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권 7화
글로벌 기업인 ID 그룹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 등등. 진출한 나 라에 세금을 성실히 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아이슬란드나 카리브해, 오세아 니아 등등의 법인세가 없는 나라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서 탈세를 하 는 기업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회귀 전 마스터플랜을 세울 때,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 나름 알아보 았던 유재원이었다. 최종적으로는 페이퍼 컴퍼니 설립 계획은 삭제했 다.
ID 그룹을 통해 이루어질 각종 비즈니스의 시장 지배력을 고려한 다면, 구글세와 같은 논란이 훨씬 크고 격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이 점쳐졌기 때문이다. 최악에는 반독 점법이 적용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었다.
세금을 확실하게 납부한다. 대신 식구들과 임직원을 먼저 챙긴다는 게 유재원의 선택이었다. 덕분에 근속자에게 시계나 금덩이를 주는 건 기본이고, 우수한 성과를 낸 이 들에겐 자동차를 주는 것이 이제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성과의 크기만큼 자동차의 급도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였다. 그러니 길버트가 흥분할 수밖에.
-아! 그런데 꼭 페라리와 람보르 기니여야만 해?
"왜? 세단이 취향이야? 그럼 롤 스로이스나 벤틀리?"
-아니! 그런 회장님 자동차는 부 담돼서 못 타지! 나는 라이트닝 볼 트의 슈퍼패스트! IDDC 마지막 날 한 번 보고 완전 반해 버렸다.
뭔가 하고 봤더니 역시나였다.
하긴 길버트와 같은 얼리어답터 에겐 전통의 슈퍼카보다는 최고 성 능의 전기 자동차인 슈퍼패스트가 취향 저격이었다.
비단 길버트뿐만이 아니라 자동 차에 관심이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라이트닝 볼트사의 정식 발매 자동 차에 큰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0K! 접수했다. 그런데 실제 배 송까지는 최대 2년 넘게 기다릴 수 도 있다는 거 알지?"
-그럼! 문제없어!
라이트닝 볼트사가 엔트리 모델부터 슈퍼패스트라는 슈퍼카 클래 스까지 4종의 전기 자동차를 정식 발표하고 예약을 받기 시작했지만, 제품 생산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였다.
슈퍼패스트와 같은 슈퍼카 클래 스는 한국에 공장이 생겼지만, 준 중형 양산 모델을 위한 공장은 이 제 겨우 터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볼트 사장은 아무리 늦 어도 예약 구매자의 집 앞으로 전 기차가 배송되기까지 2년은 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내연 기관자동차들과 달리 전기차의 구조는 무척이나 간단했기 때문이다.
길버트와의 화상 미팅을 끝낸 유 재원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헤이, 골드."
-네, 재원 님.
유재원의 부름에 전원이 꺼져 있 던 스마트폰의 화면에 금빛 실타래 들이 넘실거리는 화면이 나타났다.
"라이트닝 볼트의 양산차 공장은 어디에 지으면 좋을까?"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골드가 생각 중이라는 의미로 빙글 도는 금 빛 실타래 주위에 금가루가 뿌려졌 다.
-죄송합니다. 너무 고차원적 질 문이라 현재로서는 적절한 도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께는 듬직한 임직원이 있으니 이들과 함 께 논의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응, 알겠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골드의 지능이나 추론 능력은 일 상의 수준에서나 대응할 수 있지, 다양한 가치를 서로 비교한다거나, 온갖 정치적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는 아직 멀었다. 그래도 답변 은 제법 괜찮았다.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이 제는 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게다 가 임직원들과 의논을 해 보라는 건 신중하면서도 무난한 답변이기 도 했다.
하여튼, 라이트닝 볼트사의 볼트 사장은 전기차 양산을 위해서 십수 년을 연구해 왔었고, 이제는 결실 을 맺게 되었다.
전기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였던 배터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고, 처음부터 굉장한 임팩트를 선사했 던 자율주행 기능의 완성도도 한껏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리하여 볼트 사장은 IDDC 2005의 마지막 날 준중형 엔트리 모델인 일렉트로닉스 스피어부터 슈퍼카 레벨인 슈퍼패스트까지 4가 지의 모델을 발표했고, 예약을 받 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그 누구도 이 시점에서 완성형 전기 자동차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격도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인공지능 비서 골드의 발표로 몰 려든 관심이 라이트닝 볼트의 전기 자동차로 급격히 쏠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함께 화두로 치솟은 게 라이트닝 볼트의 양산차 생산 공장의 입지였다.
