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권 19화
-콜 옵션 판매처가 더 늘어났습 니다.
투자 시장이 무서운 것이, 잘 팔 리는 상품이 나왔다면 비슷한 상품 들도 우르르 출시된다는 점이었다.
공장을 돌려야 상품이 나오는 굴 뚝 산업과 달리, 투자 시장은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트레이딩 시스 템을 조작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무 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안전장치라고 있는 건 겨우 발행 된 상품의 규모에 따라 책정되는 증거금을 납입하는 것인데, 그 정도는 웬만한 투자사라면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연방준비위원회가 금리를 인하했 으니, 집값 상승은 불 보듯 뻔했고, 그러면 서브프라임 시장은 더욱 확 대될 것이기에 콜 옵션에 대한 기 대 수익률도 폭등했다. 그러니 다 들 겁도 없이 콜 옵션이 나오자마 자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것이다.
-음, 풋 옵션도 거래창에 올라왔 습니다. 호가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풋 옵션까지도 생겨났다.
인기 폭발인 콜 옵션과 달리 파 는 사람이 훨씬 많은 풋 옵션은 빠 르게 가격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풋 옵 션의 호가창은 ID 인베스트먼트를 비웃는 듯 보였다.
-고객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투자금 상환을 요 구하는 금액도 평소보다 많습니다.
그에 따라 ID 인베스트먼트에 투 자금을 맡긴 고객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남들은 다 상승에 배팅 중 이었는데, ID 인베스트먼트만 하락에 배팅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 번 투자로 수익률을 까먹을 것 같 아 걱정이 되는 사람들은 투자금을 빼는 것이었다.
풋 옵션 매수에 쓰인 자금의 70%가 유재원의 개인 돈이었음에 도 이렇게나 민감했다.
"상환 요청은 당연히 들어 드려 야죠. 그렇다고 콜 옵션 매수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우리의 판단을 수 정해야 할 만큼 상황이 변한 건 아 니니까요."
-알겠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모니터 화면 속 빈센트 사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 다.
빈센트 사장이 보기에도 이 상황 은 유재원이나 ID 인베스트먼트의 오판이 아니라 투자 시장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흠."
빈센트 사장과의 ID톡 화상 미팅을 종료한 유재원은 짧게 생각에 잠겼다.
미국의 경기가 과열 국면에 접어 든 건 확실하고, 그에 따라 전 세 계 경제도 활황이었다. 세계 최대 의 소비 시장인 미국이 뒷일은 신 경 안 쓰고 돈을 펑펑 쓰고 있으 니, 미국에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팔고 있는 나라들도 덩달아 돈 잔 치가 열리는 중이었다.
"이거 까딱 잘못하면 회귀 전보 다 후폭풍이 더 클 수도 있겠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속담을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리먼브라더스에서도 실현 가능성 이 없다는 걸 보고 출시하는 콜 옵 션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 는 작금의 상황은 분명 잘못된 것 이었다.
유재원은 무턱대고 콜 옵션을 사 는 사람들보다, 옆에서 부추기는 매스컴들이 더 싫었다.
구글에다가 경제 관련 기사를 검 색해 보면 별의별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겉으로는 풋 옵션 대량 매 수를 한 ID 인베스트먼트나 유재원을 우려하면서도, 속으로는 비웃는 듯한 기사들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이런 기사보다 더 많이 보이는 건 주택 시장은 탄탄하다며 값이 더 오르기 전에 지금이 집을 사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 기사였다.
아니면 주택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며 비판하는 문구가 있지만, 기사를 뜯어 보면 매년 수십 퍼센 트가 상승했다면서 그래프는 물론 각종 지표를 동원해서 투자를 부추 기는 기사였다.
"어떻게 하면 이놈들에게 한 방먹여주지?"
지금 시장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년 10월까지 버티는 것도 용해 보였다.
앨 고어 행정부에 강력하게 경고 하고, 앨 고어 대통령에게도 개인 찬스를 동원해 연락을 하더라도 피 해의 규모를 조금 줄이는 정도에 그칠 것 같다.
