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회
미래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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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 기사님 섭외도 잘 되고 있나요?”
“네, 이미 섭외가 끝났습니다.”
시범 경기라는 아이디어를 유재원이 떠올린 건 불과 3일 전쯤이었다. 아이디어는 곧장 유재원의 ID톡을 타고 이찬수 사장에게 전해졌다.
즉, 시범 경기를 뛸 바둑 기사를 섭외하는 건 이찬수 사장에게 맡겨진 일이었다는 이야기다. 바둑 기사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바둑 연구생이나 아마추어를 데리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늘 오후 3시쯤에 보스턴 다이나믹스에서 로봇 팔이 하나 날아올 테니까, 그걸 받으시면 세팅을 시작하세요.”
“예, 회장님.”
“아 참! 갑작스런 제안에 기꺼이 응해 주신 고마운 기사님은 누구인가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재원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정작 중요한 걸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창호 9단입니다.”
“이창호? 그분이 시범 경기를 수락했다고요? 시범 경기 조건도 다 전달한 거 맞죠?”
유재원이 이렇게 되물은 건 시범 경기의 세팅 조건이 내년에 있을 정식 도전과는 약간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바둑판부터가 정규 바둑판이 아니다.
11*11로 간소화된 바둑판을 쓴다는 큰 차이가 있다.
골드가 바둑의 룰을 깨우치긴 했지만, 심화 학습 단계는 아직 미진한 상태다. 그렇기에 전장의 크기를 반 정도로 줄여서 인공지능의 연산 부담을 줄이면 프로 기사를 상대로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아주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바둑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데 보탬이 된다면 시범 경기라도 기꺼이 참가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고맙네요. 거마비랑 대전료를 넉넉히 챙겨드려야겠어요.”
이창호 9단의 명성이라면 시범 경기로 띄우기엔 충분하다 못해 과분할 지경이다.
비록 지금은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에 밀린 상태였지만, 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창호 9단의 시대였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인정할 정도였으니, 인공지능 골드와 이창호 9단의 시범 경기라면 전 세계는 몰라도, 아시아권에서는 충분히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더욱이 이창호 9단의 기풍은 그야말로 정석이었다. 두터움, 침착함, 형세 판단, 끝내기로 요약될 만큼 어떠한 흔들기도 통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돌부처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시범 경기에서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네요.”
망신도 망신이지만, 선입견이란 무섭다.
어설픈 모습을 보여서 인공지능 바둑도 별거 아니네 하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이 최악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박힌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시범 대회라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유재원도 마음을 바꾸었다. 원래는 대전에 내려가 TPU의 준비 상황을 직접 보고 나서, 시범 경기 점검은 조금 느긋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 유재원의 스케줄은 이창호라는 이름 덕에 바로 수정되었다.
“바둑 모듈 본체는 어디 있죠?”
“네! 특수 연구실에 있습니다.”
“갑시다!”
이찬수 사장도 유재원의 한 마디에 로데오 빌딩 깊숙한 곳에 차려진 연구실로 유재원을 안내했다.
며칠 후.
8월 24일, 일요일.
성대한 지구촌의 축제였던 베이징 올림픽의 성화가 꺼지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은 초저녁. 많은 사람들이 흑석동의 디지털 미디어 센터로 속속 모여들었다.
-바둑의 미래.
-이창호 9단 VS 인공지능 골드 레벨1 시범 경기.
디지털 미디어 센터 입구 상단에 걸린 거대한 인피니티 디스플레이에 잠시 후 치러질 이벤트전의 제목이 띄워져 있었다.
깜짝 발표된 시범 경기였지만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한국 선수단의 선전으로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가 너무도 뜨거웠지만, 사람들은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도전을 잊지 않고 있던 모양이다.
중간 점검 형식이고, 딱히 큰 판돈이 걸린 것도 아닌 시범 경기였음에도 티켓은 빠르게 동이 났다.
심지어 바둑 전문 케이블 방송으로 실시간 방송도 이뤄졌다. 공중파인 KBS에서도 새벽 1시부터 녹화 중계를 하기로 했다. 매일 일요일 새벽에 바둑왕전을 녹화 방송했던 KBS였는데, 정규 방송을 조금 미루고 이벤트전을 방송하는 건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비록 녹화 방송이긴 해도 공중파는 공중파였으니 말이다.
여기에 ID 테크놀로지는 유튜브 라이브도 준비했다. 관심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시범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유재원은 대국이 있을 메인 스테이지 바로 뒤에 마련된 관제실에 있었다.
