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6회
충격과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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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어제 새해 특별 대담의 여파로 생겨난 이슈인 세계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일어날 기술적 대량 실업 사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는 게 행복한 거냐 따위의 논쟁이 세계적으로 불이 붙었을 때.
세계 최대의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인텔에서도 작은 행사 하나가 진행 중이었다.
현 인텔의 CEO인 폴 오텔리니의 퇴임과 새롭게 CEO에 지명된 브라이언 매슈 크르자니크의 취임식이었다.
원래보다 5년 이른 2000년대에 인텔의 CEO로 발탁되어서 펜티엄부터 네할렘 세대까지 인텔의 전성기를 가져온 폴 오텔리니였다.
2000년대 초반에는 AMD의 부활로 인해서 많은 비판을 들었지만, 작년 출시한 네할렘으로 다시 역전에 성공하면서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유재원은 물론이고 컴퓨터 전문가들이 모두 예측했던 그대로, 불도저는 AMD를 몰락으로 이끌었다.
불도저 아키텍처의 가장 큰 문제는 연산 유닛 숫자였다.
코어가 8개면 뭐하나.
연산 유닛이 반쪽이라 제 성능이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코어가 8개면 정수 연산 유닛이든 부동 소수점 연산 유닛이든 8개씩 있어야 병목 현상이 사라진다. 그런데 불도저는 4개뿐이라서 코어 2개가 하나의 연산 유닛을 나눠 써야 했다.
운영체제나 게임이 다루는 데이터가 커졌고, 훨씬 복잡해졌다. 그러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되는 멀티태스킹은 보편화된 지 오래다. 그렇기에 코어 하나가 각종 연산 유닛 혼자 쓰기도 바쁜데, 2개당 하나를 나눠 써야 하니 정작 CPU가 할 일이 많아졌을 때 어쩔 수 없이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 유닛이 생기는 것이다.
그나마 부동 소수점 연산이 많이 쓰이지 않는 서버 프로그램은 AMD의 설계 목표에 잘 부합했지만, 가성비 대신 극단적 성능을 선택하는 쪽에서는 인텔에 밀렸다.
무엇보다 클라우드 시스템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ID 그룹에서 구식 데이터 센터 업그레이드용 CPU를 네할렘 아키텍처 기반 제온을 선택함으로써 AMD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심지어 업그레이드의 형태도 AMD의 구식 옵테론을 인텔의 최신 제온으로 바꾸는 것이라서 AMD에겐 타격이 컸다.
반대로 인텔에겐 지금이 최고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서버 시장에서 인텔과 AMD의 비중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50:45으로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62:38로 서서히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컴퓨터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월 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 역시 앞으로 그 격차의 크기는 더욱 커질 거라고 장담했다.
CPU의 아키텍처라는 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설계가 아니다. 연구 기간도 최소 2, 3년으로 길었다. 앞으로 최소 3년간은 AMD의 앞날이 너무도 어두웠다.
그런데 왜 인텔의 이사회는 CEO의 교체를 선택했을까?
남의 떡이 더 커 보였기 때문이다.
인텔이 본업인 CPU 사업에서 오랜 라이벌인 AMD를 완전히 누르는 데 성공했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출혈 경쟁도 심했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 무섭게 성장하는 모바일 분야에서 인텔은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AP나 4G 모뎀, 인공지능용 텐서코어와 자율주행 등등.
어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게 4차산업 이슈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재 인텔의 포트폴리오는 현재 시점에선 최고지만, 미래에는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인텔의 이사회는 그 점을 정확히 보았고, 미래를 대비할 CEO로 브라이언 매슈 크르자니크를 선택했다.
“우리 인텔은 구성원 모두의 단합된 힘으로 CPU 시장에서 절대적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최대 파트너사인 ID그룹이 클라우드 시스템의 업그레이드용으로 우리의 최신 제온 제품을 100만 개나 주문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브라이언 매슈 크르자니크는 취임사를 하는 자리에서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1982년 엔지니어로 인텔에 입사했고, 1996년 에리조나 팹의 관리자가 되었고, 2000년에는 인텔의 CPU 생산에 대한 원료 공급망 관리 책임자가 되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의 최대 업적은 인텔의 제품 생산에서 분쟁 광물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분쟁 광물이란 콩고나 우간다 같은 분쟁 지역에서 전쟁이나 범죄를 벌이며 생산되는 천연자원들을 의미했다.
