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회
셔먼 액트(Sherman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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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유재원의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보니 ‘프레더릭 테일러 2세 위독, 마음의 준비 필요’라는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발신인은 알프레드 집사님이었다.
유재원은 바로 단축 번호를 눌러 김대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컬러링을 쓰지 않는 김대석 비서실장이었기에 구식의 전화벨이 울렸다.
-예, 회장님. 김대석입니다!
“김 비서실장님, 오늘 저와 가족들의 한국행을 취소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일정을 수정하는 것도 아니고 취소하겠다는 말에도 김대석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유재원이 하겠다고 하면 언제나 가장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김대석이었다. 지금처럼 갑자기 일정을 전면 수정하는 등의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가족끼리 한국에 가는 것이었고, 관련된 스케줄도 많았다. 유재원의 경우 여러 사람들과의 비즈니스가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그걸 다 취소하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김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했다.
“대신 LA로 급히 날아가야 합니다. 조금 전에 프레더릭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만큼 위중하니 이에 맞춰 준비해 주세요.”
-아,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김대석의 목소리가 한층 진중해졌다.
김대석은 유재원이 급하게 한국행을 취소한 것에 대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 정답이었던 것이다.
“고마워.”
“뭘, 가족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위독하다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기본 아니겠는가. 심지어 남도 아니고 가족인데 말이다.
띵!
-지금 공항이시니 일단 전용기에 오르시면 됩니다.. 전용기에 연락해 행선지를 LA로 바꾸었습니다. LA에 도착하시면 예복을 비롯해 필요하신 물건들을 바로 수령하실 수 있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역시 김대석 비서실장이었다.
유재원과 가족은 바로 공항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쳐 전용기에 탑승했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LA로 이동했다.
신기한 건 혜성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비행기들을 보며 방방 뛸 정도로 신을 냈었다. 그러다가 유재원과 티파니가 알프레드 집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서 분위기가 달라지자 얌전해졌다.
“혜성아, 일이 생겨서 한국 할아버지 집은 다음에 갈 거야.”
“일? 무슨 일?”
“엄마의 외할아버지 프레더릭, 기억나지?”
“응! 생각나!”
“프레더릭께서 매우 아프시대.”
“아픈 거 싫은대. 내가 빨리 나으라고 호 해 줄 거야!”
과연 혜성이가 지금 상황을 이해했을까?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유재원과 티파니가 하던 평소의 대화를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고대했던 한국행이 아니라 LA에 간다고 갑자기 변경했음에도 떼를 부리지 않고, 얌전해진 것만으로도 또래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잠시 후.
유재원의 전용기가 LA에 도착했다.
LA 공항에서 김대석 비서실장이 준비한 경호팀으로부터 의복을 비롯한 문병용 선물들과 꽃을 받았다. 꼼꼼한 김대석 비서실장의 명성 그대로 준비된 옷 중에는 혜성이의 것도 꼬마용 정장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유재원과 식구들은 LA 공항의 VIP 라운지 숙소에서 얌전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프레더릭이 있는 UCLA 메디컬 센터로 이동했다.
UCLA 메디컬 센터에서 특급 VIP를 위해 만든 1인 병동.
그곳에 프레더릭이 있었다. 거기까지 접근하기 위해서 ID 테크놀로지 본사의 보안 시스템에 비견될 만큼의 보안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프레더릭 할아버지!”
그렇게 만난 프레더릭을 보고 혜성이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어이쿠, 우리 혜성이 왔느냐!”
프레더릭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상체만 세운 상태에서 혜성이를 안아 줬다.
그 모습에 티파니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알프레드 집사님으로부터 받은 연락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혜성이를 안아 줄 정도의 기력은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유재원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언뜻 보면 기력을 회복한 것 같지만, 유재원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촛불이 꺼지기 직전 심지가 타들어 가면서 확 밝아지는 것처럼 프레더릭도 그렇게 기력이 돌아온 것 같았다.
“엄마나 이모들은요?”
혜성이가 프레더릭에게 재롱 잔치를 하는 동안 티파니가 알프레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티파니 아가씨와 재원 님이 제일 먼저 도착하신 겁니다. 다른 분들도 곧 도착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알프레드 집사의 말에 유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원과 티파니는 전용기가 준비된 상태에서 연락을 받은 덕에 바로 LA로 목적지를 변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연락이 늦어서 태평양 한가운데 있었다든가, 한국에 도착한 뒤였다면 지금 이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을 확률이 높았다.
“외할아버지, 나 배고파요.”
프레더릭에게 그간 배웠던 율동을 선보이던 혜성이가 뜬금없이 배고프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다급히 날아오느라 점심을 깜빡했다.
“어이쿠, 긴급 상황이로군. 알프레드, 혜성이가 먹을 만한 식단으로 음식 좀 차려 오게.”
“할아버지도 같이 먹어요! 엄마, 아빠도!”
“그래그래. 다 같이 먹자꾸나. 알프레드, 들었지?”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프레더릭의 말에 알프레드 집사님이 급히 움직였다.
