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권 13화
그렇기에 유재원은 최강건과의 미팅은 수락했지만, 정작 만나서도 급한 모습은 일절 보여주지 않았다.
전과 같이 기왕이면 북한이 1+1 이벤트의 수혜자가 되었으면 좋겠 다는 정도의 말뿐이었다. 대신 북 한에 가겠다거나 하는 적극적인 모 습을 더는 보여주지 않았다.
최강건은 유재원이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수뇌부는 재촉만 했을 뿐, 결정권이나 다른 카드를 쥐여 준 건 아니었기에 최강건이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이었다.
대신 대북 토륨 사업은 완전히 다른 쪽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북한 비핵화의 상징은 토륨 원 자로가 될 것.
백악관의 샌디 버거 국가 안보 보좌관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당연하게도 유재원과 앨 고어 대 통령 사이에 긴밀한 통화가 있은 다음 나온 발언이었다. 통화에서 유재원은 좋은 의도로 북한에 호의 를 베풀었는데, 미적지근한 반응에 크게 실망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걸어 놓은 프레 임을 박살 내기 위해 조금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북미 수교의 마지막 단추, 토륨 원자로 역시나 앨 고어 대통령은 확실한 카드였다.
토륨 원자로를 팔고 싶으면 북미 수교에 힘을 보태라고 했던 북한의 프레임이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었 다.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했 다고 증명하려면 토륨 원자로를 설치해야 하는 입장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이게 꼭 북한에 나쁜 건 아니었다.
종전 선언 후, 몇 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던 북미 수교의 단초 가 드디어 열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 가 생기는 중이었다. 이런 상태에 서 북미 수교가 이뤄진다면 북한의 수뇌부는 적잖이 안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돌파구가 보이자 북한도 달라졌다.
토륨 원자로에 관해 실권은 없었 던 최강건이 북한으로 돌아갔고, 그를 대신해 북한의 리수용 외무상 이 직접 샌프란시스코를 찾아왔다.
협상 파트너가 리수용으로 바뀌 고 나서부터는 북한의 토륨 원자로 사업이 급물살을 탔다. 유재원의 큰 그림을 위해 꼭 필요했던 북한 의 자원 탐사권과 개발권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모든 협상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 았다. 중요한 합의들은 모두 문서 화되어 계약서에 포함되었다. 이제남은 단계는 서명식이었다.
"북한에 토륨 원자로 하나 팔아 먹기가 이렇게 힘들었네."
전용기에 오르는 유재원은 푸념 이 절로 나왔다.
특별한 거래였던 만큼 서명식은 유재원과 김정일이 대표로 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오늘 샌프란시스 코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토륨 원자로가 아니라 상온 핵융합 발전소였다면, 이런 푸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이 절로 들었다.
"다녀오면 프로메테우스 프로젝 트를 바로 시작해야겠어."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 바로 상 온 핵융합로 개발 계획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티탄 신족이 바로 프로메 테우스였다. 너무도 상투적인 이름 이지만, 상온 핵융합로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이름은 없었다.
잠시 후.
유재원이 탄 전용기는 경쾌한 엔 진음과 함께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 다.
인공지능 골드를 의미하는 황금 빛 실타래로 기체 도장을 바꾼 유 재원의 전용기가 날아갈 최종 목적 지는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은둔의 나라 북한의 수도 평양이었다.
#406. 월 스트리트의 외로운 늑 대유재원의 북한행을 불안하게 보 는 사람들은 많았다.
북한이 정상국가를 향해 나아가 고 있지만, 그래도 8, 90년대 불량 국가였을 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 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다.
특히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친척 들이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그렇지만 이분들의 불안은 기우 였다는 듯 3박 4일 일정의 북한행 을 무사히 마치고 유재원은 돌아왔 다.
정해진 스케줄을 안정적으로 소 화했다는 말은 북한에서의 일도 성 공적이었다는 의미였다.
북한과 비즈니스를 하면 시시때 때로 느낄 고구마 같은 상황도 없 었다.
-ID 웨스팅하우스, 토륨 원자로 첫 상업 판매 성공!
-북한, 2GW 토륨 원자로 2기
설립키로!
-1+1 이벤트 결코 만우절 거짓 말 아니야. 1기 설치 비용으로 2기 설치!
-이제 남은 순번은 단 둘! 눈치 싸움 치열!
