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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M12에 적용하는 건 무리고, AMD의 신형 CPU에 적용할 수 있으려나?”
연구 동향이라는 건 해당 기술의 트렌드와 연구 수준을 간략히 요약해 놓은 보고서다. 그런데 유재원이 연 파일의 용량이나 분량은 연구 동향 정도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수준을 자랑했다.
파일의 이름만 연구 동향이지, 실제로는 다이아몬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완벽한 레퍼런스였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반도체는 배선망은 물론, 트랜지스터까지도 다이아몬드로 구현하는 차세대 반도체였다.
정확한 이름은 붕소 도핑 다이아몬드 반도체다. 붕소를 통해 반도체의 특성을 구현하는 것인데, 기본적인 다이아몬드는 열전도율이 매우 높아서 발열 해소에 좋고, 내구성도 지구 최강이었다.
순수한 다이아몬드는 아주 높은 전기 저항값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 부도체였다. 그런데 붕소가 들어가면 전기 저항이 떨어져서 반도체의 특성이 발휘된다.
문제는 다이아몬드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기존의 반도체 생산 공정으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붕소가 도핑된 다이아몬드 단분자를 반도체 설계에 따라 차근차근 그려 나가야 했다. 그 과정은 마치 레이저 프린터의 원리와 비슷했다. 웨이퍼는 레이저 프린터에 투입되는 종이이고, 토너는 붕소 도핑 다이아몬드 단분자다. 토너를 종이에 흡착시켜 문자와 그림을 출력하는 드럼은 ASML의 EUV 노광기로 구현할 수 있다.
다만 순도 높은 붕소 도핑 다이아몬드 단분자를 만드는 것과 노광기를 개조하는 것이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 최대 난관이었다.
“이렇게 레퍼런스가 있는데 못하면 말이 안 되지.”
그렇지만 유재원은 결국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노광기를 다루는 노하우는 제작사인 ASML보다 ID 일렉트로닉스가 훨씬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ID 일렉트로닉스나 TSMC, 마이크론 심지어 인텔까지도 ASML의 노광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7나노미터 미세공정을 양산하는 건 ID 일렉트로닉스가 유일하다. 나머지 업체들은 14나노미터 미세공정에 아직도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다이아몬드 단분자를 만드는 것도 유재원에겐 노하우가 있다.
지금은 단분자는커녕 그래핀이라는 2차원 평면 구조의 고분자 탄소 동소체를 양산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반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찾아낸 황금과도 같은 노하우를 아는 유재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 일단 시작은 논문으로 할까?”
말은 이렇게 해도 논문을 내는 것이 맞나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의 청문회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ID 그룹서 논문을 내주면 다들 깜짝 놀라며 칭송하기에 바빴다. 그렇지만 청문회에서 몸소 체험한 것처럼 불만만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에에, 쓰자.”
생각을 정리한 유재원은 결국 이번에도 쓰기로 했다.
다만 과거처럼 레퍼런스 수준으로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에 대해 보여주는 선에서 끝낼 예정이었다.
ID 일렉트로닉스에서 붕소 도핑 다이아몬드 반도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다들 알 정도로만 말이다. 그리곤 AMD의 신형 CPU부터 해당 제품이 양산되면 게임 오버다.
다이아몬드 반도체가 뜬금없이 등장한 건 아니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논문은 필요했다.
유재원은 곧장 백지상태인 IDW 파일을 열고 자판을 두드렸다.
새로운 문서를 클릭하면 나오는 백색의 화면에 곧 깨알과 같은 글자들이 적히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각.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정신없이 뭔가를 읽고 있던 칼레 라슨은 해당 문서의 중간쯤에 도달하자 강렬한 분통을 터트렸다.
애드버스터라는 세계 시민 운동 정보 채널을 꾸준히 운영해 온 창립자이자 기자인 칼레 라슨이 보고 있는 문서는 유재원이 얼마 전 올린 ‘진짜 그림자 정부를 알려주마 – 제1편 록펠러’라는 제목의 인터넷 게시물이었다.
