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회
권력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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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이동
-유재원 회장, 주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메모리 분야 지배력 놓치지 않겠다 선언!
-ID 일렉트로닉스 DDR3램 대규모 양산, 이미 진행 중.
주주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대외비가 아니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주주 밀집도는 대한민국이 제일 높았다. 상장과 함께 국민 공모를 받으면서 신청만 하면 최소 10주씩은 매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외국서 한국까지 들어온 투자자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주주들 중에 언론 종사자도 당연히 있었고, 이들은 편지를 받자마자 대외비 표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기사화를 시켰다. 보도 경쟁에서 승리만 하면 소속 언론사에 수천만 원의 정산 수익이 생겼고, 여기서 일부는 기자의 몫으로 떨어지니 말이다.
비단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의 인터넷 미디어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되었기에, 유재원의 편지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 순식간에 퍼졌다.
결과적으로 메모리 업체들 모두가 DDR3 체제를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따라 주식시장도 들썩였다.
상황 판단이 빠른 주주들은 이길 만한 업체에 배팅적으로 매수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처분하는 투자자들도 많았다. 메모리 업계가 점유율 싸움을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가격이었으니, 수익성 악화를 예상하고 수익 실현에 나선 것이다.
당사자인 유재원은 편지가 퍼지는 동안 대전의 반도체 공장을 찾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일정으로 물량전을 시작하기 전 최종점검을 위한 스케줄이었다.
“TPU는 마음에 드셨나요?”
리사 수 박사는 대전을 찾은 유재원을 보고 대뜸 TPU부터 물었다.
“최고였어요!”
이에 유재원은 양손의 엄지를 치켜 세우는 것으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i웍스 상태로만 구동되었을 때는 아마 3급 정도의 수준이었던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모듈이 서버랙 1개 수준으로 시스템을 확장하자 이창호 9단과 정식 대국에서 130수까지 접전을 펼쳤다.
120수가 넘어가면서 바둑 모듈의 기력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지만, 그 전까지는 아주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시스템의 규모가 12배로 확장된 덕이기도 했지만, TPU가 없었다면 절대 이루지 못할 일이었다.
TPU라는 건 바로 ID 그룹이 자랑하는 M시리즈 AP에 기원을 두고 있다.
M시리즈 AP들이 애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바로 텐서코어의 유무였다. 이런 M시리즈에서 텐서코어 부분만 따로 빼내서 크게 뻥튀기시킨 것이 TPU였다.
30나노+공정으로 제작되는 TPU의 면적만 600㎟로 엄지손톱 크기의 2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이렇게 광활한 면적에 200억 개의 트랜지스터들이 집적되어 텐서코어 유닛을 이루고 있었다. 최신 M시리즈 AP인 M8에는 48개 유닛의 텐서코어가 있다면 TPU에는 1,024개의 유닛이 들어가 있었다.
텐서코어에 보다 집중을 했다면 10% 정도를 더 늘릴 수 있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1,024개로 만족했다.
TPU 전용 메모리를 제어하는 메모리 컨트롤 유닛과 CPU와 데이터 통신을 담당하는 유닛, 데이터 입출력과 스케줄러, 병목 현상을 줄이기 위한 캐시 메모리 등등이 추가되어야 했던 탓이다.
이러한 TPU의 설계에는 역시나 리사 수 박사가 이끄는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팀의 공로가 아주 지대했다.
TPU의 성능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TPU 하나로 128테라플롭스라는 무시무시한 성능이 뿜어진다. 인텔이 자랑하는 네할렘 CPU에서도 최상급인 제온 E8칩이 500기가플롭스의 성능이니, TPU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바로 비교된다.
물론 TPU는 용도가 한정된 유닛이라서 일반 CPU와 바로 비교하기는 무리다. 단적으로 TPU의 연산 유닛은 8비트라서 CPU처럼 정밀한 수치를 다루는 건 비효율적이었으니 말이다. 오로지 인공지능 분야에서만 큰 힘을 낼 수 있다.
“짐 켈러 팀장이 큰일을 했습니다.”
“아, 켈러 팀장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그분 능력이 그렇게 대단했어요?”
“예! 8비트 정수 연산 유닛의 최적화와 쓰레드 스케줄러 설계, 캐시 메모리 적중률 향상 등등. 켈러 팀장 덕에 TPU의 성능이 30%는 상승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리사 수의 말에 유재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사실 유재원은 짐 켈러라는 인물을 리사 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업적까지 기억하고 있는 인재였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도 CPU 설계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었다.
다 죽어가던 AMD를 라이젠 아키텍처로 살려냈고, AMD가 살아나자 죽을 쑤던 인텔로 넘어가서 사파이어 래피즈 아키텍처를 완성해 화려한 부활의 신호탄을 터트렸다.