마지막 날, 북한에서 유재원의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관련 소식들 이 먼저 기사화되어 특종으로 보도 되었다.
평양에 도착할 때만 해도 청개구 리 같은 북한이라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주체'라는 단어에 특히나 목을 매는 북한인지라, 이번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하게 되면 기겁을 하는 게 북한의 생리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토륨 원자로가 북한 의 비핵화를 증명하는 도구로 쓰였 으니 크게 반발하면서 청개구리처 럼 굴 수 있었는데, 의외로 순조로 웠다.
알고 봤더니 북한은 제사보다 제 삿밥에 관심이 더 컸던 탓이다. 그 것도 두 개나 되었다.
하나는 익히 알고 있던 북미 수 교였고, 다른 하나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사업이었다. 북미 수교는 앨 고어 대통령의 발언으로 토륨 원자로의 기공식이 시작되면 바로 추진되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 다.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사업 역시 북한이 군침을 흘리는 사업이 었다.
송유관이 북한을 지나는 것만으 로도 원유 확보는 물론이고, 대지 사용료와 통행료까지도 받을 수 있 었으니 말이다.
북한은 동시베리아-태평양 사업 에서도 유재원이 힘을 써주길 바랐 다. 그도 그럴 것이 동시베리아-태 평양 송유관 사업에서 러시아 다음 가는 대주주가 바로 셰브롱이었으 니 말이다.
엄연히 독립된 법인이지만, 북한 수뇌부나 김정일은 셰브롱에도 유 재원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 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유재원은 굳이 북한 수뇌부의 인 식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대신 셰 브롱이나 사업 주최인 러시아에도 좋게 말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유재원도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왔다.
바로 북한의 지하자원 탐사권과 개발권이었다. 토륨 원자로의 사업 비 역시 한 푼도 깎지 않고 미국 달러화로 공사 단계에 따라 나눠 받기로 했다.
이미 1+1이라는 파격적인 이벤 트 때문에 깎아 줄 여력도 없었고, 북한 측 역시 깎아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논란이 생긴 건, 지하자원 탐사권을 어느 시점에 행사 할 수 있느냐였다.
토륨 원자로의 대가로 내주는 것 인 만큼, 토륨 원자로가 가동되면 그때부터 권한이 생긴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약서에 유재원과 김정 일의 사인이 들어가 힘이 발동되는 시점부터 생긴다는 것도 일리가 있 었다.
양측이 치열하게 맞붙은 결과 중 간값으로 합의가 되었다. 기초 공 사가 끝나고서 원자로 설치 단계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행사할 수 있도 록 했다.
유재원은 북한 측의 조치에 실망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북한의 지하자원 탐사는 자기 좋 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 의 역학 구도를 다시 짜기 위해 하 는 일이었다.
유재원이 생각하는 구도로 재편 된다면, 북한이 최대 수혜자가 되 는 것인데, 이렇게 딴죽이라니.
그나마 중간점으로 타협을 해서 내년 중반쯤에 시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김정일은 예정보다 일찍 갈 거 같은데, 걱정이네."
한숨 돌린 유재원은 자연스럽게 서명식에서 만난 김정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받은 느낌은 홀쭉해졌 다는 사실이다. 원래 김정일은 적 당히 배도 나오고 얼굴에 살도 오 른 이미지였다. 그런데 어제 봤던 김정일은 살이 쪘다는 느낌이 없었 다.
살이 빠졌으니 건강해졌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김정일은 반대살이 빠져서 건강해진 게 아니 라, 병이 있어 보였다. 당뇨 혹은 몸속의 중병 때문에 살이 빠진 것 처럼 말이다.
예정보다 일찍 죽는다면 후계 구 도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
"뭐, 그건 북한 사람들이 걱정할 일이겠지."
잠깐 생각을 해 보던 유재원은 걱정을 훌훌 털었다. 미국이 김씨 일가 정권을 인정한 이상 쿠데타의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그러니 후계 구도는 김정남 아니면 김정은 둘 중에 하나였다.
누가 되었든 회귀 전 북한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북한은 이걸로 됐고."
유재원은 노트북 화면 위에 열린 북한 관련 파일을 모두 닫았다. 그 리곤 그룹 전산망 그리고 본인의 업무용 ID톡에 올라온 파일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유재원이 북한에 있는 동안에도 ID 그룹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와 관련된 보고서와 결재 요청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땐 일부러 열어 보지 않았으니 쌓 여 있는 양은 평소의 몇 배에 달했 다.