칼레는 처음 중2병 가득한 게시물의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유재원의 상원 청문회를 기점으로 재산 1조2천억 달러니, 유재원은 그림자 정부의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아바타라느니 하는 온갖 음모론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림자 정부 운운하면서 록펠러를 언급하는 게시글도 그런 기류에 편승해 나온 글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레가 게시물을 클릭한 건 평소 자주 접속하던 커뮤니티에서도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워지기 전에 얼른 봐라!’, ‘안 보면 후회한다!’ 등등의 반응이었다.
닉네임을 보면 평소 그 진지하고 과묵한 녀석들이 확실한데, 그런 반응이라니. 특히나 지워지기 전에 보라는 말이 칼레를 움직였다.
뭐 엉터리라면 그냥 창을 닫아 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중간까지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자 정부가 바로 금주 동맹 시절 비밀스러운 술자리 사교 클럽을 가리킨다는 말부터가 칼레를 확 사로잡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록펠러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는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졌다.
기존의 아무 말이나 마구 가져다 쓴 음모론과는 차원이 달랐다.
첨부된 문서도 하나같이 진본이었다. 칼레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끌고 있는 애드버스터라는 매체가 상대하는 최대의 적이 거대 기업 그리고 자본가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칼레의 분통을 터트리게 만든 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였다.
칼레는 애드버스터라는 매체 덕분에 금전적인 타격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돕는 수많은 후원자들 중에서 모기지론의 마진 콜이 들어와 집을 빼앗긴 이들이 상당수였다.
몇 달만 좀 기다려 주면 성실히 갚을 수 있는데, 마진 콜이 들어와 대출금 모두를 갚으라니. 이걸 버틸 사람이 있겠나.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아닌 일반 모기지론을 받았던 사람들도 상당수 타격을 입었던 게 그 사태였다.
칼레를 더욱 열 받게 하는 건 대출 채권의 부도율 급증에 따른 은행 부도 위험에 미국 정부가 수천억 달러를 FRB에서 융통해 은행에 그대로 지원했다는 점이었다.
FRB도 거대 자본가의 소유였고, 지원을 받은 은행도 거대 자본가의 소유였다. 그러니 FRB의 지분을 가진 초거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돈을 빌려주고, 빌려준 돈을 다시 지원받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게 문제라니까!”
칼레가 매주 기사를 쓰면서 지적하는 게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유재원이 풋 옵션에 극단적으로 투자해서 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에 대해서도 분노했던 칼레였다. 선물 옵션이란 시장은 제로섬 게임이 이뤄지는 곳이었으니, 그가 벌어들인 수익은 누군가의 손실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은 그 수익을 ID TSL이라는 모기지 전문 금융기업을 창업하면서 은행들이 포기한 모기지 채권을 구입하는 데 다 썼다. 덕분에 모기지 시장은 안정되었고, 모기지 채권의 연쇄 부도의 고리도 끊을 수 있었다.
칼레가 유재원을 다시 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거대 자본가라는 놈은 은행에 지원된 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게다가 은행으로 보내진 지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 지원을 받았다면 모기지론 대출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금리라도 인하해 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은행에 주어진 지원금은 국민들의 피땀으로 모은 혈세였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일이 서브프라임 사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겠지!”
칼레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곧장 애드버스터의 식구들이 모여 있는 단체 톡방에 접속해 분노에 가득 찬 울분을 토해냈다.
-월 스트리트의 모럴 해저드가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이번엔 정도를 넘었어!
-자기가 미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록펠러 같은 작자들 때문이겠지.
칼레의 글에 리플은 빠르게 달렸다.
그만큼 이번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돼! 행동으로 보여야 해!”
-맞아! 월 스트리트를 엎어 버리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월 스트리트에 다들 모이자!
분노는 곧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렇지만 모이자느니 엎어 버리자느니 하는 말로는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았다.
칼레는 한참 고심하다가 번뜩이는 단어를 떠올렸다.
“점령!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
-오, 좋은데?