이처럼 능력이 차고 넘쳐서 이직이 잦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짐 켈러의 첫 직장은 지금은 사라진 DEC였다. 그곳의 알파 CPU 설계팀에 있으면서 CPU 설계에 눈을 뜬 그는 AMD에 스카우트되었다. 그곳에서 짐 켈러가 설계한 건 너무도 유명한 애슬론 CPU였다.
AMD 역사상 최초로 인텔을 능가한 CPU였던 에슬론은 지금의 AMD를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이었다. 애슬론을 완성한 다음의 행선지는 팔로 알토 반도체라는 저전력 프로세서 업체였는데, 이 회사가 애플에 인수되면서 애플이 자랑하는 ARM의 a시리즈 AP 설계에 참여했다.
여기서도 짐 켈러는 또 대박을 쳤다.
그 유명한 a4가 짐 켈러의 손에서 완성된 모델이었다. 당시 a4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M4AI였기에, 빛이 좀 바랜 감은 있었지만 애플의 아이폰을 구동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a4를 완성한 짐 켈러는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리사 수에 의해 ID 일렉트로닉스로 왔고, M시리즈의 최적화는 물론, TPU의 완성에 집중했다.
역시 짐 켈러다 싶었다.
텐서코어의 기초는 유재원 본인이 잡긴 했다. 그런데 그건 M시리즈 AP 안에 들어갈 유닛이었고, 짐 켈러에게는 이러한 유닛을 1,024개나 집적하는 초대형 빅칩을 확대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상주 인구 100명의 조그만 마을을 설계하는 것과 100만이 사는 도시를 설계하는 건 완전히 다른 스케일의 작업이었는데, 짐 켈러는 그 일을 완벽히 해낸 것이다.
“와우. 능력자로군요. 직접 칭찬해드리고 싶은데, 불러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잠시 후, 화제의 짐 켈러가 유재원 앞에 등장했고, 그에 맞춰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어려운 얼굴로 이 자리에 불려 나왔던 짐 켈러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였지만, 높으신 사람들 앞에 선다거나, 대중 앞에 서는 건 어려워하는 성격인 모양이다.
“켈러 팀장님,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예? 아, 예! 맡겨 주십시오.”
유재원은 짐 켈러와 악수를 하면서 기대감을 드러냈고, 짐 켈러도 호응했다.
앞으로도 기대한다는 말에 담긴 속뜻은 어디 딴 데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마치 방랑벽이 있는 것처럼 몇 년 주기로 회사를 옮기던 사람이 짐 켈러였으니 말이다.
짐 켈러도 그러한 속뜻을 읽었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원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TPU와 인공지능에 대한 호기심은 아직 처음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짐 켈러를 비롯해 TPU 설계와 양산을 책임진 이들에게 칭찬 세례와 보너스도 마음껏 내준 유재원에게 리사 수 박사는 본론을 시작했다.
“DDR3의 양산 준비도 순조롭습니다. 1차적으로 100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라인에 투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100만 장의 웨이퍼.
소규모 업체라면 기겁할 물량이지만, 리사 수 박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야말로 여장부의 아우라가 너무도 찬란히 느껴질 정도다.
“이것이 DDR3-1333 8기가비트 칩으로 생산을 마친 웨이퍼입니다. 우리의 주포가 될 아이템이죠.”
리사 수 박사는 특수 케이스에 담긴 웨이퍼 한 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각도에 따라 무지개로 빛나는 웨이퍼에는 수백 개의 칩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참고로 DDR3라는 단어 뒤에 붙은 1333이라는 숫자는 작동 속도였다. 네할렘과 불도저 CPU의 메모리 컨트롤러 속도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1066이지만, ID 일렉트로닉스는 처음부터 1333을 타깃으로 설계되었다.
이른바 메모리 오버클럭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한 체급 높은 작동 속도를 보증함으로써 제조사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네할렘이나 불도저 아키텍처의 특징이 메모리 처리 능력에 따라 성능 향상이 눈에 띌 만큼 향상한다는 점이었다.
컴퓨터의 데이터 처리 능력이 증대되면서 병목 현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병목 현상이 제일 크게 일어나는 지점이 하드디스크였다. SSD가 빠르게 보급되는 중이었지만, 아직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다.
빨라 봐야 초당 120메가바이트 정도의 속도가 나오는 하드디스크는 컴퓨터를 느리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다음이 메모리 속도였다. 하드디스크보다는 월등히 빠르긴 해도, CPU의 처리 속도에 비하면 느리디느린 속도였다.
컴퓨터 업계가 DDR3의 보급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의 DDR2보다 50%는 빨라진 속도를 자랑했기에, 확실한 업그레이드 체감이 있었다. 게다가 DDR3를 또 한 번 오버클럭하면 추가 비용 없이도 성능 향상을 꾀할 수 있다.
“슈퍼그린 메모리 리테일 패키징입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패키징도 훌륭했다.
PVC 플라스틱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리테일 시장에서도 타 회사의 제품과 확실하게 차별할 수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슈퍼레드와 슈퍼블랙입니다.”
