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회
인공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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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유럽 시장이 마감되었을 때, 폭스바겐 그룹의 주가는 –24%라는 하락률을 기록했다.
장 초반에 –44%를 찍었던 것에 비해서 장 마감 시점에는 주가를 꽤나 회복했다. 참고로 독일 주식시장은 가격 변동폭이 없었기에 이론적으로 –99%의 하락이나 100% 이상의 상승폭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하여튼, 폭스바겐 그룹의 주가가 시초가에 비해 20%나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뮐러 CEO의 발표 때문이었다.
-폭스바겐 그룹의 클린디젤 기술은 세계 최고.
-측정에 착오가 있었을 것.
-이번 논란으로 일어나는 손해는 모두 책임을 물을 것.
뮐러 CEO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로 당당한 모습을 밝혔다.
그러자 독일이나 세계의 투자자들은 적잖이 안심했다. 진짜로 배기가스가 모종의 조작이 이뤄졌으면, 뮐러 CEO가 이렇게 당당히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발 배기가스 조작 뉴스는 세종시 시장의 기자회견 말고는 정식으로 발표된 것이 없었다.
다음 날.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난 유재원은 아침 운동으로 이어지는 루틴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밀렸던 보고도 받고 뉴스도 확인했다.
당연히 폭스바겐 그룹의 뮐러 CEO의 전화 인터뷰 기사도 보았다.
“책임이라고? 더럽게 뻔뻔하네.”
디젤 게이트의 전모를 알고 있는 유재원이었기에, 뮐러 CEO의 빨간 거짓말이 그대로 보였다. 게다가 뮐러 CEO의 의도도 기사를 통해 통해 뻔히 읽을 수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희생양으로 몇 명 털고 끝낼 작정인가?”
일단 배기가스 조작을 명령했다고 대놓고 수긍하면 조작의 책임은 뮐러 CEO가 지게 된다. 반면 어제처럼 밑밥을 깔면서, 자기는 몰랐다는 식으로 하면 실무자 몇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빠져나갈 수 있다.
실제로 회귀 전 디젤 게이트는 실무진 몇을 희생양으로 삼고 실제 지시를 내린 고위층은 처단을 하지 못했다.
폭스바겐 그룹이 배상금을 지급하긴 했지만, 그것도 미국처럼 힘센 나라에나 전폭적인 배상을 했다. 다른 나라들은 1천 달러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한국은 제외였다.
결정적으로 폭스바겐 그룹이 있는 독일에서 배기가스 조작에 대한 수사는 미적지근하게 이뤄졌다.
잘못에 대한 단죄보다 폭스바겐 그룹이 망해서 독일 경제가 휘청이는 걸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폭스바겐 그룹은 파격적인 할인 행사를 하면서 다시금 소비자를 끌어모았고, 끝까지 잘나갔다.
그렇기에 배기가스 조작으로 어마어마한 환경 파괴와 소비자 기만을 해놓은 것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운 처벌로 끝이었다.
“이번엔 절대 그렇겐 안 되지.”
유재원은 뻔뻔하게 나오는 뮐러 CEO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그냥 화만 내는 게 아니라, 한창 달리던 사이클 머신에서 내려와서는 스마트폰에 새로운 앱을 실행했다.
대표 SNS 서비스인 톡톡이었다.
간단한 페이스 키 인증으로 로그인을 마친 유재원은 새로운 게시물을 작성했다.
-시티OS의 대기질 센서와 배기가스 포집기로 잡힌 데이터를 첨부합니다.
-데이터를 보면 클린디젤은 허상이고 세계적 단위의 사기입니다.
-배기가스 조작으로 시티OS도 피해를 본 만큼, 폭스바겐 그룹과 뮐러 CEO는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한 번 끝까지 가봅시다.
간략히 끝내는 평소 유재원의 톡톡과 달리 이번엔 문장이 많았다. 덤으로 배기가스 포집기로 뽑힌 정밀 분석 데이터를 첨부했다. 이재관 시장의 기자회견은 격정적이긴 했는데, 디테일이 부족했다. 그래서 배기가스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걸 보완해줄 증거 자료였다.
“전송.”
유재원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일단 유재원이 그간 SNS 활동을 하면서 ‘사기’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폭스바겐과 뮐러 CEO를 제대로 언급하면서 책임을 요구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기업의 오너나 CEO들도 SNS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긴 했지만, 보통은 홍보의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자기들이 맡은 회사들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내용은 어지간해서는 올리지 않는다. 더구나 월급쟁이 사장이나 CEO의 경우 소신 발언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반면 유재원은 거침이 없었다.
효과는 엄청났다.
