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회
셔먼 액트(Sherman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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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우 정부의 혁신 정책은 또 있습니다.”
개성시 스마트 종합병원에 대한 청사진에 대해 브리핑을 마친 최 부회장은 새로운 슬라이드를 띄웠다.
슬라이드에 뜬 건 큼지막한 글꼴의 일곱 글자였다.
“산업 재해 책임법?”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산업 재해 책임법은 제목 그대로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재해에 대한 책임을 원청의 대표에게까지도 묻는 강력한 법안이었다.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유재원의 빠른 개입 덕에 비정규직의 전면적인 확대는 막았다. ID 그룹이 타의 모범을 보인 기본급 체계 역시 대기업들이 본을 받으면서 최저 임금도 원래 취지에 맞게 아르바이트이나 은퇴한 어르신들의 일용직 일자리, 재활용품 센터의 1인당 한도에 맞춰졌다.
이제 비정규직은 아직 한국에서는 낯선 일자리였다.
그렇지만 한국이 노동자들의 천국이 된 건 아니었다. 비정규직 비중이 적어진 대신 파견이나 하청의 형태는 훨씬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생산직과 건설 현장에서의 대표적인 고용 형태였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뜯어고치고 싶다고 해도 이미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고칠 수도 없었다.
대기업들은 위험한 생산 시설에 근무하는 작업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대신, 하청 업체를 통해 일을 시켰다.
위험한 작업 중에 재해를 당해도 하청 업체의 책임으로 끝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현장 노동자를 타 회사 사람 취급하느냐? 당연히 그러지도 않았다. 하청이라면 직접적인 지시는 하청 업체를 통해 이뤄져야 하는데, 대기업의 관리직이 직접 하청 업체의 직원들을 머슴 부리듯 부렸다.
정병우 행정부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산업 재해 책임법으로 끊겠다는 것이었다.
법안의 핵심은 대기업 노동자든 하청 업체의 직원이든 재해 사고를 당하면, 해당 작업장을 가진 대기업의 대표에게 위험한 작업장을 만들고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게 한 책임을 물겠다는 것이었다.
노동계의 숙원과도 같은 법안이었고, 반대로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까지도 결사반대하는 법안이기도 했다.
위험한 작업장이라는 문구는 매우 해석의 여지가 많았고, 작업자가 멋대로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고 사고를 당해도 대표의 책임이 되는 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기업의 활동이 크게 위축될 거고, 위험한 분야에 대한 투자 철회는 물론 진출해 있던 사업까지도 접겠다는 식의 협박성 반응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물론 이는 회귀 전의 이야기였다.
정병우 정부와 통일국민당이 추진하는 산업 재해 책임법의 경우 지금은 오직 유재원에게만 알려진 극비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반발이 상당하겠군요.”
이번이라고 전과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ID 그룹이 한국에서 제일 거대한 기업 집단에 등극했지만, 일성부터 미래, 금성 등등. 기존의 재벌 집단 역시 이전보다 한층 성장한 형태였다.
재벌 3사 모두 유재원에게 전자와 반도체 분야를 넘겨야 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동차와 중공업 등에서 큰 성장을 거두었다.
중공업의 경우 산업 재해 책임법의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는 분야였다.
“예. 하지만 당과 청와대는 이미 각오를 했습니다. 기업이 4차 산업혁명에 소극적이라면, 법률로 강제해 억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겁니다.”
산업 재해 책임법에서 갑자기 4차 산업혁명이 나왔다.
두 단어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따져 보면 아주 관련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막대한 하중으로 찍는 프레스 작업이나 고층에서의 작업, 유독가스가 가득한 폐쇄된 공간에서의 작업은 중공업에서는 빠질 수 없는 불가피한 작업이었다.
산업 재해 책임법에서 기업들이 앓는 소리를 하면서, 만약 통과되면 당장 철수하겠다고 엄살을 부려도 막상 실제로 통과되고 나더라도 진짜로 사업 철수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기업은 없었다.
그나마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게 방법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만큼 기업을 유지하기 좋은 나라도 없다.
중국은 한국과의 무역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그에 따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철퇴를 때리고 있었다. ID 그룹만 해도 P마켓 차이나에 대해 소방 점검이니 위생 점검이니 하는 조치로 스마트 물류센터의 가동률이 반토막이 나 버렸다.
각종 점검을 하면서 물류 시스템을 며칠 동안 정지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동시에 깐깐한 세무 조사가 이뤄지면서 장부를 탈탈 터는 건 기본이었다.