이탈리안 로즈처럼 붉은색 방열판이 돋보이는 슈퍼레드와, 어둠을 잘라내 만든 검은색의 슈퍼블랙은 슈퍼그린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포장을 하고 있었다.
슈퍼그린도 1333MHz의 속도지만, 그보다 더 높은 1600MHz의 속도를 자랑하는 것이 슈퍼레드였다. 그리고 슈퍼레드 중에서도 한발 더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담고 있는 게 슈퍼블랙 제품이다.
슈퍼그린이 대형 컴퓨터 제조 업체와 일반 유저를 상대로 물량 공세를 펼칠 제품이라면, 레드와 블랙은 스스로를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었다.
컴퓨터 부품의 성능을 극한까지 뽑아내는 오버클러커나 일반 유저와는 차원이 다른 부품으로 시스템을 꾸미는 익스트림 레벨 유저들이었다.
이런 사용자들은 퍼포먼스에 목숨을 걸었다. 성능 수치에서 일반인이라면 딱히 신경 쓰지도 않을 한 자리 수 단위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그러면서 가격 따위는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오버클럭 잠재력이 높은 슈퍼레드와 슈퍼블랙은 이들에게 알맞은 제품이었다.
슈퍼레드는 슈퍼그린의 2배, 슈퍼블랙은 슈퍼그린의 3배 가격으로 책정해 둔 상태였다. 덕분에 ID 일렉트로닉스 영업팀에서는 비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성능 향상은 겨우 20~30% 정도인 제품에 2배, 3배의 가격을 쓰겠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자신했다.
익스트림 사용자의 사전에는 가성비라는 게 없었다. 치킨런 상황에서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가 최소한 적자가 나지 않도록 해 줄 효자 상품이 레드와 블랙이다.
무엇보다 다른 업체들은 따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제품이었다.
표준 DDR3램보다 40%나 높은 작동 속도를 보장할 수 있는 바탕에는 30나노+공정이 있었다. TSMC같이 자사 스펙을 과장하기 좋은 반도체 업체였다면 27나노 공정이라고 포장했을 만큼, 10% 이상의 최적화를 이뤄낸 신공정이다.
단순 공정 향상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진일보를 이뤄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14나노 공정도 순조롭습니다. 연구용 라인에서 실험 생산 중인데, 수율은 기대 이상입니다.”
30나노 공정을 ID 일렉트로닉스가 완성한 건 2006년이었고, 본격적인 양산은 2007년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후속 공정으로 ID 일렉트로닉스가 선택한 것은 14나노 공정이었다. 반도체 업계는 단번에 15나노 이하로 내려가는 건 어렵고 22나노 혹은 24나노미터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 갈 거라고 예상했다.
유재원에겐 필요 없는 일이었다. 15나노도 아니고 14나노미터 공정에 돌입했고, 이미 성과도 내고 있었다.
“좋군요.”
“회장님께서 기초를 잘 잡아 주신 덕이죠.”
리사 수 박사의 말처럼 유재원의 명확한 비전과 기술 제공 덕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14나노 공정은 물론이고, 차차기 공정인 7나노 공정까지도 확실한 방법론을 제시한 상태였다. 유재원은 이미 실리콘 기반 반도체의 끝을 회귀 전에 보았고, 이와 관련된 극히 사소한 정보까지도 기억의 궁전에 넣어 놓았다.
7나노가 아니라, 궁극의 실리콘 기반 반도체라 할 수 있는 3나노 반도체 공정도 당장 뽑아서 줄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을 받아서 구현할 장비가 없다. 7나노 이하의 공정에서는 강력한 EUV(극자외선)을 포토리소그래피 공정에 사용해야 하는데, ASML에서는 아직 이를 구현하지 못한 탓이다.
광학 노광 장비 업체로 ASML 말고도 캐논과 니콘이 있고, 이곳 역시 EUV 장비를 개발 중이라고는 하는데 유재원의 성에 차진 않았다. 게다가 유재원의 머릿속 기억의 궁전에 들어 있는 레퍼런스는 ASML 장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아주 일찌감치 ASML의 지분에도 투자를 해 놓은 상태였다. ID 인베스트먼트는 물론이고 다양한 창구를 통해 수집된 ASML의 지분은 25%에 달했다
“치킨런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무조건 많이 만들어 주세요. 아 참, 그렇다고 DDR2 물량을 줄일 필요는 없어요. DDR2도 똑같습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로서 전면적인 세대 교체가 일어날 시기지만, 기존의 제품의 수요도 꾸준하다. 어떤 제품이건 무조건, 많이.
그것이 유재원의 반도체 치킨런의 전략이었다.
ID 일렉트로닉스 대전 반도체 공장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친 유재원은 출국길에 올랐다.
보통은 샌프란시스코로 직항 루트였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경유지로서 일본을 한 번 들르는 루트였다.
동일본 대지진과 직결된 중대한 협상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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