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회
리콜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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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 빨랐다.
2009년이 시작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11월이 되었다.
유재원에게 있어서 2009년은 여러 가지 결실을 이뤄낸 해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연초에는 백신 탐색 알고리즘을, 뜨거운 여름에는 칼을 갈았던 신제품들이 쏟아졌고, 가을에는 인공지능 골드로 절대 사람 말고는 정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던 바둑에서도 세계 최강 기사를 상대로 완벽히 승리했다.
11월이 되자마자 들려온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은, 난야 메모리와 인피니온, 엘피다의 파산 소식이었다. 도시바 역시 위태롭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감산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작년에 시작했던 메모리 반도체 치킨런도 이제 끝이 보이는 것이었다.
시작은 엘피다였다.
일본의 최대 D램 생산 업체였던 엘피다는 메모리 업체 중에서도 가장 높은 생산 비용을 안고 있던 회사였다. ID 일렉트로닉스가 출혈 경쟁을 시작하자 제일 먼저 곡소리가 났던 기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일본의 반도체 사업이란 상징 때문에 일본 정부는 엘피다에 긴급 수혈까지 했다.
그렇지만 8기가바이트 메모리가 이제 단돈 30달러다! 한국 돈으로 3만3천 원에 불과할 정도로 폭락한 지금에는 일본 정부의 지원금이라는 것도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반도체 공장이란 일단 건설할 때부터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한 시설이었다. 엄청나게 독한 화학물질을 다루면서 먼지 하나 없는 클린룸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리소그래피 장비도 1세트가 수천억 원이고 최근 예약을 받는 EUV 장비는 조 단위를 자랑했다.
공장이 만들어진 다음, 가만히만 있어도 감가상각비로 수십억 원씩 떨어진다. 수익을 내기 위해 반도체 제조 장비를 돌리면 운영비가 필요하다.
칩을 팔아도 손해가 나면서 체력이 약한 메모리 업체부터 파산 행진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단 엘피다만 그런 게 아니라 난야 테크놀로지나 인피니온 등등. 다른 메모리 반도체 제조 업체들 모두가 그랬다.
오죽하면 ID 일렉트로닉스도 반도체 사업부는 작년 말부터 손해였다. 하지만 다른 반도체 회사들에게는 없는 가전 부문이라는 건실한 사업체도 있었고, 스마트폰과 PC, 서버 시장, 클라우드 시스템 시장 등등 훌륭한 고정 거래선이 있었기에 의외로 적자의 규모는 제일 작았다.
이렇게 반도체 업체들이 다 쓰러지고 나자, 지금 시장에 남은 업체는 둘이었다.
한국의 ID 일렉트로닉스, 미국의 마이크론.
마이크론도 위태롭긴 했지만, 미국 내에서 기계학습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구동하기 위한 클라우드 서버의 요구량이 폭발하면서 버텨낼 수 있었다.
다만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당장 ID 일렉트로닉스의 수익성이 기적처럼 반전되는 일은 없다.
시장에 풀린 재고들이 다 소진될 때까지는 몇 달이 더 걸릴 테니 말이다. 대신 내년 이맘때쯤이면 ID 일렉트로닉스는 승자의 여유를 즐기며, 돈을 쓸어 담고 있을 확률이 100%다.
그걸 보고 다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 업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ID 일렉트로닉스는 7나노미터 최신 공정 양산을 시작하고 있을 테니, 경쟁을 걱정할 단계는 이제 다 지났다.
유재원이 이와 같은 보고서를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서 받아 보았을 때, 비슷한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주식 투자자들이었다.
엘피다와 난야, 인피니온 등의 파산 소식이 연이어 들릴 때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주가는 만 원 단위로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애널리스트들도 ID 일렉트로닉스에 대해 리포트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목표 주가도 설정해 줬는데, 최대한 보수적으로 나온 게 18만 원이었고, 높이 잡은 건 25만 원인 것도 있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주식 발행량이 20억 주였으니, 목표 주가가 25만 원이라는 건 주가총액이 500조 원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시장에서는 ID 테크놀로지라면 모르겠지만, 가전과 반도체뿐인 ID 일렉트로닉스가 시총 500조가 될 가능성은 작다고 봤다. 다만 단기든 장기든 기업의 전망이 너무나도 좋다는 증거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가전 부문의 힘으로 버텨오던 ID 일렉트로닉스도 이제 해 뜰 날이 찾아온 것이다.
비슷한 시각.
띵!
-레이나 님!
컴퓨터 앞에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리포트를 쓰기 위해 ID 워드프로세서와 씨름하고 있던 레이나는 본인을 부르는 소리에 잠시 작업을 멈췄다. 잠깐 작업을 멈춘 김에 기지개를 켜자 우두득 하는 소리가 온몸에서 났다.
-레이나 님!