최근에는 발견된 비위가 중대해서 P마켓 차이나의 영업권을 박탈할 수도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진작에 대비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운영하던 P마켓이었다. 실제로 각종 긴급 점검이 내려와도 걸리는 건 억지 트집을 잡아서 만든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영업권 박탈 운운하는 기사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ID 그룹이 이 정도 상황인데, 다른 중국 진출 기업들의 상황은 보다 심각했다. 한때 베이징서 잘나가던 미래자동차의 판매량은 곤두박질쳤고, 금성전자의 중국 디스플레이 공장 건설도 지지부진이었다.
기업들은 한중 무역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길 바랐지만, 유재원이 보기에는 이게 나았다. 13억 단일 시장이란 프로파간다에 속아 중국에 진출했다가 기술과 자본을 탈탈 털리고 나오는 것보다는 지금 쓴맛을 보고 나오는 게 훨씬 남는 장사였으니 말이다.
기업들의 최우선 선택지였던 중국이 이런 상황이니, 차선책으로 동남아시아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는 인프라와 노동자들의 숙련도가 문제였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대응은 새로운 법이 정한 방침에 따라 사업장의 워크플로우를 개선하고, 위험한 기기를 만지는 작업자에 대한 안전 수칙과 안전 장비를 구비해 놓는 것이었다. 덤으로 작업자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고 있는지 지켜보는 전문책임자도 고용하는 것이다.
ID 그룹이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만 하면 된다.
한국의 재벌들에겐 ID 그룹이 인건비 중 3% 이상을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쓰고 있는 게 낭비로 보였을 거다.
“그렇게 하기 어려우면 아틀라스 같은 로봇을 쓰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최 부회장의 대답 그대로였다.
위험한 작업장을 고치는 데 막대한 돈이 든다면, 사람 대신 아틀라스 로봇을 투입하면 그만이다.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필요한 산업 재해 책임법이지만, 동시에 4차 산업혁명으로의 전환에 압력을 넣는 법이기도 한 것이다.
아틀라스 로봇이 좀 비싸긴 했지만, 사망 사고가 나서 어마어마한 배상금에 벌금은 물론 대표나 회장이 감옥에 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싸다.
더욱이 유재원이 아틀라스 로봇을 무조건 제 가격에 팔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라와 산업마다 특성이 있고, 기업이나 조직마다 자본력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틀라스 로봇의 몸값이 비싸서 도입을 망설이는 기업을 대상으로 임대를 하는 사업 모델도 구상 중이었다.
소정의 비용만 받고 아틀라스 로봇을 파견해 의뢰받은 일을 처리해 주는 사업, 이른바 로봇 대여 서비스였다.
어떻게 보면 인력 파견 업체와 똑같다고 볼 수 있지만, 유재원의 비즈니스는 사람 대신 최첨단의 로봇을 보내준다는 게 큰 차별점이다.
로봇이라는 요소로 인해서 구태의 극치인 인력 파견업이 4차 산업의 정점으로 올라서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건 확실하네요. 그래도 법안은 원안 그대로 통과되면 좋겠군요.”
유재원은 살짝 걱정이긴 해도 법안 통과가 좌절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포문을 열면 통일국민당이 당론으로 확정을 짓고 신속하게 법안을 처리할 겁니다. 실망시킬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최 부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병우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55%로 안정적이었고, 국회 역시 통일국민당과 민주당이 과반을 점유하고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인 보수 야당은 대선 참패의 후유증으로 크게 약해진 상태다.
정기 국회가 열리면 혁신 법안이 상정되어 통과될 것이고, 이는 곧 세계에서 가장 빨리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조치가 될 것이다.
“좋습니다! 진행하세요!”
“예, 회장님!”
이후 유재원은 최 부회장의 안내로 여의도의 드림 스타디움 건설 현장으로 이동했다.
“공사 진행 상황은요?”
현장에 도착한 유재원이 제일 먼저 살핀 건 공사의 진척도였다. 대규모 공사인만큼 하루하루 고정으로 소모되는 매몰 비용만 수십억 원이었다. 어째서 건물주들이 공사기간 단축에 그렇게나 연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게는 비용적 부담보다는 내년 IDDC를 여의도에서 열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공사는 별 탈 없이 진행되어 진척도는 52%를 넘겼습니다. 매우 순조롭습니다.”
최 부회장의 말 그대로 여의도 서쪽 모습은 유재원의 기억들과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예전에 왔을 때에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시설의 잔재가 남아 있던 공사판이었다면, 지금은 드림 스타디움을 비롯해 주변의 공원과 방송 스튜디오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은 앙상한 철골 프레임이 더 많이 보였지만, 하단부에는 보랏빛 나는 특수 유리 재질의 외장재가 입혀지면서 완공되었을 때의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했다.
