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회
블루오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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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철이가 장성택이를 구금시켰어!
글자만 봐도 김정남이 잔뜩 흥분해 있는 게 보였다.
평소 김정남은 백강철 차수에 대해서는 부담스럽게 느끼면서, 유재원에게 보내는 개인 ID톡에도 차수라는 북한군 특유의 직책을 불러줬으니 말이다.
“장성택이 잡혔으면 뭐, 끝났지. 백강철 차수가 허수아비 차수는 아니었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차수라는 직위는 원수와 대장 사이에 있는 직책으로, 서방에서는 부원수 정도로 치환될 수 있었다.
북한군은 장성급 인사들의 정년이라는 게 없다. 숙청당하지 않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유임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전역을 하지 않으니 몇십 년 묵은 짬밥과 김씨 일가에 대한 충성을 무시할 수도 없게 된다.
여기에 대해 보상을 해 줘야 하는데, 원수 직위를 남발할 수도 없었다.
북한에서는 대좌(대령)가 별을 다는 것보다 대장이 원수가 되는 게 훨씬 까다로울 정도다. 그럼에도 원수라는 직책을 얻은 장성들이 10명은 넘었다. 다만 이렇게 붙여진 원수들에게는 부대를 움직일 실권은 주지 않으니 명예직이다.
차수도 반쯤은 명예직이었다.
그렇지만 백강철은 아니었다.
그가 차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김정일의 총애도 있었지만, 비상한 능력도 있었다. 능력이 있다는 증거는 바로 백강철의 56세라는 나이다.
50대 차수는 북한 역사에도 몇 없는 존재였다. 보통은 60대 말, 보통은 70대 초에나 차수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백강철 차수와 장성택의 관계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장성택이 백강철을 향해 미래 권력인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은근히 강요했기 때문이라는 김정남의 설명이었다.
권력에 딱히 관심이 없던 김정남이 그런 소리를 들었을 만큼, 노골적이었던 모양이다. 백강철 차수는 충성의 대상은 오직 김정일뿐이라면서, 장성택의 압박을 피했단다.
김정남 입장에서는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유재원이 보기엔 웃기는 일이었다. 북한군의 지휘권을 가진 총사령관이 북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김정일이라는 개인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성택과 백강철이었는데, 김정일 사망 후 3일간 파탄이 나 버렸다.
김정일이 죽으면서 이제는 김정은이고, 그러면 제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장성택이었다. 그러면서 장성택도 라선으로 급히 출동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위독을 챙기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급하게 이동 중이었던 김정은은, 장성택이 차를 타고 라선에 도착할 때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 묶어 두라고 했던 김정남이 라선에 도착할 때까지도 김정은은 응답이 없었다. 김정남을 데려온 자신의 부하들을 다그치자, 본인이 데려오라고 했으면서 왜 그러나 싶은 얼굴이라서 더욱 화가 뻗쳤다.
라선특별시 병원은 백강철 차수가 부른 호위 병력들로 가득했기에, 여기서는 김정남을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더욱이 통신도 되지 않는 김정은을 찾는 게 더 급선무였다.
그런 장성택을 충격으로 빠뜨린 건, 김정은이 타고 오던 헬리콥터의 추락 잔해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김정은이 3대 세습을 하게 되면, 당분간 대리청정으로 북한의 권력을 독점할 계획이었던 장성택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장성택은 무슨 이유로 구금된 거죠?”
문뜩 의문이 든 유재원은 김정남에게 ID톡을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아, 조금 전에 아버지의 유언이 공개되었거든.
김정일은 2000년대 중반부터 본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유언장을 만들어 금고에 넣어두고, 유고 상황 시 꺼내 보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김정일의 사망이 공식 확인되자 금고에 잠겨 있던 유언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분량은 상당하단다. 무슨 하고픈 말이 그렇게나 많이 남았는지는 유재원도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요점만 간단히 하면 이런 내용이다.
김정일은 3개의 직책을 독점하면서 북한에서 절대 권력을 영위하고 있었다.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사령관.
김정일의 통치 이념이 선군 정치였다. 군이 먼저인 정치라는 뜻으로, 군에 모든 자원을 집중한다는 의미였다. 그런 군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자리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유언장에서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조선인민군사령관으로 김정은을 지목했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에는 장성택을 지목했다.
