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19화
그 결과 한국은 아주 숙원이었던 소파 개정에 미국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 그동안 판매하지 않았던 글로벌 호크 같은 고등 정 찰 자산의 판매도 허가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한미 FTA 역시 나 동등한 관계에서 체결하기로 하 면서 빠르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말로만 혈맹이 아닌, 진정한 동 반자적 관계의 시작이었다.
"노 대통령이라면 재협정도 잘 하시겠지."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엔 글로벌 호구 소리 듣던 대통령도 있었지만, 노 대통령의 협상력은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최상이었다.
회귀 전에도 나름 균형적인 한미 FTA를 체결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가서는 미국에서 불리하다고 재협 상을 요구했을 정도로 괜찮은 결과 였다. 심지어 당시 미국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늘 충돌했던 전쟁광 부시 시절이었다.
지금은 노 대통령과 이야기가 잘 통하는 앨 고어 대통령이었고, 한 반도의 상황도 전과 다르니 훨씬 큰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한국의 뉴스도 한참이나 챙겨 본 유재원은 이번엔 게임 패드를 들었 다.
엑스박스용 패드와는 모양이 많 이 달랐다. 바로 플레이스테이션3 의 듀얼쇼크3라는 게임 패드였기 때문이다.
소니는 전 세계 게이머들과 약속 했던 플레이스테이션3의 출시 날짜 를 지켰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맞 춰 플레이스테이션3의 발표와 함께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출시 가격은 엑스박스2와 같은 499달러였다.
혹시나 소니는 다를 거라고 기대 했던 게이머에겐 실망이었을 테지 만, 엑스박스2와 같은 499달러를 고수한 것은 소니에겐 엄청난 무리 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플레이스 테이션3의 발매 스펙은 회귀 전에 나왔던 제품에 비해 상당히 업그레 이드되었기 때문이다.
CELL 이군}는 독자적인 CPU 나엔비디아의 G70 GPU나 회귀 전 오리지널 기기에 비해 성능이 대폭 올랐다.
메모리의 용량도 커졌고, 하드 디스크의 용량도 늘어났다. 여기에 블루레이라는 차세대 광학 미디어 를 채용하면서 플레이스테이션3의 원가도 대폭 상승했다.
순리대로라면 출시 가격을 좀 을 려야 하는데, 엑스박스2와의 경쟁 을 위해서 같은 가격으로 낼 수밖 에 없었다.
그렇지만 엑스박스2라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해 가격을 마음대로 올 리지도 못했고, 스펙을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게이머들로부터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CELL이라는 괴악한 구조의 CPU로 인해서 개발사들은 게임을 만들고 최적화하는 데 엑스박스2보다 훨씬 힘들어하고 있었다.
"으흠, 역시 그란투리스모뿐이네."
플레이스테이션3를 켜고서 할 만 한 게임을 살피던 유재원은 이번에 도 그란투리스모를 실행했다.
유재원도 출시일에 맞춰 자비로 플레이스테이션3를 구매했고, 지금 처럼 틈이 날 때마다 게임을 즐기 는 중이었는데, 문제는 즐길 만한 게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이 다. 엑스박스2 역시 AAA급 타이틀 이 아직 많은 건 아니었는데, 소니 는 더더욱 부족했다.
이유는 바로 CELL이라는 괴악한 구조의 CPU 때문이었다. 이론적 성능은 무척이나 좋은데, 이를 게 임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나마 그란투리스모라는 레이싱 게임은 차세대 게임기의 성능을 제 대로 보여주었다.
문제는 소니와의 독점 계약으로 오직 플레이스테이션에서만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스티어링 휠을 어디다 뒀지?"
유재원은 본격적으로 레이싱 게 임을 하려고 휠까지 찾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조만간 새 해가 되면 바빠질 것이기에, 지금 처럼 느긋하게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티파니는 셰브롱의 연말 자선 행사에 간 터라 그야말 로 지금은 유재원만의 시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현실판 그란투리 스모도 즐길 수 있는 유재원이었지 만, 실제 슈퍼카를 모는 것보다는 이렇게 안전한 거실에서 레이싱 게 임을 즐기는 게 훨씬 좋았다.
