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41화 (741/1,007)

34권 25화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흥행 기세 심상치 않다!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인 기작 대열에 들어선 거죠."

유재원은 스크랩북을 보며 투덜 거렸다.

"그렇습니다. 이미 손익 분기점 을 넘어서 확실하게 수익 구간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자동차 옆자리에 앉은 김대석 비 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손익 분기는 3억 달러였다.

CG와 같은 제작비가 크게 드는 기술을 쓰지 않았지만, 배우들의 몸값이나, 영화의 주요 배경인 월 스트리트의 화려함을 그대로 재현 하다 보니 제작비가 치솟았다.

거기에 전 세계에 마케팅 비용으 로 제작비와 거의 비슷한 자금을 풀었기에 손익 분기점이 상당히 높 아졌다.

유재원은 손해 봐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제작자나 영화 관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개봉 후, 하루하루박스오피스 성적표만 보고 살았는 데, 일주일이 지나고서는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보통 영화는 개봉 당일부터 일주 일 사이에 흥행이 판가름 난다.

덕분에 배급사들이 개봉 첫날 영 화관 확보를 위해 피 튀기는 싸움 을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일단 스크린이 많아지면 극장을 찾은 관객의 선택지에 오를 확률이 높아졌으니 말이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는 1,000개 정도 되는 스크린으로 개봉했다.

극장은 관객의 기대 순위나 감독 의 이름값을 보고 영화를 가져가는 데,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는 죄다 하위권이라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진 못했다.

한국은 영화관들이 멀티플렉스로 전환 중이었는데, 멀티플렉스가 먼 저 시작된 미국은 오히려 한국보다 변화 속도가 느렸다.

그나마 타임워너 넥스트컴이라는 뒷배가 있어서 1천 개를 맞출 순 있었다.

그런데 2주 차에 접어들자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더 올라갔다.

1주 차 매출액이 1,200만 달러였 는데, 2주 차에는 1,600만 달러로 상승했다. 전 세계 동시 개봉이었 기에 새롭게 매출이 터질 나라도 없었는데, 전보다 더 올랐다.

"네티즌들의 입소문 마케팅이 생 각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에서 보내온 리포트를 봤던 김대석 비서실장이 한 마디로 요약했다.

영화는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 실을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받아서 집 을 샀던 사람들에겐 자신들의 이야 기 그 자체였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후 폭풍-다우존스 큰 폭 하락. 금융시장 출렁?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그저 재미로 보고 넘겼지 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쏟아냈던 대사 에서 공감대와 위기감을 동시에 느 낀 이들은 본인들의 현금 흐름을 체크했고,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매도하면서 총알을 비축했다.

그 숫자는 많진 않았지만, 상승 탄력이 거의 바닥난 주식시장을 움 직일 정도는 되었다.

-전문가들, 일시적인 현상, 미국 경제 펀더멘털 훌륭!

-주택시장 안정적. 거래량 하락 하긴 했지만, 공급 물량 부족해진 현상 탓.

반면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은 작년부터 했던 낙관론을 계속 유지 했다. 영화를 보고 혹한 마음이 든전문가도 있었지만, 이제까지 쏟아 냈던 말이 있어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다.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ID 인베 스트먼트는 월 스트리트의 전문가 들에겐 그야말로 껌과 같은 취급이 었으니 말이다.

-CDO란 무엇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규모, 2조 달러 넘어!

-관련 파생 상품 포함하면 4조 달러 육박!

반면 일부 매스컴에서는 유재원 과 ID 인베스트먼트가 한참 전에 지적했던 위기 요소에 대한 팩트 체크를 이제야 시작하기도 했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리먼브라더스 와 AIG 등에서 매입한 풋 옵션의 만기는 이제 딱 100일 남은 시점이 기도 했다.

"도착했습니다."

김대석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해 대화하다 보니 순식간에 목 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모하비 사 막의 2GW 토륨 원자력 발전소였 다.

작년 초부터 시작했던 공사가 모 두 끝났다. 본격적인 운전을 시작 하기에 앞서 미국 에너지부로부터 안정성 인증까지도 확실하게 받았 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가 끝난 지 금, 화려한 준공식과 함께 상업 운 전을 시작하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캘리포니아 주지 사는 물론이고, 리버만 부통령과 에너지 사업을 하는 여러 기업에서 VIP들이 모하비 사막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최첨단 전투기 F22의 콕핏에 비 견될 만큼, 발전소 모니터링과 제 어를 모두 디지털로 전환한 컨트롤센터에서 유재원을 비롯한 귀빈들 이 붉은색 스타트 버튼을 꾹 눌렀 다.

그러자 완벽하게 가동 준비를 끝 낸 토륨 원자로가 반응을 시작하면 서 막대한 열을 뿜어냈다.

토륨 원자로가 발산한 열기는 열 교환기를 통해 가스터빈으로 전환 되었고, 가스터빈은 발전기를 돌리 며 전기를 생산했다.

-토륨 원자로 가동률 안정적.

-출력 상승 중. 50, 60…… 100%!

전면의 대형 스크린에 2GW라는 수치가 찍혔고, 모두 박수로 축하 했다.

생산된 전기는 일찌감치 설치가 끝난 송전 설비를 타고 LA와 샌프 란시스코 등,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로 전해졌다.

그렇게 모하비 사막과 캘리포니 아주를 환하게 밝히는 토륨 원자로 가 가동을 시작하면서, 막대한 전 기를 뿜어낼 때.

앨라배마주의 작은 지역 은행 하 나가 파산을 선언했다.

월 스트리트에서는 해당 은행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자그마한 규모 였지만, 그 파열음은 만년설이 무 너지는 것만큼 거대했다.

몽고메리 뱅크.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에서 처음 영업을 시작했고, 최대 도시 인 버밍햄에서 최대의 세력을 과시 했던 지역 은행이었다.

그렇지만 미국 은행 순위에서는 30위권에 들지도 못할 만큼, 작은 규모였기에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은 전국 뉴스감도 아니었다.

하지만 앨라배마에서만큼은 특급 뉴스였다. 80년에 가깝게 영업을 했던 은행이었고, 지역 사회에 잔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몽고메리 뱅크의 내실은 탄탄한 편이었다.

세계 경제의 수도 뉴욕이나, 웬 만한 선진국보다 경제력이 더 큰 캘리포니아주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세계적인 은행이 되었을 테지만, 앨라배마도 나름 경제력이 있던 주 였다. 신흥 공업 지역으로 일컬어지는 선벨트 지역에 걸쳐 있어서 중공업이 특히나 발달해 있었으니 말이다.

전통적으로는 나사의 마셜 센터 나 미 육군 미사일 시험과 개발을 총괄하는 레드스톤 병기창이 위치 해 있었고, 미사일은 곧 항공 우주 산업에도 영향을 줘서 크게 발달해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는데, 미국 전통의 자동차 도시가 디트로이트 였다면 신흥 자동차 도시는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였다.

몽고메리에는 대한민국의 대표 자동차 회사인 미래자동차가 진출 을 타진 중이었고, 일본의 도요타 와 혼다는 일찌감치 공장을 만들었 다. 심지어 독일의 대표 자동차 회 사인 메르세데스-벤츠도 공장이 있 었다.

이처럼 해외 자동차 기업들의 진 출로 앨라배마의 경제는 탄탄했고, 그러한 지역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 장했던 은행이 몽고메리 뱅크였다.

웬만한 지역 은행들은 몽고메리뱅크가 웃으면서 넘길 정도였다. 그런 탄탄한 몽고메리 뱅크가 누구 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갑자기 파산해 버린 건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유재원이 몽고메리 뱅크의 소식 을 들은 건 모하비 토륨 원전의 준 공식과 첫 불 당기기 행사를 마치 고, 파티장으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애써 황량하기 그지없는 모하비 사막까지 와 주신 VIP들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발전 소 안에서 파티를 할 수는 없었기 에, LA로 이동해서 화려한 파티를 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는 중에 김대석으 로부터 준공식 중에 일어났던 일을 보고 받았다. 그중에 최고로 놀랄 일은 몽고메리의 일이었다.

"에? 몽고메리 뱅크가 파산이요?"

"예. 여기 관련 리포트입니다."

김대석이 안드로이드 패드를 건넸다. 거기엔 속보로 전해진 기사 들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몽고메리 뱅크 파산, 서브프라 임 모기지 파생 상품 투자 실패 탓.

-손실금 규모가 예치금 규모 초 월-투자자들 망연자실, 금융위원회 뱅크 런 차단에 주력.

역시.

몇 년 전만 해도 건실함 하나만 으로 대형 은행에 흡수되지 않고 자립할 수 있었던 지역 은행이 삽 시간에 망해 버린 건 무리한 욕심 으로 비상식적 투자를 했기 때문이 었다.

전통적인 은행의 업무는 예금과 대출이 었다.

예금을 받아서 이자를 주고, 대 출을 해서 이자를 받는, 그래서 대 출 금리와 예금 금리의 차액만큼 수익으로 삼는 것이었다.

앉아서 돈을 버는 것이지만, 예 대 금리 차이만으로 돈을 버는 것 은 너무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런 은행이었기에 새로운 비즈 니스는 언제나 빠르게 도입되었다. 은행에서 보험이나 펀드를 팔기 시 작한 것도 이러한 수익 개선을 위 한 작업이었다. 너무도 지루한 전 통의 은행 비즈니스에서 서브프라 임 모기지 대출은 그야말로 신세계 였다.

1%대의 예대 금리 차이로 겨우 이익을 내던 것과 CDO만 팔아도 8, 9%의 수익률이 절로 나오는 것 은 그야말로 신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무한대의 이익까지도 나오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생 상 품은 천지개벽이었다.

서브프라임 관련 상품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은 몽고 메리 뱅크가 전통의 은행 비즈니스 를 하던 때의 몇 배에 달했다.

은행의 대주주들이 단번에 돈의 맛에 빠져 버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걸 막았던 게 은행장이었다. 그러자 대주주들이 나섰다. 전임 은행장은 은행원에서부터 은행장까 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은행은 은행으로서의 일을 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이었고, 서브 프라임 투자 확대에도 부정적이었 다.

대주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는 그를 해임해 버렸다. 그리곤 새로 운 은행장으로 월 스트리트의 선진 금융 시스템을 체득한 투자회사의 CEO 출신을 앉혔다.

그 결과 몽고메리 뱅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서브프라임론 투자 비율이 크게 상승했다. 동시에 파 생 상품까지도 거침없이 다뤘다.

당연하게도 몽고메리 뱅크는 극 단적인 콜 포지션이었다. 그러다가 미국 경기가 잠깐 소강 국면에 접 어들었고, 대출자의 조건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남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연체가 쌓이기 시작했 다.

연체는 곧장 CDO의 수익률 악 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CDO를 기 초 자산으로 둔 파생 상품의 경우 엔 부도가 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몽고메리 뱅크가 투자했던 CDO 와 파생 상품이 그러했다.

얼마나 변동성이 컸으면 몽고메 리 뱅크의 경영진이 파산을 예측한 건, 파산을 선언하기 불과 이틀 전 이었다. 즉, 3일 전만 해도 수익률 이 폭락하긴 했지만, 부도가 날 정 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파생 상품, 특히 풋 옵션의 만기를 앞두고서 서브프라 임 모기지론 대출자들의 연체율이 급상승했고, 그에 따라 권리 행사 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보았던 풋 옵션의 행사가 가능해졌다.

반대로 권리 행사가 가능했을 거라고 보았던 콜 옵션은 풋 옵션과 반대로 행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손 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실 은행이 파생 상품을 직접 사고파는 건 엄연한 불법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투자를 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돈이 돈을 벌어들였고, 위험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죽고 나서야 투자가 아닌 투기였다 는 걸 알아차렸다. 늘 그렇듯 알아 차리고 나서는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은 시점이었다.

당국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도 전에 몽고메리 뱅크는 파산했다. 그렇지만 미국 경제 전체적으로 보 면 너무도 작은 지분이었기에, 몽 고메리 뱅크의 파산으로 위험을 감 지한 사람의 숫자는 적었다.

“세상에.”

리먼브라더스의 CFO 에런 폴드도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으로부터 위기를 감지한 사람이었다. 아니, 몽고메리 뱅크가 없었더라도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를 보고 나서부터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서 술을 마시러 간 게 아니라, 회사에 돌아와 해외 금융시장에서 하락에 배팅했던 것 아니겠는가.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그널은 계속 올라왔다. 특히 에런 폴드가 집중해서 체크하고 있던 건 연체율과 부도율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본인의 예상치라면서 보여준 것과 놀랍도록 흡사하게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다. 리먼브라더스가 슈퍼컴퓨터로 예측한 데이터에서는 7월 이후 안정세를 찾아야 했는데, 현실은 연체율이 더 치솟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앨라배마주에서 올라온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 소식은 에런 폴드의 머릿속에 붉은색 경고등을 띄우는 소식이었다.

비단 에런 폴드뿐만이 아니라 리먼브라더스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 관련해 깊숙이 개입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긴급한 회의가 소집되었고, 에런 폴드 역시 참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에런 폴드는 제일 먼저 큰 목소리를 냈다.

“10월 31일까지만 버티면, 우리가 이깁니다.”

놀랍게도 에런 폴드가 내린 결정은 상식을 안드로메다에 날려 버리는 것과 같았다.

10월 31일!

지금으로부터 딱 100일 뒤의 날짜였다.

그때까지 무조건 버티는 것, 그것이 에런 폴드의 결론이었다. 리먼브라더스의 CEO 리처드 풀드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기에 바로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에런 폴드의 이어지는 말이 더 빨랐다.

“설명을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습니다.”

리먼브라더스 역시 중요 회의에서는 레이저 프로젝터로 큰 스크린을 만들었고, 거기에 컴퓨터를 연결해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을 띄웠다. 당연하게도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였고,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은 ID 오피스였다.

스크린에 띄워진 것은 10월 달력. 거기에서 31일은 평범한 화요일이었고, 특별한 기념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작년 리먼브라더스를 직접 찾아온 ID 인베스트먼트의 사장 빈센트 그린힐과 리먼브라더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CDO의 수익률을 기초 자산으로 둔 풋 옵션을 발행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계약된 금액은 무려 20억 달러. AIG와 시티그룹도 각각 5억 달러씩 똑같은 풋 옵션을 팔았지만, 단일 옵션 상품으로는 20억 달러를 찍은 리먼브라더스가 최고였다.

오죽하면 이후에도 리먼브라더스는 CDO와 연관된 옵션을 무지막지하게 찍어냈지만, 상징성으로는 단연 역대급이었기에 모든 포커스는 오직 리먼브라더스로만 집중되었다.

특히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라는 영화가 인기작 대열에 오르고 나서는 북미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 모두의 관심이 ID 인베스트먼트가 샀던 풋 옵션에 쏠렸다.

영화 속 주인공은 과감하게 풋 옵션을 샀고, 영화의 끝에서 대박이 터졌다.

보통 대박도 아니고, 수천 배의 대박이 터지면서 단번에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영화보다 더한 액수를 투자한 ID 인베스트먼트였으니 과연 그 끝이 어떻게 날지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ID 인베스트먼트가 가진 풋 옵션이 권리 행사를 못 하고 사라진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드리워진 암운도 사라질 것입니다.”

에런 폴드의 말이 끝나자 CEO인 리처드는 물론 다른 임원들도 생각이 깊어졌다.

발행할 때부터 CEO 리처드의 결재를 거친 상품이었고, 이후로도 지속적인 모니터링 중인 상품이었다. 그렇기에 리먼브라더스의 CEO인 리처드도 권리 행사 조건과 같은 세부적인 데이터를 잘 알고 있었다.

풋 옵션의 권리 행사가 가능한 기준점은 리먼브라더스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CDO 중에 가장 신용도가 좋은 A클래스의 수익률이 5% 이하일 때였다.

그렇지만 5%라고 해서 무조건 투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풋 옵션 권리를 행사하더라도, 권리 행사 후 얻을 수 있는 수익금이 20억 달러를 넘어야 ID 인베스트먼트는 본전을 챙기는 것이니 말이다.

“그 지점이 3%입니다.”

20억 달러라는 원금을 회수할 정도가 되려면 빈센트 그린힐이 유재원에게 보고했던 것처럼 3% 이하로 떨어져야 했다.

“현재 A클래스 CDO의 수익률은 6.25%입니다. 연초의 10.25%에서 4% 정도 하락하긴 했지만, 10월 말까지 3% 이상을 사수하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에런 폴드의 말에 리먼브라더스 임원진들은 생각에 잠겼다.

A클래스 CDO가 3%라니.

연방준비위원회의 기준 금리가 작년에 한 번 인하를 단행해 2.75%까지 내려와서 쭉 동결 중이었다. 그런데 위험성이 공존하는 CDO가 연방 기준 금리와 불과 0.25%밖에 차이가 안 날 정도로 내려간다는 건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생 상품 시장이 박살 났다는 의미였다.

비단 ID 인베스트먼트의 풋 옵션의 권리 행사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생 상품 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수해야 할 선이었다.

“마지노선은 5%다.”

리먼브라더스의 CEO 리처드는 에런 폴드보다 더 높은 5%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5%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에런 폴드는 힘차게 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먼브라더스의 다른 임원들 모두가 A클래스 CDO의 수익률을 5% 이상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백악관에서는 리먼브라더스와는 다른 기류가 흘렀다.

비슷한 시각.

“안정적인 연착륙이 필요합니다. 인플레이션 우려도 커졌고, 주택시장도 너무나 과열되었습니다.”

몽고메리 뱅크 파산 소식에 백악관에 긴급 소집된 장관급 정무 회의에서 주택부 장관인 멜 마르티네스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년부터 유재원이 꾸준히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물론 앨 고어 대통령에게도 공감대를 일으키진 못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유재원의 무시무시한 능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앨 고어였지만, 시장의 자율에 맞기는 게 섣부른 개입보다 낫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앨 고어가 신자유주의자들처럼 시장 만능을 신봉하는 건 아니다. 개입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보았을 뿐이다. 게다가 주택시장의 성장은 IT와 함께 미국 전체의 경제 성장률을 이끄는 쌍두마차였기에 과열에 대한 우려보다는 경제성장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다.

“지엽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연방준비위원회에 보다 보수적인 판단을 요청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에 대한 백악관의 관점도 주택시장 전체가 아닌 은행 경영진의 개인적 실패라고 보았고, 그렇기에 나온 결론도 소극적이었다.

그렇지만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은 미국 주택시장을 떠받치고 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의 확실한 전조였다.

파산의 여파는 백악관과 리먼브라더스 등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전파되는 중이었다.

며칠 후, 연방준비위원회에서 금리를 인상하느냐 마느냐 한창 논란이 일어날 무렵.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규모로 업계 2위에 빛났던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위태롭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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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단두대 매치“뭐라고요?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했단 말씀입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대통령님. 파산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근거가 아주 없는 게 아닌 게, 몇 달 전만 해도 30달러대였던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주가는 지금 5달러대로 급락한 상태입니다. 오늘도 10% 이상 하락하고 있습니다.”

앨 고어 대통령이 비서실장의 보고에 펄쩍 뛰었다.

평소에는 늘 차분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은 그저 지엽적(枝葉的)인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앨라배마의 지역 은행이 파산해 봤자 앨라배마 정도의 혼란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주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고 연방 정부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면 충분히 해결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은 이야기가 다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규모 2위의 회사였다. 최대 규모는 리먼브라더스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리먼브라더스에 아주 조금 밀리는 20% 후반대의 비율을 차지하는 게 뉴센추리 파이낸셜이었다.

“대체 이유가 뭡니까?”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면서 기업과 개인 사업자들의 매출 규모도 줄었습니다. 그에 따른 여파 중 하나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수익률의 급락입니다. 대출을 받은 이들 중에 이자는 물론이고 대출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진 탓입니다.”

“경기 하강 국면 때문에? 성장률 차이가 작년의 같은 분기 대비해서 -0.3% 정도 떨어졌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이너스 성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파산 위험이라고요?”

앨 고어의 지적에 비서실장은 변명이 궁색해졌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경제 규모였다. 그러니 0.3%라도 금액으로 따지면 수백억 달러가 넘는다.

반면 앨 고어의 물음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0.3%의 성장률 하락은 말 그대로 작년 동월에 비해 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것이지, 성장을 아예 못 했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파산 위기라니.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역시나 무리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무분별한 대출과 파생 상품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였다.

투자의 규모가 커질 때마다 레버리지 효과로 인해 수익률도 커졌지만, 손실 가능성 역시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을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다. 설사 회사 안에서 그 위험성을 감지하고 경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겁쟁이나 보수주의자 취급을 하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체자의 증가는 치명적이었다.

유재원의 지적처럼 레버리지 효과는 손실에도 적용되었다. 작년만 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던 손실 금액이 지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위기도 여기에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CDO의 수익률 급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용도가 괜찮은 A클래스 채권이라면 시장에 내놓기 무섭게 팔렸다.

그런데 지금은 주택이 담보로 잡혀 있는 주택저당채권(MBS)도 쉽게 팔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위험성 높은 CDO는 과거처럼 활발하게 거래가 이뤄지지도 않았다.

반대로 뉴센추리 파이낸셜에 돈을 맡겼던 이들이 돈을 찾기 시작하면서 엎친 데 덮친 꼴이 되었다. 내외의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뉴센추리 파이낸셜은 2분기 영업 실적이 최악으로 떨어지면서 주가도 폭락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앨 고어 대통령의 물음은 동석한 주택부장관을 향했다. 그것으로 이미 앨 고어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회생 절차를 준비해야 합니다.”

주택부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딱 정해져 있었으니 말이다. 반면 경제자문위원회의 제이슨 위원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제이슨 위원장은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로서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정부가 개입하는 건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니 부작용이 더 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뉴센추리 파이낸셜도 시장에 맡겨서 다른 금융 그룹이 인수하도록 하거나, 아예 해체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반면 앨 고어는 몽고메리 뱅크도 그렇고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 위기도 그렇고, 주변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특히 작년부터 주택 시장 과열을 경고했던 유재원의 목소리가 이제는 결코 가볍게만 들리지 않았다.

작은 불씨가 산천초목을 다 태우는 산불이 되기 전에 진화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과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은 성질이 많이 달랐다.

몽고메리 뱅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파생 상품에 투자했다가 망한 것이라서, 손실도 본인들 책임이었다. 반면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경우에는 주택 대출이 문제였다. 이곳에서 돈을 빌려 주택을 사고 성실하게 원금과 이자를 갚던 사람들도 많았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진짜로 파산해 버리면 문제가 커진다. 채권자들이 자산 회수를 시작하면 대출금 상환에 대비 못 한 이들이 멀쩡한 집을 빼앗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숫자는 기본이 수십만 단위였으니 앨 고어 대통령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같은 시각.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 위기는 타임테이블에 있던 사건이군.”

유재원은 아주 비밀스러운 문서를 컴퓨터 위에 띄워 두고 있었다. 바로 마스터플랜이었다. 회귀 전 열심히 만들었던 문서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달라진 미래의 흐름으로 인해 언제부턴가 찾지 않게 된 문서였다.

그렇지만 마스터플랜의 가치는 지금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문서에 담긴 계획표는 현실과 완전히 달라졌지만, 문서에 담긴 미래 정보와 미래 기술은 천금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단적으로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과 같은 것은 마스터플랜의 세부 문서에도 담겨 있던 내용이었다. 다만 문서에는 파산 위기가 아니라 파산이라고 확실히 명시되어 있었다. 시점도 좀 다르다.

2006년이 아니라 2007년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마스터플랜의 문서를 보고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위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큰돈을 벌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몇 달 전 주가가 30달러 위에서 날고 있을 때, 간단히 공매도만 해도 성공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엄청난 금자탑을 쌓은 상태였기에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 위기라는 항목을 보고 그저 안심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유재원에겐 큰 힘이었다.

사실 얼마 전 몽고메리 뱅크가 파산했을 때는 상당히 놀랐던 유재원이었다. 백악관은 그저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했지만, 유재원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모하비 토륨 원자로 준공식을 마치고 파티장으로 가는 중에 김대석에게 처음 보고 받았을 땐 서브프라임 위기의 전조로 일어난 일이라 치부했었다. 그런데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스터플랜을 확인했을 때는 크게 놀랐다.

마스터플랜에는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었던 탓이다.

아주 세밀한 정보까지도 기록한 마스터플랜이었으니,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도 존재해야 했는데,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기억의 궁전 속에 있는 뉴스 라이브러리에도 없었다.

그로 인해서 유재원은 서브프라임의 전개 양상이 이전과 확 달라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은 예정대로 이뤄지면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나마 기준점을 잡을 만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파산 위기에 놓인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고객들에겐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유재원은 마스터플랜 문서를 한참이나 보다가 닫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문서를 다시금 암호화하여 개인용 보안 영역에 밀봉했고 캐시 메모리도 깔끔하게 지웠다.

이미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보안성은 세계 최고 수준을 달성했기에, 전설적인 해커라도 절대 뚫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는 유재원이다. 그러니 그냥 문서만 닫아도 될 일이지만, 회귀 후부터 쌓은 투철한 보안 의식 덕에 지금은 그냥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리먼브라더스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마스터플랜 문서를 봉인한 유재원이 새롭게 열어 본 문서는 빈센트 그린힐의 월 스트리트 동향 보고서였다.

CDO 풋 옵션을 대거 매입한 후로는 시시때때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보내주고 있었다. 정보팀의 보고서도 훌륭했지만, 빈센트 그린힐의 동향 보고서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특히 이번에 날아온 보고서는 리먼브라더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몽고메리 뱅크의 파산에서 위기감을 감지했던 모양인지, 긴급 임원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 그런데 임원 회의를 마친 후 리먼브라더스의 행태가 상식과는 많이 달랐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한 파생 상품의 판매에 더욱 열을 올렸다.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건가?”

풋 옵션을 사들이는 건 아니었다.

리먼브라더스가 투자를 확대하는 건 당연히 기존의 상승 포지션과 같은 상품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곧 본인들이 현재 설정 중인 콜 포지션을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MBS에 대한 매수도 시작했는데, 그 물량을 비상식적일 만큼 크고 공격적으로 늘렸다는 이야기도 추가로 담겨 있었다.

MBS는 그나마 담보가 잡혀 있어서 CDO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성질의 자산도 아니었다. 주택 시장이 붕괴하면 담보의 가치도 급락하는 건 물론이고, 판매 자체가 막혀서 현금화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니 말이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유재원은 바로 금융 전산망을 켜고 리만브라더스의 거래 기록을 살폈다. 거래의 익명성을 위해서 누가 얼마나 샀는지 정확히 나오는 건 아니지만, 거래 기록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10월 말까지 억지로라도 버텨 보겠다는 거네?”

티파니의 걱정을 사면서까지 밤을 새워 분석한 결과 유재원은 리먼브라더스의 의도를 상당히 정확하게 읽어냈다.

리먼브라더스의 A클래스 CDO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것.

이를 위해 리먼브라더스는 불과 3일 동안에 10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10월 말까지만 버텨 유재원이 사들인 풋 옵션의 권리 행사를 막고 나서, 풋 옵션 투자로 유재원과 ID 인베스트먼트가 망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면, 시장의 심리는 반대로 돌아설 거라는 기대였다.

“골드, 네 덕분에 분석이 수월했어.”

-도움을 드려 영광입니다.

유재원의 말에 골드는 인간미 없게 기계처럼 말했다.

골드는 기계였으니 정확한 감정선이지만, 사람이라면 으쓱할만한 일이었다. 리먼브라더스의 자금 흐름 추적은 유재원 혼자서 했다면 며칠은 더 걸렸을 작업이었다. 여기에 인공지능 비서 골드의 도움을 받은 덕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대략 12시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인공지능 골드는 일반용이 아니라 개발자 모드로 구동되긴 했다. 그러니 보통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받을 수 없는 서비스였다.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유재원은 골드의 지능을 독점할 생각이 없었다. 일반용 골드도 개발자 모드 수준으로 지능을 끌어올릴 작정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어려웠다. 리먼브라더스의 자금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에 동원된 연산력도 상당했으니 말이다.

이걸 전 세계 사람들이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클라우드 서버의 연산력이 지금보다 최소 1천 배 이상은 향상되어야 했다.

“아으, 어깨가 뻐근하네.”

수고는 골드가 다했는데 정작 유재원에겐 피곤이 몰려왔다. 앉은 자리에서 상체만 스트레칭을 하는데도 전해지는 감각이 달랐다.

20대 초에는 아무리 컴퓨터 작업을 오래해도 피곤함을 몰랐는데, 이제는 30대가 코앞이니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부모님과 큰아버지 그리고 친척분들께서 몸에 좋다고 보내주시는 것은 다 챙겨 먹고 있고, 정기적으로 의료 검진도 받으면서, 일반적인 식사로는 결핍이 생길 만한 영양소까지 보충제로 챙겨 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간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최근에 신경을 쓸 게 많아져서 운동량이 줄어들었던 건 분명 사실이었다. 일단 잠을 좀 자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유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띵!

안타깝게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자마자 알람이 울렸다. 빈센트 그린힐 사장의 ID톡이었다.

-회장님, 연방 정부에서 뉴센추리 파이낸셜에 대한 회생 절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지원금으로 무려 50억 달러를 책정했다는 소식이 워싱턴에 파다합니다.

“네? 회생이라고요?”

다시금 자리에 앉은 유재원은 깜짝 놀랐다.

마스터플랜에도, 머릿속 기억의 궁전 뉴스 라이브러리에도 뉴센추리 파이낸셜은 파산한다. 회생 절차를 밟지 않고 그대로 청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생이라니.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부시 대통령과 지금의 앨 고어 대통령의 성향 차이가 만들어낸 변화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과거처럼 그냥 파산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회생 절차를 밟는 게 좋은 것인지 곧장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대신 유재원을 대신해서 곧장 반응을 해 주는 곳이 있었다.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금융시장이었다.

오전장이 열리고서 횡보를 하며 눈치 싸움이 한창이던 주식시장은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회생 결정 소식에 급격히 반응했다.

수직 낙하로 말이다.

결국 이날 다우존스와 나스닥은 -3%에 이르는 폭락으로 마무리되었다.

더욱이 시장이 비관적으로 반응한 이유도 뒤늦게 밝혀졌는데, 유재원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비상식적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제가 주식을 막 시작하고서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더랬지요.

종합지수 -3%하락 정도는 하락도 아니었네요.

그때 저는 초심자의 행운으로 멋모르고 샀던 코스피 ELW 풋을 조금 들고 있었는데, 좋다고 팔고, 콜을 샀죠.... 며칠 후 밀려든 진짜 폭락을 온 몸으로 맞고는 떡실신했던 기억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으로 ELW 같은 파생상품을 샀는지......

×

세기의 단두대 매치리먼브라더스와 ID 인베스트먼트가 벌인 세기의 옵션 대결.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에서 드러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관련 파생 상품의 사기성.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마이클 잭슨 사건으로 인해 언론의 신용도가 대폭 하락한 상태였다. 뒤늦게 드러난 증거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은 마이클 잭슨은 온갖 언론의 가짜 뉴스의 확실한 피해자였다. 이로 인해 곧 믿을 언론이 하나 없다는 관념이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의 미디어까지 싸잡아 사이비 취급당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재원이 나서기 전까지 침묵으로 동조했던 죄가 있었으니 비난은 합당했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엔 몽고메리 뱅크가 파산했고, 이제는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자 그저 낙관만 하던 사람들도 이쯤 되면 뭔가 있다는 걸 확실하게 눈치챘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은 파산설이 파다하게 돌기 시작하고 나서, 불과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고, 결국 5일 만에 법원에 파산을 신고하고 말았다.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

-수백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자들 운명, 법원 결정에 달렸다.

뉴센추리 파이낸셜발, 뉴스 폭풍에 혼란이 극대화될 무렵.

-앨 고어 대통령, 법원 판단 존중. 다만 회생 결정이 난다면, 연방 정부 차원에서 지원책 마련할 것.

백악관 발표도 빠르게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타가 되고 말았다.

“오! 좋아. 역시 앨 고어는 다르구만.”

“그러게. 준비는 하고 있었나 보네.”

유재원의 말에 거실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던 티파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ID톡으로 뉴스 속보보다는 조금 빨리 전달을 받았었던 유재원이지만, 텔레비전으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옆에 앉은 티파니의 말투에서 유재원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같이 산 지 이제 곧 있으면 15년 차인 둘이었다.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무슨 생각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으니 절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응? 그런데 자기는 살짝 미지근한 반응인데? 이 정도면 최고의 조치 아니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재원이 먼저 물었다.

“음,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빠른 느낌이야.”

“빠르다는 게 문제야? 선제적 조치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선제적이라고 하지만 공감대는 필요하잖아. 백악관에서만 너무 빨리 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치 우리 같은 사람은 모르는 위험한 정보를 알고서 나서는 것 같아.”

티파니가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살짝 위화감이 오는 유재원이다.

유재원 본인의 경우엔 아예 2회차 인생이었고, 티파니의 경우에도 결코 평범한 배경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곧 닥쳐올 서브프라임을 기준으로 보자면 티파니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진 정보량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백악관의 행보를 보고서 뭔가 더 큰 게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뻔히 봤던 유재원이다. 그러니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그야말로 노골적인 영화를 다 만든 거 아니겠는가.

“글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주식시장이 난리가 터질 거.”

티파니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악관의 발표는 주식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장 중에 나왔다.

앨 고어 대통령의 발표가 끝나고 나서, 잠깐 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거대 매도 물량이 쏟아지면서 하락 반전했다.

장을 마감했을 때 다우존스와 나스닥은 쌍둥이처럼 -3%를 찍어 버렸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투자자들의 심리가 낙관에서 비관으로 전환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재원이 ID 인베스트먼트로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영화를 찍어 보여주기도 했을 땐 월 스트리트는 큰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었다. 그나마 대중의 심리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긴 했다.

보유했던 주식을 판다거나 이자가 너무 높았던 대출금은 좀 빠르게 상환하고 이자가 조금이라도 적은 상품으로 갈아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큰 수익을 노려보겠다 하는 사람의 경우엔 파생 상품에서 하락에 배팅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이라도 이렇게 위기를 대비할 수 있다면, 유재원에겐 기쁜 일이었다. 반면 실제 투자시장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리먼브라더스의 경우 유재원과의 대결에서 절대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를 대폭 늘렸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리먼브라더스의 결정에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유재원에겐 기정사실이지만, 그들에겐 만에 하나의 확률인 풋 옵션이 발동된다면, 그걸로 치러야 할 손실금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 투자를 대폭 늘려서라도 10월 31일까지만 버틴다면 남는 장사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상되는 손실금의 크기는 A클라스 CDO의 수익률을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의 1/10도 되지 않았다.

CDO를 기초 자산으로 둔 파생 상품 시장의 규모는 ‘조’ 단위 규모였는데, CDO 자체는 수천억 달러 규모였고, 거기에서 A클래스 상품의 규모는 더 작았으니 말이다.

도표로 정리하자면 완벽한 역피라미드 형태였다.

어떻게 보면 리먼브라더스는 본인들의 취약점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보강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리먼브라더스의 전략적인 결정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터진 백악관의 발표는 찬물을 확 끼얹은 것과 같았다.

‘백악관이 나설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

대통령이란 이름이 가진 무게감은 차원이 달랐다. 대중의 인식이 확실히 달라졌다. 의구심은 곧 의심으로 바뀌었다.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펀더멘털이었는데,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과 백악관 발표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유재원이 간과했던 것은 한국과 달리 국가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들의 성향이었다.

-나스닥 -4%.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 -2%.

다음 날에도 하락세는 지속되었다.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보다 나스닥의 하락폭이 컸다. 굴뚝산업이라는 확실한 수익 모델이 있는 전통의 기업들이 모여 있는 다우존스에 비해, 나스닥은 경기에 큰 영향을 받는 IT 기업들이 몰려 있던 탓이다.

여기에 주요 주주들의 구성도 나스닥이 훨씬 젊었기에 트렌드에 민감하기도 했다.

-백악관이 꽤나 당황한 것 같습니다.

유재원은 모니터 한쪽에 주식시장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띄워 놓고, 정보팀장 레빈 윌리스로부터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그렇겠죠. 기껏 선제적인 조치를 했는데, 시장에서 이런 반응이니.”

정보팀장의 말에 유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앨 고어 대통령의 발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유재원이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빠르게 조치를 해 준 것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조치에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패닉에 빠져 팔아치우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오히려 유재원은 대량 매도마저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제2의 IT 버블처럼 주가가 엄청나게 상승한 지금 -10%, -20%씩 맞고 팔아도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 말이다. 상투에서 잡은 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계속 주시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회장님.

유재원은 레빈 정보팀장과의 화상 미팅을 종료했다. 덕분에 백악관의 속사정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우려가 커졌다.

시장의 격한 반응 때문에 옳은 결정을 내렸음에도 위축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거대한 파장을 몰고 올 텐데, 정작 그때가 되어 지금의 경험 때문에 바른 조치를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휘발유를 콸콸 붓는 곳도 있었다. 매스컴이었다.

-뉴센추리 파이낸셜, 시장에 해법을 맡겼어야 했다!

-섣부른 백악관 개입에 주식시장 패닉!

역시 원조 가짜 뉴스의 나라답게 최근 높은 클릭 수를 자랑하는 뉴스만 보면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은 마치 백악관의 잘못 같았다.

언론 보도만 보면, 시장에 맡기면 알아서 새로운 인수자가 나타나 시장 논리로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언론의 보도가 마냥 시장만 믿으라는 식은 또 아니었다.

-빠른 공적 자금 투입, 모럴 해저드 부른다.

-뉴센추리 파이낸셜, 파산 직전까지도 성과급 돈잔치!

-잘못된 결정 내린 경영진, 면죄부 주나?

눈을 살짝만 돌려보면 뉴센츄리 파이낸셜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와 성과급 잔치를 자극적으로 담은 기사들도 있었다.

실제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2분기 보너스로 수백, 수천만 달러를 나눠 가졌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돈잔치는 이곳만 그런 게 아니라 서브프라임 관련 상품에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던 월 스트리트의 회사들 대부분이 똑같았다. 심지어 제일 문제가 많은 리먼브라더스는 억 단위의 성과급을 뿌려댔으니 말이다.

“둘 중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다루지. 이게 뭐야.”

매스컴은 극단적인 반응을 동시에 다뤘고, 네티즌들과 일반 여론은 그러한 매스컴의 기사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반응했다.

넥스트컴의 경우 히스토리 기능으로 진짜 갈대처럼 움직이는 건 매스컴의 보도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지만,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백악관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말이지.”

걱정이 커지는 유재원이다.

단순한 엄살이 아닌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방준비위원회에서는 금리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주택은 물론 주식 등등, 금융시장의 안정적인 연착륙을 위해서는 시중에 너무나 풀린 달러를 회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방준비위원회는 주식시장의 폭락에 겁을 집어먹어 버렸다. 여기서 금리를 인상한다면 주식시장의 폭락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주택시장에까지 여파가 미칠 거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사실 연착륙의 과정에서 폭락이 일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배울 만큼 배운 연방준비위원회의 위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명예 회복을 노리고 있는 그린스펀 의장으로서는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미적거리는 연방준비위원회에 힘을 가해 줄 수 있는 집단이 백악관인데, 아직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유재원이 앨 고어 대통령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유재원과 ID 그룹에 이를 가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는 지금이었다. 본인들의 투자 실패를 유재원과 ID 그룹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말이다. 그냥 두면 모두가 잘될 텐데, CDO 풋 옵션이니 영화니 만들어서 안정된 시장을 들쑤셨다고 생각했다.

완전 비상식적인 판단이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인 지금이었다. 그러니 앨 고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어휴, 나는 내 할 일이나 해야겠네.”

반면 유재원의 경우 작년 말부터 서브프라임 위기에 대응해 왔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ID 그룹 차원으로 모든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ID 인베스트먼트뿐만이 아니라 보유 자산 중 주식 비중이 많은 계열사들은 하락장에서 손실을 보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다시금 컴퓨터에 집중했다.

정보팀장의 보고를 받기 전까지 모니터에는 유재원의 머릿속으로부터 나온 아주 복잡한 소스 코드가 채워지던 중이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지능을 향상하는 최적화 코드였다. 사실 소프트웨어 차원에서는 이미 극한까지 퍼포먼스를 끌어올린 상태라서, 보다 나은 하드웨어를 추가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CPU든 GPU든 차세대 칩이 나오면 제일 먼저 도입되는 게 ID 그룹의 클라우드 시스템이었다.

이미 최신 하드웨어가 적용된 상태였기에, 지금 할 수 있는 건 소프트웨어적인 조치뿐이었다. 더욱이 유재원이 그리고 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후속 대책엔 인공지능 골드의 역할이 지대했다.

유재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유재원이 서재에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중에도, 파국을 향한 폭주 기관차는 멈추지 않았다.

영국의 초대형 은행이자 ID 그룹의 주거래 은행이기도 한 HSBC가 89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손실을 발표했다.

다가올 파국을 의미하는 확실한 전조였다. 이 자체로도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진정한 공포는 시작에 불과했다.

AIG와 시티은행, 매릴린치,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같은 초대형 금융회사들의 2분기 실적발표가 줄지어 예고되어 있었으니 말이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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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편 리플에 맞춤법 때문에 논란이 살짝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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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네요!

건강하게 잘 보내시고, 월요일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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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단두대 매치HSBC의 89억 달러 손실이란 실적 발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증권가에서 기업의 실적 발표가 시장의 기대 이하로 저조하게 나왔을 때 쓰는 어닝 쇼크(Earning Shock) 단어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HSBC의 전년도 같은 분기의 실적에서는 70억 달러에 달하는 순이익을 달성했으니 말이다.

불과 1년 만에 70억 달러 순이익에서 89억 달러 손실로 반전되었다는 건 충격을 넘어서 공포였다.

-HSBC 어닝 쇼크.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 실패가 원인.

천문학적인 손실의 원인은 역시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그리고 관련 파생 상품 투자 실패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2006년의 기록적인 수익률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투자 덕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레버리지를 얼마나 끌어올렸으면, MBS 부도율이 몇 퍼센트 오르는 것으로 저렇게나 큰 손해가 터지는 거야.”

-220% 이상입니다.

유재원의 푸념에 딱 부러지는 대답이 나왔다.

놀랍게도 대답은 김대석 비서실장이나, 빈센트 그린힐 등, 전문가의 대답이 아니었다. 유재원이 작업 중인 서재에는 혼자뿐이었고, 다른 누군가 온라인으로 연결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개발자 모드의 인공지능 골드의 답이었다.

논리적 추론 부분을 열심히 강화한 덕에 지금은 어려운 질문에도 제법 그럴듯한 답을 내주는 골드였다. 그렇지만 골드의 추론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직은 무리였다. 추론 과정에 사용된 데이터부터 추론에 동원된 알고리즘은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

다만 지금 나온 HSBC의 레버리지는 믿을 수 있었다.

ID 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만큼,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쌓아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겠다. 그런데 은행이 레버리지를 220%나 당겨? 완전 미쳤다는 이야기지.”

덕분에 유재원의 입에서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리지널 투자로 100억의 이익이 날 상황에서 레버리지 220%를 당겼다면, 그 이익의 크기를 320억으로 부풀렸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손실이 100억 났다면 320억으로 확대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레버리지를 220%나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정상일 수가 없었다. 동시에 안전하게 자산을 운영해야 할 은행이 공격적 성향의 사모펀드 혹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성향의 개인 투자자나 할 법한 투자를 했다는 게 큰 실망이다.

마음 같아선 HSBC에 예치한 ID 그룹의 자금을 모조리 빼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은행 중에 HSBC가 제일 양반이라는 거지.”

사업 초기 한국의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삼았다가 비밀 유지가 되지 않아서, 바로 해외 은행으로 바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로운 주거래 은행을 찾을 때 제일 고려한 것이 바로 안전성이었다.

HSBC는 안정성부터 이율까지 모든 조건이 최고였고, 지금도 그 수준을 유지 중이었다.

89억 달러의 손실을 내놓고도 최고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다른 경쟁 은행들의 손실은 HSBC의 이상이라는 이야기였다.

HSBC의 다음으로 시티은행, 웰스파고 등등 대형 은행들과 AIG와 같은 대형 보험사들의 실적 발표가 있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어닝 쇼크였다. 그리고 그 수준은 HSBC를 단번에 넘어섰다.

-금융그룹의 총체적 부실!

-주택시장 상승, 투자가 아닌 투기 때문이었다.

-주택 매도 물량 폭증하는 가운데, 주택 거래량 감소는 역대 최고치!

-MBS, CDO 등, 서브프라임 관련 금융 상품 수익률 폭락!

-주택시장 10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 예상!

쏟아지는 암울한 전망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자고 일어나면 본인의 금융 계좌 잔고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큰 피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집을 샀던 이들이었다. 특히 본인이 보유한 자산 규모 이상으로 무리하게 비싼 집을 서브프라임 대출로 샀던 사람들 말이다.

투자를 넘어선 투기였다.

1년 전만 해도 문제는 전혀 없었다.

주택 투자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집값이었으니 말이다. 미국 전역에서 집값은 꾸준히 올랐다. 단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경우엔 몇 달 사이에 2배로 뛰는 경우도 있었다. 기술로만 승부하는 스타트업 기업의 산실인 실리콘 밸리는 전 세계에서 도전자들이 몰려왔다.

자연스럽게 주택 부족으로 이어졌고, 사놓기만 하면 집값은 알아서 올랐다. 그렇기에 본인의 전 재산이 10만 달러인 사람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90만 달러를 대출받아서 100만 달러짜리 집을 사는 게 가능했다.

원금 상환이 어려워지면 집을 팔면 되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사이에 집값이 올라서 100만 달러짜리 집은 200만 달러가 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비용을 빼고도 100만 달러의 수익이 생긴 것이니, 단번에 중산층 진입에 성공했다. 그것으로 만족했다면 좋았겠지만, 한 번 돈맛을 본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집을 샀고, 돈을 벌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이 집값은 무조건 오를 거라는 기대와 주택시장에 무지막지한 자금을 공급해 주는 금융기업들 덕이었다.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단적으로 주택이 담보로 잡혀 있은 모기지 채권의 경우에는 몇 개월 전만 해도 금융시장에서 한 차원 높은 신용도로 쳐주었다.

지금은? 그저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실정이었다.

연초만 해도 집은 없어서 살 수가 없었다. 반대로 매물로 내놓기 무섭게 팔렸던 주택이었는데, 지금은 거래량이 뚝 끊기면서 할인을 해도 팔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체적 사례로 들어가 보면 더 심각했다.

200만 달러에도 잘만 팔렸던 저택이 지금은 반토막인 100만 달러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반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원금 상환과 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가는 구조였다. 버티다 못한 채무자가 개인 파산을 선언하는 경우가 빠르게 늘어났고, 이는 금융 기관의 부실을 초래했다.

미국 주택시장을 떠받치고 있던 그 메커니즘이 붕괴되고 있었다.

-연방준비위원회, 기준 금리 0.25% 인상!

-주식시장 일제히 하락!

연방준비위원회가 금리를 인상한 건 10월 초였다.

인상 논의가 시작된 건 7월이었는데, 무려 3개월 동안이나 미적거린 것이었다. 명백한 실기였다. 적절한 방향성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였다. 일찍 조치를 했었더라면 분명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매스컴이 문제야.”

여기에 유재원은 매스컴에 대해 이를 갈았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회생을 결정한 백악관은 분명 적절한 결정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온갖 매스컴에서 온갖 시비를 거니, 시장의 반응이 왜곡되어 나타났다. 그런 시장의 반응에 백악관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뉴센추리 파이낸셜은 회귀 전과 같이 파산했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은 주택시장에 더욱 큰 압박으로 전해졌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담보로 잡고 있던 주택이 채권단에 의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채권단의 입장은 담보로 잡힌 주택이라도 팔아서 투자금을 보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채권단이 건진 투자금은 본래의 1/10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에 불과했다. 빙하기처럼 얼어붙은 주택시장에 대량의 물량이 터졌으니 매수자는 자취를 감추는 게 당연했다. 지금 집을 사 봐야 집값이 내려갈 텐데, 누가 선뜻 매수에 나서겠는가.

결국, 유재원의 예상 그대로 반값, 반의반 값에 팔아야 겨우 팔려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그렇지 않아도 붕괴되고 있던 주택시장에 치명타를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회생에 들어가서 이들이 담보로 잡고 있던 물량이 시장에 풀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곡소리는 지금보다는 줄었을 것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점을 찾자면 리먼브라더스가 바보짓을 그만둔 것이려나?”

유재원이 인공지능 골드와 함께 분석한 리먼브라더스의 전략은 CDO의 수익률을 억지로라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전략이었지만, 리먼브라더스는 구체적인 플랜까지 만들어서 실행에 옮겼다. 그중 하나가 바로 주택의 자전 거래였다.

주택시장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체크되는 게 거래량과 거래 가격이었다. 두 가지 값만 체크하는 것으로 주택시장의 상태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리먼브라더스는 A클래스 CDO에 포함된 주택들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것처럼 내부 거래를 했다.

덕분에 아주 일시적으로나마 리먼브라더스가 보유한 CDO의 수익률이 상승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같았다.

뉴센추리 파이낸셜의 파산으로 쏟아져 나온 물량에, 개인 파산을 선언한 이들도 많아지면서 리먼브라더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경제 전문가들은 리먼브라더스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넘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리먼브라더스의 경영진은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띵!

경쾌한 알람 소리와 함께 빈센트 그린힐 사장의 ID톡이 날아왔다.

-회장님, AIG에서 풋옵션 관련해서 회장님을 꼭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AIG도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요주의 대상이었다.

미국 최대의 보험사 중 하나인 AIG도 서브프라임 투자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 ID 인베스트먼트가 CDO 풋 옵션을 매수할 때 리먼브라더스가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AIG도 5억 달러에 달하는 풋 옵션을 팔았던 당사자였다.

“AIG가 그나마 현실 파악이 빠르군요.”

리먼브라더스에 비해 규모는 좀 작아도, 치명타인 건 확실했다. 그나마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리먼브라더스와는 달리 AIG는 현실 파악이 빨랐던 모양이다.

물론 월 스트리트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이야기지, 유재원이 보았을 때는 리먼브라더스나 AIG나 50보 100보였다.

-예, 회장님 말씀대로 풋 옵션 만기가 도래하기 전 전 청산을 요청하려는 겁니다.

30억 달러나 질렀던 풋옵션의 권리는 이미 확정적이었더 손익 분기점인 CDO 수익률 3%는 진작에 달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1%대 수익률이 붕괴한 것도 몇 주 전이다.

B클래스 CDO는 진작에 마이너스 수익률이 되었다. 금융 전문가들이나 애널리스트들은 A클래스 CDO도 조만간 마이너스 대로 진입할 것임을 기정사실로 말하고 다녔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넥스트컴의 히스토리 기능으로 월 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쏟아낸 발언을 정리해 보면 몇 달 전만 해도 반대의 소리를 하고 다녔다는 게 훤히 드러났으니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내 집 장만할 때라던가 CDO 투자를 하지 않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던가 하는 폭언을 쏟아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180도 얼굴을 바꿔 마이너스 진입이 어쩌고 하면서 공포를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쏟아지는 매도 물량은 곧 CDO 수익률의 파탄을 의미했다. 심지어 개인도 파산했고, 거대 모기지론 회사도 파산했다. 그 과정 속에서 돈을 빌려주고, 투자회사에 돈을 맡긴 투자자들의 돈은 허공에서 사라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주택시장 규모를 표시할 수 있다면 1초에 10억씩 사라지고 있는 거겠지.”

2006년 초, 모든 사람이 단꿈에 젖어 있을 때. 미국 주택시장의 규모는 4조 달러 규모로 예측되었다. 한국 돈으로 4,400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렇지만 정확한 건 아니다. 마치 시가 총액을 계산하는 것처럼 현재가를 기본으로 미국 주택 자산 전체를 평가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원금 회수라도 하기 위해 너도나도 주택을 팔고자 매도를 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주택의 가치가 한없이 추락한다.

그러니 주택시장 규모라는 건 사실 허상이었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는 그 허상도 중요했다. 주택의 가격에 기반하여 담보대출이나 투자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지금은 1초에 10억도 모자란 거 같은데?”

초신성처럼 한없이 팽창하던 주택시장이 반대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 속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 죽어 나갔다.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고, 집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투자 실패를 비관해서, 수년 간 애지중지하며 대출금을 내오던 집을 빼앗긴 실의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런 일을 초래한 거대 투자회사의 임원들을 처벌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경영 실패로 회사에서 쫓겨나더라도 쓰레기 같은 CDO를 팔아 치우면서 받았던 천문학적인 인센티브로 잘 먹고 잘 산다.

이번엔 절대 그 꼴은 못 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1일까지 2주 남았나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텐데, 굳이 만기 전에 만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지만, 세기의 단두대 매치는 코앞까지 왔다. 그런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두대 매치까지 일주일이 남겨진 시점이 되었을 때, S&P와 무어스 같은 거대 신용평가회사에서 MBS와 CDO 같이 파생 상품의 기초 자산이 되는 상품의 신용도 평가를 엉망으로 해 왔다는 게 인터넷 언론사를 통해 폭로되었다. CDO를 만들어낸 투자회사들과 짜고 정크 수준의 모기지 채권을 다량 섞어 넣은 CDO도 A클래스 신용도를 매겼다는 게 드러났다.

하필이면 그날이 일요일 저녁이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주식시장은 이제와는 차원이 다른 폭락을 마주하게 되었다.

장 시작과 함께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가 -13%를 찍어 버렸다.

블랙 먼데이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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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먼데이 강림!

그런데 현실에서도 블랙먼데이가 터질 줄은 몰랐네요.

셰일 오일에 밀렸던 사우디가 석유 패권을 되찾기 위해 한 판 벌일줄이야...

혹시나 주식하는 독자님이 있다면, 힘내시길! 이번만 넘기면 대박이 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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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 황금의 제국

묵직한 중량감을 자랑하는 기업들로만 주가 지수를 만든 다우존스가 -13%를 찍었다.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스닥의 경우엔 -15%라는 믿지 못할 수치가 나왔다.

오죽하면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에 속하는 기업들보다 안정감이 더 높은 안드로이드사와 ID 테크놀로지마저도 -5%가 넘는 하락이 있었다. 그야말로 하락의 공포가 투자자들의 한계선을 단번에 뛰어넘었고, 이로 인해 매도가 매도를 불렀다.

그나마 매수를 했던 게 주식 거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는데, 기준치를 뛰어넘는 하락세는 프로그램도 감당할 수 없었던 물량이었다. 프로그램들까지도 매도로 전환되자 지수 하락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 투자 비중이 컸던 회사들의 하락은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대기권 돌파를 시도하는 것처럼 무섭게 치솟았던 투자회사들의 주가는 단 하루 만에 몇 년 치 상승분을 토해냈다.

대표적인 회사가 리먼브라더스였다.

1주에 200달러가 넘었던 블루칩인 리먼브라더스는 10월 23일, 단 하루 만에 100달러 초반대가 되었다. 단 하루에 -48%라는 무지막지한 하락이 이뤄진 것이다. 주가의 상승과 하락에 한계선이 없는 미국에서도 리먼브라더스와 같은 초대형 주식이 하루 만에 반토막이 나는 건 과거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역사였다.

그나마 역대 최악의 꼴은 면했는데, 1929년 세계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제 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락률은 -20%를 넘었다. 그래도 세계 대공황과 비교될 만큼의 하락이었기에, 세계가 받는 충격은 대단했다.

더욱이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다우존스 -9%에 나스닥은 -12% 하락.

리먼브라더스는 다시금 반토막이 나면서 주가는 50달러대로 추락했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의 실제 가치에 비해 1주당 50달러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리먼브라더스가 보유한 자산 대부분은 주택과 MBS, CDO와 같은 것들이었다. 현재 월 스트리트를 패닉으로 몰아넣은 경제 위기의 근원이 바로 주택시장이었다. 주택시장의 하락률은 나스닥이나 다우존스 이상이었다. 단지 전산화가 잘 되어 있는 주식시장에 비해 실시간 지표로 나타내기가 어려워서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MBS와 CDO의 수익률이나 부도율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10월을 기점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부실이 상승했다.

특히 이번 블랙먼데이를 기점으로 리먼브라더스의 A클래스 CDO 수익률은 마이너스로 전환되었다.

블랙먼데이 당일에만 -5%에 달하는 손실로 전환되었고, 다음 날과 다다음 날까지 이어진 여파로 결국 두 자릿수 손실률을 찍었다.

10월 31일이 되었을 때.

확정된 A클래스 CDO의 수익률은 -16%.

그야말로 리먼브라더스가 발행한 CDO는 다 터졌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무지막지한 손실률이 벌어졌다.

사실 세기의 단두대 매치는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예정된 게임이었다.

유재원 본인과 ID 그룹의 등장으로 흐름이 회귀 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는 건 전과 같았다.

오히려 청나라 채권 환수에 이라크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 미국 안에 머물던 유동 자금의 규모가 회귀 전보다 더욱 거대해지면서 거품의 크기가 더더욱 커졌고 지금과 같은 사태를 만들었다.

2006년 11월 1일.

주식 투자를 했건, 아니면 주식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사람들이건 TV와 신문 그리고 인터넷에서 전하는 암울한 소식에 모두가 절망에 빠졌다.

세상이 오늘 끝날 것 같은 암울함이 가득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날씨는 너무도 좋았다. 늦가을의 파란 하늘은 너무도 짙은 파란색이었고, 구름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불 때 낙엽이 떨어지는데, 그 분위기가 예술이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 대다수는 이러한 가을 분위기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발달된 현대의 금융 시스템이었고, 웬만한 이들은 이것과 연결되어 있어서 10월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터진 블랙먼데이의 후폭풍을 다들 실감하고 있었던 탓이다.

오죽하면 태평양 너머의 한국도 미국발 블랙먼데이로 인해 직격타를 맞았다. 코스피만 해도 -10%에 이르는 폭락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은 IMF 이후로 전격적인 금융시장 개방이 이뤄졌고, 시스템도 세계 표준에 맞췄다. 저평가된 우량 기업이 대거 포진한 대한민국이고, 시스템적인 불안정성이 해소되자 해외에서 많은 투자금이 몰려왔다.

제2의 IT 버블 같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꾸준한 주가 상승의 원동력 중 제일 덩치가 컸던 것이, 이러한 외국인의 투자였다. 그런데 본진인 미국에서 일이 터지자, 다급히 투자금을 회수해서 마진 콜과 같은 위기에 대응해야 했다.

마치 IMF 때 일본이 앤캐리트레이드를 청산했던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이었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실물 경기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제2의 IMF가 올 일은 없었다.

IMF 외환 위기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은 한국은 해외 투자자들이 대거 빠져나간 지금에도 외환 보유고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을 만큼 안정적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재테크 중 주식시장 비중이 컸던 개인들에겐 혹독한 가을이었다. 1년 농사 잘 지어놓고 추수만 하면 되었는데, 태풍이 몰려와 싸그리 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파생 상품을 투자했던 개인이라면 90% 이상은 손해를 보았다.

극소수인 10% 정도만 이익을 보았는데, 하락에 배팅했던 사람들이었다.

기록을 따져 보면 놀라운 수익률도 많이 튀어나왔다. 수십, 수백 배의 로또 같은 수익률이 터진 경우가 허다했다.

중요한 건 퍼센트가 아니라 ‘배’였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하루 뒤면 소멸했을 5만 원짜리 풋 옵션이 1억 원에 마감되어 2천 배의 수익률이 터졌던 경우였다. 해당 옵션을 구매한 사람은 개미 투자자였는데, 주문 실수로 300만 원어치를 구매했다고 했다.

단 하루 사이에 300만 원이 60억 원으로 불어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 세계로 시야를 확대하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작년부터 폭락을 예견하고 투자를 했던 유재원의 ID 인베스트먼트가 있었으니 말이다.

-회장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네, 준비됐어요.”

블랙먼데이가 터지고서 태풍이 휘몰아쳤던 일주일이 지난 지금, 유재원은 빈센트 그린힐 사장으로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에 대한 종합 보고를 받았다.

물론 대면 보고는 아니고 ID톡 화상 미팅을 이용해 연결된 상태였다. 월 스트리트에서 할 일이 많은 빈센트 그린힐은 지금 유재원에게 보고를 마치자마자 여기저기 출장 스케줄을 다녀야 했다.

하여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먼저 말했던 빈센트 그린힐이었지만, 모니터상으로는 본인이 더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의 투자는 이미 언론에서부터 대성공이라고 떠들고 있었을 만큼, 역대 최대 규모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그렇지만 정확한 투자 구조가 공개된 적은 없었기에 언론들은 어림잡아 보도했을 뿐이다.

빈센트 그린힐도 정확한 수치를 확인한 것은 몇 시간 전이었다.

국제 금융 전산망상에서 각종 기초 자산들의 시가 계산이 끝나고, 그에 따라 연계된 파생 상품들의 계산이 이뤄진 다음에야 확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리먼브라더스가 발행한 A클래스 CDO의 10월 31일 자 수익률은 -16.25%입니다. 그에 따라 A클래스 CDO의 수익률을 기초 자산으로 삼아 발행한 풋 옵션의 수익률은 8,125%입니다. 수익금으로 환산하면 1,625억 달러입니다.

“와.”

유재원 본인이 설계한 것이지만, 1,625억 달러라는 수익금은 감탄을 절로 자아냈다.

-AIG와 시티은행에 각각 5억 달러씩 투자했던 옵션 역시 수익률은 똑같습니다. 각각 5억 달러를 투자했으니 406억 2,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AIG와 시티은행이 발행한 풋 옵션 역시 기초 자산을 리먼브라더스의 A클래스로 삼았고, 기준도 동일했기에 투자 수익률도 똑같았다.

-그에 따라 이번 풋 옵션 투자의 총수익률은 2,437억 5천만 달러입니다.

“와아.”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ID 테크놀로지가 작년에 열심히 번 돈이 500억 달러에 조금 모자랐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직원들이 열심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만들어 팔았고, 컴퓨터를 만들어 팔았다. 애드센스로 인터넷 광고 시장을 장악했으며, ID 클라우드 서비스로 서버 시장에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면서 IT 분야에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역대 최대의 매출액을 올렸고 전체 마진율도 20%를 넘었다. 전통의 굴뚝 기업들은 상상도 못 할 세계 최고의 수익률이었다. 그럼에도 순수익은 500억 달러를 넘지는 못했다.

물론 500억 달러에 가까운 순수익도 어마어마했지만, 이번 ID 인베스트먼트가 올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단적으로 ID 인베스트먼트의 임직원 숫자는 1천 명을 겨우 넘었다. 그런 소수의 직원들이 2,437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물론 이번 풋 옵션은 전적으로 유재원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행해진 거래였지만, 실무는 ID 인베스트먼트에서 행했다. 게다가 비슷한 차원에서 이뤄진 다른 투자들도 있었고, ID 그룹의 금융 위기 대응을 위해서 다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덕분에 달성할 수 있었던 무시무시한 수익률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있으니, 선물 옵션 시장은 완벽한 제로섬의 법칙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다.

유재원이 2,437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면, 누군가는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이처럼 천문학적인 손실을 본 주체는 풋 옵션을 발행했던 투자회사들이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

“수익금 정산이 가능할까요?”

이쯤 되면 배 째라 하고 못 주겠다고 나올 확률도 무시할 수가 없다.

-안 된다면 되게 할 겁니다. 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모니터 속 빈센트 그린힐이 단호하게 말했다.

리먼브라더스는 물론 AIG와 시티은행 등등의 채권 추심은 강력했다.

주택시장의 붕괴에 이들도 한몫 크게 했던 게, 무리한 마진 콜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경기가 어려워지긴 했지만, 약간의 배려가 있었다면 충분히 대출금과 이자를 갚아나갈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공포에 사로잡힌 경영진들이 한 푼이라도 더 건지고자 무리하게 마진 콜을 당겼고,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한 이들은 집을 내놓아야 했다.

매물이 잔뜩 쌓여 있던 주택시장에서 하루라도 먼저 팔기 위해선 가격을 대폭 깎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담보 대출을 받은 개인이나 돈을 빌려준 투자회사 모두가 죽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4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내줘야 하는 리먼브라더스와 AIG, 시티은행이었다.

도박판에서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대박을 터트렸을 경우,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판돈을 들고 집에 잘 돌아가는 것이었다.

원래 불법인 도박판이었으니, 판을 엎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이유를 붙여서 돈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조폭이 만든 도박판과 월 스트리트를 동일선에 놓는 건 비상식적이었지만, 지금의 상황 자체가 비상식적인 상황 아니겠는가.

“그럼, 잘 부탁해요. 수익 실현이 끝나면 기대하셔도 좋아요.”

-예, 회장님!

그런 일의 전문가가 바로 빈센트 그린힐이었다.

월 스트리트에서 일평생을 보낸 사람이었고, 그렇게 길었던 생애 중에 이번과 같은 대폭락의 시기도 있었다.

리먼브라더스를 필두로 AIG나 시티은행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다음 날.

-리먼브라더스, 파산 보호 신청!

-블랙먼데이 직격탄에 천문학적 손실!

-손실 규모, 5천억 달러 이상!

리먼브라더스는 여지없이 유재원과 빈센트 그린힐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진짜로 배를 째 버렸다.

파산!

회사가 망했으니, 옵션 청산 절차 자체가 정지되었다. AIG와 시티은행 역시나 부도 위기라면서 위기설을 퍼트렸다. 그리고 이를 매스컴에서 받아 쓰면서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이 온갖 찌라시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쓰는 기사만 보면 유재원과 ID 인베스트먼트가 금융 위기의 흑막처럼 보일 정도다.