혜성이만의 점심이라면 이렇게까지 급하시진 않았을 거다. 아무래도 프레더릭은 최근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유재원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프레더릭의 예전의 건강했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너무도 대비되었다. 반쪽이 된 얼굴에 주름과 검버섯이 오른 모습은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을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몇 시간 후.
점심을 다 먹은 혜성이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친화력 만점에 낯가림이란 것이 없는 혜성이는 프레더릭의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저렇게 졸기 시작했다.
“혜성이는 크게 될 녀석이야.”
프레더릭은 그런 혜성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남겼다.
“그럴 수밖에요.”
유재원도 거기에 동의하기 때문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본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건 필연적으로 크게 될 수밖에 없다. ID 그룹이나 셰브롱의 안정적인 미래를 생각한다면 혜성이에게 둘 다 승계되는 게 제일 좋은 그림이었으니 말이다.
“후후,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 될 거라고 확신하지.”
그런 유재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프레더릭은 더 크게 될 거라고 말했다. 마치 유재원은 모르는 뭔가를 본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높이 서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지.”
“네? 저는 아니던데요?”
유재원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외롭다는 느낌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고, 가족과 동료들이 주변에 있었다. 게다가 시시때때로 터지는 예측 못 할 사건들은 유재원의 긴장감이 풀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당장 실리콘 밸리만 봐도 애플의 잡스와 페이스북의 에두아르도, 마크가 합심해서 반ID 그룹 여론을 이끌고 있었다.
ID 그룹의 강력한 존재감을 거론하면서, 거대한 독점 기업 때문에 시장의 건강한 발전이 저해되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최근 유재원이 시작한 라이프 리워드에 대해 언급했다.
그룹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유재원이 개인적으로 벌이는 프로젝트였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인터넷에서는 화제였다. 라이프 리워드로 수십 개의 Z코인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네티즌의 부러움도 끊이지 않았다.
“그야 자네가 특이한 법이고. 혜성이에게 동생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일세.”
유재원의 반박을 프레더릭은 가볍게 받았다.
“아, 네, 티파니랑 잘 이야기해 볼게요.”
식구를 더 늘린다고 해서 유재원에게 부담은 전혀 없었다. 식구들로만 축구팀을 꾸릴 만큼 많은 자식을 두어도 다 먹여 살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티파니는 달랐다. 아이를 갖게 되면 최소 3개월은 쉬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후계 구도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최근에 자네가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지?”
재미있는 일?
유재원은 진행 중인 일이 하도 많아서 프레더릭이 무얼 지칭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틀라스 말인가요?”
“그래. 그것도 있었지.”
프레더릭의 말을 들어보니 재미있는 일이란 라이프 리워드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아틀라스도 알고 계신 걸 보니 최근 유재원이 벌이는 일은 다 알고 계신 게 확실하다.
“티파니가 자네를 처음 데려온 날이 생각나는군.”
그러면서 프레더릭은 갑자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유재원도 셰브롱 로고가 찍힌 전용기를 타고 프레더릭의 저택에 처음 가 봤던 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이제 와서 이야기를 하자면, 티파니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고 그게 동양인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당혹스러웠지. 예상했던 일은 아니었거든. 솔직히 부정적인 감정이었어. 그렇지만 직접 대면했을 때, 자네의 눈빛을 보고 마음에 들었지. 나를 보고 주눅 들지 않았던 젊은이는 자네가 처음이었으니까.”
프레더릭 이전에 워낙 큰일을 많이 겪어 봤던 유재원에게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과 같은 특이한 모습은 처음인 프레더릭에겐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지 궁금한데, 아쉽게도 내가 그걸 직접 확인하진 못하겠군.”
“그런 말씀 마세요. 곧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어지간해서는 빈말 따위는 하지 않는 유재원이지만, 프레더릭에게만큼은 달랐다.
“후후,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지. 하여튼, 일단 시작했다면 끝을 확실히 봐.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일세.”
“물론입니다. 끝장을 보는 걸 저보다 잘 하는 사람은 없죠.”
유재원도 쉽게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반동이 이어질 테고, 어쩌면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 길이 아니면 미래는 없는 것이었다.
“후우, 그러면 이제 티파니를 좀 불러주겠나.”
“예.”
시작을 했다면 확실히 끝을 봐라.
이것이 프레더릭이 유재원에게 주는 마지막 조언이었던 모양이다. 유재원은 곧 티파니와 자리를 바꾸었다.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자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시작으로 프레더릭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모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다 모인 상태에서도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티파니 이모들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셰브롱의 후계 구도는 티파니로 정리되었기에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녁부터 프레더릭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의료진들이 열심히 조치를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슨 병이 있어서 앓아 누은 게 아니라, 노환이었으니 어떠한 긴급 조치를 할만한 것도 없었다.
프레더릭은 그렇게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얼굴로 영면에 들었다.
장례는 프레더릭이 생전에 했던 말에 따라 가족들만이 참석하는 작은 규모로 치러졌고, 묘소 역시 프레더릭 가문이 묻히는 가족 묘지에 자리 잡았다. 한참 전에 먼저 자리를 잡았던 제이콥의 옆자리였다.
장례 절차는 끝났지만, 프레더릭의 가족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진 못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유언장 개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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