유재원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ID 그룹이라면 과거 한국 의 외환 위기 정도는 거뜬히 막아 낼 수 있다. 아니, 그룹의 힘을 모두 동원하지 않고 유재원 개인의 재산만으로 그게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위기는 어림도 없다.
매일같이 수백억 달러가 서브프 라임 투자, 혹은 이와 연동된 파생 상품 투자로 유입되는 중이고, 그 렇게 누적된 자금의 크기만 '조' 단 위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한국 원 화가 아니라 미국 달러 기준으로 '조' 단위였다.
이들은 그때가 되면 틀림없이 180도 모습을 바꾸고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쏟아낼 것이 분명했 다.
"일단 뉴스 페이지부터 개편해야 겠군."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는 일간 조회 수가 1억은 거뜬하게 넘는 규 모를 자랑했다. 북미 지역의 사람 들과 북미 지역에 관심이 있는 이 들이 가장 간편하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사이트였으니 말이다.
"히스토리 기능을 넣어야겠다."
과거의 기록을 모조리 저장하는 아카하이브 기능은 진작 가동 중이었다. 유재원이 말하는 히스토리 기능이란 기자가 동일 사안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도를 했는지 사이드 화면으로 띄워 주는 것이었다.
시류에 따라 갈대처럼 달라지는 기자들의 논조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면, 나중에 창궐할 가짜 뉴스 사태에도 효율적으로 대 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뉴스 페이지 에 히스토리 기능을 넣는 것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보다 직접적인 조 치가 필요했다.
한참 고민한 유재원은 오랜만에 눈을 감고 기억의 궁전에 들어갔다 가 나왔다.
"애덤 맥케이."
기억의 궁전에서 가지고 나온 것 은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애덤 맥케이 씨와 식사 자리 약 속을 잡아 주세요."
-영화감독인 애덤 맥케이 말씀이 십니까?
"네!"
유재원은 바로 김대석 비서실장에게 미팅 약속을 잡아 달라고 지 시했다. 과거 SNL의 작가였고, 지 금은 SNL을 함께했던 동료인 윌 페럴과 합심해서 여러 편의 코미디 영화를 제작하며 흥행에도 성공했 다.
덕분에 김대석 비서실장은 갑자 기 웬 코미디 영화감독이냐 싶으면 서도, 유재원의 지시였기에 충실히 이행했다.
유재원이 애덤 맥케이의 이름을 기억의 궁전에서 가져온 이유는, 이 사람이 바로 화제의 영화 빅쇼트의 감독이자 작가였기 때문이다.
빅쇼트는 공매도 혹은 선물매도 라는 뜻으로, 영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시작부터 끝을 담아 내며 복잡한 내용을 알기 쉽게 전 달했다.
당시에는 2015년쯤에 발표했으 니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정도 의 의미였다.
만약 빅쇼트라는 영화가 2006년 초에 나와서 예언서가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 아니 겠는가.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 서가 아닙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 다는 착각 때문이죠. 월 스트리트 의 매니저들은 서브프라임을 기초 자산으로 삼은 각종 파생 상품이 자신들의 통제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오! 과연 그렇군요."
유재원의 말에 검은색으로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검은 머리칼의 젊은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놓아 너 무도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포 크로 푹 찍어 크게 한 입 하려다가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뭔가 웃기는 포인트였다.
맞장구를 치는 이 사람의 이름은 애덤 맥케이.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코미디 영 화를 구상하고 있다가, 유재원이 정중히 저녁 식사에 초청한다는 ID 그룹 비서실의 연락을 받고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허락한 사람이었 다.
SNL의 작가였고, 1년하고도 6개 월 전쯤에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앵커맨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 라 매우 좋았다.
1970년대의 방송가를 배경으로 새로운 형식의 뉴스를 보도하는 앵 커에 포커스를 맞춘 코미디 영화였 는데, 전 세계적으로 9,600만 달러 의 흥행탑을 쌓았다. 평론가들로부 터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서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 시에 잡았다.
"아, 드시면서 들으셔도 됩니다."
육즙이 줄줄 흘러나오는 스테이 크를 쿡 찌른 포크를 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애덤 맥케이 감독의 모습 에 유재원이 한 마디 보탰다.