-느낌 있어! SNS에 올리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터치를 해 볼 거야!
-당장 시작하자!
“좋아! 그럼 바로 내일부터 월 스트리트로 모이자! 각자 홈페이지와 SNS에 띄워.”
행동력에 있어 언제나 최고인 칼레는 바로 일을 만들었다.
칼레는 물론이고 애드버스터 식구들의 SNS와 홈페이지가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제대로 파 봐야겠어.”
칼레가 이거라고 말한 건 당연하게도 유재원이 업로드했던 록펠러 파일이었다. 칼레는 여기에 담긴 증거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강렬한 직감을 받았다. 이걸 중심으로 파고든다면 록펠러 가문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가 전문이니, 맡겨 줘!
칼레의 동료들도 동의했다.
유재원의 재산 기사에서 시작된 사건은 다양한 후폭풍을 만들어내며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갔다.
다음 날.
-긴급 속보, 거대 시위대가 월 스트리트 앞에 집결!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구호 한목소리.
“역시 땔감이 있으니 활활 타오르는구나!”
워싱턴의 안가에서 하루를 시작한 유재원은 점심을 막 지난 시점, CNN의 속보를 보았다. 거기엔 수백 명의 분노한 사람들이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분명 기대한 것 이상의 반응이었다.
유재원이 ‘익명’으로 올린 그림자 정부 록펠러 편의 의도는 카운터였다.
그들이 유재원을 음모론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엉터리 음모론 속에 숨어 있는 록펠러 가문의 진짜 재산을 가장 중요한 순으로 까발렸다.
엉터리 음모론 속에 숨었다는 건, 어설픈 음모론은 실체를 밝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록펠러에서도 그런 식으로 가짜를 만들어 본인들의 실체를 감추는 데 열심히 사용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익명으로 밝힌 건 그런 어설픈 것과 완전히 달랐다.
추적 가능한 증거들은 록펠러에서도 절대 부인하지 못할 강력한 것들이 가득했다. 그러니 이걸 읽은 진짜 기자라면 제대로 파 보기 시작할 것이다.
반면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시민 운동은 유재원도 예상하지 못한 덤이었다.
“응? 원래 있던 일이었구나.”
기억의 저장소에 있는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져 보니 이번과 비슷한 시점에 시작되었던 동명의 운동이 있었다.
아카이브를 둘러 보니 원래의 운동은 참 아쉽게도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초반엔 크게 불이 붙었지만, 지속력이 문제였다. 결국 구체적인 성과는 없이 끝이었다.
“이번에는 다르지!”
공격의 대상이 훨씬 구체적이었다. FRB의 지분을 가진 대형 은행, 그리고 이들 은행들을 불법적으로 지배하는 거대 자본가들이었다. 당연하게도 록펠러의 이름은 시위대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저들이 뛰쳐나온 이유가 유재원이 올린 록펠러 파일이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것이 유재원과 반ID 그룹 세력,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록펠러와의 가장 큰 차이였다.
유재원을 향한 가짜 뉴스와 음모론은 잠깐 불이 붙다가 끝났지만, 유재원이 뿌린 록펠러 파일은 월가 점령 운동을 비롯한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클라크 씨는 가문의 뒤를 캐는 기자들과 저 시위대 중 뭐가 더 짜증이 나려나?”
잠깐 고민을 했던 유재원은 곧 결론이 나왔다.
“굳이 하나만 고를 필요가 있나? 짜증 날 일은 다 하는 거지.”
뭐가 됐든 클라크 록펠러 씨에게 뼈아픈 카운터를 먹여 줄 수 있다면 그저 좋다는 것이 유재원의 결론이었다.
록펠러 파일을 보고 깊게 파고드는 기자들도 지원하고, 월가 점령 운동도 이전과 다르게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확실하게 도와주는 거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결론을 내린 유재원은 바로 김대석 비서실장을 ID톡으로 연결했다.
-예, 회장님!
ID톡이 연결되자 월가 점령 시위대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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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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