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25화
원자로의 안정에는 핵분열 연쇄 반응의 제어가 중요한데, 그중에서 도 연쇄 반응의 트리거인 중성자가 문제였다.
우라늄 원자로의 경우 핵분열이 시작되면 중성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제대로 제어해 주지 않으면 걷잡을 수가 없다. 반면 토륨은 중 성자를 안정적으로 흡수하는 성질 이 있다.
보통의 핵 발전소는 불의의 사고 가 터졌을 때, 제때 냉각하지 못하 면 원자로 폭발의 위험이 급격히 상승하는데, 토륨 발전소는 원자로 가 정지되면 토륨이 자체적으로 중 성자를 흡수해 핵분열 연쇄 반응이 중단된다.
즉, 핵 발전소의 최대 위기인 멜 트다운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중성자를 계속 외부에서 공 급해 줘야 안정적인 원자로가 가동 되는데, 이것이 토륨 원자로의 상 용화를 가로막고 있던 가장 큰 문 제점이 었다.
"초우라늄 씨앗?"
ID 하이테크의 박사님들은 그 문제를 가만히 있어도 중성자를 뿜뿜 내뿜는 초고농도 우라늄을 작은 씨 앗 형태로 만들어 토륨의 핵분열을 유도하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되어 있었다.
핵물리학 쪽은 유재원의 전공도 아니었기에, 보고서에 담긴 복잡한 내용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연구소의 시험용 토륨 원자로가 3달이 넘도록 안정적으로 운전 중이라는 글귀는 눈에 잘 들 어왔다.
또한, 지진 등의 천재지변이나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상정한 시뮬 레이션에서도 긴급 셧다운이 잘 작 동되었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상업 판매를 위한 대형 원자로의 건설뿐이라는 이야 기였다.
"칼 타이밍이군."
딱 좋은 판매처가 있다. 북한이 다.
유재원의 회귀 이후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북한은 2000년대로 넘어 온 다음부터는 4%대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이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고난의 행군에 대 한 지독한 후유증으로 마이너스 수 치를 찍고 있어야 했겠지만, 지금 은 많은 게 달랐다.
석탄과 철광석, 석회 등등. 지하 자원을 단순 채굴해 파는 것에 불 과하지만 수출도 잘 되고 있었다. 농업 역시 트랙터 등의 현대화된 농기구와 비료 공급으로 식량난이 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경수로 2기가 완공되어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산 업의 전반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심지어 지금 북한에서는 장마당 과 같은 민간 시장은 물론 맥도날 드도 진출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전력의 수요는 많아 졌다. 경수로 맛을 제대로 본 북한 은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 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문제였다.
경수로는 북핵 포기의 대가로 지 어 준 것이지만, 이제는 제 돈 주 고 人}야 했으니 말이다.
이런 북한에 토륨 원자로를 지어 주고, 전 세계에 쇼케이스를 한다 면 그야말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더욱이 토륨 원자로 사업을 통해 북한 수뇌부와 접촉해 인연을 만들 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의 유전 개 발도 시작한다면, 티파니의 후계 구도까지도 완벽해지는 것 아니겠 는가.
마음 같아선 당장 북한에 사업 계획서를 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공인된 외부 기관에서도 검증을 받아보는 게 먼저라는 걸 잘 아는 유재원이었다.
"오랜만에 시애틀에 가 봐야겠네."
덤으로 직접 시애틀의 ID 하이테 크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 었다.
그날 저녁.
"토륨 원자로라고? 자기도 원자 로 사업에 관심이 있었어? 아니, 그건 또 언제부터 시작하고 있던 거야?"
기술 증거용 실험로 구경을 위해내일 ID 하이테크 연구소가 있는 시애틀로 가야 한다는 유재원의 말 에, 티파니는 무슨 기술 증거냐고 물었다. 이제는 비밀이 아니었기에 순순히 토륨 원자로라고 말했고, 그러자 보이는 티파니의 반응이었 다.
"음. 좀 오래되긴 했어. 하이테크 연구소 설립 때부터 시작했거든."
"에! 그럼 15년도 넘었다는 거 네'?"
