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회
인피니티(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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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보유한 한국 문화재 중에 제일 유명한 건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처럼 들리지만,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곧바로 직지 혹은 의궤라는 답이 즉각적으로 나올 것이다.
직지는 직지심체요절을 뜻하고 의궤는 조선왕실의궤를 의미한다.
이메일에 첨부된 문화재 목록에는 문화재 반환의 상징성과 같은 직지와 의궤가 빠져 있었다. 참 친절하게도 리스트 상단에 주석을 만들어서 그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이 두 가지 문화재는 루브르 박물관 소유가 아니라 프랑스 국립박물관 소유라는 것이다.
협상에서 오해가 생기지 않기 위해 미리 공지를 하는 거라는 친절한 코멘트와 함께 말이다.
“오해라니? 그냥 도발아니야?”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유재원은 모나리자 콘퍼런스에서 프랑스에 했던 제안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튜브나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도 그 내용이 올라가 있었다.
그때 유재원은 분명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 전부’라고 말했다.
루브르에 있든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든 유재원은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유재원은 양심적으로 국가 소장 문화재만 말했다. 프랑스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양도 상당하지만, 그건 그냥 1:1 거래로 가져오면 되는 일이었다.
40일을 고민해서 나온 결과가 이 정도라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안 되겠네.”
유재원은 바로 해당 이메일을 비서실로 전달했다. 그러면서 실망스럽다는 코멘트를 첨부했다. 물론 실망의 원인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다음 날.
-프랑스 정부, 모나리자와 한국 문화재 교환에 동의.
-프랑스 보유 한국 문화재 리스트, ID 그룹에 전달.
-유재원 회장, 프랑스 측 리스트에 큰 실망.
-직지와 의궤 모두 빠진 반쪽짜리 리스트.
프랑스에서 보낸 리스트가 전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기사에 용량 제한이 없는 인터넷 신문들은 아예 리스트 전체를 공시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은 10만 개에 달하는 방대한 리스트에 놀랐고, 전문가들은 직지와 의궤처럼 중요 문화재가 빠진 것에 분노했다. 일각에서는 그냥 모나리자를 한국에 그대로 두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렇게 한국의 여론이 급변하자 당황한 것은 프랑스였다.
올랑드 대통령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다. 리스트의 양만 많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빼놓은 건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ID 그룹과 이것저것 협상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건 얻어내자는 것이다. 그걸 꼭 모나리자와 관련된 것으로만 한정한 게 아니었다.
ID 그룹이 보유한 이권은 상당했다. 그중에서 제일 강력한 것은 역시나 다이아몬드 반도체였다. ID 클라우드 시스템의 업그레이드 작업이 끝나면서 시중에 대량으로 풀리는 다이아몬드 반도체였지만, 여전히 수요가 공급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에 깔린 구식의 실리콘 기반 제품을 모두 다이아몬드 반도체 기반 제품으로 교체하려면 어마어마한 물량이 필요했다.
다이아몬드 반도체의 공급량에서 프랑스를 우대한다는 조건만 가져와도 바닥을 뚫고 들어간 지지율을 회복할 수 있고, 프랑스 기업에도 이익 아니겠는가.
유재원은 그런 프랑스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바로 공론화를 해 버린 것이었다.
당장 프랑스의 문화재 반환에 큰 기대를 하고 있던 한국의 사학자들이 크게 일어났다. 문화재는 예술적 가치도 가치였지만, 역사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실물이 들어오면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될 건 당연했다. 특히 직지는 한국의 인쇄술 연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료였기에 더욱 중요했다.
그 때문에 관련 학자들은 유재원의 프랑스 강탈 문화재와 모나리자의 교환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는데, 이번 일로 너무나 큰 실망이었다.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단순히 공론화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졌다.
-다이아몬드 반도체 공급은 시장 원리에 따라 이뤄질 것.
일단 올랑드 대통령이 그나마 실익을 챙기려고 했던 다이아몬드 반도체부터 못을 박았다.
-모나리자,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로 옮긴다.
덤으로 드림 스타디움에서 지금까지도 전시 중이던 모나리자를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제주도로 말이다.
제주도는 여전히 환상의 섬이었다.
