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회
충격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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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피라는 제목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전자는 뭔가 오컬트 적인 느낌이고, 후자는 게임산업의 최선두에 서 있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잘 뜯어 보면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는 조합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과거에도 있었던 이벤트였다.
이벤트.
정확하게는 게임 속 이벤트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10년 가까이 서비스 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MMORPG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이벤트다.
깐깐하게 따져 본다면 과거에 있었던 건 정식 이벤트가 아닌 버그에 더 가까웠다.
인스턴트 던전 안의 보스 몬스터가 뿌리는 스킬에 맞았을 때만 활성화되어야 할 전염성 도트 데미지가 던전 밖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순식간에 아제로스 영역 전체로 퍼져 버린 탓이다.
도무지 고쳐지지 않아서, 나중에는 블리자드가 서버를 리셋함으로써 사건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최고 인기 게임의 버그로 일어난 사태였지만, 다르게 보면 가상 세계에서의 전염병 발발과 전개의 예로 이보다 적절한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해당 사건은 이번에는 현재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건 버그가 원인이었다. 유재원의 도움으로 한층 탄탄해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게임 엔진에서 버그라는 건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게임 엔진의 개발 언어가 Z+로 교체되면서 개발진이 인지하지 못했던 사소한 오류까지도 인공지능이 다 잡아내면서 빈틈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유재원은 오염된 피 사건을 제대로 된 이벤트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사건도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과거의 사건은 버그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전염병의 양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 제대로 시작할 오염된 피 이벤트는 전염병의 성향을 제대로 반영했다.
오염된 피로부터 시작되는 독감이라는 콘셉트로 가까이 있으면 전염되고, 두건이라는 마스크 비슷한 형태의 아이템으로 전염성 수치를 크게 낮출 수 있다. 현실 시간으로 3일간 새롭게 전파되는 사람이 없으면 박멸된다는 탈출구도 만들었다. 현실에서는 14일이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5배나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똑같다.
그러면서 MMORPG답게 각자의 역할극에 충실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도 마련했다. 마음만 먹으면 강력한 슈퍼 전파자가 되어서 얼라이언스나 호드에 의도적으로 전염병을 퍼트릴 수도 있었다.
반대로 치료사가 되어서 병에 걸린 이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치료를 해 주고, 완벽한 치료제를 찾기 위한 퀘스트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치료제를 찾기 위한 퀘스트는 매우 까다롭고 꽝도 많은 노가다 퀘스트였다. 현실에서 백신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려고 일부러 노가다 퀘스트 형식으로 만들었다. 한국 서버 기준으로 퀘스트를 완료하는 데 100만 명의 유저들이 100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정도였다.
여기에 트롤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주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짜 치료제 아이템도 유저들이 만들 수 있게 해놓았는데, 플레이를 망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트롤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과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유저들은 거리 두기와 두건 쓰기로 오염된 피를 이겨낼지, 아니면 노가다 치료제 퀘스트로 이겨낼지, 그것도 그것도 아니면 트롤들의 승리로 끝날지 두고 볼 일이다.
-오염된 피 이벤트를 시작할까요?
마이크 사장의 답신은 바로 돌아왔다.
이벤트 기획은 작년부터 해 왔던 일이기에, 바로 실행할 수 있었다.
“일단 일주일 정도 홍보를 하고 시작하죠.”
전 세계 모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서버에서 시작될 초대형 글로벌 이벤트였다. 이런 식의 이벤트가 싫을 수도 있는 유저들도 있을 수 있으니, 이벤트가 시작된다는 알림은 먼저 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예, 회장님!
마이크 사장도 유재원의 말에 공감했다.
기술적으로 당장 시작할 수는 있다지만, 블리자드 역시 준비해야 할 건 있었다. 특히 게임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GM들에게 미리 학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염된 피가 주는 도트 데미지는 GM들의 캐릭터라고 해서 면역은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면 GM 캐릭터도 사망이니 철저한 대비는 필수였다.
다음 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역사상 처음 있는 글로벌 이벤트인 오염된 피에 대해 게임 커뮤니티가 떠들썩할 때.
