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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화면에 뜬 티파니라는 글자에 유재원은 순간적으로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놈들의 타격이 유재원 본인뿐만이 아니라, 덕진리의 티파니와 혜성이, 그리고 부모님께도 동시에 진행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이었다.
상상은 곧 분노를 일으켰다.
본인을 타격하는 건 그나마 낫다. 하지만 가족을 건드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녹색의 연결 버튼을 누르는 유재원이 손을 덜덜 떨면서도 , 본인은 이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재원아! 괜찮아? 어디 이상한 데 없지?
“으응?”
전화를 받자마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평소라면 친근한 인사부터 시작할 티파니가 본인의 안부부터 물어보는 게 아닌가.
“나야 거뜬하지. 자기는?”
-다행이다. 여기는 무사해. 나와 혜성이도, 자기의 부모님도.
마치 티파니는 유재원에게 암살 시도가 있었던 걸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튀어나와서 수상한 놈들이 타고 있던 SUV를 포트맥 강으로 밀어버린 27톤 덤프트럭이 있었다.
“그 덤프트럭, 그걸 자기가 준비한 거지?”
몇 마디의 대화로 유재원의 머릿속에서는 퍼즐들이 다다닥 맞춰졌다.
-응! 트럭은 셰브롱의 카운터팀이야. 엑손모빌의 히트맨팀이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는데, 하필이면 워싱턴 DC에서 움직이는 거야. 수상한 녀석들이 중고 SUV를 구매하는 걸 보고 우리는 덤프트럭을 준비했어.
“히트맨팀이라고?”
-정유 메이저들처럼 거대한 에너지 사업을 하게 되면, 지저분한 일에도 얽힐 수밖에 없어. 메이저 사이에도 충돌이 많이 있었지. 그래서 그런 일을 전담하는 각각의 해결사들이 있었다. 특히 우리 셰브롱과 엑손모빌 사이에는 최근 꽤나 많은 충돌이 있었어. 그리고 대부분 우리가 승리했지. 독이 바싹 올랐던 거야.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진짜 괜찮은 거지?
“응. 나도 대비는 하고 있었거든. 경호팀도 2배로 늘렸고.”
-아! 진짜? 어떻게 미리 알았어?
“의회의 청문회 이야기가 상원에서 논의되면서 나도 자체적인 정보팀을 좀 돌려봤어. 그랬더니 페르난도 의장하고 엑손모빌의 우즈 회장의 회동이 찍히더라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고. 게다가 이번 테러가 터지기 30분쯤 전에는 페르난도 의원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와서 회유를 시도하더라고.”
-가만. 페르난도 의원? 상원 상업과학통신위원회 의장말이야?
“응, 그 양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ID그룹과 셰브롱의 합병만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 하더라고.”
-합병? 그래서?
“당연히 그 따위 약속은 못 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복잡한 일은 모두 내 책임이라는 거야. 그때만 해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더니, 이렇게 됐네. 백주대낮에 암살 시도라니.”
유재원은 티파니와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몇 가지 구멍이 좀 있었다.
“그런데 자기는 우즈 회장이 히트맨팀을 움직인 걸 어떻게 알았어?”
구멍 중 하나가 티파니의 개입 타이밍이었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한 대응 덕에 유재원은 별 탈 없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대비를 한 건지는 미스터리였다.
-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유언장에는 특별한 편지가 있었잖아. 거기에서 엑손모빌을 잘 지켜보라는 당부가 있었거든.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엑손모빌 따위가 감히 우리 가족에게 해결사를 보내진 못할 테지만, 그 이후에는 부담감이 사라지면서 쌓였던 게 폭발할 거라고 예상하셨어.
역시 프레더릭이었다.
그러고 보면 셰브롱이 거침없이 영토를 확장할 때에도 동종 업계로부터 뭔가 심각한 방해 공작은 없었다.
해결사니, 히트맨팀이니 하는 것들을 굴리는 업계였는데도, 아주 무난하게 확장할 수 있었던 건 프레더릭이 미리 사전 정지 작업을 끝냈기 때문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유재원에게도 프레더릭의 편지와 비밀 주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주머니를 열어볼 때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록펠러 가문의 움직임도 수상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엑손모빌의 우즈 회장을 움직이는 배후가 록펠러거든, 그래서 이들의 히트맨 팀이 움직일 때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오늘 보니 외할아버지 말씀을 따른 게 참 다행이네.
“자기 없었으면 진짜 길거리서 총격전 벌일 뻔했어. 고마워.”
-부부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지. 음, 그러면 이제 한국으로 올 거야?
티파니의 목소리에는 바로 넘어 왔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아쉽지만, 아니야. 이번 일을 절대 가만히 넘길 수는 없어. 확실히 끝장을 내놓은 후에 가는 게 제일 날 것 같아.”
-맞아, 끝을 봐야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티파니도 유재원이 집으로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과 별개로 이번 일을 꾸민 자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유재원처럼 뜨겁게 폭발하는 종류는 아니었다. 이렇게나 서늘한 티파니의 목소리는 유재원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니 말이다.