유재원이 올린 톡톡은 곧장 리트윗되면서 사이버 세계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ID 그룹 유재원 회장, 클린디젤은 사기.
-유재원 회장의 다음 타깃은 폭스바겐 그룹? 뮐러 CEO를 향해 전면전 선포!
인터넷 매스컴을 시작으로 기사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저 인터넷 커뮤니티나 유명인, 연예인들의 SNS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면서 기사를 쓰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재원의 SNS는 최우선 순위 모니터링 대상이었다.
덕분에 톡톡에 글이 올라오자마자 관련된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게다가 유재원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어 기사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기사들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의 언론들이 유재원의 SNS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상식적으로 이번 사건을 보았을 때, 배기가스 조작은 거의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를 검증하는 방법도 어려운 건 아니다. 그냥 시중에 돌아다니는 클린디젤 마크 달고 있는 폭스바겐 차량을 가지고 검사소에서 검사를 한 번 하고, 배기가스 포집기를 단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하면 끝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사건의 진실이 뭔지 파헤치고자 하는 진짜 언론에서는 자체적인 검증을 시작한 상태였다.
“유튜브도 가자!”
유재원은 톡톡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본인이 보유한 제일 강력한 SNS 서비스는 톡톡이 아니라 유튜브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동영상을 만들 수는 없었다. 대신 배기가스 조작 관련한 내용을 올린 유튜버들 중에 제일 볼만하고 재미도 있는 것에 좋아요 버튼을 눌러줬다.
좋아요 버튼은 단순한 추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유튜브 사용자들의 성향 파악에도 쓰인다. 유재원의 톡톡 SNS 팔로워들 중에 유튜브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재원이 추천을 누른 동영상이 자연스럽게 그의 메인 페이지에 추천 영상으로 뜨는 식이었다.
또한, 빠르게 조회 수가 올라가는 동영상은 인기 조회 동영상으로 다시금 추천이 되면서 스노우볼을 크게 굴릴 수 있었다.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서 시간을 두고 확인해야겠지만, 며칠 지나면 유튜브에서도 배기가스 조작이 크게 다뤄질 것이다.
며칠 후.
유재원의 의도는 적중했다.
인터넷부터 공중파까지 배기가스 조작 이슈는 활활 타올랐다. 한국에서만 들끓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펄펄 끓어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배기가스 조작 차량은 세종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제일 오래된 연식은 2009년형 출시 차량부터 배기가스 오염도가 심각했다. 그리고 폭스바겐 그룹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벤츠와 BMW 같은 다른 독일 자동차 회사의 모델에서도 같은 조작이 보고되었다.
물론 독일 3사 중에서 제일 악질적이고 매연의 강도가 심한 건 폭스바겐이었다.
검사소에서 정지 상태로 측정했을 때와, 실제 운행 중에 발생하는 오염 물질의 차이는 기본 40배였고 많은 건 100배를 넘기는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의 이름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폭스바겐 게이트로 명명되었다.
일각에서는 디젤 게이트라는 명명도 간혹 보이긴 했지만, 디젤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가솔린 자동차에서도 보고되고 있었기에 폭스바겐 게이트가 되었다.
각국의 정부도 이쯤 되자 공식 대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장 발이 빠른 건 대한민국이었고, 미국도 교통안전국의 정밀 검증이 착수되었다.
그러면서 폭스바겐을 비롯한 차량들의 판매 금지 처분도 강력히 고려되었다. 또한 문제의 자동차를 구매한 오너들 사이에서는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집단 소송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일련의 반응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도요타 리콜 스캔들로 미리 선행 학습을 했기 때문이다.
집단 소송에 참여를 해야 빠른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문제를 일으킨 대기업 측에서도 무시하지 못했다.
반면 집단 소송 제도나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없는 나라의 도요타 차주들에겐 보상의 수준이 형편없었다.
여기에 소비자들의 분노를 가속하는 요소가 더 있었다.
환경 보호였다.
이를 위해서 유로6 인증이라고 훨씬 비싼 값에 차들을 샀는데, 그게 자연 보호와 대기질 개선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염만 더 시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소비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오죽하면 유튜브의 최고 인기 동영상에 폭스바겐 골프 차량에서 검은색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나 나치의 이동식 가스차에 폭스바겐 마크를 합성한 영상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반면 폭스바겐은 여전히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절대 조작을 지시한 일도 없었고, 비슷한 배기가스 조작은 벤츠와 BMW에서도 나오는데, 폭스바겐 게이트라고 부르는 게 억울하다는 이야기였다.
비슷한 시각.
