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회
충격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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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니터 화면에 복잡한 단백질 구조가 3D로 나타났다.
백신 탐색 알고리즘이 H1N1을 23일간 쉬지 않고 분석해낸 끝에 발견한 백신이었다. 이 물질의 이름은 안티플루 H1으로 지정했다.
신종플루인 H1N1뿐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몇 가지 변종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2020년에 유행할 코로나 19에도 효과가 있을지는 그때가 되어 봐야 알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 생성 속도가 워낙 빠르니 2020년에는 과연 유재원이 알고 있는 그놈이 튀어나올 거라는 확신은 없었으니 말이다.
“작동 메커니즘 설명 부탁드릴게요.”
현대의 상식을 초월한 백신 탐색 알고리즘을 구현해 백신 후보 물질을 찾는 것에 성공한 유재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생명공학 분야의 권위자가 된 건 아니다. 기계학습 인공지능의 최대 단점 중 하나로 도출된 결과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은 이번에도 적용되기에,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했다.
“이 후보 물질은 H1N1이 인체 세포 침식의 메커니즘을 방해합니다. H1N1의 수용체 돌기에 인체 세포보다 먼저 반응해, 수용체 돌기의 성능을 80% 이하로 떨어뜨리고, H1N1의 RNA를 보호하고 있는 단백질 캡슐의 형질을 변화시키지요. 동시에 인체의 T세포와도 반응하여 염증성 사이토카인의 분비를 억제합니다.”
레이몬드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그러면서 모니터 위에 H1N1과 백신 후보 물질이 결합되었을 때 나오는 현상을 전자 현미경으로 포착한 영상을 띄웠다.
레이몬드 박사의 말처럼 길쭉한 쐐기 형태의 백신 후보 물질은 H1N1의 수용체 돌기와 결합했다. 또한, 백신 후보 물질과 결합된 H1N1의 활동성도 크게 떨어졌다. 이 정도면 백신 후보 물질이 아니라, 백신 그 자체였다.
더욱이 H1N1 감염에 의한 첫 사망자의 사인은 다발성 신부전증이었다.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인체 면역체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스스로의 몸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H1N1을 물리칠 때까지 사이토카인 분비를 억제함으로써 면역체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걸 막을 수 있다.
다만 너무 강하게 억제하면 면역 결핍으로 인한 합병증이 일어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인체에 유해하진 않겠죠?”
“일단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임상에 들어가 봐야 제대로 답이 나올 겁니다.”
레이몬드 박사의 질문에 유재원은 확신을 주진 못했다.
버추얼 휴먼 프로젝트가 완성된다면 임상에 들어가지 않아도, 가상의 인체 실험을 통해 유해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기술이니 그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나저나 실물은 언제 완성되나요?”
“지금 연구실서 소량 생산 중입니다. 다만 인체 투약 방식은 후보 물질을 바로 주사하는 것보다 나은 메커니즘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레이몬드 박사가 구상하는 건 바로 이런 거다.
백신 후보 물질의 작동 메커니즘을 보았을 때, 사백신(Inactivated Vaccine)의 형태로 가공하는 게 최고의 효과가 나올 거라는 이야기다.
백신 후보 물질을 H1N1과 먼저 반응시킨다. 그리고서 사멸한 H1N1만 모아 몸에 먼저 주사하고, 다음에 3일 정도의 시간을 두고서 2차로 백신 후보 물질을 접종하는 방식이다.
그냥 백신 후보 물질만 주사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는 건 유재원도 상상할 수 있었다. 다만 번거롭게 두 번 접종해야 하는 게 문제지만, 이미 판데믹 선언이 된 상황에서 덥고 찬 거 따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좋아요. 일단 우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동물 실험을 해 보고, 결과가 나오면 양산과 사람 임상 실험도 수행하도록 하죠.”
유재원의 결정이 나왔다.
이제는 뒤도 안 보고 앞으로만 달릴 시간이다.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 신종플루 백신에 유의미한 성과 도달.
-동물 실험에서 매우 긍정적인 결과 도출.
-한국과 미국, 멕시코 3국에서 동시에 대규모 임상 실험한다.
ID 하이테크발 백신 소식이 전 세계를 강타한 건, 인공지능이 백신 후보 물질을 만들어낸 지 10일이 지난 후였다.
물론 ID 그룹 차원에서 배포된 보도 자료를 보고서 부랴부랴 속보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기술도 세계 제일이지만, 보안도 세계 최고였다.
경쟁 기업들의 입장에서 ID 그룹은 그야말로 보물 창고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ID 그룹과 여타의 경쟁 기업들 사이의 기술 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벌어지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확실한 예가 바로 메모리 반도체였다.