뜨악 하고 놀라는 티파니의 표정 은 꾸임이 없었다. 하이테크 연구소 설립 때부터 토륨 원자로 개발 성공을 예상하고 일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유재원의 선견지명이 얼 마나 일찍 시작되었던 것인지 절로 헤아려지고, 당시 나이에 다시금 놀라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 그건 아니야."
유재원은 티파니의 반짝반짝 빛 나는 눈빛이 너무도 부담스러워서 바로 보충 설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경제 붕괴 때 모셔온 박 사님들 중에 원자력 전공이 많더라 고. 나는 이분들이 그냥 하고픈 대로 하게 해드린 것뿐이야."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냐? 시간 과 예산을 넉넉히 챙겨주는 사장님 이라니!"
"그런가?"
ID 하이테크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도적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 조 직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기능하는 건 유재원이 원하는 제품들을 만들 어 주는 곳이었다. 21세기 중반, 최 신의 제품에 둘러싸여 있다가 지금 으로 돌아온 유재원에게는 뭐든 불 편하고, 느린 것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의 생활 수준이 만족 할 만한 수준에 이른 건, ID 하이 테크에서 유재원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를테면 유재원의 저택 거실과 안 방을 징식하고 있는 65인치 HDTV 는 ID 일렉트로닉스에서도 제작하지 못한 수제작 제품이다.
ID 하이테크의 박사님들이 수원 공장에서 나온 원판 LCD를 꼼꼼히 살펴보며 수율을 선별하고, 연구소 로 가져와서 일일이 수제작으로 만 든 것이었다.
영상 신호 처리를 위한 하드웨어 보드나 각종 기기와의 연결을 위한 입출력 기능, IoT 연결을 위한 기 능 등등도 하이테크 연구소에서 만 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제품은 유재원의 안방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서 끝나는 건 아니고, 프로토타입 을 만들면서 쌓은 기술은 고스란히 ID 일렉트로닉스에 전해져서 양산 형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데 쓰였 다.
지금은 영상 제작 분야에서 대중화된 드론도 이렇게 만들어진 물건 이었다.
유재원이 청사진을 그려 주면 하 이테크 연구소의 박사님들은 현실 의 기술을 최대한 응용하거나, 아 예 만들어내면서 제품을 완성했다.
반면 이번에 완성된 토륨 원자로 는 박사님들이 하고 싶은 걸 하도 록 묵묵히 지원하자 만들어낸 물건 이었다. 유재원의 차세대 에너지의 마스터플랜은 당연히 상온 핵융합 발전이었고, 그에 대한 로드맵도 이미 있었다.
더욱이 ID 하이테크 연구소로 모 셔온 핵물리학자들도 원래는 북한 의 핵 프로그램 참여 저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박사님들은 아무것도 안 해 도 이익이었는데, 적당히 챙겨드린 예산과 넉넉하게 주어진 시간이 놀 라운 기적을 일으켜 토륨 원자로라 는 S급 아이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참고로 상온 핵융합 기술이라는 치트키를 알고 있는 유재원이지만 토륨 원자로는 충분히 시장성이 있 었다.
기술적 여건 때문이다. 기술 가 속이 일어난 지금으로 기준을 바꾸 어 봐도 상온핵융합은 2030년은 넘 어서야 실현 가능했으니 말이다.
"나도 구경하고 싶은데."
공대생 마인드가 아직 그대로인 티파니는 토륨 원자로 소리에 눈빛 이 반짝였다.
"그럼 같이 가자."
"그러고 싶은데, 중요한 프레젠 테이션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아,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사업 참여 말이지."
"응! 안타깝게도 3일 후가 프레 젠테이션이야."
토륨 원자로만큼 유재원의 동아 시아 전략에 중요한 것이 동시베리 아-태평양 송유관이었다. 이미 안 정적인 에너지 수입선이 있는 한국 이지만, 중동의 정세는 언제 급변 할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이제는 유재원도 예측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으로 흘러가는 중동이 었다. 미국의 공백으로 이라크 내전이 발발했고, 유럽과 러시아가 끼어들었으며, 이슬람 원리주의도 급격히 세를 불리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최대 원유 수입처는 이란이었으니 이라크 내전과는 한 발 떨어져 있긴 했다.
하지만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 관이 연결되면 원유와 가스를 이란 에서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공급이 가능 해진다.
집집마다 가스 보일러를 얼마든 지 켜 두어도 가스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격을 내릴 수 있 다.