유재원만 없었으면 연착륙했을 주택시장이었는데, 비관론을 퍼트린 탓에 이지경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제는 기어코 풋옵션을 실현해 세계 금융시장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덤으로 무리하게 옵션 청산을 집행해 돈을 가져갈 경우, 리먼브라더스처럼 AIG와 시티은행도 부도가 나고, 이로 인해 금융위기가 한층 더 심각해질 것이며, 그로 인한 혼란은 모두 유재원과 ID 인베스트먼트의 책임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이에 대한 유재원과 빈센트 그린힐 사장의 대응은 철저한 원칙이었다.

리먼브라더스와의 계약에서는 수익 금액에 대한 담보 설정도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최우선 채권자가 되었고, 파산한 리먼브라더스의 자산의 처리에 대해 그 어떤 채권자보다 우선해 있었다.

빈센트 그린힐은 즉각 법원에 자산 동결 조치를 신청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연방 검찰에 리먼브라더스 경영진 전체에 대해 형사 고소도 넣었다.

죄목은 배임과 횡령이었다.

단순한 엄포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구체적인 사례까지도 고소장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A클래스 CDO에 대한 신용도를 신용평가사와 짜고 조작했다는 혐의와 증거였다.

더욱이 빈센트 그린힐 발 고소장은 리먼브라더스 한 곳만 향한 게 아니라 AIG와 시티은행에도 이어졌다.

그와 함께 짧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풋 옵션 투자 수익금에 대해서는 2,437억 5천만 달러 전액 그대로 집행할 것을 천명했다. 아니, 전액 정도가 아니라 지급이 지연되는 일수에 맞춰 지연이자를 책정해 1센트까지도 추징할 것임을 당당히 밝혔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30억 달러가 2,400억 달러로 불어나는 기적~!

좀더 무리했으면 훨씬 더 많이 벌 수도 있었지만, 우리 재원이의 목표는 돈이 전부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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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자네, 진짜로 1센트까지 다 받아낼 건가?

유재원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너머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번에 나온 최신의 안드로이드 S6라서 그런지 떨림은 더욱 생생했다. ID 그룹의 전통답게 홀수 번호에서는 대대적인 스펙업을, 짝수 번호에서는 안정화 버전을 의미했고 이번에도 그랬다.

안드로이드 S6는 비판적인 성향의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혁신이 끝났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스펙의 업그레이드는 미약했다. 그렇지만 소프트웨어에서는 그간 ID 테크놀로지가 이뤄냈던 모든 혁신을 통합한 만큼,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터치 인터페이스도 메테리얼 테마가 적용되어 차분해졌고, 인공지능 비서 골드와의 결합도 본격적이었다. 여기에 얼굴 인식 인증인 페이스 키와 지문 인식 핑거 키가 결합되어 보안성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또한, 카메라와 포토 북, N페이 등등의 기본 탑재되는 애플리케이션도 이제는 인공지능 비서 골드와의 결합률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전화기의 가장 기본인 전화를 걸고, 받는 것을 유재원은 잊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S6는 역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중에 통화 품질이 제일 좋았다.

덕분에 지금과 같이 스마트폰 너머로 앨 고어 대통령의 목소리에 담긴 불안과 떨림을 고스란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물론이죠. 지금과 같은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원칙입니다. 해당 업체들은 작년 저와 계약했을 때, 공돈이 들어왔다고 좋아했죠. 위험에 대해서는 단 1%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를 때입니다.”

반면 유재원의 목소리는 반듯했다.

평소처럼 서재에 앉아 있었고, 유재원의 눈높이에 맞춰진 거대한 모니터에는 각종 그래프와 수치 데이터들이 잔뜩 띄워져 있었다.

금융 전산망에 접속해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증권시장의 데이터였다.

오늘도 -3%를 찍고 있는 주식 시장이었다.

다우존스와 나스닥 모두 동반 하락 중이었다. 주택시장 붕괴에서 시작한 금융위기는 블랙먼데이를 맞아 리먼브라더스를 파산시켰고, 며칠 전엔 메릴린치가 파산했다. 그리고 이제는 북미 최대의 보험사인 AIG와 메이저 은행인 시티은행이 위험했다.

마치 대한민국이 IMF 때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기업들이 도산했다는 소식이 나올 때처럼, 미국도 난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큰 압박을 받는 건 앨 고어 대통령이었다.

재선 임기가 이제 반환점을 넘은 상태였고, 불과 몇 달까지만 해도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에 남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앨 고어 대통령의 찬란한 경제적 업적은 이번 위기로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순도 99.9%의 순금인 줄 알았는데, 도금이었다는 게 드러나 버렸다.

언론에서는 이미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라는 네이밍까지 완료했다.

-그러면 진짜로 AIG와 시티은행을 망하게 만들 건가?

“미스터 프레지던트. 이 세상 그 어떤 채권자도 채무자가 망해 원금 환수를 못 할 상황은 달갑지가 않아요.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이 미친 듯 부도 위기론을 쏟아내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한 발 더 깊게 들어가셔야죠.”

이유는 간단했다.

본인들 팔목에 은팔찌 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수갑 차고 교도소로 가는 건 죽기보다 싫다는 게 금융회사들의 경영진과 오너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모럴 해저드로 비롯된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그에 대한 자각도 없었다. 그저 정부를 위협해 공적 자금을 받아 회생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 여기면서 위기론을 퍼트리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위기론의 최고 선두에 선 회사가 바로 AIG와 시티은행이었다.

-그러면 공적 자금을 쓰지 않고도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나?

유재원의 말에 혹시나 하고 되물어보는 앨 고어 대통령이다.

“아뇨. 지원은 해야 할 겁니다. 주택시장의 규모가 4조 달러였어요. 제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만한 자금은 없어요. 대출자의 연쇄 파산 도미노를 끊으려면 일단 공적 자금을 투입해 파산의 연쇄를 막아야 해요. 저의 계산으로 급한 불을 끄려면 당당 1천억 달러 정도를 동원하시면 될 거예요.”

-망할.

그런 앨 고어 대통령의 기대를 유재원이 간단히 부쉈다.

덕분에 신사처럼 점잖은 앨 고어 대통령으로부터 거친 욕을 들을 수 있었다.

1천억 달러.

한국 돈으로는 120조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참고로 10일 전만 해도 108조였는데, 며칠 사이에 12조나 더 올랐다. 이는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로 본진이 위태로워진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주식과 국채를 대거 내다팔고 달러를 뽑아가면서 환율이 상승해 버린 탓이다.

하여튼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데 회귀 전에는 1천억 달러로는 어림도 없었다.

공적인 유동성 공급이라는 명목하에 연방준비위원회에서 금리를 0%에 가깝게 내려놓았다. 그야말로 돈을 쏟아부어서 부실 상태의 금융회사들의 현금 흐름을 억지로 복구시켜 놓았다. 이유는 단 하나.

금융회사들이 망하면 현대 자본주의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의 로비에 정치권이 맥없이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불어온 이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원래의 자리에서 그대로 활동했다. 심지어 리먼브라더스와 같이 5천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파산을 일으킨 경영진들 역시도 처벌은 없었다.

그간 리먼브라더스를 운영하면서 받았던 천문학적인 성과급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심지어 리먼브라더스에서 그 허접한 CDO를 양산해 냈던 에런 폴드라는 최고재무책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지원금이 거대 금융회사의 잇속이 아니라 진짜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전해진다면, 이번의 위기도 기회로 바꿀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한가?

“그럼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말은 참 좋지만, 그게 현실에서 가능한 경우는 얼마 없었다.

-위기 때마다 매번 자네에게 기대는 것같지만, 이번 만큼 절실한 적은 없군.

만약 지금 앨 고어의 대화 상대가 유재원이 아닌 다른 누구였다면 의심하고 봤을 것이다. 세계 정치의 수도 워싱턴 DC는 온갖 욕망과 음모가 회오리치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믿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반면 유재원은 여전히 앨 고어에게 믿음의 대상이었다.

작년 주택시장이 과열됐다느니, 풋 옵션을 크게 배팅하고, 영화까지 만든다고 할 때만 해도 왜 저러나 싶기도 했다.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 말처럼 경제와 안보 모두가 잘나가고 있는데, 왜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왜 그때 유재원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나 하며 깊은 후회가 드는 중이었다.

-그 계획이 뭔지 알 수 있겠나?

“네, 일단 모럴 해저드로 이 사달을 부른 작자들에 대한 확실한 사법 처리가 우선이죠. 잃어버린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범법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확실한 처벌입니다. 다음은 실거주자와 투기 목적으로 집을 샀던 이들을 분리해내서, 실거주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고요.”

-전자라면 얼마든 가능하네. 그 작자들에게 이를 가는 건 우리만이 아니니까. 그런데 후자는 진짜 가능하겠나?

앨 고어의 물음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발로 뛰는 인터넷 언론이 신용평가사와 투자회사가 짜고서 CDO의 신용도를 멋대로 조작해 유통한 것만으로도 관련자들의 쇠고랑은 예고된 상태였다. 앨 고어 대통령도 이런 작자들이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면, 미래의 사기꾼들에게 똑같은 일을 벌일 용기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거주 목적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자와 투기 목적으로 대출을 받은 사람들을 분리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기지 채권에 걸린 다양한 이해관계의 복잡성이란 수학계가 엄선한 밀레니엄 문제를 초월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었다.

그렇지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다 죽겠다고 아우성친다고 검증도 없이 공적 자금을 들이부으면,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겐 가지 않고, 중간에서 다 해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회귀 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도 그랬다.

수천억 달러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었고, 제로 금리 상태가 되면서 시중에 돈이 많아지자 월 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은 되살아났다. 그리고서 다시금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그 모습에 분노한 미국 시민들이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자면서 들고 일어났다. 엄청난 숫자의 시위대들이 맨해튼 센트럴파크를 차지하고서, 매일같이 월 스트리트에 있는 금융회사 앞까지 진출해 시위했다.

만약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ID 인베스트먼트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타임워너 넥스트컴과 NBC를 통해 미디어 제국을 거느린 상태였지만, 북미 전체의 미디어 진영에서는 대략 45%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반은 유재원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고, 월 스트리트와 긴밀하게 유착된 매스컴들은 유재원과 ID 인베스트먼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흉이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진실과는 100만 광년쯤 떨어진 이야기였지만, 이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머릿속에 있는 두뇌라는 기관이 제 역할을 했다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본인들이 보기 편한 기사만 믿으려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 자금이 과거처럼 흐른다면 분노한 시위대가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을 점령하겠다고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앨 고어 대통령과의 통화가 끝난 후,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회장님, 리먼브라더스의 자산 동결이 완료되었습니다.

빈센트 그린힐로부터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나이도 많으신 빈센트 그린힐이지만, 리먼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한 날부터 지금까지도 현장으로 출근 중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M&A팀 30여 명을 이끌고 유재원과 ID 그룹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오죽하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리먼브라더스 직원들로부터 점령군이라는 말도 나오는 중이었다.

점령군 소리를 들은 ID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은 당연히 어이가 없어졌다.

오히려 상식적인 ID 인베스트먼트 직원들이 보기에 리먼브라더스 사람들은 약에 취해 미친 것 같았다.

놀랍게도 약에 취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이야 농담조로 한 소리였지만, 실제 월 스트리트에 자리한 금융회사에서 수억, 수십억을 마음껏 주무르던 엘리트들은 십중팔구 코카인 같은 마약을 했다.

마약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했고, 촌각을 다투며 남들과 다른 날카로운 판단도 하지 못했다.

반면 ID 인베스트먼트의 경우 핵심 투자의 판단은 유재원이 혼자 감당했다.

리먼브라더스와 AIG, 시티은행에 치명타를 꽂아 넣은 풋 옵션 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년에 개봉된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에서는 강력한 각색이 이뤄져서 젊고 잘생긴 크리스찬 베일이 주인공이었고, 본인이 직접 주택시장 부실을 파악하고 투자자를 모아 풋 옵션을 만들러 다니는 이야기로 꾸며졌다.

그렇지만 현실의 ID 인베스트먼트에서 전략적인 판단은 모두 유재원이 했고, 빈센트 그린힐과 임직원들은 이를 실행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금처럼 확정된 풋 옵션을 실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풋 옵션 계좌에는 현금 대신 아직도 풋 옵션만 있었다.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했고, AIG와 시티은행은 아직도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식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직원들에게 전가되는 부담감의 크기는 다른 월 스트리트의 금융기업들에 비해 무척이나 가벼운 편이었다.

“텅 비었나요?”

-예, 회장님. 당좌 계좌에 남은 자금은 32억 달러뿐입니다. 증권과 채권 등의 현금성 자산을 다 모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개털이군요. 부동산은요?”

-네. 본사 빌딩을 포함해 제법 가치가 있는 건물이 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산은 모기지 채권에 물려 있는 상태입니다. 장부상으로는 3천억 달러가 넘지만 신용도도 신뢰할 수 없고 부실 규모도 파악하지 못해서 정확한 가치 평가는 보류했습니다. 그리고 부채의 규모도 엄청납니다. 분식 회계 정황도 있어서 파산 규모는 언론이 발표한 것보다 1천7백억 달러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 그렇군요.”

부채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소리에도 유재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전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회귀 전 리먼브라더스는 2008년에 파산했다. 그 당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자산의 규모는 6,700억 달러였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빈센트 그린힐 사장은 무척이나 빠르게 리먼브라더스의 자산의 규모를 정확히 알아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직 파악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지만, 어떻게 할까요?

빈센트 사장의 물음이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리먼브라더스의 실사였다. 이후의 행동 방침은 유재원이 정해 줘야 한다.

“모기지 채권을 모두 인수합시다. 현금성 자산이나 부동산은 다른 채권단에 양보를 해서라도 최대한 많이 가져오세요.”

-모기지 채권? 주택담보대출 채권 말입니까?

빈센트 그린힐 사장이 의아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블랙먼데이 이후로 MBS의 부도율은 한 차원 더 높아졌다. 채권 시장에서 실시간으로 폭락 중인 상품이 모기지 채권이었다. 그런 채권을 최우선적으로 인수하라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이 있습니다.”

유재원의 큰 그림은 지금부터다. 조만간 백악관의 발표도 있을 것이고, 연방준비위원회도 대책을 발표할 것이다. 그에 맞춰서 유재원도 특집 방송을 계획했다. 본인이 직접 출연하는 특집 방송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계획? 플랜!? 마스터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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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3, 2, 1. 시작!

“투나잇 쇼,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PD의 신호와 함께 깔끔한 슈트 차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코난 오브라이언입니다. 오늘은 생방송으로 시청자분들과 만나는 터라 긴장이 큽니다만, 그건 저만 잘하면 되니 문제없습니다! 대신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 밤 쇼를 찾아 주신 시청자 여러분은 행운아입니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화려한 금발에, 하얀 피부 그리고 입담으로 유명한 코난 오브라이언의 투나잇 쇼가 오프닝을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손님은 특별합니다. 두 번째로 모시는 손님이지만 말이죠. 그때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이번엔 또 다릅니다. 그사이에 엄청난 잠재력을 터트렸던 모양인지, 지금은 금단의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지요.”

게스트에 대한 장황한 설명.

보통은 하나 혹은 두 개의 문장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오늘은 말이 길어졌다.

“예지라는 금단의 마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1년 전부터 예측하여 하락에 투자하는 건 물론이고 알기 쉬운 영화를 만들어서 직접 경고를 전하기도 했지요.”

이쯤 되면 투나잇 쇼의 이번 게스트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코난 오브라이언의 오프닝 멘트는 끝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어떤 반응이었죠?”

코난의 물음에 객석에서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여 명의 방청객은 그야말로 리액션 전문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대출로 낭패를 보고 있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그중에서 둘은 유재원이 제작한 영화와 막대한 풋 옵션 배팅을 보고 선제 대응을 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도 실거주 목적으로 구매했고, 아직은 저금해 놓은 돈이 있어서 대출금 상환 금액이 상향된 게 부담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집을 빼앗기진 않았다.

“하하, 여러분의 반응을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요. 그럼 무대로 모셔 보도록 하지요. 오늘의 특별 게스트 유재원 ID 그룹 회장입니다.”

코난의 말에 맞춰 유재원은 무대 위에 등장했다. 예전에 더 퍼시픽 게임을 홍보하기 위해 직접 나섰을 때와는 다른 차원의 환호가 쏟아졌다.

스테이지 뒤에서 자신을 부르기만을 기다리던 유재원은 안정적인 코난의 진행에 고개를 끄덕였다.

투나잇 쇼는 이제 NBC의 대표적인 토크 쇼가 되었다. MC 교체 이후에 예상대로 시청률이 추락했지만, 코난의 능력을 믿고 기다려 주니 역시나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가 나왔다.

전보다 3% 더 높은 시청률을 찍으면서 현재는 북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 쇼가 되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오랜만에 텔레비전 앞에 서는 프로그램으로 투나잇 쇼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다.

“유 회장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여기 객석에 계신 분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제가 대표로 물어보겠습니다. 얼마 버셨습니까?”

다만 지금처럼 천진난만한 얼굴로 돌직구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게 살짝 당황스러운 정도다. 그렇지만 어떤 게스트라도 막 대하는 게 코난의 특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적정선을 지키는 게 토크 쇼 MC의 미덕이기도 했다.

“비밀인가요?”

“아뇨. 말 못 할 이유는 없죠. 이미 알 만한 분은 다 아실 테니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2,437억 5천만 달러입니다.”

쿵!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치 무대 위에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진 것 같은 파문이 일어났다. 대충 무지막지한 금액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숫자를 장본인한테서 직접 듣자 효과가 남달랐다.

“월 스트리트의 역사를 새로 쓰셨군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소감은 어떤가요?”

코난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미 구체적인 숫자가 나온 만큼, 쇼가 방송되고 나서의 반응은 일찌감치 예상되는 바였다. 코난은 여기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오르게 하고 싶었다.

“별로입니다.”

그런 코난의 기대에 유재원은 찬물을 확 끼얹었다.

“이미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지도 10년은 넘었거든요. 무엇보다 풋 옵션 투자로 돈을 버는 건 썩 기분 좋은 일도 아닙니다. 거기다 저의 풋 옵션은 아직 계좌에 있는 상태로, 정산금이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1,600억 달러 정도를 정산해 줘야 할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해 버렸다.

AIG와 시티은행은 죽는소리만 하고 있다. 각각 400억 달러 정도씩 유재원에게 갖다 바쳐야 하는데, 이 돈을 지금 빼게 되면 망한다는 소리만 하고 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AIG와 시티은행도 부도 상태나 다름이 없다. 원래 기업의 부도라는 것은 갚아야 할 채권을 갚지 못할 상황을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만기일인 10월 31일, 유재원에게 400억 달러가량의 돈을 정산하지 못한 것 자체가 AIG와 시티은행도 부도가 났다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AIG와 시티은행의 부도는 리먼브라더스의 부도와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을 만드는 일이었다.

리먼브라더스는 그래도 원금 손실에 대한 인식이 있는 투자자들이 모인 것이었다. CDO와 CDO 관련 파생 상품 따위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서 입은 손실에 대한 후폭풍도 투자자들이 쪽박을 차는 정도에서 끝이다.

반면 보험사와 은행은 민간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가 달랐다. ID 그룹도 은행에 돈을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실했던 시티은행이었으니 여기를 주거래 은행으로 삼고 있던 기업들도 많았다.

그런 시티은행이 무너지면 기업들도 무너지는 것이었다. AIG 역시 마찬가지다. 부도가 나면 엄청난 숫자의 보험 가입자까지도 파산한다.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 비용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은행보다 더 큰 파문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ID 인베스트먼트 계좌에는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받아낼 권리만 있지, 현금은 아직 한 푼도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에 아시다시피 이번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나, 텔레비전으로 보고 계시는 분들이나 부정적인 영향을 다들 받고 계실 테니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장님도 영향을 받으셨다고요?”

“그럼요. 저는 많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IT 제품의 특성상 경기에 따라 매출액이 크게 좌우되고 있습니다. 올겨울부터 매출 하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죠.”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펴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에 따라 ID 그룹의 매출도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단적으로 스마트폰의 선주문량은 11월 들어서 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콜 옵션으로 이와 같은 돈을 벌었다면 즐거울까요?”

콜 옵션으로 2,400억 달러를 벌었다?

그것은 지금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다. 다우존스와 나스닥은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오르고 있을 테고, 집값 역시 자고 일어나면 2배씩 뛰고 있어야만 지금과 비슷한 수익률이 나올 것이다.

“아닙니까?”

코난이 그런 상황을 상상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혀 아닙니다.”

그런 코난에게 유재원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아니라고요?”

“예. 주가가 치솟고 집값이 치솟으면 모두가 좋을 것 같지만, 그런 상황에서 더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죠. 집 없이 세를 들어 사는 분들입니다. 또한, 소득 수준이 낮은 저소득층에겐 지금보다 더 치명적일 겁니다.”

양극화는 클린턴 대통령 때부터 미국의 문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유재원 때문에 IMF가 주장했던 고용유연화 정책이 폐기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은 천만다행이도 88만원 세대 같은 단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한국도 완전히 유토피아는 아니어서 고용과 소득 불균형 문제는 심각했지만, 미국처럼은 아니었다.

여기에 덤으로 한국과 차원이 다른 의료 비용이 미국 사람들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그러니 콜옵션으로 이와 같은 돈을 벌어 들이는 상황이었다면, 집값과 월세도 폭등해서 중산층 이하 계층은 월 소득의 반을 거주 비용으로 뜯기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주택시장에서 이와 같은 천문학적 금융 소득을 올리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꼭 필요한 3가지 요소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 어떤 산업보다 거대한 시장입니다. 많은 투자가 몰리는 것도 당연하고, 경쟁도 치열하지요. 그런데 서브프라임 대출과 CDO와 같은 악마의 발명품이 만들어지면서 문제가 커졌습니다. 시장을 왜곡하는 커다란 거품이 끼었고,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파국이 벌어졌지요.”

유재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기초 자산으로 둔 파생 상품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인 생각을 강하게 피력했다.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악마의 발명품이라는 말도 거침없이 꺼냈다.

“제 눈에는 이런 식으로 귀결될 게 뻔히 보였는데, 누구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이상했습니다. CDO와 관련 파생 상품에 대해 경고를 확실히 보여드리기 위해 풋 옵션을 걸었던 것인데, 여지없이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더군요.”

미국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유재원이다.

겸양은 미국에선 의미 없는 태도였다. 주류로 올라온 힙합이 돈 자랑을 하는 이유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풋 옵션 대박을 터트린 월 스트리트의 투자자였다면, 선견지명으로 돈을 잔뜩 번 것에 대해 자랑은 기본이었다.

유재원은 어려서 배웠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겸양을 보인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뒤이어 나온 유재원의 말 역시 담백 그 자체였지만,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저에게는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그리고 주택시장의 위기가 하루빨리 진정되는 게 훨씬 더 이익입니다. 그래서 이번 풋 옵션의 수익금 100%를 금융위기 해소에 사용하기로 정했습니다. 그게 이 상황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100%?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수익금 전부를 말입니까? 아니! 그 전에 회장님께는 이번 서브프라임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코난 오브라이언이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렇지만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퍼지는 중이었다. 단순히 대형 은행이나 투자회사의 천문학적 손실로 끝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 영향력이 갔다.

일자리!

양질의 일자리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단적으로 최악의 사고를 치고 파산해 버린 리먼브라더스만 해도 수천 개의 특급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임원들의 연봉은 기본 수백만 달러였고, 성과금으로 억 단위를 받았다. 단순 사무를 보는 일반 직원들이라고 해도 1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이었다.

그런 일자리가 단숨에 사라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리먼브라더스와 연계해 사업을 진행했던 기업들도 많았다. 투자금을 빌려다가 사업을 진행했는데, 투자금이 끊기면서 엎어진 업체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게 쌓이면서 일자리 관련 지수들이 폭락 중이다.

주택시장 붕괴가 실물경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번 위기의 근본은 바로 주택시장에 있습니다.”

유재원은 그에 대한 해법을 문제의 원인인 주택시장이라 판단했다.

최고 4조 달러 규모로 불어났던 미국의 주택시장이 지금은 3조 달러 초반대로 폭락했다는 게 정설이다. 대충 고점에서 25% 정도 폭락한 것인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주택시장의 폭락이 금융권에 충격을 주고, 그게 최종적으로 민간 시장에 영향을 주면서, 다시 주택시장의 폭락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악순환이다.

이를 단번에 끊어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저는 이번에 거둔 풋 옵션 수익 전액을 MBS 매입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객석에 자리한 방청객 중 일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재원이라는 이름값치고는 너무도 간단한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MBS라는 건 주택담보대출 채권이다.

“그리고 강력한 필터링을 통해 이자율과 대출 상환 계획을 재조정해서 건실한 가정이 금융위기로 해체되는 걸 막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방청객은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2,400억 달러에 달하는 모두를 말입니까?”

“네! 이미 리먼브라더스가 보유했던 주택담보대출 채권은 모두 인수한 상태이고, AIG와 시티은행과도 협상 중에 있습니다.”

유재원의 큰 그림이 하나 공개되었다.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현금으로 ID 그룹의 당좌 계좌에 가져올 수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긁어올 만한 자산은 무분별하게 남발된 주택담보 채권뿐이었다. 그렇게 가져온 주택담보 채권을 가지고 마진 콜을 일으킨다면, 불량한 은행들과 동급이 된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주택시장의 큰손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개인 정보를 속이고 빌렸다거나, 투기 목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이용한 이들에겐 해당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신용평가사들이 주택담보 채권의 신용도를 조작해 금융시장에 유통한 탓에 지금의 혼란이 더욱 커졌습니다만, 우리 ID 그룹은 자체적인 기술을 통해 이를 가려낼 방법이 있습니다.”

2,400억 달러 모두를 주택담보 채권 인수에 쓰겠다는 말은 그야말로 유재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였다.

동시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투나잇 쇼를 지켜보던 전문가들도 무릎을 탁 쳤다. 가능성이 있는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주택시장의 규모가 줄어든 만큼 주택담보 채권의 실질 가치도 폭락했는데, 덕분에 현시점에 이르러 서브프라임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조 달러 초반으로 판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재원의 풋 옵션 수익금인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면 주택 대출금의 1/10이 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 금액이면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있던 주택시장 붕괴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가능합니까? 그…… 필터링 말입니다. 말만 들어도 엄청나게 힘들 것 같은데요.”

맞다. 필터링 작업의 관건은 신용도가 뒤죽박죽인 주택담보 채권을 정확히 분리해내는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 없이 무작정 채권을 인수하면 유재원도 제2의 리먼브라더스로 전락해 버릴 테니 말이다.

“가능합니다. 우리에겐 인공지능 골드가 있으니까요.”

인공지능 골드!

그것이 유재원이 가진 비장의 한 수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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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유재원이 출연한 코난 오브라이언의 투나잇 쇼는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방송이 끝나자마자 어마어마한 반향이 몰려왔다. 시작은 역시나 인터넷이었고, 다음 날부터는 덩치 큰 것들이 움직였다.

매스컴과 뭉칫돈이었다.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준 투나잇 쇼!

-이것이 미스터 유의 스웨거,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모두 주택담보대출 채권 인수에 사용!

-주택담보 채권 가격 일제히 상승!

이러한 후폭풍 중에서도 제일 구체적이었던 것은 채권 거래 시장에서의 주택담보 채권 가격의 상승이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발발 후 주택담보 채권은 쓰레기 취급으로 가격이 계속 폭락 중이었다. 주식시장은 급격한 하락 후에 급반등이 일어나기도 했고,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아가는 중이었지만, 채권 시장에서 주택담보 채권은 할인에 할인을 거듭해도 쉽게 팔리지 않았다.

특히나 신용평가사의 주택담보 채권 신용도 평가가 엉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이 되었다.

C급은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고, B급은 반의 반토막이 났다. A급은 그나마 반값 혹은 75% 정도를 보전할 수 있었다.

개인이 아닌 이름이 알려진 기업들이 부동산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을 의미하는 S급만 원금과 약간의 프리미엄을 챙겨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풋 옵션 수익금 전액을 주택담보대출 채권 매입에 쓰겠다고 하니, 채권 거래 시장에 단번에 변화가 일어났다.

A급의 가격들이 일제히 상승했고, 거래가 되지 않고, 제3금융권으로 넘어가던 C급도 하나둘씩 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3금융권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는 없는 단어였다.

바로 사채시장을 의미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부도난 채권이 사채시장으로 흘러가서 마피아들과 연관된 추심 업체에 의해 강압과 협박 심지어 폭력까지 동원된 불법 추심이 이뤄진다.

과거에는 부도난 채권들이 헐값에 흘러갔었는데, 이제는 C급까지 그런 취급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의 생방송 이후로 정상화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연방정부,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정상화를 위한 공적 자금 1천억 달러 확정.

-연방정부의 재정 건전성 역대 최고. 금융위기 근원적 사태 해결을 위해 추가 조성도 얼마든지 가능.

-눈먼 지원금 방지를 위해 지원 대상 기업 정밀 조사 중. 경영 투명성 확인된 기업에만 지원할 것.

-연방준비위원회도 긴급 금리 인하. 인하율은 1%p.

유재원의 투나잇 쇼에서 이뤄진 조치를 지원하기 위한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발표되었다.

1천억 달러의 공적 자금! 그리고 연방준비위원회의 1%p에 달하는 금리 인하.

돈을 새로 찍어내서 내는 게 아니라, 그저 연방정부의 금고에서 꺼내는 것만으로도 조성할 수 있는 공적 자금이었다.

미국 경제 호황에 청나라 채권 환수까지 겹치면서 흑자 재정을 몇 년간이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남는 돈으로 국가 부채를 마구 갚지도 않았다. 국가 부채를 상환하는 것에는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다. 부채가 없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뜰히 모은 자금이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한 방에 싸그리 털렸다. 앨 고어로서는 너무도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이 보기에 공적 자금 1천억 달러만 쓰고 이번 위기를 막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굳이 최악의 상황이었던 회귀 전과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는 그야말로 악수에 악수를 두어서 진짜 이렇게 막장이 될 수 있나 생각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여건이 나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공적 자금과 금리 인하 조치들로만 이번 금융위기를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단적으로 투나잇 쇼와 오늘의 연방정부 발표가 있자, 금융 시장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하락만 하던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가격이 신용도 등급에 상관없이 일제히 상승으로 반전했다.

월 스트리트에도 첫눈이 내렸다.

첫눈치고는 많은 양이라서 센트럴파크는 동화 속 겨울 왕국과 같이 변했다. 그렇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겨울의 정경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이 바로 이곳에 자리한 월 스트리트 아니겠는가.

월 스트리트를 주름잡고 있던 웬만한 터줏대감들은 아주 혹독한 겨울을 나는 중이었다. 작년 겨울만 해도 센트럴파크에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은 최소 벤자민 프랭클린의 초상이 들어간 100달러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진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월 스트리트의 호황을 이야기하는 수식어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지면 뉴스의 기사에 실제로 실린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고 하니, 유재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빈센트 그린힐을 타고 ID 인베스트먼트에 흘러들어 왔고, ID 인베스트먼트 직원들 사이에 공감대가 생겨나면서 주변으로 번졌던 식이다.

마치 대박이라는 감탄사가 빠르게 전파되었던 것과 같았다.

하여튼, 강아지들이 100달러씩 물고 다녔던 센트럴파크는 이젠 없다. 겨우 1년 전의 이야기였지만 마치 옛날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던 시절 같았다.

지금 월 스트리트는 살아남기 위한 혹독한 경쟁이 펼쳐지는 정글이었다.

감원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나마 그냥 잘리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금융감독위원회, 증권거래위원회 등등의 금융권의 준사법 기관들이 총출동되어서 월 스트리트의 금융기관을 조사했다.

가장 크게 털리는 곳은 신용평가회사였다.

리먼브라더스의 뇌물을 받고 CDO의 신용도를 조작한 정황이 너무도 명백한 탓에, 경영진과 실무진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다음으로 무분별한 대출을 남발했던 은행과 투자회사들이었다.

여기에 꽁꽁 얼어붙은 투자 심리는 금융 기업의 실적 하락을 가속화했다.

금융 기업들이 보유했던 비즈니스 모델이 죄다 박살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실적이 좋게 나오는 게 이상했다.

유일한 예외는 ID 인베스트먼트였다.

CDO 풋 옵션 하나만으로 천문학적 수익을 올렸던 ID 인베스트먼트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값이 오르는 것들이 있으니, 금과 같은 귀금속, 석유, 석탄 등의 자원 그리고 식량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는 일찌감치 이러한 분야에 대거 투자를 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중이었다. 올해 초 ID 인베스트먼트에서 가입도 쉽고 탈퇴도 간편한 기본 펀드 상품에 가입한 사람이라도 30%가 넘는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다.

가입과 탈퇴가 쉬운 만큼, 수익금의 정산 비중도 낮은 상품이었다. 그렇기에 10월까지만 해도 수익률은 10% 초반이었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금값과 석유 가격이 폭등하여 30%가 넘는 이자를 정산받을 수 있게 되었다.

월 스트리트에서 독야청청이라는 말은 오직 ID 인베스트먼트에게만 허용된 단어였다.

그렇기에 빈센트 그린힐은 당황했고 분노가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걸 우리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 아니. 며칠 전 투나잇 쇼에서 유 회장님이 직접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모두 주택담보 채권 매입에 쓰시겠다고 말이죠. 그날 이후로 C급 MBS도 가격이 폭등 중입니다.”

빈센트 그린힐의 물음에 당황한 듯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시티은행의 CEO인 마이클 암스트롱이었다.

센트럴파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ID 인베스트먼트 빌딩 최상층에 자리한 빈센트 그린힐의 집무실까지 직접 찾아와서 이뤄진 미팅이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되는 사안은 바로 풋 옵션 정산이었다.

406억 달러에 달하는 풋 옵션 정산금은 시티은행의 CEO인 마이클 암스트롱을 ID 인베스트먼트의 안방까지 불러올 만큼 막대한 자금이었다. 더욱이 406억 달러를 현금으로 받아 가는 게 아니라, 폭탄과도 같은 주택담보대출 채권으로 받아 간다고 하니 시티은행으로서는 너무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시티은행은 본인들이 보유한 MBS 중에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들로만 406억 달러어치를 정리해 가져왔다.

빈센트 그린힐은 시티은행이 정산금 대신 가져온 MBS를 보고 실망을 넘어 분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유 회장님께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매입을 명하신 건 대의를 위해서였습니다. 금융위기가 한시바삐 해결되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귀사는 유 회장님의 선의를 이런 식으로 후려치는 겁니까?”

문제는 시티은행이 가져온 주택담보 채권의 수준이었다.

확실한 신용도가 있는 S클래스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전체의 30% 정도 되는 A클래스라도 신용도 조작 의혹이 있는 신용평가사가 평가한 것이었고, 60% 정도가 되는 대부분은 B클래스였다. C클래스도 10%나 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채권의 평가 가격이었다.

전체 액면가의 총합은 450억 달러. 시티은행이 유재원에게 지급해야 할 돈은 406억 달러였으니, 10% 정도 더 준 것이다.

“그렇기에 저는 이 제안서를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빈센트 그린힐이 사납게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계산법이었다. B클래스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할인율은 최소 30%였고 많으면 50%에 이르기도 했다. 부도율이 너무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막 주택담보대출이 이뤄진 채권이라면, 대출금 상환까지는 무려 20년이나 걸린다.

20년 동안 대출자가 안정적으로 대출금을 갚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 원금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거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티은행의 마이클 암스트롱은 대충 10% 정도의 할인만으로 풋 옵션 정산금과 부실 채권을 동시에 처리하려고 했다.

그야말로 유재원을 호구로 봤다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그것이…… 채권시장에서 모기지 채권의 가격이 상승하고 있고……. 그에 따라 호가도 변했으니 우리가 제시하는 가격도 달라지는 게 당연…….”

생각 이상으로 격한 빈센트 사장의 반응에 마이클 암스트롱은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음에도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협상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후려친 다음에 거기서 최대한의 합의점을 찾아가 보는 것 말이다. 그렇기에 마이클 암스트롱 CEO도 처음부터 무리한 조건에서 시작해 최대한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볼 계획이었다.

“당연하다고요? 이거 아무래도 시티은행은 우리와 협상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AIG보다는 괜찮아서 먼저 만나 보았던 것인데, 실망이 크군요.”

반면 빈센트 그린힐은 가차 없었다.

시티은행이 미국의 대형 은행 중에는 그나마 괜찮은 상황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라 주택담보대출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이자 수익도 폭증할 때인 2005년 시티은행의 순이익이 200억 달러를 넘겼으니 말이다.

주택담보대출의 부실도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 보통은 BOA라고 불리는 은행의 경우에는 부실이 너무 커서 구제 금융을 받지 못하면 도산 위기에 몰린 상태였다. 게다가 신용도가 박살난 은행들은 뱅크 런이 일어나면서 재정 위기가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이었다.

반면 시티은행은 그나마 최악은 아니었다.

제일 위험한 요소는 바로 406억 달러의 정산금이 터져 버린 풋 옵션이었다.

이것만 해결된다면 빠르게 정상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덕분에 월 스트리트의 슈퍼스타가 된 빈센트 그린힐과의 미팅도 제일 빠르게 이뤄진 것이었다. 그래서 방심했던 것일까.

“멀리 배웅하진 않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길게 이야기해 볼 것도 없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제안서를 들고 온 마이클 암스트롱 사장에게 빈센트 그린힐은 축객령을 내렸다.

“빈센트 사장님!”

“그나마 마이클 CEO이기에 이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리먼브라더스의 경영진처럼 횡령이나 배임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마이클 암스트롱은 빈센트 그린힐과의 미팅이 아니라 검찰과 사이 좋게 대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청렴한 덕에 아직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반면 현재 매스컴이나 인터넷에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촉발한 전범으로 취급되는 사람이 바로 리먼브라더스의 최고재무책임자인 에런 폴드였다.

CDO 그리고 CDO를 기초 자산으로 삼은 파생 상품을 대규모로 발행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에런 폴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억울해했다. 그렇지만 조사 중에 밝혀진 여러 가지 행보들로 네티즌들의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코카인, 성매매, 불법 도박 등등.

그야말로 인생 즐겁게 즐긴 흔적들이 대거 쏟아진 것이다. 여기에 막타를 넣은 것이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를 보고 나와서는 엄청난 액수의 풋 옵션을 매수했던 것이었다.

그 규모가 3천만 달러였는데, 에런 폴드가 가진 현금 자산의 80%를 쏟아부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하게도 블랙먼데이가 터지면서 에런 폴드의 풋 옵션도 대박이 나 버렸다. 더욱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렇게 개인 재산으로는 풋 옵션에 거침없이 배팅했으면서, 리먼브라더스의 임원 회의에서는 완전 반대의 소리만 지껄였다는 사실이었다.

에런 폴드는 월 스트리트의 모럴 해저드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마이클 암스트롱이 뒤따랐다.

명백한 범죄자인 에런 폴드와 동급이 되어 버린 마이클 암스트롱은 너무도 억울해했다. 하지만 ID 인베스트먼트와의 주택담보대출 채권 거래가 파투나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나마 질서를 되찾았던 금융시장에 패닉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어마어마한 하락이 시작된 탓이다.

채권 시장이 활발해진 원인은 유재원이 전한 2,40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의 투입 소식 때문이었는데, 시티은행의 마이클 암스트롱 CEO가 욕심을 부려 틀어졌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모멘텀이 사라진 금융시장은 다시금 하락장으로 빠져 버렸다.

같은 시각.

ID 인베스트먼트와 시티은행 사이의 채권 거래가 틀어진 것에 대해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로 시티은행의 마이클과 협상을 했다고? 아무리 도박수로 벌어들인 돈이라고 해도 그렇지, 돈은 돈인데 왜 시궁창에 버리려고 하는가?

프레데릭 테일러 2세셨다.

평소라면 알프레드 집사님을 통해 전화를 걸었을 텐데, 직접 전화를 넣으셨다.

911이후로 크게 쇠약해지셨던 프레더릭이었고, 최근에는 병원에 계신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지금도 병원에 계실 텐데, 최근 유재원의 행보가 워낙 충격적이셨던 모양이었다.

“아이고, 시궁창이라뇨.”

말은 매우 거칠었지만, 거기에 담긴 유재원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였다. 그렇기에 유재원도 대충 넘기지 못하고, 계획하고 있던 큰 그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이네요!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보이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건강 잘 챙기시면서 주말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

석유가 용천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땅이 지평선이 보일만큼 가지고 있는 프레더릭이 보기엔 시도때도 없이 디폴트가 터지는 터지는 주택담보대출 채권은 쓰레기처럼 보일 겁니다~ㅇ!

×

황금의 제국“인공지능 골드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신용도를 새로 파악해서 부도율을 최소화할 거예요. A급의 탈을 쓰고 있던 쓰레기 채권의 분류가 끝나면 최소 50%이상의 수익률이 나올 거예요.”

최소가 50%다.

기본은 100%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택담보대출 채권이 만기까지 잘 상환된다면 얻을 수 있는 이자 수익이 원금만큼 되었기 때문이다. 100만 달러를 빌렸다면, 채무자는 20년동안 200만 달러를 나눠 갚아야 했다. 그만큼 장기 대출의 이자율이 높았던 것이다.

-인공지능? 그걸로 신용도 파악이 가능하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네만.

당연하다.

유재원이 이번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수입 대비 소비 금액을 따져보고, 소유한 주택의 위치와 GPS 위치 데이터를 비교하는 등의 구체적인 신용도 평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한다거나, 그림이나 영상을 이해하는 작업에 비해 매우 직관적이고 간결한 작업이었다.

대신 민감한 개인 정보를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에 채권자의 사전 동의는 필수였다.

개인 정보를 얻기 위해 유재원은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제시할 작정이었으니, 바로 원금 상환 거치 기간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연장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을 준비했다.

해당 기간 동안은 원금을 갚지 않고 이자만 낸다.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집안 경제를 운영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정보 활용 동의를 해 주는 절차도 간결하게 구현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영업장을 방문해 복잡한 서류에 사인하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앱을 실행해 전자 서명을 해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채무자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정책이었다. 정책이 발표되면 채무자의 99.999%는 동의해 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시궁창이란 생각은 바뀌지 않는군.

프레더릭은 인공지능 골드를 도입해 신용도를 재평가할 거라는 말에 솔깃했지만, 생각이 바뀌진 않으셨던 모양이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세계 석유 업계에서 엑손모빌과 1위를 다투는 셰브롱의 오너인데, 주택담보대출 채권에 매력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석유 업계 7대 메이저 업체인 셰브롱이었고, 유재원과의 인연이 생긴 다음부터 급성장을 거듭하며 이제는 확고한 2위 업체가 되었다. 예전에는 석유 메이저 업체 부동의 1위인 엑손모빌과 경쟁은 어려웠는데, 이젠 얼마든지 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가능해진 것은 어마어마한 경제적 매장량을 자랑하는 유전지대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셰일 가스, 셰일 오일 개발의 최전선에 있었고, 이르쿠츠크 유전도 엄청났다.

부동산 불패의 신화인 한국 강남의 아파트, 센트럴파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맨해튼의 최고급 맨션, 심지어 매년 수천 킬로그램 단위의 순금이 쏟아져 나오는 금광이라도 유전지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부동산을 소유한 셰브롱의 오너가 프레더릭이었다.

그런 프레더릭에게 부도 위험이 크고, 상환 기간도 너무 긴 주택담보대출 채권이라는 건 그야말로 휴지조각만도 못하게 보일 것이다.

“저는 단순히 채권만을 멍청하게 보유하고 있을 마음은 없어요. 주택 관리나 일상생활에 대한 토털 솔루션까지 제공하는 신규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에요.”

-토털 솔루션이라니?

미국에도 집에 대한 관리부터 경비까지 모두 제공하는 서비스 업체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서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유재원과 같은 슈퍼리치 정도가 되면 그런 업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체적인 조직을 만든다.

“아직 이름을 확실히 정해놓은 건 아닌데요. 일단 ID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고 정해놓긴 했어요.”

기본적으로 금융 서비스에서 시작해서 주택의 자산 관리와 보수, 보안, 각종 편의 서비스까지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체였다.

-흠, 여기서 왕이라도 되고 싶은 게냐?

“왕이라니요.”

유재원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말했지만, 어떻게 보면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리먼브라더스로부터는 이미 주택담보대출 채권을 넘겨받고 있는 중이었고, 그렇게 넘어온 채무자들은 유재원에게 이자와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다.

마치 세금처럼 말이다.

기본적인 세금에 약간의 추가금을 더 낸다면 각종 편의 서비스가 추가되는 식이다.

사업전망은 충분히 있다. 집을 구매해서 실제로 살다 보면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적으로 경비 서비스가 있다.

아직은 페이퍼 플랜 상태였지만, 유재원이 결심하는 순간 북미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업체를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바로 ID 그룹 자체적인 경비팀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재원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회사의 임직원들을 위해 경비 조직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몇십 명 정도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1천 명이 넘어섰다.

아직도 시큐리티팀, 혹은 경비팀이라는 이름이 더 입에 붙어 있지만 결코 ‘팀’ 규모의 조직은 아니었다. 이를 전면적으로 확대해 외부에도 경비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만든다면 아주 훌륭한 경비 업체가 된다.

여기에 ID 그룹이 자랑하는 스마트 테크놀로지가 결합되면 다른 경비 업체들은 따라 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바로 동영상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스마트 CCTV와 긴급 출동 경비 서비스의 결합이었으니 말이다.

CCTV는 ID 일렉트로닉스의 훌륭한 효자 상품이었다.

피처폰 시절부터 CCD 기술과 영상 처리 기술을 갈고 닦은 기업이 ID 그룹이었고, 이는 스마트폰 시대에 오면서 극대화가 되었다. CCTV의 수요는 처음엔 경찰과 같은 공적 영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기업과 중산층에도 널리 퍼졌다.

1세대 CCTV는 단지 특정 화면을 비추는 것에서 끝났고, 더 나아가 봐야 아날로그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하는 정도에서 끝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디지털 리코딩으로 화질 손실이 거의 없으면서도 다채널을 동시에 녹화하고, 이를 웹 서버를 이용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전달받았다. 여기에 움직이는 동영상을 해석하는 스마트 기능이 더해지는 것으로 이미 경쟁사를 압도했다.

움직임을 파악하고 당직자에게 알람이 가는 것만으로도 경비 효율이 대폭 상승했다. 고객 만족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혁신이란 것은 끝이 없었다.

인공지능 골드는 물과 같이 정해진 형태가 없는 녀석이었다. 학습 기능을 통해 평상시의 모습을 인지하고 있다가, 달라진 점을 캐치해서 보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침입자가 발생한 경우뿐만이 아니라, 안전사고까지도 감지는 물론 화재 예방도 가능해진다.

여기에 긴급 출동 경비 서비스까지 결합되면 그야말로 훌륭한 주택 경비 서비스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죠. ID 그룹은 이제 전기도 공급하니까요. 기존의 통신과 방송, 인터넷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입이 아플 정도네요.”

유재원은 ID 그룹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줄줄 읊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자네 회사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무서운 이야기로군.

이쯤 되자 프레더릭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주택담보채권 매입이 단순한 치기가 아니라 거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계획이 현실성이 없는가?

아니다.

실현만 된다면 파괴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외손녀사위의 능력은 충분히 실행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다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들이 이 녀석의 손에서 다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90년대만 해도 상상 속에나 존재했던 스마트폰부터, 영화 속에나 등장할 인공지능도 만들어냈고, 최근에는 토륨 원자로까지 실용화해 버렸다.

외골수 천재들처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사업 능력이 부족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토륨 원자로가 대표적이었다. 핵분열 발전 분야에서 엄청난 혁신을 이뤄내긴 했는데, 그렇다고 기존 업체를 압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엄청난 이해관계를 뚫어야 겨우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정작 상용화를 시킨 본인은 그걸 모르는 눈치인지라 당황했고, 옆에서 보기에 너무 답답해서 힌트를 조금 주었다.

물론 프레더릭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나중에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점을 파악하자마자 바로 수정하더니, 본인의 존재감과 국제 정세를 이용해 북한에 팔아치웠다.

북한이란 철의 장막 속 나라에 토륨 원자로가 팔리고 나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중국이 10기를 동시에 주문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3+3기를 샀다. 원자력 발전소를 우유나 맥주처럼 +1이라는 이벤트로 팔아치우는 것에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효과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이벤트가 끝났음에도 토륨 원자로의 판매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세계의 전력 수요는 날이 갈수록 폭증했고, 핵폐기물 문제가 없는 토륨 원자로는 확실한 대안이었으니 말이다.

이번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역시나 유재원에겐 기회였다는 걸 프레더릭은 인정했다.

-흐음, 문뜩 내 나이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군.

“네? 지금도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프레더릭은 마음 같아선 유재원이 이룰 궁극의 결과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ID 그룹이 10년, 20년 뒤에는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10년을 더 버티는 것도 이제는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한 자네가 자기 일을 잘하는 건 알겠지만, 티파니도 잘 챙기게.

“당연하죠.”

셰브롱의 후계 레이스 역시 유재원이 놓치지 않고 있는 문제였다.

북한으로부터 얻은 자원 탐사권은 언제든 행사할 수 있는 단계였으니 말이다. 남포에 건설 중인 북한의 토륨 원자로는 기초 공사가 진작에 끝났고, 원자로 설치와 대형 변압기, 송전 설비를 동시에 설치 중이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었기에 내년 이맘때쯤이면, 북한이 금강 1, 2호기라 명명한 토륨 원자로도 가동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자원 탐사권의 경우 공사가 끝난 다음이 아니라, 원자로 건설에 들어가면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 과거 T&U 리서치 출신의 인력들이 가서 기초 조사 중이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아직 미뤄진 상태였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로 인해서 셰브롱도 보수적인 경영 정책으로 전환된 상태였던 탓이다. 유재원도 서브프라임 때문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더욱이 북한 자원 탐사에는 아주 특별한 방법을 쓰려고 했기에, 사전 조율 작업도 필요했다.

그렇지만 프레더릭이 지적하는 건 조금 다른 사안이었다.

-2세 생각도 하란 말일세. 티파니의 나이도 생각해야지.

“아, 네!”

부모님이 손자 이야기를 꺼낼 때는 많았다.

최근에는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때문에 뜸해지긴 했지만, 올해 초부터는 그 빈도수가 상당히 높아진 상태다. 그런데 프레더릭이 아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이쪽으로는 둔한 유재원이라도 프레더릭의 신상에 뭔가 변화가 왔다는 것을 감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같은 것에는 놀라울 만큼 세세한 계획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의 가족 계획은 부족했던 유재원이다.

프레더릭과 전화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아주 신중하게 따져보기 시작했다.

며칠 후.

-ID 인베스트먼트, 리먼브라더스의 MBS 물량 중 95% 인수!

-액면가 3천억 달러 규모!

-할인율 40% 선, 일각에서는 특혜라는 지적.

-AIG, 최종 타결 초읽기.

-잘못된 협상 전략으로 후순위로 밀린 시티은행.

-시티은행 이사회와 주요 주주들. 마이클 CEO에 불만 폭주.

풋 옵션 수익금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전액을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인수로 쓰겠다는 유재원의 호언장담은 현실화되었다.

그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리먼브라더스의 채권단은 골칫덩이 MBS를 유재원에게 모두 밀어주는 대신, S급 담보 채권과 환금성이 그나마 있는 실물 부동산만 가져가는 것에 합의했다.

대신 유재원은 이자나 원금 상환에 이미 펑크가 나 버린 정크 등급 채권부터 A클래스 채권까지 모두 갖기로 했다. 액면가는 3천억 달러가 넘었지만, 실제 가치가 1,600억 달러에는 모자랄 거라는 것이 월 스트리트의 평가였다.

AIG로부터도 리먼브라더스와 비슷한 할인율로 평가된 채권이 인수되었다. 액면가로는 600억 달러에 조금 모자랐지만, 406억 달러 가치는 확실히 되는 물량이다.

빈센트 그린힐에게 밉보인 시티은행만 뒤로 밀린 상태였지만, 협상이 아예 파탄이 난 건 아니었다.

마이클 CEO 입장에서는 기왕 엇나가 버린 것, 아예 대놓고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판을 깨 버리고 싶어도 연방정부는 공적 자금 집행을 투명성이 확보된 다음에 하겠다고 못을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회귀 전이었다면 공포 전략으로 일관하는 월 스트리트에 밀려 조건 없이 집행되었을 자금이었지만, 지금은 ID 인베스트먼트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게다가 연방정부의 움직임과 논조를 맞추는 언론도 있어서 월 스트리트의 벼랑 끝 전술이 먹혀들지 않았다.

-유재원 회장, ID 그룹의 새로운 계열사, ID 토털 리빙 솔루션 발표!

-주택담보대출 채권 관리 업무 전담과 함께 쾌적한 주거환경을 위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업체!

그런 와중에 프레더릭과 지인들에게만 알려졌던 ID 토털 솔루션이 런칭되었다.

자본금 규모만 2,400억 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모기지 업체였지만, 단순한 금융 업무뿐만이 아니라 시큐리티부터 에너지, 통신, 방송 등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해결책을 제공하는 라이프 케어 업체라는 확실한 비전이 제시된 기업이었다.

엄청난 비전이었지만, 당장은 금융 업무가 대부분이었기에 필요한 인력은 ID 인베스트먼트에서 대부분 수혈되었다. 그렇기에 ID 토털 솔루션의 본사 역시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에 들어섰다.

제대로 조직이 갖춰지기까지는 빈센트 그린힐이 사장을 맡기로 했다. 그러면서 신규 고용 공고도 냈는데, 한파가 몰아치는 월 스트리트였기에 능력 넘치는 인재들이 구직에 몰리면서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재원의 경우에는 ID 토털 솔루션의 오너로서 오직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주택담보대출 채권 신용도 평가 작업이었다.

-MBS 신용도 평가 작업을 시작합니다.

골드의 메시지와 함께 유재원의 모니터에 뜬 모니터링 프로그램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장 먼저 클라우드 센터의 전력 소모율이 치솟았다,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뜬 MW 단위의 숫자가 무섭게 오르더니 순식간에 GW 단위로 바뀌었다. 그에 맞춰 전체 연산력도 하늘을 뚫을 듯 튀어 올랐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리빙 솔루션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한데,

사실은 우리 나라들의 주택관리 업체들이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서비스입니다. 경비부터 청소, 부서진 곳 수리도 하고. 여기에 전기와 인터넷, 케이블방송도 패키지로 묶어 공급할 수 있고.... 전자제품 렌탈도 하고...

만에 하나 일자리를 잃어서 대출금 갚기가 어렵다싶으면, 일자리 알선까지 해주는 거죠.

그야말로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온갖 서비스는 다해준다고 보시면 됩니다!

금융부분도 단순한 주택담보대출뿐만이 아니라, 학자금대출이나 사업자금 대출까지 이어질 거고요...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는 이름이 절대 과분한 건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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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레오날드 맥더글라스에게 2006년은 악몽과도 같은 해였다.

시작은 좋았다.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주도 내슈빌에서 배관공으로 살아왔던 그가 처음으로 내 집 마련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2층짜리 집이었고, 차고와 잔디로 덮인 앞마당과 뒤뜰이 있는 주택이었다. 24만 달러나 되는 가격을 자랑했다.

지금도 집값을 생각하면 억울했다. 몇 년 전부터 이 집을 살 거라고 눈독을 들인 상태였고, 그때의 가격은 15만 달러도 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깡촌인 테네시주도 부동산 폭발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격이 무럭무럭 오르더니 레오날드 씨가 집을 살 땐 24만 달러나 줘야 했다.

24만 달러나 주고 샀을 땐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더 늦게 사면 집값이 더 올라서 후회할 거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집을 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4만 달러의 대금 중에 반인 12만 달러는 모아놓았던 돈으로 냈고, 나머지 12달러만 10년짜리 주택담보대출을 받아서 갚기로 했다.

한 달에 1천2백 달러씩, 10년을 내야 했다.

원금 상환이 1천 달러이고, 이자가 2백 달러나 된다. 배관공은 어디 커다란 기업에 소속된 정규직도 아니었고, 자그마한 자영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프라임 모기지론이 아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돈을 빌려야 했던 탓이다.

그렇지만 내 가족의 집이 생겼고, 아이들도 이제야 각자 방이 생겨서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다 난리가 난 건 여름이 막 넘어서였다.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위기설이 막 퍼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월 스트리트의 대형 금융기업이 망하든 말든, 테네시주에 살고 있는 레오날드 씨는 본인의 삶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이었다.

레오날드 씨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은 곳은 테네시주의 자그마한 로컬 은행이었다. 처음 사회에 나와 직장을 잡고 월급을 받을 때 만들었던 계좌를 지금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로컬 은행은 본인들이 대출하고 받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월 스트리트의 대형 투자회사에 되팔았다.

매각한 가격은 13만 달러 정도였다.

만기까지 기다리면 14만4천 달러를 받겠지만, 10년 뒤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는 13만 달러에 파는 게 은행에는 이익이었으니 말이다.

리먼브라더스도 만기까지 기다리면 1만4천 달러의 이익이 생기는 것이니 괜찮은 거래였다. 하지만 레오날드 씨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구입한 리먼브라더스 역시 만기까지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오날드 씨와 비슷한 조건으로 발행된 여러 개의 채권들을 결합한 후 조각내서 CDO를 만들어 팔았다. 그렇게 발행된 CDO의 액수는 100만 달러를 훌쩍 넘겼다. 마치 중간 유통업자를 거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는 한국의 농작물 시장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월 스트리트에서 어떤 장난을 치든 레오날드 씨는 성실하게 매달 내야 할 대출 상환금을 충실하게 갚았다.

그런데 리먼브라더스가 부도가 나면서 그 여파가 테네시주의 레오날드 씨에게도 닥친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마진 콜 요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은 날이 지속되었다.

대출금을 한 번에 갚으라는 마진 콜이 들어오면 레오날드 씨는 버틸 수가 없었다. 배관공의 일은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일이지,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최근처럼 경기가 나빠지면, 사람들은 불편해도 참아 버리지 사소한 고장에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출장 서비스는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비싼 나라가 미국이었다. 인건비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고치는 DIY 시장이 크게 발달한 나라가 미국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리먼브라더스가 진짜 파산해 버리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랫동안 거래했던 주 은행까지도 망해 버려서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유재원이란 이름이 들려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레오날드 씨도 몇 번 들어봤던 이름이었다.

작년부터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첫째 딸이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게 유재원이 만들었다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었다.

무슨 휴대폰 한 대가 거의 1천 달러에 달하는 것인지.

첫딸의 대학 입학 기념, 생일 선물로 스마트폰을 살 때, 속으로 욕을 열심히 퍼부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언락폰 대신에 보조금이 나오는 약정폰을 샀던 기억도 생생했다. 그래도 기기는 괜찮아 보였다.

결국 레오날드 씨의 가족들은 본인 포함해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공대로 진학한 딸과 긴밀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스마트폰은 필수였다. 특히 사진과 동영상도 빠르게 전달되는 ID톡이란 메신저는 신세계였다.

그렇게 레오날드 씨에게 욕이나 먹었던 유재원이 이들 가족과 한층 더 가까워진 일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니.”

ID 토털 리빙 솔루션의 출범이었다.

프라임이든 서브프라임이든 리먼브라더스와 AIG, 시티은행의 주택담보 채권을 모조리 인수해 설립된 초대형 모기지 기업이었다. 레오날드 씨도 본인의 채권이 ID 토털 리빙 솔루션에 인수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는 앱을 받아 설치해 가입 후 개인 정보 제공 동의를 한다면 대출금 상환에 거치 기간을 준다는 소식도 받았다.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희소식이었다.

마진 콜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거치 기간 연장이라니. 한 달에 1,200달러를 갚는 것과 200달러를 내는 것에 부담감 차이는 엄청났다.

기본 3개월이고, 개인의 사정과 신용도에 따라 최대 1년까지 늘려 준다니, 앱을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는 기업은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개인 사업자 등록?”

레오날드 씨는 앱을 구석구석 살펴보다가 흥미가 생기는 메뉴를 발견했다.

“이거 회사 이름을 괜히 주방용품 회사처럼 지은 게 아닌 모양인데?”

사실 레오날드 씨는 리빙 솔루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친근함을 느꼈다. 배관공이 출동할 일은 보통 주방 하수구가 막혔을 때였으니 말이다.

왜 이런 메뉴가 앱 속에 있나 봤더니, 놀라웠다.

아주 소정의 금액만 내면 전기, 목공, 배관 등등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출장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 사업자 등록라는 건 그러한 요청을 받았을 때 출동할 사업자를 등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앱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중개를 해 준다는 말이군.”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레오날드 씨였지만, IT에 문외한이었던 건 아니었다. 컴퓨터는 예전부터 썼던 물건이었고, 안드로이드 모바일 운영체제도 직관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토털 리빙 솔루션이란 앱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 볼까?”

가뜩이나 출동 횟수가 확 줄어든 상황이다. 이 조그만 앱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등록은 무료라고 하고, 수수료도 당분간은 무료라고 하니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커지는 레오날드 씨였다.

“해 보자.”

마음이 움직이자 행동은 빨랐다.

해 볼까라는 마음이 해 보자로 바뀌자, 그의 몸은 바람같이 움직였다. 다만 사업자 등록을 하는 데 필요한 서류가 제법 있었다.

사업자 번호, 성범죄 이력 증명서와 거주지와 출장 가능 지역 설정, 그리고 정산금을 받을 계좌 등록 등등.

서류 처리를 하는 데만 하루가 다 걸렸다. 그렇지만 그날 하루 레오날드 씨의 배관공 기술을 찾는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에,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류를 다 넣고 하루를 더 기다리자 승인 알람이 왔다.

과연 토털 리빙 솔루션으로도 콜이 올까 궁금해지는 레오날드 씨였다.

“한 달에 하나라도 오면 좋겠네.”

소박한 바람이기도 했다.

토털 리빙 솔루션 가입자들 중에 내슈빌 사람들이 배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앱을 켜고 요청을 해야만 레오날드 씨에게까지 연결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서 며칠이 지났다.

놀랍게도 레오날드 씨는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이 뚝 사라졌다. 등록한 첫날에는 한 번의 알람도 없었지만, 다음 날에는 하나가 왔고, 그다음 날부터는 복수의 알람이 오더니, 이젠 예약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관은 늘 트러블이 생기는 물건이지만, 주머니 사정이 나빠서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토털 리빙 솔루션을 설치하고서, 20달러만 내면 주택 관리에 대한 통합적인 솔루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불렀는데, 진짜로 해당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 출동했다. 성공적으로 솔루션을 제공받은 이들은 인터넷과 앱스토어에 후기를 남겼고, 그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들이 폭증했다.

다만 한 달 내에 동일한 관리 서비스를 2번 이상 신청한 경우 무료에서 유료로 바뀌고, 요금도 할증이 붙는 방식이다.

반면 레오날드 씨는 일거리가 많아졌다는 것, 정산 방법이 달라졌다는 것 빼곤 달라진 게 없었다.

예전엔 수리를 마치고 나면 바로 돈을 받았지만, 지금은 토털 솔루션 앱으로 사인을 받으면 끝이다.

그러면 다음 날, 계좌에 정산금이 꽂혔다. 까딱했으면 잔고가 바닥났을 레오날드 씨의 계좌는 어느새 수천 달러의 돈이 쌓였다.

토털 리빙 솔루션의 힘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레오날드 맥더글라스 님의 신용도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C등급에서 B등급으로 상향되었습니다.

-등급 상향에 따라 이자율도 하향 조정됩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용도 재평가를 한다고 하더니, 레오날드 씨의 신용도도 현실에 맞춰졌다. 매월 내야 했던 이자만 200달러였는데, 160달러로 20%나 경감되었다.

“세상에나!”

리먼브라더스가 터졌을 때만 해도, 까딱 잘못했으면 애써 샀던 집이 경매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위기를 넘기는 건 물론이고, 이자까지 경감되었다. 여기에 토털 리빙 솔루션 앱을 통한 안정적인 수입까지 생겼으니, 그야말로 대반전이었다.

레오날드 씨의 행운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토털 리빙 솔루션의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내슈빌에도 배관공으로 등록되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다. 인구가 60만 정도인 도시였으니, 배관공도 수백 명은 있었다. 이들 중엔 레오날드처럼 토털 리빙 솔루션에 본인의 모기지 채권이 인수되어 가입한 사람도 있었고, 나중에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뒤늦게 가입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들 중 제일 먼저 가입한 레오날드는 더 바빠지고 있었다.

최초로 가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좋아요 숫자와 리뷰 숫자였다. 토털 리빙 솔루션은 서비스를 받은 이들이 결과물에 대해 추천을 남길 수 있었다. 간단하게는 검지손가락이 척 치켜든 아이콘을 누를 수 있고, 아니면 사진과 함께 긴 리뷰도 남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배관공을 찾을 때, 기왕이면 좋아요 숫자가 더 많은 레오날드를 선택했다.

“유재원 만세다!”

기어코 레오날드 씨의 입에서 만세가 터졌다.

-토털 리빙 솔루션의 가입자가 1천만을 넘겼습니다.

-개인 사업자들도 빠르게 가입 중입니다.

-반응이 좋습니다. 특히 1호 가입자인 레오날드 씨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신 덕입니다.

모니터 속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의 상반신이 떠 있었고, 각자 발언권을 얻어서 열심히 논의를 진행 중에 있다.

바로 토털 리빙 솔루션의 리빙 솔루션 파트의 핵심 관리자들이었다.

