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권 10화
댈러스는 유재원에게도 익숙한 장소이긴 했다. 지금은 더 퍼시픽 의 확장팩이 최종 완성 단계에 있 어 정신이 없을 존 카맥의 ID 소프 트웨어의 본사가 위치해 있었으니 일 년에 몇 번은 출장을 가는 도시 였다.
그렇지만 볼트 사장이나 유재원 이 모두 단 한 번도 후보에 넣지는 않았던 도시였으니, 뜬금없이 느껴 졌다. 그런 유재원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개발자 모드 골드는 밝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중남부에 자리해 북아메리카 전 역을 아우르는 최적의 유통망!
-북미 항공 우주국이 근처에 자 리해 고학력 엔지니어를 쉽게 고용 할 수 있음!
-텍사스주는 전기차 구입에 특혜 를 주고 있음!
나름 괜찮은 이유들이 연이어 나 타났다.
그러면서 주요한 포인트가 하나 나올 때마다 이를 보조하는 논리나 데이터들이 모니터 위로 가득 펼쳐 졌다. 유통망을 설명할 때엔 최적의 유통망을 구성할 수 있는 거점 들을 찍어서 보여주기도 했고, 나 사가 나올 땐 휴스턴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번 답변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응. 고마워, 조금 도움이 되었어."
유재원은 마치 사람에게 하는 것 처럼 고맙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 로부터 크게 벗어나긴 했지만, 결 과가 도출되기까지 동원된 논리 자 체는 그럴듯했다.
"그런데 라이트닝 볼트 북미 생 산 공장은 디트로이트에 지어질 거야."
심지어 고맙다는 말로 끝나지 않 고, 구체적인 후속 절차에 대해서 도 설명했다.
비록 고급 연산의 결과가 유재원 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결과 보 고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유재원이 높은 점수를 주는 건 고급 연산의 과정에서 인 위적인 개입이 없이 골드의 자체적 인 논리 전개로 이어졌음에도 아주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그렇군요. 다음엔 보다 확실히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 니다.
그러자 골드도 더욱 힘내겠다고 답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따지면 결 과물의 퀄리티가 고등학생 과제 수 준이었지만,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 은 무궁무진했다. 무엇보다 좋은 피드백이야말로 인공지능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 에 유재원은 피드백에도 노력을 아 끼지 않았다.
다음 날.
오늘 유재원은 평소와는 다른 스 케줄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 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유재원이 주최하는 허리케인 카 트리나 피해 복구를 위한 자선 파 티였다.
평소 집과 회사만 오가던 유재원이 오랜만에 주최하는 외부 행사였 으니 캘리포니아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은 죄다 몰려왔다.
그런 유재원과 친분이 있으면 나 쁠 건 없었다. 아니,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마이너스 가 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수재민을 돕기 위해 행사 를 열었기에 초청에 응하겠다는 사 람이 넘쳐났고, 유재원도 행사장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사람들을 받 아들였다.
"이거 두 번은 못 하겠네요."
덕분에 제일 힘든 사람은 손님들 을 맞이하느라 진이 다 빠진 유재 원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보스도 이제 체력을 관리할 때가 되었군요."
유재원의 말을 받은 사람은 레밍 턴 총회장이었다.
레밍턴도 유재원의 자선 행사 소 식에 오랜만에 서부로 날아온 상태 였다.
유재원을 대신해서 타임워너 넥 스트컴이라는 세계 최대 미디어 그 룹의 총회장직을 듬직하게 수행하고 있는 레밍턴은 이제 완연한 중 년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시간이란 흐름을 자연스 럽고 멋지게 받아들인 뉴요커 중년 이었다.
하긴, 세계 최대의 미디어 그룹 총회장으로서 매일같이 만나는 사 람들도 미국의 높으신 양반들이나 할리우드 스타, 셀럽들이니 일부러 라도 멋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엠마랑 레온은 잘 크고 있죠?"
"그럼요! 딸은 벌써 내년이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었지요. 사 진 보여드릴까요?"
레밍턴은 유재원의 대답을 듣기 도 전에 안드로이드 S5를 꺼내 사 진 어플을 열었다. 거기엔 애처가 답게 아내인 섀넌과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고, 다음으로 눈에 넣어 도 아프지 않을 딸 엠마와 이제는 개구쟁이가 된 레온의 사진도 가득 했다.
회귀 전과 달리 너무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레밍턴의 모습에 유재원은 뿌듯함을 느꼈다. 첫째딸인 엠마에 이어 둘째 아들인 레 온도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으니 말이다.
"내년이면 엠마가 중학생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요."
"네, 보스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 니던 게 어제 같은데, 지금은 불꽃 같은 사춘기를 시작하고 있지요."