김정은이 제 자리에 안착할 수 있을지 불안해서, 고모부인 장성택을 안전장치로 삼았던 모양이다. 다만 김씨 일가가 아닌 외부인에게 총비서 자리를 주는 건 꺼림칙했던 모양인지, 장성택에게 주어진 노동당 자리는 중앙위원회 서기라는 애매한 자리였다.
김정남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원래 김정남이 하던 조선 컴퓨터센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상위직이었지만, 동생 김정은이 받은 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자리였다.
김정일은 아주 확실하게 3대 세습으로 김정은을 지목했다는 것이 유언의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김정은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장성택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이 군권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어야, 장성택이라는 애매한 사람도 노동당 총비서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김정은이 없는 지금, 장성택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위험이란?
백강철의 분노였다.
김정일을 위해 평생을 봉사한 백강철이었지만, 김정일의 유언에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아부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장성택을 노동당 중앙위원에 앉혔다는 것 자체가 백강철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었다.
더욱이 백강철은 김정일의 사망에 장성택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정일에게 기름진 산해진미와 독주 그리고 변태적인 유흥거리를 끊임없이 가져다 바친 게 장성택이었으니 말이다.
백강철에게는 도저히 곱게 볼 수 없는 존재가 장성택이었다. 그런 장성택을 족칠 빌미가 김정남에게서 나왔다.
-장성택, 국가존엄의 가족 호출 명령 무시!
-김정남 보호를 빌미로 자택 구금시도!
위독한 아버지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김정남을 구금했던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백강철은 바로 장성택을 체포시켰다.
평양이라면 어려웠을 일이었다.
장성택은 엄연히 보위부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보위부의 힘은 국가 위급 상황 시 가장 크게 확대되니 말이다.
그렇지만 일이 터진 건 라선특별시에서였고, 김정일이 수술에 들어가자마자 백강철은 본인의 수족들을 불러다 경비를 강화했다.
그렇기에 김정남을 위협했다는 빌미로 장성택을 구금시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백강철과 담판 보셔야죠. 그다음에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경위에 의문이 있는 것 같으니, 합동수사본부를 만들고 거기에 백강철을 앉히면 됩니다.”
비슷한 일이 한국에도 있었다.
바로 10‧26 사건이었다.
한국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이 공백이 된 1인자 자리를 낼름 먹었다. 백강철이 북한의 전두환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어렵다고 봤다.
회귀 전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나간 북한이었다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의 경제 상황은 훨씬 나았다. 중국처럼 개혁 개방 후 급속도로 성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지하자원 판매, 인적자원 수출 등으로 먹고살 만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유전이 터지면서 해외에서 자본이 뭉텅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김씨 일가의 오랜 숙제를 김정일이 해결한 상황이다. 북한 사람들의 충성도가 남달랐다.
그러니 이제 남은 백두혈통인 김정남이 필요한 상황.
결과적으로 군사 분야 실권은 백강철이 가져가고, 김정남이 얼굴마담으로 국방위원장과 노동당 총비서를 나눠 갖게 되면 딱 맞다.
눈엣가시인 장성택도 김정남의 구금과 엮으면 골로 보낼 수 있다.
아니, 좀 더 스케일을 키우자면 본인이 모시는 김정은의 빠른 승계를 위해서 일부러 김정일을 골로 보내고, 거기에 김정남까지도 보내버리려고 했다는 시나리오도 쓸 수 있다.
물론, 사람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어서 만에 하나 백강철이 김정남도 보내버리고, 새로운 백씨 왕조를 세우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북한에 강력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도 있었다. 세계 초강대국이 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유재원은 미국과 러시아를 움직일 영향력이 있다.
중국은 누가 봐도 김정은과 장성택 편이었지만, 김정은이 없는 지금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며칠 후.
-북한, 김정일 위원장 서거에 의문 포착.
-서거 원인 조사 위한 합동수사본부 구성키로!
-합동수사본부장에 백강철 차수 임명.
-긴급! 합동수사본부 장성택 체포!