발족과 함께 ID 그룹 중 제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게 된 자회사가 토털 리빙 솔루션이었다. 일단 자본금이 2,400억 달러였고, 실제 회사의 가치는 4천억 달러를 훌쩍 넘는다. 인공지능 골드의 분석을 통해 썩은 사과를 빠르게 가려냈고, 그에 따라 평가 절하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가치도 원래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토털 리빙 솔루션의 제일 큰 사업부는 단연 금융 파트였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금융 파트는 빈센트 그린힐에게 맡겨 버렸다. 대신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 건 리빙 솔루션의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 파트였다.

토털 파이낸싱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리빙 솔루션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플렛폼 사업이 당장은 손해지만, 정착만 된다면 이보다 더 탄탄한 비즈니스 모델은 없다. 동시에 프레더릭이 꿰뚫어 본 것처럼, 열열한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토털 리빙 솔루션으로 제대로 자리만 잡는다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국의 든든한 기초가 완성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무려 황금으로 쌓은 제국이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유재원 사전에는 자만과 방심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혁신에 대한 고삐는 조금도 늦어지지 않았다.

말 많고, 탈 많았던 2006년을 보내고, 겨우 찾아온 2007년 새해 초부터 유재원은 이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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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 골든 타임

“2006년은 어려운 해였습니다. 경제 위기로 인해서 모두가 어둠 속에 잠겨 어디가 앞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대로 혁신은 끝이고, 21세기에 이룩한 모든 기술적, 경제적 성과가 무너지는 것처럼 다들 느끼셨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번 위기의 후유증이 4년은 갈 거라고 하더군요.”

유재원은 담담한 목소리로 2006년을 되짚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의 견해는 다른 모양이네요?”

“네! 저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혁신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또한, 위기가 지나고 나면 더 나은 미래가 우리를 찾을 겁니다.”

그런 유재원의 말에 세트장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유재원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말끔한 차림의 MC도 그렇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전문가 패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통 새해가 되면 유재원은 시무식과 함께 ID 그룹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설정해 주는 게 지금까지의 전통이었다.

90년대부터 작년까지 빠짐없이 해 왔던 행사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시무식에서 했던 유재원의 발언은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비전이라고 하면 두루뭉술하기 일쑤인데, 유재원의 말은 너무도 명확했고 정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작년 2006년도만 해도 금융 위기를 예측하고서 대응책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긴축만 하지 말고, 위기 때 치고 나갈 수 있는 공격적인 방식도 주문했다. 특히 넥스트컴과 타임플렉스, P마켓 등의 인터넷 서비스 업체를 향해 제2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대로 있다간 젊은 세대의 외면으로 사용자층의 분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탓이다.

2006년 초만 해도 의외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적절한 비전이었다.

유재원의 말에 따랐던 ID 인베스트먼트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고, 다른 계열사들도 하락에 대비해서 보험에 들어 놓은 덕에 투자에 대한 손실을 만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익도 크게 챙겼다.

심지어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라는 영화 속에 등장한 CDO 수익률 그래프나 부도율 그래프까지 현실과 일치하면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 중에는 그 그래프를 믿고 배팅을 해서 큰돈을 벌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작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촉발한 인물들 중 하나인 리먼브라더스의 에런 폴드라는 게 뉴스가 되기도 했다.

천만다행이라면 에런 폴드의 재산 전부는 몰수되었다는 사실이다. 배임과 횡령, 분식 회계 등등, 여러 가지 경제 범죄에 대해 1심에서 유죄를 받았고, 그가 회사에서 받았던 성과금도 분식 회계 등으로 과대평가된 성과를 통해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모조리 환수 조치되었다.

보통 경제 사범들은 본인들의 재산을 차명이나 가명, 심지어 해외에 은닉해서 환수가 힘들었는데, 에런 폴드는 본인이 몰락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미국 계좌에 대부분 그대로 있어서 환수가 쉬웠다.

하여튼, 이쯤 되자 방송국들이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유재원이란 아이템으로 대박을 탔던 NBC부터 시작해 ABC와 CBS도 유재원 부르기에 가세했다. 심지어 유재원과는 사이가 나쁜 FOX 뉴스에서도 유재원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미국 공중파는 물론이고 웬만한 케이블 TV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무수하게 쏟아지는 출연 요청에 대해 유재원이 내린 선택은 CNN이었다.

CNN의 창립자인 테드 터너와 유재원은 보통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CNN의 위상도 웬만한 공중파 못지않았다.

“우리가 보건대, 이미 회장님은 답을 찾으신 것 같은데요. 2007년의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CNN의 앤더슨 쿠퍼의 질문에 유재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유재원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앤더슨 쿠퍼의 360도라는 프로그램이었다. CNN의 간판 앵커인 앤더슨 쿠퍼가 진행하는 프라임 타임 시사 프로그램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 8시에 생방송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이다.

“인공지능입니다.”

“음, 인공지능이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타당합니다. 그렇지만 회장님까지도 인공지능이라고 하시면 뭔가 김이 빠지는 느낌인데요? 게다가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도 인공지능을 언급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와! 기억력 좋으신데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인공지능 골드라고 말씀을 드리지요. 골드, 너는 내 의견에 어떻게 생각해?”

유재원은 안주머니에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꺼내서 카메라에 액정화면이 잘 보이도록 들었다. 그러자 검게 꺼져 있던 화면에 금빛 실타래가 빙글빙글 돌면서 인공적인 목소리가 나타났다.

-많은 사람을 돕는 게 저의 기쁨입니다. 무슨 일을 맡기시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는 이제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어제보다 더 성장하는 게 골드의 바탕이 되는 기계학습의 특징이었다. 개인용 비서로서 단숨에 수천만에 달하는 사용자와 만난 인공지능 골드는 그야말로 폭풍 성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고도화가 되었다.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에 영 적응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골드의 지원을 익숙하게 사용했다.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사용자 데이터가 누적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골드의 일상대화 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골드로 간편 예약과 인터넷 결제, 스케줄 관리와 같이 개인 비서로서의 기능을 써보지 않으신 분은 이제 없을 겁니다. 게다가 친구처럼 일상적인 대화도 가능한 골드죠.”

골드에 쌓인 사용자와의 피드백 데이터를 보면 온갖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골드와의 대화는 서버에 전송된다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사용자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골드는 보다 심화된 지능으로 전문적인 영역에 도전할 겁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앤더슨 쿠퍼의 얼굴이 펴졌다.

“최근에는 ID TLS의 모기지 채권 신용도 재평가 작업에 성공하기도 했죠.”

TLS라고 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는데, 토털 리빙 솔루션의 앞머리 글자를 딴 것이었다. 너무도 직관적인 이름이라 회사 이름으로 쓰기에는 좀 문제가 있어서 TLS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정식 명칭은 ID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는 것에서 변함은 없다.

“신용 평가 회사의 채권 평가보고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밝혀진 상태였기에, 완전한 제로 상태에서 새롭게 평가를 해야 했지요. 그 물량이 수천만 건이었습니다. 사람이 맨손으로 하기엔 불가능했지만, 골드는 해냈습니다.”

인공지능이라고만 하면 너무 무난했다.

유재원이 기계학습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투자가 지지부진했던 인공지능에 돈이 몰려들었다.

그리고서 애플사가 최초의 인공지능 비서 시리를 발표하면서 두 번째 충격을 선사했다. 그렇게 애플에 따라잡히나 싶었던 ID 그룹은 다음 해에 골드를 발표하였다.

애플의 인공지능 선도는 1년도 가지 못했다.

골드는 단숨에 개인 비서 시장을 장악했다. 음성 인식률부터가 엄청난 차이가 났고, 자연어 대화는 시리가 따라오지 못할 수준이었다.

다만 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있었다.

수많은 업체가 도전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결과가 나온 곳은 ID 그룹과 애플사뿐이었으니 말이다.

일각에서는 골드나 시리가 완전한 인공지능이 아닌, 그저 정교한 통계의 결과물이라는 폄하도 있었다.

ID 그룹은 그런 반론에 대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결과물을 떡하니 내놓았다. 그것이 ID 토털 리빙 솔루션이 인수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분류였다.

골드가 분류를 끝낸 채권의 신용도는 지금까지 99.999%에 이르는 정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A급이라고 하면 A급이었고, C급이라고 하면 C급이었다. 기존의 신용평가사가 A급이라 판정했던 경우가 실제는 C등급인 사례가 여럿 나와서 반발이 상당했었는데, 실제 조사를 해 보니 부실이 있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P마켓은 두 번째 혁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P마켓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역시 인공지능 골드입니다. 정확하게는 인공지능이 결합된 최신의 물류 시스템입니다.”

넥스트컴을 비롯한 ID 그룹의 인터넷 서비스 중 상당수가 10년 차를 넘어섰다.

P마켓도 그런 업체 중 하나였다. 혁신이 필요한 때였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대적인 투자였다. 기업 간 거래 혹은 기업의 인터넷 판매 대행, 소비자끼리의 중고품 거래를 위한 플랫폼 제공이 그간 P마켓의 모델이었다.

이제는 P마켓이 직접 재고를 두고 직접 판매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북미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초대형 물류창고를 여러 곳 만들었다.

그간 P마켓은 물류창고 없이 중간 플랫폼 역할만 하니 빠르게 바뀌는 고객들의 요구에 즉각 대응할 수가 없었다. 또한, 대형 할인 행사를 하려고 해도, 준비 기간이 길었다. 업체와의 의사소통도 복잡했고, 조율해야 할 이해관계도 많았다.

아마존 같은 강력한 경쟁자들이 급하게 치고 올라오는데,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다는 게 유재원은 물론이고 P마켓 경영진에게도 있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작년 10월부터 대대적인 부지 매입이 시작되었다. 도시 외곽의 빈 땅을 사는 것이지만, 부동산 폭락 때문에 큰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업비 규모 자체는 줄지 않았다.

부동산 매입 부분에서 절약된 자금은 그대로 창고 건설에 투자되었다.

창고의 형태는 조립식 단층이었기에 바닥공사가 끝난 지금 창고의 외형은 모두 완성된 상태다. 대신 창고 하나의 크기는 축구장 10개가 들어갈 만큼 거대했다. 더욱이 단층이긴 해도 천장까지의 높이가 웬만한 건물 3층 높이와 같았다. 각종 물품을 수직으로 높게 적재할 수 있도록 천장 높이를 높였다.

이런 창고가 무려 100개였다. 미국의 주(State)가 51개였으니, 각 주마다 평균 2개의 창고가 지어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인구 밀도는 주마다 달라서, 캘리포니아주나 뉴욕주와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는 4개가 들어서고, 델라웨어주 같은 조그만 주는 아예 들어서지 않기도 했다.

대형창고의 입지는 P마켓에서 주문 물량의 빅데이터를 동원해 최적의 장소를 설정했다. 그렇지만 이런 지리 데이터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자동화였다.

각 물류창고마다 수천 대의 자동화 로봇이 배치되어서 창고에 물건이 입고되는 것부터, 출고되는 것까지 거의 모든 영역을 커버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위해 두 종류의 로봇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니, 스마트 카트와 로봇팔이었다. 스마트 카트는 알아서 움직이는 자율 주행 카트로 입고된 물품을 옮기는 로봇이었다. 로봇팔은 창고 천장의 레일을 타고 움직이는 섬세하고 강력한 팔이었다. 스마트 카트가 가져온 물건을 선반에 옮긴다거나, 주문이 들어오면 선반에서 해당 물품을 꺼내 스마트 카트에 실어주는 역할이다.

힘이 세서 수백 KG의 무게를 옮길 수도 있으면서, 유리잔처럼 깨지기 쉬운 물건도 안전하게 옮길 만큼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스마트 창고가 완전 무인은 아니었다. 택배용 상자에 최종적으로 포장하는 작업은 사람이 해 줘야 했다. 또한, 로봇들이 잘 움직이는지,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나면 사람이 나서서 움직여야 했다.

창고마다 최소 300명이 넘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이것도 최소 숫자였고, P마켓의 가동 상황에 따라 인력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과적으로 P마켓에서만 3만 명에 달하는 신규 고용이 생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P마켓의 스마트 창고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여드리죠.”

유재원은 깔끔하게 촬영된 영상도 준비했다.

생방송이지만 스튜디오 안에 미리 세팅도 다 된 상태였기에, 시청자들은 원본 그대로의 화질로 유재원이 준비한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의 시작은 거대한 물류창고의 전경이었다. 땅에서 찍었다면 그 웅장한 규모를 다 보여주지도 못했을 텐데, 드론 촬영은 이제 개인도 도전해 볼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환경이 되었기에 문제없었다.

창고 지붕의 끝이 지평선과 함께 걸릴 만큼 대단한 규모였다. 물론, 이처럼 거대한 창고가 도시 근처에 들어서도 그다지 비싼 돈이 필요치 않는 미국이 축복받은 땅이었다.

곧이어 화물을 실은 대형 트럭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미국 물류 네트워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트러커였다. 바퀴가 18개씩 달린 초대형 트럭들이 몰려와서 화물을 쏟아냈다.

그것은 화장실 휴지였다. 팔레트에 잔뜩 실린 화장지는 그대로 대형 카트에 얹어졌고, 팔레트 하나를 올린 카트는 스스로 움직여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카트 수십 대가 트럭 옆에서는 화물을 받으려고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카트를 조종하는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어? 저건 뭔가요?”

“스마트 카트입니다. 인공지능 골드를 통해 제어되죠.”

화장지가 잔뜩 실린 카트는 그대로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도 그대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창고 안쪽 제일 깊은 곳 선반에서 대기 중인 카트들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엔 천장 레일을 타고 분주히 오가면서 카트에 실린 화장지를 선반에 차곡차곡 쌓는 로봇팔도 있었다.

“설마 완전 자동화 창고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ID 그룹은 로봇에 의해 100% 가동되는 자동화 창고나 공장을 지을 능력이 있지만, 그걸 만들 계획은 없습니다. 일자리라는 건 중요하니까요. 대신 힘들고 어려운 작업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로봇의 힘을 빌리죠.”

지금 보여지는 로봇팔은 ID 하이테크의 자회사인 보스턴 다이나믹스에서 만들었고, 카트는 실리콘 밸리의 키바라는 업체의 제품이다.

“세상에. 놀랍군요. 그러니까 저렇게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을 모두 골드가 통솔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입니다. 모두 골드가 직접 제어하고 있죠.”

“그런데 화장지만 너무 많이 들이시는 거 아닙니까? 지금 화면으로는 다 세어 볼 수 없을 정도니 P마켓에 화장지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럼요!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화장지는 물론 그 어떤 생필품도 P마켓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 유 회장님 말씀이니 꼭 믿고 있겠습니다.”

앤더슨 앵커나 다른 출연진들에겐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던 모양인지, 유재원의 말을 가볍게 받았다. 하지만 21세기에 어떤 위기가 찾아올지 알고 있는 유재원의 이 다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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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그런데 이게 단순한 시범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실제 창고가 이런 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앤더슨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훤칠한 얼굴, 젊은 나이인데도 벌써 은색으로 센 머리카락, 반짝이는 눈빛 등등, 플러스적 요인이 될 만한 외적 요소 덕분에 단순한 질문에도 날카로운 기세 같은 게 전해졌다.

“음,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증거를 보여드리죠. 지금 현장의 모습입니다.”

유재원은 그러면서 본인의 스마트폰에서 웹브라우저를 열고 특정 주소를 입력했다. 그러자 스마트폰에는 방금 화면으로 나왔던 캘리포니아 스마트 창고 내부의 CCTV 중 하나가 촬영하고 있는 화면이 나타났다.

마침 스튜디오에 세팅된 텔레비전은 ID 일렉트로닉스의 보르도 TV였다. 덕분에 스마트폰의 화면을 와이파이 커넥트 기능으로 간단히 복제해서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방금 영상은 편집이 끝난 녹화 영상이지만, 이건 라이브 영상이죠.”

조금 전 나왔던 영상에선 텅 빈 창고에 화장지를 열심히 채우고 있었다면, 지금은 1/10 정도가 생필품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저급부터 최상급까지 다양한 종류의 화장지가 긴 선반 하나를 가득 채운 상태였고, 다음 선반에는 손 세정제가 가득 채워졌다. 지금은 2L짜리 생수들이 열심히 채워지는 중이었다. 6개가 한 묶음이라 생수 한 덩이가 12Kg의 무게를 자랑했지만, 로봇팔들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선반에 물을 채워 넣었다.

“골드, 저기 294번 로봇팔로 다시 우리에게 인사해 볼래?”

294라는 숫자가 몸통에 크게 써져 있던 로봇팔이 스튜디오로 화면을 보내주고 있는 CCTV와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이었다.

-네, 회장님.

골드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화면 속 로봇팔이 들고 있던 생수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창고 천장의 레일을 타고 움직이며 CCTV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화면 가득히 로봇팔이 들어오는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국식 수화로 ‘안녕하세요’라는 모션까지도 취했다.

“V 자도 해 볼래?”

-이 V는 승리의 V입니다!

로봇팔에는 사람처럼 5개의 손가락도 있었다. 손가락에는 마디도 있어서 정교한 손놀림이 가능했다.

90년대 중반쯤 유재원이 비전으로 제시했던 유비쿼터스가 완성되면서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였다. 그렇지만 앵커이자 MC인 앤더슨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마트 창고를 통한 효과를 고객분들은 아마도 올해 연말에 확실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염두하고 하는 말이었다.

힌트는 이 정도면 충분했기에 유재원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우리 골드의 잠재력은 대규모 로봇 시스템의 제어뿐만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퍼포먼스를 기대할 분야가 있으니, 영상 진단 의학 분야죠.”

영상을 보고 환자의 병이 무엇인지 검사하는 것.

현대에 들어서 크게 성장한 의학 분야였다. 전통의 엑스레이는 물론이고, MRI와 CT 등등, 환자의 몸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가 많아지면서, 환부를 절개하지 않고도 병을 알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환자로부터 찍은 영상을 두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는 문제가 좀 많았다. 영상을 판독하는 의료진의 수준에 따라 편차가 심했기 때문이다.

좋은 의사를 만나면 병을 일찍 포착할 수도 있었고, 반대의 경우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내다가 병을 키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골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재원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며, ID 그룹 전반을 열심히 공부했던 앤더슨 앵커였다. 계열사가 워낙 많고, 하는 일도 많아서 공부의 양이 엄청났지만, 앤더슨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흥미가 생겼으니 말이다.

골드 역시 마찬가지다.

시리를 발표한 애플에 드디어 ID 그룹이 따라잡히는가 싶더니, 골드를 발표함으로써 순식간에 치고 나갔다.

앤더슨이 보기에 시리보다 훨씬 일찍 인공지능 비서를 발표할 수 있었음에도,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시간과 공을 더 들인 것 같았다. 정확한 분석이다. 음성 인식률과 자연어 처리를 위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애플에게 줬다.

대신 사용자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얻어냈다. 앤더슨처럼 골드라면 가능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 있던 건,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전문 분야는 잘못된 판단에 대한 리스크가 일반 작업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만약 초기에 대장암이니 췌장암이니 하는 것들을 진단해 내는 데 성공한다면 대단한 일이지만, 실패한다면 환자의 목숨이 위험해지고, 치료하는 데도 많은 돈이 드니까요.”

유재원은 골드가 본격적으로 영상 진단 의학 분야에서 활동하면 오진의 확률이 크게 낮아질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방대한 사례를 통해 학습을 해야 하긴 했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학습의 알고리즘이었다.

영상 진단 분야에서 이미 검증이 끝난 최고의 알고리즘도 이미 유재원의 머릿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필요한 건 사람들의 신뢰였다. 생명에 관계가 된 일도 얼마든지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있다는 신뢰를 확보해야만, 골드가 영상 의학에도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기의 도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려고 합니다.”

도전이라니.

앤더슨 앵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말은 리허설 땐 없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CNN에서만 10년이 넘게 앵커로 근무했던 전문가였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맞췄다.

“세기의 도전이라니요?”

“바둑입니다. 3년 내에 바둑을 정복해 보이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도전을 보여주려나 싶었던 앤더슨 쿠퍼는 살짝 당황했다.

영상 진단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에 세기의 도전이라고 했으니, 영상 진단에 관한 도전이 나올 줄 알았다.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들의 엑스레이 사진 중에 병을 찾아내는 도전 말이다. 기왕이면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진 의학자들과 팀 대결을 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둑이라니.

“바둑이 뭔지 아시죠? 검은 돌과 흰 돌을 두고 각자의 집을 짓고 누구의 집이 더 큰지 겨루는 보드게임이죠. 단순히 집만 짓는 게 아니라, 상대가 집을 지을 때 방해할 수도, 붕괴시킬 수도 있죠. 더욱이 바둑은 체스와 달리 모든 돌이 똑같습니다. 그렇기에 착수의 종류는 우주의 숫자보다 더 큽니다. 기보 몇 개를 입력해 두는 것으로는 사람의 판단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런 바둑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3년 후, 골드는 세계 랭킹 1위의 바둑 기사에게 도전하겠습니다.”

과거에는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세기의 천재 바둑기사인 이세돌에게 직접 도전했다. 당시 랭킹 1위는 따로 있었지만, 21세기 바둑을 지배한 이세돌의 명성이 알파고와 더 어울린다 생각해서 도전자를 선택했다고 했다.

인간계 최강에게 도전하는 인공지능이라는 타이틀을 위해서 말이다.

이번엔 다르다. 유재원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그야말로 압도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압승이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구현할 능력도 있었다.

“이거, 과거 ID 그룹이 열었던 챌린지를 보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번엔 골드의 도전이죠. 그리고 상금 역시 과거의 챌린지 시리즈에 걸맞게 화끈한 수준으로 걸 생각입니다. 5번기 대국이고, 각 대국마다 1천만 달러의 상금을 걸겠습니다. 그리고 5번기 대국의 최종 승자에게는 1억 달러의 추가 상금이 있을 겁니다.”

“5번기 대국이 뭔가요?”

“3번기까지 내리 이겨 3:0이 되더라도 남은 대국과의 게임 2번을 끝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러면 5판을 내리 이긴다면 1억5천만 달러의 상금을 받게 되는 거군요. 그런데 상대에겐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기본 대국료야 당연히 드려야죠. 각 대국마다 100만 달러씩 책정했습니다.”

“하하! 역시 유 회장님 손이 크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죠. 그런데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한데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확답을 드릴 수 없지요. 하지만, 자신 있습니다.”

늘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유재원이었지만, IT에서만큼은 달랐다.

IT에서 최고의 기업은 언제나 ID 그룹이었고, 그 자신감은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늘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서 100%를 자신하면 큰코다칠 테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더욱이 인공지능 골드의 쓰임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조만간 예약자들께 배송을 시작할 라이트닝 볼트사의 자율주행부터, 인터넷 서비스의 각종 필터링과 보안 프로그램에서도 활약하고 있고, 영상과 이미지 해석 분야에서도 인공지능 골드가 최강의 솔루션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한, 넥스트 뮤직을 비롯한 여러 사용자 맞춤 서비스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최근에는 ID TLS에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신용도 평가 작업도 성공리에 끝냈지요.”

“그렇게 보니까 인공지능 기술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네! 그렇기에 바둑에 대한 도전이 성공한다면 골드가 단순한 분야뿐만 아니라 전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는 이 방송을 보고 계신 시청자 여러분, 더 나아가 세계 시민들께도 분명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도움이 된다니요?”

“골드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께 드리는 배당금이 있기 때문이죠.”

골드의 지능 형성의 핵심은 전 세계 사람들이 생성하는 빅데이터에 있다. 이는 곧 개인 정보였고, 유재원은 개인 정보 사용 동의를 얻으면서 배당을 약속했다.

인공지능 골드를 통해 매출액 중에 10%를 개인 정보 동의를 해 준 사용자들에게 재분배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약속은 실제로 이뤄졌다.

골드가 활동하고 나면서 몇 차례 실시했는데, 아직까지는 미미한 액수였다. N포인트로 제공되었는데, 많아 봐야 50N포인트를 넘기진 못했으니 말이다. 1N포인트가 100원이었으니, 한국 돈으로 오천 원을 넘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ID 그룹의 통합 아이디인 이메일닷컴의 가입자 숫자가 10억 명을 넘은 게 한참 전이었다. 그나마 중국에 정식 서비스를 하지 않아서 10억 명대였지, 중국이 정식으로 문호를 개방했다면 2배인 20억도 거뜬했을 것이다.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에게 골드의 수익금 배당을 한 건 아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서 골드를 활성화하고, 개인 정보 제공 동의와 N페이 가입까지 마친 사람들에게만 골드의 배당금이 지급된다.

현금이 아닌 N포인트 배당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 동의를 했더라도 N페이 계정이 없으면 포인트를 받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의 숫자가 1억 명 정도다. 게다가 배당금도 일률적으로 주는 건 아니었다.

개인 정보 제공에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데이터의 종류가 있다. 단순한 인터넷 검색 기록부터, 가장 가치가 높은 카드 결제 기록과 GPS 기록까지 아주 세세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제공하는 개인 정보가 많을수록 배당금도 상승한다.

“이번 배당은 많이 다를 겁니다.”

“다르다니요?”

“골드가 작년에 크게 활약하면서 배당금의 규모도 커졌거든요.”

2006년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악몽으로 기억될 해였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2006년에 크게 득을 본 이들도 있었다. 운 좋게 풋 옵션을 사 놨다가 로또보다 더 큰 대박을 터트린 사람도 있었고, 운 좋게 폭락을 피해간 사람도 있다.

물론 가장 최고의 성적을 낸 기업은 ID 그룹이었다.

그중에서도 골드의 매출 향상은 엄청났다. ID TLS의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신용도 재평가 작업은 이제껏 골드가 올린 매출 중에서도 가장 컸다.

ID 그룹은 계열사 간 거래에서도 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렇기에 TLS의 채권 신용도 재평가 작업은 인공지능 골드의 모든 권리를 가진 ID 테크놀로지에 정식으로 외주를 주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것도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한 것이 아닌, 건당 수수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계약했다. 1만 달러 이하의 채권이 최소 가격으로 10달러의 수수료가 책정되었고, 채권의 액면가가 커지면 비용도 올라갔다.

평균을 내 보면 채권 가격의 1%가 골드의 재평가 수수료였다.

골드가 평가한 주택담보대출 채권의 총액이 4천억 달러에 이르렀으니. 골드의 매출은 40억 달러였다.

더욱이 골드는 ID TLS의 채권만 평가한 게 아니었다. 빠르게 안정화를 되찾은 ID TLS를 보고 다른 투자회사들도 골드에 의뢰를 넣었던 것이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골드만삭스 같은 대형 금융 기업들이었다.

이런 외부 기업들은 ID TLS만큼 전폭적으로 수용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10억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신용 평가 부분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친 골드였다. 그런데 기존의 인터넷과 스마트폰에서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특히 골드와 애드센스의 결합은 높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비밀 서약 때문에 밝힐 수는 없지만,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발생한 매출액의 크기도 상당했다.

이렇게 해서 2006년의 매출액 총합은 100억 달러를 넘었다.

다른 기업들은 이제야 인공지능을 연구한다는데, ID 그룹은 골드를 완성해서 수익 모델까지 완벽하게 구축한 것이다.

여기서 10%가 배당금이니 10억 달러다.

“5억 달러는 1/n으로, 남은 5억 달러는 기여도에 따라 차등 배분될 예정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인공지능 골드의 배당 요건에 맞는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5천만 명.

유재원이 시뮬레이션을 해 본 결과 최소한으로 동의를 해 준 사람에겐 120N포인트 정도가 돌아가고, 협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에겐 배당금 숫자에 0이 둘 혹은 셋이 더 붙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건 SNS 활동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량의 차이 때문이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지능 향상에 도움이 되는 데이터를 많이 생산한다거나, 신규 사용자가 골드에 가입하도록 영향력이 커지면 배당금도 많아지는 구조였다.

물론 그렇게 특별히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소득 대체율이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2006년도 기준으로 이 정도 규모이니, 10년만 더 지나면 트렌드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신년 특집으로 유재원과의 인터뷰로 꾸며진 앤더슨 쿠퍼의 360도는 역시나 큰 화제가 되었다.

-유재원 회장, 3년 내 바둑 정복 선언!

-상금 규모만 1억5천만 달러에 이르는 세기의 도전 선언!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받은 건 골드의 배당금이 아닌, 바둑이었다.

복잡한 수식이 필요하고, 실제 돌아오는 액수도 작은 골드의 배당금보다는 1억5천만 달러에 이른 상금과 함께, 바둑이라는 기존 컴퓨터로는 정복할 수 없는 보드게임에 도전한다는 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잡아끌었다.

-바둑계 들썩!

-2010년 랭킹 1위를 노려라.

-한중일 바둑 기사들 신경전 치열!

특히 프로 바둑대회가 있는 한중일 나라들의 기사들은 환호했다.

90년대 반짝인기를 끌다가, 21세기에 들어와 시들어지고 있던 바둑계였으니 말이다. 상금의 규모도 규모지만 새로운 도전자의 등장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둑계 사람들 그 누구도 골드와의 대전에서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우리 개인정보와 개인 데이터가 공짜로 줄만한 것들이 아닌데...

첫 단추를 잘못 꿴 다음 너무 멀리와버린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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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띵!

“응? 뭐지?”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이던 새내기 대학생 레이나는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문자 메시지 알람이었다.

보통 이때쯤의 새내기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보통이지만, 레이나는 그대로 기숙사에 남았다. 학비는 집에서 지원도 해주었지만,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했기에 아르바이트에 매진 중이었다.

아직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해서 딱히 연락이 올 사람도 없었다.

-개인 정보 동의에 대한 정산금이 레이나 님의 N페이 계정으로 입금되었습니다.

인공지능 비서 골드의 세팅을 문자 메시지가 오면 자동으로 읽도록 해 두었기에, 스마트폰을 들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 그때 재미 없게 봤던 프로그램에서 말했던 정산금인 모양이네.”

-맞습니다. N페이 포인트의 잔고는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레이나의 말을 골드가 받았다.

재미 없다고 말했던 프로그램은 앤더슨 쿠퍼의 360도였다. 완전 아저씨 취향의 프로그램이고 너무 무거운 주제만 다루는 탓이다. 무엇보다 CNN이라는 채널은 20대 초반 여대생인 레이나에겐 딴 세상에 있는 채널이었다.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녀의 우상인 유재원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봤던 게 전부였다. 물론 재미있진 않았다. 아무리 유재원이라도 포맷 자체가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살려내진 못했다.

대신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는 많았다.

레이나가 120%의 효율로 쓰고 있는 인공지능 골드의 도전부터, P마켓의 대대적인 확장이라든가, 개인 정보 정산금이라든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특히 바둑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역사가 수천 년이라는 것부터 놀라웠다. 건국의 역사가 짧은 미국에는 천 년 단위의 유물이라곤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것들뿐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바둑을 좀 아는 사람들은 죄다 골드가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만 했다. 바둑판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우주의 수보다 크기에 아무리 강력한 컴퓨터로도 감당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부터,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셀 수 없는 대전을 치르며 쌓은 경험과 사람의 직관력을 과연 3년 만에 정복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 등등.

모두가 비관적인 소리만 했다.

물론 반대의 의견도 있다.

인공지능 골드가 이길 거라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레이나도 거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골드에게 배팅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바둑의 ‘ㅂ’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레이나는 앤더슨 쿠퍼의 프로그램에서 바둑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유재원이 바둑을 한국어 명칭 그대로 ‘바둑’이라고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터넷 검색으로도 처음 보았던 보드게임이었다.

모눈종이를 좀 키운 보드 판에 민무늬의 흰 돌과 검은 돌로만 두는 게임이라니. 배워 볼까 하다가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그런 보드게임에 프로 리그가 있고, 국제 대회까지 있다는 건 레이나도 깜짝 놀랐던 사실이었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무척이나 재미있을 이벤트겠지만, 3년 뒤의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먹고 사는 일이 더 중요했다. 특히 이제 겨우 독립에 성공한 대학생인 레이나에겐 부모님의 지원과 아르바이트가 수입원의 전부였다.

작년에는 겨우 80N포인트 정도가 들어와서 저녁 한 끼 간단히 먹은 걸로 끝이었다.

레이나는 바로 책상 위 스마트폰을 들었다. 작년에 구매한 최신상 안드로이드 S6였다. 가속도 센서와 수평 센서 등이 있어서 스마트폰을 들면 알아서 스크린이 켜졌고, 레이나의 얼굴을 확인한 페이스 키가 알아서 잠금을 풀었다.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는 강인한 인상의 털복숭이 중년 남성이 엄지를 척 하니 들고 있었다. 레이나의 아버지였다.

바탕화면을 바꾸고 싶긴 한데, 스마트폰을 사 준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일단 1년간은 그대로 쓸 작정이었다.

첫 화면의 하단부 단축 아이콘 N페이를 실행하면서, 다시 한 번 페이스 키로 본인 인증을 했다. 돈이 오가는 앱이기에 이중 보안인 것이다.

“어? 뭐지?”

N페이의 인증이 되자마자, 잔액이 큼지막하게 떴다.

이제껏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숫자였기에 레이나는 크게 당황했다. 혹시 소수점을 잘못 본 거 아닐까 하고 다시 한 번 봤다. 그렇지만 처음 본 숫자가 정확했다. 소수점 이하를 구분하는 점이 아니라 자릿수를 구분하는 쉼표가 분명했으니 말이다.

-잔액: 334,545N

“33만?”

원래 레이나의 N페이 잔액은 45N포인트였다.

로그인할 때마다 +1N이 되는 신규 인터넷 사이트의 출석 이벤트도 열심히 참가했고, +3N이 나오는 인터넷 설문조사도 열심히 하면서 알뜰살뜰하게 모았던 포인트였다. 이렇게 모은 포인트로 웹소설과 카툰, VOD 등의 유료 콘텐츠를 이용하는 게 레이나의 취미였다.

그런데 갑자기 잔고에 334,500N포인트가 추가된 것이었다.

“설마 해킹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잔고 액수에 레이나는 해킹이라 생각했다.

N페이를 해킹한 해커가 포인트 세탁을 위해서 본인의 계좌를 중간 다리로 이용하다가, 실수로 잔액을 남긴 게 제일 현실적이지 않은가.

레이나는 바로 입출금 내역 보기를 눌렀다. 그러면 입금자 이름에서 단서가 나올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개인 정보 공유 정산금 입금: 334,500N

해커의 흔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입출금 기록에는 떡하니 정산금 입금이라는 항목이 들어와 있었다.

진짜 정상적인 입금이었다.

그렇지만 레아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본인의 개인 정보가 334,500N포인트에 달하는 가치라고 인정되지 않았다. 1N은 한국 돈으로 100원의 가치였고, 미국 돈으로는 10센트였다. 그러니 지금 입금된 금액은 미국 돈으로 3만3천4백 달러였다.

인건비가 조금 쎈 미국이긴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 1년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받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번쩍거리는 광택이 생생히 살아 있는 신상 자동차도 거뜬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레이나는 정산금에 대한 자세한 내역을 알고 싶어졌다. 이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은 기능이라서 어디로 접속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골드, 개인 정보 공유 정산금의 자세한 내역을 알고 싶은데?”

인공지능 비서 골드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저 본인이 알고 싶은 내용을 정확하게 물어보면 그만이다.

-네! 개인 정보 공유 정산금의 자세한 내역을 볼 수 있는 URL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자 화면에 골드가 만든 말풍선이 떴고, 그 안에 URL이 있었다. 그걸 터치하자 웹브라우저가 뜨면서 레이나가 알고 싶은 자료가 드디어 나타났다.

“어? 이게 돈이 되는 일이었어?”

거기엔 +1N이라는 항목들이 수도 없이 있었다.

작년 여름부터 레이나가 ID 클라우드 서버에 열심히 올리던 사진들이었다.

레이나의 취미는 사진 찍기. 그중에서도 동물들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스마트폰으로도 부족해서 중고 DSLR 사진기와 단렌즈 하나를 들고 나가서, 메모리카드 몇 장 분량을 찍고 오는 게 레이나의 취미였다.

그저 많이 찍는 것처럼 확실한 공부는 없다는 말에 하루도 쉬지 않고 찍고 있었다.

개인 정보 정산 문자를 받기 전까지 했던 일도 어제 찍었던 사진을 분류하고 업로드하는 일이었다.

해상도가 높은 DSLR 사진 파일 하나의 용량이 제법 컸다. 그래서 개인용 하드 디스크에 보관하는 건 부담이었다. 대신 ID 클라우드 서버를 요긴하게 쓰고 있는 레이나다.

그림 파일당 용량 제한도 없고, 사진 파일의 경우에는 무제한으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공유도 쉬워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전달하기도 편리했다.

그렇게 작년부터 열심히 업로드를 했던 레이나다.

그렇지만 그녀가 정산금 상위 0.1%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그저 사진 파일 공유를 활성화시켜 놓은 것만이 다는 아니다.

어마어마한 수량도 수량이지만, 사진마다 태그를 열심히 달아 놓은 것도 비결이었다. 사진 파일마다 메타데이터를 넣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레이나는 거기에 열심히 코멘트도 달았다.

고양이 사진이라면, 단순히 고양이라는 명칭뿐만이 아니라 고양이의 종류도 태그에 넣었다. 샴이라든가 아메리칸 숏컷이라 하는 품종도 확실히 구분하여 넣었다.

매우 꼼꼼한 성격인지라, 엄청난 숫자의 사진에도 거의 빠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는 인공지능 골드의 지적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풍부한 데이터에 정확한 라벨링까지 더해지니 해당 분야에서 골드의 분석 능력이 크게 올라갔던 것이다.

사실 기계학습 기반 인공지능의 성장은 무척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새로운 정보는 사람의 손에 의해 일일이 가공되어야 했던 탓이다. 레이나가 했던 작업이 그런 라벨링 작업과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공로를 골드는 빠짐없이 기록 중이었고, 정산도 확실히 치렀다. 다만 딱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게 있다면 세금이었다. 현금으로 바로 치환될 수 있는 핀테크에 대한 과세 법칙은 미국에서도 확정된 게 없었던 탓이다.

대신 확실한 것은 이번에 입금된 334,500N포인트는 레이나가 정당하게 얻은 소득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얼마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우와! 대박!”

레이나가 대박 소리와 함께 펄쩍 뛰었다.

334,500N라면 아르바이트 따위는 당장 때려치우고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니, 지금처럼만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ID 클라우드 서버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부수입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레이나는 이런 행운이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정산 알고리즘이 비밀은 아니었다. 더욱이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레이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취미는 취미대로 하고, 나는 뭔가 더 새로운 걸 찾아보는 거야.”

키포인트는 ‘인공지능 골드의 성장에 얼마만큼 기여를 하는가’라는 사실이었다. 핵심 알고리즘 같은 건 유재원 회장이나 ID 그룹에 고용된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연구진이 보완하고 발전시키고 있을 테니, 본인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현재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그럼, 바둑?”

거기까지 생각에 이른 레이나가 골든 챌린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바로 앞에 있는 컴퓨터로 레이나는 넥스트컴의 게임 페이지에 접속했다. AAA급 온라인 게임은 독자적인 웹사이트를 운영하지만, 간단한 아케이드 온라인 게임은 넥스트컴 게임 페이지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있다!”

놀랍게도 보드게임 항목에 바둑도 있었다.

레이나는 용감하게 초보 방에 들어가서 튜토리얼을 시작했다. 바둑이란 이름을 며칠 전 앤더슨 쿠퍼의 방송에서 처음 들어봤던 진짜 초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둑이라는 게임은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의 실력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종목이라는 걸 몰랐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다.

잠시 후.

튜토리얼 1단계를 무사히 끝낸 레이나는 바둑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열심히 해 봐야겠다.”

앞으로 열심히 게임을 해서 내년에도 대박 정산을 받겠다는 야무진 꿈도 컸다.

“그 전에! 사람다운 식사부터!”

레이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는 탓이다.

지금까지 레이나의 점심은 패스트푸드였다. 돈이 없으면 맥도널드의 치즈버거를 먹었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빅맥을 먹었다.

N페이 계정에 33만4천이 넘는 포인트가 쌓여 있는 지금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은 레이나가 찾은 곳은 버거킹.

“몬스터 와퍼, 풀세트 하나요! 음료는 코카콜라 오리지널!”

N페이 앱을 켜며 당당히 외치는 레이나였다.

-ID 테크놀로지, 개인 정보 공유자에 대한 배당금 지급 완료!

-최소 120N포인트에서 최대 50만 N포인트까지. 기여도에 따른 차등 배분.

-일부 사용자, 포인트 분배 계산법에 의문 제기.

-알고리즘에 따른 분류로 주관적 판단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혀.

북미와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는 N포인트 분배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포인트를 분배 받은 사람들이 거의 1억 명에 달했으니 파급력이 확실했다.

불만의 소리도 조금 나오긴 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여도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이 따로 있고, 이를 담당하는 서버만 해도 AAA급 온라인 게임 서버보다 규모가 더 컸다. 사소한 기여라도 완벽히 기록하고 있었으니, 내역서를 보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다녀올게.”

“응! 잘 다녀와. 그리고 연락은 매일매일 꼭 해.”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재원은 티파니와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차에 올랐다. 2007년의 첫 해외 출장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러시아, 프레더릭이 내준 마지막 과제를 단숨에 끝내기 위한 출장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건강 잘 챙기시고, 월요일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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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프레더릭의 마지막 과제라는 건 새로운 유전 탐사였다.

이르쿠츠크 유전 탐사의 대성공은 셰브롱의 역사에도 길이 남을 만한 성공이었지만, 프레더릭은 조금 더 욕심을 냈다.

유재원 역시 그 정도 욕심은 충분히 채워 줄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단지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1년 빠르게 터지면서 새 유전 탐사 사업의 본격적인 시작이 조금 늦춰졌던 것뿐이었다. 더욱이 유재원에겐 원래 계획보다 조금 늦어진 것 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능력이 있었다.

수천조 원, 어쩌면 조 단위 이상의 가치를 담은 상세한 자원 지도가 유재원의 머릿속 기억의 궁전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디지털 지도에 좌표를 입력하여, 여기서 석유가 뿜어져 나올 거라고 찍어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석유뿐만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부터 우라늄, 플루토늄, 황금과 은 등등. 가치 높은 자원이 산출되는 새로운 광산에 대한 좌표도 한가득이다.

실제로 채굴한다면 그야말로 큰 재미가 터질 만한 이벤트지만, 현실적으로는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재원이 아무리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무당처럼 찍는 곳마다 석유가 터지고, 다이아몬드가 쏟아지면, 이를 순순히 실력이라고 바라볼 사람은 없을 테니까.

후폭풍을 생각하면 실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미 정확한 탐사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이벤트가 필요했다. 러시아행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함이다.

블라디 푸틴.

2004년 대선에서 재선에 승리해 집권 2기에 접어든 푸틴은 러시아의 새로운 짜르였다. 보리스 옐친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푸틴은 개혁 개방 실패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던 러시아를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강한 러시아!

구소련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러시아였고, 푸틴은 그런 러시아 사람들의 취향을 확실하게 저격했다.

구소련 몰락 후, 소련 시절의 자산을 불하받아 급속도로 성장한 러시아의 신흥 재벌들을 강하게 억누르며 시장경제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자본주의가 생소했던 러시아에서 그나마 남다른 사업 능력을 갖춘 이들이 신흥 재벌들이었는데, 이들은 독과점과 담합 등, 시장 질서를 어지러뜨리는 각종 방법들을 동원해 돈을 벌었다.

푸틴은 이들에게 기업체 해체나 경영진 구속, 천문학적 추징금 부여 등등 철퇴를 날림으로써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었고, 이러한 경고를 받은 신흥 재벌들은 푸틴에 적극 협조하는 것으로 몸을 낮췄다.

당연하게도 푸틴은 이렇게 회수된 권한과 사업체를 본인의 지지 세력에 재분배했는데, 셰브롱과 함께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사업을 진행 중인 트란스네프트도 그 세력 중 하나였다.

앞으로도 러시아의 대통령이고, 20년쯤 뒤에도 러시아의 대통령일 푸틴은 단순한 수사로서의 짜르가 아니라 그 단어의 의미 그대로 러시아에 새로운 왕조를 열어 버렸다.

그야말로 강력한 지지 세력을 구축했고, 러시아 사람들의 지지도 한 몸에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줄을 잘 탄 신흥 재벌 중에는 유재원과 약간 관련이 있는 로만 아브라모비치도 있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축구 클럽 첼시의 구단주였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다음부터, 영국 프리미어 축구팀의 가치는 더욱 상승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과 NBC를 통해 북미의 미디어 지형을 꽉 잡았다. 한국에서도 상당한 점유율을 끌어올린 케이블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글로벌 서비스를 한다.

이러한 채널을 통해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뿌려졌다.

축구보다는 미식축구를 더 즐겨보는 미국이었지만, 남미에서 올라온 히스패닉 사람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면서 축구의 인기는 기존의 메이저 스포츠에 도전할 만큼 상승했다. EPL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치솟아 올랐고, EPL의 팀들의 인기도 이와 비례해서 올랐다.

유재원의 뒤를 이어 2003년 첼시 FC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다. 이유는 전적으로 취미 활동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EPL의 글로벌화와 맞물려 첼시 FC의 가치는 몇 년 사이에 2배가 넘게 폭등해 버렸다. 그에 따라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재산도 5조 원대에서 10조 원대로 폭증했다고 추측 중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푸틴 집권 후 등장한 신흥 재벌 중에서는 말석에나 겨우 올라가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푸틴의 경제적 호위 세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성장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현재 러시아의 부흥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유가의 힘이었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때문이었다.

비록 유재원이 인공지능 골드를 동원해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붕괴되는 걸 막았다고는 했지만, 금융위기는 아직 진행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부터 웬만한 선진국들은 양적 완화라는 정책을 경쟁적으로 펼치고 있다. 양적 완화라는 말이야 그럴듯한데, 실상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시장에 돈이 많이 돌게 해서 금융 시장의 붕괴를 막겠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넘쳐나는 돈은 투자처를 찾았다.

금리는 바닥이고, 돈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현금을 그냥 들고만 있으면 저절로 손해가 나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돈은 가치가 확실한 곳으로 몰렸는데, 하나는 증권시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천연자원이었다. 천연자원 중에서 가장 고도화된 투자 시스템을 갖춘 곳이 원유 시장이었다. 원유 시장에 돈이 몰리면서 원유의 거래 가격은 폭등 중이었다.

1배럴의 가격은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에는 60달러 후반대였다. 지금은? 90달러 후반대를 달리고 있었다.

단숨에 50%에 달하는 상승이었다.

러시아의 산업 구조에서 천연자원 수출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비용을 감안해 1배럴에 30달러 후반대라면 러시아에겐 짭짤한 이익이 나온다. 90달러라면? 돈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

유가의 폭등에 힘입은 푸틴의 러시아는 그야말로 선심성 예산을 펑펑 남발하고도 돈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푸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랐다. 그렇기에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다. 웬만한 국가의 지도자라도 푸틴과의 미팅을 잡는 건 한참을 기다려야 가능했다.

딱 하나 예외가 있는 존재가 있으니, 유재원이었다.

“어서 오게.”

“환대 감사합니다.”

푸틴은 마치 백년지기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유재원을 반겼다. 실제로도 그랬다. 유재원과 푸틴의 인연은 9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깊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 전부터 러시아에 진출했던 게 ID 그룹이었다.

ID 하이테크의 모스크바 연구소도 건재할 뿐만이 아니라, 규모는 전보다 훨씬 커진 상태였다. 특히 인터넷 보안 기술에 특화되어 있는데, PC와 모바일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보안 파트 소스 코드는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다.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ID 그룹의 투자도 대규모였다.

ID 플래그십 스토어도 수십 곳이 생겼고, 러시아가 진행 중인 여러 사업에도 투자가 이어졌다. 게다가 셰브롱의 투자도 유재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푸틴과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유재원의 주요 활동 영역이 미국과 한국이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직접 얼굴을 보게 되는 날이면 그야말로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유재원을 끌어안은 푸틴의 얼굴에 웃음이 크게 피어났다. 푸틴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최측근들도 거의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자네를 위해 준비했다네.”

푸틴은 유재원을 직접 영빈관의 접견실로 안내했다. 거기엔 이미 다과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정식 만찬 전에 즐기는 티타임이었다.

“금융위기 때 한 건 크게 했다지. 우리 금융위원장도 자네가 아니면 큰 불이 일어날 거라고 했었지. 나도 기왕 불이 날 거 활활 타오르길 바랐지만, 자네가 특급 소방수로 활약할 줄이야.”

“제가 아니라 골드가 활약했던 것이지요.”

“후후, 그 인공지능을 만든 게 자네 아닌가? 하여튼, 금융위기가 좀 더 커졌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군.”

푸틴은 강 건너 불구경처럼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말투였다.

유재원은 쓰게 웃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허세를 부리는 모습은 여전히 푸틴 그 자체였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자본주의는 국가를 초월해 긴밀히 연결된 상태였다. 금융위기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러시아의 2006년 GDP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거의 0%에 수렴할 것은 분명했다. 원유 수출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러시아이니 원유 급등에 큰 영향을 받긴 하는데, 나머지 산업군의 상태가 너무도 빈약해 마이너스로의 성장이 속출했다.

회귀 전과 같이 계속되었다면, 러시아라도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푸틴도 이런 속마음은 유재원과 같이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만 내보일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진 않는다.

서로의 잔에 담긴 홍차가 반쯤 사라졌을 때, 푸틴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재미있는 일을 꾸몄다지?”

“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님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수라(SURA) 프로젝트는 어떻게 알았나? 나도 겨우 과학원 자료를 뒤져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던 건데.”

“제가 그런 쪽에 관심이 좀 많습니다.”

수라 프로젝트가 이번 러시아 출장의 핵심이었다.

니즈니 노브 고로드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바실수르스크의 작은 마을 근처에 위치한 전리층 연구를 위한 대규모 실험시설이다. 미국이 전리층 연구인 HAARP를 시작하자 구소련도 이에 맞대응해서 만든 시설이었다.

전리층에 대규모 전자파를 방사해서, 되돌아오는 신호를 포착하고 이 데이터를 해석해 전리층의 형태나 성질을 파악하는 연구였다.

하프에 대한 음모론적인 이야기는 많았다.

지진을 일으키고, 가뭄과 홍수, 정전을 야기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 시설의 기능은 전리층 조사에 맞춰져 있었다. 덤으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추가적인 기능도 발견되었다.

지질 조사에 활용이다.

전리층을 반사판으로 활용하면 드넓은 영역에 걸쳐 대규모의 전자파를 조사할 수 있다. 지층을 타고 들어간 후 되돌아오는 전자파 데이터를 수집해 조사하면 지질 구조를 파악하는 데 한층 수월해진다.

대신 전자파 수집을 위한 사전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했고,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팅파워도 필요했다.

유재원에겐 둘 다 모두 갖춰진 상태였다. 여기에 MSG와 같이 유재원만 아는 좌표를 살짝 끼워 넣는 것만으로 당첨 확률이 높은 복권을 당첨이 확실한 복권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낡디낡은 시설을 유 회장의 말만 믿고 재개장했어. 거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물론이죠. 성공은 100% 확실합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100%라는 보증까지 했다.

더욱이 이게 다가 아니다. 넓게 보자면 이번 일도 과거 도깨비 컴퓨터 사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판의 규모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거대했을 뿐이다. 이렇게 판이 커지면서 부담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판이 크기 때문에 +a로 끼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지진 예측이었다.

이번 SURA의 재가동을 통해 탐지용 전자파가 뿌려지는 지역은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였다. 기왕 가동하는 거, 성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탐지 영역을 넓게 잡았다.

이를 통해 북한의 유전 개발은 물론이고 쓰촨성 대지진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의 예측까지도 한 큐에 해 버릴 작정이다.

당장 지질 전문가들은 검증을 해 보겠다고 난리겠지만, 그들에게도 이번과 같은 거대한 데이터 폭풍은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유재원이 가진 지질 조사 알고리즘은 진짜였다. 유재원이 예언자처럼 지진을 예측한 것에 대해 혹시라도 의문을 갖고 재검증을 해 볼 전문가들도 딴소리는 못 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가진 장비가 ID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만큼, 전문가들의 검증은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도 한참 뒤에나 끝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똑같을 테니, 유재원이 외계인과 소통한다는 식의 의혹이 제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푸틴과의 회포를 길게 풀었던 유재원은 다음 날, 수라(SURA) 프로젝트 시설이 있는 바실수르스크로 이동했다.

수라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상주했던 소수의 러시아 연구자들, 과거엔 T&U리서치 소속이었다가 지금은 셰브롱 미래전략실 연구소 소속으로 바뀐 이들, 그리고 ID 그룹의 경호팀 인력들이 모든 세팅을 끝내고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합시다!”

전용기편으로 날아온 유재원은 환영 행사가 끝나자마자 수라의 가동 버튼을 꾹 눌렀다. 버튼은 한 번 보면 누구나 눌러보고 싶은 욕구가 샘물처럼 피어날 만큼 큼직하고 탐스러운 붉은색이었다.

오래도록 쓰이지 않은 탓에 뻑뻑한 느낌이 크게 났지만, 매일 하드트레이닝으로 단련된 유재원의 팔힘은 더 강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버튼은 완전히 눌려졌고, 웅 하는 공진음이 뒤를 따르며 거대한 설비가 가동이 시작했음을 알렸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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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유재원이 붉은 버튼을 누르자 막대한 전자기파가 동북아시아 방향으로 방출되었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수라 프로젝트 시설이 있는 바실수르스크로부터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지역인지라 최고로 뛰어난 레이더로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전리층을 반사판처럼 사용함으로써 수라 프로젝트 시설로부터 발산된 전자기파는 정확하게 목표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반도 지역부터 탐사에 들어갑니다.

-수라 프로젝트의 전자기파 확인.

버튼을 누른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바로 반응이 왔다.

관제실에는 최신식의 컴퓨터들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를 통해 북한에 들어간 셰브롱의 탐사팀과도 연결이 된 상태였다.

탐사팀은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통해 원유가 나올 만한 후보지를 선택했고, 티파니와 유재원의 최종 결재를 받았다. 탐사팀이 정리한 후보지 중에 실제 원유가 뿜어져 나왔던 지역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셰브롱에서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지만, 티파니의 남편이라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셰브롱의 탐사팀은 과거 T&U 리서치 소속이었기에, 유재원의 말이 허투루 넘길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후보지가 정해진 다음, 탐사팀에서는 전자기파를 수신할 준비를 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땅속 깊숙이 수천 개의 탐침봉을 박아 넣었다.

러시아의 관측 위성으로 지표면에 맞고 되돌아오는 전자기파를 수신하는 게 제일 간단했지만,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땅에서 신호를 수집할 준비였다.

-반사파 확인.

-모니터링 장비에 기록을 시작합니다.

모든 게 완벽했다.

ID 그룹의 클라우드 서버는 한반도 전역에서 올라오는 고품질의 탐지 신호를 단 하나도 놓치는 것 없이 완벽하게 수집했다.

서버로 들어오는 데이터의 크기가 초당 수백 테라바이트를 거뜬히 상회했지만, 분산 컴퓨팅의 힘으로 적절히 나눠 저장하니 아무런 부담도 없었다.

탐지 작업이 순조롭게 시작되어 1시간쯤 지났을 때.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던 것이 뚝 끊겼다.

“첫 번째 탐색이 끝났습니다.”

수라 프로젝트 시설의 안테나에 막대한 전력이 공급되다가 뚝 끊긴 것이다. 그러나 탐지 작업 전체가 끝난 건 아니다.

“10분 후에 전자기파의 주파수를 바꿔서 탐색합니다.”

전자파의 주파수에 따라 탐지할 수 있는 특성이 달라진다. 그에 따라 수라 프로젝트 시설로부터 조사되는 전자기파의 주파수 영역을 다르게 설정해 조사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데이터의 질도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네, 이제부터는 팀장님이 맡아서 진행하세요.”

유재원은 선뜻 뒤로 물러났다.

본인의 역할은 수라 프로젝트 시설을 자원 탐사에 온전히 사용할 수 있도록 러시아와 의견을 조율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이 전격적인 협조를 하기로 했지만, 현장에서는 또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 회장님! 맡겨주십시오!”

실무자는 유재원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고는 바로 제어판을 조작해 세팅을 바꿨다. 주파수를 조종하는 건 둥그런 다이얼이었는데 돌릴 때마다 드륵드륵 소리가 났다. 출력값을 바꾸는 것은 레버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여러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이것들을 내리고 올리는 등 아주 부산한 움직임이었다.

디지털화가 되었다면 컴퓨터로 간단히 조작했을 텐데, 이것은 모든 세팅값을 일일이 손으로 조작해야 했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의 정수를 보는 것 같았다.

-러시아 정부의 수상한 움직임.

-수라 프로젝트를 아는가? 소련 붕괴 후 봉인된 시설 재가동.

-러시아 정부 고위관계자. 첩보 시설? 사실무근. 단순한 지구 환경 모니터링 장비일 뿐.

-수라 프로젝트란? 구 소련 시절 미국의 하프(HAARP)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유재원 회장의 협조 요청에 의한 것. 정당한 대가도 지불.

수라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나서 얼마 후.

이를 감지한 유럽과 미국의 언론에서 러시아가 수상한 짓을 벌인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기에 유재원의 러시아 방문 사실이 엮이면서 그럴듯한 음모론이 나왔다.

음모론은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오래도록 자생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나온 음모론도 수라 프로젝트의 원조인 하프(HAARP)에서 파생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실상은 지질 탐사였는데, 엉뚱한 기상 이변이나 지진을 연관시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악의적으로 말이다.

음모론을 끝내는 건 결국 팩트였다.

최대한 빠르게 사실을 밝히는 게 음모론의 싹을 자르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유재원은 자신 있었다. 과거에는 수라 프로젝트의 가동으로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부터가 일이었고, 제대로 된 해석 방법도 마땅하지 않아서, 아웃풋이 변변찮았다.

덕분에 막대한 예산과 전력을 쓰고도 결과가 없으니 사람들은 의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기상 이변이 일어나면서 이상한 음모론이 피어났다.

이번에는 다르다.

전 세계 슈퍼컴퓨터를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시스템이 ID 그룹의 클라우드 서버였다. 막대한 연산력으로 수라 프로젝트의 가동으로 수집된 데이터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유재원은 음모론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MSG를 팍팍 칠 작정이었다.

북한의 석유 탐사 성공이라면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하는 이들을 단숨에 막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쓰촨성 대지진과 동일본 대지진까지도 예측한다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만 수라 프로젝트의 강력한 탐지 능력에 눈이 돌아간 석유메이저나, 각국의 정부들이 너도나도 하프나 수라를 만들어 전리층을 건드려 예상 못 한 후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는 있다.

음모론에 이끌리던 사람들은 유재원이 러시아에서 뭔가 큰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재원은 이미 미국에 돌아온 상태였다.

수라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현장에서도 순조로웠고, 혹시나 온갖 방해 공작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북한에서도 탐사팀에 대한 대우는 훌륭했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현장에서 교통 정리를 해 줄 필요가 사라졌기에 유재원은 샌프란시스코 저택으로 돌아와 티파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프레더릭과의 통화 후 유재원은 티파니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가족 계획에 대한 대화였다.

원래 유재원 부부의 가족 계획은 30살 후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물론이고 프레더릭도 기대가 크다는 걸 알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티파니도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셰브롱의 후계자 레이스를 달리는 중이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상관없다는 것이 티파니의 말이었다. 그리하여 유재원도 30살이 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올해부터는 피임을 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둘 사이는 신혼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만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나누는 대화가 보통의 부부들과는 아주 달랐다.

“데이터 해석은 잘 돼?”

“응! 컴퓨터 성능도 좋아졌고, 알고리즘도 최적화가 잘 돼서 그런지 예전보다 만배는 빨라진 거 같아.”

티파니의 물음에 유재원이 답했다.

매우 개인적이고도 오붓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자리였지만, 유재원과 티파니의 대화는 평소에도 이렇게 일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수라 프로젝트를 가동해 얻은 데이터는 엄연히 셰브롱의 소유였다. 데이터의 처리도 셰브롱의 데이터 센터가 주관한다. 대신 물리적인 데이터는 ID 클라우드 서버에 있고, 분석 작업에 소요되는 연산력도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제공되었다.

셰브롱이 ID 그룹에 아웃소싱을 하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유재원은 그러면서 안드로이드 패드에 이미지 파일 하나를 띄웠다. 파란색으로 뒤덮인 동북아시아 지도였다.

여기에 붉은색부터 파란색까지의 색칠이 들어가 있는데, 원유 매장 예상 확률을 색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붉은색은 매우 높은 확률을, 파란색은 낮은 확률이다. 석유라는 게 워낙 귀한 자원이다 보니 붉은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빨간색은 하나도 없는데?”

안드로이드 패드에 얼굴을 묻고 붉은색을 찾아보던 티파니가 허탈한 듯 말했다.

“아직 분석 중이니까 그렇지. 전체 진척도를 보면 이제 겨우 10%를 했을 뿐이야.”

그런 티파니를 유재원은 부드럽게 달랬다.

클라우드 서버에서 열심히 돌고 있는 프로그램은 적당한 때가 되면 놀라운 결과를 뿜어내 줄 것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 하루 빼놓는 거 잊지 않았지?”

“그럼!”

이번에도 티파니가 물었고, 유재원은 흔쾌히 답했다.

내일 하루는 유재원도 티파니도 통으로 스케줄을 비운 날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날아온 초대장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오스카상으로 유명한 아카데미 시상식에 유재원이 초청되었다.

전례가 없던 건 아니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은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였다. 여기에 ID 엔터테인먼트는 세계 1위를 다투는 영화 투자사이기도 했다. 투자하는 영화마다 대박이 터지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 둘의 시너지는 어마어마해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 점유율이 40%에 이르고 있었다.

유재원의 이름값도 영화계에서 단번에 자리를 잡았다.

할리우드의 제작사들은 일단 좋은 시나리오가 나오면 가장 먼저 ID 엔터테인먼트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덕분에 유재원도 앉은 자리에서 뜰 만한 영화를 먼저 알아보고 투자를 선행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영화계에서 유재원의 입지도 상승했다.

확실한 증거가 바로 아카데미 시상식의 초청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보통은 앞글자를 따서 AMPAS의 회원들이 그 해의 개봉 영화 중에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다음 해 1월 즈음에 부문별 후보들이 발표되고, 2월 중순쯤에 최종 후보로 2차 투표를 한 뒤, 2월 마지막 주나 3월 첫째 주 일요일에 로스앤젤레스의 코닥에서 시상식을 한다.

유재원의 경우에는 ID 엔터테인먼트가 영화 투자사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세운 다음부터 초청장이 왔다. 때로는 시상자로 서 달라는 부탁이 오기도 했다. 다만 일이 바빠서 그런 초청에 응했던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번엔 좀 달랐다.

시상식을 빛내 달라는 초청도, 시상을 해 달라는 부탁도 아닌 유력한 수상 후보가 된 탓에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로 말이다.

영화가 막 극장에 걸렸을 때도 제법 이슈가 되었던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오고 나서는 더 큰 후폭풍이 일어났다.

영화 속 주인공이 예견한 그대로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졌고, 그에 대한 후폭풍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후보에 오른 것이었다. 유재원은 애덤 맥케이 감독에게 뼈대만 가르쳐 줬다고 생각했지만, 애덤 맥케이 감독은 유재원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나리오 구상 후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고서, 실제 월 스트리트의 투자 회사가 사용하는 데이터 같은 디테일이 필요한 게 있으면 유재원을 찾았다. 그때마다 유재원은 최대한 조언을 해 주었고, CDO 부도율 예측 그래프 같은 건 직접 만들어 줬으니 말이다.

그에 따라 애덤 맥케이 감독은 영화가 끝나고 올라오는 제작자 목록에 유재원의 이름을 두 번 넣었다. 한 번은 투자자였고, 다른 하나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럼. 아주 작게만 하고 있어.”

유재원의 말에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했던 말과 다르게 눈빛이 반짝이는 게 누가 봐도 잔뜩 기대한 사람의 것이었다.

내일 스캐줄만 해도 그렇다.

오죽하면 다음 주에나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한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서 하루를 통으로 비워두겠는가.

티파니의 성화에 유재원도 장단을 맞춰주려고 시간을 내긴 했는데, 수상 전망은 긍정적이진 않다는 게 문제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깔린 백인우월주의는 불문율 수준이라는 게 문제였다. 2020년쯤에나 깨질만한 일인데, 지금은 2007년이다. 기술가속은 이뤄내는 데 성공했던 유재원이지만, 시민의식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번 만큼은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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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다음 날.

“어때?”

“우리 자기, 너무 멋져!”

유재원의 물음에 티파니가 호들갑스럽게 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티파니의 눈빛은 초저녁의 샛별처럼 반짝였으니 절대 빈말은 아니었다.

“그럼 이걸로…….”

“음, 아직 입어 볼 게 남았으니 킵 해 놓고 다음 것도 입어 보자.”

“어휴. 알았어.”

덕분에 유재원은 기대감을 갖고 결정을 하려고 했지만, 티파니는 단호하게 진행을 계속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옷을 벌써 다섯 벌쯤 갈아입은 거 같은데, 티파니의 마음에 차는 옷은 없었던 모양이다.

반면 유재원에겐 그냥 맨 처음 나왔던 옷을 입어도 괜찮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이 입을 옷들은 검은색의 세련된 정장이었다. 검정색과 투버튼을 기본으로 약간의 변화만 주는 정도였다.

