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883화 (883/1,007)

859회

셔먼 액트(Sherman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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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해 보자니.

그러면 지금까지는 제대로 하지 않았단 말인가?

유재원과 티파니의 부부 관계는 최고였다. 재벌 부부들은 보통 겉으로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쇼윈도 부부가 많았다. 욕망에 따라 행동해도 누가 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꼴리는 대로 해도 별일 없었기 때문이다.

애인들을 여럿 두는 재벌들도 많았는데, 이는 미국이나 한국 모두 비슷했다. 하지만 유재원은 오직 티파니뿐이었다.

스탠퍼드 이전에는 연애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고, 스탠퍼드 시절에는 티파니에게 반해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은 결혼 후에 아이가 생겨나면 권태기가 온다는데, 유재원은 아니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제대로 해 보자고 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아무래도 프레더릭이 혜성이 동생 이야기를 본인에게만 한 게 아니라, 티파니에게도 유언으로 남긴 게 틀림없다.

“혹시 프레더릭 유언이야?”

유재원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것도 그렇고. 둘째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그렇다면 알겠어. 각오하라고!”

역시 추측 그대로였다.

유재원도 프레더릭의 개별 유언을 받았다.

덤덤하게 인생의 종막을 준비하는 할아버지가 본인의 경험을 물려주기 위해 쓴 수필과도 같았다. 프린터로 뽑은 것도 아니고 만년필로 직접 쓴 편지였다. 프레더릭이 이렇게나 글을 잘 쓰는지 유재원도 몰랐을 정도다.

글자의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문장의 수준도 너무 좋았다. 나중에 열정이 식었을 때 다시 꺼내 보면 좋을 글이었다.

그러면서 편지 말미에 유재원에게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열어 보라는 말이 있었고, 편지의 마지막 장 뒤에 작은 주머니가 붙어 있었다.

무척 궁금했지만, 아직 곤란한 일은 전혀 없었기에 열어 보지 않고 서재의 금고에 넣어 둔 상태다.

다음 날.

“다녀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유재원은 출근을 하며 티파니와 부모님께 인사했다.

“아빠, 올 때 치킨이요!”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따라 나왔던 혜성이는 치킨 타령이었다.

“치킨? 좋지.”

“우와! 아빠 최고!”

“그런데 어떤 치킨 먹고 싶어? 종류가 엄청난데.”

한국에 올 때마다 먹었던 특별식이 치킨이었다.

90년대 초만 해도 유경 치킨과 처갓집 치킨 말고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애써 찾아보자면 시장 통닭 정도였을까.

지금은 온갖 치킨들이 난립 중이었다. 2002 월드컵에서 치킨의 수요가 빵 터졌고, 이후로 전국에 온갖 프랜차이즈가 생겨났다.

부동의 1위는 여전히 유경 치킨이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유율이 하강 중이었다. 그렇다고 매출액까지 줄어들진 않았다. 치킨 시장 자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기에, 점유율이 조금 내려도 유경 치킨의 매출액은 2000년대와 비교하면 2, 3배 성장했으니 말이다.

“양념치킨!”

역시 아기들 입맛에는 달콤한 양념치킨이었다.

“자기야, 나는 간장치킨 콤보로 부탁해.”

티파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콤보 치킨은 날개, 봉, 다리만 담은 것으로 닭고기 가공 산업의 발달 덕에 나오게 된 상품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한 마리씩 통으로 팔았다면, 지금은 선호도에 따라 고를 수 있었다. 팔지 않고 남은 부위는 닭고기 잡육으로 퉁쳐서 너겟이나 패티를 만들면 되었고, 약간의 가공으로 한 마리 통으로 팔 때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것이었다.

“간장치킨 콤보? 알았어.”

티파니도 치킨이 먹고 싶었나 보다. 물론 유재원은 이면에 담긴 일찍 돌아오라는 의미도 읽어냈다.

“그럼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퇴근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재원이니, 일찍 들어오는 건 문제도 아니다.

다만 일찍 퇴근한 이후가 문제였을 뿐이다.

‘제대로 해 보자’는 건 어젯밤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그동안 몸에 좋다는 것도 열심히 챙겨 먹었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전혀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장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잠시 후.