딱 봐도 대박이라는 걸 눈치챈 지자체들에서는 온갖 혜택을 제시 하면서 공장 유치전에 돌입했다.
로비에 웅대하는 것만으로도 라 이트닝 볼트사의 행정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했다. 덕분에 볼트 사 장도 예정보다 빠른 양산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아! 헤이, 골드. 라이트닝 볼트 의 양산차 공장은 어디에 지으면 좋을까?"
그러다가 유재원은 아까와 똑같 은 질문을 골드에게 던졌다.
-방금 답변을 드린 질문이군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그러자 골드는 이전의 상황을 기 억한다는 듯 답변했다. 유재원도 그런 골드의 답변을 예상한 것처럼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이번엔 개발자 모드로 전 환해서 다시 계산해 보자."
리테일 버전의 골드가 그냥 커피 라면 개발자 모드의 골드는 진짜 T.O.P였으니 말이다.
-개발자 모드 전환에는 관리자 인증이 필요합니다.
"물론이지."
유재원은 스마트폰에 뜬 메시지 박스에 본인만이 알고 있는 암호를 입력했다.
-전환 완료. 무제한 고급 연산을 시작합니다.
구차하게 이런저런 조건을 달고, 질문의 요지를 다시 설명하는 일은 없었다. 개발자 모드의 골드에는 방대한 데이터는 물론이고 여러 가 지 변수들이 일찌감치 설정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발자 모드 골드는 일상 적인 서포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 면서 발전되고 있었기에, 방대한 변수를 바탕으로 하는 가치 판단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띵!
-우앗! 무슨 일이야? 갑자기 개 발자 버전 골드의 연산력이 폭등했 어!
그만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계 산할 때 필요한 것은 연산력!
ID 그룹의 클라우드 센터를 담당 하고 있던 영식이로부터 곧장 ID톡 이 날라왔다.
길버트가 소프트웨어의 설계를 담당했다면, 영식이는 ID 그룹의 전체 하드웨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모니터링 중 특정 프로세서의 연산력 요구치가 치솟으니 바로 유재원 에게 ID톡을 날린 것이다.
"내가 개발자 모드에서 어려운 질문을 좀 했어."
-아! 다행이네. 난 또, 갑자기 무 한 루프에 빠진 줄 알았네.
"미리 알렸어야 했는데, 좀 즉흥 적으로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기계학습의 치명적인 오류 중 하 나가 바로 무한 루프에 빠지는 것 이었다. 순환 논리가 작동한다든가, 논리 폭탄과 같이 인위적인 과오를 발생시키는 루틴이 만들어지면 아주 곤란하다.
엄청난 숫자의 연산이 병렬로 동 시에 처리되고 있으니, 관계자들이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산력 만 낭비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딱 하루 동안만 10엑사만 독점 으로 할당해 줘."
-OK! 그 정도는 문제없어!
ID 그룹의 클라우드 시스템의 여 력은 10엑사플롭스를 뚝 떼어 특정 프로세스에 몰아줘도 여력이 남을 정도다.
"결과는 좀 뻔할 테지만."
일상의 일을 보조하는 건 지금의 골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이 다. 특히 반복 작업에 있어서는 사 람보다 낫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진 정리 같은 일이 다. 사진 폴더 하나에 수천, 수만 장을 찍어 놓고 정리하지 않은 사 람이라면, 골드의 보조가 딱이다.
사진의 내용을 인식해 폴더별로 정리를 해 준다거나, 태그를 붙여 주는 일은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정 답이 나오지 않는 사진의 경 우엔 사용자에게 질문을 할 테지만, 그런 질문에 성실히 답해 준다면 학습 기능이 작동되어서 나중에 분 류 효율이 올라간다.
반면 라이트닝 볼트사의 생산 공 장을 어디에 두어야 좋을까 같은 복잡한 질문은 골드의 능력을 벗어 난 것이었다.
골드의 설계자인 유재원은 골드 가 답해 줄 결과물에 대한 품질을 예상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강?약 인공지능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지능검사 프로그램도 따로 만들 어 두었다.