순식간에 게임에 빠져든 유재원 은 게임 속 트랙을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다사다난했던 2004년이 다 지나 고,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상큼한 새해의 신호탄은 일본 중 의원 선거였다. 전체 480석 중에 일본 민주당이 3()1석을 획득, 전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우경화 움직임을 가속했던 정치 인들은 죄다 낙선했고, 하토야마 유키오 등등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일본의 새로운 총리로 일본 민주 당의 대승을 이끈 오자와 이치로가 유력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ID 그룹에 한정으로 2004년을 돌아보자면 엑스박스2와 더 퍼시픽 에만 을인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계열사에서도 많은 성장과 변 화가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덕진공대에서 첫 번째 졸업생 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이었다. ID 파운데이션에 있어 커다란 성과였 다.
ID 파운데이션은 글로벌 조직이 지만, 가장 조직력이 발달된 나라 는 한국과 미국이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최고였다.
덕진사학재단을 통해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수직화가 완성된 상태 였다. 그중에서 제일 늦었던 것이 덕진공학대학이었는데, 어느덧 4년 이나 흘러서 1회 졸업생이 나왔다.
그런데 졸업생의 그 숫자는 244 명에 불과했다.
애초에 단과 대학인 탓에 입학 정원이 겨우 600명 남짓했는데, 졸업생의 숫자는 입학 정원의 1/3인 것이다.
원인은 바로 유급 제도 때문이었 다.
한국의 대학교 특징은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졸업은 쉽다는 것 이었다. 물론 들어가기 쉬운 대학 교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명문대 일수록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면 졸업의 경우 학기 중 큰 문 제만 만들지 않으면 웬만하면 다 할 수 있다. 학사 경고가 연속해서 이어질 만큼 도의 연속이라거나, 범 죄와 같은 일에 연류되지 않으면 된다.
덕진공학대학교는 좀 다르다.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졸업 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학교였다.
설립한 지 겨우 4년 된 학교가 들어가기 어렵다는 건, 그만큼 우 수한 두뇌들이 많이 지원한다는 의 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덕진 공학대학교 졸업생에겐 ID 그룹 지 원 시 큰 가산점이 부여되기 때문 이다.
일자리 문제가 중요한 경제 이슈 로 떠오른 지금, ID 그룹의 가산점 은 예비 대학생들을 혹할 강력한 요소였다.
외환 위기가 회귀 전과 다르게 순한 맛으로 지나갔던 지금의 한국 이지만, 좋은 일자리 숫자는 늘 부 족했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 순 위를 꼽을 때 언제나 최상위권에 있는 곳이 ID 그룹이었다.
근무 여건도 최고였지만, 보수 체계는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따라 올 곳이 없었다. 기본급 자체가 커서 야근이나 특근이 없어도 빵빵한 월급이 나왔고, 매년 연말 나오는 보너스가 웬만한 중소기업 근로자 의 연봉에 비견될 정도였다.
무엇보다 IT 분야 최고 선도 기 업이라는 타이틀은 미래에 대한 걱 정을 잊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덕분에 해가 지날수록 덕진공과 대학교의 입결은 높아졌다. 이제는 한국 최고의 명문대인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부를 넘어설 정도였다. 그렇게 어려운 문턱을 넘고 입학에 성공한 새내기들은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입학이라는 가장 어려운 관문을 넘었음에도 시트콤에 나오 는 대학 생활과는 100만 광년도 멀 리 떨어진 빡빡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공 필수 과목은 최소 반 이상 이 영어로 진행되었던 탓이다. 그 럴 수밖에 없는 게 유재원이 덕진 공대 교수님들로 초빙한 분들은 스 탠퍼드 혹은 ID 하이테크 연구소 출신의 교수님들이었다.