이유는 바로 해킹 때문이다.
인터넷은 이제 북한에도 들어갔 다. 최신의 컴퓨터를 제약 없이 구 매할 수 있게 된 북한이었기에, ID 테크놀로지에서 발표한 최신 i웍스 부터 뉴에그 최신 모델까지도 있었 다.
평양의 경우엔 개방형 와이파이 도 제법 촘촘히 깔려 있어서 무선 인터넷을 편하게 즐길 수 있을 정 도였다.
다만 인터넷은 외부 세계와 연결 이 되어 있지 않아서, 세계 어디든 접속할 수 있는 진짜 인터넷은 특 별한 코드를 얻어야 했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의 연결은 극 도로 보수적이지만, 회귀 전과 비 교하면 천지개벽이었다.
더욱이 그때는 열악한 환경 속에 서도 전략적으로 해킹 부대를 만들었는데, 여건이 훨씬 나아진 지금 에는 더 강력한 부대를 육성 중일 것 아니겠는가.
분명 유재원이나 ID 그룹의 클라 우드 시스템에 대한 중국발 해킹 시도 중에는 북한이 했던 걸 중국 이 한 것으로 위장한 것도 있을 것 이다.
그러니 북한 땅에서는 음성 통화 는 해도 클라우드 시스템과 데이터 통신은 하지 않았던 유재원이었다.
"오호, 빈센트 사장님이 한 건 하셨네."
제약이 풀린 유재원이 제일 먼저 보기 시작한 문서는 ID 인베스트먼 트의 빈센트 사장님이 보낸 보고서 였다.
보고서 안에 담긴 내용은 바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에 대한 옵션 투자 이야기였다.
보고서는 유재원이 북한으로 출 발했던 며칠 전에서부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부도 율 증가!
-무담보 대출만큼은 규제해야.
"또, 이 소린가."
모니터에 뜬 ID 인베스트먼트의 리포트를 보던 이가 투덜거렸다.
톰 브라운의 수제 슈트에 말끔한 헤어스타일로 깔끔하고 스마트한 모습을 한껏 띄운 이 사람의 이름 은 에런 폴드. 세계적 투자 회사 리먼 브라더스의 최고재무책임자 (CFO) 였다.
에런 폴드는 물론 월 스트리트를 주름잡는 투자 회사들은 ID 인베스 트먼트가 작년 초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다 는 걸 잘 알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은 아니지만, ID 인 베스트먼트의 행보는 주요 체크 사 항이었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의 쟁쟁한 회사들 중 에 경이로운 투자 신화를 보유하지 않은 회사는 없다. 어떤 회사는 금 에 투자해서 대박을 이뤄냈고, 어 느 회사는 죽어 가던 호주의 광물회사에 과감히 투자를 해서 대박을 터트린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불패의 투자 신화를 가 진 곳은 아직까지 ID 인베스트먼트 가 유일했다.
ID 인베스트먼트는 90년대 초 걸프전이 터졌을 때 석유 선물 투 자에서 경이로운 수치의 투자 대박 을 터트리며 월 스트리트에 화려하 게 데뷔했다.
이후 동아시아 외환 위기에서 한 국과 일본에 투자해서 더욱 몸집을 불렸다. IT 버블에 몸을 밑?기며 한 껏 부풀렸다가 거품이 터지기 전에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ID 그룹의 기업 공개나 ID 그룹의 공격적인 합병에도 관여하 면서 내실을 다졌고, 최근에는 금 과 석유에 투자한 것이 대박이 났 다고 했다.
하나라도 삐끗했으면, 커다란 손 실을 보았을 투자였는데 실패는 없 었다. 덕분에 불과 10년이 조금 넘 는 사이에 ID 인베스트먼트의 이름 은 월 스트리트에 신화로 기록되었 다.
투자 규모는 비공개 상태지만, 월 스트리트의 많은 이들이 그 규 모가 최소 수천억 달러는 될 것으 로 예상하는 게 ID 인베스트먼트였 다.
그런 ID 인베스트먼트가 작년부 터 일관되게 내고 있는 투자 리포 트가 있으니 서브프라임 모기지였 다.
다만 리포트의 내용은 투자를 하 라는 게 아니라, 경계하라는 내용 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에런 폴드 의 신경에 거슬렸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