여기에는 스탠드 얼론 형태로 만들어진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시스템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표준 서버랙 케이스로, 케이스 안에는 어른 한 뼘 높이의 랙마운트 서버 12대가 결합된 시스템이다.
랙마운트 서버 1개당 인텔의 최신 CPU인 네할렘 제온칩이 4개, 따끈따끈한 TPU가 8개, 128기가바이트 DDR3 메모리가 장착되어 있다. 여기에 운영체제와 바둑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1테라바이트의 SSD도 장착되었다.
가격만 따지면 1개당 100만 달러는 거뜬히 넘는 시스템인데, 이게 12대가 장착되어 있으니, 하드웨어 가격만 1천2백만 달러짜리다. 물론 하드웨어보다 더 비싼 건 SSD에 저장된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학습 데이터일 것이다.
하드웨어는 TPU를 빼면 충분히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인공지능 골드의 학습 데이터는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자료이니 말이다.
이러한 메인 시스템 주변으로 각자의 임무와 역할에 맞게 20여 명의 사람들이 노트북을 조작하고 있다.
그 중앙에는 유재원이 있었다.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언제나 깔끔하기 그지없는 양복 차림이었던 유재원이었는데, 지금은 청바지에 카라 티 하나를 걸친 너무도 편안한 차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부터 계속 시스템 앞에 앉아서 고도화 작업을 해야 했던 탓에 정장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며칠을 연속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음에도 눈빛은 초롱초롱 살아 있었다. 누구는 컴퓨터 앞에 진득하니 앉아 있는 게 고역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재원은 마음만 먹으면 한 달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네티즌 반응은 어때요?”
“벌써 접속자가 1만 명이 넘었습니다.”
유재원의 유튜브 라이브를 책임진 팀장의 보고였다.
이벤트전 시작까지는 1시간 정도가 남았지만, 벌써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벌써 1만 명이라니 말이다.
시범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1시간은 남았다고 해도, 유튜브 라이브로는 이미 영상이 송출되고 있다. 접속한 구독자들이 마냥 검은 화면만 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미리 접속한 이들을 위해 방송되고 있는 건 인공지능 골드의 다양한 능력들을 재미있게 풀어가는 콘텐츠였다.
참고로 유튜브 라이브는 유튜버의 인기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척도였다. 구독자 숫자나, 조회 수도 좋은 참고 자료였지만 라이브는 해당 채널의 애청자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유튜브 라이브에서 300명만 꾸준히 유지해도 전체 유튜버 중에 상위 10%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재원이 유튜브를 인수하고서 공격적인 영업을 개시했고 그 결과로 유튜브의 가입자 단위는 억 단위를 한참 전에 돌파했다.
더욱이 쓰촨성 대지진을 계기로 유튜브를 하는 게 큰돈이 된다는 인식도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여기에 프로듀스 마이 슈퍼스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너도나도 채널을 만들어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유튜브 사용자도 늘었지만,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이들도 늘어났다. 아예 전업 유튜버를 꿈꾸는 사람들도 크게 생겨났다.
이른바 극한의 레드 오션이 시작된 것이다.
냉혹한 현실에서 초짜 유튜버가 라이브를 켜면 들어오는 시청자의 숫자는 한두 명 정도였다. 시청자 한 명 없는 유튜브 라이브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천 명 단위의 라이브 시청자를 확보한 유튜버는 상위 1%에 드는 수준이었다. 그러면 만 단위는? 지금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달성하기 힘든 수치였다.
“회장님, 1시간 전입니다.”
김대석 비서실장의 알림에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모습으로 스테이지에 나갈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스타일링을 받기 위해서 자리를 옮겼다.
1시간 후.
오후 4시가 되자 회장님다운 모습으로 재정비한 유재원이 메인 스테이지에 당당히 등장했다.
무대는 이미 세팅이 다 끝난 상태였다. 무대 중앙에는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에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다만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이창호 9단이 앉을 의자는 장시간 바둑을 두어도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 푹신한 의자였지만, 맞은편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놓인 바둑 테이블 뒤로 초읽기를 봐주는 보조 진행자들 2명도 자리해 있었다. 바둑협회에서 보내주신 보조 진행자분들이다.
유재원은 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인공지능 골드와 이창호 9단의 시범 경기에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셔서 무척이나 기쁘네요. 그렇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이번 대국은 내년 있을 본경기에 앞선 시범 대국이라는 것입니다.”