옷감의 재질이 달라진다거나, 은은한 문양이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티파니의 말에 순순히 따라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새로운 후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매일 일에 치여 티파니와 보내는 시간도 적었는데, 이렇게라도 함께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옷 갈아입기 도전은 시작도 안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성용 드레스 코드는 비교적 간단했지만, 여성용 드레스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펙트럼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티파니의 드레스는 그야말로 결혼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여배우들과 스타일이 겹치는 건 절대 안 된다. 그러면서 세련되고 우아하면서, 품격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티파니에겐 다른 여배우들과는 다른 숨겨진 미션이 있었다. 절대 유재원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티파니만의 말 못 할 문제였다.

이러한 대전제를 깔고서 옷을 골라야 했으니, 티파니의 드레스 선택은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았다.

어쩌면 하루로도 모자랄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을 위해서 며칠이고 투자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유재원과 티파니는 하루를 통으로 투자한 것으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유재원의 사기 스킬인 기억의 궁전에서 200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데이터 중 여배우들의 드레스를 확인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할리우드 셀럽 커플을 많이 봤지만, 두 분처럼 함께 섰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나오는 커플은 처음이군요.”

선택을 끝낸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나란히 서자, 전세를 냈던 의상실의 직원들이 한목소리로 폭풍 칭찬을 건넸다.

유재원과 티파니도 만족이었다.

모든 선택은 끝났고, 이제 결전만 남았다.

2007년 2월 25일.

코닥 극장 앞은 아침부터 축제였다.

날씨도 좋아서 겨울답지 않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따스함이 감돌 정도였고, 하늘마저 한국의 가을 하늘 부럽지 않을 만큼 파랗게 물들었다.

운이 나쁘면 비가 와서 축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 2007년도만큼은 확실히 달랐다.

작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의 규모도 위축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완전 반대였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를 풀기 위해서라도 화려한 축제를 여는 게 맞는 해법이었다.

레드 카펫 행사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추첨에 따라 선정된 순번으로 할리우드의 배우들이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으로부터 플래시가 터졌고, 팬들 사이에 환호성도 나왔다.

그만큼 경호원들 사이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VIP!

가뜩이나 긴장 상태였던 경호원들이 무전으로 들려온 VIP라는 소리에 최고조로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레드 카펫의 주인공은 역대급으로 중량감이 넘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들 팀입니다.”

바로 유재원 부부와 애덤 맥케이 감독, 그리고 크리스찬 베일, 브래드 피트, 라이언 고슬링, 스티브 카렐 등의 주연진이었다.

레드 카펫 행사장에서 기다리던 취재진과 팬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들 시선의 끝에서 일단의 자동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배우들을 레드 카펫 근처까지 데려다주는 자동차는 보통이 리무진이었고 스포츠카도 많았다. 협찬 혹은 본인들이 애용하는 차였다.

이번엔 달랐다.

라이트닝 볼트사의 슈퍼패스트들이 줄줄이 다가왔다.

공개 후 어마어마한 예약 물량이 쏟아진 라이트닝 볼트사의 전기자동차였고, 그중에서 최고 등급인 슈퍼패스트였다.

디트로이트와 군산에 자리를 잡은 생산 라인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양산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에 맞춰 북미 전역의 셰브롱 주유소도 라이트닝 볼트의 배터리 교환 시설을 갖췄다. 모든 셰브롱 주유소가 배터리 교환 시설을 갖추는 건 아니었지만, 반경 100km 안에 최소 10개 이상의 시설이 있도록 설정을 했다.

예약자가 적은 곳이면 시설의 숫자는 적지만, 예약자가 많은 도시 지역에는 수십 개의 교환 시설을 갖춰서 기다리는 일 없이 바로 배터리를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결정 때문에 프레더릭은 석유 메이저들로부터 배신자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프레더릭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가 대세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게 바르게 보였던 것이다. 석유 업계가 열심히 담합으로 전기자동차를 죽이려고 해도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도 그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실제 라이트닝 볼트사의 전기자동차는 3월 초에 예약자들에게 배송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양산 초기에는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숙련도가 올라서 자잘한 문제는 모두 사라졌다.

더욱이 검수 과정에 인공지능 골드의 이미지 분석 단계도 추가했다.

조립 과정에서 골드가 전방위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잡아내 주는 것이었다. 커스터마이즈의 폭이 일반 자동차와는 차원이 다른 라이트닝 볼트사였던 만큼, 고객의 주문에 따라 정확한 부품을 설치하는 게 관건인데, 인공지능이 직접 확인함으로써 엉뚱한 부품이 들어간다든가, 조립이 잘못되는 걸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기념해서 동원된 슈퍼패스트 5대도 골드의 꼼꼼한 검수를 통과한 모델이었다.

덕분에 출고된 다음 바로 행사에 동원되었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옛날 생각 난다.”

“그러게.”

감독과 주연 배우들을 먼저 보내고 맨 마지막 차에 올라탄 유재원과 티파니는 진한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2인승 슈퍼카인 슈퍼패스트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0년이었기 때문이다. 유재원과 티파니의 신혼여행 중 제주도에 들렀을 때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던 콘셉트카인 LV-F2가 슈퍼패스트의 조상님이었다.

슈퍼패스트의 성능은 LV-F2보다 훨씬 발전했고, 탑재된 인공지능의 수준 역시 비교가 불가할 정도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준비된 슈퍼패스트는 로드스터 버전으로 버튼 하나로 하드탑 커버를 열고 닫을 수 있었다.

“내가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라니!”

지금은 모두 개방한 상태였기에, 제일 앞선 슈퍼패스트에 올라탄 애덤 맥케이 감독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으며 웃을 수 있었다.

1호차 운전석에는 애덤 맥케이 감독이 배정됐고, 조수석에는 주연인 크리스찬 베일이었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 카펫에 입성한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해서는 운전석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상태로 끝내준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심지어 슈퍼패스트는 운전자가 일어난 상태임에도 20km의 속도로 레드 카펫까지 안전하게 운전 중이었다. 일반 주행 모드가 아닌, 행사 모드로 특별하게 세팅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만을 위해 만들어진 모드라서 일반 구매자들은 따라 해 볼 수가 없다.

미국도 아직은 완전 자율주행 허가는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스티어링을 두 손으로 잡고 있을 때만 자율주행 모드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애덤 맥케이 감독의 과장된 반응에 팬들은 크게 웃었고,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이봐요!”

그러다 갑자기 경호진 사이에 큰 소리가 터졌다.

카메라를 들이대며 열심히 셔터를 누르던 취재진 사이에 누군가가 애덤 맥케이 감독과 크리스찬 베일이 타고 있는 1호차 앞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프레스 배찌도 없는 파파라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미친 짓이었다. 깜짝 놀란 애덤 맥케이 감독이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애덤 맥케이 감독보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 존재가 있었다. 슈퍼패스트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였다.

전면에 사람이 끼어든 것을 감지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는 바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 갑작스러운 급브레이크도 아니었고, 수십 년 도로주행경력을 자랑하는 베스트드라이버가 깃털처럼 가볍게 멈춰서는 것처럼 멈췄다.

그 사이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파파라치를 빼냈다.

간단한 해프닝이었다. 장애물이 사라지자 슈퍼패스트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마치 조금 전의 작은 소란도 애초에 없는 것 같았다. 차례대로 레드 카펫 앞으로 도착한 슈퍼패스트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내렸고, 유재원 부부는 맨 마지막이었다.

자연스럽게 기자들의 렌즈는 유재원 부부에게로 향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처음 등장한 것이기도 했고, 부부가 동반으로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스타일링에 최대한 공을 들였으니, 그냥 마구 찍어도 화보였다.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으로 기사가 생성되는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오늘날이었다. 유재원 부부의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도배가 되었다.

인터넷이 아카데미 시상식 이슈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레드 카펫 행사를 마친 유재원은 애덤 맥케이 감독과 배우들로부터 잠깐 떨어져 나왔다. 본 시상식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휴식을 취하지만, 잠깐의 시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유재원이었기에, 그 짧은 시간에도 미팅 약속을 잡았다.

“유 회장님!”

약속 장소까지 가려는데, 갑자기 덩치 큰 누군가가 유재원을 보며 반갑게 다가왔다. 누군가 하고 고개를 돌렸던 유재원은 본인을 부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외면해 버렸다.

“어?”

그 모습에 유재원에게 다가오던 이는 혹시 본인을 못 알아본 거 아닌가 하고 더 빠르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현장 경호팀장인 그렉에게 제지 당했다.

그 사람의 덩치도 제법 컸지만, 실전으로 다져진 그렉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재원의 근접 경호는 그렉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 스쿼드 팀으로 4명이서 움직인다. 의문의 인물이 유재원의 경호원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더욱이 유재원은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고개를 돌린 게 아니라, 알아봤기 때문에 돌린 것이었다. 바로 와인스틴 컴퍼니의 하비 와인스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위손 와인스타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와인스틴 컴퍼니는 중급 규모의 영화 배급사였는데, 배급하는 영화를 멋대로 마구 잘라 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극장에 영화를 걸 때, 하루에 몇 번이나 반복해 상영하느냐가 수익성과 직결이 되는데, 상영 시간이 길면 반복 상영 횟수가 줄어드니 억지로 잘라내 시간을 맞추는 것이었다.

상업 영화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한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와인스틴은 무조건 시간을 지킨다고 영화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마구 잘라내 문제가 컸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와인스틴이 조만간 가위손이 아니라 성범죄로 유명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연예계의 대표적인 병폐 중 하나가 바로 성 상납인데, 할리우드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와인스틴이라는 작자는 본인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상납도 하면서 이 자리까지 커온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중에는 미투 운동이라는 전 지구적인 사회 문제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혀 상종하고 싶은 인물은 아니었기에, 못 본 척 치워 버리는 유재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와인스틴의 민낯을 드러내고 몰락시켜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정보팀도 와인스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물론 가십마저도 아직 포착하지 못했다. 와인스틴의 피해자들이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지금은 그저 깨끗이 무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와인스틴을 스치고 지나서 자그마한 미팅룸에 도착했을 때, 유재원은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유재원보다 13살 많은 42세의 남자.

아역으로 데뷔해서 할리우드의 유망주로 자라났지만, 고질적인 마약 문제로 인해 연예 섹션보다는 사건 섹션에 더 많은 이름을 올린 스타였다. 그렇게 방탕하게 젊음을 낭비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2000년 초반부터 재활에 성공했고 지금은 활발한 작품 활동 중으로 배우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남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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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타임“유 회장께서 저와 미팅 약속을 잡고 싶다고 해서 이유도 안 물어보고 냅다 수락했지 뭡니까. 그런데 약속을 잡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도대체 왜 저를 만나려고 했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상상할 수가 없더군요.”

서로 인사를 하고 나서, 약간 데면데면한 순간은 있었다. 하지만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싶은 것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부산스럽게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이 아이언맨이구나 하고 말이다. 이 사람 말고는 다른 아이언맨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건 로버트 씨에게 하나 보여드리고 싶은 영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서류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가죽 커버를 씌운 안드로이드 패드를 꺼내며 말할 수 있었다.

“앗! 그냥 밥이라고 불러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제 애칭이 밥이거든요.”

“그럼 저도 유재원이라고 해 주세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애칭이 밥이라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짐짓 처음 듣는 척하는 유재원이었다.

그러면서 안드로이드 패드를 로버트에게 넘겨줬다. 패드를 넘겨받은 로버트는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이었다. 안드로이드 패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아니라, 이걸 왜 자신에게 넘겨주냐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전원을 켜 보라고 권하기만 했다. 그러자 로버트도 어쩔 수 없이 패드 옆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은 화면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바탕화면이 바로 나타났다. 페이스 키나 PIN과 같은 보안 설정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바탕화면이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거기엔 금색과 붉은색 투톤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진 강철 슈트의 헤드가 큼지막하게 담겨 있었다.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마블 코믹스의 대표 히어로인 아이언맨을 바로 알아봤다.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스, 준비된 동영상을 재생해 줘.”

-네, 동영상 제목 아이언맨 마크3를 재생합니다.

유재원은 깔끔하게 골드를 시켜 안드로이드 패드에 동영상을 띄웠다. 패드의 인공지능 비서 이름을 자비스로 설정해 둔 덕에 스마트폰의 골드가 엉뚱하게 유재원의 명령을 받는 불상사 없이 로버트가 들고 있던 패드에서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우웅 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검은 화면 속에서 로봇팔들이 올라왔다. 그러더니 다리 파트부터 착착 조립되더니, 이내 강철 슈트가 완성되었다.

아이언맨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변신 장면이었다.

로버트는 유재원이 자비스를 부를 때부터 얼음 상태로 안드로이드 패드에 시선이 딱 붙어 버렸다. 그러다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확 떠졌다.

그것은 황금색의 안면 가드가 위로 올라가며 슈트 안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아이언맨 오디션 2007년 3월 5, 6일’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로버트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영상은 아니다. 3월 초가 되면 텔레비전을 통해 대대적으로 쏟아질 오디션 광고 영상이었다.

사실, 말이 광고이지 실제는 아이언맨 1의 첫 번째 티저 영상이나 다름이 없다. 벌써 아이언맨 강철 슈트를 공개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이른 것일 수도 있지만, 고도의 계산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었다. 수많은 분야에서 유재원이 일으킨 변화로 인해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일정도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DC 히어로의 압도적인 인기였다.

재작년에 나온 배트맨 비긴즈는 그야말로 히어로 영화의 고정관념을 박살내 버렸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크리스찬 베일의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 거기에 유재원이 전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영화의 퀄리티는 더욱 올랐다.

반면 마블은 첫 번째 히어로 영화인 인크레더블 헐크가 실패하면서 내부에서 위기가 팽배했다. 2008년에는 배트맨의 두 번째 시리즈인 다크나이트가 출격을 준비 중이었다.

실사 배트맨 영화 중에서 최고 흥행을 올린 다크나이트였다. 그걸 마블 측에서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대응하기 위한 영화가 바로 아이언맨 1이었다.

마블과 DC가 모두 ID 그룹에 있다지만,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실제로 ID 그룹의 조직도를 보면 서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떨어진 상태였다. DC의 경우 위너브라더스 영화사의 자회사에 있었고, 마블의 경우에는 ID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었으니 말이다.

마블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는 케빈 파이기도 영입하여 마블 시네마 제작위원회의 위원장 직위와 함께 시네마틱 유니버스 구축에 대한 전권도 내주었다.

제작위원회는 아이언맨 1의 개봉 시기를 내년 여름으로 잡았다. 그런데 그사이 DC의 영화들이 튀어나올 수 있고, 그러면 마블의 존재감이 완전히 묻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에 아이언맨 강철 슈트 티저를 오디션 영상인 것처럼 해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오디션이 가짜라는 것도 아니다.

오디션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

다만 우려가 되는 게 있다면, 제작 일정이 달라지면서 회귀 전 주연 배우들의 출연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제작 일정이 회귀 전보다 몇 달이 느려졌는데, 그사이 다른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큰일 아니겠는가. 특히 영원한 아이언맨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마약 근절 후 왕성한 영화 활동을 하는 중이었기에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설마 아이언맨 영화화가 이뤄지는 겁니까?”

“네! 제일 먼저 밥에게 알려드리는 거예요.”

다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주시하고 있는 건 유재원뿐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오는 길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꾀어낸 것이었다.

“이걸 저에게 보여주신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언맨 슈트 속에 밥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는 건 도저히 상상되지 않더군요.”

유재원의 말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즐겨 보던 코믹스가 아이언맨이었는데, 아이언맨의 영화에 본인이 출연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캐스팅의 전권은 케빈 씨가 이끄는 제작위원회에 달렸어요. 패드 안에 아이언맨 관련 자료도 가득 들었으니, 참고하셔서 오디션에서 꼭 붙어주셨으면 합니다.”

오디션 권한이 마블 시네마 제작위원회에 있다는 건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비록 유재원이 판권은 물론이고 제작비 전액을 책임지고 있지만, 영화 제작은 이미 회귀 전 검증을 끝내 버린 케빈과 그가 이끄는 제작위원회에 전권이 주어진 상태였다. 감독에게 전권을 주었다가 망해 버린 건 헐크 한 편으로 족하다는 게 유재원과 마블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건 제 꿈이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끝없는 후회만 남은 과거와 같은 실수는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로버트의 결심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유재원은 그런 로버트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 참, 패드 안에는 대외비가 가득하니까 페이스 키와 지문 인식을 꼭 등록하시고 사용하세요. 인공지능 비서의 닉네임은 자비스로 설정되어 있는데, 원하시는 걸로 바꾸시고요.”

패드 안에는 대본과 같이 극비 자료는 없다. 대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든가, 시네마틱 유니버스 버전 아이언맨에 대한 설정집 데이터 등등. 캐릭터를 잡는 데 필요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바로 하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로버트는 바로 설정 화면으로 들어가 페이스 키 등록을 시작했다.

전면 카메라 앞에서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는 로버트를 보며 유재원은 이번에도 아이언맨의 얼굴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로버트는 인공지능 비서의 닉네임은 바꾸진 않았다. 자비스라는 이름이 마음에 꼭 들었다는 것이다.

-10분 후, 시상식을 시작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정석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때마침, 안내 음성이 들렸고 유재원과 로버트의 미팅도 끝이 났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시상 부문은 무려 24개나 되어서 전체 행사 시간은 기본 2시간이 넘었고, 때에 따라서는 3시간이 넘기도 했다.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은 무대에서 불과 두 줄 떨어진 자리가 주어졌기에, 시시때때로 카메라에 잡혔다. 특히 이번에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된 유재원은 기라성같은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서도 보통의 존재감을 넘어선 인물이기에 카메라가 더욱 집중되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 앉은 티파니까지도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나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티파니가 상 욕심을 냈다. 유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전만 해도 기대하지 말자고 했지만, 며칠 동안 이번 행사를 위해 공을 들인 걸 생각하니 절로 욕심이 났다.

실제로 여러 배팅 사이트에서는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의 수상 가능성으로도 게임이 만들어졌다. 배당금은 의외로 높지 않았다. 배당금이 낮다는 것은 수상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실제로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는 무려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감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편집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의상상 부문이었다.

3개월 촬영하고, 3개월 후편집으로 번개처럼 개봉한 영화치고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메이저 부문에 죄다 오른 것이었다.

과연 이 중에 몇 개의 상을 수상할 것인가. 유재원은 본인이 못 받더라도 좋으니 감독상이나 작품상, 아니면 남우주연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최악은 유재원 혼자 각본상을 받고, 나머지는 하나도 못 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온갖 말이 다 나올 거 아니겠는가. 오히려 노미네이트만 되고 하나의 상도 못 받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2007년,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아카데미 어워드, 화려한 행사 시작!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 라이트닝 볼트사의 슈퍼카 슈퍼패스트 타고 자율주행 선보여!

-긴급! 취재진 중 하나가 자율주행 중이던 슈퍼패스트 앞으로 난입!

-슈퍼패스트의 완벽한 제동, 사상자 없이 해프닝으로 끝. 난입한 취재진 프레스 카드도 없는 파파라치로 판명.

-라이트닝 볼트사, 3월 1일부터 모든 모델 순차적 배송 시작.

아카데미 시상식의 레드 카펫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전 세계는 난리였다.

쇼케이스 이후 최초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슈퍼패스트에 대한 관심부터, 갑작스레 난입한 파파라치로 인한 해프닝까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잡아끌 만한 소식들이 연거푸 쏟아져 나왔다.

속보 경쟁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계속되었다.

-남우조연상!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들의 브래드 피트!

본상 시상에 들어가자마자 유재원의 우려는 깨졌고, 티파니의 소원도 풀렸다.

조연으로 나서서 크리스찬 베일과 합을 맞춘 브래드 피트가 호명된 것이었다. 원래는 미스 리틀 선샤인의 남자 조연이 탈 상이었는데, 유재원의 등장으로 인해서 단숨에 뒤로 밀려나 버렸다.

무대에 올라 금빛 찬란한 오스카상을 받은 브래드 피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돌렸다. 조연상이라고 해도 무려 오스카였다. 일평생 할리우드에서 배우 생활을 하고서도 단 한 개의 오스카를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배우들의 숫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브래드 피트는 이미 연기력으로 정평이 났고, 1996년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에 올랐음에도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오스카상을 받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2020년이 되어서야 배우로서 오스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유재원과 엮이면서 원래 역사보다 13년이나 이른 오늘 한을 풀었다.

이렇게 조연상 하나로 끝이었다고 해도 유재원은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과 함께 행복한 애프터 파티를 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상복은 남우조연상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남우주연상!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크리스찬 베일!

-감독상!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의 애덤 맥케이!

감독상과 남우주연상까지도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가 휩쓸었다. 그리고 각본상도 있었다.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이 호명되기 전에 먼저 등장한 게 바로 각본상이었다.

코닥 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던 유재원은 후보를 소개하는 순간에도,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유재원이라는 이름이 불리고 극장 안의 스포트라이트가 본인을 향해 집중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초 뒤, 티파니의 환호가 터지고 망부석이 된 것처럼 굳었던 유재원을 껴안은 후에야 경직이 풀렸다.

넋을 놓고 있던 표정도 그제야 바로잡혔고, 유재원 하면 떠오르는 예의 스마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후보로 호명될 때부터 유재원의 모습이 분할 화면으로 계속 비춰지고 있었기에 얼떨떨한 표정은 전 세계로 방영되고 있었다.

“자기야! 오스카가 기다리고 있어! 얼른 무대로 올라가.”

티파니의 말에 유재원은 걸음을 옮겼다. [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 오직 재원이 본인만, 본인의 존재감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거예요. 이해해주세요. 회장님으로 살았던 나날보다 회귀 전 쭈구리로 살았던 날들이 훨씬 많은 상태라서요~.

×

골든 타임그렇게 무대 위에 올라서자 유재원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순간 뭐지 싶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백인 우월주의는 뿌리 깊은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자신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나 본인의 수상을 보면 수많은 유색 인종을 좌절시켰던 인종주의 유리천장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백인 우월주의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다.

“수상 축하합니다.”

“프랜시스 감독님, 감사합니다.”

단적으로 오늘 시상자로 나온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지금 유재원에게 축하를 하며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오스카상을 전해주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역시나 백인이었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사람들 중에 오스카를 거머쥔 유색 인종은 유재원뿐이었다.

그저 유재원 본인의 존재감과 영화계에서의 파워가 아카데미의 어쭙잖은 백인 우월주의 정도는 가볍게 박살낼 만큼 강력했을 뿐이었다.

“음.”

오스카상을 넘겨받은 유재원에게 곧 마이크가 쥐어졌다. 수상 소감을 말할 때였다. 그럼에도 몇 초간 참았다. 자연스럽게 기립 박수도 잠잠해졌고, 모두가 자리에 앉을 시간을 갖도록 한 것이다.

“먼저, 못난 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신께 오스카의 영광을 돌립니다.”

유재원의 수상 소감 시작은 그야말로 무난했다.

그렇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완전히 다르다. 유재원이 말한 신이라는 존재는 꿈속 세상에서 대면했던 존재였고, 두 번째 기회라는 건 회귀를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저 종교인들이 본인이 믿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했다.

“사랑하는 티파니와 부모님,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너무도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준 애덤 맥케이 감독님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제 상상 속에서 그대로 뛰어나온 듯 연기해 주신 크리스찬 베일, 브래드 피트, 라이언 고슬링, 스티브 카렐과 출연진께도 고맙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유재원이 객석의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을 보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카메라는 한 명 한 명 집중 조명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수상 소감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평범하면 결코 유재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수많은 이들께 깊은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자리가 많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제 욕심이 듬뿍 들어간 영화인 탓입니다. 제 눈에는 금융위기가 다가오는 게 너무도 뻔하게 보이는데, 다들 너무도 낙관적이라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가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유재원은 굳이 즐거운 자리에서 그 얘길 꺼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을 전해드린다면,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는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종식될 거라는 것입니다. 금융부분과 달리 미국의 실물 경제는 탄탄하고, 언제나 꾸준히 성장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 부분에서의 거품이 사라지면’이라는 단서가 있긴 했지만, 실물 경제는 유재원의 말처럼 꾸준한 우상향을 그리는 중이었다.

비록 금융위기가 터진 미국이지만, 스마트폰 판매량은 다시 전성기 시절의 수준을 회복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의 성장이 전 세계 경제 성장을 크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블랙홀처럼 전 세계의 자원을 빨아들이지만, 그렇게 중국으로 흘러가는 자원은 절대 공짜로 제공된 게 아니었다.

“조금 자랑을 해 보자면 거품을 걷어내는 데, 저와 골드가 열심히 일조하고 있습니다. 장담하건대, 이번 겨울은 따스하게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유재원의 장담에 박수가 쏟아졌다.

인공지능 골드의 주택담보대출 채권 재평가 작업과 P마켓에 이뤄진 혁신을 염두하고 하는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유재원의 따스한 위로의 말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빈말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는 연말이 되면 확인될 것이다.

“아 참, 후속작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분이 많더군요. 아마 그분들은 진짜로 저의 다음 영화에 대해 궁금하셨다기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다음 위기가 무엇인지 더 궁금했기에 그런 식으로 물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유재원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대목으로 넘어왔다.

실제로 여러 방면에서 유재원에게 다음 영화는 무엇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테드 터너 씨였다.

테드 터너는 이번 금융위기로 알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유재원에게 모든 포커스가 집중된 탓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하락에 배팅함으로써 큰 수익을 보았다.

테드 터너가 투기와 비슷한 수준의 극단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남들보다 빠르게 말이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의 부회장으로서 비공개 시사회에 참가할 권한이 있었고, 유재원이 하는 일이라면 이제는 무엇이든 찬양하는 수준이 된 테드 터너는, 당연히 유재원이 각본을 쓰고 제작도 지원했다는 영화를 놓치지 않았다.

비공개 시사회에 참석한 다음 날, 무척이나 고민을 했던 테드 터너는 큰 결심을 하고 하락에 배팅했다. 그렇다고 선물 옵션을 하는 건 아니었고,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 S&P 지수, 나스닥 지수 등과 연계된 지수 연동형 펀드(ETF)에 투자한 것이다.

물론 인버스 ETF를 선택했고, 투자의 규모는 대략 10억 달러 수준이었다고 했다. 선물 옵션에 다이렉트로 투자하는 것보다는 수익률이 낮긴 했다. 그래도 10억 달러의 투자원금은 투자가 끝난 시점에서 50억 달러 정도로 불어났다.

이 정도가 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도 믿음이 생길 수준이다. 그런데 테드 터너는 유재원과 인연을 맺은 다음부터 유재원의 행보를 생생히 지켜본 사람이니, 광신도 수준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이뤄낸 현대 문명에 종말을 가져올 위기를 상상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대위기 말입니다. 세계 3차대전? 저는 전쟁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는 국지적인 전쟁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전쟁이 끝나는 일은 없겠지만, 문명의 종말을 초래할 만한 대전쟁은 없을 겁니다. 바로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핵 억지력이다.

핵전력이 무력화되지 않는 한, 핵은 확실한 전쟁 억지력을 보유한다.

“만약 현대 문명이 무너질 만큼 강력한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셋 중 하나일 겁니다. 자연재해, 기상 이변 그리고 미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입니다.”

유재원의 말에 일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이란 축복 받은 땅에서는 전쟁의 위협 말고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들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대다수는 유재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할리우드의 배우들 중에는 환경 운동에도 열심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재원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이 시간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전문가들이 이러한 위기를 먼저 포착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으니까요.”

위기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커다란 산업이기도 했다.

자연재해는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막아야 했고, 기상 이변에서는 식량과 생필품 확보가 최우선이다. 전염병의 경우에는 치료제와 백신이 필요하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산업이다.

“이러한 전문가 집단 중에서도 우리 ID 그룹이 최고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중대한 위협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유재원은 결국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미래의 위협에 대해서 최선의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누가 뭐라고 해도 ID 그룹뿐이었다.

가까이에는 쓰촨성 대지진이 올 것이고, 조금 먼 2011년에는 동일본대지진이 터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기상 이변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으로 인한 기상 이변이 농작물의 작황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데이터도 수집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전염병은 그야말로 인류가 극복해야 할 영원한 굴레와도 같은 것이었다. 위협이 다가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백신을 만들어도 변이가 생기면 먹히지 않는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서 유재원은 차례차례 대비책을 갖춰 나가는 중이었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흘러나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작가로서가 아니라 ID 그룹의 오너로서 할 말을 잔뜩 해 버렸다.

“아차,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음, 기회가 된다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영화로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먼저 말했던 3가지 위협 중 제가 제일 두려운 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거든요. 고맙습니다!”

뒤늦게 손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오스카상의 존재감에 이탈되었던 궤도는 정상을 되찾았다.

게다가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번을 포함해 79회나 치러진 시상식이었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법도 잘 알았다. 유재원이 마지막에 수습을 한 덕에 코닥 극장 안에는 다시금 떠들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수상 소감은 결코 의미 없이 흘러가진 않았다.

유재원이 미국과 세계 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 하나만으로도 다음 날, 미국의 주가는 상승했다. 게다가 상승을 이끄는 종목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언급했던 것들이었다. 미국의 대표 건설주인 벡텔이나 화이자 같은 대형 제약회사 주가가 주가의 상승을 이끌었다.

사실 투자자들은 ID 그룹의 계열사 중에 건설이나 의료 분야를 노리고 싶었는데, 주식시장에 상장된 ID 그룹의 계열사들은 IT 분야뿐이었다.

유재원이 말했던 부분은 ID 하이테크 연구소, 그리고 엉뚱하게도 ID 파운데이션에 나뉘어져 있었다.

투자자들은 어쩔 수 없이 꿩 대신 닭이라고 해당 분야의 대표 종목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직후, 유재원 부부는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대 팀과 함께 떠들썩한 파티를 즐겼다.

LA 해안가 근처의 아담한 호텔 하나를 통째로 전세를 내어 애덤 맥케이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 모두가 함께 즐기는 파티였다. 당연히 유재원이 통 크게 쏘는 것이었기에, 술과 음식은 물론 호텔에서의 숙박까지도 무제한 제공되었다.

그것도 하루만 하고 끝이 아니라, 원한다면 2, 3일이고 묵을 수 있게 조치를 했다. 다만 유재원 부부는 현업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당일 새벽까지만 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당장 유재원이 처리해야 할 일에는 북한의 자원 탐사와 대지진에 대한 발표가 있다.

수라 프로젝트 시설을 이용해 자원 탐사를 하면서 대지진의 전조도 포착했다는 것을 발표해야 했다.

지진 예측이라는 건 풀리지 않는 난제와 같았다.

대지진을 예측해 발표하게 된다면 지구과학에 일평생을 바친 학자들의 무수한 문제 제기와 반론이 쏟아질 것은 자명했다. 전문가 집단의 검증을 확실하게 돌파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춰 놓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유재원이 회귀를 준비하면서 만든 마스터플랜에는 이에 대한 대비책들이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비록 마스터플랜의 타임테이블은 이론과 실제의 괴리가 크게 생겨나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마스터플랜에 담긴 미래 지식의 가치는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이 밖에도 3월 1일에는 라이트닝 볼트의 신차 출시 행사가 있었다. 무려 15년에 걸친 투자가 비로소 결실을 보는 것이기에 유재원은 직접 디트로이트로 가서 출시 행사를 주관하기로 했다.

여기에 바뀐 가족계획에도 힘을 써야 했으니, 그 어느 때보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그 어떤 상황도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거뜬하게 처리했다. 지금이 아무리 힘들어도 회귀 전 그 지옥과 같은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며칠 후.

스케줄이 있는 디트로이트로 출발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유재원은 출발하기에 앞서 김대석 비서실장으로부터 잠깐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이건 다 뭔가요?”

“인터뷰 요청입니다. 그야말로 무수한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패드 위에 띄워진 문서는 열심히 스크롤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종이 문서였다면 제법 무게가 느껴질 만한 분량이었을 것 같았다. 다행히 ID 그룹은 웬만한 업무는 진작에 전자 문서로 대체된 덕에 안드로이드 패드로 충분했다.

“특히 한국에서 관심이 매우 큽니다. 한국인 최초의 오스카상을 거머쥐신 덕입니다.”

역시 고국이었다.

유재원 개인의 수상이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그것도 진심으로 말이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축전도 받았고, 정치권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축하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하신 건 부모님과 친척들이었다. 오랜만에 덕진리 동네 입구에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렸다고 했다. 심지어 부모님은 ID톡으로 인증 샷을 유재원에게 보내주시기도 했다.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받을 수 있는 상이 있으면 열심히 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유재원은 잠깐 생각해 보니 의외로 상복은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스카상 이전에는 필즈상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이제껏 이룬 업적이라면 컴퓨터 분야에서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튜링상이나, 진짜 노벨상을 받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유재원이 ID 그룹이라는 거대한 기업 집단의 오너였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유력했다.

“음, 북한에 가기 전에 한국에 들를 거니까, 그때 만나기로 하죠. 그렇다고 모든 요청을 다 수락할 수는 없으니 3개 정도로 줄여 주세요.”

“예, 회장님!”

잠깐 상념에 빠졌던 유재원은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김대석으로부터 아침 정규 보고를 모두 들은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디트로이트로 출발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띵!

그때, 유재원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렸다.

-마스터, 중요 인물로 설정한 자베드 카림으로부터 ID톡이 도착했습니다. 메시지를 읽어드릴까요?

예전 같으면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누가 보낸 건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 비서 골드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자베드 카림?

순간 자베드가 누군지 기억을 더듬어 보던 유재원의 뇌리에 유튜브가 번뜩 떠올랐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이네요!

건강하게 잘 보내시고, 월요일 자정에 다시 봐요~~!

×

골든 타임유튜브라는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유재원은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잠금을 풀었다. 잠금이 풀리고 나타난 화면에는 ID톡이 실행된 상태였기에 자베드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길다.”

10줄 정도 메시지로 유재원은 길다고 하지 않는다. 큼직한 스마트폰의 화면을 글자로만 가득하게 보일 만큼 장문의 메시지였다. 줄을 세어 보니 50줄이 넘는 분량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IDW 파일로 보내는 게 나을 텐데, 생으로 메시지 창에 써넣다니.

확실히 실리콘 밸리에서 특별한 성취를 거둔 사람들은 뭔가 비상한 것들이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다.

“음.”

읽어보니 메시지가 길어질 만했다.

처음부터 죄송하다고 시작된 메시지에는 유튜브 운영이 어려움에 처했고, 투자해 주신 돈을 모두 날리게 되어서 진짜 미안하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분량은 유튜브의 운영 데이터였는데,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튜브가 망했네.”

메시지를 끝까지 읽은 유재원은 유튜브의 파산을 인정했다.

‘투자해 주신 돈’이라는 자베드의 메시지에서 알 수 있듯 유재원은 제법 큰 돈을 유튜브에 투자했다. 다만 지분을 샀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투자로서 상장과 같이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면, 투자금의 30% 정도의 추가 수익을 정산 받는 엔젤 투자였다.

투자 시점은 유튜브가 생기고 난 직후였다.

유재원이 축하의 영상을 올렸는데, 그걸 유튜브 개발자들이 보고서 고맙다고 톡톡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후 톡톡의 다이렉트 메시지로 짧게 이야기를 하고서는 엔젤 투자를 결정했다. 그 액수는 1,000만 달러로, ID 그룹의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미미한 금액이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자금 창고인 ID 인베스트먼트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그냥 유재원의 개인 돈으로 투자를 했다.

“유튜브가 망하는 건 내가 생각한 미래엔 없던 일인데.”

자베드의 메시지에는 유튜브가 망한 이유가 구체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저 최근 수익 모델로 등장시킨 강제 광고 시청에 사용자들의 극심한 불만과 외면을 샀다는 것 정도였다.

하긴 최근 시작된 유튜브의 강제 광고는 문제가 있었다.

제일 짧은 게 15초나 되는데, 건너뛰기는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새로운 동영상을 클릭하면, 광고가 무조건 나온다.

회귀 전 유튜브는 이렇지 않았다.

수익 모델 따위는 개나 주고, 어마어마한 사용자 수를 확보할 때까지 무제한에 가까운 서비스를 제공했었다.

유재원도 회귀 전 마스터플랜을 세우면서 유튜브의 도움을 아주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다. 유용한 정보를 찾으려면 구글링이 최고였지만, 간단한 수준의 정보는 유튜브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런 유튜브가 망했다니.

아무래도 지분을 가진 개발자 중에 누군가가 욕심을 크게 냈다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수익 모델에 대해 크게 압박을 준 게 틀림없다는 판단이다.

“김 비서실장님. 여기 유튜브 개발자들과 미팅 약속을 잡아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그러면 내일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이라도 좋아요. 그리고 유튜브에 대한 근황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세요.”

자베드의 ID톡에 대한 조치를 마무리한 유재원은 출장길에 올랐다.

몇 시간 후.

디트로이트 메트로폴리탄 웨인 카운티 공항에 내린 유재원은 준비된 차를 타고 움직였다. 준비된 자동차는 당연히도 라이트닝 볼트의 6인승 전기 SUV 불칸이었다. 6인승 버전을 4인승으로 개조한 것인데, 널찍하게 확보한 뒷자리에 비행기의 비즈니스 좌석을 설치해 버렸다.

디트로이트 공장이 의전용으로 만든 차량인데, 당연하게도 유재원 전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좌석만 바꾼 게 아니라, 내부의 인테리어도 확 바꾸어서 리무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급을 높여 놓았다. 게다가 100% 전기 자동차인 불칸의 성능은 모든 면에서 휘발유 자동차들을 압도했다.

스포츠카에 비견될 주행 성능인데, 떨림이나 소음은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안전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엔진 소리를 밖으로 들려주겠는가. 듣기 좋은 엔진 소리를 만들기 위해 라이트닝 볼트사는 사운드 관련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최고의 소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전용차를 타고 공항을 벗어난 유재원 일행은 중심가를 관통해 디트로이트 남부의 페어플레이 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와, 분위기가 전과 많이 달라졌네.”

아직 라이트닝 볼트사의 공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2년 전쯤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제일 빠르게 다가오는 건 문을 열고 있는 상점들이었다.

번화가에 상점들이 문을 열고 있는 건 일상적인 모습이었는데, 과거 디트로이트는 그런 일상이 파괴된 도시였다. 번화가에서도 문을 닫고 있는 상점들이 있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은 문을 닫은 상점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번화가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화려함도 생겨났다. 큼직한 대형 매장도 들어섰고, 사람들도 북적였으니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라이트닝 볼트사의 공장이 불러온 기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라이트닝 볼트사의 공장이 완공되면서 직접 고용한 인원만 2만에 달했다. ID 그룹의 표준 임금 체계를 따르는 라이트닝 볼트사였기에, 2만 명의 최소 임금은 5만 달러 이상이다. 간부 이상의 직급은 10만 달러 이상이다.

고소득 노동자들이 많은 실리콘 밸리에서는 평범한 수준이겠지만, 디트로이트에서는 상당한 고소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이트닝 볼트사가 들어오기 전, 디트로이트의 연평균 소득은 3만 달러 이하였으니 말이다.

여기에 라이트닝 볼트를 따라서 들어온 퍼스트 파티 업체들과 서드 파티 업체들도 상당했다. 전기 자동차의 구조는 기존 휘발유 자동차에 비해 상당히 간단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부품의 숫자는 1만 개 이상이었다.

이를 공급하기 위한 회사들이 연달아 디트로이트에 들어오면서, 과거 모터 시티의 영광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있는 신차 출고식은 크고 화려한 행사로 꾸려졌다.

냉정하게 보자면 정식 차대 번호를 달고 출시되는 첫 차에 대한 기념, 여기까지 차를 받으러 오겠다는 예약 고객에게 소정의 선물과 함께 자동차 열쇠를 인도하는 것이 전부인 행사였다. 그런데 디트로이트가 되살아났다는 의미가 더해지면서 엄청나게 큰 행사로 커진 것이다.

잠시 후, 유재원 일행이 디트로이트 남부 라이트닝 볼트사의 공장에 도착했다.

“회장님, 지금 저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요?”

거기서 유재원은 잔뜩 상기된 볼트 사장을 볼 수 있었다.

전기자동차의 꿈으로 실리콘 밸리에 들어왔던 볼트 사장에게는 예약 구매자에게 첫 차를 인도하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유재원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회귀했던 당일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고, 친구들과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일을 시작해서 서울에 101층짜리 본사를 지어 올렸을 때에도 감회가 남달랐다.

볼트 사장 역시 공장이 세워질 때만 해도 그저 막막했을 텐데, 이제는 제대로 된 전기자동차를 매년 100만 대씩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연간 100만 대는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10년 뒤, 전 세계 자동차의 반을 전기자동차로 바꾸는 게 라이트닝 볼트사의 장기 계획이었다. 20년 뒤에는 전 세계 자동차를 모두 전기 자동차로 바꾸겠다는 것이 초장기 계획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는 연간 천만 대 이상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니, 아직 갈 길은 멀었다.

“그럼요. 현실입니다. 실감이 안 나시면 제가 꼬집어 드려요?”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됐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해 달라니? 그러면서 볼트 사장은 오른쪽 팔을 유재원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내뱉은 말은 지키는 유재원이 따끔하게 꼬집었다.

“우왓! 사장님이 아직도 20대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너무 아프군요! 그래서 더 좋습니다.”

성적 취향으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볼트 사장은 그저 꿈이 아니라서 좋다는 말이었을 뿐이니까.

“자, 그럼 공장을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그래요.”

예전 유재원이 기공식을 위해 찾았을 때는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이젠 그 자리에 최신식의 자동차 생산 라인이 들어선 것이다.

볼트 사장은 자랑스럽게 유재원을 안내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동차 생산은 멈추지 않고 있었기에, 전반부 근무자들이 총출동해서 열심히 조립 중이었다.

특이한 건 바로 8명 정도 되는 인원이 한 팀으로 묶여서 하나의 자동차를 끝까지 조립한다는 것이다.

“팀 조립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일반 자동차의 경우 컨베이어 벨트에 자동차를 올려두고, 노동자들은 맡겨진 파트만 담당했다. 의자를 설치하는 사람은 끝까지 의자만 설치하고, 문짝을 설치하는 사람은 문짝만 설치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면 라이트닝 볼트사는 8명을 팀으로 묶어서 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자동차를 조립했다. 이는 수제작으로 만드는 슈퍼카에 쓰이는 방식이었는데, 볼트 사장은 엔트리 라인인 뉴로까지도 이 방식을 적용했다.

“처음엔 슈퍼패스트 생산 라인에만 적용해 봤는데, 효과가 매우 좋았습니다.”

다만 슈퍼패스트 생산 라인과의 차이점은 있었다.

슈퍼패스트의 팀 방식은 별도의 작업 공간이 있었고, 거기의 모든 부품이 고급이 되는 것이라면, 뉴로와 불칸 생산 공장에서는 팀 전체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가서 작업을 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정의를 하자면 팀 조립 방식에 컨베이어 벨트를 추가한 하이브리드였다.

대형 컨베이어 벨트는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지만, 쉬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정 시간 내에 조립을 끝마쳐야, 다른 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제한 시간이 있는 것인데, 직원들의 숙련도가 오를수록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도 조금씩 빨라질 것이다.

이러한 팀이 디트로이트의 슈퍼패스트 공장에는 120팀, 뉴로 공장에는 1,200팀, 불칸 공장은 480팀으로 운영 중이었다.

4조 2교대 근무였으니, 뉴로 공장에서는 한 번에 300팀이 동시에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현재 팀 퍼포먼스는 1시간당 1대입니다.”

볼트 사장의 말에 유재원은 빠른 건가 하고 의문이 생겼다. 다만 볼트 사장이 굉장히 뿌듯해하는 얼굴이었기에, 나쁜 수준은 아니라고 이해했다.

300팀이 동시에 운영 중이니 하루면 7,200대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다. 한 달이면 20만 대가 넘는다.

“이게 가능한 게 로봇을 적극 활용한 덕입니다.”

자동차 업계는 오래전부터 산업용 로봇을 생산에 활용해 오고 있었다. 라이트닝 볼트에서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사람 8명이 한 팀을 이루고 있지만, 제9의 멤버로 로봇들이 있는 것이다.

로봇들은 조립 단계에 맞춰 부품을 가져다주었다. P마켓 물류창고에서 보았던 자동 카트가 조립 단계에 따라 필요한 부품을 배송해 주는 것이었다. 여기에 산업용 로봇은 사람 손으로 하기 어려운 곳의 조립이나, 무거운 부품을 들어주거나 고정하는 등의 도움도 크게 주었다.

이러한 로봇은 보통 산업용 로봇을 만드는 회사로부터 주문 제작을 하는데, ID 그룹은 그룹 내부 거래로 끝내 버렸다.

세계 최고의 산업로봇 생산 업체인 화낙이 ID 그룹의 소속이었고, 고성능 정밀 로봇의 신성 보스턴 다이내믹스도 한 식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낙은 일본의 신일본투자은행이 보유한 조커였다. 원래는 후지쯔에 속했던 기업이었는데, 일본의 경제 위기 때 후지쯔의 지분을 신일본투자은행이 전량 획득하면서 ID 그룹에 넘어왔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매우 드물었다.

굳이 ID 그룹의 식구라는 걸 드러내서 좋을 건 없기도 했고, 화낙 측에서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인수를 수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두 회사에 커스텀 주문을 넣은 로봇이 대량으로 들어와 생산 라인에 배치되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사람 반, 로봇 반인 수준이었다.

잠시 후.

출고 기념 행사가 시작되었다.

유재원은 기꺼이 공장까지 찾아온 예약 구매자들에게 자동차 열쇠와 소정의 상품을 넘겨주었고, 사진도 큼직하게 찍어 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출고 기념식에 찾아온 디트로이트의 VIP들이 한마음으로 축하했다.

예약 구매자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전기자동차에 대한 편견이 적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큰 이들이 먼저 예약 구매를 신청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자동차를 인도 받은 예약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행동을 했다. 지문 인식, 목소리 인식, 인공지능 비서의 닉네임 설정 그리고 데이터 공유였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처음 구매한 사람들이 하는 일과 똑같았다.

실제로 라이트닝 볼트사의 전기자동차는 대시보드에 가로로 긴 스크린이 있었다. 여기에 모바일 안드로이드를 바탕으로 스마트 자동차에 필요한 기능이 추가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담겨 있었다.

세팅이 끝나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목소리만으로도 자동차의 시동을 켜거나 잠글 수가 있었다. 물리적인 열쇠가 기본값이지만, 보안성을 유지하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도 여럿 생긴다.

이는 라이트닝 볼트사만의 스마트 기능이었다. 그렇지만 구매자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건 자잘한 스마트 기능이 아닌, 자율주행이었다.

완전 자율주행 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자들이 스티어링 휠을 두 손으로 잡고 있어야만 활성화되는 기능이지만, 기술적으로는 완성되었다. 이제 겨우 연구를 시작하는 다른 자동차 회사들보다 최소 12년은 앞섰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증을 끝낸 구매자들은 바로 자동차에 타서 집으로 출발했다. 신나게 달리기 시작한 이들 중 십중팔구는 내비게이션으로 본인의 집을 지정하고 자율주행을 시작했다. 구매자들이 대부분 자율주행을 켜고 출발했음에도, 단 하나의 문제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다음으로는 출고식도 치렀다. 한 번에 여러 대의 자동차를 옮길 수 있는 캐리어에 공장에서 나온 따끈한 자동차들을 싣고, 북미 전역으로 출발하는 행사였다.

자동차 캐리어 트럭이 떼를 지어 출발하는 모습을 손뼉치며 축하해주는 것이 마지막 일정이었다.

성공적인 디트로이트 출장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유재원은 자세히 정리된 유튜브 보고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두툼한 보고서였지만, 유재원이 제일 궁금한 건 유튜브를 망하게 만든 범인이 누구였나 하는 것이었다.

“범인이 나였어?”

놀랍게도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범인은 유재원 본인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설마, 보고서 첫 마디가 '유튜브는 회장님 때문에 망했습니다'라고 시작했다고 받아들이시는 분은 없겠죠?

×

골든 타임유튜브에 엔젤 투자로 1천만 달러나 쏟아놓고, 뒤로는 유튜브가 망하게 했다는 건 아니다. 그저 유재원의 행보가 유튜브에 도움이 1도 되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요소들이 누적되어 유튜브가 망하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FHD 시대가 예전보다 훨씬 일찍 도래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네.”

회귀 후 유재원이 제일 적응되지 않았던 건, 느리디느린 컴퓨터였다. 다음으로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이었다.

가뜩이나 유재원의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단적으로 덕진리의 웬만한 집들은 진작에 컬러 TV로 바꾸었는데도, 유재원네 집은 흑백 TV였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던 것과, 직접 보던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텔레비전 시스템을 디지털로 바꾸는 데 유재원은 열심히 공을 들였던 것 같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만들 때도 고화질 영상 재생과 편집에 공을 들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잘한 일은 동영상 압축 코덱으로 널리 쓰이는 안드로이드 코덱을 무료로 풀어 버린 것이었다.

회귀 전에는 다양한 코덱들이 표준화를 위해 힘을 겨루면서,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면, 이번에는 고화질을 보장하면서도 편집도 간편하고, 인코딩에 대한 부담도 적은 안드로이드 코덱이 일찌감치 천하통일을 하면서 문제가 사라졌다.

덕분에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도 빨라졌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이른 대중화도 유튜브에 결정타였다.

이제 스마트폰에서 디스플레이 모듈 다음으로 중요한 부품이 카메라 모듈이 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카메라 기능을 사용했다.

사진을 찍는 건 기본이고, 동영상 녹화로 다양한 순간을 녹화했다. 유튜브의 창업자 셋도 이러한 트렌드를 감지하고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유튜브의 개발자들이 미처 감안하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고화질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화질은 고용량이란 말과 같다.

유재원이 만든 안드로이드 코덱 덕에 빠르게 FHD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지만 고용량의 단점은 여전했다. 압축률을 높일수록 보다 큰 연산력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니 적당한 수준에서 화질과 용량을 타협하게 되는데, 이는 유튜브에 큰 부담이었다.

아직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나 아이폰에 기본 탑재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일부러 찾아서 가입하고 앱도 스스로 설치해야 했다.

그럼에도 벌써 수백만 명의 가입자를 모았고, 이런 가입자들 중에 상당수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당연히 사용자들은 고화질의 파일을 업로드했다.

투자를 받으면, 받는 족족 서버를 늘렸음에도 서버의 스토리지 용량은 늘 부족한 상태였다. 심지어 전용 서버가 아니라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해 서버를 임대해 쓰고 있음에도 용량 부족은 유튜브 개발자들에게 늘 고민이었다.

다음으로 문제는 저작권이었다.

유저들이 만든 동영상에는 십중팔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배경 음악이 깔렸다. 그런데 배경 음악에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팝 음악을 쓰게 되면 저작권 위반이었다. 최악은 유료 콘텐츠 동영상을 냅다 업로드하는 것이었다.

유튜브 측이 제일 많이 삭제한 콘텐츠라면 역시 성인물이었다. 다음은 타임플렉스의 콘텐츠였다.

유튜브 초창기에는 저작권 위반 사례에 대해 유튜브 경영진에게 고소가 들어왔다. 그렇게 쏟아진 고소장을 모아 보면 벌써 한 트럭은 되고도 남았다. 그나마 지금은 약관을 수정해서 동영상 공유 플랫폼이라는 것을 명시했고, 업로드로 일어날 모든 문제는 업로드한 당사자에게 있다는 걸 확실히 못을 박아 놓았다.

이렇게 단호한 조치를 하고 나서야 고소장이 줄어들긴 했는데, 대신 엄격한 관리의 필요성이 커졌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저작권 위반 콘텐츠와 부적절한 콘텐츠를 걸러내야 했는데, 서비스의 규모가 커진 만큼, 고용해야 할 관리자의 숫자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단순 관리자를 구하는 건 그야말로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에 아웃소싱을 주었다. 가장 먼저 고려한 곳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유튜브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천안문 사건이니, 티베트 이야기는 중국 당국을 너무나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 중국은 유튜브의 민감한 콘텐츠에 대해 적극적인 관리를 요구했지만, 유튜브의 창업자들은 호기롭게 거절했다.

젊은이들인 만큼 단순한 호기가 제일 큰 비중이었지만, 유튜브의 본진은 엄연히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제일 크게 사업을 하는데, 중국의 입김을 받아서 미국에선 문제될 것 없는 콘텐츠를 필터링했다고 알려진다면 본진 자체를 잃을 수 있었다.

확실한 거절 의사를 보이자 중국의 문화 콘텐츠 검열을 총괄하는 광전총국에서 유튜브의 접속 차단 조치를 내려 버렸다. 이로 인해서 중국에서는 유튜브 접속 자체가 불가능해졌기에, 콘텐츠 모니터링 아웃소싱은커녕 유튜브 진출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결국 중국의 문턱을 넘지 못한 유튜브는 모니터링 업무를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지금의 성장 속도라면 앞으로 사람 손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건 불가능해질 만큼 업로드 용량이 폭증할 거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사람 손으로 하느니, 차라리 인공지능에 맡기는 게 헐값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유튜브는 인공지능을 도입하기도 전에 자본금이 바닥나 버렸다. 크리티컬이 터진 건 바로 인터넷망 사용료였다.

미국이나 한국에는 망 중립성이란 말이 없다.

미국은 타임워너 넥스트컴이, 한국은 데이콤이 인터넷망의 지배자적 위치에 있었고, 가격을 결정할 권리도 있었다. 망 중립성이라는 단어는 2003년에 나온 것인데, 인터넷이 대중화된 건 90년대 중반이었다.

일찌감치 개인과 기업에 대한 요금 체계가 정해졌고, 그 규칙은 대단히 합리적이었기에 대다수는 문제없이 사용했다.

개인용으로는 프리미엄 100MBps 서비스가 월 40달러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기업용의 경우에는 10GBps가 월 1만 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었다. 개인용에 비해 상당한 가격이지만, 그래도 과거 전용선에 비하면 매우 저렴했다.

그렇지만 100GBps단위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용량이 10배가 올랐으니 월 사용료도 10만 달러 아닌가 싶지만, 실제 요금은 100만 달러다. 10Gbps 장비와 100GBps 장비의 가격도 차원이 다르고, 안정적인 트래픽 유지를 위해 필요한 서버 자원의 규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100GBps 서비스를 사용하는 인터넷 업체도 몇 곳 없었고, 이런 회사들은 대부분 100만 달러의 비용 정도는 거뜬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했다.

유튜브가 여기에 딱 걸렸다.

아직도 스타트업 규모인 유튜브였지만, 동영상 공유 서비스인 만큼 유튜브가 유발하는 트래픽의 크기는 거대 인터넷 기업 못지않았다.

작년 여름까지는 10Gbps 서비스를 2, 3개 정도 쓰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2006년 가을 들어서 유튜브가 폭발했다. 시도 때도 없이 버퍼링이 걸렸고, 동영상 업로드에도 시간이 대폭 늘어나며 사용자들의 불만이 폭증했다.

유튜브는 결국 작년 겨울 기업용 서비스로 최상급인 100Gbps급으로 올라와야 했다. 문제는 통신 비용이 대폭 상승하면서 자본금이 고갈되는 속도가 한층 빨라진 것이다. 인터넷 비용도 문제인데, 임대하는 ID 클라우드 서버의 용량도 커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보자면 유튜브에 사람들이 몰리고,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투자도 쉽게 받을 줄 알았지만, 이는 유튜브 창업자들의 오만이었다.

유튜브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구축해야 할 인프라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밑이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았다.

유재원이 엔젤 투자한 1천만 달러에, 유튜브 창업자들이 일부 지분을 팔고 조달한 투자금을 다 합치면 벌써 수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돈을 인프라 구축에 모두 퍼부었음에도 아직도 부족했다.

반면 수익 모델은 아직도 의문이었다.

“아, 그 고정 광고 시스템이 그냥 나온 건 아니었네.”

그래서 선택한 것이 15초 동영상 광고의 강제 시청이었다.

광고는 인터넷 비즈니스의 기초였다. 그중에서도 애드센스 동영상 광고가 제일 단가가 높았다. 다른 웹서비스라면 동영상 광고가 어렵지만, 유튜브는 태생부터 동영상 서비스이니 쉽게 추가할 수 있었다.

자베드와 동료들은 이러한 광고 실적을 데이터로 정리해서 투자자 모집에 쓸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는 최악의 결정이 되었다.

넘기기가 되지 않는 광고는 유튜브 사용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끌어냈다.

트래픽 용량이 뚝 떨어지는 게 그래프에서 훤히 보일 정도다. 유재원의 모니터 위에 띄워진 그래프의 기울기는 -45도 정도를 그리고 있었다. 유튜브 측에서 체감하는 수준은 그야말로 수직 낙하일 것이다.

무엇보다 유튜브의 대체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특히 한국산 UCC 사이트들이 유튜브의 확실한 반면 교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튜브가 흥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이미 UCC라는 사용자 제작 콘텐츠가 크게 부흥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텔레비전에서도 UCC를 주목해서 콘테스트를 열기도 했을 정도다. 이러한 UCC 사이트 중에서도 제일 흥하는 곳은 MN캐스트라는 업체였다. 그 뒤를 판도라TV와 W플레이어라는 회사가 뒤쫓고 있었다.

이들 업체도 유튜브가 겪는 문제와 똑같은 상황이긴 했다. 늘어나는 트래픽으로 인한 인터넷 요금과 서버 비용에 대한 고민, 그리고 수익 모델 창출은 모든 인터넷 업체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업체는 광고에 5초가 지나면 스킵할 수 있는 버튼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유튜브와는 차별성이 큰 점도 있었다.

바로 인플루언서의 활용이다.

인터넷에서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이들은 본인을 팔로워 한 이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동영상 SNS에서는 대단한 강점이 되었다. 유튜브의 경우 새로운 콘텐츠를 주기적으로 올려야 꾸준한 조회 수를 확보하는데, 그렇게 확보한 조회 수가 딱히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유튜브 자체가 수익 모델을 고민 중이었는데, 동영상을 업로드한 이들에게 수익을 공유하는 논의 자체는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

반면 한국의 동영상 플랫폼인 W플레이어는 수익 창출 분야에서 제일 앞서 있었다. 바로 인터넷 라이브 방송, 일명 인방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과감하게 시청자가 인방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직접 후원할 수 있는 기능을 도입했다. 후원금 중 30%를 본인들의 수수료로 받아 가고, 나머지 70%는 인방 방송국에 주는데, 세금은 방송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꼼수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후원금 중에 60%가 콘텐츠 창작자의 몫이었다.

W플레이어에서는 인방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을 브로드캐스팅 자키, 일명 BJ로 명명했다.

“음, 이번에도 BJ라니.”

회귀 후 미국에서 지낸 날이 더 많은 유재원이었다. 그렇기에 BJ가 브로드캐스팅 자키라는 말보다는 성적인 은어에 가깝게 느껴졌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BJ라는 단어가 아직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W플레이어에서 많은 팔로워 숫자를 자랑하는 BJ들은 대부분 과감한 노출로 유명한 젊은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터넷 여론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노출로 돈을 번다고 해서 아주 혐오스러운 멸칭이 붙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90년대 인터넷이 막 보급되었을 때, 보급률을 끌어올린 첨병은 바로 성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팔로워라는 숫자로 구체화되는 인기가 곧 돈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인기가 돈으로 쉽게 바뀐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도 이상한 광경이지만, 21세기 중반만 되면 팔로워 숫자는 곧 자산과 같았다.

W플레이어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후원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고, 유튜브는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다음 날.

자베드 카림,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들은 유재원의 샌프란시스코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기가 죽었다. 으리으리한 크기도 크기였지만, 좋은 일로 이곳을 방문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평점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데, 경쟁사들은 무섭게 쫓아오고 있다. 좀 더 총알을 쏟아붓기 위해 금고를 열어야 하는데, 투자금도 모두 날려 버린 상태였다.

지분을 담보해 투자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엔젤 투자금까지도 다 써 버린 상태였기에 더는 방법이 없었다.

“회장님은 거실에서 여러분들을 보기로 하셨습니다.”

김대석 비서실장이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유재원에게 인도했다.

유튜브 창업자들이 김대석의 뒤를 따라가자 샌프란시스코만이 훤히 보이는 거실 앞에서 유재원을 볼 수 있었다.

“유 회장님! 유튜브를 인수해 주십시오!”

그러자 자베드를 비롯한 유튜브 창업자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인사도 하기 전에 말이다. 이들 셋은 유튜브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할 때부터 유튜브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를 했었다.

다양한 방안들이 나왔고, 모조리 무산되었다. 이제 남은 건 딱 하나. 유재원에게 유튜브의 인수를 타진하는 것뿐이었다. 거절한다면 망하는 것이고, 허락한다면 되살아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이들 셋은 본인들이 쥐고 있던 유튜브의 모든 지분을 포기할 준비도 모두 마쳤다.

다만 길게 이야기하면서 유재원을 설득해낼 가망성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만나자마자 바로 인수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고 입을 모았다.

인수해 달라고 하자마자 깜짝 놀란 듯 보이는 유재원의 모습에 너무 앞뒤를 잘라먹은 거 아닌가 하는 후회가 빠르게 들었다.

“좋아요.”

그런데 유재원은 그들의 걱정이 무색해질 만큼 밝은 목소리로 수락했다.

회귀 전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했고, 그 뒤로 어마어마한 자금을 더 퍼부어 살려낸 것처럼, 유재원도 유튜브를 글로벌 동영상 사이트로 만들 생각을 했다.

한국산 UCC 사이트인 MN캐스트나 판도라TV를 인수해서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해당 업체들은 이미 수년간 운영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틀이 갖춰지는 중이었다. 이미 한국의 상황에 맞춰진 로컬 서비스화가 이뤄진 상태였다. 반면 유튜브는 아직 그 어떤 특색도 갖추지 못했다.

현재 나타나는 객관적 지표로는 , 유튜브 인수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원은 10억 달러에 자베드 카림, 스티브 첸, 채드 헐리의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회귀 전 구글이 16억 달러에 인수했던 것에 비하면, 6억 달러나 저렴해진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창업자 셋은 10억 달러 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더욱이 유재원은 이들 셋의 지위도 현재 그대로 인정을 해서, 유튜브 서비스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유튜브에 새로운 전략을 당장 실행하고 싶었지만, 그건 조금 미뤄졌다. 유재원에겐 동아시아의 중요한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북한의 유전 개발 그리고 쓰촨성 대지진에 대한 예언이었다.

여기에 추가해서 대한민국과 미국은 대선이 있었고, 일본은 중의원 선거도 있었다. 심지어 정보팀의 보고로는 북한의 독재자인 김정일의 건강 상태도 최악이며, 급변사태를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의 10년을 좌우할 골든타임이 지금이다.

[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옛날 생각 나네요.

W플레이어로 하루 종일 무한도전만 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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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 도깨비 슈퍼컴퓨터

한국행 전용기 안.

유재원은 퍼스트 클래스 이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전용 의자에 앉아서 안드로이드 패드를 잡고 있었다.

화면에는 유재원이 세계를 돌며 글로벌 비즈니스에 열중하던 중에 미처 챙기지 못했던 한국의 현안들이 띄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한국의 정치권에 대한 소식들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한국은 대선 레이스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야당 쪽이 꿀잼일 줄 알았어.”

문서의 분량을 따지면 여당은 A4 3장으로 끝이었고, 야당은 100장이 넘어섰다.

특히 한나라당의 분량이 70장이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나라당의 후보들은 경선 때부터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불꽃’이란 대선 때만 되면 자동으로 붙게 되는 수식어 따위가 아니라, 당이 두 쪽이 날 만큼 어마어마한 세력 싸움이 일어났다.

박근혜와 이명박의 대충돌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은 중임제 개헌 후 첫 번째로 현역 대통령 출마였기에, 경선은 없었다. 그저 노 대통령이 재선 후 구상을 밝히면서 선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통일국민당의 경우에도 추대는 없었다.

대선에 나가보고 싶은 후보들 여럿이 경선을 치르긴 했다. 하지만 정병우 대표에 비하면 나머지 후보들이 너무나 밀렸다. 결국 정병우 대표가 무난하게 통일국민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여러 군소 후보들이 난립했다.

그중에는 선거철이 되면 특히 날뛰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이인제 의원과 같은 사람 말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분당까지도 감행했던 이인제였지만, 한나라당에서도 박근혜와 이명박에 밀려서 경선을 뚫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한나라당을 뛰쳐나와서 국민통일당을 재창당하고 스스로 대선 후보가 되었다.

“이회창도 나오셨네.”

여기에 90년대부터 매번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이회창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도전했다. 역시나 거대 정당에서는 받아주지 않다 보니, 국민중심당이라는 충청도 지역 정당에 올라타고 나왔다.

“딱 봐도 가망성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정치인이란 생각하는 게 다른 모양이네.”

유재원이 보았을 때, 이인제나 이회창과 같은 분들은 유통기한이 끝난 분들이었다.

정치 분야에서 뭔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도 없고, 그저 한때 잠깐이나마 포커스를 받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서 실낱과 같은 가능성을 걸고 대선 때마다 매번 나오는 건 합리적인 유재원에겐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쩌면 매스컴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슨 말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온 나라를 뒤덮고, 어디를 가면 모두가 따라붙던 그 시절의 강렬한 기억을 잊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유재원도 여러 번 겪고 있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긴 했다. 특히 최근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또 한 번 느껴보지 않았던가. 강렬했던 그 기억은 강력한 중독성이 있었다. 유재원도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서, 이벤트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회귀 전 그 암울했던 기억과 느낌을 상기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안드로이드 패드를 잠시 내려놓았다.

“생수 한 컵 부탁해요.”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무원이 크리스털 잔에 시원한 생수를 담아왔다. 단번에 컵에 담긴 물을 모두 비워 버린 유재원은 다시 안드로이드 패드에 집중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박근혜 승리!