“응, 말해. 듣고 있다고.”
레이나를 부르던 목소리는 책상 구석에서 충전 중이던 스마트폰의 인공지능 비서였다. 3년 전 대학교 진학을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스마트폰을 선물 받았던 레이나였다. 이후 레이나의 삶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인공지능 골드의 지능 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면서 33만 N포인트를 정산 받은 게 결정적이었다. 본인이 좋아하던 사진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인공지능 골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인데, 알고 봤더니 당시 정산금 배당 순위에서 상위 1%에 드는 위치였다.
이걸 가지고 레이나는 SNS를 시작하면서 인공지능 골드와 관련된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몇 달 지나지 않아 레이나의 SNS는 순식간에 팔로워 100만을 돌파했다. 그 이후로도 팔로워의 증가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3년이 지난 지금 레이나의 SNS는 팔로워 5백만을 자랑하는 대형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레이나가 SNS를 더욱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의 2배도 찍고 있었을 테지만, 원래 그녀의 성격이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SNS에 올리는 것도, 본인의 개인정보는 모두 감추고서 개인정보 공유를 통한 수익 창출 극대화 노하우와 인공지능 골드, 최근 핫이슈 같은 걸 정리해 올렸던 것이었다.
엄청난 팔로워를 자랑하는 인플루언서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올려 보는 사치품 하울이라든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찍은 인증샷 같은 건 하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나가 처음 SNS를 시작하고서 올린 게 바로 개인정보 배당으로 들어온 33만 N포인트가 찍힌 인증사진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레이나는 33만 N포인트나 정산받았던 노하우를 SNS에 풀기 시작했고, 그것이 SNS상에서 대대적으로 공유되면서 사람들이 몰렸다.
레이나는 3년이나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개인정보 공유 배당금이 기본이었고, 인공지능 골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최근 사회의 현안이 레이나의 SNS에 올라오는 주요 소재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사치품 꾸러미를 올린다든가 하면 팔로워들이 붙긴커녕 떨어져 나갈 거라고 레이나는 확신했다. 물론 레이나의 취향도 전혀 그쪽은 아니었다.
-인공지능 골드로부터 바둑 도전에 대한 특별 배당금이 정산되었습니다.
“우와! 진짜!”
인공지능 비서의 말에 레이나가 펄쩍 뛰었다.
가장 최근 올린 건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도전이었다.
3년 전부터 기대하고 있던 이벤트였고, 그때부터 레이나는 인공지능 골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레이나는 888과 같은 배팅 사이트에서 인공지능 골드의 승리에 1만 달러나 걸기도 했다.
그것도 5:0에 걸어서 12배나 되는 대박이 터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배팅으로 12만 달러나 벌은 레이나지만, 그녀의 평소 수입은 팔로워 숫자가 100만이 넘었을 때 평범한 직장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레이나의 타임라인 중간에 한 번씩 들어가는 톡톡의 기본 광고로 매달 10만 달러의 정산금이 나왔다. IT 업계에서 레이나와 직접 컨택해 광고를 의뢰하는 것들은 한 건에 수만 달러씩 했다.
ID 그룹의 커뮤니티 가이드에 따라 합법적인 광고만 했는데도 한 달 수입이 30~40만 달러 정도였으니, 12만 달러의 배팅 수익에 레이나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슷한 또래의 최상위 등급의 수익을 자랑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초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여줘! 빨리 보여줘!”
-명세서를 화면에 띄우기 위해선 페이스 키 인증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레이나는 바로 거치되었던 최신 안드로이드 S9 스마트폰을 들어 전면 카메라에 본인의 얼굴을 비췄다. 한층 빨라진 이미지 해석 속도 덕에 슥 하고 스치기만 했는데도 잠금이 풀리면서 화면이 나타났다.
-103만 N포인트입니다.
“대박!”
레이나는 100만이 넘는 숫자를 보고는 감동했다.
돈으로 따지면 대략 10만 달러이니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배팅 사이트에서 받은 것보다 더 적은 액수다.
더구나 레이나는 3년 전부터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도전에 대비했었다. 넥스트컴 바둑에 가입해서 열심히 바둑을 두었고, 1년 전에는 아마추어 1급까지도 올라왔었다. 바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레이나가 맨땅에 헤딩으로 아마추어 1급이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넥스트컴 바둑에서 레이나가 바둑을 둔 횟수만 만 단위가 넘었다.
학교 생활이 중심이긴 했지만, 틈만 나면 바둑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다가 기력 상승을 위해서 별도의 공부까지 했다.
그렇게 대전을 치르면서 레이나는 인공지능 골드로 의심되는 상대와 여러 번 대전을 벌였다.