전 세계 공항 중에 가장 운항 횟수가 많은 노선은 서울-제주도 노선이었고, 연간 8만 회에 가까운 비행기 운항이 이뤄진다. 하루에 290회나 비행기가 오고 갔다.
국토가 큰 미국이나 비자 없이 나라를 넘나들 수 있는 유럽 연합의 노선을 뛰어넘는 횟수를 자랑했다.
그만큼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9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웰빙 문화는 IMF 때 살짝 위태롭기도 했다. 하지만 IMF의 극복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빨랐고, 부작용도 거의 없었다. 국가의 경쟁력이 떨어져서 생긴 위기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외화가 말라 버려서 생긴 위기였던 탓이었고, 미국의 IT 붐에 한국이 절묘하게 편승하면서 IMF가 멋대로 국가 경제 시스템을 손보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이후에는 매년 4%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였다. 그에 따라 국민의 가처분 소득이 크게 늘어났고, 소비품의 품목에도 다양화와 고급화가 이뤄졌다.
그와 함께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크게 늘어났다.
해외 여행지에서도 한국 사람들을 찾아보는 게 쉬울 정도다. 이러한 트렌드에 따라 TV에서도 여행지를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예능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러한 여행의 대유행 속에서 국내 여행도 찬밥은 아니었다. 캠핑이나 트레킹, 낚시 등의 문화가 새롭게 일어났으니 말이다. 이러한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최고는 여전히 제주도였다.
아예 하루 290회의 이착륙이 이뤄지는 노선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은 사시사철 제주도를 찾았다.
이런 제주도에 90년대 중반부터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던 사람이 유재원이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제주도에 대한 투자는 현재 진행형이었고, 투자금의 누적 금액은 10조 원에 육박할 정도다.
빈말이 아닌 게 전 세계를 아우르는 최대 전기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라이트닝 볼트의 본사가 제주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의 본사가 제주도에 있게 되면서 여러 협력 업체들도 제주도로 들어왔다. 또한 ID 그룹의 대형 계열사 중 아시아 사업부의 본부를 제주도에 두는 곳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P마켓이었다.
여기에 원더랜드라는 세계구급 테마 파크도 만들었고, 테마 파크 바로 옆에는 초대형 호텔 리조트도 연동시켜 놓았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제주도 해안에서 경치가 좋은 곳은 모두 매입해 리모델링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주도민과의 상생을 위해 카페 조합이니 해녀 조합이니, 자영업자 조합이니 하는 조합들을 만들어서 제주도의 발달과 도민들의 소득이 비례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공급에서 육지와 가격 차별이 있었던 것도 완전히 해소되었다. 셰브롱과 금성석유의 합작 회사인 금성칼텍스를 통해 난방용 기름이나 가스 등이 육지와 같은 가격으로 공급되면서 그 혜택을 도민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제주도에서 휘발유와 디젤 차량이 운행되는 게 전면 금지되면서 기름 수요가 크게 줄긴 했지만, 난방은 여전히 기름이 대세였기에 아직도 유효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제주도의 발달이 제주도민과 괴리되는 일은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실제 통계 수치로도 이러한 데이터를 즉각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게 지역별 1인당 소득이란 항목이다. 해당 통계가 만들어진 다음부터 2000년 중반까지 1위를 달리던 울산을 최근 능가하는 게 제주도였다.
물론 수치상으로 확인되는 것 이상으로 그냥 제주도를 둘러보기만 해도 달라진 게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주도의 발전을 이끌어낸 유재원은 제주도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단순히 그냥 인기가 많다는 게 아니다. 제주도에서 가장 끈끈한 이해관계인 괸당에서도 유재원의 이름은 제일 높이 있었다.
괸당이 드러나는 가장 치열한 싸움판은 역시 정치였다.
정치는 같은 성향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관건이었는데, 괸당 문화에서 정치 성향은 뒷전이었다.