탄탈럼, 텅스텐, 주석, 금이 대표적인 4대 분쟁 광물이다. 여기에 다이아몬드와 코발트도 분쟁 광물로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재료였고, 이를 다른 물질로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대체할 방법이 없거나, 대체한다면 생산 단가가 폭등해 버리는 탓이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의 방식 역시 분쟁 광물을 다른 물질로 대체하는 게 아니라, 공급망을 바꾸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이었다.
회귀 전의 흐름이었다면 희토류로 전 세계를 향해 갑질을 크게 한 번 해 줬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청나라 채권 상환에 올인해 있는 상태라서 희토류는 물론이고 수출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수출하고 있는 상태였다.
분쟁 지역서 떨이 수준으로 나오는 분쟁 광물 가격보다는 비싸긴 해도, 원가가 크게 오르는 건 아니었다.
이밖에도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다양한 원가 절감으로 인텔의 수익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이사회의 눈에 들었고 2005년에는 COO까지 올랐다.
“우리는 이 기세를 몰아 모바일과 인공지능 그리고 자율주행 전기자동차와 드론 시장에 용감히 도전해 승리할 겁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인텔 이사회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에 부응하는 취임사를 썼다. 더욱이 어제 NBC에서 방송한 유재원과 레이 커즈와일의 새해 특별 대담 프로그램으로 확신을 얻었다.
레이 커즈와일의 너무 나가 버린 예언 때문에 삼천포로 빠져 버린 대담 프로그램이었지만,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유재원 회장이 2009년을 준비하는 아이템으로 ‘전고체 배터리’를 언급한 걸 똑똑히 들었다.
대담 프로그램은 바이오 의약품이나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실업 이야기로 흘러갔지만,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전고체 배터리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로 모바일 기기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지금의 모바일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전고체 배터리는 브라이언 크르자니크가 보기에 이런 모바일 생태계를 지금의 몇십 배로 폭발시킬 물건이었다.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의 단점을 대부분 보완해 주는 게 전고체 배터리였다. 배터리 용량, 배터리 충전 속도, 심지어 배터리의 모양도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거기에 인텔의 미래가 있다고 보았다.
개인용 컴퓨터와 서버 컴퓨터의 시장은 날로 축소되고 있는 반면, 모바일 기기의 판매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그야말로 매년 수억 대가 팔리는 시장이었다. 자율주행 전기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배터리 문제가 해결된 전기 자동차는 곧 내연기관 자동차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 분명했다. 전기 자동차의 효율도 효율이지만, 자율주행이라는 기술은 게임 체인저였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와 무선통신용 모뎀, 자율주행 자동차에 탑재될 컴퓨터 시장이 브라이언 크르자니크에게는 노다지처럼 보였다.
덤으로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드론까지도 인텔의 신규 사업에 포함시켰다.
취임사가 끝나자 천둥과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경쟁사인 AMD가 크게 망한 지금이 치고 나갈 때라는 건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만의 생각이 아닌 인텔 임직원 모두의 일치된 결론이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인텔이 경쟁자를 AMD에서 ID 그룹으로 바꾼다는 이야기였다.
스마트폰과 무선통신 모뎀 그리고 자율주행 기술 모두 해당 분야의 절대 강자는 바로 ID 그룹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매년 수백만 개의 CPU를 사 주던 최대의 파트너를 적으로 돌리는 결정이라는 것을, 장밋빛 미래에 빠진 인텔의 이사회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인지하지 못했다.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인텔의 새로운 CEO 브라이언 크르자니크의 취임사 전문이 띄워진 기사에 유재원은 혀를 찼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가 예정보다 일찍 CEO에 등극한다는 뉴스에, 혹시나 하고 기사를 찾아본 유재원이었다.
결과는 역시나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인텔의 역대 CEO 중에 최악이었다. 전임자인 폴 오텔리니가 다져 놓은 인텔의 저력 덕이 아니었다면, 인텔을 말아 먹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극한의 원가 절감으로 사용자들의 원성을 자아냈고, 탄탄했던 연구 개발 인력 풀을 박살내면서 차세대 공정으로의 이행을 10년이나 늦추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인텔의 주력인 CPU 개발을 도외시하고 AP와 모뎀, 자율주행에 투자를 했다가 죽을 쒔다.
미래의 흐름을 보자면 방향성은 옳았다.
CPU가 4차산업 혁명에서 빠질 수 없는 부품이긴 했지만, 이보다 훨씬 큰 시장이 모바일과 자율주행, 그리고 인공지능이었으니 말이다.
덤으로 드론 역시 4차산업 혁명이 일어나면 쓰임새가 지금의 몇 배로 확대된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가 설정한 방향이 틀린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인텔이 내놓는 해당 제품들은 CPU 분야에서 얻은 명성에 먹칠을 할 만큼 형편없었다는 게 문제다.