"중학교는 어디로 보내실 건가 요?"
업무 이야기는 전산망을 통해 언 제든 할 수 있었으니, 둘 사이에 나누는 이야기는 엠마의 중학교 선택과 같은 사적인 것들로 자연스럽 게 흘렀다.
"음, 사립 기숙학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엠마랑 떨어지는 게 아 쉽지만, 공립은 너무 못 미더워서 말이죠."
레밍턴은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공립학교로 보내려고 했지만, 현실 적인 이유로 사립 기숙학교를 최선 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유재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할 만큼 최선의 선택이었다.
공립과 사립의 교육 서비스 품질 차이는 한국과 차원이 다른 게 미 국이었다. 양질의 교육을 받으려면 사립을 선택하는 게 낫다.
더욱이 레밍턴도 이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의 최상류층 에 진입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보스도 이번에 한 건, 아니 여러 건 크게 하셨더군요?"
토륨 원자로부터 라이트닝 볼트 의 전기자동차까지. 한식구인 레밍 턴마저 깜짝 놀랄 만큼의 성과가 쏟아진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작년에는 얌전하게 지나갔던 것 이 올해를 위해 2보 후퇴를 한 것 처럼 보일 정도다.
레밍턴의 칭찬에 유재원은 살짝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런데 보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눈치 빠른 레밍턴은 본인의 유일 한 상사이자 젊은 오너가 이번의 성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IDDC는 성공적이긴 했죠. 그런 데 문제는 토륨 원자로네요. 파격적인 이벤트도 하는데, 여러 나라 들이 아직 간만 보고 있잖아요."
유재원도 레밍턴에겐 속마음까지 숨길 이유는 없었기에 순순히 말했 다. 그제야 레밍턴은 아 하면서 알 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정보팀에서는 뭔가 보고가 없었 습니까?"
그러다가 은근한 표정으로 되물 었다.
"네!"
정보팀이 매일 올리는 보고서는 전과 다를 게 크게 없었다. 최근에 는 뉴올리언스의 민심 동향에 대한 보고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제방이 무너지지 않은 덕에 수재 민 숫자가 크게 줄었지만, 난개발 로 인해 사라지는 늪지대 때문에 홍수 예방이 되지 않아서 물난리가 난 곳은 제법 되었다.
더욱이 그 지역은 유색 인종이 많이 살던 곳이라서, 연방 정부가 돈을 써도 백인들을 위해 주로 썼 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돌고 있다는 보고였다.
회귀 전 막장으로 갔던 카트리나 사태를 보았다면 절대 나올 수 없 는 말이다. 유재원이 보기에 이만 큼이면 잘 막았다고 생각되었지만, 직접 피해를 겪은 이들에겐 이보다 최악의 물난리는 없었을 테니까.
피해 복구를 위해서 연방 정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거기에 발을 맞춰 ID 그룹도 움직였다. 월드컵 과 같은 대규모 야외 행사에 동원 된 WIFI용 무선 중계기를 여러 대 설치해서 인터넷을 복귀하는 게 제 일 먼저였다.
3G 통신망은 먹통이어도 인터넷 은 되었기에, ID톡이나 다른 SNS 로 가족을 찾거나, 이웃들과 소통 하며 피해 복구의 효율을 올렸다.
전 세계 어디에서 재해가 벌어지 면 제일 먼저 움직이는 ID 파운데 이션도 빠지지 않았다. 여기에 오 늘 유재원이 주최한 자선 행사처럼 돈을 모아 피해를 본 이들을 직접 돕는 일도 병행 중이었다.
하여튼, 정보팀의 최근 활동은 자연재해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름으로 짐작이 되는 게 있습니다만, 확인이 필요한 일입니다."
"진짜요? 혹시 기술적인 문제일 까요?"
토륨 원자로가 팔리지 않는 이유 가 있다니.
"설마요! 제가 엔지니어도 아닌 데, 어떻게 기술적 문제라고 단언 하겠습니까? 일단 제가 먼저 확인 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마 보스가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이 유라고 혀를 찰 게 분명하지만요."
"흐음?."
유재원은 레밍턴에게 이유를 재 촉하진 않았다.
괜한 선입견이 생기면, 좋은 건 없었으니 말이다. 레밍턴이라면 최 강욱 부회장과 같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기에,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잠시 후, 자 선 행사의 하이라이트, 애장품 경 매가 시작됩니다. 특별히 이번 경 매에는 유재원 회장의 희귀한 애장 품이 다수 나오는 만큼, 경매에 관 심 있으신 분들은 중앙의 홀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중성적이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행사장을 울렸다.