대다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30나노 공정에서 메모리 칩을 양산 중이었다. 반면 ID 그룹의 반도체 사업부는 14나노 공정의 메모리 칩을 찍어내고 있었다.
똑같은 면적의 웨이퍼를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미세 공정의 차이만으로 ID 그룹은 경쟁 업체보다 4배 많은 칩을 얻을 수 있었다. 현실은? 4배 이상이다.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가 사용하는 웨이퍼는 300mm로 업계 최고의 면적이었다.
대형 웨이퍼에서 초미세 공정으로 메모리 칩을 찍어내는 ID 일렉트로닉스의 생산 능력을 그 어떤 업체도 버텨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상징하는 게 작년부터 시작된 메모리 반도체 치킨런이었다.
현재 컴퓨터 업계의 표준 메모리는 DDR3-1333 규격의 8기가비트 칩이었다. DDR3가 처음 공급되었을 때만 해도 칩 1개당 단가가 20달러 이상이었다. 소비자들은 이러한 칩을 4개 혹은 8개를 녹색의 기판에 묶은, 일명 시금치 램이란 형태로 매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칩 1개당 단가가 워낙 비싸니, 8기가바이트짜리 시금치 램 하나가 20만 원을 호가했던 때도 있었다. 칩의 가격에 유통 비용과 마진이 보태지니, 그야말로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 튀어나왔다.
지금은?
ID 일렉트로닉스의 무차별적인 양산에 칩의 공급 단가가 폭락에 폭락을 거듭했다.
DDR3-1333 규격의 8기가비트 칩의 선물시장 가격은 2달러. 한국 돈으로 2,500원도 안 되는 가격까지 내려왔다.
불과 1년 전과 비교하면 1/10로 떨어진 것인데,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그에 따라 시금치 램 가격도 폭락했다. 1년 전 20만 원 이상의 시세를 자랑했던 8기가바이트짜리 시금치 램은 현재 5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치킨런을 버티지 못하는 메모리 업체들 중에는 벌써 자본 잠식에 빠진 기업들도 나왔다. 독일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키몬다가 대표적이었다.
반면 ID 일렉트로닉스는 DDR3-1333 규격의 8기가비트 칩의 가격이 다시 한 번 반토막이 나도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오죽하면 2008년 치킨 레이스로 반도체 업체들은 곡소리를 낼 때, ID 일렉트로닉스는 평소와 비슷한 규모의 배당을 실시했다. 주식 한 주당 500원이라는 통 큰 배당이었는데, 치킨런에 대한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키는 조치였다.
이게 가능했던 게 경쟁 업체와 차원이 다른 14나노 미세 공정의 힘이었다.
더욱이 과거 ID 일렉트로닉스는 미세 공정을 먼저 개발하고 나면, 협력 업체들에게 노하우를 제공했었다.
물론 공짜로 제공한 건 아니었지만, 반도체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미세 공정 기술을 오픈한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4나노 공정은 아직 ID 일렉트로닉스의 독점 기술로 남아 있었다.
관련 업체에 기술 제공을 너그럽게 했던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는 건 아니다. 14나노 공정도 인텔과 AMD, ATI와 엔비디아 같은 비경쟁 업체에 충분히 제공할 의사는 있다. 대신 메모리 치킨런이 끝난 다음에 제공하겠다는 것이 유재원의 계획이었다.
14나노 공정이든, 7나노 공정이든 앞으로도 미세 공정 관련 기술은 반도체 업계에 꾸준히 제공하겠다는 게 유재원의 큰 그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컴퓨터 성능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할렘 아키텍처를 완성하고 제2의 전성기를 되찾은 듯한 인텔이지만, 그 정도 성능으로는 어림도 없다.
CPU의 성능이 최소한 지금보다 5천 배는 빨라져야 한다.
하여튼, 해커들 역시 ID 그룹의 서버에서 기밀 자료만 탈취하면 신세가 바뀌는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에, ID 그룹의 전산망은 뚫으려는 자들과 이를 막는 시스템 관리자의 싸움이 늘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였다.
물론 승자는 언제나 시스템 관리자였다.
애초에 원격 접속에 의한 권한은 어지간해선 기밀 자료에 접근도 못 하게 막아 놓았기에 의심스러운 접근은 바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한 방어 덕에 ID 하이테크의 신종플루 개발 소식도,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눈치챈 사람들은 없었다.
심지어 사전 조율이 끝났던 한국의 바이오 의약 기업 셀트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셀트리온,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으로부터 신종플루 백신 생산 수주.