유재원은 오랜만에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전 9시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밀리지 않았기에, 도착 예정 시간이 칼처럼 지켜졌다.

청와대부터 국회, 대법원은 물론이고 각종 공기업의 본사들 그리고 몇몇 기업들의 본사들까지 세종시 행정수도로 이전하면서 출근길이 과거처럼 꽉 막히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유재원도 이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자동차 안에서 i웍스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소일거리를 하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은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를 다 보기도 전에 도착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최 부회장님, 오랜만이에요.”

최 부회장은 언제나처럼 본사 로비에서 유재원을 맞아주었다.

“프레더릭 어르신의 안타까운 영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마워요. 최 부회장님이 동아시아 지부를 잘 이끌어 주신 덕에 프레더릭을 편히 보내드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프레더릭의 장례는 미국보다 한국에서 보도되는 빈도수가 높았다.

아무래도 티파니가 유재원의 아내이다 보니 세계 석유 기업 중 유독 셰브롱에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게다가 티파니가 셰브롱을 맡은 지 오래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그 모습이 두드러지진 못했다. 그나마 언론에 좀 나온 건 북한의 두만강 유전의 일로 방한을 했을 때였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티파니가 친숙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프레더릭이 영면에 든 지금 티파니의 친정 체제가 확실하게 이뤄질 거라는 식의 보도가 쏟아졌다.

유재원에겐 뜬금없는 기사들이었다. 이미 셰브롱은 티파니가 확실히 이끌어 가고 있었고, 단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었던 것뿐이다.

비단 셰브롱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의 석유 메이저 기업의 CEO가 언론에 적극 나서는 일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 부회장과 함께 집무실에 도착한 유재원은 바로 현안 보고를 받았다.

“요즘 보험사 문제로 불만이 폭발 중이라면서요?”

출근길에 봤던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에서 눈에 확 들어온 게 바로 보험사와 가입자 간의 분쟁이었다.

보험 가입자를 유치할 때는 간이라도 쏙 빼 줄 것처럼 말해 놓고는,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줄 때에는 그야말로 구질구질한 이유를 대면서 지급을 미루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토종 보험사들은 물론이고, 외국계 보험사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였다.

“예, 얼마 전에는 보험사와 의사들 사이에 담합 문제가 발견되면서 더욱 불이 붙었습니다.”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해서는 진단서가 필수였다.

그런데 보험사들은 본인들이 지정한 병원에서의 진단서만 받았는데, 그 이유가 밝혀졌다. 병원의 의사들이 환자의 편이 아닌 보험사의 편에 서서 진단서를 끊어줬기 때문이다. 보험이 되는 병과 그렇지 않은 병명 사이에 해석의 여지가 있다면, 십중팔구 보장이 되지 않는 쪽으로 진단이 되는 것이었다.

“당청에서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했습니다.”

정병우 정부가 출범한 지도 이제 7개월이 지났다. 언론들과의 허니문 기간은 끝났고, 정병우 정부 역시 역점 사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가 보험사의 의료 자문 부패였다.

“이와 함께 제시되는 해법 중 하나가 진단 항목에서 인공지능 진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좋군요.”

하버드 의대와 협력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실시 중인 인공지능 진단 프로젝트의 성과는 상당했다.

인공지능의 진단 수준은 이제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전통의 X레이 사진부터 CT와 MRI를 통한 영상의학 진단의 정확성은 95%를 넘어섰다. 나머지 5%도 오진을 하는 게 아니라, 자료 부족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진단을 하고서 엉뚱한 답을 내놓는 오진율은 0.0001% 이하로 매우 낮다. 이 정도면 진단의학 분야의 권위자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성과에 고무되어 다른 병원에서도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의료 서비스 비용은 중산층이라도 부담될 만큼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의료 보험이 없이 큰 병이 생겼다면, 중산층도 단번에 파산할 정도였다. 게다가 의료 보험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의료 서비스의 품질은 유지하며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출생 신고가 들어가면 강제적으로 보험에 가입되는 의료 보험 당연 지정제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의료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없었다. 병원에서도 국민건강보험을 거부하지 못한다. 미국만 봐도 병원에 따라 특정 보험사의 의료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일도 있었기에, 위급한 상황에서도 병원을 가려서 입원해야 했다.