90년대 이후부터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엔 제법 큰 영향력을 가진 인사가 통일국민당 공천에 탈락했고, 그에 불복해서 다른 당 깃발을 들고서 선거에 나왔다. 반면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은 이는 매우 젊고 혁신적이었지만, 인지도는 떨어지는 신인이었다.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불복한 사람이 무난히 당선되는 그림이었겠지만, 결과는 정치 신인의 승리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90년대 말부터 제주 특별자치도 도지사는 늘 통일국민당이었고, 제주시와 서귀포시 국회의원들도 통일국민당이 되었다.
다음 날.
-화제의 진본 모나리자, 프랑스 아닌 제주도로?
-모나리자의 안치될 제주도 인문학 연구소란?
ID 그룹의 전용기인 a380에 모나리자가 실려 제주도로 이륙하던 날 나온 기사였다.
제주도의 실질적인 대주주인 유재원이 최근 제주도에서 벌이는 큰 공사가 있으니, 초대형 인문학 연구소를 올리는 것이었다.
위치는 제주도 동쪽의 성산리로 일출이 일품인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곳이었다.
이미 A동 건물은 완성이 되었고, B동과 C동이 지어지는 중이다. 건물 하나짜리 연구소가 아니라, 대학교 캠퍼스와 같은 대형 시설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옮겨질 건물도 A동의 연구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인문학 연구소일까?
그것은 퀀텀 프로젝트 그리고 인공지능 골드의 신경망 확장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신경망 확장 사건은 유재원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단순한 기계 학습 인공지능이 인공 인격이 있는 강인공지능으로의 진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퀀텀 프로젝트가 성공해 양자 슈퍼컴퓨터가 완성된다면 가능성은 거의 확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강인공지능의 등장이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베이스로 깔릴 기본 철학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건 당연했다.
인공지능 판검사의 도입이나 미국의 국가 인공지능 포레스탈이 셋업되었을 때, 당연하다는 듯 빅 브라더 논란이 터져 나왔다.
강인공지능은 빅 브라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슈였다. 대단한 기술적 진보였지만, 그 파급력도 남달랐다. 네티즌들이 인공지능 골드를 보고 스카이넷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하지만, 강인공지능은 진짜 그렇게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러한 미래를 일찌감치 예측했기에 로봇 3원칙이라는 걸 만들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생각하는 강인공지능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기술적 특이점을 달성하는 초강력 인공지능이었다.
실제로 유재원이 회귀 전 목도했던 21세기 중반의 기술적 특이점은 인류가 가진 지적 한계를 돌파해 마법과 같은 초현실적 기술이 쏟아져 나왔던 세계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술은 소수가 독점했고, 나머지 대다수의 삶의 질은 21세기 초반과 딱히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강인공지능의 통제가 강해져서 오히려 전보다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특히나 21세기 중반부터는 기후이변의 강도가 폭발적으로 강해지면서 사람들이 살 만한 환경이 더욱 줄어들었기에 특권층과 나머지의 구분은 더더욱 강력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통제를 완벽하게 수행했던 게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이었다.
당연히 유재원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기에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이 인류와 함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뤄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진리가 필요했다.
회귀를 준비하면서 마스터플랜을 세울 때, 강인공지능의 기반이 될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열심히 찾았던 때도 있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IT 관련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건 쉬운 일이었고,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과도 어느 정도 소통이 된 유재원이지만, 철학은 완전 미지의 분야였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소수에게 독점된 인공지능이 제대로 된 답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회귀 후 성공해서 자체적인 인문학 연구소를 만들어 강인공지능의 바탕이 될 진리를 찾자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퀀텀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부터 시작될 일이었는데, 다이아몬드 반도체의 성능이 기대 이상으로 뽑혀준 덕분에 부랴부랴 시작한 작업이었다.
시설의 완공이 끝나면, IT 혁명에서 소외되었던 철학과 인문학, 예술 분야의 인재들을 총망라해 강인공지능의 코어 마인드에 탑재될 진리를 찾는 연구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다만 이러한 청사진은 아직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대다수는 유재원의 개인용 예술품 전시관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부, 리스트 목록 아직 확정된 것 아니다.
-급하게 리스트를 만드느라 생략된 문화재 있을 가능성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긴급 속보로 나온 프랑스 정부의 발표는 항복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말을 좀 돌리긴 했지만, 직지와 의궤 등을 무조건 반환하겠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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