유재원이 주최하는 자선 행사답 게 식순의 진행을 알리는 아나운서 의 목소리는 인공지능 골드였던 것 이다.
참여의 열기는 뜨거웠다.
경매 낙찰 대금은 전액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된 다. 그렇게 기부를 하면서 유재원 의 애장품도 얻고, 유재원과 친분 을 쌓을 수도 있으니 다들 주머니를 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경매장에 올라온 품목 이 하찮은 것은 아니었다.
제일 처음 경매로 올라온 애장품 은 바로 오리지널 둠 소장판이었다. 둠이라면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북미의 둠 사랑은 남달랐다. 단적으로 오리지 널 둠은 온갖 기기로 이식 중이다.
ID 소프트웨어에서 하는 것이 아 니라 둠을 좋아하는 이들이 벌인 놀이였다. 연산 장치와 디스플레이 가 연결되어 있는 기기라면 둠을 이식해 구동시키는 게 하나의 유행 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게 다 존 카맥 사장이 둠의 소스 코드를 공 개한 덕이었지만, 그만큼 많은 사 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 둠의 오리지널 패키지, 그 것도 보관 상태가 완벽한 소장판이 었다. 게다가 유재원이 주최한 자 선 행사의 특성상 실리콘 밸리의 사람들이 잔뜩 왔으니, 다들 둠을 보고 눈이 돌아갔다.
리테일 가격이 120달러였던 물건 이, 상위 입찰이 거듭되면서 10만 달러를 훌쩍 넘어 버렸고, 최종적 으로 2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더욱 놀랄 일은 이게 시작이었다 는 점이다.
올인원 PC의 신호탄을 터트린 에그 시리즈의 첫 번째 모델이 나 오기도 했고, 다이아몬드가 그대로 박혀 있는 티파니폰 1도 있었다.
티파니&코라는 미국의 주얼리 업체와 콜라보로 만들어진 티파니 폰 1이었고, 그중에 일부는 증정용 으로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게 있었다. 당시엔 뛰어난 성능이었지만, 피처폰이라는 한계로 지금 은 다 기기 교체를 했다.
그렇다고 기기를 버리진 않았다. 다이아몬드는 티파니&코에 가져가 면 빼내어 다이아몬드 반지로 바꿔 주는 서비스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이아몬드가 멀 쩡히 박혀 있는 기기는 더더욱 희 귀한 상태였는데, 구성품까지 완벽 하게 있었기에 그야말로 초레어 상 품이었다.
그럼에도 티파니폰은 오늘 행사 의 최고 경매가를 찍진 못했다.
마지막 애장품으로 나온 아이템 때문이었다.
"1,000만!"
-네, 1천만 달러입니다. 상위 입 찰을 하실 분 계십니까? 10초를 세 겠습니다.
-10, 9, 8……. 2, 1! 네?! 라이 트닝 볼트사의 LV-F2가 1천만 달 러에 낙찰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오른 건 2년 전쯤 놀라 운 자율주행 능력을 선보였던 라이 트닝 볼트사의 모델 F2 였다.
전기차 양산을 위해 온갖 테스트 를 거치면서 프로토타입으로 만들 어 놓은 F2는 대부분 박살이 났고, 지금은 딱 3대가 남은 상태였는데, 유재원은 그중 하나를 허리케인 카 트리나로 인한 수재민을 위해 내놓 은 것이었다.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던 물건이 었는데, 시작부터 1천만이라는 엄 청난 액수가 터지면서 상위 입찰의 의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오늘 자선 파티에 온 이들도 캘 리포니아에서 나름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지만, 1천만 달러는 이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다들 1천만 달러를 부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폭발하며 고개를 돌 렸다. 그리고 역시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레더릭!"
1천만 달러를 거침없이 부른 사 람은 셰브롱의 오너이자 티파니의 외할아버지인 프레더릭 테일러 2세 였기 때문이다.
프레더릭은 전보다 기력이 많이 하락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프 레더릭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알프 레드 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자선 파티를 주최한 호스트로서 입구에 서서 열심히 손님을 받았던 유재원이지만, 경매가 시작할 때만 해도 프레더릭은 없었다.
"손녀사위가 좋은 일 한다는 데 빠질 수야 없지."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었다. 그렇 지만 평소 외출을 잘 하지 않는 프 레더릭이 진짜로 자선 행사 참석하나만으로 먼 길을 왔다고는 생각 되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나 할까?"
역시나 프레더릭도 유재원에게 특별한 용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재원은 바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프레더릭을 안내했다.
"웨스팅하우스까지 인수했는데도 토륨 원자로가 안 팔려 고민이라 지'?"
그러자 프레더릭은 대뜸 토륨 원 자로를 언급하는 게 아닌가.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