-박근혜 후보,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도전!

-경선 중 밝혀진 박근혜 후보 의혹, 상당수 사실로 드러나.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은 유재원의 안드로이드 패드에 뜬 기사들의 제목처럼 박근혜 후보의 승리였다.

“이쯤 되면 피로스의 승리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누가 보더라도 보수 성향의 신문사가 낸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한일보가 사라지고 난 다음, 보수 세력의 대표 신문이 되고 싶어 하는 중앙신문과 동아신문이 앞다퉈 박근혜 후보를 띄우는 기사였다.

그렇지만 박근혜 후보의 사정은 3번째 기사처럼 마냥 좋지 않았다.

중도와 객관성을 표방한 문화신문사는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박근혜 후보에 대한 기사를 썼다.

유재원의 마음에 쏙 드는 기사였다.

문화신문은 처음에는 미래그룹의 사보 수준으로 시작했다. 문화신문이 시작한 이유가 전명헌 할아버지의 대선 지원이었으니, 시작은 흑심 가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미래그룹에서 분리된 후, 자력갱생에 들어간 다음에는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미래그룹이 아닌 ID 그룹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만, 미래그룹과 ID 그룹의 대언론 원칙은 차원이 달랐다. 유재원이 언론 마사지 따위는 바라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쓰기를 원했기에 문화신문의 보도 원칙도 올바른 저널리즘에 맞춰지는 것이었다.

덕분에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불꽃 튀는 대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코미디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박근혜 후보, 영세교라는 사이비에 깊게 심취.

-영세교 교주 최태민의 장녀 최필녀가 박근혜 후보 경선에 깊숙이 개입 확인!

-정수장학회 편취 의혹.

-박근혜 후보의 끝 없는 의혹. 본선 레이스, 끝까지 달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

과거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의혹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다. 회귀 전에 박근혜 후보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했고, 다음 2012년 대선에서 겨우 승리해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이명박을 꺾고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대선 후보가 됐다. 대신, 회귀 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비판에 직면했다.

과거에는 잘 숨겼던 의혹들이 모조리 까발려졌고, 그것이 모두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을 타고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유재원의 입에서 이상한 속담이 나왔다.

원래는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원래 속담과 달리 개똥을 약으로 잘 썼기 때문이다.

바로 이명박이었다.

“역시 이 사람은 X맨 역할이 딱이야.”

회귀 전에는 당당히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했고, 그 기세로 대통령까지도 쟁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박근혜 후보에게 간발의 차이로 밀려서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이명박의 행보가 전과 완전히 뒤바뀐 이유에는 당연하게도 유재원의 개입 때문이었다. 핵심부터 들어가 보면 도곡동 땅이 이명박의 발목을 잡았다.

이명박이 미래건설 사장으로 떵떵거리던 시절 이리저리 이름을 돌려가며 숨겨놓은 비자금 중, 전명헌의 눈에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아 보이는 게 들어왔다. 도곡동 땅이었다. 유재원이 없었더라면 실제로도 무탈하게 집어삼키고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재원의 개입으로 인해 전명헌이 일찌감치 알아차렸고, 전명헌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도곡동에는 아파트 대신, ID 그룹의 본사인 101층짜리 빌딩이 들어섰다.

횡령죄로 고소 당해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만기 복역하고서 출소를 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서울 시장을 거쳐, 대권을 노렸을 텐데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대신 정치에 대한 꿈은 그대로였던 듯,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건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서 당내에서 급격히 세를 키웠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서울 시장을 못 했음에도 당내에서 이명박을 따르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돈을 아끼지 않고 펑펑 쓰면서 당내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신망이라는 게 조금씩 생겨났던 모양이다.

“신망? 으흠!”

유재원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에게 1원 하나 쓰는 것도 아까워했던 이명박이었지만, 감옥에 한 번 다녀오고 나니 사람이 달라진 모양이다. 더욱이 지금의 처지는 회귀 전과 달라지긴 했지만, 이맘때쯤에 이명박이란 이름에 모이는 필연성 같은 것도 있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이명박은 한나라당의 네임드가 되었고, 부푼 기대 속에서 2007년 대선을 위한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 본인의 역할은 충실히 해냈다.

박근혜 저격수로 말이다.

박근혜 후보가 애써 숨기고 있던 온갖 의혹들이 모두 이명박 진영에 흘러 들어갔고, 이명박은 궁지에 몰릴수록 그러한 의혹을 모두 풀어냈다.

영세교에 대한 이야기부터 정수장학회를 두고 벌이는 박씨 집안의 더러운 다툼까지. 원래대로라면 2016년쯤에나 드러날 이야기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명박 캠프가 박근혜 후보의 극비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재원의 의지였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후보 측에서는 이명박의 의혹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도곡동 땅 문제는 기본이고, 전과 12범에 대한 의혹들이 이어졌다. 심지어 대학생 시절 프락치 의혹도 제기되었다. 미래건설에 입사한 후 초고속 승진한 것이 프락치의 대가가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집안싸움이 너무 심해지자 한나라당의 원로들 사이에서는 본선을 생각해서 이쯤해서 신사협정이라도 맺고 매너 있는 경선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불이 붙은 두 사람 사이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언론도 열심히 부추겼다.

그렇게 혈투 속에서 결국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상처뿐인 승리였다.

더욱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겼다고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

본선이 남아 있지만 경선 중 터진 각종 비리와 의혹들로 인해서 지지율이 폭락 중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경악하는 건 사이비 종교인 영세교에 심취해 있고, 심지어 영세교 교주의 딸이 그녀의 대소사를 완벽하게 관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나 했는데 당선되면 이상하지.”

자만은 금물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유언 때문이라도 유재원은 마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야구도 그렇지만, 선거 역시나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니 말이다.

특히 선거 국면에서는 무슨 일이고 터질 수도 있었다.

다음 날.

-한국 최초의 오스카 수상자, 유재원 회장을 만나다.

-유재원 회장, 한국 문화계에 적극 투자 할 것.

-한류는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

한국 미디어가 오랜만에 유재원의 얼굴로 가득해졌다.

오스카상을 받은 후 매스컴과 약속했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기삿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유재원이란 이름은 클릭 숫자와 시청률을 보장하는 핫이슈였기에, 모든 언론이 이를 받아썼다.

-단독 특종!

-셰브롱 탐사 결과 곧 발표! 결과 매우 긍정적!

-북한에 석유 매장 가능성 매우 높다!

그렇지만 진짜 특종은 따로 있었다.

북한 자원 탐사 개발권을 얻은 셰브롱은 먼저 미국에서 긴밀하게 연결된 몇몇 언론에게 소식을 알렸다. 정확한 데이터는 아니었고, 북한 자원 탐사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전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그걸 받아쓰면서 대충 200% 정도의 과장을 추가로 보탰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들도 드디어 그 소식을 접했다. 인터넷 언론의 빠른 발달로 인해서 해외 언론들의 동향을 체크하는 게 훨씬 쉬워진 오늘날이었다.

즐겨찾기로 등록해 놓은 언론사들을 클릭해 보는 것만으로도 최신의 기사를 얻을 수 있었다.

-유재원 회장 입국의 진짜 목적은 대북 자원 탐사 결과 발표?

놀랍게도 받아쓰기를 하면서 약간의 변형을 추가했던 국내 언론사 중에서 제법 정확하게 유재원의 방문 목적을 추측하는 기사도 있었다.

정답이었다.

과거 텍사스 23번 유정 탐사를 성공시켰던 자원 탐사 프로그램은 그 이후로도 학습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었다. 덕분에 러시아의 수라 프로젝트 재가동을 통해 얻은 지질 로우 데이터를 바탕으로 북한 땅에서 매우 유력한 유전 지층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기계학습에서 학습의 시작점을 어디로 정해주느냐에 따라 결괏값이 나오는 속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은, 이맘때쯤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세팅을 해 두었다. 단지 학습 알고리즘이 뭔가 잘못되어 데이터에서 정보를 추출하지 못할 가능성이 조금 있었다. 역시나 유재원의 계산을 틀리지 않았다.

지질 탐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한 자원 탐사 프로그램이 추출한 위치는 유재원이 알고 있던 북한의 유전지대와 99% 수준으로 일치했다.

여기에 덤으로 쓰촨성의 지질 분석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지진 위험성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은 자원 탐사 프로그램과는 달리 많이 부족한 상태다. 이론적으로도 아직은 완전한 상태도 아니다. 하지만 예측된 결과가 유전지대와 마찬가지로 매우 정확히 적중된다면, 사람들의 인식을 완벽하게 바꿔 놓을 수 있다.

이렇게 확실한 두 가지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유재원에게 남은 관건은 가장 임팩트 있는 발표 장소와 타이밍을 고르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 고민 중인 유재원이다. 다행히도 유재원의 곁에는 유재원의 고민을 함께 해 주는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특히 한국에는 ID 그룹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최강욱 부회장이 있었고, 최강욱 부회장은 유재원이 한국에 들어오기도 전에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거침없이 움직이는 최강욱 부회장은 이미 북한에 가 있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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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한국에 들어온 지, 이틀째.

덕진리 고향집에서 하루를 부모님과 보낸 유재원은 오랜만에 느지막이 업무를 보았다. 평소라면 아침 9시쯤에 업무를 시작했을 텐데, 오늘은 점심을 먹고 나서 일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고향집이라 마음이 조금 풀린 것도 있었지만, 시차가 샌프란시스코와 -16시간이 나면서 굳이 아침 9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최강욱 부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은 왔나요?”

-예, 회장님. 아침에 통신이 들어왔는데, 오늘 중으로 북한의 VIP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직접 대면 보고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업무용 ID톡의 화상 미팅 기능을 이용한 원격 미팅이었다.

“오, 빠르네요.”

북한의 VIP라면 김정일 한 사람뿐이었다.

-다만, 워낙 변덕이 심한 성향이라 이유도 없이 만남이 미뤄질 수 있으니, 확실한 결과는 저녁이 되어서야 알 수 있을 겁니다.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만의 세상 속에서 사는 김정일 아니겠는가. 강제로 움직일 수가 없는 존재인데, 워낙 변덕스러운 사람이니 최강욱의 조심스러운 보고를 십분 이해하는 유재원이다.

“오늘 스케줄은요?”

-오후 3시에 스포츠 후원 계약 행사가 있습니다.

영재 후원은 전부터 했던 일이었다.

유재원이 직접 챙기는 건 아니었고, ID 파운데이션을 통해서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는 중이다. 장학금 사업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전 세계에서 ID 파운데이션의 장학금을 받는 이들의 숫자는 연간 10만 명이 넘었다.

나라에 따라 물가 수준이 다르지만, 보통은 학자금은 물론이고 생활비로 쓰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을 주고 있었다.

그렇기 ID 파운데이션의 장학금 사업은 벌써 15년이 넘었고, 장학금을 받고 성장한 이들 중에는 벌써 사회인이 된 이들도 많았다.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ID 그룹에 들어와 힘쓰는 이들도 많았다.

ID 파운데이션의 장학사업은 단순히 일반 학문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예체능 계열에도 힘을 쏟는 중이었다.

ID 파운데이션 자체가 유재원의 아버지 유봉만의 뜻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데, 유봉만의 스포츠 사랑이란 각별한 것이었다.

유봉만의 스포츠 취향은 한국의 대표 스포츠인 축구와 야구부터 시작해 마이너한 핸드볼과 빙상 스포츠까지. 가리지 않고 뭐든 좋아했다. 이러한 잡덕스러운 취향 덕분에 스포츠 영재에 대한 지원 범위도 남달랐다.

2002 남북 월드컵 이후 유럽처럼 유소년 클럽 활성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축구는 물론이고, 성인 프로 리그도 없는 핸드볼까지도 ID 파운데이션의 후원이 이어졌다.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 때만 반짝하는 빙상 종목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유봉만의 진면목은 따로 있다.

바로 온갖 비리의 근원인 협회를 두드려 패는 데 일가견이 있다.

단적으로 빙상 종목은 성적보다 라인이 먼저인 대표적인 분야였다. 누가 빠르냐보다는 출신 대학 혹은 누가 코치를 맡느냐에 따라서 유니폼에 태극기를 달 수 있느냐, 못 다느냐의 차이가 벌어졌다.

설사 대표팀이 되더라도, 메달을 앞두고 극한의 밀어주기가 벌어졌다. 입김이 센 코치를 둔 선수가 군 면제가 급하다면, 최고의 성적을 가진 선수가 밀려나기도 했다.

유봉만에게는 절대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단적으로 과거 유봉만은 핸드볼 세계 선수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둔 대표팀에게 금일봉을 주었다. 이와 함께 핸드볼의 저변을 넓히고자 핸드볼 팀을 운영하는 학교에 주는 지원금의 금액도 대폭 늘렸다.

그런데 금일봉 중 일부가 대표팀과 상관없는 핸드볼 협회 원로에게 흘러갔다던가, 학교에 내려진 지원금이 다른 쪽으로 유용되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면서 난리가 났다.

유봉만은 이들을 모두 고소했고, 최강욱 부회장이 이를 뒤에서 도왔다. 더욱이 ID 파운데이션에는 김&정 법무법인이라는 한국 최강의 로펌이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을 사람들인데, 유봉만의 고소 앞에서는 떨어지는 칼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 사건 후로 핸드볼 협회와 조직에서 자리만 차지하며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모조리 퇴출되면서, 핸드볼계는 한층 깨끗해졌다.

그렇게 핸드볼계가 정화되는 걸 옆에서 지켜본 다른 종목의 선수들이 많았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리가 터졌을 때, 다들 ID 파운데이션의 유봉만 이사장과 김&정 법무법인을 찾았다.

핸드볼 협회 다음으로 터진 곳은 역시나 빙상 연맹이었다.

빙상 연맹은 언제고 터질 폭탄이었다. 그런데 유봉만이 체육계에서 보인 막강한 존재감에 의해서 원래보다 훨씬 일찍 터지게 된 것이었다.

빙상 연맹의 최대 파벌은 일명 전 라인이라 불리는 전명규 이사의 세력이었다. 철저한 성적 만능주의자인 전명규는 90년대에 한국의 불모지였던 빙상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어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빙상 연맹에서 대표팀 선발에 대한 전권을 쥐면서 더욱 큰 성과를 내었다.

태양이 찬란할수록 그림자도 깊은 법인데, 빙상 연맹이 딱 그랬다.

전명규 이사 자체는 매우 청렴했고, 성적 지상주의라는 원칙도 확실했다. 그런데 전명규 이사 밑에 있는 코치들이 문제였다.

성적을 내기 위해서 선수들을 폭행하는 건 물론이고, 여자 선수들에겐 성추행이나 성폭행까지 이어졌다.

심지어 전명규 이사는 본인의 직속 코치들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묵과했다.

이러한 사실들이 김&정 법무법인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주었다. 그리고 그 파장은 체육계 전반에 걸쳐 여진을 만들어냈다. 아직도 법원에는 김&정 법무법인이 보낸 고소장이 한가득 쌓여 있었을 만큼, 현재에도 진행 중인 사건들이 많았다.

이러한 소송들을 진두지휘하고, 피해 선수들이 본업인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사람이 유봉만이었다.

한편으로 일부에서는 유봉만을 보고 왜 이렇게 나대냐고 아니꼽게 보는 부류가 있었다. 바로 각각의 스포츠 협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대기업들이었다. 단적으로 빙상 연맹의 제일 큰 후원자는 일성이었다.

일성의 직계는 아니고 방계 출신 혹은 일성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빙상 연맹의 관리 조직으로 자리를 옮겨 온 것이다.

단순히 사람만 보낸 게 아니라 빙상 연맹에 매년 큰 후원금을 내며 그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빙상 연맹이 놀라운 성과로 잘나갈 때는 일성그룹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지금은 오명으로 시끄러우니 일성그룹에까지 여파가 미친 것이다.

그러게 애초에 관리를 잘했어야지, 이제 와서 볼멘소리를 한다고 들어줄 유봉만이나 유재원이 절대 아니다.

이처럼 빙상 연맹이 뒤집어지는 중에도 뛰어난 성적을 내는 영재가 있었으니, 김연아 선수였다.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2004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2006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했다. 유봉만의 레이더에 이런 김연아 선수가 걸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ID 파운데이션의 영재 후원 프로그램을 받게 되었다.

유재원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선수였다.

지금은 2007년 세계 선수권에 도전 중이었는데, 올해부터 포텐이 확실히 터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스포츠 영재 후원 행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ID 파운데이션의 영재 후원 프로그램 덕에 회귀 전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월드 클래스가 될 김연아 선수에게는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이번에 ID 그룹 차원에서 김연아 선수와 메인 스폰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 지원을 받게 된 김연아 선수가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재원아.”

오후 1시가 조금 지났을 때. 후원 계약 행사를 위한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유재원을 불렀다.

“네, 무슨 일이에요?”

“새아가에게서는 무슨 연락이 없니?”

티파니와 결혼한 지 이제 7년째인데도 유재원의 어머니는 티파니를 종종 새아가라고 부르셨다. 일찍 결혼한 덕에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시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연락이라니? 티파니와는 메일이 아니라, 몇 시간마다 ID톡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어머니에게 전해드릴 소식 같은 건 전해 들은 바가 없었다. 유재원이 티파니와 나누는 이야기는 셰브롱에서의 일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없는데요.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네 점심 차려주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말이야. 굉장한 꿈을 꾸었지 뭐니.”

굉장한 꿈이라니.

이어진 어머니의 설명을 들어보니 결코 과장된 소리가 아니었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샌프란시스코의 집에 가서 산책을 하고 계셨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가득했고, 별들은 다이아몬드보다 찬란히 빛났다고 한다. 그런 은하수들 사이에 찬란히 빛나는 보석별이 있었는데, 그 별은 태양처럼 크고 찬란했다.

그런데 갑자기 보석별이 크게 흔들리더니 어머니를 향해 무섭게 떨어져 내리더란다. 엉겁결에 팔을 활짝 벌려 받아내셨는데, 별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황홀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고 선명하게 기억하셨다.

어머니의 장황한 꿈에 대해 유재원은 눈만 깜빡였다.

꿈 해몽이라는 건 유재원에게 있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고도의 컴퓨터 기술은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유재원이었다. 전 세계 슈퍼컴퓨터를 다 모은 것보다 더 규모가 큰 기계학습 인공지능 시스템도 스스로 만들었고, 그 위에 개인 비서인 골드까지도 성공적으로 구현해냈다.

그런 유재원이지만 어머니의 꿈은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너는 참, 이상한 곳에서 영 둔하단 말이야. 딱 봐도 태몽이잖니.”

어머니의 말에 유재원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는 꿈에 대해서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던 유재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꿈 덕분에 결국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는가. 다만 유재원은 꿈 중에서도 자각몽에 집중되어 있었지, 이런 태몽이니 예지몽 같은 쪽은 잘 몰랐다.

유재원은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뭐 하려고 그러니?”

“티파니에게 바로 물어보려고요.”

“거긴 밤 시간 아니니?”

“샌프란시스코랑 시차가 -16시간이에요. 저녁 8시쯤 되었을 테니까, 바로 받을 거예요.”

설명을 마친 유재원은 바로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얼마 전 ID톡을 했음에도 티파니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 티파니에게 유재원은 몸에 뭔가 달라진 징조가 없느냐고 물었다.

-응? 괜찮은데?

유재원의 물음에 티파니는 영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러면 그렇지. 티파니의 평소 스타일이라면 임신을 했다는 걸 알자마자 가장 먼저 유재원에게 알려줬을 것이다.

혹시나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숨기려고 하나 싶었는데,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이후 몇 마디 안부를 물으며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어머니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유재원이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 때부터 귀를 기울이고 계셨던 어머니의 얼굴 위로 조금은 실망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실망 안 했다. 대신 새아가에게 태기가 보이면 바로 알려줘야 한다.”

“알겠어요.”

“아! 그리고 태명은 별똥이로 하자꾸나.”

하지만 어머니는 본인이 꾼 꿈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확신이 있으신 모양인지, 유재원에게 신신당부했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유재원 주니어의 태명까지도 순식간에 정해버렸다.

태몽과 태명 등등.

짧은 순간 아빠가 된다는 기분을 느껴보았던 유재원은 아주 새로웠다. 과거에는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오후의 스케줄을 아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정치인들 여럿 만나서 여러모로 머리를 써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한국 피겨스케이트 역사를 쓸 김연아 선수를 만나서 계약서에 사인하고 한껏 응원해 주는 게 전부였다. 김 선수 역시 유재원을 직접 봐서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이었다.

더욱이 앞으로는 매년 12억 원에 이르는 후원금으로 경제적 문제도 완벽히 해결되었다. 빙상 훈련은 물론 저명한 코치를 선임하는 데 드는 비용 걱정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김 선수에게도 오늘은 각별한 날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소식은 더 들어왔다.

북에 가 있는 최강욱 부회장으로부터 날아온 희소식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문뜩, 재원이 자식으로 태어난다면 태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이 별똥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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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그날, 늦은 저녁.

-회장님, VIP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북한에 가 있던 최강욱 부회장으로부터 상세한 보고가 들어왔다. 있는 곳이 북한이다 보니 영상은 없이 음성 전용으로만 이어졌다.

북한의 열악한 통신 인프라에서 특급 보안 회선으로 연결한 탓에 가용할 수 있는 대역폭의 크기가 크지 않은 탓이었다.

“오, 브리핑을 받겠대요?”

-예, 회장님!

그럼에도 최강욱 부회장의 목소리에 담긴 기쁨의 크기는 절절하게 느껴졌다.

워낙 변덕스러운 김정일의 비위를 다 챙기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최 부회장님이 큰일 하셨네요! 매번 고마워요.”

김정일이 얼마나 특이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기에 최강욱은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직 놀라실 타이밍이 아닙니다.

“또 있어요?”

-네! 북한의 VIP가 직접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 방문해서 회장님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우와!”

유재원의 감탄사가 한층 더 크고 강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정일이 ID 그룹 본사 빌딩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단순한 개인 비즈니스 영역 수준의 이벤트가 아니었다. 한국은 이제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12일 남았는데, 이 상황에서 김정일이 내려오고, 거기서 북한 유전 개발의 결과가 발표된다면 상당한 파괴력의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다.

-청와대에서도 많은 협조를 해 준 덕에 VIP의 답방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독재자가 한국에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많이 했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이 이뤄진 것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종전 선언을 위해서 비무장 지대 남쪽에 있는 평화의 집에 온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때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참여하는 이벤트였기에, 단독으로 한국에 방문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한국에 온다고 하니, 심경의 변화가 꽤나 컸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북한 측에서도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인지라, 사전 준비가 매우 꼼꼼하게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이 움직이기 전에 경호팀이 움직인다. 심지어 ID 그룹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미리 경호팀에서 싹 테러의 위협은 없는지, 숨겨진 폭발물 따위는 없는지, 동선은 저격의 위험에서 괜찮은지 미리 체크하는 것이다.

“세기의 이벤트니 감수해야죠.”

김정일의 경호를 담당하는 곳은 호위총국이라는 곳이었다.

군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이들이 내려와서 ID 그룹의 본사를 헤집고 다니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혹시나 비밀 임무를 하달받고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기밀에 접근하려 한다든가, 만에 하나지만 도청기를 설치하려고 들 수도 있었다.

유재원은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북한이 무슨 짓을 하든, 이벤트가 끝나고 나서 모두 검출해낼 자신감이 있었다. 더욱이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은 ID 그룹의 본사이긴 한데, 엄청난 극비 자료를 취급하는 곳은 아니었다.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은 ID 그룹의 자금 흐름을 총괄하는 곳이지, 기술 개발은 ID 하이테크 연구소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이테크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안드로이드사, ID 테크놀로지와 ID 일렉트로닉스, ID 디스플레이 같은 기술 중심 계열사 본사에서 기술을 개발 중이었다.

북한의 호위총국 사람들이 보안 점검을 하는 척, 기술에 대한 탐지를 하더라도 그룹 본사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진 건 모두 최강욱의 조언 덕이었다.

해외에 있는 계열사들을 그룹 본사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돈줄을 쥐고 있는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유재원은 그 조언을 충실하게 따랐다.

미국의 지방 도시에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10달러짜리 액세서리를 팔아도, 그 매출액은 몇 초 내에 서울에 있는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주소로 넘어온다. 해당 지점의 주급을 줄 때에도 돈은 서울에서 전해진다.

옛날 그룹의 규모가 작았을 때는 사람 손으로 했었는데, 지금은 인공지능 골드가 대부분 전담하고 있었다. ID 그룹의 업무 흐름에 대해서 이미 10년이 넘게 학습했고, 지금도 학습 중인 골드였다.

전표 처리와 같은 단순 반복 작업이라면 웬만한 베테랑보다 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세계구급 기업으로 성장한 탓에 월말 결산이 되면 인공지능 골드의 보조가 있더라도 처리량이 폭증했다.

연말 결산 철이 되면 한 달은 바빠졌다. 오로지 회계, 세무 업무에서만 이 정도 수준이다. 여기에 연말 이벤트로 각종 행사들이 연달아 개최되면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은 그야말로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을 방불케 했다.

-네, 회장님! 그러면 언론 발표는 바로 내일 하고, 다음 날에는 호위총국의 경호팀이 본사를 방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최강욱의 보고를 받았던 유재원은 뭔가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바로 김정일의 방문 날짜였다.

“그런데 VIP는 언제 방문하는 건가요?”

-아차! 마음이 급해서 말씀을 못 드렸군요.

유재원의 물음에 최강욱의 목소리에서 당황의 기색이 느껴졌다. 워낙 큰 이벤트이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 정작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3월 26일입니다. 그리고 날짜는 북측에서 발표하기로 했으니, 그때까진 극비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26일?

2007년 대선 투표일이 28일이니, D데이로부터 딱 이틀 전이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부회장님도 마무리 잘하시고, 무사히 내려와 주세요.”

-예, 회장님!

최강욱 부회장의 다부진 대답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S클래스 보안 회선 통신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통화 시간은 10분 21초. 통화 중에 총 243번의 의문스러운 접속 시도, 52번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인공지능 골드의 브리핑도 이어졌다.

해킹에 대한 방어도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확실한 신호이기도 했다. 물론 보안 시스템을 다루는 건 아직 사람이 하지만, 인공지능 골드의 쓰임은 이제 거의 전천후 멀티롤 플레이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하네.”

평소에도 많은 공격이 쏟아지는 ID 그룹의 전산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도가 더 심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들어왔는지 파악했어?”

정확한 데이터는 영식이에게 물어봐야 나온다.

ID 그룹의 네트워크 시스템을 총괄하는 사람이 영식이었다. 네트워크 시스템이라는 단어 속에는 보안 영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안 하면 영식이었다. 과거 유재원이 만든 보안체계의 취약점을 제일 먼저 찾아낸 사람이 영식이었다. ID 하이테크 연구소의 컴퓨터 보안을 연구하는 카스퍼스키 박사나 안드레이 티호노프 책임연구원과 좋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매일같이 모니터링 시스템 앞에서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자잘한 공격들 역시 인공지능 골드가 방어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입니다. 다음은 미국과 러시아, 한국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 사항으로는 북한 내부에서 들어오는 공격도 있었습니다.

골드의 보고에 유재원은 그러려니 했다.

참고로 골드가 말한 나라들은 공격의 근원지였다. 국가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인터넷에서 1차원적으로 공격이 들어온 지점은 딱히 큰 의미가 없었다.

북한과 긴밀히 엮이는 이해관계국들은 딱 하나 빼고는 다 있었으니 말이다. 첩보 수집 활동을 아주 열심히들 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반대로 여기에 이름이 없는 나라들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일본 말이다.

일본은 제2차 경제 위기 이후로 유재원에게 계속 얻어맞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더 퍼시픽 사태가 터지면서 고이즈미 총리는 내각 총사퇴와 국회 해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재신임을 받으면서 위기를 돌파할 생각이었는데, 이후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일본 민주당 과반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일본 민주당이 달성한 의석은 무려 301석. 일본의 중의원 의석 숫자는 480석이니, 단독 과반을 달성했고, 이는 곧 정권 교체를 의미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의 새로운 총리는 민주당의 당수였던 오자와 이치로가 되었다.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일본이지만, 이후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일단 오자와 이치로라는 사람은 애초에 자민당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자민당을 뛰쳐나와서 민주당에 들어왔다. 자민당의 부패가 너무 심했고, 자정 노력도 없는 것에 대해 실망했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오자와 이치로 역시 정치 자금 문제에서 완벽하게 결백한 사람은 아니었다. 일본의 총리가 되고 나서 정치 자금 문제는 더욱 크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관료 조직이 소극행정을 통해 오자와 이치로를 왕따 시켰다.

국민적 기대를 엎고 총리가 된 오자와 이치로가 개혁적인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관료들은 적극 따라 주지 않았다. 관료 조직의 가장 큰 특징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일본은 그 정도가 심했다.

더욱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2004년까지 자민당의 독재와도 같았다. 무려 반백 년이 넘게 자민당과 일본의 관료들은 끈끈하다 못해 한 몸과도 같았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이 나타난 민주당 총리에게 전적으로 협조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시민들은 전과 달라지길 바라면서 정권 교체를 했는데도, 바뀌는 게 없자 점차 실망감이 커졌다. 실망감은 곧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 지지도는 중요한 지표였지만, 그렇다고 국정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다. 그저 대통령이 지지율을 참고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도였다.

반면 내각제에서 총리의 지지율은 정권 존립 자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지면 내각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오자와 이치로 총리는 더 큰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이전 고이즈미 총리가 손을 댔다가 아 뜨거 하면서 놓치고 말았던, 우정국 개혁이었다.

지지율이 높을 때 해도 성공 가능성이 낮았던 일이었는데, 지지율이 바닥난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더 큰 후폭풍이 일어나면서 일본도 오자와 총리의 재신임을 두고서 중의원 선거를 다시 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치권 자체가 크게 흔들리면서 일본은 제일 큰 위협인 북한의 최근 행적을 모니터링하는 것에 실패했던 모양이다.

인공지능 골드의 리포트에 일본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요즘 일본이 하는 꼴을 보면 과한 상상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게 나을 수도 있지.”

유재원은 길게 봤다.

일본 민주당이 아무리 무능해도 자민당보다는 나았다. 그런데 회귀 전 일본 민주당은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고, 대지진이 터지고 나서도 제대로 된 컨트롤 타워 역할도 못 한 탓에 자민당에 정권을 빼앗겼다.

당시 어마어마한 비판이 일본 민주당에 쏟아졌고, 이후 일본은 다시 자민당 강점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아베가 다시 들고 일어났고, 무능의 아이콘답게 일본을 깊은 수렁 속에 빠뜨렸다.

일본의 추락은 고소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바람직한 건 아니었다. 단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질병이 대유행할 때, 바로 근접한 나라가 대비를 엉망으로 하게 되면 주변국에 피해가 전가되니 말이다.

그러니 크게 보자면 이번에 일본의 정권이 자민당으로 다시 넘어가고서, 2011년에 다시 가져오는 게 최선이 타이밍이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으니 유재원은 지금 당장 할 일을 했다.

다음 날.

-단독 특종! 셰브롱 북한 유전 탐사 성공!

-이번에도 답은 기계학습 인공지능! 지하자원 탐사에 새로운 전기 마련!

-김정일 국방위원장 긴급 방한 결정!

-ID 그룹 본사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서 유재원 회장으로부터 직접 브리핑 듣는다!

-호위총국 경호팀, 도라산역 통해 육로 입국!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으로 직행!

-한나라당, 김정일 위원장 입국 결사반대! 완벽한 선거 개입!

사방에서 트로트와 인기곡들을 개사한 선거송을 크게 틀며 자원봉사 선거운동으로 한창이던 대한민국이 난데없는 북풍으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총풍으로 대표되는 회귀 전의 북풍과 달리, 지금의 북풍은 대부분 진보 진영에 플러스가 되는 이벤트였다.

그중에서도 이번 북풍의 규모는 단언컨대 역대급이었다.

6.25 전쟁 이후 북한의 지도자가 서울에 입성한다는 건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것도 매우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북한 유전 탐사 성공이라는 이슈로 등장할 거라는 건 이 세상에서 유재원과 같이 일하는 극소수의 사람 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동시에 방심하지 않는 유재원이 준비한 회심의 한 방이기도 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이네요!

코로나19가 많이 안정된 것 같긴한데, 방심은 금물입니다!

건강히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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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망했군.”

누군가의 입에서 망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굳이 입 밖으로 할 말은 아니었다. 이미 시작 전부터 반쯤은 망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선거대책본부.

그것이 이곳에 붙은 이름이었다. 당 경선용 선거대책본부가 차려질 때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당시에는 그저 당내 경선이었음에도 대통령이 된 것 같은 분위기에 선거대책본부에 너도나도 들어오겠다고 난리였다.

그렇게나 좋았던 분위기는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순간 180도 달라졌다. 어찌 이기기는 했지만, 이명박과의 표 차이는 불과 1% 남짓한 규모였다. 게다가 경선 중에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특히 박근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사람들이 가장 큰 충격을 먹은 건 영세교 교주의 딸이 최측근을 넘어서, 박근혜 후보의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거대책본부에서 열심히 연설문을 만들어주면, 다음 날 이상하게 수정되었고 그게 그대로 텔레비전을 타 버렸다. 보수 여론을 열심히 조사해서 공약을 만들면, 마찬가지로 다음 날 이상한 공약들이 나왔다.

단적으로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제일 공을 들였던 공약은 대북 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통일은 대박!’론이었다. 통일을 하면 단일 인구 1억짜리 경제권을 만들어낼 수 있고, 거대한 북한 개발을 통해서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한국도 제2의 전성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하루 만에 완전히 뒤집혔다.

통일은 쪽박이라고 말이다. 어마어마한 통일 비용도 문제고, 북한의 현재 유화적인 모습은 위장이라는 것이었다. 6.25 전쟁에 대한 사과 없이는 그 어떤 경제 협력도 확대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제 와서야 모두가 영세교 교주의 딸이 개입해 마음대로 수정했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세교 교주의 딸이라고 하니 뭔가 비밀에 가려진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박근혜 후보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보였던 빨간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아줌마였다. 그야말로 맹목적 지지자인데, 품위는 부족하고 활동력은 남다르면서 아주 수다스러운 그런 아줌마였다.

그런데 그 아줌마가 비선 실세라니.

이 아줌마 때문에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수립했던 모든 전략이 다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래도 화끈하게 싸운 만큼 열성 지지자들은 더욱 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서든 대선을 치러볼 생각이었다.

선거대책본부 상황실 텔레비전들이 마치 짠 것처럼 하나의 긴급 속보를 다루기 전까지 그럴 생각이었다. 명색이 본부였기에 상황실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제로는 텔레비전 여러 대를 가져다 놓고 공중파 4곳과 주요 뉴스 케이블 방송들을 동시에 띄워 놓은 공간이었다.

인터넷이 크게 발달한 요즘 시대였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은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그러니 텔레비전에 노 대통령이 나오는지, 박근혜 후보가 나오는지 체크하고 언론이 주로 다루는 이슈도 체크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황실이었다.

상황실에는 10대 정도의 텔레비전들이 두 줄로 5대씩 놓여 있었는데, 갑자기 긴급 속보가 터지기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 답방!

-셰브롱, 북한 지하자원 탐사 매우 성공적!

-고주파 전리층 이용한 지질 탐사 데이터의 인공지능 분석, 성공적!

-3번 연속 유전 탐사 성공에 ID 그룹 몸값 수직 상승 중!

과거 1, 2차 오일 쇼크에 직격 당했던 한국은 전국은 물론이고 동해와 서해, 남해까지 뒤져가면서 유전을 찾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했었다. 오죽하면 1975년에 포항에서 기름이 터졌다는 소리에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가 바로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도 했을 정도다.

국민적 반응도 대단해서 석유 원년이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고, 주식 시장에서는 석유 관련 종목들이 하늘을 뚫을 듯 상승했다.

그러나 이후 몇 년이 지나도 석유가 나왔다는 소식은 없었고, 결국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시추를 하다가 근처의 송유관을 깨뜨려 먹고, 거기에서 흘러나온 원유를 유전을 찾았다고 속였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그렇게나 갈망했던 석유가 한국도 아니고 북한에서 나왔다니.

상황실장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망이 올라왔다. 오죽하면 혹시나 포항 석유처럼 가짜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나 브리핑을 받기 위해 김정일이 내려오기로 했고, 셰브롱이나 ID 그룹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씁.”

특히 유재원이란 이름은 그런 식으로 싸잡아 내려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90년대 초, 컴퓨터 영재랍시고 반짝하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그저 신동 정도로만 다뤄 줄 수준이었다. 그런데 미국서 PC 운영체제라는 걸로 대박을 터트리더니, 급기야 MS까지 인수해 버렸다.

지금은?

ID 그룹의 전체 가치는 한참 전에 1조 달러를 넘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런칭된 ID 토털 리빙 솔루션의 자본금만 해도 2,500억 달러였다. 시장 가치는 3천억 달러 후반대다. 여기에 일찌감치 상장된 안드로이드사나 ID 테크놀로지는 각각 4천, 3천억 달러이니, 셋만 합쳐도 1조 달러였다.

여기에 비상장인 ID 일렉트로닉스와 ID 디스플레이, 라이트닝 볼트 등이 더해지면, 얼마나 거대해질지 상상 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 최고의 재벌인 일성그룹 전체 규모가 이제 200조 원을 간신히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 참, 유재원의 처가도 엄청나다지.”

셰브롱의 후계자로 유재원의 아내인 티파니가 유력하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게다가 티파니의 아버지 역시 블랙스톤 자산운용사의 대표라는 것도 상황실장의 뇌리에 떠올랐다.

“블랙스톤이 굴리는 돈이 3조 달러였던가?”

상황실장은 이쯤 되자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돈의 신이 현세에 강림했다고 해도 이보다는 못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유재원이나 그의 처가에 대해 따져볼수록 비참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상황실장이 아주 못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 상황실장을 수락하기 전까지는 동아신문 정치부장이었으니 말이다. 신문 쪽 인맥이 탁월한 덕분에 상황실장이라는 감투를 쓸 수 있었다.

상황실장을 수락했을 때만 해도 박근혜 후보가 후보라는 수식어를 떼고 청와대에 입성한다는 건 기정사실과 같았다. 그야말로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서 모두의 기대가 쏠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박근혜 후보가 청와대에 가면 청와대 대변인은 떼놓은 당상이라 여겼다.

대변인으로 인지도를 쌓은 다음에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올라가고 궁극적으로는 대권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근처에서 박근혜 후보를 며칠간 보고 있으면 나도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본인의 능력은 하나 없이 그저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선 가도를 달리는데, 본인이라고 못할까 하는 속마음도 생겼다.

그렇게 부푼 꿈을 꾸고 있던 상황실장이었는데, 후보 경선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지금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속보로 인해서 장구했던 인생 구상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유재원은 그저 본인이 계획한 일을 하는 것뿐이었는데, 그 움직임의 크기와 파괴력은 너무도 강력해 맞은편에 서 있기만 해도 속절없이 썰려 나가게 되었다. 유재원은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상황실장이 누구인지 이름도 몰랐지만, 그의 꿈을 완벽하게 박살내 버렸다.

상황실장은 도무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지금도 그 영세교 교주의 딸과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실장은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흰색 봉투 하나였다.

“아무래도 내 정치 인생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사직서였다.

3월 23일.

아직 대선까지 5일이 남은 시점에서 게임은 끝났다.

박근혜 후보는 포기 의사가 없었지만, 박근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가 이미 파탄 지경에 빠졌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선거대책본부가 굴러가지 않으니 선거운동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물론 선거대책본부가 잘 굴러간다더라도, 박근혜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했다. 후보 경선 때 쏟아져 나온 의혹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명백한 해명도 없었고, 후보의 처신이 바뀌는 것도 없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박근혜 후보에게도 맹목적인 지지 세력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지지 세력은 경선 전보다 더 올라갔다.

전에는 15% 정도 되었던 것으로 보이던 콘크리트 지지 세력이 지금은 18% 정도로 성장했다. 게다가 후보의 자질과는 별개로 민주당이 싫어서 한나라당을 찍는 이들도 있었기에, 다 합쳐서 20%대의 지지율이 나왔다.

개인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한 숫자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대통령 자리를 쟁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반면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더욱 올라갔다.

회귀 전의 경우에는 마치 싸움닭처럼 중구난방 문제를 일으키면서, 당내 분란까지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모든 부정적 이슈에 대해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라는 당도 굳건히 유지 중이었고, 개혁 작업도 사학만 집중적으로 잡아 패면서 성공했다.

이제는 사학재단이라고 해도 이사회에 외부 인사들을 참여시켜야 했다. 외부 인사의 추천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하게 되었다.

온갖 비리가 터지면서 문제 학교로 지정된 경우에는 교육부가 직접 하고, 보통의 학교들은 각 지역 교육감에게 추천 권한이 주어졌다. 대신 추천 이사에 대한 조건은 있다. 이해 충돌 방지를 위해서 해당 학교 출신 교원이나 사학재단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이들은 배제되었다. 다음으로는 교육계에서 일정 기간 몸을 담은 경력이 있어야 했다. 공교육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낙하산처럼 꽂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학 개혁 작업은 재미있게도 교총과 전교조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교총이나 전교조나 모두 사학재단 이사에 도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덕이었다.

은퇴 후 선택지가 늘어난 것만으로도 교육 노동자들의 숨통을 크게 트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사학 개혁을 마무리한 노 대통령은 다음 타자로 수도권 부동산 문제를 타깃으로 잡았다.

수도권 과밀화에 대한 해법으로 행정 수도를 제시했고, 국회에서 행정 특별 도시 설치법이 통과되면서 법적인 틀은 갖췄다.

행정 수도가 들어갈 곳은 회귀 전과 같은 충청남도 연기군이었는데, 전과 달라진 건 옮겨가는 정부 기관의 규모였다.

2020년에 인구 100만의 행정 수도를 건설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는데, 청와대부터 시작해서 서울 소재 정부 기관과 공기업 본사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가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청와대를 옮기는 것에 대해 헌법 소원까지 제기되었을 테지만, 10차 개헌으로 인해 법률로써 수도를 정하게 되면서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문제는 행정 수도로 옮겨갈 정부 기관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논의 끝에 행정 수도가 행정수도다운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청와대와 국무총리 관저부터 13부 2처에 달하는 중앙행정부처 모두가 이사를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제법 컸다.

-대한민국 수도는 절대적으로 서울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울 일!

언론을 통해 보면 그 숫자가 상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숫자만 보자면 20% 정도의 수준이었다. 단지 반대하는 이들이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많이들 자리하고 있어서 목소리가 컸고, 언론의 과도한 조명으로 확대되어 보도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재산 비중 중에 서울 부동산이 상당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행정수도 이전으로 인해 서울에서 주요 기관들이 모두 이전되면 부동산 가치가 하락할 것에 큰 우려가 있었다.

그렇지만 국민들 대다수, 심지어 서울에 사는 많은 이들이 행정수도 정책에 찬성했다.

단적으로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이지만, 유재원은 매일같이 실시간으로 여론조사의 결과를 받아 보고 있는데 55%의 안정적인 지지율이 나오고 있었다. 55%라고 하면 과반에서 조금 더 획득한 수치이니 반대도 그만큼 크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예상되는 득표수는 역대 대통령 중에 최대였다.

여기에 김정일의 방문이라는 특급 이벤트가 더해지면서 남북 관계는 한 차원 더 높아졌다. 심지어 기름까지 나온다고 하니,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엄격히 따진다면 북한에서 나는 원유는 북한 국민들의 몫이지만, 유전 개발이나 유통에 있어서 한국과의 시너지 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부푼 꿈을 꾸고 있을 때, 행사 준비로 제일 바쁜 사람은 역시나 유재원이었다.

김정일이 서울에 오는데, 그를 영접해 함께 다닐 사람은 역시나 노 대통령이었다. 그러니 탐사 결과 발표에 노 대통령도 함께 참관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전 세계 미디어가 이번 이벤트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유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인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티파니였다.

“뭐야? 갑자기 감기 기운이라니? 열이 많이 나셔?”

-응, 평소보다 좀 심하셔.

티파니 본인이 감기에 걸렸다는 게 아니었다. 셰브롱 측 대표 이벤트에 참여할 프레더릭은 오늘 미국을 출발해서 저녁쯤 한국에 도착하기로 했다. 그런데 감기 기운에 움직이는 게 힘들어지셨다는 티파니의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옆에서 간병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 외할아버지 대신 CEO인 리사 배리 씨가 대신 갈 거야.

“알겠어. 나도 이번 일 끝나면 바로 병문안 갈게. 자기도 몸조심해.”

북한 자원 개발 사업은 셰브롱이 중심이고 ID 그룹이 협력 업체의 형태였다. 그러니 프레더릭이 이번 이벤트에 참석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유재원 혼자서 감당하게 생겼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과도한 관심이라는 것에도 완벽한 내성이 있는 유재원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제 많이 연로하신 프레더릭이 감기에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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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2007년 3월 26일.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일단의 자동차 행렬이 있었다. 1987년 착공을 시작해 1992년 4월 15일, 김일성의 80회 생일에 맞춰 개통한 도로라고 북한에는 설명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년 더 뒤인 1994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남북 관계는 옛날 그대로였던지라 북한의 사정이 딱히 좋지 않았다. 덕분에 연식을 따지면 북한의 많은 도로 중에서도 비교적 최신식인 도로였다.

완공된 지 불과 13년밖에 지나지 않은 도로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신식이니 고속이니 하는 말과 무색하게 자동차 행렬의 속도는 70Km/h로 빠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고속으로 달리기 위해선 도로의 포장 상태가 좋아야 하는데, 평양개성고속도로라는 이름에 무색할 만큼 파인 곳이 많았다.

덜컹!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방탄 리무진 자동차가 불쾌한 소리와 함께 출렁였다. 그와 함께 가장 좋은 뒷좌석에 앉은 김정일의 표정도 딱딱해졌다.

차 안까지 전해지는 덜컹거림이 이번 한 번도 아니고, 벌써 10번은 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능해도 이렇게 여러 번 덜컹거림이 전해졌다면,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김정일은 2대 독재라고는 해도 북한이라는 나라를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배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고속도로 욕을 해 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았다.

그나마 북한의 살림이 90년대 중반부터 피기 시작했다지만, 갈 길은 멀었다. 명색이 완공된 지 겨우 13년 지난 고속도로 포장 상태를 제대로 유지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게 단적인 예였다.

“이보라, 명색이 1호차 운전자인데 똑봐로 못하나. 아바이가 불편해하시는 거 안 보이네?”

그렇게 김정일은 불편함을 참고 있는데, 정작 화를 낸 건 김정일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였다.

“죄, 죄송합니다. 더욱 살피겠습니다.”

청년의 목소리에 운전대를 잡은 이와 조수석에 앉은 보좌관이 움찔했다. 그 모습에 김정일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고속도로가 엉망인 게 이들 탓이냐? 내 탓이다.”

“아, 아버지.”

“지금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하찮은 보수 공사도 못 하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고 가는 거 아니겠느냐. 거기서는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약속한 대로만 움직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정일의 말에 옆자리의 젊은 녀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김정일은 속으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옆자리에 앉아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좋은 소리 못 들은 젊은 녀석이 본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장남이니 권력 계승 서열 1순위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마음은 가는데, 어디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자식 녀석이었다. 한 나라의 권력을 움켜쥔 독재자에게 필요한 모습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놀기 좋아하고,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것도 김정일의 눈 밖에 나도록 하는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장남의 출생이었다. 아무리 막 나가는 북한이라도 정실은 따로 있는데, 불륜 관계로 태어난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 갑자기 본인도 남쪽에 가 보고 싶다고 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특히 유재원 회장을 직접 보고 싶다며 통사정을 해 왔다.

평소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텐데, 늙어서 그런지 마음이 움직였다. 특히 장남 녀석이 태어날 때에는 권력 이양기인 탓에 국내 사정이 매우 불안해서 유럽에 보내야 했다. 권력 승계에 마이너스 요소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장남 녀석은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부자 사이에 유대 관계를 쌓을 날이 적었다. 다행히 공부 머리는 있어서 스위스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그 성적은 괜찮았다. 게다가 프랑스어와 독일어 등 외국어로 능통하게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언어 능력도 좋았다. IT와 같은 신문물에도 눈이 뜨여서 북한으로 돌아와서는 평양의 컴퓨터 사업을 주관하는 조선컴퓨터센터를 설립하는 데 공을 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장남은 유재원에게 호기심이 컸다.

더욱이 장남 녀석과 유재원 사이에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유재원은 90년대 초부터 본인의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를 북한으로 선물로 보내줬다.

처음에는 전명헌이 선물로 준비했지만, 이후에는 ID 테크놀로지 자체에서 보낸 물건이다. 그렇게 보낸 물건을 김정일도 몇 번 써 보긴 했는데, 실제 가장 많이 사용한 사람은 장남 녀석이었다.

물론 컴퓨터를 가지고 뭔가 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게임기로 이용했던 것이긴 한데, 게임을 하면서 알음알음 쌓은 컴퓨터 실력 덕에 김씨 일가 중에 IT에 대한 편견이 제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김정일은 어렸을 때 못 해 준 것도 있고, 유재원 회장과의 인연을 만들어 주면 뭔가 공화국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장고 끝에 김정일은 장남을 이번 남측 방문에 동행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너무 섣부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김정일이었다. 잔뜩 들떠 있는 게 뻔히 보였던 탓이다.

“3분 후, 공동 경비 구역 도착입니다.”

그런 상념도 잠시.

조수석의 보좌관의 말에 김정일의 시선이 전면을 향했다. 공동 경비 구역의 판문각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김정일의 표정도 한층 굳어졌다.

같은 시각.

공동 경비 구역, 남측 시설인 평화의 집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공동 경비 구역의 긴장 수준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 무장까지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경비 근무를 섰던 시절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종전 선언 이후, 휴전선은 국경선으로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공동 경비 구역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형태는 예전과 똑같이 유지 중이었다.

북측 판문각도 리모델링으로 한층 깔끔해졌고, 남측의 평화의 집도 확장 공사를 통해 규모를 키우면서 예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 건물뿐이었다.

판문각이나 평화의 집과 비교하면 낡디 낡은 건물이었다.

그렇지만 남과 북의 분단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이보다 훌륭한 오브제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 역사적인 김정일 위원장의 남측 방문도 도라산 남북 출입 통제소가 아닌 공동 경비 구역을 통해서 하기로 했다.

대신 공동 경비 구역도 달라진 남북 관계에 따라 바뀌는 게 굉장히 많았다. 일단 UN의 역할은 완전히 사라졌고, 남북 사이에 상황실을 만들고, 직통 라인으로 현안들을 해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근무자들도 무기는 완전히 내려놓고, 공동 경비 구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와 같은 상징성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 국가의 공동 경비 구역이라서 국내외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라면 외국인 관광객으로 분주했을 평화의 집과 그 주변 시설은 물샐틈없는 경호원들로만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북측 판문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VIP 룸은 최고의 긴장감이 있었다. 이미 노 대통령은 도착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바로 옆방에 유재원과 수행원 그리고 셰브롱 사람들이 있었다.

노 대통령과는 이미 한 시간 전에 긴밀히 인사를 나눈 유재원이었다. 한국과 세계 정치에 대해서는 전문가였고 IT도 잘 아는 분이라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변에서 제지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텐데, 노 대통령은 참모들과 나눌 이야기가 따로 있었다.

덕분에 바로 옆방으로 옮겨서 조금 지루한 대기 시간을 갖고 있었던 유재원이었다.

유재원은 스마트폰으로 프레더릭과 티파니의 안부도 챙기고 인터넷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북측 판문각의 동태도 살피는 중이었다.

요즘 유재원이 주로 사용하는 건 톡톡이었다.

단문 SNS의 시초였고, 이제는 단문보다는 사진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는 톡톡이었다. 톡톡의 리톡톡 숫자를 확인하면 그날 이슈가 무엇인지 바로 체크해 볼 수 있었다.

오늘 한국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방남이 최고의 이슈였다.

그런데 그 뒤를 바싹 따르는 것은 서울대 늑대개 복제 성공이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은 원래의 흐름대로 PD수첩이라는 MBC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저격을 당해 허무하게 끝났다. 이후 한국에서 바이오 벤처 사업은 와르르 무너졌지만, 그래도 연구 활동은 꾸준히 하고 있었고, 그것이 늑대개 복제라는 성과로 나온 모양이다.

바이오 분야 진출은 2010년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주는 기본이고 의약도 중요했다. 특히 앞으로 일어날 여러 가지 전염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바이오 분야의 발전은 필수적이었다.

2010년부터 참여라면 좀 늦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구 개발 프로세스에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유재원이 가진 미래 지식이 더해지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퍼포먼스가 나타날 테니 말이다.

이 밖에도 톡톡의 리톡톡 상위권에 있는 키워드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레이나의 N포인트 배당 노하우였다. 레이나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최근 톡톡에서 큰 화제를 몰고 있는 중이다.

시작은 그녀가 상위 0.1%에 해당하는 엄청난 N포인트 배당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후 레이나는 개강 후 만난 친구들의 권유로 톡톡에 본인의 일상과 함께 N포인트 배당을 높게 받은 노하우를 틈틈이 풀고 있는데, 유재원이 보기에도 상당히 정확한 정보였다.

유재원은 레이나의 톡톡에 엄지손가락 버튼을 꾹 눌러 추천도 하고, 최근 올린 노하우도 본인의 톡톡으로 리톡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들어 북측 판문각을 보는데, 전과 다른 뭔가가 보였다.

“곧 시작할 모양이네요.”

북측 판문각 인원들의 긴장함이 한껏 오르고, 부산스러워지는 걸 보니 드디어 북측 VIP가 도착한 모양이다.

“네?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요?”

“그야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이 곧 등장할 거니까요.”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유재원과 대화를 나누는 중년의 여성은 셰브롱의 새로운 CEO인 리사 배리였다. 프레더릭이 감기 때문에 참석을 못 하고 그 대신 나오게 된 리사 배리는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그녀의 인생 중 이렇게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리사 배리의 CEO 임명은 내부 승진 케이스였다.

즉, 20대 초반 연구원으로 셰브롱에 입사했고, 이후에도 단 한 번의 이직 없이 20년이 넘게 근무했다. 연구원으로 시작해서 현장 근무도 몇 년 동안 했었고, 임원으로 승진한 다음에도 석유 생산 시설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엔지니어 관련 조직의 책임을 맡았었다. 그리고 2007년 초 모든 직장인들의 꿈인 CEO에 등극했다.

그것도 엑손모빌과 비견될 만큼 거대하게 성장한 셰브롱의 CEO 말이다.

리사 배리는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모든 게 달라졌다.

일단 계약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연봉에 숫자 0이 추가로 붙었고, 지원되는 비서진의 규모와 업무 추진비의 규모도 달라졌다.

물론 리사 배리에게만 특혜를 주는 건 아니고,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반면 석유 업계에서는 셰브롱의 이사회가 아주 모험적인 인선을 했다는 평이었다. 남성적인 석유 산업에서 여자가 CEO에 등극한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능력 검증은 둘째 치고, 애초에 여자라면 평가조차 하지 않았었다.

일각에서는 리사 배리의 CEO 등극을 후계 구도 정리를 위한 사전 조치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성별을 따지는 게 아니라, 리사 배리가 셰브롱의 어느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는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파벌에 속하지 않으니 중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사회에서 한가락 하는 강력한 파벌에 속하지 않는 인물 자체가 티파니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는 판단이다.

“예지라도 하시는 겁니까?”

유재원이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리사 배리가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판문각의 문이 열리면서 북한 군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보통 공동 경비 구역서 근무를 서던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판문각의 금색 문이 크게 열리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걸으며 내려왔다. 그리고 보위부 소속 경호원들이 그런 김정일 위원장을 11자로 에워쌌는데, 다들 덩치들이 엄청나게 듬직했다.

그렇게 각을 잡고 나오는데 다들 한껏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이에 맞춰 노 대통령도 남측의 평화의 집 문을 열고 나가 김정일 위원장과의 역사적인 상봉을 시작했다.

“회장님, 저희도 준비해야 합니다.”

의전의 순서상, 노 대통령 다음이 유재원이었다.

다만 당장 급박한 사안은 아니었다. 두 정상이 만나서 오고 가는 인사말이나 대취타까지 동원된 환영 행사는 무려 30분 넘게 준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환영 행사가 끝나면 유재원과 리사 배리 CEO가 나서서 김정일 위원장을 대면하고, 서울의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으로 함께 이동한 후 자원 탐사 보고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후 일정은 미정인 상태가 많지만, 서울과 가까운 수원의 반도체 공장과 ID 일렉트로닉스 공장 등을 찾아보는 것도 있었다.

북한이라면 현장 지도 따위의 제목이 붙겠지만, 실상은 견학에 불과한 이벤트였다.

“응?”

천천히 나가도 되었기에, 판문각에서 북측 VIP 일행들이 계속 나오는 걸 보고 있던 유재원의 눈에 이상한 사람이 잡혔다.

수행원들 사이에 껴 있는 퉁퉁한 몸매에 동글동글한 얼굴의 젊은 남자였다.

유재원은 저 젊은 남자가 단번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동시에 큰 의문이 뒤를 이었다.

이 자리에 김정남이라니?

자연스럽게 유재원의 머릿속에는 북한의 후계 구도가 떠올랐다. 북한 입장에서 오늘 행사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러니 만에 하나 김씨 일가가 더 동석한다면 3대 세습을 하는 김정은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정남이라니.[작품후기]와~!!

어제 올린 글이 700회였네요!

이제껏 글쟁이로 수차례 연재를 했지만, 700회는 처음 달성해봅니다.

더욱이 700회임에도 수많은 독자 님이 축하해주셔서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완결까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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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더욱 웃기는 일은 김정남은 마치 북측 취재진 중 한 사람인 것처럼 프레스 완장을 차고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 프레스라고 영어로 된 완장을 차고 나왔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만, 완장의 힘은 굉장했다. 정교하게 짜여진 의전용 진영을 멋대로 넘나들면서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게 통할까 싶지만, 현장에서는 통하는 중이었다.

김정일과 김정남이 외모적으로 크게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김정남은 살이 포동포동하게 쪘지만, 김정일은 급속도로 빠지면서 그나마 있던 비슷한 점도 싹 가려졌다.

무엇보다 김정남이란 존재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은 인물이었다. 김정일이 권력 승계에 방해가 된다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존재를 숨겼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밖으로만 돌렸다.

그렇다고 회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위조여권을 들고 일본에 입국 시도 사건도 없었고, 동남아시아 카지노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도 없었다. 유재원의 개입으로 인해 김정남의 행동양상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북한 내에서는 딱히 김정남의 세력이라는 게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는 김정은에게 3대 세습이 이뤄질 때에도 김정남은 그저 빈손만 빨면서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승계를 끝낸 김정은이 김정남의 존재가 껄끄러워 암살해 버릴 때에도 멍청하게 당해 버렸다.

친형이라면 김정은도 암살까지 감행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이복형이라서 결심을 하기가 편했다.과연 이번 생에서 김정남의 말로는 어떻게 될지는 유재원도 아직은 상상 불가였다. 다만 지금 김정남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비슷한 인물은 있었다.

김여정이라는 인물이다.

김정은의 여동생이었는데, 처음 매스컴에 등장할 때 센세이션이 대단했다. 북한 방송국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었는데, 의전 구도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이는 게 지금의 김정남과 비슷한 느낌이다.

회귀 전 마스터플랜에서 북한 파트를 설정할 때, 김정남에 대한 유재원의 평가는 김씨 일가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대신 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이를 쟁취할 수단과 능력은 없다고 나왔기에 관심에서 바로 멀어졌었다.

그런 김정남이 여기에 왔다.

“흠, 그렇단 말이지.”

유재원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 하나.

김정남을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에 개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이었다. 다만 가능성뿐이지 막 실행해 볼까 하는 마음은 없었다. 김정남을 이용한다는 건 마스터플랜에도 없는 일이었다.

실패 시, 후폭풍이 상당히 거셀 테니 말이다.

“시간 되었습니다.”

김대석 비서실장의 말에 유재원의 위험한 상상도 멈췄다. 지금은 당장 닥친 일에 집중하는 게 먼저였다.

비슷한 시각.

김정일 위원장을 맞이하고 있는 노 대통령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곤욕스러웠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김정일의 속이 도무지 읽히지 않았던 탓이다. 무척이나 좋은 일로 방한한 것인데도 무표정이었다.

대취타에 이어 국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동안에도 그런 표정이었다. 노 대통령은 만약 한국에서 석유가 쏟아질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면 밥을 안 먹어도 늘 배부를 거 같은데 말이다.

그런 김정일 위원장의 표정이 확 달라진 건 사열이 끝나고 나서였다.

사열까지는 국가적 행사였다면, 이제는 셰브롱과 ID 그룹의 시간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평화의 집 VIP 룸으로 안내되었고, 옆방에서 대기 중이던 유재원과 리사 배리 CEO가 VIP 룸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때까지 노 대통령은 김정일과 함께 있었는데, VIP 룸이 열리고 유재원과 리사 배리 CEO가 들어오자 이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김정일의 감정을 볼 수 있었다.

반색이었다.

“유재원 동무! 어서 오시오!”

무표정한 김정일의 얼굴에 기쁨이 떠오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유독 자신을 반기는 김정일의 모습에 웃으며 대응을 하면서도 도통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유재원도 나름 눈치가 있어서 김정일이 본인에게 큰 호감이 있다는 건 바로 알아봤다.

다만 그 이유가 단지 이번에 북한 지하자원 탐사 성공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북한에 유재원이 갔던 건 신혼여행 때가 전부였다. 그때에도 김정일과 대면하진 않았고, 금강산 관광 코스를 탄 게 전부였다. 신혼여행 중에 북한에 컴퓨터와 게임기, DVD 플레이어 등을 선물하긴 했는데, 겨우 그걸로 이 정도로 반색하는 반응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프레스 완장을 찬 김정남이 자꾸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실 김정남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취재진도 열심히 취재 중인지라 유독 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신경이 쓰이니 계속 시선이 갔다.

“큰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재원 역시나 표정 관리를 하면서 김정일과 대면을 시작했다.

“하하, 공화국 인민들의 먹을거리 걱정을 사라지게 만들어 준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부르시오. 거드름 피우지 않고 몇 번이고 달려올 테니까.”

김정일의 대답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뭔가 좀 이상했다.

유재원이 알고 있는 김정일은 이렇게 정상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귀 전 유재원이 분석한 김정일은 굉장히 말이 많은데, 말을 많이 할수록 흥분해서는 정신없이 아무 말이나 쏟아내던 사람이었다.

그냥 그렇다는 게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분석해서 얻은 결과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대화록 전문은 원래 유재원과 같은 일반인(?)은 접근이 금지된 극비 자료였다. 그런데 2030년쯤 정권을 되찾겠다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고, 정치적 총공세가 이어졌다.

중구난방 정부를 공격하면서 극비 자료도 마구 풀었는데, 그 와중에 풀린 자료였다. 정상적인 루트로 얻을 수 없는 자료였지만, 그래서 더욱 날것 그대로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정일의 성향이나 당시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회귀 전 열심히 정리했던 북한의 정치 상황이나 주요 이벤트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클린턴 대통령을 통해 빠른 종전 선언 루트를 타면서, 북한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김정일에 대한 개인 자료는 유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대면해 보니 그것도 폐기해야 할 모양이다.

아무래도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전과 달라지면서 김정일의 정신적 문제도 상당수가 완화되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 여성 동지가 셰브롱의 새로운 책임자인 모양이군?”

프레더릭 대신 리사 배리 씨가 온다는 통보는 북한에 바로 전해졌다.

김정일의 방문을 며칠 앞두고 만날 사람이 바뀐다는 건 큰 결례였지만, 심한 감기라는 말에 북한은 큰 문제를 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내일하고 있는 김정일에게 감기라도 옮게 되면 큰일이었으니까.

“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셰브롱의 새로운 CEO인 리사 배리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리사 배리 CEO는 한국식으로 머릴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인사를 받은 김정일은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셰브롱에서 지하자원 탐사를 한다기에 혹시나 하고 허락해 본 건데, 유전을 찾았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소. 만약 우리 땅에서 검은 기름이 나오는 걸 본다면 공화국 영웅으로 추대해 드리리다.”

리사 배리 CEO를 한껏 치켜세우는 김정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그의 말 속에 만에 하나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경고도 담겨 있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원유가 나오면 공화국 영웅인데, 만에 하나 허탕이라면 본인을 여기까지 헛걸음하게 만든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그래 봐야 북한이 실질적으로 셰브롱에 위해를 가할 수단은 전무했다.

“1년 내에 위원장님이 직접 원유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유전 탐사의 실패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접견을 마친 유재원 일행, 노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과 북측 인원들은 준비된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을 시작했다.

자동차도 각양각색이었다.

유재원과 수행원들은 라이트닝 볼트의 차량을, 리사 배리 CEO는 셰브롱의 의전 차량인 캐딜락 리무진을 탔다. 노 대통령은 미래자동차의 에쿠스 리무진 방탄이었고, 김정일 위원장은 벤츠 리무진 방탄이었다.

차 값만 따지면 김정일 위원장이 제일 비쌌고, 유재원이 가장 저렴했다. 이러한 모습을 방송국의 취재 차량이 뒤따르면서 생방송으로 방송했다.

대한민국은 진작에 정규 방송이 끊기고 김정일 위원장이 국경을 넘어서기 전부터 특집 방송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이 소식은 특별 속보를 통해 전해졌다. 그만큼 전 세계 사람들이 역사적 순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한 장면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벤츠 리무진 방탄과 함께 집중 조명된 것이 유재원이 탄 라이트닝 볼트의 전기자동차였다.