유재원은 업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ID 그룹의 규모가 날로 확장되며 보고서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레밍턴과 최강욱 부회장, 그리고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들을 믿고 본인이 할 일만 했을 텐데, 신종플루가 조만간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지라 유재원은 웬만한 일들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아프면 쉬라고 지시한 일에 대해 각 계열사들이 어떻게 피드백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 따위다.
유재원의 지시 자체가 매우 두루뭉실했기에, 실무진에서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했다. 그렇지만 레밍턴과 최강욱 부회장은 유재원의 지시를 찰떡처럼 받았다. 바로 병가에 관한 규정을 손보는 것으로 말이다.
진단서만 제대로 첨부한다면 병가를 낼 수 있는 기간을 탄력적으로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병가 때문에 생긴 자리를 메울 방법으로 임시 원격근무자를 뽑는 걸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기로 했다.
알파팀과 같이 구성원 하나하나가 대체할 수 없는 천재들로 이뤄진 조직이라면 임시 원격근무자를 뽑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사무직이나 서비스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고도의 노하우가 필요 없는 단순 생산직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덤으로 혹시나 놓치는 것이 있을지 몰라 인공지능 골드에 신종플루와 H1N1과 같은 키워드를 상시 모니터링 하도록 설정해 놓았다.
그렇게 ID 그룹 전체의 업무 흐름을 살펴보고 있는데, 유재원의 눈을 거스르는 것 하나가 바로 들어왔다.
“응? 겨우 10만 장?”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한상수 사장이 올린 문서였다. 바로 에프엑스의 데뷔 앨범 생산량에 대한 보고였다.
그런데 10만 장이라니.
너무나 작은 숫자가 아닌가.
유재원은 한국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은 오전 10시로 업무를 시작할 때였다. 한상수 사장도 ID톡에 접속한 상태였기에 바로 대화창을 열어 질문했다.
“10만 장이라니. 확실해요?”
-아, 넵! 10만 장 맞습니다.
“에프엑스의 인기에 비해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절대 아닙니다! 한터차트 기준으로 월초에 릴리즈한 SNSD의 미니 1집 GEE의 초동 판매량이 2만3천 장이었습니다. 에프엑스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데뷔를 하는지라 선주문량이 크게 늘어나서 10만 장이나 찍게 되었지요.
한상수 사장의 항변에 유재원은 입이 떡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소녀시대, 글로벌에선 SNSD로 불리는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은 자타공인 탑이었다. 라이벌 걸그룹인 원더걸스가 작년 소핫과 노바디로 공전의 히트를 치며 잠깐이나마 1위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2009년이 되면서 갑자기 미국 진출을 선언한 탓에 지금 국내에는 소녀시대뿐이었다.
팬덤도 탄탄해서 GEE로 복귀한 다음 공중파 음악 방송 1위를 싹슬이 중이었다.
그런데 앨범은 겨우 2만3천 장만 팔았다니.
유재원이 인지하고 있던 소녀시대의 위상과 판매량은 전혀 매칭되지 않았다. 아무리 음반 시장이 쇠퇴하고 스트리밍과 음원 파일 시장이 커졌다고 해도 피지컬 음반이 저리 안 팔릴 줄이야.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로 유입되는 팬층도 다 계산해서 나온 숫자가 10만 장이란 건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10만 장이 다 팔린다면 걸그룹 역사를 새롭게 쓰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국 한정이라면 인정이다.
생각해 보니 글로벌 팬덤이라는 게 아직은 없을 때였다.
2010년 중반만 되어도 한류는 세계적인 현상이 된다. 그에 따라 글로벌한 인기를 끄는 아이돌 그룹의 경우 팬덤의 규모가 한 나라를 벗어난다. 앨범 판매량도 무시무시해지는데, 90년대 말에나 보였던 100만 장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건 기본이고 300~500만을 넘어서 1천만이라는 기념비적인 판매고를 찍는 일도 있었다.
1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찍는 아티스트는 미국이나 영국의 슈퍼스타만이 가능한 숫자였는데,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찍어 버렸다.
에프엑스도 글로벌한 팬덤이 조직될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 세계적으로 대흥행이 된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에서 4강까지 오른 덕이었다.