그제야 입에 고기를 넣은 애덤 맥케이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피 어올랐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없어지는 소고기는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애덤 맥케이 감독도 처음이었다. 다만 애덤 맥케이 감독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만족감이 오래가진 못했다.
"저기, 그런데 회장님. 월 스트리 트의 비화는 재미있긴 한데, 이 이 야기를 왜 저에게 하시는지 모르겠 습니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유재원의 저 택에 방문한 것도 홍이로웠고, 황 금빛으로 물드는 샌프란시스코만이 한쪽 벽에 걸린 식당의 인테리어도 놀라웠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재 원이란 인물도 본인에게 너무나 친 절했고, 유재원이 직접 들려주는 월 스트리트의 서브프라임 이야기 도 재미있었다.
다만 코미디 영화감독에 불과한 본인에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차, 제가 마음이 너무 앞섰네 요. 다름이 아니라 애덤 맥케이 감 독님이 차기작을 준비하고 계시다 는 소문을 들었어요."
"맞습니다!"
제스처가 큰 애덤 맥케이는 유재 원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앵커맨의 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에 오른 애덤 맥케이 는 슬슬 다음 영화를 준비하는 중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 영화는 완 전히 새로운 정극에 도전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극 말입니까?"
유재원의 말에 표정 많던 애덤 맥케이 감독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애덤 맥케이가 첫 작품을 코미디물로 삼은 건 어 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탓이다.
SNL이라는 NBC의 대표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라는 경력 때문에, 영화판에 들어온 다음에도 코미디 작품을 해야 제작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정극을 해 보라는 말을 하는 사 람은 유재원이 처음이었다.
"기왕이면 제가 말한 월 스트리 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가지 고 얼마나 허울 좋은 종이집만 쌓 고 있는지, 그 끝에는 얼마나 큰 파국이 있을지 다뤄 보는 영화라면 좋겠어요."
이어진 유재원의 설명에 애덤 맥 케이 감독은 그제야 식사와 함께 곁들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이 야기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유재원 회장이 30억 달러 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서브프라 임 모기지론과 연관된 풋 옵션에 투자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떠올 랐다.
그러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부정적인 전망을 담은 영화를 만들 어 폭락을 유도하려고 하나 싶었지 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풋 옵션 투자 이전에도 유재원 회장이나 ID 인베스트먼트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확대를 경 계해야 한다고 했던 기억도 났기 때문이다.
작년 초부터 그랬으니, 유재원과 ID 그룹은 일관된 포지션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말로만 주장하지 말고 직접 증명해 보라던 애널리스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30억 달러를 배팅했다는 게 바람직 했다.
"재미있겠군요."
애덤 맥케이 감독은 흥미가 피어 올랐다.
유재원 개인이 이제까지 보여준 놀라운 능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 면 끝이 없을 정도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과연 이게 한 사람 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퍼포먼스였다.
오죽하면 미국 연방정부에서 유 재원에게 명예시민이란 영광을 만 들어 주려고 했을까. 그런 유재원 이 위험하다면 그 위협은 진짜였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비단 유재원 의 명성에 기대어 확신을 갖는 게 아니었다. 본인도 아주 근처에서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을 여럿 보았던 탓이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겉으로 보 면 대단히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 지만, 거기서 일하는 스태프들은 공장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경우 가 더 많았다.
스태프들 상당수는 수입이 일정 치 않으니 집을 구할 때도, 대출을 받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고정된수입이 없으니 신용도도 좋지 않아 서 이율이 높은 서브프라임 대출로 구매했다.
유재원의 경고도 경고지만, 직접 곁에서 느끼는 숫자도 상당했다.
그렇기에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위기는 꼭 온다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그 위기를 먼저 포착하고 위기를 기회로 노리는 사람들의 이 야기라면?
당연히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 니다.
그걸 영화화하여 미리 개봉할 수 있다면?
엄청난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영화가 일찍 만들어져서 사태가 터 지기 전에 개봉한다면 예언서가 될 것이고, 사태가 터진 후에 개봉이 된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 화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라는 정통 극에 관심이 많았던 애덤 맥케이 감독은 그야말로 유재원의 이야기 에 확 끌렸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