라이트닝 볼트의 머리글자인 LV로 번개 문양처럼 형상화한 게 라이트닝 볼트의 심볼이었다. 심볼은 전면 그릴에 적당한 크기로 박혀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그 심볼의 문양이 쉴 틈 없이 보도되었다.

화면에서 보여지는 상징성도 대단했지만, 라이트닝 볼트의 전기자동차는 디자인적으로도 너무나 훌륭했다. 한 화면에 나오는 벤츠나 미래자동차, 캐딜락의 디자인은 90년대 각이 딱딱 떨어지던 스타일에서 약간의 곡선이 들어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라이트닝 볼트의 전기자동차는 2020년쯤에 나오는 전기자동차의 유려한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왔다.

기존의 자동차 디자인과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새로운 것이 떡하니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미래적인 디자인은 슈퍼패스트가 최고였지만, 슈퍼카를 격식 차리는 의전에 쓸 수 없기에 대형 SUV인 불칸을 선택했다.

볼트 사장이 유재원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불칸이어서 김정일 위원장의 벤츠 리무진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이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주요 나라들에 모두 공통된 화면으로 송출되었다.

마케팅 효과도 굉장했다.

당장 라이트닝 볼트사의 홈페이지에서 발생하는 트래픽의 크기가 대폭 상승했고, 트래픽의 상승과 비례해 주문량도 늘어났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마케팅 효과가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공동 경비 구역에서 서울 강남까지 달리는 시간은 짧았다.

거리로는 대략 60km였고, 차로 느긋하게 달려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강남의 경우에는 평일에도 차가 좀 밀리긴 했는데, 이번엔 남북한의 정상들이 함께 움직이는 터라 신호기를 조절해서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쭉 달릴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진 덕이다.

이건 유재원도 이번에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도곡동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 지금껏 수도 없이 출근을 했던 유재원이었다.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최상층에 유재원의 집이 있긴 했지만, 한국에 오면 덕진리 고향집으로 먼저 갔으니 말이다.

덕진리에서 글로벌헤드쿼터 빌딩까지 가는 데 넉넉히 1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보다 거리가 더 길었던 공동 경비 구역 평화의 집에서 오는 데는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ID 글로벌헤드쿼티 빌딩은 남북한 경호팀으로 가득했다.

로비 입구에도 중구난방으로 몰린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건물 안에 들어가게 되면 정해진 취재진만 동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재원이 제일 먼저 도착했고, 그다음이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순이었다. 로비에서 딱히 준비한 행사는 없었다. 그저 포토 라인에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약간의 시간을 조금 주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로비에서 바로 최상층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99층까지 올라갔다.

101층은 유재원의 펜트하우스였다. 100층에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와 레스토랑 등 상업 시설이 있다.

99층은 비밀이었는데, ID 그룹 본사가 사용하는 대회의실과 휴게실 등의 시설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북한 지하자원 탐사에 대한 결과를 브리핑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유재원답게 결과 발표를 그저 말로만 때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비주얼과 함께 하는 것이 유재원식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오늘 유재원식 프레젠테이션의 화룡점정을 준비했다.

일단 대회의실 전면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크린이 시선을 압도했다. 보통은 프로젝터를 동원해서 대형 화면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ID 디스플레이의 최신 제품 55인치 4K LCD 모듈을 16장 동원해 만들어진 220인치 스크린이었다.

프로젝터의 단점은 밝기와 화질이었는데, 4K LCD를 동원하면서 그 단점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대신 LCD라면 어찌할 수 없는 베젤로 인해서 이음매가 조금 보였지만, 굴절률이 큰 유리 막대를 덧대서 베젤을 가리는 꼼수를 썼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선명한 화면이 거대하다 보니 베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면 긴 말 필요 없이, 곧바로 인공지능 골드의 지하자원 탐사 결과를 확인하겠습니다. 골드, 최종 결과를 출력해줘. ”

-예, 최종 결과를 출력하겠습니다.

단상에 오른 유재원의 말에 인공지능 골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검게 물들었던 대형 스크린이 밝아졌다.

엔터프라이즈 버전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심플한 바탕화면이었다.

게이밍 버전 안드로이드는 반투명효과는 기본이고 동영상 백그라운드까지 기본 설정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비주얼 폭발이다. 그렇지만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시스템의 모든 성능을 작업에 집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단색의 바탕화면이 전부였다.

밋밋한 화면은 자원탐색 기계학습 프로젝트와 연결된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달라졌다.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실행되며 최종적으로 나타난 화면은 우주에서 북한을 중심으로 내려다본 위성 사진이었다. 해상도가 무척이나 높았지만, 흑백이었다. 대신 국경선 그리고 행정 구역이 오버레이가 되어 있어서 한눈에 북한 곳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성 사진의 범위도 넓었는데, 상단 오른쪽에는 일본의 홋카이도가, 하단 왼쪽에는 중국의 쓰촨성까지 표시되었다.

상단 왼쪽에는 다양한 수치들이 떴다.

서버로부터 받아오는 데이터였다. 클라우드 서버 상에서 구동되고 있는 자원탐색 기계학습 프로그램이 진짜였지만, 구동되는 모습을 보면 그저 숫자들의 향연이었기에, 이를 멋짐이 폭발하는 시각적 화면으로 바꿔주는 일을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담당하는 중이다.

수많은 수치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건 러시아의 수라 프로젝트의 가동 횟수였다.

처음 가동했을 때 유재원은 직접 러시아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만났었다. 그런데 그때 한 번만 가동한 게 아니라 매주 2~3번씩 반복해 탐색 작업을 했고, 탐색할 때마다 발산하는 주파수를 다르게 해서 결과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횟수가 올라갈 때마다 메인 스크린에 뜬 위성 지도는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로우데이터의 수치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지역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수치의 변화까지도 확인하면서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 시각적으로 표현 중이다.

색이 조금씩 물들 때마다 필요한 연산력의 규모는 가히 초국가적이었지만, 유재원은 굳이 비전문가들인 노 대통령이나 김정일 위원장에게 설명하진 않았다. 대신 한눈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그널을 설명했다.

“파란색이 의미하는 것은 별다른 자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용한 자원이 매장된 확률이 높을수록 노란색이 되고, 주황색이면 최고 수치입니다.”

파란색은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몇십 초가 더 지났을 때, 한반도 전체는 쪽빛으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노란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실패한 거 아닌가 싶었다.

걱정 때문에 노 대통령이 무슨 말을 막 하려고 할 때, 변화가 일어났다. 두만강 하류의 나진 선봉 지역의 앞쪽 바다에 노란색 점이 나타난 것이다. 정확하게는 대초도 앞쪽 바다였다.

“뭬야? 두만강 앞바다라니!”

화면에 집중하던 김정일이 깜짝 놀라서 쓰고 있던 안경까지 벗은 다음 다시 썼다. 제대로 본 게 맞나 확인해 봤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노란색 점은 또 나타났다.

이번엔 서해였다.

압록강 하류의 신도군 남쪽 바다에서도 노란 점이 점차 범위를 키워가고 있었다. 인공지능 골드가 찾아낸 북한의 유전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더욱이 화면의 변동은 노란 점 두 개로 끝이 아니었다. 유재원이 따로 설명하지 않았던 붉은 점들도 지도 위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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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붉은 점이 떠오르는 곳은 총 2개로, 중국 쓰촨성과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였다.

점의 크기는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에 생겨나는 게 볼링공 크기 정도로 큼지막했고, 쓰촨성 쪽에 생겨나는 것은 테니스공 크기였다.

“유 회장, 저 붉은색은 무얼 의미합니까? 유전은 아닌 거 같은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노 대통령이 질문을 던졌다.

“지하자원 탐사에 대한 기계학습을 하면서 부수적인 수입이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의 물음에 유재원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부수적인 수입?”

“지진에 대한 예측입니다.”

“지진? 지진이라고요?”

노 대통령은 유재원이 원하는 반응을 딱 보여줬다. 반면 김정일 위원장은 왜 그렇게 놀라나 싶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지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였다.

수많은 지구과학자들이 지진을 예측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은 통계 기법을 통해 예측은 해도, 언제 지진이 터질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위태로워 보이는 땅이 몇백 년이나 탄탄할 수도 있고, 단단해 보였던 지반이 삽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게 지진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런 지진에 대한 상식도 잘 알고 있었다. 한반도가 일본에 비해 지진이 없긴 했지만, 완전히 안전한 땅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간밤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종종 진도 2 정도의 지진에 대한 보고가 때때로 들어왔다.

“제가 지질 전문가는 아닌지라 높은 수준의 답변은 해 드리지 못하니 양해해 주시길. 대신 우리 인공지능 골드는 학습을 통해 높은 확률로 거대 지진이 올 것을 예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쓰촨성과 동일본해입니다.”

유재원은 스크린에 뜬 붉은 점을 마우스 커서를 이용해 클릭했다. 음성 제어도 가능했지만, 손으로 움직이는 게 빨랐다.

-예상 진앙지, 쓰촨성 원촨.

-예측 결과, 리히터 규모 M 8.0.

-지진 발생 예상일, 2008년 5월 10일에서 14일 사이.

-특이점, 최대 진도는 XI급의 대지진.

클릭을 하자마자 쓰촨성 대지진에 대한 예상 결과가 바로 떠올랐다.

너무나도 정확한 결과였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먼저 결과를 확인했던 유재원은 살짝 소름이 돋았었다. 사실 유재원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에 회귀 전 얻은 지진 예측 알고리즘을 추가하면서 이렇게 정확한 결괏값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은 거의 없었다.

ID 테크놀로지의 클라우드 시스템이 무식하리만큼 엄청난 물량으로 엑사플롭스 단위의 연산력을 달성해냈다. 그렇지만 기술 특이점을 넘어서 버린 미래의 시스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초전도 반도체 기반의 양자 컴퓨터인 골든실버의 코어 프로세서 크기는 야구공만 했다. 반면 ID 테크놀로지의 클라우드 시스템은 연결된 PC만 1천만 대 정도의 규모였다. 서버용 보드였기에 PC 한 대에 8개의 CPU가 들어가고, GPU도 최소 4장이 장착된 PC들이 1천만 대 정도 연결되어서 엑사플롭스 단위의 연산력을 겨우 달성했다.

그럼에도 회귀 전 기준으로는 겨우 기초 정도만 뗀 것인데,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지진 예측 알고리즘이 제 역할을 해냈다.

물론 약간의 튜닝은 있었다.

기계학습 인공지능이 결과를 내놓는 속도에는 입력되는 자료의 순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재원은 간단하게 중국은 남쪽부터, 일본은 동일본해 자료부터 입력하면서 결괏값이 빠르게 나올 수 있도록 설정했다.

이어서 유재원은 후쿠시마 앞쪽에 뜬 붉은 점도 클릭했다.

-예상 진앙지, 일본 산쿠리 연안.

-예측 결과 리히터 규모 M 9.x.

-지진 발생 예상일 2010년에서 2013년 사이.

-특이점, 대규모 해일 발생 가능성 높음.

쓰촨성 대지진의 예측과 같이 유재원이 회귀 전 직접 눈으로 보았던 동일본 대지진의 양상을 그대로 입력한 것 같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다만 쓰촨성 대진과 다른 점은 예상일이었다.

쓰촨성 대지진은 오차가 4일에 불과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은 연 단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래에서 가져온 지진 예측 알고리즘이지만 주어진 정보의 양이 부족했다. 오히려 수라 프로젝트를 통한 광범위한 지역의 지질 데이터만으로 유전도 찾아내고 지진도 찾아낸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공위성이나 심해 탐사선 등을 띄워서 얻어낸 자료까지 투입된다면 예측 오차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신뢰할 수 있는 겁니까?”

노 대통령의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기계학습 인공지능이 내놓은 결과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겠죠. 그렇지만 저는 골드의 판단을 100% 신뢰합니다.”

유재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100%가 아니라 1,000% 신뢰하는 유재원이었다. 인공지능 골드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만든 시스템이다. 결함을 찾아보자면 유재원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하드웨어적, 소프트웨어적인 결함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실수에서 배우는 것처럼 인공지능 골드도 실수에서 배운다. 그것이 기계학습의 핵심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지금 발표된 유전 탐사와 지진 예측은 회귀 전 기억이라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까지 더해진 후에 나온 결과였다.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유재원이 확신에 찬 대답을 하자 대회의실에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기분 나쁜 침묵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정보였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침묵은 박수 소리에 의해 깨졌다.

김정일 위원장의 박수였다. 곧이어 노 대통령도 손뼉을 쳤고, 나머지 보좌관과 수행원들에게도 곧 전염되었다. 그런 박수 소리 중에서도 유독 큰 게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수행원 사이에 껴 있던 김정남이었다.

공동 경비 구역에서는 어설픈 사진 기자 흉내를 내더니, 여기에서는 수행원 사이에 끼어서 얌전하게 있었다.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나 노 대통령이나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쓰촨성 대지진 예측 자료는 김정일 위원장님께 따로 드리겠습니다. 제가 정식으로 발표를 하겠지만, 중국과 보통 사이가 아니신 김정일 위원장님이라면 중국에서 받아들이는 체감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알겠소. 중국의 동지들에게 확실히 전해드리리다.”

김정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얻은 사람이 김정일 위원장이었다.

유전 후보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자원 탐사권은 셰브롱이 가져갔지만, 개발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물론 탐사권이 있는 셰브롱에게 우선할 권리가 있긴 한데, 계약서상으로 그것은 단 하나의 유전에 부여된 권리였다.

그러니 남은 하나는 김 위원장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유전 개발과 함께 여러 가지 조건들을 내건다면, 북한이 산적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더욱이 지진 예측 데이터는 생각지도 못했던 덤이었다.

진짜로 내년에 대지진이 중국에서 일어날지 확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 중국에 대고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남북 관계, 북미 관계 개선으로 전과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북한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제 발전은 더뎠다. 최대 무역국은 한국이었고, 다음이 중국인데 절대적인 수치는 비슷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체급 차이는 몇 배 수준이니, 중국이 북한에 소극적이라는 해석도 가능했다.

지진 예측 자료 그리고 유전 개발로 중국을 끌어들인다면 북한의 경제 개발도 훨씬 나아질 거라는 김정일의 생각이었다.

이미 김정일의 머릿속에서는 거대 스크린에 황금빛처럼 빛나던 노란 점을 보았을 때부터 계산은 끝나 버렸다. 신의주 남쪽의 신도군 유전은 중국과 개발하고, 두만강 앞쪽 바다는 셰브롱과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유재원이 노렸던 바였다.

사실 진짜 북한의 노른자 유전은 두만강의 대초도 유전이었다.

경제적 매장량이 대략 30억 배럴 정도 되는 중소형 유전이지만, 연안에 있어서 채굴과 운송이 간편했다. 더욱이 회귀 전 중국은 유전 개발을 핑계로 나진 근방에 거대한 항구를 개발했고, 본인들의 앞마당처럼 활용했다.

급기야 군함까지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중국의 숙원 사업이었던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함이었다.

미국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충돌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거의 전쟁 불사 단계까지 갔는데, 다행히도 유재원이 죽기 전까지 전쟁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반면 신의주 앞바다인 서해 유전의 경우에는 경제적 매장량이 거의 없었다. 경질유와 천연가스가 좀 나오는데,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고려하면 약간의 이익을 보는 정도다.

애초에 후보지로 찍어줄 생각도 없었는데, 유재원이 생각이 바뀐 건 중국 때문이었다.

중국은 청나라 채권 추징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매년 수백조 원을 빚을 갚는 데 써야 했음에도, 경제 성장률이 5%가 넘었다. 원래는 8~10%의 초고속 성장을 찍었지만, 그래도 엄청난 수치였다.

더욱이 빚을 갚는다고 긴축 재정 정책을 펼치면서, 오히려 회귀 전 이 시기에 급격히 불어나던 부동산 거품이 완화되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청나라 채권 상환이라는 최악의 지뢰를 밟아 버린 후진타오의 조기 퇴진설이 솔솔 피어나는 중이었다.

청나라 채권만 아니었다면 2013년까지 주석 자리에 있을 후진타오를 대신한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시진핑이 급부상했다.

보시라이나 리커창도 거론되고 있었지만, 상왕처럼 권력을 놓지 않고 있는 장쩌민과 그의 상하이방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차기 권력을 만들어내진 못해도 최소한 점찍은 대상이 권좌에 오르는 건 방해할 수 있는 세력이 장쩌민의 상하이방이었다.

그렇게 되자 태자당의 신성 시진핑이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유재원은 중국이 차기 권력으로 이양될 시점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다음으로 예측했다.

후진타오 주석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받은 다음에 자리를 넘겨줄 것으로 예상했다.

시진핑 시대가 원래보다 5년이나 일찍 개막한다는 이야기다.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시진핑이 신의주 신도군 유전을 어떤 식으로 다룰 지는 너무나도 뻔하다.

셰브롱이 개발하는 대초도 유전과 중국이 개발할 신도군 유전으로 북한은 비교체험 극과 극을 확실히 체감할 것이다.

대형 스크린 속 노란 점 두 개에 이렇게나 많은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김정일 위원장이나 노 대통령 모두 유재원의 안배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이미 텍사스와 러시아에서 거대한 실적을 올렸기에 탐색 매커니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에도 결과에 대한 신뢰는 확고했다.

다만 지진 예측에 대한 반응은 유재원도 미지였다.

북한 자원 탐사 결과는 물론, 지진 예측에 대해서 오늘 중으로 정식 보도 자료가 전 세계에 전해질 것이다.

그러면 전문가들의 검증도 시작될 것이고, 이들의 말을 기사화해서 온갖 기사들이 쏟아질 것이 자명했다.

그중에서도 지진 예측에 대한 발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지진 예측이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쓰촨성 대지진이 터지는 시기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남았다. 그날이 다가올 때까지 논란이 쉬지 않고 이어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일들이 앞으로 많이들 벌어질 것 같다.

잠시 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할 준비를 했다.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이제는 남은 일정을 진행해야 할 시간이었다.

정상 회담과 청와대 만찬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김정일 위원장 일행은 숙소로 가서 좀 쉬었다가 청와대에서 정상 회담과 만찬을 진행하고, 유재원은 만찬에만 참석한다. 리사 배리 셰브롱 CEO는 바로 북한 실무진과 함께 유전 개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말이 곧 법이지만, 그래도 나라의 구색은 갖춰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유전 개발에 대한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수의계약 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북한 측과 협의가 필요했다.

“크흠. 유재원 회장과 잠깐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갑자기 김정일 위원장이 무슨 마음을 먹은 건지, 노 대통령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러시지요. 그러면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유재원을 쓱 보더니 먼저 자리를 피해 줬다. 다른 곳도 아니고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의 최상층 대회의실이었으니, 먼저 움직여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유재원은 김정일 위원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었다.

“김정남이는 이리 와 보라.”

그런데 유재원의 예상과 달리 김정일 위원장은 수행원들 사이에 끼어 있던 김정남을 부르는 게 아닌가.

김정남은 김정일의 부름에 머뭇거리면서도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 녀석이 내 장남이라오. 컴퓨터 쪽에 관심이 많아서 평소 유재원 회장을 만나 보고 싶어 했는데,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데려왔다오.”

김정남과의 접촉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김정일이 직접 소개를 해 줄 줄이야. 유재원의 머릿속에서 개털처럼 미미했던 김정남의 존재감이 한 단계 더 높아지는 순간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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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슈퍼컴퓨터김정남을 유재원에게 소개시켜 주는 김정일의 모습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마치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연예인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부모의 모습이 유재원의 뇌리에서 겹쳐졌다.

여기서 인성질을 세게 해서 매몰차게 거절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회귀 전과 달리 이번 생의 김정남은 활용 가치가 높은 인물이었다.

단적으로 북측에서는 김정남을 어쩔 수 없이 김정일과 동행했다는 뉘앙스지만, 한국이나 전 세계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를 한다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특히 김정일의 장남이면서 차기 권력에 유력하다는 듯 MSG를 팍팍 친다면 말이다.

아마 북한에 남아 있는 김정은이 길길이 날뛰지 않을까.

김정남과 달리 김정은에 대한 데이터는 차고 넘치는 유재원이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꼭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다.

본인이 무시당하는 건 절대 못 참는 김정은이니, 김정일이 살아 있는 지금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칼을 갈 것이다.

“처음 봤을 때,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위원장님의 장남분이셨군요.”

계산을 끝낸 유재원이 김정일의 소개에 김정남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깜짝 놀란 척 연기를 했다. 자세히 뜯어 보면 좀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포착되었을 텐데, 김정일은 너무 늙었고, 김정남은 너무 흥분한 상태였기에 전혀 몰랐다.

“유 회장님, 반갑습니다! 평소 유 회장님을 흠모하고 있었는데, 오늘처럼 좋은 일로 한국에 가게 되자 아바이께 억지를 써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김정남의 반응은 마치 푹 빠져 있는 연예인을 만난 열성 팬에게서나 볼 법한 반응이었다.

“유 회장이 보내준 컴퓨터와 게임기는 이 녀석 차지였다는 거 아니겠소.”

거기에 김정일의 첨언까지 이어졌다.

두 부자의 말에 유재원은 확신이 더더욱 짙어졌다.

“저희 컴퓨터와 게임기를 유용하게 사용하셨다니, 너무 영광이군요. 앞으로도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보내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의 컴퓨터 선물을 김정남이 사용했다는 것도 유용한 정보였다.

예전 남북 관계가 아슬아슬한 시절에는 유재원이 직접 해당 컴퓨터에 심어진 루트킷을 이용해 정보를 찾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종전 선언 후 남북 관계가 정상화에 들면서 그런 위험한 일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북한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 난이도도 많이 내려왔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도 사라졌다. 덕분에 루트킷을 깨우는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뜩 최근 올라온 스팀 통계 자료가 생각났다. 북한에서도 하루에 2,500건 정도의 접속자가 나왔다는 특이 보고였다.

종전 선언도 하고, 개성과 라선, 신의주 등등 일부 지역에 경제 특구를 만들어 개방도 조심스럽게 하는 북한이지만, 인터넷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일성 대학 컴퓨터실이나 일부 특정한 장소와 특권층에겐 진짜 인터넷이 열려 있었다.

두 부자의 반응을 보아하니 북한의 스팀 접속 통계에서 김정남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리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했다.

김정일의 첨언에 김정남도 더욱 신나서 본인이 즐겼던 게임에 대해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컴퓨터와 친해졌고, 컴맹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북한에서 컴퓨터 보급 사업을 하는 책임자가 되었다고도 말했다.

유재원의 귀가 뜨이는 건 김정남 본인이 해 봤다는 게임들의 리스트를 듣고 나서였다.

둠과 디아블로부터 더 퍼시픽까지. ID 엔터테인먼트 딱지를 붙이고 발표된 게임들은 다 해 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혹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아! 당연해 해 봤지요. 40인 공대도 이끌어 봤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나오자 반색을 하는 김정남이었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싱글 플레이 게임도 재미있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멀티 플레이 게임도 재미있지만, 가장 큰 재미는 역시나 사람들과 함께 팀을 이뤄서 거대한 적에 맞서는 대규모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만 한 게 없었다.

게임 개발사의 입장에서도 한 장 사면 새로운 수익이 없는 싱글형 AAA 게임보다는 매월 접속료를 받는 온라인 게임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덕분에 전 세계에 우후죽순 쏟아지는 대규모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야말로 양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넘어서는 퀄리티를 보이는 건 없었다. 기술적으로도 재미로도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술적으로 서버 한 대에 8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뿐이다. 한 서버에 접속한 이들 중 수백 명 규모의 인원이 하나의 전장에 모여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것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만 가능했다.

기존 게임들은 공성전만 하면 버벅거려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반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기본 사양 컴퓨터에서 30프레임 이상은 보장했다. 컴퓨터의 성능이 최상급이라면 60프레임은 나왔다.

유재원의 미래 기술이 더해진 고성능 넷코드와 서버에 대한 투자도 과감했고, 블리자드의 운영도 훌륭했기 때문에 달성한 성과였다.

무엇보다 이러한 대규모 전투와 시나리오를 잘 버무려서 훌륭한 콘텐츠로 만들어냈다는 것도 중요했다.

덕분에 레이드 콘텐츠에 빠지면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른바 와우 폐인이 양산될 정도로 말이다.

김정남도 그런 와우 폐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김정남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레전드 리그를 더 즐기고 있습네다!”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최근 빠져 있는 게임까지도 실토했다.

그야말로 잡덕 게이머였던 모양이다. 레전드 리그의 중독성도 가히 상상 그 이상이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공격대 레이드는 한 번 뛸 때마다 최소 2시간이고 40인 공격대의 경우 5, 6시간은 가뿐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번 플레이 하고 나면 진이 빠져 버린다. 반면 AOS의 최강자인 레전드 리그는 게임 전개가 빨랐다.

그러면서 극한의 PvP를 경험할 수 있었다.

플레이 타임은 30분 내외지만, 재미의 순도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레이드에 비견될 정도다. 물론 게임에서 이겼다면 말이다.

레전드 리그 또한 유재원이 풀 만한 이야깃거리가 한가득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달리 레전드 리그는 프로 리그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다. ‘고전파’와 같은 전설의 프로게이머들이 등장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지금의 최상급 티어 선수들의 기량은 일반 즐겜 유저들의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온게임넷에서는 시범 리그를 진행 중이었는데, 시청률은 스타 리그를 앞설 때가 많았다. 아직 대기업 창단팀은 없고, 나진, 제닉스, 슈마 같은 중소기업들이 팀 스폰서를 하는 정도이지만, 그 인기는 대기업팀에 비견할 만했다.

그만큼 레전드 리그라는 게임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기, 이제 이동하실 시간입네다.”

“뭬야!”

순간 유재원은 사극을 보는 줄 알았다.

그저 게임 이야기를 하는데 수행원 중 하나가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도끼눈을 뜨고 매섭게 쏘아보는 게 아닌가. 시간과 장소만 현대이지 김정남과 수행원의 관계는 조선 시대 왕족과 무수리와 똑같았다.

“아, 제가 바쁘신 분을 붙잡고 있었군요.”

그 모습에 유재원의 기분도 상해 버렸다.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도끼눈을 뜨는 김정남이나, 어렵게 말을 한 것인데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반응하는 수행원이나 모두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제야 대화에 몰입하느라 깜빡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북한은 새로운 신분제 사회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닙네다! 바쁘신 건 아바이고, 저는 남아 있어도…….”

뒤늦게 괜찮다고 하려던 김정남은 김정일의 눈빛에 움찔했다.

처음엔 장남을 위해서 직접 소개도 마다않던 김정일이었다. 그런데 유재원과 함께 나랏일이나 사업에 대한 일도 아니고 겨우 게임 이야기나 하는 장남의 모습을 보니 남들 앞이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괜찮으시면 못다 한 이야기는 ID톡으로 할까요? 스팀과도 자동 연동이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같이 레이드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재원도 대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ID톡을 언급했다.

“진짜 괜찮겠습니까?”

유재원의 말에 김정남은 반색하면서도 김정일이나 유재원의 눈치를 또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북한 사람과 사사로이 접촉하는 것 자체가 금지였다. 통신 또한 마찬가지다.

종전 선언이 되고, 남북 관계가 완연하게 풀린 지금은 국가보안법이 없다.

대신 형법에 안보법이 신설되었다. 과거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되는 법은 아니고, 진짜 국가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산업 스파이와 간첩 등등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들을 묶어서 안보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국가보안법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지만, 북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아직 실향민과 같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은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이메일이나 ID톡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정남이라면 가능했다.

유재원 역시나 한국 정부에서 허가를 받아야겠지만, 김정남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수고를 감수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따가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김정남은 희희낙락 본인의 아이디를 적어 줬다. 눈빛을 보아하니 어쩌면 북한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친구 추가 작업이 끝나자 김정일은 김정남을 데리고서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김정일의 실망을 크게 산 모양이다.

다음 날.

-셰브롱, 북한 유전 탐사 대성공!

-유전 후보지 2곳 발표!

-한반도의 새로운 희망이 된 두만강과 압록강.

보도 자료가 풀리자 역시나 북한의 유전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었다.

셰브롱 내부에서는 두만강 쪽은 대초도 유전으로, 신의주 쪽은 신도군 유전으로 불렀었는데, 언론에는 훨씬 더 직관적이고 익숙한 이름인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단순화해서 네이밍을 해 버렸다.

확실히 두만강 유전과 압록강 유전이 입에 착 붙는다.

-북한, 셰브롱에 우선 개발권 약속한 곳은 한 곳.

-셰브롱, 두만강 유전 낙점.

-중국, 압록강 유전에 큰 관심!

일반에 공개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유전 개발의 큰 그림이 나왔다. 그것도 유재원이 구상했던 것과 똑같은 구도였다.

북한은 스스로의 기술로 유전을 개발할 능력이 없으니, 다른 업체의 손을 빌려야 한다. 다만 셰브롱은 두만강 유전을 낙점했다. 태평양과 통하는 지역이라서 셰브롱이 자랑하는 해상 유전 플랫폼인 아틀라스를 그대로 가져와 채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압록강 유전 개발은 경쟁 입찰로 돌릴 수 있는데, 그 누구도 중국 말고는 입찰에 성공할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북한 유전 소식은 뒤이어 터진 초특급 소식에 묻혀 버렸다.

-ID 그룹, 지질 탐사 알고리즘 개선 작업 중 지진 예측.

-인공지능 골드, 쓰촨성 원촨에 리히터 규모 8에 달하는 대지진, 1년 내에 올 거라 예측!

-동일본 대지진도 6년 내에 터질 것이라 예상! 리히터 규모 9 이상!

-지진 전문가들, 지진 예측 현실성 없다! 강력 부정!

인공지능 골드의 지진 예측에 대한 소식도 드디어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공개된 것이다. 어제 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200인치가 넘는 초대형 스크린으로 보았던 화면도 친절히 제공되었다.

쓰촨성 원촨과 후쿠시마 앞쪽 동일본해에 큼지막하게 찍힌 붉은 점은 너무나도 불길해 보였다.

전문가들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지진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에겐 상식이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에 리히터 규모 8과 9짜리 지진이 온다는 인공지능 골드의 예측은 그야말로 상식 파괴였다.

중국과 일본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세한 데이터가 전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연구해 보겠다는 말도 없었다.

대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태풍과도 같은 반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티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특히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가장 부정적이었다. 지진 예측에 대해서는 믿지도 않았고, 도대체 어떤 식의 알고리즘으로 대지진이 올 거라고 말하는지, 검증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일각에서는 97년 일본의 경제 위기에서 한탕 크게 했던 일본이 그때의 기억을 못 잊고 또 위기감을 키운다는 식의 음모론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네티즌들은 단순한 가십으로 넘기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재원은 검증에 대비해서 과거에도 요긴하게 써먹었던 도깨비 컴퓨터를 도깨비 슈퍼컴퓨터로 강화했다. 당시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유재원이 준비했던 건 286컴퓨터와 베이직으로 짠 간단한 시뮬레이터였다.

이번에 납득시켜야 할 대상은 전 세계였으니, 준비물의 규모도 사상 최대였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서 퍼져가는 긍정적인 여론을 보니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유재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인공지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입니다!

코로나19 사태의 끝이 보이지만, 이 망할 전염병은 방심할 때마다 크게 사고가 터지는 것 같더군요. 완전히 종식 될 때까지 방심하지 말고 거리두기를 잘 지켜냅시다~!

그럼, 주말 건강히 잘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

×

별의 아이○ 별의 아이

다음 날.

유재원의 발표로 전 지구가 떠들썩해질 때. 유재원과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노 대통령은 정해진 스케줄을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서 특이한 건 노 대통령이었다.

바로 내일이 투표 날임에도 노 대통령은 선거 운동보다 김 위원장과 함께 움직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했던 게 노 대통령은 현재 재선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참고할 국가는 있었다. 미국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 도전이 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재선에 대한 규칙도 미국을 참고해서 만들어졌는데, 아직은 큰 문제 없이 작동 중이었다. 다만 노 대통령은 직접 본인이 발로 선거를 뛰는 것보다는, 유재원이 만들어낸 이번 이벤트에 올라타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단적으로 어제 청와대에서 있었던 정상 회담 후, 아직 공동합의서가 발표되진 않았지만 언론들의 관심도는 대단했다.

뭔가 대단히 큰 게 나올 것 같다는 긍정적인 기대감도 상당했다.

덕분에 어제 방송된 공중파 뉴스의 비중을 보면 60%가 김정일 방한에 대한 소식이었다. 김정일에 대한 보도가 이뤄질 때 유재원 아니면 노 대통령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도되었고,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전해졌다.

선거 운동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된 김원기 의원과 각 지역 선거 대책 본부에 맡기고는 정상 회담에 집중했다.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실제 데이터로도 증명이 되었다. 바로 지지율로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나오던 지지율 발표는 깜깜이 기간에 접어들어 언론 공표가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지지율 조사 자체는 할 수 있었고, 돈 좀 있는 선거 캠프나, 유재원과 같이 어느 정권이 들어서는지가 중요한 기업은 자체적인 여론 조사를 매일 돌리면서 지지율의 추세를 살폈다.

오늘 아침, 유재원이 받아 본 지지율 표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마의 50%를 넘어서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노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이벤트에 소수 비관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받아 보고선 그런 사람들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덕분에 노 대통령도 오늘의 일정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ID 일렉트로닉스 대전 공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대전 공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리사 수 박사가 유재원과 노 대통령,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환영의 말을 전했다.

오늘 김정일 위원장의 일정 대부분은 ID 그룹 계열사들의 공장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북한 쪽에서는 현장 시찰, 유재원은 견학으로 명명한 바로 그 이벤트였다.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 최고기술책임자인 리사 수 박사입니다. 수 박사님의 손끝에서 세계 최고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가 만들어지고 있지요.”

대전 공장에 도착하자 리사 수 박사가 유재원과 두 정상을 맞이했고, 유재원은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리사 수 박사를 소개했다.

“회장님의 겸손과 과찬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번에 준비되고 있는 M7까지도 모두 회장님의 기술을 바탕으로 업그레이드 된 프로세서들이니까요.”

진짜 겸손한 사람은 리사 수였다.

그녀의 말대로 기초를 쌓은 건 유재원이지만, 그 위에 금자탑을 쌓아 올린 사람은 리사 수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2007년을 대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입니다.”

단적으로 리사 수 박사가 들어 보이는 무지갯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대형 웨이퍼에는 그녀의 노력이 듬뿍 담겨 있었다.

“올해 IDDC에서 발표될 최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탑재될 M7이 담긴 웨이퍼 원판이지요.”

지름만 45cm에 달할 만큼 커다란 웨이퍼는 커팅 작업도 끝난 상태라서 새끼손톱만 한 칩들이 수백 개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오죽하면 IT의 I도 모르는 김정일의 눈에도 대단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겉모습만 봐도 화려한 물건이지만,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시각적 효과 그 이상으로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었다.

“최신 30나노미터 공정이 적용되었습니다.”

일단 제작 공정 자체가 경쟁사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안드로이드 진영의 라이벌은 애플이었다. 애플의 모바일 프로세서는 ARM사의 a시리즈였는데, 현재 시점 기준으로 그보다 3년은 앞서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업체들은 60나노미터, 혹은 45나노미터에 도전 중이지만, ID 일렉트로닉스는 벌써 30나노 공정 양산체제에 접어들었다.

그나마 애플사만이 겨우 따라가고는 있었는데, 이번 봄에 출시될 아이폰 5에 45나노미터 공정의 a5x칩을 탑재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시제품이 나온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여기에 안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10년부터는 한 자릿수 대의 나노 테크에 도전하고 2018년쯤에는 실리콘 기반 반도체에서 탈피해, 초전도 반도체에 도전하겠다는 것이 유재원의 원대한 마스터플랜이었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마스터플랜은 내려놓았지만, 테크놀로지에서만큼은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는 유재원이다.

하여튼, 공정 수준이 높아진 만큼 M7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의 숫자도 대폭 늘어났고, 작동 속도도 크게 증가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전작인 M6의 4배인 4억 개입니다. 빅리틀 쿼드코어에 최신 ATI사의 GPU가 결합되었고, 인공지능 가속 회로인 텐서코어의 숫자도 전작인 M6 대비 4배가 증가했습니다. 작동 속도는 AP 부분이 1.5GHz, GPU가 800MHz로 이제껏 나온 모바일 프로세서 중에 가장 강력합니다.”

리사 수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유재원은 안드로이드 S7에 탑재될 M7 프로세서에 대한 설명을 줄줄 읊었다.

이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웨이퍼를 보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고, 입은 저절로 움직여 버렸다.

그렇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불모지였다는 한국에서 이제는 세계 최고의 AP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했으니 말이다.

취재진도 앞다퉈 리사 수 박사가 들어 보인 웨이퍼를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과 짧은 설명을 곁들여 속보로 내보냈는데, 스마트폰 혹은 작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면서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보도였다.

기자들은 그저 평소 하는 작업이었지만, 그 모습을 본 유재원은 마음 한구석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회귀 전의 2007년을 생각하면, 지금 이 모습은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았고, 모바일 요금제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쌌다. 피처폰이라는 휴대폰에 달린 인터넷 전용 버튼을 잘못 누르면 순식간에 몇천 원이 빠져나갈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언론과 사회에서 열심히 문제 제기를 하니 인터넷 전용 요금제나 데이터 프리존 같은 게 나왔지만, 이때 박힌 비싸다는 인식 때문에 유선 인터넷망이 정교하게 발달한 한국에서 무선 인터넷 보급은 처참했다.

반면 지금은 스마트폰이 대량 보급되었고, 무선 인터넷 요금도 저렴했다.

단적으로 TG모바일의 3G 기본 요금 상품에는 데이터 1기가바이트가 기본 제공이었으니, 웬만한 사람들은 기본 요금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대량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요금제에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다.

티파니폰 시절부터 무선 인터넷을 펑펑 쓰던 것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커서도 데이터를 펑펑 사용했다.

간단히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화려한 그래픽으로 가득했고, 게시물마다 고화질의 짤방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모바일 게임도 크게 발달했다. 유명 온라인 게임들은 모두 모바일 버전을 출시했고, 최근에는 모바일 전용 게임도 늘어났다. 여기에 모바일은 부분 유료화에 특화가 되면서 적은 개발비로 큰돈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업계에 퍼져 너도나도 모바일 게임 제작에 돌입했다.

아직 보석이니 하트니 써가면서 카드를 뽑는 식의 게임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 기세로 보면 조만간 출시될 게 확실했다.

덕분에 이동통신사에게 남는 게 많은 대량 데이터 제공 요금제 혹은 무제한 요금제는 늘 가입자가 많았다.

물론 이러한 서비스들은 모두 스마트폰의 성능이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 선도하면서 품질의 상향 평준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회귀 전처럼 몇 년은 느리게 대중화되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디스플레이 공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김정일 위원장과 노 대통령은 반도체 생산이 실제 이뤄지는 클린 룸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한창 M7을 양산 중이었는데, 아무리 방진복을 잘 차려입고, 조심한다고 해도 새로운 인원이 대규모로 입장하면 수율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를 맡은 북한 실무팀도 생산 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건 결사반대였다. 반도체 생산에는 순도 99.999999%의 독한 화학 물질이 쓰이는데, 아무리 안전한 방호복을 입는다고는 해도 불안하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공장 견학은 짧게 끝났다.

대신 바로 근처에 있는 ID 디스플레이 공장으로 이동했다.

LCD 반도체도 일부 공정에서는 위험한 물질이 쓰이긴 하는데, 반도체 생산 라인보다는 훨씬 덜했다. 게다가 커다란 로봇들이 생산 라인에 다수 배치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도 있는 곳이었다.

반도체 생산 시설에서는 딱히 큰 반응이 없었던 김정일 위원장도 ID 디스플레이 공장에서는 의욕을 보였다.

북한에 이런 최신식 공장을 만들고 싶다는 게 딱 보였다.

“두만강, 압록강 유전 개발이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산업을 키울 만한 자본 자체가 없는 북한이었다.

그나마 있는 돈도 김정일 일가의 개인 재산으로 넘어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나마나 두만강 유전에서 나온 원유 판매 대금도 김정일 일가의 주머니 속으로 상당 부분 넘어갈 테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유재원의 말에 김정일 위원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검은 황금이 펑펑 쏟아지는 유전의 힘이란 막강했다. 그런 유전이 북한에 두 개나 생긴다고 하니 힘이 생겼다.

딱 하나 아쉬운 건 본인의 나이였다.

10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자원의 저주라고 유전이나 고부가 가치의 자원이 나오는 후진국이 어떤 식으로 망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제대로 기틀을 잡아줘야 하는데, 본인이 죽기 전에 유전 개발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었다.

김정일이 막 세습을 끝내고 정권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의 북한은 그야말로 다 쓰러져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다들 잊고 있지만, 김정일이 정권을 잡으면서 본인의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판문점에서 도끼 만행 사건을 일으켜 큰 위기가 다가오기도 했었다.

미군 장교가 사망해 버리면서 분노가 폭발한 미국이 항공 모함 전단인 미해군 7함대를 서해에 진입하도록 했고, 한국에 준전시 태세가 내려졌다. 심지어 중국에도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절대 북한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엄포까지 전해졌다.

이제 막 정권을 잡고서 권력에 흠뻑 취했던 김정일이 뒷일은 생각도 못 하고 벌인 일이었다. 결국 일을 수습한다고 뛰었던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김정일이다.

조만간 북미 수교도 이뤄지고, 평양과 워싱턴DC에 있던 연락사무소도 대사관으로 승격될 지금의 상황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날 오후.

ID 그룹의 최첨단 공장 견학을 마친 김정일 위원장과 수행원들은 복귀 준비를 시작했다. 복귀 경로는 도라산 남북 출입국 사무소를 통해 북한으로 올라가는 루트였다.

그 전에 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도라산역 앞에서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어제 김정일과 청와대에서의 정상 회담에서 합의한 사안들이 문서화되어서 두 정상의 서명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남북 협력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은 이산가족 상설 만남이었다.

남북이 힘을 합쳐서 금강산에 이산가족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거기에서 날짜와 관계없이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작년까지는 추석과 설날 이렇게 1년에 두 번, 300 가족 규모로 상봉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산가족 모두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는데, 상설 상봉이 추진되면 더는 추첨 때문에 가슴 졸일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번에 유재원과 셰브롱이 탐사해낸 유전 개발에 한국의 참여를 약속했고, 유전이 아닌 다른 지하자원의 개발도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에 지하자원이 많다는 건 늘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실제로 석탄과 철광석은 러시아를 낀 삼각무역을 통해 안정적으로 공급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직접 북한의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경제성이 있는 지역은 이미 중국이 개발했거나 침을 발라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중국에 비하면 많이 늦은 한국이지만, 유재원이 제시한 차원이 다른 자원 탐사 기법이라면 중국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김정일의 방한이었지만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큰 사고도 없이 완벽하게 끝났다.

다만 유재원의 경우엔 귀찮음이 조금 늘어났다.

친구 추가로 유재원의 ID톡에 등록된 김정남이 시시때때로 대화를 걸어왔던 탓이다. 한국에 있을 때만 그러면 좋았을 텐데, 북한에 돌아가고 나서도 연락이 왔다. 심지어 게임도 같이 하자는 초청이 올 정도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레이드는 아니고, 레전드 리그를 한두 게임 하는 것이었는데, 다이아몬드 리거인 유재원에게 업혀 가서 승리한 뒤로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북한에서도 스팀이 되고, 게임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였기에 유재원은 무작정 거절하진 않았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모든 스케줄을 마친 유재원은 ‘노무현 대통령 54%의 압도적 지지율로 재선 성공’이라는 소식을 마지막 보고 받고는 귀국길에 올랐다.

유재원의 전용기는 평소라면 샌프란시스코로 직행이었겠지만, 이번에는 LA였다. 프레더릭의 병세가 나아졌다는 말은 아직 없었고, 간병을 위해 티파니도 프레더릭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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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LA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도 유재원은 일이 이어졌다.

예전엔 시차에 적응하기 쉽게 미국에는 아침에 도착하도록 비행시간을 짜서, 비행기 안에서는 그냥 자 버리는 게 보통이었다.

이번에도 비행기 시간은 그렇게 맞췄지만, 잘 시간은 부족했다.

인터넷 때문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이제 고속 인터넷이 되면서 일거리가 유재원을 따라 비행기 안까지 들어왔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아이폰 중에 가장 획기적인 아이폰을 소개합니다. 아이폰5!

유재원의 i웍스 노트북 화면 가득히 띄워져 있는 화면은 애플의 신제품 컨퍼런스인 맥월드였다. 매년 4~5월에 치러지던 맥월드는 올해 1개월이 더 빠른 3월 말에 열렸다.

이유는 역시나 아이폰5였다.

-아이폰5의 두뇌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AP칩인 a5x칩으로 45나노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리사 수 박사가 예상했던 그대로 a5x는 45나노 공정이었다.

원래 회귀 전에 나왔던 a5x는 일성전자의 32나노 공정으로 양산되었다. 시점도 2007년이 아니라 2012년쯤에나 나올 물건이었다.

유재원의 기술 가속으로 반도체 생산 능력이 경쟁 업체는 6~7년,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는 10년 정도 앞섰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30나노는 오직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만의 기술이었고, 애플사의 AP를 열심히 만들어주던 일성전자도 이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애플은 a5x칩을 TSMC를 통해서 주문 제작하게 되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소개합니다. 아이폰5의 AP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바로 디스플레이이지요. 망막과 같은 수준의 놀라운 디스플레이를 보시면 아마 다들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애플이 칼을 갈았네.”

원래는 아이폰4에 탑재되어야 했을 레티나 디스플레이였다.

문제는 아이폰4가 완성될 때 세계 그 어디에서도 레티나 디스플레이라고 명명할 만큼 높은 DPI를 지닌 LCD 모듈을 만들 회사가 없었다.

애플은 직접 제품을 만들기도 하는 회사였다. 파워맥이라든가, 아이맥이라든가 하는 PC는 미국에서 만들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생산 공장 없이 설계만 하고, 실제 제품은 외주를 통해 만드는 방식이었다.

생산 수량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맥과 같은 건 연간 1~2백만 대 정도의 주문량이었다. 충분히 미국 내의 공장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요였다. 그런데 아이폰과 같은 경우에는 기본이 천만 단위였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진영에 밀려서 차선책으로 전락한 아이폰이지만, 일본과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점유율 1등을 자랑했다.

일본의 경우 그들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내 버린 유재원이 싫어서 아이폰을 선택했고, 중국의 경우에는 이미지 자체는 좋았다. 다만 ID 그룹이 직접 진출을 하지는 않았고, 대신 합작사인 텐센트를 통해 공급 중이었다. 더욱이 중국에 공급되는 물량 자체가 적었다.

이러한 사정들로 아시아에서 아이폰의 지분은 상당히 컸다. 매년 2, 3천만 대의 스마트폰을 팔아치웠다.

그 말은 최대 3천만 대를 양산하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애플은 폭스콘이라는 대만의 IT 제조 전문 아웃소싱 회사를 선택해 해결했다.

디스플레이 모듈 역시 아웃소싱이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 모듈은 한국의 금성 디스플레이에서 만들었다.

IMF 때, 일성그룹은 자동차와 중공업 그리고 통신을 주력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절대 자의는 아니었고 유재원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이뤄진 구조 조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일성전자는 21세기 성장 동력이라고 보았던 전자를 절대 내놓지 않았을 테니까.

전자를 강탈당한 일성그룹은 아쉬움을 통신 사업에 매달렸다. 덕분에 옴니아라는 안드로이드 계열 스마트폰도 직접 만들었고, 한국 내에서의 지분도 약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통신에서도 일성통신은 국내 2위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일성그룹의 성공적인 구조 조정에 금성그룹도 움직였다.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도 있었다. ID 일렉트로닉스였다.

금성전자는 가전과 반도체 중심으로, 디스플레이 사업은 분리해서 금성 디스플레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독립한 금성 디스플레이가 내놓은 회심의 역작이 바로 아이폰5에 탑재된 4.2인치 레티나 디스플레이 모듈이었다.

애플도 처음에는 ID 디스플레이에서 LCD 모듈을 공급받았는데, 최대 경쟁사에게 좋은 일 해 주긴 싫었던 모양인지, 빠르게 부품 공급선을 다각화했다. 4에서는 샤프사의 LCD 모듈을 썼는데 단가도 비싸고 불량도 좀 나왔다.

덕분에 금성 디스플레이가 치고 들어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스티브 씨가 아주 홀쭉해졌네.”

애플에 막 복귀했던 스티브는 덩치도 크고 통통한 체격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 나타나는 스티브는 당시와 비교하면 반쪽이 되었다.

차세대 아이폰을 개발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로 인했다고 보는 게 타당했지만, 회귀 전 스티브 잡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병이 이번에도 생겨난 것일 수도 있었다.

췌장암 말이다.

까다로운 암이지만, 뭐든 초기에 잡으면 완치율은 높아진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일찍 잡을 수 있었던 초기에 대안 치료라는 걸 하면서 시기를 놓쳤다.

“알려줘야겠지.”

스티브 잡스는 타도 안드로이드를 외치는 강력한 경쟁자였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스티브 잡스가 끝까지 관여하는 아이폰 시리즈가 궁금하기도 했다. 만에 하나 스마트폰에서 유재원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기능을 만들거나, 혁신을 이뤄낸다면 그것으로 세상에 좋은 일이었다.

솔직히 스티브 잡스의 작고 이후에 나온 아이폰 중에 유재원이 만족한 건 단 한 대도 없었다. 빌어먹을 노치 디스플레이나, 짜디짠 메인 메모리 용량이나, 스토리지 장사하는 옵션이나 다 불만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을 이겨내고 끝까지 함께한다면, 분명 애플은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줄 것이다.

“김 비서실장님.”

“예, 회장님!”

유재원이 혹시나 하고 김대석을 부르자 바로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전용기에서 김대석의 자리는 유재원 바로 뒤쪽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아주 작게 불렀는데도, 바로 대답했다.

“애플의 스티브 CEO에게 아이폰5에 대한 축전을 보내주세요. 그리고 미팅 약속도 잡아주시고요.”

“축전과 미팅 말씀이십니까?”

유재원 바로 옆으로 다가온 김대석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와 만나 보고 싶다는 유재원의 말은 완전히 의외였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쯤, 스티브 잡스와 미팅 약속을 잡았던 기억도 났다. 약속 날짜를 며칠 앞두고 스티브 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에, 지금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명분은 스마트폰 앱 관련 비즈니스로 하죠. 아이폰에 기본 제공되는 앱에 변화를 주고 싶거든요.”

유재원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었다.

애플의 아이폰에도 ID 그룹의 많은 프로그램들이 기본 설치된다. ID 오피스 모바일 버전과 웹브라우저, 동영상과 음원 코덱 등등. ID 오피스는 유료긴 한데,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었고, 나머지 프로그램들은 거의 무료였다.

유재원은 여기에 최근 인수한 유튜브를 포함시킬 작정이었다.

유튜브가 안드로이드와 아이폰에서 기본 탑재되는 동영상 사이트가 된다면, 회귀 전보다 훨씬 강력한 성장세가 폭발할 것이다.

“예, 잘 전달해서 미팅이 성사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유튜브 기본 탑재에 대해 얘기하면서 췌장암에 대해서도 경고를 해 주면 딱이었다.

“다음은…….”

김대석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고, 유재원은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대한민국 대선 보고서네.”

노 대통령의 재선 성공.

그것도 역대 최대 득표 차이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상 유재원이 대놓고 영향력을 끼친 선거판이었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대선 경선부터 당이 두 쪽이 날 만큼 격한 싸움을 붙였고, 박근혜 후보는 경선의 후유증을 그대로 안고 본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서 김정일의 방남이라는 초대형 이벤트를 터트렸다.

비록 기름은 북한 땅에서 나왔지만,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더욱이 북한 유전 개발에 한국의 참여를 기대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말에 국내 정유사들의 주가는 폭등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금성칼텍스의 주가는 1주당 200만 원을 호가할 만큼 자고 일어나면 상한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셰브롱이 북한에 제시한 사업계획서에는 두만강 유전 개발에 금성칼텍스의 인력과 기술을 동원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또한, 해상 플랫폼이 완성되면 채굴된 석유의 가공에 금성칼텍스의 시설을 쓰기로 했다. 시베리아 태평양 송유관 사업의 종점은 블라디보스토크였는데, 이를 북한 동해안를 거쳐 울산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확정 지었다.

울산의 정유시설로 원유를 보내서 정제하고, 돈 혹은 정제된 휘발유와 부산물을 받아 가는 것 중에 선택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정유시설까지도 북한 땅에 지어지길 원했지만, 북한이 워낙 낙후된 탓에 당장은 힘들었다.

남쪽에 세계적 규모의 정유 플랜트가 있으니, 송유관을 연결하는 게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사업과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는 더욱 폭발한다. 일본과 중국에 석유 완제품을 팔아치울 절호의 기회였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현직 프리미엄이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도 현역 국회의원이 재출마하게 되면 정치 신인과는 차원이 다른 인지도로 덕을 많이 본다.

대통령 재선 도전은 국회의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노 대통령이 싫어도 일단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번 대통령 선거는 노 대통령이 과반이 넘는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2011년까지는 큰불을 껐네.”

대신 2011년에 보수 진영에서 누가 대권에 도전하게 될지는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이명박 후보나 박근혜 후보나 이번 일로 완전히 나가리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유재원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정병우 의원이 이렇게나 선전할 줄이야.”

노 대통령의 압도적 지지율로 재선이라는 뉴스가 워낙 컸던 탓에 조금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만큼 대단한 뉴스는 또 있었다.

낙선자 중 1위, 전체 득표율 26%로 2위에 오른 사람이 통일국민당의 정병우였다.

대단한 선전이었다. 이번 대선에서 유재원은 통일국민당을 위해 뭐 하나 해 준 게 없었다. 남북통일이라는 당헌이 있는 통일국민당이지만, 김정일 방남에도 별다른 시너지 효과를 받지 못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카운터 파트너는 노 대통령이지, 일개 야당 대표가 만날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정병우의 대선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도 없었다는 게 포인트였다.

피파 회장으로 눈을 돌린 전재준은 이번 대선에서는 그저 지원만 했지, 본인이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이인제 의원처럼 트롤링에 특화된 인물도 일찌감치 당을 박차고 나가서 정병우는 마이너스 요소를 전혀 쌓지 않고 본인의 스타일대로 대선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쩌면 노 대통령보다 정병우에게 치명적인 요소는 박근혜 후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 세력이 정권 교체라는 원대한 꿈을 위해 원기옥을 모아 쏘아주려고 했던 사람이 박근혜 후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밥상을 걷어차면서 어부지리로 정병우에게로 보수의 지지가 몰려들었다.

노 대통령이 2011년까지 국정을 잘 운영하더라도, 그쯤 되면 국민들 사이로는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커 나갈 것이다.

정병우 의원이 2011년까지 본인의 존재감을 잘 유지한다면, 차기 대선에서 유력한 존재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정치적 성향으로 따진다면 진보와 보수 사이 중도층을 싹쓸이하는 것이다.

“대신 미국이 걱정이구만.”

미국 대선도 올해 11월에 있다.

대선 경선 레이스가 시작됐고, 민주당이나 공화당 모두 뜨거웠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경우 클린턴에 이어 앨 고어까지 2번 연속 민주당 정권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 8년, 앨 고어 8년, 총 16년이나 백악관의 주인이 민주당이었다.

앨 고어도 상당한 수완을 보였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특히 작년에 터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민주당에겐 너무나 큰 악재였다. 유재원의 개입으로 원래보다 훨씬 부작용이 적게 막아냈지만, 수백 개의 금융 기업들이 부도가 났고, 실업률은 폭증했다.

힐러리와 오바마가 맞붙었지만, 민주당 안에서만 뜨거웠지 그 열기가 대중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군소후보의 말도 큼지막하게 보도되는 등 상반된 반응이었다. 공화당에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연스럽게 공화당에 돈과 사람들이 몰리면서, 최근 공화당서 치러지는 경선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경선은 초반이었지만, 존재감이 부각되는 공화당 후보는 둘이나 있었다.

매케인 그리고 부시였다.

“부시라니. 사람이 그렇게 없나.”

보고서를 보던 유재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파일을 닫았다.

앨 고어에 밀려난 부시였는데, 또 부활했다. 기껏 살려놓은 미국 경제를 부시가 나타나 다 말아먹어 버릴지 걱정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공화당 경선의 선두는 매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 대선부터 미국의 대통령 경선까지 현안들을 살피다 보니,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흘렀고, 유재원을 태운 전용기는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오늘은 국회의원 선거일이네요!

건강 조심히 투표 잘 하시고, 휴일 잘 즐기시길~~!

저도 투표 잘 하고, 목요일 자정에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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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LA의 날씨는 참 좋았다.

한국의 봄 날씨처럼 활동하기 딱 좋은 20도 내외의 기온에 바람도 잔잔했다. 하늘마저 푸르러서 집돌이 성향의 유재원이라도 짧게 피크닉을 다녀오고 싶은 그런 날씨였다.

유재원을 태운 자동차 행렬은 LA 국제공항을 나와 프레더릭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프레더릭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마치 중세 영주의 성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가는 길부터가 잘 닦인 데다 주변 경관까지도 관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유지이니 출입 금지 팻말이나, 잘 찾아보면 보이는 CCTV는 조금 위압감을 줬다.

부드럽게 산길을 달려 저택의 거대한 철제 정문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보고 있던 모양인지, 선두에 서 있는 경호 차량에서 경호원이 내려 벨을 누를 필요도 없었다. 차량이 접근하자 셰브롱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철제 정문이 알아서 스르륵 열렸으니 말이다.

정문을 지나서도 5분 정도 차를 타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으리으리한 성과 같은 프레더릭의 저택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마스터와 티파니 아가씨가 유재원 님을 많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택의 문 앞에서는 오래도록 프레더릭을 모셔온 알프레드 집사님이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수 유재원이 앉은 쪽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유재원의 기억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알프레드 집사님의 최우선 순위는 프레더릭, 다음이 티파니였다. 오늘처럼 저택에 방문하면 티파니가 먼저였다. 유재원의 경우에는 본인이 알아서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통이었고, 아니면 유재원의 경호원이 움직였었다.

“안녕하세요, 알프레드 집사님. 프레더릭은 괜찮으신가요?”

유재원의 인사를 진중하게 받았던 알프레드 집사는 이어진 프레더릭에 대한 안부에 살짝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거실에 계시니 바로 확인해 보시지요.”

보아하니 괜찮은 모양이다. 하긴, 병원이 아니라 집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니라는 뜻일 테니 말이다.

알프레드 집사의 안내로 유재원은 바로 저택에 입장했다. 유재원의 경호팀에서는 팀장 그렉만 유재원을 따랐고, 나머지 경호 팀원들은 저택에 따로 마련된 수행원들을 위한 공간으로 가서 쉬도록 했다.

저택이 아니라 유럽의 성 규모였고,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맞춰졌기에 별의별 방이 다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집 안에서도 좀 걸어야 거실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거기에서 프레더릭과 티파니가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 왔느냐?”

프레더릭은 도착한 유재원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려했던 병색은 전혀 없었다.

“감기는 다 나으신 모양이네요?”

“감기?”

오히려 유재원의 안부에 알프레드와 마찬가지로 물음표가 떴다.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티파니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제가 재원이한테 한국에 못 가는 이유를 외할아버지가 감기에 걸렸다고 했거든요.”

티파니의 말에는 미안한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러면 애초에 프레더릭이 한국에 오지 못한 건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 왜 티파니가 그런 소리를 했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자기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

“응? 나를?”

유재원 본인이나 티파니의 생일은 지금으로부터 한참 멀었다. 가을에 다 몰려 있었으니 말이다. 티파니가 9월, 유재원 본인이 10월이었다.

“자기야 놀라지 마. 나 임신했어!”

이런저런 추리를 해 보려고 바쁘게 돌던 유재원의 머릿속이 티파니의 말에 하얗게 되었다.

“어? 어, 어!!”

바보처럼 짧은 물음만 연발하다가 깜짝 놀랐다.

일반인 평균치와는 차원이 다른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였지만,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그 잘난 머리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저 놀랐고, 뒤늦게 큰 기쁨이 따라왔다.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던 유재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티파니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조심하거라. 4주 차라 안정이 필요해.”

그런 유재원과 티파니를 보며 프레더릭이 급히 말렸다.

“임신 4주라니.”

그 말인즉, 유재원이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부터 신호는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초보 부부인 유재원이나 티파니나 그걸 바로 알아차리진 못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이야.”

그러다가 유재원이 먼저 한국에 들어갔던 날 프레더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꿈자리가 사나워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꿈자리요?”

“그래, 재앙급 운석이 지구로 끌려오더니 너희 집을 직격하는 거 아니냐.”

운석?

프레더릭의 운석이란 말에 유재원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태몽이라며 말하셨던 그 꿈도 별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프레더릭의 감은 티파니와 전화를 해 보다가 바로 임신에 대한 낌새를 읽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장모님과 함께 산부인과의 검진을 받았고, 임신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티파니의 임신을 확인한 프레더릭은 북한행을 취소하고 티파니를 돌보기로 했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정일을 만나 석유 비즈니스를 하는 것보다 티파니를 돌보는 게 우선이라니. 심지어 장인, 장모 모두 시간을 넉넉히 뺄 수 있는 분들이었는데, 프레더릭이 훨씬 극성이었다.

“미리 좀 알려주지.”

유재원도 살짝 아쉬워졌다.

프레더릭이 그랬던 것처럼 실시간으로 티파니의 임신 소식을 알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다.

“미안하군. 우리도 정신이 없었어.”

프레더릭의 말 그대로였다.

시간을 따지고 보면 겨우 이틀 정도의 차이였다.

사실 프레더릭도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보여준 반응이란 유재원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김정일과의 비즈니스 미팅도 취소했을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임신한 장본인인 티파니가 더 침착할 정도였다.

“아차! 우리 부모님께도 알려드려야지.”

“응! 어머니께도 조금 전에 연락 드렸어.”

섬세한 티파니는 유재원보다 한발 빨랐다.

티파니로부터 임신 소식을 전해 들은 유재원의 부모님 사이로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고, 곧이어 주변으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큰집을 비롯해 친인척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건 끝이었고, 일을 하며 인맥이 생긴 분들에게도 전화를 돌리는 것이었다. 유재원의 사업 성공 이후, 부모님의 활동 영역은 마당발 차원을 넘어섰다. 그만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분들도 많았다.

워낙 마당발이신 두 분은 지인들에게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실 것이다.

띵!

-회장님,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모든 언론사들이 사모님의 임신 소식에 대해 속보로 전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김대석 비서실장으로부터 다급한 메시지가 왔다. 첨부된 파일은 언론사 홈페이지 캡쳐였는데, 내용은 아무것도 없이 제목만으로 티파니의 임신을 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사방에 퍼트린 소식을 접한 언론에서 다급히 기사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골드, ‘저도 방금 알았습니다. 사실입니다.’라고 답신을 보내줘.”

-네, 발송했습니다.

유재원은 프레더릭과 티파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음성 인식을 통해 답신을 보냈다. 처음에는 직접 터치 키보드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지 자꾸 오타가 났다. 지금처럼 그냥 말로 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훨씬 빨랐다.

-앗! 사실이군요. 사모님의 임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러면 그룹 차원에서 보도 자료를 준비할까요?

이어진 김대석의 물음에 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싶었다. 회귀 전 한국의 재벌들이 본인들의 가정사를 시시콜콜하게 보도하는 걸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그런 한국의 고만고만한 재벌이 아니라, 세계적 규모인 ID 그룹의 수장이었고, 동시에 셀럽과도 같은 속성도 있었다.

단적으로 지진 예측에 대한 발표도 현재의 상식으로는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야 할 이야기였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도 뜨거운 이슈였다.

일본은 유재원에 대한 악감정도 있었고, 지진이 예측된 시기까지 여유가 많았기에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결론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1년 조금 남은 중국의 경우에는 무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유재원이란 이름 석 자에 담긴 무게감은 상당했고, 이제껏 예측한 모든 것들이 다 맞아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진 예측 결과지만, 적어도 뭔가 대책은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커져 가고 있었다.

“골드, ‘그러면 매스컴에서 문의가 들어오면 사실 관계만 확인해 주세요.’라고 보내줘.”

-네, 발송했습니다.

예전부터 유명세가 양날의 검이긴 해도, 잘 쓰면 좋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유재원이기에 비밀로 가져가진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대석과의 메시지는 짧게 끝났다.

다시금 티파니와의 대화로 복귀한 유재원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챙기지 못했던 관심을 다 쏟아냈다.

몇 시간 후.

“잠깐 이야기 좀 하지.”

티파니가 피곤하다며 방으로 올라갈 때. 유재원도 따라가려고 했다가 프레더릭의 제지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 남았다.

조금 전 티파니와 함께할 때만 해도 그야말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가득했던 프레더릭은, 그야말로 진중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에서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는 유재원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유재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했다. 프레더릭과 결산을 해야 할 게 많았으니 말이다.

“후후,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지.”

프레더릭도 편안하게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뇌리에 티파니가 유재원을 처음 소개시켜 줬던 때가 기억이 났다. 지금은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외손녀의 사위지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떤 망할 놈팽이 녀석이 순진한 티파니를 꼬셨나 싶었다.

샷건이라도 찾아 놓을까 싶었는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진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ID 테크놀로지는 실리콘 밸리의 조그만 기업이었는데, 공룡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소송에서 승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수까지 해 버렸으니 말이다.

