를 위한 검증단은 누구나 인정할 권위자들로 구성할 예정.
-총 상금 규모는 1,000억.
-2016년 1월까지 응모 가능!
일을 키우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다.
무려 1,000억이나 꺼내 들었다. 1등에게 다 몰아주는 게 아니라 전체 상금 규모였지만, 1등은 500억이고, 20위까지도 억대의 상금을 책정했다.
일부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그냥 허공에 뿌린다고 생각했지만, 유재원은 퀀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돈을 쓸 수 있었다.
더구나, 현재 유재원이 매일매일 벌어들이는 순수입은 하루 1조 원을 일찌감치 초과한 상태였다. 인터넷과 IT 분야에서 공룡으로 자리를 잡은 ID 그룹이었고, 새로운 다이아몬드 반도체와 OLED 디스플레이 그리고 인공지능이 무지막지한 수익을 내주고 있었다.
1,000억 원이라고 해도 2시간 정도 기다리면 모이는 자금이었기에, 얼마든지 던질 수 있었다.
-유재원 회장의 SNS에 전 세계 인문학계 들썩!
-재조명되는 철학과 인문학! 서점에서 관련 서적 매출 급등!
유재원이 던진 한 방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뮌헨 대학교의 마르쿠스 가브리엘 교수는 자신의 진심 어린 성명을 돈으로 모욕했다며 노발대발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시원찮았다. 어제만 해도 마르쿠스 가브리엘 교수에게 동조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각자 논문을 준비하기에 바빴으니 말이다.
덕분에 유재원의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 정식 채용 공고는 아무런 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 신설에 따른 공채 계획 발표.
-인문 계열 박사 이상의 이력을 보유한 경력직 500명.
-연구 보조와 사무 처리 등 신입 인문 계열 2,500명.
-지원서 접수 4월 30일까지.
특이 사항으로 경력직은 국적 무관이었고, 근로 계약의 형식은 계약직이었다.
계약직하면 한국에서는 그다지 좋은 느낌을 주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계약직은 임원 계약과 비슷했다. 연봉은 억 단위에서 시작하고 사택과 인력도 제공되었으니 말이다.
모집 인원만 봐도 단독으로 연구 과제를 수행할 경력자에게 5명의 조수를 붙여줄 생각으로 설정한 인원이었다.
연구원의 보조가 될 일반 신입 공채 대상자는 유재원이 유튜브에서 공지했던 그대로 인문계라는 조건 말고는 없었다.
참고로 2014년 기준으로 ID 그룹의 신입 연봉은 6,600만 원 선이었는데,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도 이와 같은 체계를 적용할 예정이다.
-신입 2,500명 모집. 리얼이냐?
-제주도라는 게 살짝 걸리지만, 이 정도면 대박!
-제주도가 단점이라니는 녀석, 제주도 내려와 본 적 없지?
-집까지 제공해 주는데, 당장 지원한다!
대한민국은 유재원이 발표한 인문학 연구소 대규모 공채에 뜨겁게 반응했다.
지원서를 다운로드받기 위해서 홈페이지에 접속자가 폭주했다.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 박사 학위자들로부터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다양한 언어로 문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문의 폭주에 인사팀이 곤란한 건 없었다.
언어의 문제도 이제는 인공지능 골드 덕에 완벽히 해소된 덕이다.
ID 그룹에서도 대규모 공채를 치를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지원자들을 놓고 평가 방식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유재원이 하달한 최고의 평가 요소는 ‘인성’이었다.
인성이라고 하면 너무나 고리타분하게 들리지만, 조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유재원이었다.
회귀 전에는 능력만 보고 채용했다가 회사의 기밀들이 술술 털렸고, 나중에는 매수된 동료들이 법정에서 거짓 진술도 하는 최후의 통수도 거하게 쳤다.
인성 바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거한 뒤통수를 치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인문학 연구소에 근무하게 될 일반직군은 엄청난 재능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상사의 지시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사무직 업무인 ID 오피스를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다. 같은 인문 계열 졸업자라도 서울과 지방 대학교마다 능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건 사실이지만, 실무에 들어가면 그 차이는 지극히 작아진다.
강인공지능의 인격 형성을 위한 기초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니만큼, 지시받은 것을 제대로 수행하는 게 중요하다. 일을 설렁설렁한다거나 본인의 주관을 투영하는 등의 일은 지극히 삼가야 했다.
특히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게 질이 나쁜 사이트의 유저가 본인이 있는 사이트의 유저만 알아볼 수 있는 은어들을 작업물에 숨겨 놓고 자기들끼리 돌려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그냥 별 의미 없는 은어들이라도 문제였지만, 이들이 약자나 대형 참사의 피해자들을 비하하는 걸 즐긴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 강인공지능의 코어 마인드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서 일반 대화 중에 질 나쁜 은어들이 툭툭 튀어나오게 되면 대참사 아니겠는가.
실제로 다른 기업들의 자연어 처리 인공지능에서 비슷한 참사가 벌어진 일이 빈번했다. 아시아인, 흑인, 유대인 등등 인종 차별이라든가, 각종 혐오의 말이 그대로 터져 나와서 서비스를 중단한 업체가 수두룩했다.
그나마 그런 사고가 적었던 것이 인공지능 골드였다.
인공지능 골드의 자연어 학습은 2CH.com에서 시작했고, 점차 각국의 대표 커뮤니티 사이트로 확대했다.
그런 학습을 1990년대부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미비점을 파악하고서 욕과 은어 학습을 시작한다고 해도, 시간의 차이는 절대 극복하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방대한 욕 데이터베이스 때문에 인공지능 골드의 말투가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약점을 파고든 게 실리콘 밸리의 신생 인공지능 업체들이었는데, 아직도 상용화에 성공한 업체는 없다는 것이 자연어 처리의 난이도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심지어 인공지능 골드도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실시간으로 학습을 했는데, 미처 걸러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게다가 유저들도 온갖 방법으로 필터링을 회피하려고 했다.
물론 ID 그룹의 인사 프로세스라든가 인공지능 골드가 자체적으로 학습하는 욕과 은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포착되어 걸러질 테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건 모르는 법이다.
마치 창과 방패의 끊이지 않는 대결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특정 커뮤니티 유저들의 입사 금지 따위를 공지하면 그건 또 차별금지법에 걸리기 때문에 알아서 잘 걸러내는 것밖에 답이 없다.
“똥 무섭다고 장 못 담그면 그것도 말이 안 되지.”
더구나 지금은 손해 배상 소송 제도가 전과 달라져 있다.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처럼, 기업의 이미지를 고의적으로 훼손했거나, 치명적인 손실을 끼친 개인에게도 손해 배상 소송을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심력을 쏟을 일도 아니었기에, 유재원은 ID 그룹 인사실이 보낸 공채 계획에 전자서명을 넣고 클릭했다.
이로써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 개관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시간이 더 흘러 4월 30일.
프랑스에서 올랑드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방한했다.
올랑드 대통령의 전용기는 서울 성남공항에 우아하게 착륙했다. 이후 바로 청와대에 가서 정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환담을 나눈 시간은 불과 30분도 되지 않았다. 방한한 목적은 정치적인 이슈나 경제 협력이 아니라 모나리자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랑드 대통령의 마음은 그냥 제주도로 직행이었지만, 세계 경제에서 존재감이 한층 강화된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형식적인 예방만 하면서도 경제 협력과 친선, 우호 등의 말을 하면서 예방을 마친 올랑드 대통령은 청와대 만찬이나 기자회견 등의 행사는 모두 넘겨버리고, 다시 제주도로 날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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