-신속한 임상 실험과 대량 생산으로 신종플루 위기 극복에 힘 보탤 것.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의 보도자료가 있은 다음에야 셀트리온에서도 보도자료를 냈다. 게다가 셀트리온 측에서 보도자료를 낸 시간은 한국 주식시장이 열린 직후인 아침 9시 30분. 그러자 셀트리온의 주가도 하늘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온갖 협잡들이 얽히고설킨 한국의 주식시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처럼 굵직한 이벤트가 있다고 하면 먼저 정보를 접한 이들이 움직였으니 말이다.
내부자 정보를 통해 주식을 거래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었지만, 지켜지는 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평소의 한국 주식시장이었다면, 셀트리온이나 ID 인베스트먼트가 먼저 셀트리온의 주식을 사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개미투자자들이 막차를 타거나, 상투를 잡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달랐다.
셀트리온은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이 먼저 보도자료를 낼 때까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오 의약품이라는 건 언제든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은 산업이었다.
백신 탐색 알고리즘이 최적의 백신 후보 물질을 찾아내 준 지금 이 시점에서도 돌발적으로 트러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이야 그나마 백신 후보 물질이라는 성과가 나왔으니 보도자료를 내면서 공개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한 상태에서 공표가 되었는데, 백신 탐색 알고리즘이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했다면?
유재원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도 일이지만, 수많은 피해자가 생겨날 수도 있었다.
증권시장은 희망으로 움직이는 곳이었고, 신종플루 백신이라는 건 지금 이 시점에서 그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상품이었다.
즉, 주가 폭등은 당연했다.
오늘 보도자료가 나오자마자 셀트리온의 주가가 상한가를 찍은 다음 매물도 하나 나오지 않는 것이 이를 확실히 증명한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한다면 상투에서 잡은 개미들의 피해는 엄청났을 것이다.
이들의 원성은 그대로 유재원에게 쏠리는 것 역시 당연했다.
유재원은 만에 하나 있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셀트리온 측에 비밀 엄수와 내부 자료를 통한 주식 매매를 금지하도록 했다. 만약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과의 협약이 새어나가면 계약을 파기하는 건 물론 손해배상 청구도 하겠다고 엄포했다.
셀트리온의 임직원들 역시 순식간에 실리 계산을 끝냈다.
어떻게 따져 보더라도 비밀을 지키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는 결론이었다. ID 그룹의 협력사가 된다는 것 자체로도 엄청난 일이었고, 미국과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신종플루의 백신을 세계 최초로 만드는 것 역시 셀트리온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내부자 정보로 주식을 좀 샀다가 잘못된다면 입게 되는 피해는 상상 그 이상이다. 계약이 파기되는 일도 큰일이고, 경쟁 업체에 백신 생산 계약이 넘어가는 것도 타격이겠지만, 한국 땅에서 ID 그룹 눈 밖에 난다는 건 최악이었다.
이젠 1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었지만, 밤의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대한일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유재원에게 찍혔기에 일어난 일 아니겠는가.
재벌은 물론 대통령도 대한일보와 척을 지기 싫어했던 게 그간의 흐름이었다. 그래서 유재원과 대한일보가 처음 충돌할 때만 해도 유재원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유재원에게 찍혔다고 한다면 셀트리온이 제2의 대한일보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덕분에 셀트리온은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과의 협업을 극도의 비밀로 취급했다. 소수의 정예 조직을 꾸렸고, 셀트리온의 회장이 직접 이를 이끌면서 지금의 성과에 이른 것이다.
ID 하이테크 바이오 팀으로부터 백신 후보 물질을 넘겨받은 셀트리온은 임상 실험과 양산을 위해 전력으로 움직였다.
-전 세계 신종플루 누적 사망자 1천 명 돌파.
그러는 사이 신종플루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체 사망자 중에 멕시코의 비중이 50% 이상이었지만, 미국에서도 100명이 넘었다. 그에 따라 치명률도 급상승했는데, 그 수치는 감염자의 2%에 달했다.
유재원이 예상했던 0.3%에 비해 7배나 높은 수치였다.
타미플루와 리렌자 로타디스크가 적극적으로 처방되고 있었음에도 치명률이 낮아지기는커녕 더 높아지는 것이었다.
-ID하이테크의 신종플루 백신, 동물실험 이상 무.
전 세계가 가장 먼저 임상실험에 돌입하는 유재원의 백신 임상실험 돌입에 주목했다. 유재원 역시나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과거의 신종플루보다 7배나 높아진 치사율이라니.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유재원은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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