이후의 행보도 놀라웠다.

특히 유전 탐사를 짧은 시간 안에 연달아 성공하는 건 그야말로 프레더릭도 해낼 수 없었던 성과였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북한에서 유전이 나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프레더릭은 속마음을 꺼냈다.

유재원이라면 하는 기대감은 있었지만, 만약 실패했더라도 이제까지 쌓아 올린 성과가 무용지물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미 유재원에 대한 시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을 만큼, 프레더릭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았다.

대신 프레더릭이 지켜보고 있던 것은 유재원과 티파니 사이에서 언제쯤 아이가 태어날까였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둘 사이의 아이가 생겨나면 본인이 가진 유산들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이가 생겨나면 ID 그룹과 셰브롱의 결속이 법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한 차원 더 높아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도무지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직접 와서 넌지시 언급했을 만큼 프레더릭은 속이 탔을 정도다. 그런데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해질 만큼, 빠르게 임신 소식이 되돌아왔다.

“그렇다는 말씀은?”

“그래. 티파니가 셰브롱의 3대 오너다.”

프레더릭의 선언이다.

티파니와 결혼을 할 때 어쩌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했던, 그 일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유재원은 덤덤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티파니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유재원 인생 역사상 이보다 짜릿한 순간은 없었다. 회귀를 하고서 고향집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티파니의 셰브롱 승계 선언은 조만간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훗, 당연하단 표정이군. 그래 그게 자네다운 모습이지. 우리 티파니와 셰브롱을 잘 부탁하네.”

“네!”

어떠한 수식어도 없는 짧고 간결한 유재원의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든든하게 가슴속에 들어오는 프레더릭이었다.

그날 저녁.

티파니의 임신 소식을 ID 그룹과 셰브롱에서 공식 확인을 해주기 시작하자 한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모든 언론들이 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할리우드 최고 셀럽 부부의 임신이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만큼 압도적인 보도량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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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위원장 동지께서,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함께 ID 그룹 유재원 회장 동지의 안내로 라이트닝 볼트사의 군산 공장을 방문하시었습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최신 2007년형 보르도 TV 중에서도 55인치의 광대한 화면 크기를 자랑하는 최상급 모델 화면 속에 김정일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김정일이 가운데 서고, 왼편에는 유재원이, 오른쪽에는 노 대통령이 있어서 두 사람이 마치 김정일 위원장을 보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잔뜩 상기된 김정남도 있었다.

실시간 화면은 아니었다.

북한의 사정이 회귀 전보다 훨씬 낫긴 했지만, 먼 거리에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건 아직 어려운 일이었다. 독자적인 통신 위성이 있다거나, 외국의 통신 위성을 빌려 써야 했는데, 북한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조선중앙TV를 통해 보도되는 영상물은 모두 강력한 후편집이 가해져야 했기에,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저저, 저 못난 인간은 낄 자리도 모르고 어딜 기웃거리는 거야?”

그렇기에 텔레비전을 보던 이는 김정남의 모습에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놀라울 모습이었을 것이다. 감히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을 비난해?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북한의 평범한 사람이 그랬다면 바로 사상 검증에 들어갈 만큼 큰일이었다.

김정남의 존재감이 미미하다고는 해도 김정일의 장남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한 집안이 풍비박산 날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는 있듯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말해도 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텔레비전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존재는 바로 김정일의 차남인 김정은이었기 때문이다. 출생의 문제로 밖에서 자라난 김정남과 달리 정통성이 넘치는 김정은은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덕분에 일찌감치 김정은을 따르는 세력이 생겨났을 정도로 기반이 탄탄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겨우 평양에 귀환할 수 있었던 김정남과는 차원이 달랐다.

덕분에 김정은은 김정일 앞에서는 김정남에게 형님이라고 꼬박꼬박 칭해줬지만, 그 자리만 아니면 멋대로 불렀다. 기분이 좋으면 형님이고, 아니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지금 못난 이라고 칭하는 건 아주 짜증이 폭발하는 중이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정남의 방남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내려가는 김정일을 대신해서 평양에 남겨진 김정은이다.

김정은이나 그의 세력들은 남겨진 게 아니라 평양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평양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이 든든히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사실 외국으로 눈을 돌려도 현재의 권력과 권력 승계 1순위가 함께 비행기를 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만약 비행기 사고 등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권력 공백이 생겨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평양을 지키게 된 김정은이 차기 후계자라는 확실한 신호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김정은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 장남 김정남 씨와 동행 중!

-3대 세습, 김정남 유력?

-김정남, 4개 국어 능통에 컴퓨터도 전문가 수준.

-유재원 회장과 IT 분야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할 정도로 놀라운 식견 발휘.

변수는 한국의 언론들이었다.

김정남은 처음엔 김정일 위원장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수행원인 것처럼 행동했기에,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유재원과 리사 배리 셰브롱 CEO의 북한 지하자원 탐사에 대한 종합 발표 후에 확 달라졌다.

압록강 유전, 두만강 유전이 제일 큰 특종이었고, 다음이 쓰촨성 대지진 예측이다. 그리고 제3 순위가 김정남이었다.

원투 펀치로 다룰 이슈가 워낙 대단했기에, 처음에는 김정남에 관해 쓰는 기사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베일에 가려졌던 유력한 후계자라는 말이 뜨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며칠이 지난 지금 결산을 해 보면 쓰촨성 대지진 관련 기사들과 비슷한 보도량이었다. 이는 외신들의 받아쓰기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보도된 김정남 관련 뉴스는 해외에서도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외신들은 일찌감치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매우 나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만간 3대 세습이 시도될 것 같은데, 그동안은 누가 될지 베일에 가려졌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장남인 김정남이 공개되니 곧바로 전 세계의 관심이 몰려들었다.

북한은 과거 악의 축으로 규정되고, 불량 국가로 낙인 찍힌 상태에서도 존재감이 상당했다. 조그만 나라가 어그로를 끄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이다. 지금은 핵개발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많이 약해졌지만, 유전이 2개나 터지면서 전성기 시절에 비견될 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김정남이 집중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김정은의 뇌리에 경고등이 뜨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제껏 북한 수뇌부 내에서 닦아 놓은 기반이 있으니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방송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기록물 뉴스에 김정남이 등장하면서 경고등의 색깔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한국 사람들은 조선중앙TV의 기록물 영상을 보고는 너무도 시대와 동떨어진 모습에 웃기 바빴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기록물 영상이 갖는 상징성은 강력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거리가 곧 권력의 크기였다.

가까울수록 측근이라는 말이었고, 이는 곧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력이었다. 그렇기에 김정일과 같은 화면에 김정남이 나온다는 건 김정은에게 있어 3대 세습으로 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암초가 튀어나온 것과 같았다.

“이거 안 되겠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 속에 등장한 라이트닝 볼트사의 군산 공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산업용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이 사람들을 보조하면서 최첨단 전기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블록버스터급 시각적 충격이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카트 로봇부터 차체 프레임을 들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주는 대형 로봇과, 사람과 한 몸이 된 것처럼 보조하는 로봇팔은 상상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뒤이어 라이트닝 볼트 군산 공장 옆에 마련된 자율주행 테스트 트랙에서 운전자도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확실히 각인될 결정적 장면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김정남의 모습은 빠지지 않았다.

김정은의 위기감은 최대였고, 반전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뒤를 따랐다.

공화국 하늘에 빛나는 태양은 오직 하나였고, 그 빛을 받아 빛날 수 있는 별도 오로지 자신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멋모르고 김정남을 띄우는 한국의 언론들 그리고 유재원에 대한 앙심도 깊어졌다.

다음 날.

-임신 축하해. 순산을 위해 지금부터 기도할게.

“고마워요. 별똥이 첫 생일 때 꼭 부를게요.”

-별똥이(starboy)? 이름이야? 이야, 특이한데?

“태명이에요. 임신이 확인되었을 때부터 태어날 때까지만 부르는 한국식 애칭이죠.”

-음! 그렇구나. 그러면 첫 생일에도 보통 생일 파티가 아니라 돌잔치라는 걸 하나?

“오! 어떻게 알았어요?”

-친구네 문화인데, 당연히 고유의 문화도 알아봤지. 태명은 몰랐지만. 아무튼 선물 기대해.

“이야, MJ가 그렇게 말하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후후, 티파니에게도 축하한다고 꼭 전해주고.

“물론이죠. 아주 고마워할 거예요.”

기대라는 단어는 유재원에게 의미가 크게 달라진 단어였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기대감도 생기는 법인데, 유재원은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미미해졌던 기대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MJ가 하는 말이었으니까.

유재원 부부의 임신 소식에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정치인부터 연예인들까지. 유재원과 티파니가 그간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축하를 해 주는 이들은 숫자부터 규모가 달랐다.

방법도 다양했다.

톡톡을 통한 SNS부터, 축전이라는 간단한 편지, 대중적인 ID톡도 있었다. 재미있는 건 친분의 깊이에 따라 점점 전통의 방식이 된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가까운 이들은 직접 찾아와 축하의 말을 전했고, 다음은 전화 통화였다. ID톡이 그다음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는 거의 익명 수준이었다.

MJ는 당연하게도 직접 전화를 걸어줬다.

그러면서 기대하라고 하니, 기대감이라는 감각이 평균 이하인 유재원이라도 절로 마음이 동할 정도였다.

그렇게 MJ와 통화를 마친 유재원은 바로 다음 전화로 이어 갔다. 이번에는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클린턴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재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심지어 미국 공화당의 부시도 그 리스트에 있을 정도였다.

이쯤이 되면 별똥이가 잉태된 것에 대한 순수한 축하보다는, 티파니의 임신을 이유로 유재원과 통화를 하면서 친분을 쌓으려는 속셈이 더 커 보일 정도였다.

그런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은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다.

“그래도 축하해 주겠다는데, 받아야지.”

하지만 티파니의 생각은 달랐다.

이유야 어떻든 축하는 받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미신 같은 걸 따르지 않는 티파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모양이다. 형식적이라도 별똥이에게 축하를 해 주는 것이라면 좋은 기운이 몰릴 거라는 식이다.

유재원 역시 사소한 미신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신이 존재한다는 건 직접 체감한 바였다.

의도가 보이는 축하라도 받아두면 좋을 거라는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결국, 유재원은 별똥이에 대한 언론 보도가 시작되고 나서 3일 동안은 전화기만 붙잡고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3일 후에도 유재원 부부에게 쏠리는 관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셰브롱 이사회 의장 프레더릭 테일러 2세, 은퇴선언.

-프레더릭, 후임 이사회 의장으로 ‘티파니 유’ 지목.

-지분 상속 절차도 바로 시작할 것.

티파니에겐 한참 전에, 유재원에겐 3일 전쯤 본인의 결심을 알렸던 프레더릭은 세상이 좀 잠잠해질 때, 일을 시작했다.

한다면 하는 프레더릭이었다.

셰브롱의 이사회에서 더는 여한이 없다는 표정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후임 의장으로 티파니를 지목했다.

이미 이사회에서는 모든 준비 작업이 끝났던 상태였는지, 이사회에서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제는 지분 상속이었다.

프레더릭이 가진 셰브롱의 지분은 무려 31%.

본인 혼자서 셰브롱의 최대 지분을 자랑하고 계셨다. 물론 회사의 경영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는 50% 이상의 지분이 필요했다. 나머지 지분은 셰브롱의 자회사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 재벌들의 순환 출자 구조처럼 복잡한 것은 아니었고, 셰브롱 이사회 의장이 되면 바로 해당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31%의 지분을 온전히 상속받는 건 상당히 큰일이었다.

말 많은 한국의 상속세 최대 세율은 50%였지만, 미국도 38%로 만만찮은 수치를 자랑했다. 현재 셰브롱의 주가는 5천억 달러에 이르렀으니, 프레더릭의 지분은 대략 1,500억 달러로 평가된다.

거기에 38%의 세율이 붙으면 570억 달러라는 막대한 상속세가 부여된다. 물론 미국도 상속세를 나눠 낼 수 있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속세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도 많았다. 하지만 유재원이나 티파니는 그렇게 좀스럽게 행동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프레더릭이 결심하자 티파니는 단순 명쾌한 방식으로 돈을 만들어냈다.

상속받을 지분을 담보로 57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빌리기로 했다. 누구에게? 유재원에게서 말이다.

다만 유재원이라도 그만한 큰돈이 현금으로 존재하진 않았다. ID 그룹이 매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고 거기서 상당한 비율을 순수익으로 남기지만, 현금으로 단순 보유하는 경우는 없었다.

ID 그룹만큼 이익 잉여금 재투자를 열심히 하는 기업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유재원은 570억 달러의 현금을 따로 만들어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선택한 방식은 바로 ID 그룹의 대표적 비상장 계열사였던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이었다.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 60%!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점유율 70%!

마지막으로 백색 가전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이 ID 일렉트로닉스였다. 유재원은 그런 ID 일렉트로닉스를 상장시켜 현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월 스트리트에서 책정한 ID 일렉트로닉스의 기업 가치는 최소 3천억 달러 이상이었기에, 570억 달러 정도를 조달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ID 일렉트로닉스 상장에는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바로 국가였다.

이제까지 ID 그룹의 자회사들은 모두 미국 증권 시장에 상장되었다. 이번엔 다르다. ID 일렉트로닉스는 처음부터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한국 증권 거래소를 선택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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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네요.

건강 유의하면서 재미있게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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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유재원의 자금 조달 계획이 알려지자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다.

-자금 조성은 한국에서? 570억 달러 세금 납부는 미국에?

-천문학적 국부 유출, 막아야 한다.

하나는 한국에서 외화를 유출해 미국에 퍼준다고 난리가 난 이들이었다. 대한일보가 파산하면서 공백이 된 보수 정론지의 자리를 두고 동아신문과 중앙신문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지도 10년이 넘었다.

두 회사는 서로 보수 정론지라면서 경쟁하는데, 해가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이대로라면 정통 보수 세력의 재집권은 물 건너 갔다고 보았던 모양인지, 서로 자극적인 기사를 써내면서 경쟁했다.

유재원이 보기에는 누가 더 바보인가를 겨루는 것 같았다.

-ID 일렉트로닉스 상장이 왜 국부 유출?

-최소 1천억 달러 이상의 천문학적 해외 자금, 한국으로 쏟아 들어온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시장 가치는 기업 공개를 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300조 원 이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PER을 통한 주가 총액을 따지면 더욱 쉽게 계산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의 평균 PER은 대략 8~12 수준이다.

미국과 같이 증시가 활황인 곳에서의 IT 분야 PER은 20을 쉽게 넘기지만, 한국에는 아직 IMF의 후유증이 있는 모양인지, PER 지수가 상당히 낮았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연간 순이익 규모는 대략 30~50조 원으로 업계 최고였다.

반도체와 AP가 주력이고, 백색가전의 순이익 수준이 반도체 사업부엔 미치지 못하지만 매출액 규모는 상당했고 순이익도 나오는 중이었다.

최소 30조 원 순이익이니 PER 12를 대입한다면 360조 원짜리 기업이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주식 시장에서는 현재보다 미래를 훨씬 중요하게 보는데, ID 일렉트로닉스의 성장세는 아직 정점에 이르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미국에 상장한다면 한국보다 훨씬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패널티가 있음에도 유재원이 ID 일렉트로닉스를 한국에 상장하고자 하는 건, ID 일렉트로닉스의 기반인 반도체 생산 공장이 모두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성전자가 ID 일렉트로닉스에 흡수되면서, 비상장 상태로 전환되자 한국의 증권 시장 규모가 확 줄어 버렸다.

2007년이라면 적어도 코스피 상장사 전체의 시가 총액 합은 250조 원 이상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일성전자가 빠지자 100조 원 후반대에 불과했다. 일성전자 하나가 100조 원이 넘는 엄청난 덩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식 시장 규모가 축소되면서, 주식 시장의 변동성은 이전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IMF의 후유증을 축소해냈다고는 해도, 자본시장 개방은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이뤄져서 외국 투자회사들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규모는 작은데, 외국 투자회사들의 입김이 세졌다?

외국 투자회사들이 개미들 돈 털어가기가 쉬워졌다는 의미와 같았다. 게다가 주식 시장이 빨아들여야 했을 시장의 잉여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몰리면서 서울 집값은 원래의 흐름보다 빨리 들썩이기 시작했다.

ID 일렉트로닉스 상장은 한국 경제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한 방에 처리할 치트키였다.

부동산으로 쏠리는 자금을 단번에 주식 시장으로 가져와서 주택 가격 안정화는 물론이고, 주식 시장의 양적인 성장을 노릴 수 있다. 게다가 미국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저평가된 기업이니 주식 가격의 상승은 불 보듯 뻔했다.

단기간 2배 상승을 해도 절대 거품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성장 잠재력은 차고 넘치도록 남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모바일 시장은 이제 겨우 커 나가는 단계였다.

2010년대 후반만 되어도 모바일 시장의 규모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성장할 것이다. 그러한 성장에 ID 일렉트로닉스가 지대한 지분을 차지할 테고, 그 지분만큼이나 회사의 규모도 커지게 된다.

부동산 대신 주식에 투자한 이들은 확실한 성공의 맛을 볼 테고, 이러한 경험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확산될 것이다. 마치 ID 인베스트먼트의 펀드 상품처럼 말이다. 그러면 주식 시장에 몰리는 돈의 규모도 훨씬 커질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사기 치는 놈들도 많겠지만.”

쓰레기 같은 기업들의 주식을 포장해서 비싸게 팔아 치우는 놈들이 많아질 것도 자명했다. ID 인베스트먼트의 대박으로 한국에 투자회사들이 확 늘어났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실력을 갖춘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의 차이가 확 벌어졌다.

ID 인베스트먼트에서 입금과 출금이 자유로운 기본 펀드의 수익률은 지금도 연 20%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투자회사들은 원금 손실이 나기도 했고, 아예 파산이 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상장된 기업의 실적은 공시 시스템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공개되는 만큼, 우열은 쉽게 가려지니 말이다.

거기에 배당금도 빼놓을 수 없다.

ID 그룹은 미국에서도 배당금을 잘 주기로 소문이 났다. 1970~1980년 전성기를 자랑했던 IBM은 배당 한 푼 없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그런 IBM도 이제는 ID 그룹을 따라 배당을 하기 시작했을 만큼, ID 그룹은 연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배당했다.

배당금 수익이 이자 수익보다 훨씬 높게 유지되고 있었기에, ID 그룹의 주식들을 매수 후에 장기 보유하는 부류도 상당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한국 증권 거래소 상장의 단점은 딱 하나.

너무 덩치가 크다는 것이었다. 한국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기업들을 다 합쳐도 ID 일렉트로닉스의 주가 총액만도 못한 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연못에 고래가 들어온다는 게 결코 수식어 따위가 아닌 상황이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한국 증권 거래소는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을 열렬히 반겼다.

한국 증권 거래소의 질적, 양적 팽창을 위한 이벤트로는 그야말로 적격이었으니 말이다. 개미들 역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코스닥에서 바이오 테마주에 탔다가 쫄딱 망해 봤던 경험은 다들 가지고 있는 한국의 개미투자자들이었다. 그런 개미투자자들에게 그동안 ID 그룹 주식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아직 개미투자자들이 해외 주식을 매매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던 탓이다.

HTS나 MTS에서는 불가능했고, 증권사에 가서 직접 해외 주식 주문을 해야 했는데, 계좌 개설부터 환전과 송금까지 본인이 일일이 해야 했다.

그런 개미투자자들이 드디어 ID 그룹 계열사 주식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덕분에 보수 언론들의 부정적인 뉴스 보도는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국부 유출이니, 외화 유출 따위의 말은 매스컴에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대신 ID 일렉트로닉스의 한국 증권 거래소 상장 이후 일어날 장밋빛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인터넷에서는 일명 별똥이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었다.

유재원과 티파니의 아이라니.

오른손엔 인터넷 제국을, 왼손에는 검은 황금을 잡고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다들 축하해 주면서도 부러움을 참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잘 부탁합니다.”

-예, 회장님,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유재원의 당부에 당차게 대답하는 이는 ID 테크놀로지의 앨런 사장이었다.

앨런 사장에게 유재원은 양해를 구했다. 바로 본인의 출근에 대한 양해였다. 티파니는 본인의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셰브롱에 출산 휴가를 냈다.

티파니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출산 휴가 정책이 잘 마련된 미국에서는 보통의 직원들도 얼마든지 출산 휴가를 낼 수 있다. 다만 유급 휴가 기간은 6주였고, 추가로 6주를 휴가로 더 낼 수 있는 방식이다. 다만 나머지 6주는 무급 휴가였다.

그렇기에 보통은 배가 크게 불러와서 출산 예정일이 가까이 오면 출산 휴가를 내고, 몸을 추스른 후에 복귀했다.

셰브롱의 경우에는 미국 정부 정책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출산 정책을 시행 중이었다. 유급 휴가의 기간도 12주였고, 출산 후에도 바로 복귀하지 않고 10주 정도의 휴가를 더 쓰거나,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티파니도 셰브롱의 출산 정책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프레더릭은 물론 장인, 장모님과 유재원 쪽 시부모님이 몸조심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었기에 임신 초기부터 휴가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신 출산 후 회사로의 복귀에 대한 의욕은 컸다.

티파니는 단순히 셰브롱의 오너 지분만 상속받는 게 아니라 프레더릭에게 셰브롱의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지명을 받았다. 경영권까지도 확실히 행사할 수 있게 되었기에, 현장으로의 복귀 의사가 확고했다.

유재원은 티파니가 무슨 선택을 하든 밀어준다는 생각이었다.

대신 티파니가 일찍 출산 휴가에 들어간 만큼, 유재원도 티파니와 함께 곁에서 출산과 육아를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회귀 전 너무도 쓸쓸하게 눈을 감았던 것은 지금도 깊은 한으로 남아 있었다. 이른바 영혼에 새겨진 한이었다.

그런 건 앞으로는 절대 사양이었다.

그러니 가족과 유대감을 쌓는 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티파니가 회사에 다닐 때라면, 유재원도 회사 일에 집중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출산과 육아에 집중한다면 동참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렇기에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물론, 다른 도시나 해외에 출장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완전히 중단하기로 했다. 다만 회사 일에서 손을 뗀다는 건 아니었고, 지금처럼 서재에서 화상 통신과 온라인 근무를 통해 일을 보는 건 그대로 할 생각이다.

대신 근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티파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겠다는 게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엇! 그러면 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러면 IDDC 2007도 제가 진행해야 합니까?

“그래야겠죠.”

앨런 사장은 유재원의 갑작스러운 장기 출산 휴가에 당황했지만, 다부진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모습은 유재원에게도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IDDC 대목에 와서는 그 다부진 모습에 살짝 틈이 생겼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ID 그룹은 유재원이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했다. 그룹의 모든 신제품 개발에는 유재원이 참여했고, 핵심 개발자로서의 역량도 유감없이 뿜어주었으니 말이다.

현재에 와서는 안드로이드사부터 타임워너 넥스트컴까지 대부분 계열사는 모두가 유재원이 없더라도 잘 돌아갔다.

사장단을 통한 경영 원칙과 신제품 개발 역량이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였다. 게다가 인공지능 골드를 통해 그룹 전산망 전체가 모니터링되고, 때로는 업무 처리에 큰 도움도 주고 있는 상태였다.

유재원이 경영을 잠깐 내려놓는다고 해서 ID 그룹의 역량이 무너질 일은 없다.

그렇지만 앨런 사장에겐 IDDC의 진행은 상당한 일이었다. 변호사 출신의 앨런 사장은 법률 분야에 대한 전문가였지, 기술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조연설만 좀 하시고, 신제품 소개는 개발 팀장에게 맡기세요. 그리고 정 안되면 저도 있으니까요. 저나 티파니가 태평양 작은 섬나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예, 잘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그나마 얼굴이 풀리는 앨런 사장이었다. 절대 유재원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렇다고 IDDC라는 커다란 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룹 사장단들과의 통화는 앨런 사장을 마지막으로 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재원이 서재를 벗어난 건 아니었다.

“다음은…….”

유재원은 ID톡을 종료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띄웠다.

PC용 안드로이드 프로그래밍 도구인 DEV 스튜디오였다. 안드로이드사에서 제일 잘 팔리는 건 PC와 모바일용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였다. 그런데 안드로이드사가 만드는 프로그램은 운영체제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개발자 도구들이 있었다.

그래픽 편집툴부터 PC용 음악 작업 프로그램, 모바일과 PC를 위한 개발자 도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DEV 스튜디오는 PC용 툴인데, C와 C++, 안드로이드용 베이직 등등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하는 툴이었다.

티파니의 임신에 맞춰 본인도 출산 휴가를 낸 유재원이지만, 완전히 일감을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집 안에서 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작업을 떠올려 보니 프로그래밍이 본인에겐 딱이었다. 더욱이 별똥이가 세상에 나오길 준비하는 동안, 유재원도 그 시간에 프로그래밍을 한다면 그 자체로도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프로그래밍에 있어 역대급 천재인 유재원이 거의 1년을 투자해야 완성되는 프로그램이란 당연히 보통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래밍 언어!

그것이 이번 프로그래밍의 목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PC용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의 표준은 C와 C++였다.

데니스 리치라는 세기의 컴퓨터 공학자께서 만든 언어였다. 그는 C뿐만이 아니라 유닉스라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모태가 되는 운영체제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했다.

데니스 리치가 C를 발표한 게 1972년이었으니 가히 조상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2007년이었다. 그 긴 시간만큼 컴퓨터 분야에서는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물론 C언어 역시나 대형 업데이트가 꾸준히 되면서 발전했다. 현재 최신 버전은 C10으로 DEV 스튜디오에도 탑재되어 있다.

컴퓨터 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준 C언어였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데엔 부족했다. 로우레벨 프로그래밍 언어 답게 성능은 최상급이지만, 그만큼 프로그래밍 난이도가 높았다. 대다수 개발자에게는 안드로이드 사가 제공하는 라이브러리가 없으면 개발 작업을 원만히 끝마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공지능 개발이나 활용에 있어서 C언어는 효율이 너무나 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회귀 전에도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할 프로그래밍 언어들이 탄생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혼란까지 가중시켰다. 나중에 가서야 파이썬이란 언어가 패권을 잡았다.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라 익히기 쉽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자연스럽게 점유율이 높아진 것이다.

유재원은 티파니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할 차세대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 작정이었다. 누구나 배우기 쉽고, C보다 더 강력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언어를 완성하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큰 프로젝트라면 성공 가능성부터가 의문이었을 테지만, 유재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무리 프로젝트 경험이 넘쳐나는 엘리트 프로그래머라도, 프로젝트 시작 시 마주하게 되는 텅 빈 백색 화면의 압박감에 타이핑이 망설여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유재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프로그래밍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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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며칠 후.

유재원 부부가 장기로 휴가를 냈다는 소식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부러움과 함께 논란도 일어났다. 보통은 만삭이 되면 출산 휴가를 내는데, 티파니는 만삭까지도 한참 남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논란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유재원이나 티파니나 엄청난 특혜를 받아서 초장기 유급 휴가를 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둘이서 보유한 주식과 재산 때문에, 출근을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수입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에 놀라워할 뿐이다.

유재원 같은 경우는 새로운 이슈로 파생된 게 있으니, 길에 떨어진 100달러를 줍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일어났다.

ID 그룹 전체 지분의 가치, 그리고 배당금과 이자 수익 등으로 유재원의 재산은 매일매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시간 많은 누군가가 이를 계산해 보았는데, 1초에 100만 원 이상이었다. 그러니 미국 돈 100달러를 줍는 시간도 아까울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심지어 티파니에게까지도 그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을 정도다.

“자기는 어떻게 할 거야?”

“주워야지.”

유재원은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듯 말했다.

열심히 계산한 네티즌 누군가가 간과한 게 있으니, 유재원이 이룩한 재산은 유재원이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증식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돈을 주우면 100달러가 더 추가되는 것이지, 재산 증식이 멈추는 건 아니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유재원의 재산이 다시 한 번 큰 도약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 때문이었다.

“상장 주관사는 선정했어?”

“응! 이번엔 미래 에셋 증권에 맡기려고.”

미래 증권이라는 소리에 유재원에게 기대고 있던 티파니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티파니에겐 약간은 생소한 회사였던 탓이다.

그간 ID 그룹의 상장에는 골드만삭스, JP모건 등등이 달라붙어 경쟁했다. 세계구급 투자회사들이 욕심을 내어 서로 나은 조건을 제시할 만큼, ID 그룹 상장은 엄청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ID 일렉트로닉스 역시 그간 상장된 계열사들과 비견될 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는 회사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골드만삭스를 필두로 여러 투자회사들이 달라붙어 상장 주관사가 되려고 했다.

유재원의 선택은 미래 에셋 증권이었다.

미래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미래 그룹 쪽에 속한 회사였다. 그렇다고 미래 그룹 계열사는 아니다.

미래 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미래 자동차 그룹과 미래 중공업 그룹으로 분리되었을 때, 미래 투자 증권의 박연주 사장이 독립해서 세운 금융기업이 미래 에셋 증권이다.

미래 투자 증권의 박연주 사장은 전명헌 할아버지의 최측근이었다. 그렇기에 전재구와 전재근이 열심히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누구 하나 손을 들어줄 상황이 아니었기에 독립을 한 것이었다. 본인의 능력도 상당해서 미래 에셋 증권은 한국의 투자회사들 중에 ID 인베스트먼트와 경쟁이 가능했다.

차이나 디스커버리 펀드라는 펀드를 만들었는데, 그 수익률이 ID 인베스트먼트의 기본형 뮤추얼 펀드를 10% 이상 뛰어넘었다.

중국의 경제가 바닥을 치던 때에 펀드가 조성되어서 투자되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2008 올림픽 부흥을 목표로 경제 부양을 크게 일으키니, 수익률이 크게 폭증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신흥 경제 성장국들을 대상으로 하는 펀드였는데,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묶어서 이르는 말이었다.

매년 5% 이상의 고성장을 이루는 나라들이었기에 펀드의 수익률도 무척이나 높았다.

“수수료 조건도 미래 에셋이 제일 좋았거든. 게다가 한국에 상장하는 건데, 굳이 큰 회사들 좋은 일 해 줄 필요는 없잖아.”

기왕이면 유재원은 ID 일렉트로닉스가 국민 주식이 되었으면 했다.

국민 주식이라고 해서 뭐, 거창한 건 아니고 주식 하는 개미들 모두가 최소 몇백만 원어치라도 보유하고 있는 회사가 국민 주식이라는 게 유재원의 생각이다.

유재원의 로드맵상 계획들이 실행되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기업이 ID 일렉트로닉스였다. 인공지능 골드의 파워업을 시작으로 전 세계 컴퓨터 시스템의 대대적인 업그레이드가 이뤄지는데, 거기에 필요한 반도체가 ID 일렉트로닉스에서 생산되는 물량이었으니까.

상장 후, 몇 년 내에 최소 2배로 뛸 것이고, 적어도 10년 내에는 한국 증권 역사상 최초로 1천조짜리 기업이 될 회사가 ID 일렉트로닉스였다.

3대를 대물림해도 절대 손해가 아닌 회사라고 자신하는 유재원은, 최대한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았으면 했다.

“아깝지 않아?”

티파니가 슬쩍 물었다.

약간 미안한 감도 있었다. 유재원의 말대로라면 근 미래에 1천조 원이나 나갈 기업을 300조 원에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기업의 지분 100%를 내놓는 게 아니라, 다른 ID 그룹의 상장처럼 49%만 내놓는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상당한 손해였다.

“전혀.”

반면 유재원은 딱히 손해를 본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셰브롱의 상속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에 직접적인 우군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미국 내에 ID 그룹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은 건, ID 그룹의 이익이 곧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주식을 조금 보유했다고 그 기업에 충성심이 즉각적으로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데 주가 폭등으로 주식 계좌에서 비중이 점점 커져 가고, 매년 혹은 매분기마다 배당금이 따박따박 들어오게 되면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겨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ID 그룹의 운신의 폭은 대폭 넓혀지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회귀 전 한국의 경제 체제에서 일성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이상이었다. 주식 시장에 한정하면 일성 그룹의 지분은 30%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일성 그룹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유재원은 거기까지 바라진 않는다. 대신 나중에 한국에서 여러 가지 신사업을 할 때, ID 그룹을 밀어줘야 한다는 정도의 여론이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기 위해선 ID 그룹의 성장과 함께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다.

유재원이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에 기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 ID 일렉트로닉스 한국 증권 거래소 상장!

-ID 그룹, 상장 주관사로 미래 에셋 증권 선정.

-예상 주가 총액 최소 250조 원 이상!

-국민주 공모 방식으로, 고르게 분배될 예정.

ID 일렉트로닉스 상장에 대한 구체적인 소식이 뜨자, 한국이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전에는 셰브롱의 승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면, 지금은 과연 어떻게 해야 ID 일렉트로닉스 주식을 하나라도 더 매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에 따른 후폭풍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원화 환율 폭등 중!

제일 먼저 움직이는 건 환율이었다.

-원화 환율 한때, 1달러당 1천 원 선 붕괴하기도.

IMF 금융 위기가 터지고 나서 1달러가 2천 원에 근접하기도 했던 원화 환율은 며칠 사이 급격하게 폭등하기 시작했다.

쉽게 풀어쓰자면 한국 원화 기준으로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외환시장이 헤지펀드들에 의해 공격을 받는 줄 알았다. 수출 비중이 큰 한국이었기에, 원화 가치 상승은 수출 기업에 부담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보통은 정부에서 환율조작국 지목을 당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응을 하는데, 이번에는 정부 대응 수준을 넘어선 만큼 큰 변동 폭이 생겨났다.

-외국 큰손들, 달러 뭉칫돈 들고 원화 환전 중!

-ID 일렉트로닉스 주식 공모를 위해 해외 거대 투자회사들이 움직여.

알고 봤더니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외국의 큰손들이 어마어마한 달러화 뭉칫돈을 한국에 들여왔고, 이를 원화로 환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풀리는 자금의 규모가 억 단위였고, 10억 단위도 있었다. 당연히 단위의 기준은 미국 달러화였다. IMF 때는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달러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원화로 환전을 했으니, 원화의 가치가 치솟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국민주 공모 방식이었기에, 돈을 넣는다고 그만큼 주식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치금의 규모가 클수록 할당되는 ID 일렉트로닉스의 주식 숫자도 많아지는 만큼, 앞다퉈 예치금의 비중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대 자본과 경쟁이 되지 않는 개미 투자자들을 위한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공모에 참여하면 받을 수 있는 주식도 최소 100주는 되었다.

100주라고 하면 적을 것 같지만, 천만 원은 넘는다.

ID 일렉트로닉스 주식 1주의 공모가가 12~15만 원 선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계산법도 아주 직관적이었다. ID 일렉트로닉스는 이번 상장에서 전체 발행될 주식 숫자가 20억 주였고, 이 중 9억9천만 주가 시중에 풀릴 예정이었다. ID 그룹의 특징이 스톡옵션은 없다는 것이기에, 9억9천만 주가 모두 공모에서 풀리는 것이다.

이를 예상 시가 총액으로 나누면 1주당 가격은 12~15만 원이 나온다.

-가계 대출 급증!

-빚내고 집 팔아 주식 하려는 개미들 폭등.

아무리 주식에 문외한이라도 이번에 공모 주식을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수십%에 달하는 프리미엄 차익을 챙길 수 있다는 건 인지했다. 설사 소식에 느리더라도 주식 좀 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퍼트렸다.

그렇기에 당장 여윳돈이 없는 이들까지도 빚을 내어 주식 공모에 참여했을 만큼 뜨거웠다.

-금융위원회, ID 일렉트로닉스 상장 작업 예의 주시!

결국 금융위원회가 나서서 급한 불을 꺼야 할 정도가 되었다.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거의 매일 집에 있는 유재원에게 시간의 흐름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은 티파니였다. 한 팔로 안아도 넉넉했던 티파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도 빠르게 생겨났다.

입덧도 그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문제없이 먹었던 음식들도 가리게 됐다거나, 뜬금없이 먹고 싶다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중엔 유재원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었을 음식도 있었다. 순대와 떡볶이 같은 것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에도 한인들이 많이 살면서 K마트도 들어왔지만, 티파니가 원하는 순대와 떡볶이는 그런 양산품이 아니라 한국서 만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유재원에게는 수행원들이 있었고, 별도로 운영할 수 있는 전용기도 있어서, 덕진리의 분식집 주인아주머니를 재료와 함께 초빙해서 오리지널 순대와 떡볶이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한국이라면 1인분에 몇천 원도 안 할 음식인데, 전용기까지 띄우고 떡볶이집 주인아주머니를 초빙도 하는 등 작은 난리가 났다.

유재원은 돈에 상관없이 티파니가 좋아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는 사이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 작업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ID 그룹의 기업 운영의 방침은 시작부터 상장 기업 수준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기준을 갖춘다고 이것저것 해야 할 것도 없었고, 회계 처리도 투명하게 관리를 했기에 뒤늦게 부실이 발견되어 난리가 날 일도 없었다.

덕분에 여름이 다 가기 전에 ID 일렉트로닉스는 상장을 완료할 수 있었다.

유재원의 바람대로 수백만 명의 개인 투자자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이들 모두가 적게는 100주에서 많게는 5만 주까지 주식을 배정 받았다. 해외의 큰손들 역시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시중에 풀린 9억9천만 개의 주식 중에 40%가 외국인들 투자자들에게 넘어갔으니 말이다.

주식 공모에서는 이들의 탐욕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진 못했지만, 공모 후 주식 거래가 시작되면서 어마어마한 물량을 쓸어갔다. 외국인 주식 보유 한도 비율인 40%를 단숨에 충족해 버릴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그 결과 공모가 14만 원으로 상장되었던 ID 일렉트로닉스의 주가는 18만 원 후반대로, 시가 총액은 유재원이 예상했던 300조 원을 단숨에 넘어서 버렸다.

이와 함께 한국 코스피 지수도 대격변이 일어났다.

ID 일렉트로닉스라는 종목 하나가, 나머지 코스피 상장사 전체를 합친 주가 총액보다 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게 코스피 지수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1,100포인트 내외를 오고 가던 게 코스피 지수였다. 그런 상태에서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이 끝나자 단번에 2,300포인트로 치솟아 오른 것이었다. 마치 퀀텀 점프가 일어난 것처럼, 하루 아침에 지수의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 버렸다. 덕분에 지수 연동형 투자상품에 가입한 이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대박이 터져 버렸다.

반대로 코스피의 나머지 주식들이 다 떨어져도, ID 일렉트로닉스 하나만 상승해도 지수는 상승으로 마감되었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오죽하면 주식 전문가들은 투자의 기준을 코스피 지수로 삼으려면 ID 일렉트로닉스는 빼고 계산해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이처럼 후폭풍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유재원의 개인 계좌에도 소득세를 뺀 금액이 그대로 입금되었다. 유재원은 관례에 따라서 ID 일렉트로닉스에 상장 기념 보너스를 집행했고, 원래의 목적인 티파니에게 담보증서 하나만 받고 빌려주었다.  그러고도 제법 큰 돈이 남아 있었지만, 당장 쓸 곳은 없어서 계좌에 보관하기로 했다.

티파니는 바로 미국 국세청에 소득세를 냈고, 프레더릭의 셰브롱 지분을 인계 받았다.

진정한 셰브롱의 주인으로 거듭났다는 뜻이었다.

출산이 마무리될 때까지 외부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던 티파니였기에, 셰브롱의 오너로 등극한 것에 대한 공식 행사는 없었다. 대신 이를 기념하는 작은 가족 파티를 열기로 했다.

유재원도 별일만 없었으면 참석했을 텐데, 일이 생겼다.

-회장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답신이 왔습니다.

김대석 비서실장의 급한 ID톡이었다.

“답신이라니요?”

-미팅 약속 말입니다.

다름 아닌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와의 미팅이었다.

한 번 만나보자고 제안을 넣은 게 몇 달 전이었는데, 답신이 없다가 오늘에서야 왔다는 것이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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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몇 시간 후.

유재원은 실리콘 밸리의 호텔 카페에서 스티브 잡스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임신 축하하네.”

스티브 잡스는 유재원을 보자 티파니의 임신 축하와 함께 하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핑크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는 의외로 가벼웠다. 무게감으로 어림잡아 보자면 애플사의 물건들이 들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애플의 아이폰이라고 해도 조금은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상자는 크기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아기 옷과 신발 좀 골라봤네.”

“고마워요.”

역시나 애플의 최신 스마트폰이 아니라 아기 용품이었다.

유재원은 선물 상자를 받아 바로 옆자리에 잘 챙겨두었다. 가정과는 거리가 먼 스티브 잡스가 아기 용품이라니, 의미가 남다른 선물이다.

반면 유재원은 스티브 잡스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때로 챙겨둔 건 없어서 살짝 미안해졌다. 그래도 선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이번 미팅의 목적은 겉으로는 비즈니스였지만, 실제로는 스티브 잡스의 췌장암을 지적해주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초기 치료 시기를 놓친 스티브 잡스는 뒤늦게 본인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고, 대안 치료에 몰두하면서 더욱 병을 악화시켰다. 결국에는 회복하지 못하고 2011년에 세상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나? 비서에게 듣기로는 우리에게 제안을 할 게 있다고 하던데.”

곧이어 스티브 잡스는 본론을 물었다.

지금보다 훨씬 일찍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번번이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던 모양이다.

“네. 제가 유튜브라는 동영상 플랫폼을 인수한 거 아시죠?”

“그럼. 세간에는 자네 집에 돈이 넘쳐나서 유튜브 아이들에게 버렸다고 하더군.”

“스티브 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 전혀. 애플에 여유 자금만 있었다면 투자했을 거야.”

스티브 잡스는 의외로 솔직한 대답을 해 줬다.

“모바일 유틸리티의 최종 아이템인 스마트폰에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라면 최고지. 문제는 데이터 전송 속도지만 4G가 곧 실현된다고 하니 문제없겠지.”

스티브 잡스의 말 그대로였다.

4G/LTE 중계기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고, 여러 통신사에서 설치 중에 있었다. 빠르면 올가을부터 일부 통신사들은 시범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4G 커버리지를 늘리는 데 가장 선봉에 선 회사는 한국의 TG모바일이었다. 모바일 전략에 대해 유재원과 긴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TG모바일이었다. 심지어 유재원은 2대 주주이기도 했기에, 투자에 아낌이 없었다.

무엇보다 4G 중계기 개발에는 넥스트컴의 기술력도 듬뿍 들어가 있었다.

놀라운 이야기이지만,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90년대 초 모뎀 시절부터 매년 수천억 원에 이르는 돈을 무선 통신 분야에 퍼붓기로 했던 과감하다 못해 과격하다고 할만한 투자 덕이었다.

지금은 타임워너 넥스트컴이라는 기업에 다들 익숙하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넥스트컴이란 포털 사이트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공격적인 경영으로 컴캐스트를 인수하면서 유선 인터넷망도 확보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브로드컴을 창업했을 헨리 사무엘 사장도 영입했다.

이후 타임워너와 합병을 하면서 지금의 규모에 이르렀는데, 넥스트컴 사업부는 헨리 사무엘 사장이 그대로 전담했다.

헨리 사무엘 사장이 역점을 둔 것이 광대역 무선 통신 기술이었고, 유재원도 적극 호응해서 매년 엄청난 연구 개발비를 집행해 주었다. 이렇게 개발된 무선 통신 기술은 4G에 표준으로 흡수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포석은 따로 있으니 5G 중계기 사업이었다.

4G 중계기는 기술적 난이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경쟁사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덕분에 단가도 무척이나 저렴한 상태에서 보급 중이었는데, 5G는 차원이 다른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넥스트컴의 목표는 4G를 교두보 삼아 진출하고, 5G 시장을 석권하는 것이었다. 회귀 전에는 화웨이가 중국에서 남아도는 인력을 갈아 넣어 원가 이하로 공급해 버리는 통에 5G 시장을 잠식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발 해킹 사태가 터져 버렸다.

이번엔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나저나 유튜브로 뭔가 할 계획인 모양이지?”

“네!”

스티브 잡스의 물음에 유재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제가 주인공은 아니죠.”

유재원 본인이 뭘 한다는 게 아니라, 창의력 넘치는 사람들이 마음껏 놀아볼 수 있는 판을 깔아주려는 것뿐이다. 그렇게 놀자판을 만들어주면 번뜩이는 이들이 모여서 뭔가 재미있는 것들을 쏟아낼 것이다.

유재원은 그런 이들에게 애드센스를 붙여서 수익 창출을 지원해주면 끝이었다.

자베드 카림이 수익 창출에 급급해서 다짜고짜 고정 광고를 붙였을 땐 반발이 대단했었다. 장장 1년 치 성장세를 순식간에 까먹어 버릴 만큼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충성도 높은 팬들을 거느린 유튜버에게 붙은 광고라면? 광고 수익이 유튜버와 함께 공유된다면?

유튜브 시청자들은 유튜버를 돕기 위해서라도 진득하니 광고를 봐 주었다. 심지어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해당 광고를 클릭해 구매로 연결하기도 했다.

더욱이 무선 통신 속도가 4G로 업그레이드되면 스마트폰에서의 유튜브 시청이 더욱 원활해진다. 지금은 FHD 영상을 보기 위해서 WIFI가 되는 곳으로 가야 했지만, 4G가 되면 움직이는 자동차 안에서도 볼 수 있으니, 유튜브의 접근성과 효용은 더욱 업그레이드된다.

“허, 이제 보니 유튜브를 홍보하러 오셨군.”

유재원이 유튜브에 대해 열을 올리니 스티브 잡스가 슬쩍 웃으며 정곡을 찔렀다.

“네, 맞아요.”

유재원도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니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유튜브 앱을 기본 탑재해 주세요.”

그러면서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흠, 어려운 일은 아니군.”

운영체제를 뜯어고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유튜브 기본 앱을 탑재하는 정도는 자동 설치 스크립트 한 줄 추가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대신 우리도 받아야 하는 게 있어야지 않겠나?”

“뭘 원하세요?”

“흠. 뭘 해 줄 수 있나?”

유재원은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선제시 같은 건 온라인 게임에서나 있는 것인데, 현실판 비즈니스에서도 등장할 줄이야. 그렇지만 남다른 인내심이 있는 유재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유튜브를 받아주시면, 저희도 애플사의 앱을 받아 드리죠.”

서로의 앱을 하나씩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유재원이 훨씬 남는 장사다. 애플사도 아이폰을 런칭한 후, 킬러앱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는 건 없었다. 결국 안드로이드 모바일과 비슷한 구성이 되었다.

“시리도?”

“에이, 농담도 잘하시네요.”

인공지능 비서 분야에서 골드의 뒤를 겨우 따라오고 있는 시리지만, 지능의 차이는 확실하게 났다. 등록된 사용자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골드와 명령어가 한정된 시리는 유용성에서 급격한 차이가 났다.

골드의 대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웠으면, 차가운 도시의 외로운 사람들이 제일 의지하는 친구로 골드가 선정되었을 정도다. 유재원도 골드의 자연어 대화 기능 향상에 매년 수백억 원에 이르는 큰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인문학 전문가들의 지원이었다.

심리상담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고, 예술과 교양 분야도 투자의 규모가 커져 가고 있었다. 심리학의 경우에는 우울증과 자살 예방의 목적이 컸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가끔가다가 골드가 자살을 권유했다는 식의 게시물이 올라오는데, 실제 골드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진짜로 벌어질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심리상담 전문가들을 통해 골드의 자연어 데이터베이스에 전문지식을 확장하고 있었다.

반면 시리는 인공지능 시스템 자체를 돌리는 것에도 버거운 실정이었다. 그런 시리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채용하라는 건,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팟캐스트 앱이라면 모르죠.”

“팟캐스트?”

아이폰만의 독특하고 유용한 앱이 있다면 팟캐스트였다.

인터넷 라디오인데, 생방송으로도 들을 수 있고 다운로드해서 들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진입 장벽이라는 게 없어서 누구나 만들어 올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였다. 팟캐스트라는 앱은 인터넷 라디오를 하려는 사람들과 아이폰 사용자를 연결해 주는 앱이었는데, 음원 파일을 직접 서비스해 주는 건 아니었고, 중계만 해 주는 것이었다.

“설마 그걸로 끝인가?”

반면 스티브 잡스는 본인이 아이폰에 탑재하기로 결정했던 팟캐스트의 잠재력을 낮게 보는 모양인지, 실망감이 역력했다.

“그러면, 스티브 씨가 직접 원하는 대가를 말씀해 보세요. 웬만하면 다 들어드릴 테니까.”

선제시가 기운 빠지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상대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원하는 숫자를 맞춰 줘야 하니 말이다. 그냥 그쪽에서 원하는 것을 말하면 쉽게 끝날 일인데 돌아돌아 가야 하는 게 유재원은 참 답답했다.

유재원의 말에 스티브는 살짝 고민했다.

특히 웬만하면 다 들어주겠다는 말에 솔깃한 표정이었다. 잠깐 생각에 빠져든 스티브는 뭔가 결심을 한 모양인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올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 굉장하다지?”

“그럼요. 특별히 공을 들였죠.”

이제껏 나온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도 혁신에 혁신을 거듭했던 물건이었지만, 올해 출격 준비 중인 S7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30나노 AP인 M7에 디스플레이 모듈은 AMOLED를 채용했다.

ID 디스플레이의 비밀 무기가 바로 AMOLED였다. TV의 경우에는 백라이트를 LED로 사용한 4K 고해상도 대형 패널을 주력으로 하고, 모바일은 AMOLED에 집중하기로 했다.

안드로이드 S7에 채용된 AMOLED 디스플레이는 기술적 한계로 서브픽셀의 형태가 마름모꼴 형태의 펜타일 픽셀이지만, 애플이 자랑했던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뛰어넘는 집적도를 자랑했다.

이렇게 이원화된 기술은 AMOLED가 충분히 숙성되면 대형 패널도 AMOLED로 전환하기로 방향을 설정했다.

AMOLED는 궁극의 디스플레이 기술이라는 별명처럼 색감이나 시야각, 반응 속도 등등, LCD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특정 색을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물리적인 잔상이 남는 번인 현상이 단점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그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에 큰 문제도 아니었다.

“여기에 4G 모뎀도 채용되었죠.”

아직 4G 무선 통신이 가능한 지역은 한국의 일부 도시에 한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표준화가 완료되었기에, 커버리지가 넓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저번 ID 일렉트로닉스로 한국 증권 시장에의 상장에 성공했다지.”

“후후, 30나노 공정의 힘이죠.”

“그래. 30나노 공정. 도대체 어떻게 달성한 건가?”

역시 스티브 잡스는 안드로이드 S7의 다른 기술보다 30나노 공정 기술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른 기술들은 협력사들과 함께 손을 잡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30나노 공정은 전 세계에서 ID 일렉트로닉스가 유일했다.

“비밀입니다.”

예전에는 반도체 신공정을 널리 팔았다.

인텔과 AMD는 물론이고 TSMC부터 UMC,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까지. 가리지 않고 신공정 기술을 라이선스해 주었고, 덕분에 컴퓨터의 성능이 빠르게 향상될 수 있었다. 하지만 30나노 공정부터는 기술을 팔지 않았다.

기술의 가치나 실행 난이도가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120나노 공정은 구식의 장비로도 그럭저럭 수율이 나왔지만, 30나노 공정은 시작가가 조 단위인 대규모 시설 투자가 선행되어야 이룰 수 있는 기술이었다. 기술의 진화 루트를 다 알고 있는 유재원인데도 그렇게나 큰돈을 써야 했다.

“그렇겠지. 그러면 이건 어떤가? a6칩을 자네의 ID 일렉트로닉스에 양산을 부탁하는 건? 허락만 해 준다면 3천만 개 정도 주문하지.”

“a6? 벌써 설계가 끝났나 보죠?”

최신 아이폰에 탑재된 AP는 a5x으로 45나노 공정이었다. 아직까지 최고의 AP였지만, 8월에 안드로이드 S7이 출격하면 단숨에 뒤로 밀려날 칩이기도 했다. 그 정도는 애플사에서도 다 예상은 하고 있는 모양인지 일찌감치 차세대 칩셋인 a6의 설계를 끝마친 상태였던 모양이다.

“후후, 할 텐가?”

유재원의 물음에 스티브 잡스가 물끄러미 보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가만 맞으면 못 할 것도 없죠.”

ID 일렉트로닉스의 사업 영역에는 파운드리 사업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ATI와 엔비디아사의 최상급 GPU 칩, 일명 빅뷰티를 열심히 찍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비쌀 거예요.”

애플의 특징이 협력 업체를 극한까지 쥐어짜는 것이었다. 발주 물량이 크다는 것, 그리고 선입금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짜디짠 마진율을 자랑했다. 부품의 납품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고, 선금으로 받은 돈을 이리저리 굴려서 수익을 내야 했다. 그런데 발주 물량이 크고, 그만큼 입금되는 선금의 크기도 커서 협력 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했다.

이런 애플이라도 ID 일렉트로닉스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엄격히 따진다면 ID 일렉트로닉스가 을(乙)이지만, 보통 을이 아니라 슈퍼 을이었으니까.

“감수해야겠지. 거래 완료인가?”

“네. 좋은 거래였어요. 아, 덤으로 팟캐스트도 탑재해 드리죠.”

유재원은 선심 쓰는 척, 팟캐스트를 언급했다.

지금은 인지도가 낮은 팟캐스트지만, 언론의 자정 기능이 고장이 나기 시작하면 대안 미디어로 크게 각광을 받을 서비스였다.

“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응? 뭔가?”

“지금 다이어트 세게 하고 계신 건 아니죠?”

“다이어트라니? 내가?”

“네! 몇 달 전에 비해서 얼굴이 반쪽이 되셨거든요. 다이어트로 일부러 빼신 게 아니면, 몸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닌가요? 이렇게 심하게 빠지는 거면 90% 이상의 확률로 췌장암일 수도 있으니 정밀 건강 검진을 받아 보세요.”

유재원은 그야말로 직구를 꽂았다. 돌려 말하는 것도 없이 췌장암을 언급하면서 정밀 건강 검진을 권유했다.

존경하는 개발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의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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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역사상, 가장 진보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안드로이드 S7을 소개합니다!

“잘하시네.”

화면 속 앨런 사장의 모습에 유재원은 잘한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잘할 수 있었으면서 엄살이었냐는 뉘앙스가 듬뿍 담겨 있었다.

유재원의 서재 책상에 올려진 대형 LCD 모니터에 나오고 있는 화면은 바로 IDDC 2007의 메인 스테이지 화면으로, 앨런 사장이 안드로이드 S7을 소개하는 기조연설이 진행 중이었다. 발표 며칠 전만 해도 떨려 죽을 것 같다고 하더니, 실전에서는 너무도 잘하고 계셨다.

반응도 좋았다.

준비된 안드로이드 S7이 디자인부터 성능까지, 경쟁사 제품을 압도할 만큼 뛰어나기도 했지만, 앨런 사장의 진행도 나름 괜찮았기 때문이다.

-막강한 성능의 안드로이드 S7을 100% 활용하게 해 줄 확장 디바이스도 준비했습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 와치와 무선 이어폰 에어버드입니다.

30나노 공정의 M7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가 비장의 무기이기도 했지만, 안드로이드 S7의 활용을 돕는 추가적인 디바이스도 발표되었다.

스마트 와치와 무선 이어폰이었다.

AMOLED의 장점은 바로 디스플레이의 형태를 원하는 대로 쉽게 조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LCD 디스플레이도 가능하긴 했지만, AMOLED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백라이트가 필요하지 않아 두께가 훨씬 얇은 AMOLED는 스마트 와치처럼 손목에 올릴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기에도 편리했다.

42mm의 둥그런 형태의 스마트 와치는 안드로이드 S7과 페어링 되어서, 웬만한 기능들을 모두 무선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문자 메시지 확인부터, 전화 받기와 전화 걸기, 음악 재생 그리고 인공지능 비서 골드의 제어까지도 가능했다. 물론 시계의 가장 기본인 시간 확인은 당연했다. 잘만 사용한다면 활용성은 무궁무진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내장 배터리의 용량의 한계로 디스플레이 화면을 상시 켜 놓으면 5시간도 간당간당하다. 게다가 AMOLED 모듈의 특성상 번인 현상이 빠르게 날 수도 있다. 유재원이 번인에 강한 유기 화합물을 쓰긴 했지만, 아직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을 확인하려고 자세를 취하거나 다른 기능을 쓰기 위해 터치를 하면 디스플레이가 켜지는 것이 기본이었다.

무선 이어폰 에어버드는 스마트 와치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완성된 디바이스였다.

콩 모양으로 귓바퀴에 쏙 들어가는 형태였는데, 연속 재생 시간이 8시간이 넘었다. 디스플레이 모듈을 밝게 빛내야 하는 스마트 와치와 달리 무선 연결을 유지하면서 소리만 내주면 되는 것이기에 작은 배터리로도 긴 작동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무선 연결 규격은 ID 그룹이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블루투스 기술이었다. 여기에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만의 고음질 코덱인 AAC for AIR가 지원되면서 CD 음질보다 한두 차원 더 높은 음질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뿐만이 아니라 블루투스 모듈이 있는 모든 기기와 연결할 수 있다. 컴퓨터, 라이브팟, 엑스박스 심지어 TV까지도 말이다.

-안드로이드 S7의 기본형은 64GB 모델이고 799달러부터 시작합니다. 안드로이드를 120% 활용하게 해 줄 스마트 와치는 299달러, 무선의 자유를 선사해 줄 에어버드는 199달러입니다.

처음엔 자연스러웠던 모습이, 나중에는 대본을 그대로 외워서 말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앨런 사장이었다. 그럼에도 메인 스테이지에 가득하게 모인 안드로이드의 열성적인 팬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저렴해진 가격은 앨런 사장의 딱딱한 목소리를 마법처럼 부드럽게 들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스마트 와치나 무선 이어폰도 사람들이 예상했던 가격보다 100달러는 저렴했다.

비단 실리콘 밸리 컨벤션 센터에서만 뜨거운 게 아니라, 북미 전역과 한국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IDDC가 열리는 8월 첫째 주가 되면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것이 바로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 줄을 서는 것이었다.

일명 얼리어답터라는 최신 제품을 누구보다 빨리 사용하고 싶은 이들이 장사진을 치는 건 이젠 익숙한 그림이었다.

줄을 서는 건 10년도 넘게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자체로 시대의 변화도 보여주었다. 전에는 그저 무료하게 줄을 서고 있었다면, 지금은 다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게임을 하거나 IDDC의 기조연설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799달러입니다.’라는 가격이 발표되자마자 다들 환호성을 크게 질렀다.

기능이 강화된 만큼 작년보다 비싸질 거라고 예상하고 돈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100달러는 저렴해졌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스마트 와치와 에어버드라는 무선 이어폰의 등장은 다들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플래그십 센터에 지불한 금액 자체는 작년과 크게 변하진 않았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스마트 와치와 에어버드까지 모두 구매했다면 1,300달러에 이르는 돈을 냈으니 말이다.

다음 날.

“오늘은 뭘 준비했어?”

오늘도 유재원과 티파니는 나란히 앉아서 IDDC의 둘째 날 행사를 시청했다. 그러면서 티파니가 잔뜩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로 오늘 출격할 신제품에 대해 물었다.

티파니와 함께 살다 보니 알게 된, 그녀의 특이한 성격은 바로 스포일러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반전이 중요한 영화가 있다고 한다면, 유재원은 그 반전을 미리 알고 보면 재미가 반토막 나 버린다. 반면 티파니는 반전을 미리 알아도 재미있게 보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반전이 터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미리 알려달라고 조르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음, 가전제품이야.”

2일 차 IDDC에는 새로운 도전자들이 메인 스테이지 위에 올라왔다. ID 일렉트로닉스 가전제품 사업부였다.

“하긴 가전제품 사업부도 ID 그룹의 식구였지.”

유재원의 말이 예상 밖이었던 모양인지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진 티파니는 곧 수긍해 버렸다. ID 일렉트로닉스의 반도체 사업부가 워낙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다 보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가전제품 사업부였다.

그렇지만 가전제품 사업부도 세계적 규모의 전자제품 업체였다. 대형 LCD TV 점유율 1등이었고, 홈허브로 대표되는 하이엔드 클래스 냉장고와 세탁기도 효자 상품이었다.

“아! 시작한다.”

암전 상태였던 메인 스테이지의 화면이 밝아졌고, 중년의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ID 일렉트로닉스 가전제품 사업부의 송대근 사장이다.

일성전자 사장에서 ID 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사업부 사장이 된 황창규와 달리, 송대근 사장은 최강욱 부회장의 추천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원래는 금성전자의 임원이었는데 헤드 헌팅에 성공해서 ID 일렉트로닉스의 사장으로 왔다.

유재원의 머릿속에 있는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인물이었고, 대부분 긍정적인 뉴스였다. 원래대로라면 금성전자의 가전사업부 사장이 되었을 몸이었다. 이는 곧 최강욱 부회장의 능력 검증이 정확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신제품은 에어필터 그리고 스타일러입니다.

송대근 사장은 미국 사람들에겐 낯선, 유재원에겐 무척이나 친숙한 한국식 발음의 영어로 두 가지 신제품을 발표했다.

미국 사람들에겐 낯선 억양이지만, 그래도 뜻은 통했다. 채팅창을 보면 어디서 코미디언을 데려왔느냐고 난리지만, 그 이상으로 호감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외국인이 좀 투박한 발음으로 자국어를 열심히 하면 호감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후, 무대 위로 제품 실물이 등장했고, 송대근 사장이 직접 설명에 들어가자 사람들은 제품에 집중했다.

“에어필터? 이거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쓰고 있던 거잖아?”

반면 티파니는 조금 김이 빠졌다는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어필터라는 건 공기청정기였고, 유재원의 집에서는 몇 년 전부터 거실과 방안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던 건 프로토타입이었지. 저건 양산형이야.”

항상 작동되고 있었기에 유재원이나 티파니에겐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완전히 생소한 물건이었다.

미세먼지의 위협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기준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 프랑스 등등에서는 호흡기 질환의 환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었다. 한국도 봄과 겨울에 중국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눈에 보일 만큼 공기가 탁해졌다.

미세먼지를 걸러줄 에어필터가 가전 필수품이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ID 일렉트로닉스는 과감하게 에어필터 양산을 결정했다.

본체는 물론이고, 제품 안에 들어가는 헤파 필터와 MB 필터까지도 ID 일렉트로닉스에서 직접 생산하는 터라 생산 원가가 많이 올랐다. 그렇지만 괜히 중국이나 베트남에 공장을 지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었고, 퀄리티 관리를 위해서라면 직접 공장을 운영하는 게 훨씬 나았다.

“스타일러는 뭐야? 옷장 같이 보이는데?”

일찌감치 유재원의 집 한쪽을 차지한 에어필터와 달리 스타일러는 티파니도 처음 보는 제품이었다.

“스마트 옷장이지. 정장처럼 사무직들이 매일 입어야 하는 옷은 세탁을 많이 할 수 없잖아. 그런 옷들을 벗어서 걸어두면 잔주름도 펴지고, 옷에 뱄던 냄새도 제거해 줘.”

“와, 진짜?”

유재원의 설명에 티파니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유재원 부부 정도가 되면 매일 입는 옷은 항상 새것처럼 깨끗한 상태로 준비되었다. 둘 다 패션에 유난스럽지 않은 성격인지라 까탈스럽게 구는 건 아니지만, 옷장에는 늘 새것 같은 옷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유재원이나 티파니나 모두 처음부터 이렇게 산 건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만 해도 똑같은 옷을 여러 번 입어서 냄새가 밸 정도로 입었던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뿌리는 탈취제를 유용하게 썼지만, 근본적은 해결책은 아니었다.

1분 1초도 아까운 현대인들에게 딱 맞는 옷장이었다.

-기본형 600달러부터! 고급형은 990달러까지 다양한 모델을 준비했습니다.

“에, 무슨 옷장이 스마트폰보다 비싸.”

딱 하나 단점은 비싼 가격이다.

“소량 생산 품목이라 그래.”

티파니도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가격 때문에 회귀 전에도 보급에는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던 아이템이었다.

이후로도 송대근 사장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신제품들을 열심히 소개했다.

에어필터와 스타일러가 혁신적인 아이템이었다면, 주인공격인 제품은 바로 보르도 TV였다. 무려 55인치 4K UHD TV라는 괴물의 등장이었다.

-보르도 TV 울트라 캔버스입니다!

너무도 장황한 이름이지만,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42인치 정도가 주류인 TV시장에서 크기부터 화질까지, 압도적인 제품이었다. 다만 공중파로 UHD가 시작된 곳은 아직 단 한 곳도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 일찍 FHD방송 체제를 갖춘 한국에서도 아직 UHD로의 전환 일정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UHD화질의 콘텐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젠 더는 낯설지 않은 VOD서비스인 타임플렉스는 일찌감치 UHD콘텐츠를 대량확보한 상태였기에, 절대 무의미한 스펙은 아니었다.

“엑! 1만 달러라고?”

집중해서 신제품 발표를 지켜보고 있던 티파니가 보르도 TV 울트라 캔버스의 가격에 경악했다. 다만 셰브롱의 오너도 깜짝 놀랄 만큼 비싼 가격이 대중화의 걸림돌이었다.

“UHD 패널 수율이 최악이거든.”

100장을 찍어낸다면 그중에서 쓸만한 패널은 20개도 나오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가격이나 보급률 모두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저녁.

띵 하는 알람 소리와 함께 유재원의 스마트폰이 밝아졌다.

-하프라이프 3라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가슴 벅찬 감동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호들갑스러운 단어들이 가득한 메시지였다.