-북한 권력 승계,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김정일 사망 이후의 전개는 유재원의 예상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정남은 본인의 마지막 동아줄을 유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유재원이 전해준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게 현실의 차가운 진리였지만, 김정남은 기꺼이 북한군의 지휘권을 백강철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백강철 역시 김정남의 승계를 인정했다. 김정일의 유언으로 김정은에게 주어진 자리였던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가 김정남에게 돌아가는 걸 인정했다.
대신 김정남과 백강철의 쌍두 정치로 인해 의미가 상실된 국방위원장이란 자리는 공석으로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방위원장이라는 건 김정일이 본인의 권력 강화를 위해 스스로 만든 자리였기 때문이다. 김정남이나 백강철 둘 중에 누가 들어가도 부담스러운 만큼, 영구결번처럼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하며 공석으로 두는 것이 최고였다.
반면 북한이 후계구도를 빠르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이나 세계의 언론들은 북한에서 뭐가 터질 때마다 호들갑이었다.
추측성 보도는 기본이고, 작은 사실들을 크게 부풀리면서 북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그렸다.
다행히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언론이 쏟아내는 대로 휘둘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크게 줄었지만, 그래도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았다.
다만 북한이 과거로 회귀해 남북 대치 상태가 강해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전쟁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북한의 권력 승계 작업이 깨지면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고 예측은 해도, 남침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회귀 전과 지금의 가장 큰 차이였다.
며칠이 더 지났다.
-긴급! 북한 합동수사본부 백강철 차수, 수사 결과 발표!
아침부터 북한의 언론이 긴급 합동수사본부의 긴급 발표가 임박했다고 나리였다. 이후 아침 10시가 되자 다부진 눈빛의 백강철이 북한 인민군 정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국가존엄의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최근 몇 년간 장성택이 국가존엄에 접근하여 의도적으로 기름진 음식과 유흥 제공 확인.
-며칠 전 긴급 사태 발생 시 보위부 사령관 지위 이용해, 백두혈통을 억압한 사실 확인.
-국가존엄께서 국가에 헌신할 기회 주었음에도 사익을 위해 사용.
-장성택이 치부한 재산은 미화 200억 달러 이상.
-장성택의 모든 지위 박탈과 재산 압류. 국가 역사에서 삭제.
역시나 유재원이 예상했던 그대로 김정일 사망의 죗값은 모조리 장성택이 뒤집어썼다. 텔레비전에서는 얼굴이 팅팅 부은 장성택이 포승줄을 차고 재판장에 등장하는 모습도 비췄다. 티 안 나게 잘 때리는 게 특기인 곳이 북한인데, 저렇게 팅팅 부을 정도면 얼마나 후려 팬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피고인 자리에 선 장성택은 모든 걸 체념한 상태로 백강철 차수가 발표한 사실들을 모두 시인했다.
그리고서 이날 오후 새로운 북한의 권력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김정남!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백강철!
유재원만이 알고 있던 김정남과 백강철의 쌍두 정치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북한의 분열을 예고했던 언론들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김정남과 백강철이 김정일의 장례위원이 되어서 국가장을 준비하는 것으로 일주일 넘게 이어졌던 북한의 권력 공백은 해소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북한의 시작이다.
“휴, 북한 일은 이걸로 됐고.”
텔레비전의 긴급 속보를 보던 유재원은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 집중했다. 북한은 분명 한 고비 넘겼다. 이제는 본인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
2008년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유재원에게 남은 큰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P마켓의 전 지구적인 이벤트 블랙프라이데이, 그리고 아들 혜성이의 첫 번째 생일 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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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어제 연재된 글에서 재원이의 과격한 선택이 독자 님 사이에 논란이 되었네요.
재원이의 선택이 무리수가 된 것에 대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최대한 원만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그쪽으로는 글이 쉽게 나오지 않았네요. 지금 독자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글을 쓸 때는 이상하게도 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음, 제가 쓴 글들을 꾸준히 봐주신 독자님이라면 진작 알고 계셨겠지만, 김씨 일가에 대한 취급은 대대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르게 그려보려고 했고 줄거리도 그렇게 잡았는데,,, 쓰고나서 보니 현실에서의 실망감이 글까지 전해진 것 같습니다.
실망하신 독자님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