유재원은 문뜩 티파니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 지 궁금해졌지만, 각자의 비즈니스 방식이 있는 만큼 물어보지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 부모님께도 미리 말 좀 해줘. 나도 전화를 하겠지만, 뉴스로 먼저 보고 놀라지 않게 말이야.”
-물론이지.
유재원과 티파니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로 통화를 끝내고 각자의 방식대로 일을 시작했다.
띵!
-회장님, 4호 차로부터 긴급 보고입니다.
4호 차량은 포트맥 강에 남아서 사고 수습을 지켜보기로 한 경호팀 차량이었다.
-추락한 SUV에서 용의자 셋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한 명은 사망, 둘은 의식 불명입니다. 총기도 발견되었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M4 카빈 소총 2정입니다. 두 정 모두 개조가 된 상태라고 합니다.
4호 차량에 있던 경호원들이 포트맥 강에 뛰어들어 SUV에 있던 용의자를 다 잡아놨다는 이야기였다.
-워싱턴 DC 경찰에 신고를... 응? 뭐라고? 앗! 죄송합니다.
보고를 잘 이어가던 경호팀장이 갑자기 놀란 건 옆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긴급 보고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
-3호 차량의 긴급 보고입니다. 피탄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피탄?
유재원은 SUV의 뒷문이 열리면서 M4 소총을 봤다. 그런데 총이 발사된 장면은 기억에 없었다. 대신 쾅 하는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27톤 덤프트럭이 충돌하면서 나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총탄이 발사된 소리까지도 섞였던 모양이다.
“3호 차량 인원은 무사해요?”
-예, 회장님, 우리 방탄 차량의 방호력은 12.7미리 철갑탄도 방어하는 수준입니다. 5.56미리 탄은 생채기도 못 냅니다.
마음 같아선 RPG공격도 막아내는 수준의 방탄을 쓰고 싶었다. 어렵게 얻은 두 번째 기회인데,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끝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들로 12.7미리 철갑탄 정도로 맞출 수밖에 없었다.
만약 티파니가 27톤 덤프트럭을 준비하지 못했고, 히트맨팀이 탄 SUV가 총알을 한 박자 빨리 유재원이 탄 차량을 향해 쏟아냈더라도 유재원의 몸에는 단 한 발도 닿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3호 차량에 총알이 박혔으니,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총탄에는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총열이 남기는 지문과 같은 흔적을 만드는데, 이를 통해 발사된 총을 확인할 수 있다. 총 역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전문적인 히트맨팀이라고 하니 증거를 제거하는 것에 완벽히 했을 테지만, 그래도 발전된 기술 덕에 정보를 찾아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안가에 도착했습니다.
워싱턴 DC 외곽의 새로운 안가에 도착한 유재원은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곧이어 유재원은 바로 반격을 시작했다.
몇 분 후.
-긴급속보!
-ID 그룹 유재원 회장, 출국길에 피탄!
CNN이 시작이었다.
평일 오후 정규 프로그램인 증시 분석 프로를 진행 중이던 CNN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바로 긴급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테오도르 루즈벨트 다리에서 벌어진 전체적 상황을 담은 영상까지도 함께 보도되었다.
그것도 희미하게 찍힌 게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찍힌 영상들을 감각적으로 편집하여 보도했다.
테오도르 루즈벨트 다리의 CCTV, 히트맨팀이 타고 있던 낡은 SUV와 가장 가까이 있던 경호차량의 블랙박스 영상, 그리고 광각의 화면으로 테오도르 루즈벨트 다리 근처를 지나던 시민이 운 좋게 찍은 영상까지도.
유재원이 탄 불칸을 향해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낡은 SUV의 모습이나, 뒷문이 열리면서 총 비슷한 걸 든 검은 복장의 남자가 불쑥 나오는 장면이나, 27톤 덤프트럭이 쾅하고 뒤에서 박아버리는 장면까지도 모두 있었다.
심지어 사각 때문에 유재원은 못 봤던 낡은 SUV가 포트맥 강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키는 장면도 있었다. 화룡점정은 3호 차량의 차창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미줄이 쫙 퍼지는 것 같은 화면이었다.
화면만 보면 유재원이 탄 차량에 총알이 박힌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측면 경호를 맡은 3호 차량이었다.
-ID 그룹, 관련 주식 대폭락!
-안드로이드 –9%, ID테크놀로지 –13%, 타임워너 넥스트컴 –8%
CNN의 자극적인 보도가 나가자마자 미국 증시에 상장된 ID 그룹의 대형 계열사들이 폭락했다. 주식이야 항상 오를 수는 없으니, 물론 내리는 날도 있다. 하지만 –10%대 하락은 역대 최초였다. 게다가 유재원의 피탄 소식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3% 정도의 상승을 보이고 있었으니, 엄청난 하락 반전이었다.
ID 그룹이란 거대한 기업이 유재원 원맨팀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재원 회장, 방탄 차량에 탑승 안전.