4강에서 비록 아델에게 밀려나긴 했지만, 그때 받은 표수가 1,700만 표는 되었다. 이 중에서 2%만이라도 실제 음반 구매에 나선다면 34만 장이나 판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글로벌 판매망이 구축되지 않았고, 팬덤도 정교한 형태의 조직은 아니라서 초동 공구와 같은 행사도 없었다. 그러니 일본이나 대만의 보따리상들이 들어와서 대량 구매를 한다고 해도 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수량은 한정적이다.
한상수 사장의 말대로 현시점에서는 10만 장만 팔아도 엄청난 사건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그나저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잘 준비됐죠?”
-넵! 이미 전체 편집은 모두 끝난 상태로 언제든 방송할 수 있습니다.
아이돌 그룹 팬덤을 다지는 도구 중 하나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멤버들의 근처에서 찍은 영상으로 평소의 모습을 재미있게 가공해 떡밥을 만들어 내주면, 팬덤은 쑥쑥 자라난다.
유재원의 평소 모습을 보여주었던 리얼카메라 이후로 크게 흥하고 있는 장르였고, 여러 아이돌 그룹들도 이를 따라 했다. 망작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부분 크게 이득을 보았고, 아이돌 그룹의 컴백 때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에프엑스 데뷔도 이러한 흥행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준비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여타의 리얼리티와 격이 달랐다.
에프엑스의 결성부터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 본선 진출과 4강 위업 달성 그리고 데뷔 앨범 준비까지의 여정을 다 담았다.
1편당 분량이 90분에 달했고, 에피소드 숫자는 4편이나 된다. 360분 분량이나 되는데도 에프엑스의 데뷔 서사를 다 담아내기에는 부족할 지경이다. 데뷔 전부터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1편에 90분이라는 편성 시간은 언뜻 길어 보였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 파트에서는 정식 방송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비하인드와 온갖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쏟아질 예정이었다. 게다가 심사위원을 했던 슈퍼스타들과의 캐미도 대단했다.
여타의 아이돌과는 완전히 다른 서사였기에, 데뷔 앨범의 성공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수에게 제일 중요한 앨범의 수록곡을 대충하지 않았다.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에서 선보인 곡들은 물론, 국내 최고의 작곡가들과 해외의 곡들을 후보곡으로 선별했다.
그다음 드림 엔터테인먼트에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블라인드 테스트 때에는 유재원도 참여해서 의견을 냈다.
서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푸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앨범 퀄리티만으로 이미 상급이었다.
“알겠어요.”
그렇기에 유재원은 겨우 10만 장만 찍는다는 소리에 아쉬움이 절로 나왔다.
“대신 해외에서도 분명 반응이 크게 올 거니까, 일본이나 대만,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정식으로 음반을 유통할 방법도 찾아보세요.”
-알겠습니다.
“아! 혹시 물량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 공장에 생산 예약은 잡아 두세요. 만에 하나 제 예상이 틀려서 나중에 위약금을 물어주더라도, 물량이 모자라서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되니까요.”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상수 사장에게 추가 지시를 내린 유재원은 안심하고 ID톡을 종료했다.
에프엑스의 데뷔일은 2월 14일, 토요일이고 현시점에서는 딱 3주 정도 남았다. 그야말로 유재원이 모아줄 수 있는 우주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모아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실패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유재원은 도무지 에프엑스가 실패할 것 같지 않았다.
며칠 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최초 글로벌 이벤트 오염된 피 시작!
-혈신 학카르의 강림을 저지하라!
배틀넷 사이트에 드디어 공지가 떴다.
그와 함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40인 공대용 인스턴트 던전 하나가 새롭게 등장했다. 던전의 보스는 타락한 혈신 학카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최고 전성기였기에, 프로화가 끝난 공격대들이 여럿 존재했었고 이들은 세계 최초의 학카르 킬러 타이틀과 스페셜 아이템 루팅을 위해 너도나도 던전에 뛰어들었다.
혈신 학카르는 자신을 넘보는 공격대들을 향해 오염된 피를 아낌없이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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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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