세종시에서 시작된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 이제 전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는 중이지만, 유재원은 여전히 대전시에 있었다.
원래 유재원의 대전시 일정은 하루짜리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결과가 좋아서 훨씬 오래 머물게 된 것이다.
그것은 AMD 인수 후, 리사 수와 짐 켈러가 제대로 각 잡고 만든 ZEN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 샘플링 생산이었다.
엔지니어링 샘플링이란 설계가 끝난 반도체를 직접 찍어서 작동을 확인하고, 각종 버그와 최적화를 도모하는 단계였다. 프로젝트의 진행에 따라 엔지니어링 샘플링이 빠르게 끝날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버그가 발견되면 기약 없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ZEN의 엔지니어링 샘플링은 기대 이상이었다.
CPU의 덕목은 뭐니 뭐니 해도 범용 연산 성능이었다.
그렇기에 과거 인텔이나 AMD는 AVX나 FMA와 같은 특수한 명령어를 포함시켜 연산 성능이 높아 보이도록 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해당 명령어는 벡터 연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능력이 발휘된다. 렌더링이나 인코딩과 같은 작업이었다. 게임이나 일반 오피스 프로그램 등의 범용 프로그램에서는 가속 능력이 미미했다.
리사 수 박사와 짐 켈러가 완성시킨 ZEN 프로젝트는 클럭당 성능인 IPC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또한, 멀티코어 CPU 구조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이뤄졌다. MCM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나온 CPU는 모두 하나의 반도체 회로도 위에 멀티코어를 설계했다. 성능은 좋은데 멀티코어의 숫자를 높이는 게 지극히 어려웠다. 불량이 발생하기도 쉬웠다. 반면 MCM 방식은 CPU 패키지 위에 물리적으로 독립된 별도의 칩을 이어 붙여서 멀티코어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MCM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었다.
과거 CPU의 성능이 부족했을 때, 대형 메인 프레임이나 서버에 필요한 강력한 CPU를 만들기 위해 MCM 방식이 쓰였다. IBM의 파워 CPU나 선마이크로시스템의 울트라스팍과 같은 제품군에서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렇지만 PC용 CPU에 MCM을 도입한 건 ZEN이 최초였다.
이에 따라 ZEN의 기본 8코어 칩을 하나의 CPU 패키지 위에 최대 8개를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여기서 관건인 건 칩과 칩을 고속으로 연결해 주는 인터페이스였다.
인터페이스가 충분히 빠르지 못하면, MCM의 설계 특성상 병목 현상이 크게 발생해서 기대만큼 성능향상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천재인 짐 켈러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칩과 칩을 연결하는 인피니티 페브릭이라는 초고속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해당 기술의 난이도에 대해 알고 있는 전문가라면 불과 2년 만에 해결책을 내놓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짐 켈러에게는 숨겨 놓았던 비밀 무기가 있었다.
2001년대에 AMD가 발표했던 하이퍼 트랜스포트 기술이었다. 다양한 확장을 위한 고속 인터페이스였는데, 당시에도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기술이라 평가를 받은 기술이었다.
하이퍼 트랜스포트 기술을 당시 책임졌던 사람이 짐 켈러였다.
그가 10년 만에 귀환해서 하이퍼 트랜스포트를 인피니티 페브릭으로 진화를 시켰다. 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인피니티 페브릭까지 완성했으니, 가히 CPU 설계의 마이스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ZEN 프로젝트의 마지막 화룡점정은 유재원의 2나노미터 다이아몬드 반도체 공정이었다.
이러한 기술들이 모두 결합되어 나온 것이 64코어 ZEN 프로세서였다.
CPU의 크기는 굉장히 거대했다.
DM12 칩의 실제 반도체 다이 면적이 150㎟였다면 ZEN 프로세서는 280㎟였다. 이런 칩을 8개나 다닥다닥 붙여 놓은 CPU 패키지는 손바닥처럼 넓었다. 이렇게 큰 CPU를 장착하기 위해서 특별한 소켓도 설계를 해야 했고, 머더보드의 크기도 일반 보드보다 훨씬 큼지막해야 했다.
테스트용 보드에 설치까지 끝났고, CPU 연산력 벤치마크의 대세로 자리 잡은 시네벤치도 정상적으로 설치되었다.
테스트용 시스템에서 처음 작동되는 시네벤치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스케줄을 미루고 미룬 유재원이었다.
“자, 그럼 누릅니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64개의 네모난 사각형이 쏟아져 나오면서 멋들어진 컴퓨터 그래픽을 완성했다.
진짜 눈 깜짝하는 사이였다.
“점수는?”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 왼쪽 상단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1,760.52라는 차원이 다른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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