21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인공지능 발전사 전체를 꿰고 있는 유재원은 내년에 있을 대국이 얼마나 큰 의미를 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는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일이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인공지능 세계의 중대한 도약에 공감을 해 주었으면 했다. 덤으로 인공지능의 실력을 검증할 바둑계도 한층 더 진지한 자세로 나오길 바랐다.
다만 유재원은 이러한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언론과 관계자들에게 돌린 보도자료에는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학습이 제대로 되었는가를 중간 점검하기 위한 이벤트라고 적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먼저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모듈을 소개하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끝낸 유재원은 바로 선수 소개로 들어갔다.
기잉 하는 기이한 모터 소리와 함께 제법 덩치가 있는 기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퀴가 달린 로봇 팔이었다.
과거 P마켓의 스마트 물류창고가 NBC를 통해 최초 공개되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로봇 팔의 소형화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시 유재원은 골드의 개인 비서 기능을 통해 스마트 물류창고와 멀리 떨어진 LA 스튜디오에서 물류창고 안의 로봇 팔에게 V자 제스처를 하도록 명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 등장하는 로봇 팔은 인공지능 골드의 바둑 모듈과 연결되어 계산이 끝난 바둑알을 바둑판에 착수하는 역할을 하게 될 녀석이었다.
더구나 단순히 돌만 놓는 게 다가 아니었다.
-^^!
로봇 팔의 본체에는 큼지막한 모니터가 달려 있었고, 거기에는 웃음을 의미하는 ^^모양의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3개인 손을 흔들며 마치 객석과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하는 것과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유튜브 라이브 채팅창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폭발적이었다.
산업용 로봇과는 달리 관절과 본체가 모두 매끈한 형태였고, 구동음도 거의 나지 않았다. 미래의 스마트 공장에서 막 나온 듯한 모습이었는데, 친근함까지 전해졌으니 다들 깜짝 놀랄 만했다.
보스턴 다이나믹스가 꾸준히 갈고 닦은 로봇공학의 결정체가 담긴 로봇 팔이었다.
비단 인사만 하는 게 다가 아니다. 로봇 팔의 가동 범위가 사람의 팔보다 더 유연했고, 정확했다. 어떻게 보면 기괴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보스턴 다이나믹스는 사람에게 친근함을 주기 위해 최대한 익숙한 제스처를 많이 넣었다.
모니터에 뜬 눈 모양 이모티콘 역시 마찬가지다. 바둑 진행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모티콘들이 등장할 수 있게 내장해 놓았다. 연산 시간이 길어지면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한다든가, 좋은 수를 발견하면 전구가 번쩍 켜진다.
바둑이라는 핵심 기능에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기능들이다. 연산 중이라고 땀을 삐질 흘리면 오히려 상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착수점에 따라 달라지는 연산 시간을 보고 인공지능이 중점으로 탐색하는 묘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인공지능 골드나 로봇 팔이 기계라는 건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유재원은 사람 냄새 나는 기계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해당 기능을 만들도록 했다.
곧이어 긴장한 표정의 이창호 9단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각자의 자리에 앉은 이창호와 인공지능 골드의 로봇 팔은 돌을 잡았다. 선수는 인공지능 골드였다. 도전자인 골드에게 이창호 9단이 검은 돌을 양보해 준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흑을 잡은 인공지능 골드가 먼저 불리함을 감수한 것이었다. 전통의 바둑에서는 선수를 두는 흑이 아주 조금 유리하다고 보았지만, 극한의 기계학습 끝에 나온 결론은 7:3 정도로 백이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말이다.
차르륵.
로봇 팔이 바둑통에서 돌을 고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러면서 로봇 팔 본체에 달린 모니터에는 큼지막한 눈깔사탕 아이콘이 떴고 바둑판 여기저기를 훑었다. 곧이어 그 시선은 어느 한 점에 머물렀고,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검은 돌이 놓인 위치는 삼삼. 3선과 3선의 교차점이었고, 극단적인 실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번 시범 경기의 바둑판은 11*11의 미니 바둑판인 것을 고려하면 오리지널 바둑의 화점과도 같은 정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에 맞서는 이창호 9단의 수는 날일자로 받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정석에 이창호 9단 역시나 정석으로 받아쳤다.
다음 수를 놓기 위해 인공지능 골드의 연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로봇 팔의 모니터에도 땀방울 아이콘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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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우리 독자님은 완전 날카로우시네요.
이창호 9단을 예상한 분이 이렇게나 많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