거기서 일반에 공개된 골드의 지 능은 86이었고, 지금 유재원이 다 루는 개발자 모드의 골드는 92였 다. 사람의 IQ 지수와 비슷하게 보 면 되는데, 숫자만 봐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다만 볼트 사장이 조만간 최적의 입지를 선별해서 보고서를 올리기 로 했는데, 골드의 결과값과 비교 를 한다면 숫자상으로는 보이지 않 던 개발자 모드 골드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명령을 내 린 것이었다.
다음 날.
평소와 같은 아침의 루틴을 깔끔 하게 마친 후 서재로 출근한 유재 원은 본인의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 과 컴퓨터에 로그인했다.
항상 로그인 상태로 두면 편리하 지만, 보안 측면에서는 좋지 않았기에 늘 암호를 입력해 로그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유재원 회장님, 로그인을 환영 합니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골드의 환 영 멘트가 있다는 점이다.
"굿 모닝, 오늘 뉴스는 뭐지?"
-회장님께서 꼭 확인하실 뉴스는 총 37개가 있습니다.
유재원과 골드는 자연스럽게 대 화를 나누었다. 언뜻 들어보면 김 대석 비서실장과 대화를 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결과물에 대해선 물음 표였다. 단적으로 김대석이 아침마 다 올리는 뉴스 스크랩과 비교한다 면 골드의 패배다.
무슨 아침 뉴스를 37개나 본단 말인가.
골드가 띄운 화면을 보니 한국의 집값 상승 뉴스부터 프랑스의 이민 자 문제까지 그야말로 잡다한 뉴스 들이 가득했다.
반면 김대석이 올린 스크랩북은 늘 간결하고 정확했다. 골드가 이렇게나 많은 뉴스를 골라 놓은 이 유를 따져 보면 합당한 구석은 있 었다.
한국 집값 뉴스의 경우엔 유재원 이 전에 클릭했던 뉴스의 후속 기 사였고, 프랑스 이민자 문제 기사 는 넥스트컴 프랑스의 클릭 수 1위 의 기사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뉴스를 읽을 유재원에겐 그다 지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문제 가 있었다.
"내일은 뉴스 숫자를 10개 이하 로 맞춰 줄래?"
-네, 그러면 뉴스 스크랩 한도를 10개로 맞추겠습니다.
처음부터 숫자를 줄여 놓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숫자에 제한을 걸 면 골드의 논리 확장에 제약을 거 는 것과 같아서 그냥 두었다.
그러다가 스크랩 작업을 하나 마 나 한 결과로까지 이어졌으니, 아 쉽더라도 숫자를 줄이는 게 정답이 었다.
그렇다고 골드가 골라 준 기사가 볼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집값 급등 뉴스는 유재원이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던 사안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기사에서는 노무현 정권 초기에 비해 40%나 집값이 올랐다고 호들 갑이었지만, 유재원의 기준에서는 아직 심각한 지경에 이른 건 아니 었다. 3억 후반대의 자금이면 강남 아파트를 거뜬히 구매할 수 있었으 니 말이다.
더욱이 노무현 정권도 부동산 문 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 다.
중구난방으로 역사 청산부터 사 학 개혁까지 크고 거대한 문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려다가 큰 반발에 부딪쳐 하나도 성공하지 못 했던 회귀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사학재단 이사회에 공익 이사 침 투라는 최고의 결과를 얻어내는 것 으로 사학 개혁을 완수한 노무현 정권은 부동산 문제에 집중하고 있 었다.
다만 아직 어떤 식으로 부동산 문제에 대처할지는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회귀 전처럼 종부세가 나올 확률은 매우 높지만, 확신은 이 르다. 여건이 전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유동 자금 크기 는 전보다 상당히 확대된 상태였다.
IMF를 빠르게 넘긴 게 제일 큰 이유다. IMF 시절만 해도 시중의 돈이 싹 말라 버렸었는데, 이제는 시중에 풀린 돈이 많아져서 인플레 이션을 우려해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주식시장과 펀드와 같은 금융상품이 전보다 크게 융성해진 터라 부동산에 돈이 쏠리는 걸 막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한국의 금융시장이 유동성 자금을 효과적 으로 흡수할 만큼의 규모로 성장하 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