발신인은 바로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었다. 혹시나 하고 ID톡에 친구로 등록했던 김정남은 북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유재원에게 틈틈이 연락을 했었다. 특히 오늘은 아주 호들갑스러웠는데, 바로 하프라이프 3 때문이었다.

유재원이 게이브에게 스팀을 맡기면서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 바로, 모든 게임들의 확실한 마무리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프라이프를 콕 찍어 지목을 했었는데, 다행히 게이브는 유재원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회귀 전, 게이머들은 전설적 FPS 시리즈인 하프라이프의 마지막 작품과 마주하기 위해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VR 전용 게임으로 나와서 VR기기가 없는 사람들은 스트리머들이 플레이하는 걸 지켜보며 손만 빨아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프라이프 2 이후, 하프라이프 2 에피소드 2니 하는 확장팩을 내며 변죽만 올리다가, 드디어 이번 2007년에 3이라는 확실한 마침표를 찍었다.

2007년형 최신 시스템에 맞춰 그래픽도 대폭 업그레이드되었다. 비주얼적인 충격도 대단했지만, 개발진이 특히 중점을 둔 것은 바로 물리 엔진이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오브젝트가 현실성 있는 상호작용을 보였다.

예전 게임들은 건물이 무너질 때, 먼지와 불꽃으로 화면을 대충 가린 후 무너진 잔해가 서서히 나타났다. 반면 하프라이프 3에서는 건물이 무너질 때, 벽과 바닥에 금이 가는 것을 시작으로 실제와 거의 흡사한 형태의 붕괴를 그대로 연출했다.

심지어 붕괴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무너지는 양상도 살짝 달랐다. 스크립트가 아니라 물리 엔진에 의한 실시간 렌더링이었기에 가능한 연출이었다.

이처럼 사실적인 물리 엔진으로 게임에 대한 몰입감은 상당했다. 김정남과의 ID톡을 통해 그가 잡덕 성향이긴 했지만, FPS는 그다지 즐겨 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 유재원이었다. 그런 김정남이 정통 FPS 게임인 하프라이프 3에 푹 빠졌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얼른 싱글 캠페인을 다 깨고 멀티로 가겠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북에 사는 김정남이라도 역시 한국인인 모양이다.

하프라이프 3은 메인 스토리만 쭉 깨는 것에만 20시간 가까이 걸리는 상당한 분량의 게임이었다. 그걸 출시 하루 만에 다 깨고, 그것도 모자라 멀티로 오겠다니 말이다.

그나저나 명색이 김정일의 장남이면서 영어를 이렇게나 마구 남발해도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언어도 투쟁의 도구라면서 표준어에서 영어는 싹 뺐던 북한인데, 김정남은 마치 한국서 자란 사람처럼 영어를 섞어 썼다.

더욱이 지금의 북한은 후계자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이었다. 만약 유재원이 김정남으로 환생했다면, 절대 천하 태평하게 게임만 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네, 저야 휴가 중이니 얼마든지 같이 플레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유재원은 김정남에게 조언을 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만에 하나 북한에 긴급 상황이 발생 시, 북한 최상층과 바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 김정남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유재원의 부재 속에서도 IDDC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새해가 되어 티파니의 출산 예정일이 훌쩍 다가왔다.

세상 처음으로 아빠가 된다는 부담감과 순조로운 출산에 대한 걱정으로 유재원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시간을 빠르게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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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아이2007년이 된 지 어제 같은데, 순식간에 겨울이었다.

특히나 유재원의 입장에서는 눈 한 번 깜박이자 한 해가 다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초에 도깨비 슈퍼컴퓨터를 준비하고, 김정일의 방한과 쓰촨성, 동일본 지진을 예측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더니, 티파니의 임신과 ID 일렉트로닉스의 상장, 셰브롱의 상속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러는 와중에 유재원의 부재로 치러진 IDDC 2007도 평소와 다름없이 성황리에 끝났다. 늘 서던 자리에 서지 않으니 뭔가 좀 허한 느낌이었다. 본인이 순식간에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없었다면 연초의 김정일의 방한도, 도깨비 슈퍼컴퓨터로 두만강, 압록강 유전의 발견도, 대지진의 예측도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1월 넷째 주에 있었던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이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P마켓,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행사 시작!

-최대 90%의 파괴적 할인율!

-42인치 FHD 보르도 TV가 불과 299달러!

북미와 전역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소수의 국가에 대규모 스마트 물류창고를 건설한 P마켓이었다. 단순한 중간 유통업자 역할만으로 전자 상거래 1위 업체가 되었던 P마켓이었지만, 아마존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혁신이 없으면 따라잡힌다는 위기감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유재원이 내놓은 카드는 대규모 스마트 물류창고였다. P마켓이 직접 공장으로부터 리테일 상품을 가져오고, 스마트 물류 시스템으로 유통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어느 인터넷 쇼핑몰보다 P마켓의 가격이 제일 저렴하다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제 살 깎아 먹는 출혈 경쟁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다른 인터넷 쇼핑 업체가 P마켓보다 저렴한 가격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제 살 깎는 경쟁도 P마켓만큼 할 수 없었다. ID 일렉트로닉스 상장 후, 직원들 보너스와 티파니에게 빌려주고도 남은 돈이 수백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것을 모두 유재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유재원은 특정한 목표를 위해서 금고 문을 여는 데, 인색함이나 주저함은 전혀 없었다.

아마존이 인터넷 최저가를 표방하며 출혈 경쟁에 돌입하자 유재원도 맞불을 놓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블랙프라이데이 이벤트였다.

42인치 보르도 TV는 신제품의 등장으로 구형이 되었다. IDDC 2007에서 발표한 1만 달러짜리 4K UHD 울트라 캔버스 모델이 최상급이었고, 그 이하로 3, 4천 달러대의 중형 모델이 주력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42인치 보르도 TV의 가격은 1,200달러로 싸지만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력 모델이었고, 공중파와 케이블이 모두 FHD 방송 중이었기에, 42인치 모델로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런 42인치 보르도 TV가 블랙프라이데이에 접어들자 2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등록되었다.

299달러, 한국돈으로는 단돈 30만 원!

이 정도 가격은 회귀 전에도 어림도 없는 가격이었다. 디지털 TV로의 전환이 느렸던 당시에는 LCD 패널 개발 속도와 양산이 많이 밀렸었다. 대기업 브랜드의 대형 LCD TV가 30만 원대로 떨어지는 건 2017년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유재원은 무려 10년을 앞당겨 버렸다.

물론 그때처럼 생산 원가가 절감된 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대량 주문을 통한 할인, 아마존이라는 신흥 강자와의 경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는 가격이었다.

P마켓의 스마트 물류창고 건설이라는 공격적인 영업 방식의 최대 장점은, 손익 분기점을 빠르게 당겼다는 것이었다.

박리다매였지만, 그래도 남는 건 있었고, 애드센스 광고 수입이라는 든든한 우군도 있었다. 덕분에 P마켓의 2007년도 회계 기준상에서 손익 분기점을 10월 마지막 주에 넘을 수 있었다. 이 말인즉, 11월 달부터는 재고로 남은 상품에 대해 어떤 가격을 붙여 팔든 순이익이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리테일 가격이 1,200달러였던 42인치 보르도 TV를 299달러라는 파괴적 가격에 내놓아도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량 할인으로 평소 잘 팔리지 않았던 재고 상품이 다 팔려 나가면, 순이익의 폭은 더 넓어지는 것이었다.

-블랙프라이데이 세일로 한때 인터넷 마비.

파격적인 세일에 소비자들의 응답도 확실했다.

북미의 인터넷 인구는 물론이고, 해외 직구라는 노하우가 있는 이들 모두가 P마켓으로 몰려들었다. 그에 따라 웬만한 DDOS 공격보다 훨씬 거대한 트래픽이 발생했고, 일부 인터넷들은 먹통이 되었을 정도다.

다행히 타임워너 넥스트컴의 유선, 무선 인터넷 시스템은 탄탄했다. 문제가 된 것은 시설 투자에 인색한 지역 인터넷 가입자들이었다. 넥스트컴의 인터넷이 들어가지 않는 지역들은 아직도 일부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는 지역 인터넷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야 했다.

그렇지만 인터넷에 장애가 왔다고 세일 품목을 구매하는 데 실패하는 일도 드물었다. 늦게 접속했다고 해도 재고는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42인치 보르도 TV는 이번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의 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P마켓의 스마트 물류창고가 지어질 때부터 대충 300만 대 분량의 대량 주문을 넣었었다. 창고가 완공이 될 때마다 배송을 받아서 직접 판매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초부터 블랙프라이데이가 될 때까지 반 이상이 팔렸고, 이벤트를 시작할 때 120만 대가 재고로 남아있었다.

먼저 접속한 사람이 싸다고 2, 3대씩 구매하더라도, 조금 늦게 접속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물량은 충분했다. 물론 120만 대라는 막대한 물량도 이틀을 버티진 못했지만 말이다.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행사는 3일 동안 이뤄졌기에, 나머지 날에는 다른 품목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뉴스에는 스마트 물류창고에 들어선 수십 대의 초대형 트럭에 대형 TV들이 인공지능 지게차에 의해서 팰릿째로 실려 나가는 모습이 연일 비쳐졌다.

웬만한 일들은 자동으로 이뤄지는 스마트 물류창고의 모습 자체가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스마트 물류창고에 거대한 주문량이 쏟아지면서, 모든 로봇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었다.

물론 창고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늘 봐왔던 모습이라 새로울 건 없었지만, 스마트 물류창고가 제대로 가동되는 걸 처음 보는 일반인들에겐 또 하나의 비주얼 쇼크였다.

맞불 작전을 펼쳤던 아마존도 자체 물류창고는 있었고, 11월 말에 들어서 거의 손익 분기점을 넘을 뻔했지만, 블랙프라이데이 세일로 인해서 손실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제 겨우 체계를 잡아가는 아마존이었는데, 이미 스마트 물류창고 구축을 끝내고 막대한 자금력도 있는 P마켓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연말 홀리데이 시즌의 승자가 된 P마켓의 효과는 ID 테크놀로지로 이어졌다. P마켓은 따로 상장된 상태는 아니었고, ID 그룹의 계열사로 등록된 상태였다. 대신 인공지능의 운영부터 전자 상거래 기술 등 P마켓 고유의 기술이라는 건 죄다 ID 테크놀로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ID 그룹은 한참 전부터 계열사 간 거래도, 외부와의 거래처럼 수익과 비용 계산을 철저히 했기에, P마켓의 연말 홀리데이 시장 석권은 곧 ID 테크놀로지의 이익이었다.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ID 테크놀로지였기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주식을 살 수 있었고, 그에 따라 ID 테크놀로지의 주가도 치솟았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곧 보너스로 연결되었기에, 직원들의 사기도 폭발했다.

비단 ID 테크놀로지뿐만이 아니라 ID 그룹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었다. 심지어 ID 그룹 식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계열사들도 2007년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ID 웨스팅하우스와 ID TLS가 대표적이었다.

토륨 원자로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나라들은, 모하비 사막의 1호기가 가동된 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에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에 설치된 2기의 토륨 원자로도 문제없이 가동되면서, 주문이 쏟아졌다.

싼값에 대량으로 주문을 넣은 중국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같은 중동의 나라들도 ID 웨스팅하우스의 새로운 고객이 되었다. 그러자 선진국에서도 진지하게 고려를 하기 시작했다.

자국의 원자로 사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도 컸지만, 기존 원자로는 방사능 문제가 너무도 심각했다. 가동 중에 나오는 방사능도 문제지만, 폐연료봉과 같은 방사능 폐기물은 그야말로 처치 곤란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토륨 원자로는 중성자가 공급되는 우라늄 시드와 토륨 충전제가 분리가 되었다. 반응 효율이 떨어지는 연료봉에서 토륨 충전제를 분리하고, 우라늄 시드는 계속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연료봉서 분리된 토륨에선 방사능은 전혀 검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대로 방치하는 건 찝찝하니 지하 창고에 보관하는 것을 권고했다.

2007년은 ID TLS가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난 것 같은 반전이 있는 해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부터 비롯된 금융 위기는 2006년 여름부터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여진은 세계 금융 시스템을 아직도 뒤흔들고 있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선택한 것이 양적 완화였고, 이는 곧 달러의 무제한적인 공급이었다.

그나마 유재원의 개입으로 불량한 금융회사들에 공적 자금을 퍼주는 대신, 경제 논리에 따라 부도를 맞이하도록 한 게 그나마 부작용이 줄어드는 일이었다. 리먼 브라더스를 필두로 여러 보험사와 지방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이러한 금융회사들의 붕괴가 주택시장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ID TLS의 출범으로 연쇄 부도의 도미노는 막았다. 대신 넘쳐나는 자금은 원유와 금, 곡식과 같은 실물 투자로 방향을 틀어 버렸는데, 그로 인해 현재 원유의 가격은 1배럴당 100달러 수준까지 근접한 상태였다.

금 가격 역시 폭등 중이었는데, 둘 다 유재원이 미리 선점한 상품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하여튼 ID TLS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많았다. 자산의 대부분이 서브프라임 채권이니,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ID TLS는 무탈하다 못해 승승장구 중이었다.

새롭게 인수하면서 내준 거치 기간이 끝나고 원금 상환이 시작되었을 때, 다들 긴장했지만 인공지능 골드가 분류한 신용도는 유지되었다.

A 클래스의 경우 연체율은 2%대에서, B 클래스는 8% 미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월 스트리트에서 연체율이 튀었을 경우 ID TLS도 리먼 브러더스의 뒤를 따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이자와 원금이 상환되면서 ID TLS의 자금 운용에도 숨통이 트이다 못해, 계획만 잡아 두고 있던 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토털 리빙 솔루션이라는 이름답게, 학자금 대출과 생활 자금 대출, 긴급 의료비 대출 같은 다양한 금융 서비스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성과들의 최종 결과물은 막대한 연말 보너스였다.

-ID 그룹, 대규모 연말 보너스 책정.

-최소 400%, 성과가 높은 계열사의 경우 1,200%까지도!

덕진리의 소프트웨어 패키지 공장은 기본 400%가 적용된 계열사였다.

패키지 공장은 실물 경기가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언제나 똑같은 일을 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패키지, 오피스 패키지 그리고 엑스박스 게임 패키지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스팀을 통한 디지털 다운로드 유통이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수집욕으로 패키지를 사는 사람들도 꾸준했다. 더욱이 수집가용 특별 패키지는 남는 게 많은 효자 상품이기도 해서 덕진리 공장은 앞으로 20년 후에도 축소될 일은 없다.

반대로 뭔가 특별한 성과를 내기에도 어려웠던 탓에 2007년 연말 보너스는 400%로 정해졌다. 여기서 기준은 바로 기본 월급이었는데, 기본급이 높은 ID 그룹이었기에 400%라도 분명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물론 다른 기업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보너스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풍족한 연말이지만, ID 그룹 사람 중 그런 연말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12월 중순의 늦은 밤.

유재원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여전히 잠을 잘 때 꿈은 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깊은 잠에 들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잠자리가 좀 이상하면 바로 눈을 뜰 수 있었다.

“티파니!”

티파니가 이상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별, 별똥이가 일찍 나오려나 봐.”

다행히 아직 양수가 터진 건 아니었지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유재원은 곧장 침대 옆 탁자에 있던 붉은 버튼을 눌렀다.

긴급 프로토콜 발동 스위치였다. 임신한 티파니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위층의 상황실 그리고 저택의 별채에 근무 중인 당직 직원에게 호출이 가는 스위치였다.

버튼을 누른 지 1분도 되지 않아 직원들이 침실 문을 두드렸다. 유재원은 바로 문을 열어서 티파니를 호송토록 했다.

원래 티파니의 출산 예정일은 1월 초였다. 그런데 티파니의 배 속에 있던 별똥이는 세상을 좀 더 일찍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분만실이 있는 산부인과 병원도 바로 근처에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산부인과 병원도 긴급 프로토콜이 실행되면, 바로 산부인과 전문의가 대기하기로 했다. 심지어 그 산부인과 전문의는 프레더릭이 직접 초빙한 분으로 예전부터 셰브롱가의 자녀들을 받은 믿을 수 있는 전문가였다.

그럼에도 예정보다 이른 출산에 유재원은 불안감이 커졌다.

차로 10분도 안 걸릴 산부인과 병원까지 가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그때,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밝은 유성이 유재원의 눈에 들어왔다.

“제발, 순산 기원합니다.”

별똥이라는 태명답게 유성까지도 불러온 모양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산을 기도했다.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세계 최고의 부자인 유재원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오직 순산 하나만이 간절한 한 사람의 예비 아빠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주말이네요!

즐겁게 보내시고, 월요일에 다시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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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 황금기

유재원의 간절한 기도 덕이었을까.

급히 분만실에 들어간 티파니는 4시간도 되지 않아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예정일보다 빠른 갑작스러운 출산에, 티파니도 첫 아이다 보니 혹여 난산일 가능성도 점쳐졌지만, 자연분만으로 건강하게 출산했다.

유재원의 부모님, 티파니의 가족들이 다 산부인과에 모였기에 한바탕 난리법석이었다. 이 자리에는 티파니와 셰브롱의 후계자를 겨뤘던 이모들도 찾아왔지만, 이미 게임이 끝나 버렸기에 더는 틱틱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함박웃음을 짓는 프레더릭의 존재감 때문이라도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셰브롱의 후계자를 정한 프레더릭이지만, 그분의 재산 상속이 다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프레더릭의 재산 중에 셰브롱의 지분이 제일 컸지만, 그것 말고도 수많은 기업의 지분 그리고 부동산과 현금성 자산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셰브롱의 지분을 티파니에게 상속했다고 해서 프레더릭이 이빨 빠진 호랑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프레더릭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티파니의 이모들은 별똥이의 출산을 열심히 축하해 줬다.

“아드님을 안아 보세요.”

그런 난리법석 속에서 따듯하고 깨끗한 물에 목욕도 끝낸 별똥이가 강보에 쌓여 티파니에게 먼저 안겼다.

“우리 아기.”

산열이 남아 있을 텐데도 티파니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별똥이를 안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렁차게 우는 별똥이도 엄마를 알아보았는지, 울음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곧이어 티파니가 자연스럽게 젖을 물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웠다. 오죽하면 유재원도 별똥이를 안아보고 싶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성스러워서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유재원이 별똥이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젖을 먹은 별똥이가 귀여운 첫 트림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막상 안으려니까 손이 떨렸다.

조금만 힘을 줘서 안으면 깨질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열심히 회귀를 준비했고, 그 계획을 120% 실행해 거대한 제국을 이룬 유재원이지만, 아빠가 되는 건 모든 생에 걸쳐 처음 있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심지어 회귀 전 만들었던 계획에도 가족 계획은 불과 몇 줄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상상해 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장대한 분량의 마스터플랜에서 아이들의 분량은 존재 자체가 미미했다.

그런데 실제 안아본 별똥이는 존재감부터가 달랐다.

그저 이 존재 자체로 유재원의 마음속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절로 일어났을 정도다. 그것은 바로 아빠로서 책임감이었다.

가족을 지키는 것, 그리고 아들이 자랑스러워할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로 일어났다.

“유 서방. 우리도 별똥이 좀 안아 보세.”

프레더릭이었다.

장인, 장모님과 부모님도 함께 있었기에, 평소처럼 자네가 아니라 ‘유 서방’이라는 한국식 호칭으로 유재원을 불렀다. 심지어 병실 안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유재원의 팔에 안겨 있던 별동이에게 시선이 쏠린 상태였다.

유재원이 별똥이를 혼자서 독점하자, 참다참다 못한 프레더릭이 대표로 말을 꺼낸 것이다. 시간을 보니 유재원도 깜짝 놀랐다.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시간상으로는 5분이 훌쩍 지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유재원은 너무도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별똥이를 프레더릭에게 안겨주었다.

2007년 12월 21일, 오늘은 유재원과 티파니 그리고 가족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날 아침.

-유재원, 티파니 유 부부. 득남!

짧고 굵은 기사들이 인터넷을 제일 먼저 장식했다. 공중파 뉴스에서도 한 꼭지를 할애해 보도를 했을 만큼, 모든 사람들이 관심이 있어 하던 뉴스였다.

기사를 클릭해 본 네티즌들은 축하의 리플을 남기면서, 일부는 할인 쿠폰 같은 걸 뿌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표시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별똥이 탄생을 기념해서 ID 그룹 차원의 이벤트는 없었다.

ID 그룹이 비상장 상태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력 계열사 대부분이 상장된 상태였다.

주식회사였기에, 공과 사는 구분을 해야 바람직한 경영이었다. 더욱이 저번 달에는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벤트가 열리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극한까지 소모시켰다.

오죽하면 북미 최대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조금 영향이 왔을 만큼, 엄청난 소비 축제였기에, 별똥이 탄생 기념으로 이벤트의 효용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세간의 이목만 끌어서 별똥이에 대한 위험만 올리는 꼴이다.

실제 정보팀의 보고에서 별똥이의 유괴 위험도가 높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유재원이나 티파니나 보통 수준의 부자가 아니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보유한 부의 크기도 그렇고, 사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도 차원이 달랐다.

별똥이의 유괴만 성공하면 미국의 로또 당첨금보다 더 큰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단적으로 별똥이가 태어난 아침, 수많은 곳에서 축하 전화가 결려왔다. 정치인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현직 미국 대통령인 앨 고어, 대한민국 재선 대통령인 노무현은 물론이고, 북한의 김정일로부터도 축전이 왔다.

심지어 미국 공화당의 차기 대선 후보로 무섭게 떠오르는 부시와 존 매케인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

이처럼 미국 정계에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게 유재원이었다. 그러니 돈이 아니더라도,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테러 단체가 별똥이의 유괴를 꿈꿀 수 있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경호팀장은 혹여 경호에 빈틈이라도 생기면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에, 경호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과 경호 수준 강화를 권유했다.

유재원은 보고서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수락했다.

경호 파트 지출이 많이 늘어나고 번거로운 일도 생기겠지만, 사건이 터지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돈을 쓰는 게 훨씬 나았으니 말이다.

전자 문서에 사인을 하며 경호 강화를 승인한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티파니가 있는 안방으로 이동했다.

티파니는 산후조리 중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몸이 튼튼해서 산후조리가 필요 없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겉으로만 보고 하는 말이었다.

출산을 위해 체질이 변한 몸이 본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기간이 필요했다. 산모가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집에서는 일상의 활동이 있으니, 산후조리원에 들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유재원네 집은 달랐다. 사람들을 추가로 고용하고, 컨디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음식과 물자를 조달하는 데 예산은 조금의 제약도 없었다.

그렇기에 집 안에 있으면서 어떤 최고급 산후조리원보다 더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단적으로 티파니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보스턴다이나믹스의 로보틱스 기술이 담겨 있는 기술의 정수였다.

버튼 하나로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은 물론, 푹신한 소파에서 침대로의 형태 변환도 가능했다. 심지어 그 상태로 이동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티파니가 호출하면 바로 달려와 줄 전문 간호사들도 상주해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 어떤 기계보다도 사람의 손이 나았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재원도 서재에서 일을 보다가 지금처럼 틈틈이 티파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티파니는 유재원이 들어왔음에도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직도 결론이 안 났어?”

유재원의 물음에 티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결론인고 하니, 별똥이의 이름 때문이었다. 프레더릭부터 유재원의 부모님까지. 각자 정하신 이름이 다 달랐다.

더욱이 한국식 이름과 미국식 이름으로 그 격차도 커서, 이름을 정하는 데 난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름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한 건 아침을 먹고 나서였다.

어제 늦은 저녁부터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라서 다들 비몽사몽이었지만, 아침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서 별똥이의 진명을 정했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각자 생각하신 이름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재원의 부모님은 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태인이라고 지었다. 성까지 붙이면 유태인이라서 좀 이상했지만, 유씨 집안 족보에 따르면 '재' 다음이 '태'자 돌림이라서 이름을 짓는 데 약간의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프레더릭은 대천사 미카엘로부터 파생된 마이클을 미셨다. 반면 장인, 장모님은 심사숙고 끝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만들어 오셨다. 당연하게도 고대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드로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다들 너무나 좋은 이름이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유재원과 티파니가 정한 이름도 있었다.

혜성.

유혜성(柳慧惺)이다.

이름에 쓰인 한자를 풀어보면 슬기롭고 영리하다는 뜻으로 밤하늘 천체 현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발음만은 같다.

유재원의 어머니와 프레더릭이 공통으로 꾼 태몽이 혜성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예정일보다 빠르게 별똥이의 출산 신호가 오면서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달릴 때, 유재원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순산을 빌기도 했었다.

태명까지 별똥이니, 모든 정황이 혜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 심지어 프레더릭이 주장하는 이름도 나쁜 건 아니었기에, 아직 확정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별똥이의 이름이 정해진 건 다음 날이었다.

유혜성, 그리고 알렉산더.

그것이 격론 끝에 정해진 별똥이의 진명이었다. 실제 출생신고서에 오르는 이름은 유혜성이고, 알렉산더는 정식 서류엔 오르지 못했지만, 미국 식구들끼리 부르는 이름으로 하기로 했다. 혜성이라는 이름은 한국 발음에 익숙지 못한 이들에겐 좀 어려운 발음이었던 탓이다.

“으음.”

별똥이의 이름도 확정되고, 출생신고도 끝났고 티파니도 잘 회복 중이었다. 그러니 유재원은 입가에 미소가 떨어질 일이 없어야 했다. 그나마 고민이 있던 것도 디디와 혜성이의 대면은 언제쯤 하면 좋을까 하는 소소한 것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저택의 터줏대감 디디는 새로운 식구에 대해 관심이 넘쳤다. 틈만 나면 아기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혜성이에게 고양이 알레르기라도 있으면 큰일이었으니 말이다.

알레르기 검사는 진행 중이었지만, 설사 알레르기 반응이 없다더라도 당장 접촉시킬 마음은 없었다. 접촉 시간은 조금씩 늘려나가는 게 좋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유재원의 고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소소한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2008년 새해가 되면서 불현듯 생겨난 사건 때문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2008년 새해가 되자, 전 세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새해맞이 행사를 떠들썩하게 열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했다. 유재원도 이번 새해는 특별했다.

2007년만 해도 전에는 티파니와 소소하게 새해를 맞았다면, 이번에는 모든 식구들이 함께 모여 새해를 맞이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새로운 식구인 혜성이도 있었으니, 2008년은 더욱 각별했다.

그렇게 공식적인 새해맞이 행사가 끝나고 나서, 유재원에게는 혼자만의 새해 행사도 있었다. 바로 기억의 궁전 속에서 2008년의 주요한 사건 사고들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었는데, 매년 신년행사를 마치고 서재에서 혼자가 되면 습관처럼 했던 것이 정례행사처럼 되었다.

절대기억력을 소모해 만든 기억의 궁전이었기에, 회귀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능 하나는 확실했다.

그렇기에 2008년의 주요 기록들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유재원의 뇌리에 떠올랐다.

-5월 12일. 쓰촨성 대지진.

수많은 사건 사고 중에 유독 신경을 거스르는 건 중국의 쓰촨성에 일어날 대지진이었다. 사망자만 7만에 가까운 규모였으니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작년에 북한 지하자원 탐사를 명분으로 삼아 쓰촨성 대진을 예측했고, 단 하나의 과장도 없이 그대로 발표했다. 심지어 김정일 위원장의 방한 때, 직접 중국에 자료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정일 위원장은 유재원의 부탁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압록강 유전 개발 사업은 누구나의 예측대로 중국이 수주했다. 그에 따라 치러진 계약식에 김정일 위원장이 참석했고, 중국에서는 후진타오 주석이 참석했다. 행사의 규모도 성대했다. 북한과 중국 탄탄한 동맹을 자랑하기 위한 행사로 유례가 없을 만큼 크게 치렀다.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 내에서 차기로 떠오르고 있는 시진핑에 밀려서 레임덕 상태였다. 2008 올림픽만 끝나면 바로 국가 권력 전체가 시진핑에게 모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는데, 그래도 국가 주석이란 자리는 대단한 위치였다.

그렇게 후진타오 주석에게 쓰촨성 대지진의 예측 데이터를 넘겼는데도, 중국은 2008년 새해가 된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결국 중국도 일본처럼 완전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유재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두 개의 대지진을 예측한 것으로 본인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쓰촨성에 진짜 대지진이 일어나 궤멸적 타격을 받으면, 여기에 화들짝 놀란 일본은 결국 대비책을 마련할 테니 말이다.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막을 수 없더라도, 지진으로 일어날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의 핵발전소가 터지는 것만 막아도 유재원은 만족했다. 핵발전소의 파괴로 인한 피폭은 일본 국민들에게도 문제지만, 지구에서 가장 큰 바다 태평양이 오염되는 원인이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태평양의 오염만 막으면 된다고 여겼던 유재원이었는데 혜성이의 탄생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중에 혜성이가 다 커서 예측은 잘 해놓고, 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아직도 2008 올림픽의 성공에만 급급한 중국 지도부만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결국 혜성이가 유재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휴, 일단 하는 데까지 해 보자.”

유재원은 스마트폰을 들어 아주 오랜만에 ID톡 연락처를 뒤적여 하나의 이름을 클릭했다.

텐센트의 마화텅 회장이었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네요.

그런데 이번 주는 수요일까지만 달리면 황금 연휴입니다~!

우리 독자님도 부처님 오신 날에 이어 노동절도 연달아 쉴 수 있길 기원합니다.

파이팅입니다~!

×

황금기-옙! 마화텅입니다! 유 회장님!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마화텅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텐센트의 본사가 있는 중국 선전과 샌프란시스코의 시차를 생각해 보면 무려 -17시간. 샌프란시스코가 오후 5시를 막 넘었으니, 선전은 아침 8시였을 것이다. 새벽은 아니어도, 이른 아침이었을 텐데 바로 응답이 오니 운이 좋았다.

“오랜만이죠? 그간 안녕하셨어요?”

-물론입니다! 회장님의 득남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직접 가서 축하드리고 싶은데, 백일이나 첫돌에 꼭 좀 초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백일이나 첫돌 잔치도 소박하게 가족끼리만 할 거라서요.”

-그, 그렇군요.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마화텅 회장은 첫돌 행사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목소리에서 힘이 좀 빠졌다. 하지만 마음만 받겠다는 건 단순한 빈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백일이나 첫돌 잔치에는 지인들만 부를 예정이었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레밍턴과 최강욱 부회장, 앨런 사장까지가 구체적인 범위였다.

그 이상으로 초대 범위를 넓히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바리바리 들고 오는 선물도 부담스러웠다.

집에 들어온 아기 옷도 방 하나 가득할 정도였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기 옷과 신발을 선물로 해 주었다. 하얀 천사 아기 옷이었다. 과연 스티브 잡스의 안목답게 디자인부터 재질까지 모두 특별했다. 덕분에 유재원보다 더 높은 안목을 지닌 티파니의 기준도 거뜬히 통과해 혜성이에게 실제로 입혀졌을 정도다.

그렇게 스티브 잡스를 시작으로 아기 용품들 선물이 수많은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처음엔 고마웠는데, 지금은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인 상태였다. 매일 새 걸로 입는다고 해도 모두 입어 보기도 전에 다 커 버릴 정도로 말이다.

무엇보다 유재원 정도의 부에 도달하게 되면 경제적 자유가 아니라 자본적인 자유가 생긴다. 사치품을 얼마든지 소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까지도 마음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십조 원이 투입되어야 하는 신공정 반도체 생산 라인이라든지, 허허벌판에 연간 수백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을 짓는 짓도 할 수 있다. 아니면 북미 전역의 인터넷 속도를 100MBps로 단숨에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재원의 선택에 장애물이라면 기술과 시간, 그리고 법률적인 문제뿐이었다.

그러니 혜성이에게 주는 선물이라도 이제는 사양이다.

“저기, 마 회장님.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부탁이라니요! 그저 하명만 해 주십시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마화텅 회장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되돌아왔다.

부탁을 받으면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아니라, 유재원에게 뭘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태도다. 마화텅 회장이라면 이제 중에서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인데도, 유재원에게는 그야말로 극진한 모습이다.

마화텅 회장은 1971년생으로 유재원보다 7살이나 많은 사람이지만, 오래전부터 유재원을 대하는 건 형님 취급이었다. 단지 형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텐센트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독립적인 기업이 아니라, ID 그룹의 중국 지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텐센트가 중국에서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ID톡 덕이었다. ID톡의 엔진을 받아서 중국적 기능을 추가해 QQ로 만들어 보급했고, 곧 폭발적인 사용자를 얻었다.

억 단위의 압도적인 사용자 숫자를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 유통도 했는데, 그게 또 대박을 쳤다.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레전드 리그였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처음에는 중국 유통 허가인 판호가 나오지 않아서 문제를 겪었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1년 반 정도 늦긴 해도 나오긴 나왔다. 그리고서 폭발적인 반응이 터졌다.

로그인 서버가 다운될 만큼 엄청난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신규로 생성된 아이디 숫자만 1억 개를 가뿐하게 넘을 정도였다. 다만 그 아이디가 모두 유료 등록자는 아니었다. 중국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즐기는 이들은 대부분 PC방에서 즐기기 때문이다.

PC방을 위한 요금 체계는 따로 존재하기에, 이들을 그냥 단순 유료 등록자로 치환하는 건 무리였다.

이처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대박이었는데, 뒤이어 나온 스타크래프트나 레전드 리그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특히 레전드 리그는 중국인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드래곤볼, 마블, DC와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건너온 히어로들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레전드 리그 오리지널 히어로들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해당 나라의 대표적 캐릭터를 특전으로 등장시켰는데, 한국은 구미호, 중국은 황룡을 의인화한 캐릭터가 출시되어 엄청난 판매고를 이뤄내기도 했다.

레전드 리그는 풀 프라이스 게임이라서 게임을 구매하면 모든 캐릭터를 다 이용할 수 있다. 대신 특별 코스튬은 유료 상품이었다.

게임 내적으로는 성능 차이가 없다. 유료 코스튬을 구매했다고 해서 승패를 좌우하는 스텟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대신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완전히 달라진다. 기본 캐릭터도 나쁘지 않지만, 유료 코스튬은 눈에 확 들어온다.

레전드 리그의 특징이 캐릭터 중복 선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밴에 막히고, 선픽에서 누군가 먼저 선점해 버리지 않는 한은, 본인이 선택한 캐릭터는 본인 고유의 모습으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한정판이나 특정한 성과를 달성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상 등으로 리미트가 걸린 코스튬이 나오면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다.

남들과는 달라 보이고 싶은 이들에게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레전드 리그 개발을 전담하는 파이어 피스트 게임사에도 좋은 일이었다. 개발자에겐 100종이 넘는 히어로들의 전용 코스튬을 일일이 만들어야 하는 게 부담이지만, 수익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패키지 판매량은 결국 한계가 있지만, 코스튬 판매는 한계가 없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새로운 히어로를 출시할 때에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새로운 코스튬을 만드는 것에는 밸런스 걱정이 없었다.

텐센트에서는 ID 엔터테인먼트의 편중을 줄이기 위해서 경쟁 유통사의 게임들도 유통했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더욱이 하드웨어 파트로 넘어가면 완전히 ID 그룹 판이었다.

컴퓨터부터 스마트폰, TV까지. 텐센트의 영업망은 ID 그룹의 전자제품들로 가득했다. 정식 진출을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중국이 소화하는 물량은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중국도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 아이폰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투자를 하는 중이었다.

텐센트도 그런 회사 중 하나였다.

회귀 전과 달리 텐센트는 하드웨어 부분이 신설되었고, 매년 엄청난 자금을 R&D를 위해 투자 중이었다. 심지어 헬리오스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안드로이드 호환 스마트폰을 만들기도 했지만, 점유율은 그다지 높진 않았다.

짝퉁의 나라가 중국이었고,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가짜들이 시장에 범람했다. 그렇기에 중국 사람들은 오히려 진짜에 집착했다.

그런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었다. 차선책은 아이폰이었다. 진짜 구매력이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진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 혈안이었다.

덕분에 작년에 출시된 최신 안드로이드 S7 스마트폰은 중국에서만 벌써 300만 대 이상이 팔렸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마화텅 회장이 유재원의 부탁을 명령처럼 대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ID 그룹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현재에 와서 텐센트의 전체 매출 중 80% 이상이 ID 그룹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유통에서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유재원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내색하진 않았다. 중국의 성과를 과시하는 것보다는 일부러 존재감을 축소하는 게 ID 그룹의 기조였으니 말이다.

“P마켓 아시죠?”

-그럼요, 저번 블랙프라이데이 세일 뉴스는 중국에서도 큰 화제였습니다.

“P마켓의 중국 진출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예? 그러면 이제 직접 진출하시는 겁니까?

마화텅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텐센트에 유재원의 투자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룹 차원이 아니라 유재원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렇기에 ID 그룹의 서비스와 상품이 텐센트라는 창구를 통해 중국에 유통되었지만, 기술이 이전되는 일은 없었다.

직접 진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국은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해서 외국계 기업의 중국 진출 시, 합작 법인 설립을 권고하고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독자 진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토지의 임대부터 각종 세제 혜택 등등의 차이가 심했다. 게다가 중국에는 꽌시라는 특유의 내 식구 챙기기 문화가 존재했다.

현재에도 강하게 작용 중인 꽌시는, 웬만한 법률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독자 진출을 선택하는 기업이 없을 뿐이었다.

“네, P마켓으로 중국 진출을 시작해 보려고요.”

-소식이 알려지면 중국 전체가 떠들썩해지겠군요! 회장님의 눈에 들기 위해 다들 난리가 나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마화텅 회장은 노련하게 본인을 어필했다.

“하하, 마화텅 회장님까지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첫 직접 진출인데, 텐센트가 아니면 누구랑 합작 회사를 만들겠어요.”

화끈한 유재원은 마화텅 회장을 애태우지도 않았다.

-유 회장님!

마화텅은 그저 감격했다.

투자의 기본은 분산 투자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문구가 되었을 정도다.

유재원도 이를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중국만큼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은 사업체 여러 개로 분산하기보다는, 차라리 원래 잘 크고 있는 녀석 하나를 더욱 밀어주는 게 낫다.

더구나 중국은 이제 후진타오의 시대가 끝나고, 조만간 시진핑 시대가 열릴 예정이었다. 시진핑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텐센트는 지금보다 더 커질 필요가 있었다. 시진핑도 쉽게 다루지 못할 만큼 커지는 것이, 중국에서 ID 그룹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수였다.

“텐센트의 유통망도 이제 포화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P마켓의 최첨단 물류 시스템은 분명 텐센트와도 시너지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 텐센트뿐이겠는가.

중국은 거대한 인구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물동량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해외 물류뿐만이 아니라, 중국 내부에서 소화되는 물류도 엄청난 규모였다. 이 엄청난 규모를 지금까지는 사람을 투입해 감당해 왔다.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이야기다. 하지만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고 인건비도 저렴하다 못해 거의 공짜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곧 한계에 봉착한다. 투입된 인력의 숫자와 업무의 효율은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시범적으로 쓰촨성에 물류 시스템을 도입해 볼까 하는데요.”

-쓰촨성이라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마화텅 회장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맞아요. 우리 인공지능 골드가 대지진이 터질 것으로 예측했던 지역이죠.”

유재원도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마화텅은 유재원을 대신해서 중국의 실무를 책임질 사람이었기에, 괜히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서 유재원의 목적에 완벽히 부합할 수 있게 움직이게 하는 게 훨씬 나았다.

“골드의 예측이 틀린다면 저만 망신당하고 마는 거죠. 하지만 정확한 예측이라면? 지금이라도 대비하고 있는 게 나을 거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겸사겸사 P마켓의 테스트 필드 역할도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일단은 가건물 수준으로라도 창고를 지은 다음, 긴급 상황 시 필요한 물품을 재고로 쌓아 두세요. 지진이 일어나면 요긴하게 쓰고, 아니면 P마켓에서 헐값으로라도 팔면 되는 거니까요. 아, 창고는 진앙으로 예측된 원촨에서 멀리 지어주세요. 청두 같은 대도시도 좀 피하고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오늘 실행하겠습니다.

마화텅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유재원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바로 이해했다. 유재원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당장 본인이 할 일을 시작했다.

며칠 후.

-P마켓, 텐센트와 손잡고 중국 진출 타진.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제법 큼지막한 기사가 떴다.

유재원과 마화텅의 강점 중 하나가 추진력이었다.

마화텅 회장과의 통화 직후, 곧장 법인 설립 절차에 들어갔다. 쓰촨성의 여러 곳에 부지가 장기 임대되었고, 지반 공사 후, 바로 거대한 창고들이 들어섰다. 동시에 긴급 재난 상황 시 필요한 물건들이 대거 매입되어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ID 그룹의 행보와 인공지능 골드의 쓰촨성 대지진 예측을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작년 초에 있었던 대지진에 대한 이슈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국 정부에게 답변을 구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ID 그룹이 이렇게 나서는데, 중국의 정부나 공산당 차원에서 조치는 없냐는 물음이었다.

이번에도 중국 정부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현재 중국 정부의 모든 역량은 개막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미미한 지진 예측 따위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작품후기]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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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2008년 5월 11일.

“좋군. 수고했어.”

비서관의 보고서에 후진타오 주석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눈에 베이징의 번화가에 걸린 거대한 플래카드가 들어왔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베이징 올림픽까지 D-90!

숫자는 날마다 1씩 차감되고 있다. 얼마전 D-100일 행사를 시끌벅적하게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90이었다.

후진타오 주석 입장에서는 할 일이 많은데, 하루하루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무리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꾸준히 받고 있다는 점이다.

주경기장부터 수영 경기장, 구기 종목 경기장 등등.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새롭게 지어 올리는 초대형 경기장의 공사 일정부터, 선수단의 상황이나 자원봉사단의 준비 상태 등등.

늦어도 7월 말까지는 모든 경기장들이 준비될 거라고 했다.

이처럼 현재의 후진타오 주석에게 주어진 현안은 오직 2008 베이징 올림픽뿐인 거처럼 보였다.

올림픽의 성공이 후진타오 주석의 노후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순조롭다는 보고서를 올리기 위해 취해진 무리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일부의 조치는 선진국이라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일어날 것도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길거리 가득했던 판자촌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도저히 돈이 벌리지 않아 도시로 올라온 농부들, 일명 농민공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게 보통이었다.

적당한 숙소를 빌릴 돈도 없어서 판자를 얼기설기 모아다 지은 집에 살았고, 그런 이들이 모인 도시의 구석진 곳에는 거대한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베이징은 그런 농민공의 숫자가 제일 많은 도시였다. 하지만 도시에 와서도 사람 대접은 받을 수가 없었다.

근본 원인은 소득 수준에서 도시와 농촌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탓이다. 베이징과 상하이 등의 개발이 잘 된 도시 사람들의 한 달 평균 수입은 한국 돈으로 50만 원 정도.

한국의 소득과 비교하면 여전히 저렴한 수치지만, 농민공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벌어진다. 농촌에 있는 농민들의 한 달 평균 소득은 10만 원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10만 원이라는 수치도 평균값이지, 현대화된 대규모 농장 경영으로 큰돈을 버는 일부 성공한 상위 1%를 제외하면, 실제 농민의 소득 수준은 더더욱 낮아진다.

CIA 등등, 믿을 수 있는 정보조직에서 파악한 실제 중국 농민들의 소득 수준은 2007년 기준 월 3~6만 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아무리 물가가 저렴한 중국이라도 한 달에 3만 원을 벌어서는 사람답게 살 수가 없다.

그렇기에 도시로 올라와 일용직 노동자라도 하려는 것인데, 공사판에서는 그나마 10~20만 원은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베이징 올림픽의 준비로 베이징에 수많은 공사판이 열리면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기에 농민공들은 성공에 대한 부푼 꿈을 꾸고 상경했다.

안타까운 건 부푼 꿈을 꾸며 상경한 대다수 농민공들의 현실은 최악이라는 점이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득이 늘어나긴 했는데, 도시 생활비도 그만큼 높아진 탓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철저할 정도로 도시와 농촌을 분리한 호적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농민공의 발목을 잡았다.

호적에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었고, 출생지가 다르면 의무교육 등이 제공되지 않았다. 농민공들이 낳은 자식은 베이징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농민공 부모는 도시로 올라가고, 자식들은 고향에 남아 학교에 다니며, 명절 때나 되어야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와 만나는 것이 중국에서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명절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인파는 한국에도 매번 뉴스로 보도가 되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산업화 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처럼 극도로 차별적이진 않았다. 중국이 더욱 문제인 것은 올림픽을 앞두고 농민공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농민공들의 모습을 외국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서 국가 차원에서 빈민촌 철거를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재개발이 되지 않은 베이징의 구시가지는 아예 거대한 임시 벽을 세워서 가려 버렸다.

모든 구시가지를 그렇게 조치한 건 아니지만, 공항과 연결된 도로 근처의 지역이나 통행량이 많은 지역의 구시가지는 예외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중국에게 2008 베이징 올림픽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국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 세계를 호령하는 경제 대국으로 일어섰다는 상징 말이다.

찬란히 빛나야 할 베이징 올림픽에 농민공과 구시가지 같은 허름한 모습은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후진타오 주석과 중국 공산당 수뇌부의 일치된 마음이었다.

“쓰촨성은?”

창밖을 보던 후진타오 주석이 쓰촨을 언급했다.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비서관도 바로 대답했다.

사실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작년 초 유재원이 쓰촨성 대지진을 예측할 때부터 긴급 보고를 받았다. 다만 보고를 받고는 지금까지 무시 전략을 펼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후진타오 주석이지만, 인공지능 골드가 예측한 대지진의 날짜가 바로 내일이었다.

이미 전 세계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과연 지진이 올지, 오지 않을지 갑론을박하는 네티즌들로 커뮤니티 사이트가 버벅거릴 정도였다.

2002년부터 폭풍 성장한 베팅 사이트에는 대지진이 올지, 오지 않을지 베팅을 하는 상품이 최고 인기에 떠올랐을 정도였다.

중국에서도 쓰촨성 이야기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외국만큼은 아니었다.

중국이 인터넷이란 기술을 도입하면서, 그와 거의 동시에 개발한 것이 국가 단위의 필터링 시스템이었다.

일명 황금방패라는 것으로, 중국 공산당이 보기에 불편한 것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걸러주는 기능을 했다.

천안문 사태와 같은 게 대표적인 키워드였다.

중국 포털 사이트나 검색 엔진에서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될 단어였다. 천안문 사태를 필터링해 주느냐, 하지 않느냐는 인터넷 검색 엔진의 중국 진출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넥스트컴의 기본 검색 엔진인 구글이 중국서는 서비스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넥스트컴 중국어판이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중국 유통 제품의 기본 설정값은 구글이 아닌 텐센트 포털이었다.

문제는 중국 최대의 검색 엔진은 바이두였기에,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개통한 중국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기본 검색 엔진을 바이두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기본 설정값이라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텐센트지만, 검색 엔진 분야는 주력 사업이 아니었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P마켓 물류창고에 많은 사람들이 투입돼 고박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박?”

“배에서 화물을 실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결박하는 것 말입니다. 여기에 중장비와 험지 돌파가 가능한 특수 수송 트럭들도 수백 대가 집결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지진이 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로군. 마 회장은 아직도 현장에 있나?”

“예, 텐센트의 마화텅 회장이 쓰촨성 P마켓 물류창고 근처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상주하고 있습니다.”

마화텅 회장은 중국판 P마켓을 위해 그야말로 사활을 걸었다.

게임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오래전부터 그의 뇌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방송 콘텐츠부터, 영화 유통까지 다양한 방면으로 사업의 영역을 확장했었다. 그러다가 작년 P마켓이 터트린 블랙프라이데이 쇼크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그렇게 군침만 삼키다가 1월 초에 유재원의 연락을 받고 마화텅은 텐센트 창업 초기처럼 발로 뛰기 시작했다.

쓰촨성 총서기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판 P마켓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유재원이 말했던 긴급 구호 물품의 주문도 서둘렀다.

돈은 유재원과 마화텅 회장이 반반씩 부담했다.

P마켓 차이나 법인도 ID 그룹과 텐센트의 합작이 아니라, 유재원과 마화텅 두 사람의 합작으로 만드는 법인이었기 때문이다.

회삿돈은 1원 하나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 모두 부담은 전혀 없었다.

유재원은 ID 일렉트로닉스의 한국 상장 이후 현금이 쌓인 상태였고, 마화텅 회장 역시 중국서 코 묻은 돈을 갈퀴로 거둬들이는 상태였다.

물류창고 구축에 필요한 기술은 ID 테크놀로지와 ID 하이테크 등에서 제값 주고 사 오는 방식이었고, P마켓이라는 이름은 P마켓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고 빌려오는 식으로 중국 법인을 만들었다.

중국에서의 사업이란 한 치도 예측할 수 없기에, 언제든 백지화할 수 있도록 완전히 독립적인 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그렇지만 외적으로 보자면 P마켓이 중국 진출을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릴 경우 쓰촨성을 발판 삼아서 중국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마화텅 회장은 날이 풀리는 3월부터는 아예 쓰촨성의 물류창고 공사장에 상주한 상태였고, 덕분에 물류창고 구축도 남다른 속도로 빠르게 이뤄졌다.

후진타오 주석이나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서는 신경 쓰이는 그림이었다.

“공청단 쪽에서는 움직임이 없나?”

심지어 후진타오 주석은 여전히 대지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다. 그것도 본인의 출신 계파의 움직임을 살피는 데 열심이었다. 공청단은 후진타오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파탄 지경이었다.

공청단의 새로운 핵인 리커창이 후진타오와 각을 세우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 최고영도인이 될 부푼 꿈을 꾸고 있던 리커창이었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미국 해킹 사태와 청나라 채권 상환 등의 굵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해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야 할 장쩌민의 영향력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임 인선까지 관여했다.

결국, 공청단이나 상하이방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두루두루 인맥이 있고 소탈하고 원만한 성격의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낙점이 되었다.

그러자 리커창의 불만이 폭발하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리커창 입장에선 당연했다. 차기 지도자는 본인이 될 줄 알았는데, 정치적 협잡에 의해 듣도 보도 못한 시진핑이 낙점되었으니 말이다.

“음, 그것이……. 어제 쓰촨성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후진타오 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측이 틀리길 바라는 수밖에 없군.”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후진타오로서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너무도 헛된 것이었다.

2008년 5월 12일.

전 세계의 시선이 쓰촨성에 집중되는 날이었다. 과거 삼국지에서 촉한 세력의 주요 무대였고, 요리와 관광으로 유명한 쓰촨성은 인구 8천만이 집중된 중국 내륙의 요충지였다. 그중에서도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21세기에 들어 급속도로 성장한 도시였다.

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장강 상류로 인해 고대 때부터 농업으로 번성했던 청두는 현대에 이르러 서부 대개발 계획의 핵심 도시로서 전체 인구만 1천만에 달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오늘의 청두도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지진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지만, 청두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과 청두 당국이 의도적으로 대지진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청두의 당사자들 역시, 담담한 얼굴이었다.

날이 밝아서 점심때가 다 지날 때까지 아무런 기미도 없었기에, 별일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잔잔했던 일상이 깨진 건 오후 2시 28분이 막 되던 순간이었다.

쓰촨성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 설치된 지진계들이 미친 듯한 떨림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지진이었다.

진앙은 청두시로부터 북서쪽으로 100km쯤 떨어져 있던 쓰촨성 원촨이었다.

원촨에서 시작된 진동은 곧이어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단순한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땅이 솟아오르고 꺼지면서 파도가 치는 것처럼 멀쩡하던 땅이 일어났다. 그 높이가 무려 5m에 이르렀다.

다른 지역에서는 산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산 아래에 있던 작은 농촌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그것이 대지진의 시작이었다.

땅속에서 핵폭탄 수천 개가 동시에 터진 것 같은 엄청난 파괴력이 곧이어 인구 1천만의 대도시 청두를 향해 직격했다.

청두는 진앙으로부터의 거리가 100km 정도로 떨어진 덕에 파괴력이 직접 미치진 못해 다행이었다. 거리가 있는 탓에 리히터 규모 8.0에 달하는 파괴력이 대도시를 직격하진 못하고, 많이 상쇄되었다.

하지만 청두가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땅을 타고 전해진 지진의 파괴력은 아찔할 정도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도로가 터지고, 건물이 쓰러졌다. 심지어 15층, 20층에 달하던 고층 아파트까지도 쓰러졌다. 이런 와중에 4~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도 벽이 갈라지거나 천장이 내려앉아 버리는 등의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렇게 쓰러진 건물들의 잔해였다.

원래 설계대로라면 굵직한 철근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공간에 썩어 말라비틀어진 대나무들이 보였다.

중국의 고질적 병폐인 부실 시공이었다.

제대로 시공된 건물이라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지진 앞에선 무력하다. 하물며 철근 대신 대나무를 넣어 만든 지어진 건물이 멀쩡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런 건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썩은 대나무가 훤히 보이는 건물의 잔해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심하게 썩었던 중국 그 자체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717회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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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지진이다!

-오, 마이, 갓.

-속지마! 본인이 흔드는 거야!

-위에 녀석, 눈이 없냐? 건물이 쓰러지고 있잖아!

-저거, 저거, 세트장 아니지?

쓰촨성에서 지진이 터진 순간, 그 모습을 전 세계 수십 만의 사람들이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일부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를 보며 채팅까지도 하는 수준이었다. 2008년이었음에도 유재원이 일으킨 기술 가속으로 인해서 인터넷 인프라의 수준은 2010년 중반 수준을 달성한 덕이다.

스마트폰의 사용 인구도 그때만큼 증가한 상태였기에, 쓰촨성에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현장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남다른 활약을 펼친 이들은 지금 인터넷 방송을 켠 사람처럼 외국서 기꺼이 쓰촨성까지 날아온 이들이었다.

파워블로거들 그리고 SNS에서 수십, 수백만의 팔로워를 거느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유재원이 가속화한 인터넷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한 사람이었다. 과거에 인정을 받았던 직업을 버리고, 오직 인터넷에 올인해서 성공 했다.

이들은 인터넷에 글과 동영상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전통의 직업군을 초월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잡아끈다거나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것에 성공한다면 인터넷만으로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다.

그 바탕에는 ID 그룹의 올인원 광고 플랫폼 애드센스가 있었다.

걸어 놓기만 하면, 방문자들을 인공지능이 분석해서 가장 적합한 광고를 걸어주고, 월말이 되면 자동으로 정산까지 해 주는 애드센스는 인터넷 광고의 혁명이었다.

덕분에 파워블로거의 운영이나 톡톡의 운영만으로 연간 수억, 수십억의 수입을 올리는 거대한 인플루언서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감이 좋은 사람들이 쓰촨성 대지진이라는 예정된 사태를 그냥 놓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지진이 일어나면 그것 자체로 놀라운 일이고, 설사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유재원을 놀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에게는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본인이 제일 위험하다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12일 새벽부터 사방이 뻥 뚫린 평지에 나와서 지진이 오나, 오지 않나 기다리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오후가 다 지날 때까지만 해도 유재원이 틀렸나 싶었다. 그런 쪽으로 게시물을 쓰거나, SNS에 청두는 멀쩡하다는 식의 영상과 사진을 올렸던 이들은 오후 2시 지진이 터지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지진의 규모는 이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인공지능 골드의 예측은 리히터 규모 M8.0이었고, 실제로 터져서 지진계에 찍힌 지진 규모도 M8.0으로 동일했다.

심지어 땅이 비틀리고 깨져 나가는 파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최대 진도는 XI급이었고, 이는 역대 지진 기록에도 얼마 없는 대지진이었다. 그 현장을 직접 찾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죽을 짓을 했다는 걸 뒤늦게나마 후회했다.

-헤이, 잭! 괜찮아?

-이봐, 살아 있으면 카메라 좀 제대로 들어 보라고!

하지만 단순한 수치상의 M8.0과 실제 사람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잭이라는 유튜버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ID 그룹과 애플 사이의 협약으로 스마트폰계의 양대 진영 모두에 유튜브 앱이 탑재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유튜브 앱의 수준도 한 차원 더 높아졌다. 2010년 중반쯤에서나 완성될 라이브 방송 기능이 대표적이었다. 그렇게 앱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유튜브는 프로모션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었다.

유재원의 인수로 자본의 규모가 달라진 유튜브는 광고 폭탄을 만들어 전 세계를 향해 쏟아냈다. 악명 높았던 강제 광고 시스템도 내리고, 5초 이후에는 스킵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여기에 유튜버를 양성하는 정책을 펼쳤다.

10만 이상의 구독자를 모은 이들에게는 애드센스 분배 비율의 상향 조치가 자동으로 주어졌고, 유튜브 본사 차원에서 각종 프로모션 혜택도 있었다.

신기술을 빠르게 이해하면서 큰돈을 벌었던 이들은 당연히 유튜브의 잠재력도 알아보았고, 일부는 쓰촨성 현지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What the f…….”

유튜브 아이디 ‘멍청한 잭’, 본명은 잭 다니엘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라이브 방송 중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진이 일으킨 흔들거림 때문에 어지러웠고 속은 완전히 뒤집어진 것처럼 메슥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천생 유튜버인 것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튜버가 되기 전의 잭 다니엘은 고졸이었고, 학교에서 뭔가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라서 불과 2년 전만 해도 많고 많았던 백수 한 명에 불과했었다. 그러다가 부모님을 졸라 겨우 얻은 스마트폰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처음엔 보통의 유저들처럼 게임과 인터넷에 빠져들었던 잭은 우연찮게 유튜브를 알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당시엔 워낙 수준 낮은 영상들이 가득했고, 그런 영상이 또 조회 수 탑을 찍으면서 잘나가고 있던 때였다.

그중에서도 짓궂은 장난을 친다거나, 몰래카메라를 연출하는 것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잭은 그걸 보고 저런 멍청한 짓들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곧바로 멍청한 잭 채널을 만들었고,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그랬지만, 업로드된 영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차 반응이 왔다.

2년이 지난 지금은?

구독자 숫자가 100만이 넘는 초대형 유튜버로 성장했다. 구독자가 10만만 넘어도 유튜브 본사로부터 애드센스 정식 계약을 받고, 특별하게 만들어진 유튜브 버튼도 선물 받았다.

잭 다니엘의 유튜브 버튼은 무려 황금색이었다.

소득 수준도 확 달라졌다.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던 탓에 마이너스 상태였던 잭의 계좌에는 이제는 수백만 달러가 쌓여 있었다.

그런 잭에게 인공지능 골드의 쓰촨성 대지진 예측은 새로운 기회로 보였고, 때가 되자 즉각 행동에 옮겼다.

타이밍 좋게 라이브 방송 기능까지 생겨서 지진이 일어난 순간을 생방송으로 전 세계에 방송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심심했던 방송은 오후 2시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잭은 순간적으로 저승 구경도 했다.

리히터 규모 M8.0이란 지진은 우습게 볼 수 있는 재난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평지에서도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혹시 몰라 고층 건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잭이었지만, 이러다 땅이 갈라져 죽는구나 싶었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그런 잭은 본인의 스마트폰을 확인하고서 또 놀랐다.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을 때 시청자 숫자는 10의 단위였다. 구독자가 100만이 넘은 잭이었지만, 라이브 방송이라는 건 유튜브 이용자에게도 낯선 기능이었다.

라이브 방송을 하는 사람도 어떻게 찍고, 어떻게 방송을 해야 할지 몰랐고,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한국 네티즌들이라면 인터넷 방송에 대해 조금은 익숙했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기능이었다.

그런 라이브 방송이었는데, 시청자의 숫자가 1천 단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냐?

-잭, 죽은 거 아니지?

-방송, 왜 이리 끊겨?

시청자 숫자가 넘쳐나자 채팅도 폭발했다. 1초에 수십 개의 채팅이 쏟아져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도박은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어어? 네네, 저는 괜찮습니다. 지진도 그친 거 같으니 좀 더 접근해 보겠습니다.”

시청자 숫자에 고무된 잭은 조금 전까지도 지진의 충격에 벌벌 떨었던 것을 떨치고 분연히 일어났다.

안타까운 건 통신 상태가 급속도로 떨어져서, 수신율을 보여주는 안테나가 2개도 간당간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화질을 낮춰도 깍두기가 가득했고, 영상도 제대로 송신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텍스트인 채팅은 원활했다.

“세상에. 저거, 대나무 맞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진의 참상과 중국의 민낯을 전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잭이 터트린 대박은 도미노가 쓰러진 것처럼 쓰러져 있는 청두시 외곽의 아파트 단지였다.

쓰러진 아파트 건물은 비교적 멀쩡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쓰러지며 드러난 기초 공사는 더 큰 놀라움을 자아냈다. 도시 중심부의 건물처럼 예외 없이 철근 대신 대나무가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잭이 찍은 아파트 단지는 건축 중이었기에 사람들이 입주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쓰러져 있는 아파트가 우습게 보일 정도였다.

-아! 이제 좀 잘 보인다.

-푸하하! 저게 뭐여!

-세상에. 대륙의 기상이라고 인터넷에서만 들었지, 리얼이었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안테나가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4개까지 늘어났다.

잭은 몰랐지만, 유재원이 일찌감치 준비한 이동용 중계기가 작동하면서 무선 인터넷망이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질도 복구되었고, 중국의 실상도 제대로 전파되었다.

도시 중심부로 접근할수록 대지진의 참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나무로 지어 올리다 쓰러진 아파트는 다들 웃을 수 있었지만, 도시 안으로 접근할수록 웃음기가 사라졌다.

길거리에 있다가 고층 건물의 창문이나 외장재가 깨지면서 쏟아진 파편에 휩쓸려 피가 철철 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외벽이 무너지면서 깔린 사람들도 많았다. 아예 건물이 붕괴되어 휩쓸린 사람도 많았다.

잭의 말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젠장.”

그러다가 초등학교가 반쯤 붕괴된 곳에서는 발걸음을 멈춰 버렸다. 멍청한 잭이라 불렸던 그였지만 대규모 재해를 그저 호기심과 돈을 위해 비춰 주는 건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는 자각이 불현듯 일어난 것이다.

결국 잭은 두 팔 걷어붙이고 잔해를 파헤쳐 아이들을 끌어 올리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긴급 속보, 쓰촨성에 대지진 발생!

-리히터 규모 M8.0으로 시작되어 5분간 지속.

-최대 규모는 M8.2까지 상승.

-쓰촨성 성도 청두, 도시 기능 상실.

전 세계의 모든 미디어가 일시 정지되었고, 곧장 속보 체제로 전환되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재빨랐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통의 유선 통신망은 파괴되어 통신 두절이 일어났기에 보통은 현지의 소식을 접하는 데 커다란 시차가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무선 인터넷은 살아 있었기에, 참사의 현장이 고화질의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거의 동 시간대에 보내졌다.

어째서인지 중국이 자랑하는 황금 방패의 필터링도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황금방패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쓰촨성의 참사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인터넷 채널들은 모두 막혀야 했지만, 대부분의 방송이 정상적으로 송출되었다.

일부 방송이 중단된 채널도 방송을 진행했던 이들의 자체적인 중단 때문이지, 외부의 강압 때문은 아니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새로운 소식이 너무도 느리게 전달되는 레거시 미디어 대신,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유튜브를 찾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비슷한 자료 화면을 주야장천 재탕하는데, 유튜브에서는 실시간으로 긴급한 소식들이 전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튜브 측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일찌감치 예측하고 있었기에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서비스가 마비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유 회장님, 중국 정부에서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 대해 맹렬히 비난 중입니다.

“예상한 바 아닌가요?”

유재원에게 지분을 넘기고 유튜브의 기술이사로 자리를 옮긴 자베드의 연락도 그런 예측 범위 안에 있던 일이었다.

-네, 그런데 대규모 DDOS도 이어지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타깃은 당연히 쓰촨성 현지에서 방송 중인 유튜버들이고요.

다만 DDOS는 예상 밖이었다.

과거 9‧11 사태 때 큰 곤욕을 치렀던 중국이었다. 이후 중국발 해킹은 좀 줄어드나 싶더니, 최근에는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해킹 시도가 모두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서비스 장애를 초래할 만큼 위험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유재원이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DDOS만큼 확실한 공격법도 없지만, 그만큼 DDOS를 막는 기법도 크게 발전한 덕이다.

“네, 외부에서 뭐라고 하던 우리는 우리 일을 하면 됩니다.”

-예, 회장님.

자베드의 당당한 대답이었다.

비단 유튜브에만 해당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유튜브만큼이나 유재원이 신경을 쓰는 것은 바로 P마켓 차이나였다.

지진이 터진 직후부터 활동을 시작한 P마켓 차이나의 인력들은 재난 현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동형 중계기로 망가진 통신망을 복구하는 것부터, 중장비를 동원해 잔해를 치우고 생존자를 구조하는 일까지. 중국 정부가 할 일을 P마켓 차이나의 인력들이 전력을 다해 수행 중이었다. 동시에 그 헌신적인 활동은 유튜브는 물론 전 세계의 미디어를 통해서 지구촌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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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원고료 쿠폰, 후원 쿠폰도 완전 감사합니다!!

다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오늘 연차 쓰셔서 내일까지 쉬는 독자님은 위너네요!

저처럼 월요일 출근하셨다면 월요병 때문에 고생하셨겠지요?

다행히 오늘은 어린이날!

오늘 쉬면 추석까지는 공휴일은 없다는 게 절망이지만, 쉴 땐 열심히 쉬어봅시다~!

그럼, 수요일 자정에 돌아오겠습니다.

ps: 둠 이터널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득하니 플레이를 할 수가 없더라고요. 강강강쾅쾅쾅으로 몰아쳐서 스테이지 하나 넘길 때마다 정신적 피로가 확 몰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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