그나마 한국은 어느 병원을 가더라도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대신 이러한 국민건강보험은 의료 업계 종사자들, 특히 의사들의 헌신을 강제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터무니없이 낮은 의료 수가와 말도 안 되는 보험금 지급 정책이 제일 큰 문제였다. 수가 문제야 국민건강보험이 전면적으로 시작했을 때부터 문제였지만, 보험금 지급 정책은 유재원에게도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의료용 아틀라스를 도입한 스마트 병원을 완성했다고 해도, 보험금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지급 기준을 정하는 건 건강보험공단 산하의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이라는 곳이었는데, 최신 기술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고, 외국에서 만들어진 합리적 기준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신약에 대한 보험적용도 까다로웠다. 발표된지 몇 달이 지난 프로녹티스만 해도 보험 적용 문제는 아직도 논란 중이었다.

최신 의료 기술에 대한 보험 적용을 포기한다고 해도 의료비를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튼, 한국에서 이뤄지는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는 막강한 규제 속에서 의료인들의 헌신에 기대고 있는 만큼 의료인 협회의 힘이 매우 막강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서 성공적으로 완성된 진단의학 인공지능이 전면 도입한다고 한다면? 한국 의사들이 결사반대하며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99%였다.

그렇지만 보험사와 병원 사이의 의료 자문 부패를 명분으로 일부 도입된다면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보험 가입자들 중에 보험사들의 수동적인 보험금 지급 때문에 속을 앓아 본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의료민영화라면 국민 여론은 크게 갈라지겠지만, 보험사의 의료자문 적폐를 타파하는 형태라면 일치된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의료인 전문가들은 이면에 담긴 의미를 알아 보고 반발을 할테지만, 이번에 밝혀진 보험사와의 짬짜미 규모가 워낙 컸다. 인공지능 진단기술이 한국에 도입되는 건 시간문제다.

물론 유재원은 겨우 이 정도의 일로 만족하지 않았다.

“혁신 스마트 종합병원 설립 준비도 순조롭습니다.”

최 부회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서 해볼 수 없는 최상급 의료 서비스와 혁신적인 최신의 의료 치료법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이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는 영리 병원이었다.

영리 병원이란 그야말로 대기업들이 그렇게나 바라는 숙원 사업이었다. 그렇지만 최 부회장이 말하는 병원이라는 건 영리 목적이 아니라, 인공지능 의료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IDDC에서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마크 박사가 말했던, 원격 의료 서비스는 물론이고 인공지능 로봇의 직접 수술까지도 가능한 그런 최첨단의 병원 말이다.

이러한 최신 서비스는 국민 의료 보험의 한계로 현실화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 지정제에서 제외되어서 최신의 의료 기술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는 병원이 필요했다.

미국은 돈만 충분히 낸다면 프레더릭이 받았던 최첨단 호화 병실을 쓰고 저명한 의료진들의 진료를 매일같이 받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한국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유재원이라도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 부회장과 ID 그룹의 인재들은 방법을 찾아냈다.

“이틀 후, 개성에서 북한의 오만복 인민보건상과의 스마트 종합병원 설립을 위한 조인식이 예정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김정남 위원장도 깜짝 참석하는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답은 개성이었다.

아무리 정병우가 대통령이 되었다지만, 다 싫어하는 법을 억지로 바꿔서 영리 의료 법인을 설립할 마음은 없다.

개성이라면 유재원이 원하는 수준의 대규모 스마트 종합병원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는데, 무리수를 둬서 뭐 하겠는가.

남북관계는 예전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진전된 상태다. 한국 사람이 개성을 방문하는 건 인터넷으로 신청만 하면 끝이었다. 개성이라는 장소에 불안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ID 그룹만이 보유한 최신 의료기술을 서비스 받고자 개성행을 선택할 사람들도 많았다.

더욱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는 김정남이었다.

사적으로는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으니 개성은 최신 의료서비스를 시범 실시하는 데 있어 최적의 입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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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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