무선통신용 모뎀은 퀄컴의 제품에 비해 성능이 크게 부족했고, AP 역시 ARM의 제품과 가격 대 성능, 전력 소모량 대비 성능에서 모두 밀렸다.
이번엔 다를까 싶지만, 취임식에서 보이는 브라이언 크르자니크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니 같은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할 것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AMD는 발등에 불이 떨었네.”
AMD의 흐름도 예전과 같았다.
불도저라는 실패작이 똑같이 나왔다.
신제품의 역량이 경쟁사에 비해 무엇 하나 나은 게 없는 AMD는 그야말로 수직 낙하 중이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시장 점유율인데, 염가로 내놓는 보급형 라인업에서나 겨우 버티지 수익이 제대로 나오는 상급 라인업은 인텔에 밀려 초토화 중이다.
문제는 이 다음의 흐름이다.
그나마 회귀 전에는 AMD가 인적 혁신 덕에 기사회생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던 AMD를 살려낸 명의가 바로 리사 수 박사와 존 켈러였다.
지금 이 둘은 ID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ID 일렉트로닉스의 소속으로 설계를 끝낸 2009년형 AP M9의 양산을 지켜보며 휴식 중이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핵심인 M시리즈 AP는 매년 세대를 교체 중이었고, 단 한 번의 연기도 없이 지켜지고 있었다.
M시리즈 AP를 최초 설계할 때부터 확장성에 대해 큰 틀을 잡아 놓았기에, 갑자기 아키텍처를 송두리째 바꿀 일도 없었고, 미세화 공정의 개발도 착실히 이뤄진 덕에 목표했던 성능 향상을 이뤄냈다.
2009년에 발표될 신형 안드로이드폰에 탑재될 M9만 해도 14나노공정이 적용되어 만들어졌다. 2년 만에 50%에 달하는 집적도 향상을 선보였다.
유재원에겐 아직도 느린 속도였지만, 경쟁 업체들은 14나노공정의 M9가 양산된다는 소문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반도체 기술을 선도하는 ID 일렉트로닉스였고, 거기서도 가장 노른자라 할 수 있는 반도체 사업부를 이끌고 있는 리사 수 박사다.
AMD에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 이직을 결심한다고 하면 유재원도 막을 수가 없겠지만,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AMD가 살아날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바로 게임기였다. 엑스박스2가 나온 지 이제 4년이 지났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차세대 게임기가 나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니의 경우 차세대 게임기 경쟁을 좀 더 미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재원은 올해 IDDC에서 엑스박스3를 예고하고, 내년 초에 발매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다. 게임의 발달 속도는 비디오 게임기의 스펙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게임 개발사들을 자극하는 가장 큰 논리는 수익성이었고, 엑스박스2 게임기 시장은 게임 업계의 가장 큰 파이였다. 엑스박스2는 2004년 발매 후, 누적으로 8천만 대가 팔린 게임기였다. 엑스박스2에서 너도나도 사는 대작 게임이라고 하는 게임들의 판매량은 최소 1천만에서 시작했다.
차세대 게임기가 출시되면, 이곳을 선점하기 위한 게임사들의 투자가 활발하게 이어질 것이고, 게임의 수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엑스박스2에 탑재된 CPU가 AMD의 커스텀 칩이었다.
차세대 기기인 엑스박스3의 하위 호환성을 위해서는 AMD의 칩을 다시 쓰는 게 좋았다. 게다가 PC용이나 기업용으로 팔리지 않는 불도저 칩이라도 게임기에서는 제법 고성능 CPU로 쳐줄 수 있다. 모자란 성능도 커스텀 주문을 통해 개조하면 쓸 만할 정도는 된다.
엑스박스3가 전작과 마찬가지로 8천만 대 정도 팔린다면, AMD가 불도저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CPU 아키텍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AMD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 하고 유재원은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퇴근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니, 바싹 집중해서 그룹 전산망에 남은 미확인 서류들은 싹 치워 버릴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제 곧 저녁이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부는 오전 9시가 지나면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 말인즉 온갖 서류들이 쏟아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역시나 유재원이 보는 것만큼 새로운 서류가 쌓이기 시작했다.
모든 서류를 다 확인할 필요는 없다. 중요도는 저마다 다 달랐고, 인공지능 골드가 서류에 담긴 핵심을 따로 요약해 주고 있기 대문이다.
“응?”
인공지능 골드의 보조로 빠르게 서류들을 해치우던 유재원의 눈에 걸리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보고되는 독감 환자 숫자가 작년 동월보다 30%는 더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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