인공지능이라고 밝혀지면 불필요한 관심과 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상대의 정보가 전부 익명 처리되는 깜깜이 방에서만 활동했다. 그래도 바둑을 두다 보면 인공지능이구나 싶은 상대가 분명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상세한 내역서도 첨부되어 있다.
레이나는 바로 파일을 탭해서 내용을 띄웠다.
“42번이나 붙었었구나.”
19승 30패.
레이나가 넥스트컴 바둑에서 알파 버전 바둑 모듈과의 승부로 거둔 전적이었다.
알파 버전 바둑 모듈도 작년 시범 경기에서 이창호 9단과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니, 레이나의 19승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다. 승리 전적 대부분은 알파 버전이 완성된 극초기 아마추어 수준의 기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 거둔 전적이었다.
이후에는 계속 지기만 했다. 알파 버전의 기력이 프로 수준으로 올라갔던 2008년 여름 이후론 레이나의 실력 부족으로 대국 기록이 더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 수준에서의 33번의 대국도 유재원이 장담했던 그대로, 103만 N포인트라는 막대한 보상으로 돌아왔다.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달리 2009년 11월 현재 레이나의 주 수입원은 SNS가 되었지만, 100만 N포인트가 넘는 정산금은 여전히 각별했다.
더욱이 첨부된 정산서와 넥스트컴 바둑에서 알파 버전과 겨뤘던 기보를 바탕으로 분석한 연재 글을 쓴다면 레이나의 톡톡을 팔로우하고 있던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레이나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톡톡!
“응?”
한참 정산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던 레이나에게 다시 한 번 알람이 울렸다. 톡톡의 알람이었다. 짧게 두 번 톡톡하고 울리는 알람의 의미는 레이나가 팔로우하고 있는 누군가가 톡톡에 게시물을 올렸다는 뜻이었다.
500만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레이나지만, 정작 본인은 다른 사람을 많이 팔로우하진 않았다.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팔로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이나는 바로 스마트폰을 들고 본인에게 전달된 톡을 확인했다.
새로운 톡은 렉서스 급발진 피해자 연합이었다.
도요타 렉서스 자동차의 급발진은 레이나도 생방송으로 보았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는데, 동화 속에 등장하는 기사처럼 2세대 뉴로 전기차가 나타나면서 최악의 참사를 막았다.
그와 함께 사건의 경과도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서 관련자들의 SNS를 팔로워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연히 레이나는 피해자 연합 그리고 유재원의 편이었다. 바닥 장판과 가속 페달이 원인이라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리콜하겠다는 도요타의 발표는 아무리 봐도 신빙성이 떨어졌다.
-긴급!
-장판 교체, 가속 페달 교체를 받은 차량에서 급발진 발생!
-도요타 측에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렉서스 사고 조사에서 ECU 문제가 아닌 장판과 페달 문제로 몰아가는 정황 확인!
톡톡에 올라온 링크를 확인하자 처참한 사고 사진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대파된 차량은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고, 사고가 터진 도로는 전쟁터 같았다.
“역시! 장판 따위 교체한다고 급발진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지.”
레이나는 바로 해당 톡톡을 본인 계정의 톡톡으로 리톡했다. 다른 사람이 올린 게시물을 그대로 본인의 팔로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레이나가 리톡 버튼을 한 번 탭하자 순식간에 똑같은 내용이 500만이 넘는 팔로워들에게 전해졌다. 그와 함께 레이나의 톡톡을 팔로워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의 알람이 울렸고, 해당 톡을 본 이들 중 최소 10% 이상은 리톡 버튼을 탭해 다시금 전달했다. 일부는 공유 버튼을 눌러서 본인이 사용 중이었던 다른 SNS나 즐겨찾기를 해놓은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물을 올렸다.
이러한 반복이 몇 번 이어지자마자 인터넷은 순식간에 도요타 급발진 사태가 점거했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조사에 어떠한 영향력 행사하지 않았음.
도요타에서도 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바로 SNS에 해명이 올라왔다.
-ECU 소스 코드 검증 완료. 어떠한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음.
논란의 중심인 전자제어유닛(ECU)에도 자신감이 넘치는지 바로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글이 이어졌다.
“뭐지? 얘네가 이렇게 빠른 애들이 아닌데.”
도요타 측의 빠른 반발에 레이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나가 알고 있던 일본 기업들은 기민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마치 정곡을 찔린 것처럼 바로 반박이 나오다니 말이다.
톡톡 하는 알람이 다시 울렸다.
-유재원의 톡톡입니다.
“유재원 회장님!”
인공지능 비서의 설명에 레이나는 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담겨 있는 내용도 놀라웠다.
-도요타의 ECU 소프트웨어에서 중대한 버그를 발견했습니다. 조만간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 급발진 재현 실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의 톡톡 한 방에 도요타의 대규모 자발적 리콜은 미담이 아닌 스캔들로 급속히 속성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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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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