여기에 덤으로 중국의 미세먼지 문제도 해결할 실마리가 된다.
2010년 중반부터 중국의 에너지 수요는 폭증했는데, 중국은 이를 석탄으로 해결했다. 석탄 발전소에 서 뿜어지는 어마어마한 미세먼지 는 겨울과 봄에 북서풍을 타고 그 대로 한반도로 내려왔다.
이러한 수요를 가스와 석유로 대 체한다면 회귀 전과 같은 미세먼지 참사도 사라질 것이다. 더불어 중국의 에너지 안보에 러시아와 셰브 롱이 한 발 걸칠 수 있게 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점도 크다.
"아, 그게 3일 후야?"
"응!"
집에 일을 가져오는 일이 없었던 티파니지만,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았다. 유재원에게 조언을 구할 때도 있었 고, 그냥 공감을 바라고 하는 경우 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유재원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다.
덕분에 티파니의 현재 현안인 프레젠테이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 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언 제든 이야기해 줘."
"에이, 그럴 일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그래그래! 그럼 믿고 있을게."
당차게 말하는 티파니였지만, 유 재원 덕에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자기도 시애틀 가서 너무 위험 한 곳까지 들어가지는 말아. 토륨원자로가 안전하다고는 해도 핵용 합로는 아니잖아. 기존의 원자로처 럼 방사성 물질을 쓰는 거니까 적 당히 해."
"물론이지."
건강과 안전을 챙기는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재원이다.
지금 누리는 이 삶이 얼마나 귀 한 것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 는 장본인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티파니는 그걸로도 안심되지 않았 던 모양인지, 손가락을 걸며 약속 을 하게 했다.
다음 날.
유재원은 시애틀에 도착했다. 시 애틀 공항에서 다시 헬리콥터로 갈 아타고 동쪽으로 100km쯤 다시 들 어가면 워터빌이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거기서 좀 더 북쪽으로 올 라가면 ID 하이테크의 핵물리연구 소가 나온다.
안전한 토륨 원자로를 연구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핵물질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인구 밀도가 적고, 지 층도 안전한 곳을 찾게 되었다. 그 것이 워터빌이었다.
"작은 도시가 아니라, 작은 마을 이네요. 처음 원자로를 설치할 때 문제없었나요?"
워터빌의 인구는 2천이 채 되지 도 않았다. 시내가 걸어서 10분 거 리도 되지 않을 만큼 작았다. 심지 어 이 숫자도 ID 하이테크의 분과 연구소가 생기고 나서야 올라온 것 으로, 10년 전에는 상주인구가 1천명도 간당간당하던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를 지탱하는 산업도 옥수수, 밀, 포도 같은 농사 였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깨끗함이 생명인 농사였으니, 농지에서 수십 km 떨어진 곳에 원자로가 들어온 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럼에도 지금까지 시험로가 워 터빌 인근에 자리할 수 있었던 건 ID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폭적인?"
유재원 본인도 모르는 전폭적인 지원이라니?
생각해 보니 이론적으로는 가능 했다. 유재원은 단순히 경영자가 아니라, 개발자이기도 했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하는 일이 워낙 많 아서 경영에 신경을 쓸 시간이 다 른 오너들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 렇기에 사장과 임원에게 위임된 권 한도 상당했다.
워터빌 정도로 작은 마을에 지원 을 하는 정도라면 안드레이 소장선에서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이 렇게 많은 권한을 위임한 만큼, 감 사를 비롯한 여러 견제 장치도 마 련해 두었다. 참고로 유재원이 가 장 신뢰하는 모니터링 수단은 인공 지능 골드였다.
최강욱 부회장처럼 공명정대한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이기에 실수 의 가능성은 늘 있다. 하지만 인공 지능 골드라면 실수 없이 완벽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다.
ID 하이테크에서 이상한 곳으로 자금이 흘렀을 경우 분명 골드가 보고를 했을 터인데, 이제껏 골드 의 보고서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회장님 입장에서는 미미한 규모 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상당히 큰 액수였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 연구원들을 위해 지은 편의 시설도 이곳 사람들에게 개방해서 좋은 반 응을 얻고 있지요."
안드레이 소장의 말에 유재원은 바로 이해했다.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지금은 원자로가 우 선이니까요."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