-피탄된 차량은 경호원의 차량.
-워싱턴 DC 경찰, 긴급 출동 후 현장 봉쇄! 최선을 다해 테러 수사할 것.
CNN의 브레이킹 뉴스는 급박하게 속보로 보도했다.
그리고 유재원이 무사하다는 속보가 나오자 거짓말처럼 주가가 회복되었다. 순식간에 마이너스 수치가 사라지면서 상승으로의 반전이 일어났다.
-ID 그룹, 유재원 회장 무사 확인.
-예정된 행사와 일정도 연기 없다.
그렇지만 CNN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처럼 현실에서는 온갖 후폭풍이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뒤집어진 건 페르난도 의원이었다.
-FBI! Don’t Move!
FBI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사가 페르난도 의원실에서 터졌다. 유재원은 FBI의 긴급 수사에 협조해서 본인의 스마트폰을 수사관에게 넘겼다. 물론 암호도 해제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면서 가장 최근에 통화한 사람은 페르난도 의원이었고, 통화중에 매우 의미심장한 협박성 발언이 나왔다는 것도 직접 증언했다.
스마트폰의 통화 기록은 물론 녹음된 통화 음원을 확인한 FBI는 페르난도 의원실로 출동했다. 놀랍게도 수색 영장은 물론이고 체포 영장까지도 확보한 상태였다.
의원에 대한 체포 영장은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것도 상원 의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체포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너무나도 중대했고, 제출된 증거 역시나 확실했다.
이상한 건 페르난도 의원의 반응이었다.
몇십분 전만 해도 유재원에게 비상식적인 일 운운하며 협박을 했던 페르난도 의원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이 터지고 나서 긴급 속보를 확인하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퍼져버렸다. 진짜 멘탈이 나가버린 것처럼 체포 영장을 받았다.
아무래도 유재원과의 통화를 마치고서 이런 식으로 일이 터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반대로 엑손모빌의 우즈 회장은 CNN의 속보가 터지기 10분 전에 이미 본인의 전세기를 타고서 뉴욕을 떠났다.
유재원은 티파니가 전해준 정보로 우즈 회장의 도주를 알았다.
참 아쉽게도 우즈 회장에 대한 밀착 모니터링은 ID 그룹의 정보팀이 따로 준비하진 못했다. 대신 티파니가 프레더릭의 유언장을 받은 뒤부터 줄곧 우즈 회장의 이상스러운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고, 그것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공권력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페르난도 의원이나 우즈 회장이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하지만 진짜 몸통은 록펠러라는 걸 유재원은 잊지 않고 있다.
록펠러 가문을 폭격할 수단은 많았다.
유재원이 익명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 하나로 궁지에 몰린 록펠러였지만, 그건 전체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금권을 수호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은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록펠러를 후려칠 타이밍이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페르난도 의원과 우즈 회장까지 털려야 한다. 그렇게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들도 그저 깃털에 불과했다는 것이 알려질 테고, 진짜 흑막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이 폭발할 테니 말이다.
“후, 그러면 지금은 이걸 열어볼 때인가?”
유재원이 서류 가방 안쪽에서 꺼낸 건 프레더릭이 본인에게 남긴 주머니였다. 살짝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유재원은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구형의 저장매체 2개였다.
“마이크로필름하고 마이크로카세트테이프네?”
마이크로필름이란 190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까지, 대량의 문서와 종이 자료, 도면 등등을 축소, 복사하는 데 사용된 필름이었다.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시기는 냉전 시대였는데, 크기가 작아서 동전으로 위장한 필름 케이스에 마이크로필름을 담아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이크로카세트테이프 역시 카세트테이프의 소형 버전으로 음성을 녹음하는 매체였다.
두 가지 모두 내용물을 보기 위해서는 특수한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당연히 유재원이 있는 안가에는 두 가지를 재생할 수 있는 도구는 없었다.
대신 마이크로필름의 경우 몇 가지 도구를 활용해서 대충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임시 리더기는 만들 수 있었다.
책상 조명인 스탠드라이트를 백라이트로 삼았고, 돋보기를 겹쳐서 배율을 확대하고 거기에 접사 모드 스마트폰을 올린 다음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흑백의 마이크로필름이 큼지막하게 찍힌 이미지 파일이 나왔다.
“이게 뭐지?”
마이크로필름의 첫 번째 컷에 담긴 내용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조지 히키 주니어라는 사람에게 매주 1천 달러부터 많게는 1만 달러까지 송금한 기록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이름을 더듬어 봐도 막 떠오르는 건 없었다.
유재원은 일단 작업을 멈추고 조지 히키 주니어라는 이름을 인터넷에 넣어 봤다. 딱히 기대감은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놀랍게도 검색 엔진에 걸리는 결과가 있었다.
“헉!”
검색 결과는 그가 백악관의 시크릿 서비스 요원이라는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약과였다. 유재원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내용은 따로 있었다.
조지 히키 주니어가 백악관 시크릿 서비스에 근무했던 당시, 백악관의 주인은 존 F. 케네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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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