안전모, 안전화 등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콘크리트 가루가 풀풀 날리면서 열심히 공사 중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부 인테리어는 전기와 통신, 상하수도 등등 사람이 사용하는 데 필수적인 인프라를 설치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감리사의 보고서, 작업자들의 복장이나 안전 수칙 준수 등을 체크한 유재원은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아주 기분 좋은 마음으로 드림 스타디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너스 지급을 명령할 수 있었다.
오너가 현장을 방문하면 보통은 회식이나 특식을 제공하는 게 기본이었지만, ID 그룹의 기업 문화 자체가 회식은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보너스로 대신했다.
이후 다시 회사로 돌아온 유재원은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사인을 하며 업무를 보았고, 평소보다 1시간 일찍 퇴근했다.
티파니와 혜성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덕진리 입구에서 미리 주문해 놓았던 양념치킨과 간장치킨 콤보를 찾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틀 후.
유재원은 아침 일찍 덕진리 집을 나섰다.
“잘 다녀오너라.”
집을 나서는 유재원을 어머니가 배웅해 주셨다.
특별한 스케줄 때문에 아침 6시부터 집을 나서는 거라 일부러 티파니와 혜성이는 깨우지 않았는데, 기상 시간이 이른 어머니는 이미 깨어나 계셨다.
“네, 다녀올게요.”
오늘 유재원의 스케줄은 최 부회장이 보고했던 그대로 개성에 가서 스마트 종합병원 개소에 대한 조인식이 전부였다.
그 자리에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남도 깜짝 등장할 예정이었고, 김정남 위원장과의 회담으로 이어지게 된다. 회담에서는 ID 그룹의 북한에 대한 투자 확대 등이 논의될 예정이었는데, 실무진 선에서는 모든 게 결정이 난 상태였다.
IT 인프라가 불모지인 북한에 대규모 설비 투자가 이뤄지는 것으로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이러한 투자 확대 방침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을 것이다.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북한 땅에서 기름이 펑펑 나면서 돈 뜯길 위험이 사라진 것이다.
북한도 투자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과거 북한이 해외 여러 나라들에 현물이나 돈을 빌렸다가 갚지 않고 있던 것들이 상당했었다. 김정남이 등극하면서 북한은 선대 독재자들이 쌓아 놓았던 빚들을 모두 갚았다. 이자는 물론이고 +a를 더 쳐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빚을 모두 털어내고도 여유가 있을 만큼, 유전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상당했다. 게다가 북한은 과거처럼 극단적인 무력 도발을 더는 벌이지 않았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북한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유재원의 어머니만 봐도 귀한 아들이 개성에 다녀온다는 말에도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을 정도다.
“아 참, 텔레비전 보다가 놀라지 마세요.”
혹시나 김정남이 깜짝 등장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까 유재원은 한마디 더 말을 보태고서 준비된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에 자리를 잡은 유재원은 습관적으로 i웍스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이보다 가벼운 안드로이드 패드도 있었지만, 유재원의 취향은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i웍스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을 펼친 유재원은 언제나처럼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에 접속했다.
-보험사-계약자 분쟁에 인공지능이 지원한다.
-통일국민당, 산업 재해 책임법 입법 논의.
-사업장에서의 중대 산업 재해에 사업주 책임 묻는다.
-전경련 등, 경제인 협력 단체 강력 반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악법!
“역시 예상했던 것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전경련 반응을 보며 유재원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리곤 다음 기사로 넘어가는데 ID 그룹의 이야기가 나왔다.
-ID 그룹, 개성에 스마트 종합병원 짓는다.
-보스턴 다이나믹스, 신규 비즈니스 모델 발표.
스마트 종합병원 이야기와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봇 파견 사업에 대한 기사였다. 두 가지 모두 ID 그룹 차원에서 언론에 전격적으로 보도 자료를 내면서 알려진 소식이었다.
두 가지 이야기는 곧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스마트 종합병원 이슈가, 미국에서는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봇 파견 비즈니스 모델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특히 반ID 그룹 여론을 이끌고 있던 페이스북과 애플의 연합 진영은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차세대 비즈니스 모델을 덥석 물었다.
비록 유재원에게 밀려서 2등을 전전하고 있었지만, 미래를 그려보는 능력은 평균이상이었다. 이들은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에 내포된 위험성을 놓치지 않고 간파했다.
각자 가진 SNS에서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급기야 셔먼 액트라는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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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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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네요!
코로나19의 유행 조짐이 심상치 않네요.
건강 조심하시면서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