더욱이 평균 평점이 1.6 이하면 유급에 처해진다. 한 학기를 그대 로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덕진 공학대학교의 시험 체계는 모두 절 대 평가였기에 유급은 오로지 학생 의 책임이었다.
더욱이 장학금 제도가 워낙 잘되 어 있어서 웬만하면 다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니기에 더욱 책임이 따른다.
유급을 2번 받으면 장학금 혜택 이 사라지고, 3번이면 퇴학 조치가 된다.
이러한 학사 시스템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영어 공부와 함께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 다.
대신 그 어려운 과정을 딛고 졸 업에 성공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과 실은 달콤했다.
영광의 졸업생 타이틀을 받은 244명 모두에게 약속한 것처럼 ID 그룹에서의 인턴십 기회가 주어졌 으니 말이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오늘 유재원의 스케줄은 전용기를 타고 날아온 덕진공대 졸업생들의 환영식 참석이었다.
"이야! 내가 저걸 타보다니!"
늦깎이 졸업생 홍범수는 크고 넓 적한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비 행기를 보고 감격했다. 동체에 그 려진 귀여운 안드로이드 로봇과 수 직 꼬리 날개의 ID 마크.
ID 그룹의 전용기였다.
상업 운행은 하지 않는 전용기에 홍범수가 탈 수 있게 된 것은 유재 원의 배려 덕이었다. 덕진공대 졸 업생들을 샌프란시스코로 데려오기 위해 일부러 한국으로 보낸 것이다.
홍범수는 다시금 덕진공대에 들 어간 것에 대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홍범수의 나이는 벌써 39살. 평범하게 살았 더라면 어디 기업에서 과장 혹은 부장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실제로 홍범수는 1992년 서울대 학교 산업공학과 석사를 마치고 일성SDS에 입사했다. 일성의 전산화 와 물류 시스템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성 SDS 에 들어갔다는 건 그 자체로 성공했다는 의미이기 도 했다.
지금은 ID 그룹에 밀려난 신세지 만, 당시만 해도 기업 전산화의 첨 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성 SDS 에서의 생활은 홍범수에겐 실망과 고난의 연속이 었다. 특히 일성SDS의 가장 큰 고 객인 일성전자가 ID 그룹에 인수된 다음부터는 일성그룹의 일성SDS에 대한 취급도 달라졌다.
지금이야 일성통신이 생겨서 다 시금 취급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애물단지 취급이었으 니 말이다.
그러다가 IMF 외환 위기가 오자 회사 자체가 흔들렸다. 명예퇴직을 신청받기 시작했던 그때, 홍범수는 제일 먼저 신청했다.
영 가망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 다. 홍범수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사내 벤처 기업인 네이버의 좌초였다.
그룹 차원에서의 일성의 기본 전 략은 패스트 팔로워였다. 시장 선 도는 하지 않지만, 뭔가 되는 것 같다면 선도한 기업보다 더 완성도 높은 후속 제품을 출시해 따라잡는 것이라고 그룹에서는 설명했지만, 그냥 모방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이었다.
일성SDS에서 패스트 팔로워 전 략으로 선보인 건, 네이버. 바로 넥 스트컴을 따라 한 포털 사이트였다.
결과적으로 망해도 처참하게 망 했다.
넥스트컴이라는 시장 선도적인 서비스는 언제나 늘 새로운 서비스 를 제시했고, 후발 주자인 다움이 라는 확실한 국내 2인자가 있었다.
결국 3위 싸움부터 해야 하는데, KT에서 파란이라는 걸 들고 나왔 다.
지금 파란은 없는 이름이 되었 다.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 정보 유 출 집단 소송에 걸려 파산해 버렸 으니 말이다.
개인 정보 유출 피해자에게 30만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 떨어졌고,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유출된 개인 정보만 300만 명이 었으니, 배상금 총액이 9천억 원에 이르렀다.
파란이 모든 자산을 처분하고도 배상금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했 다. 그렇지만 피해자 모임은 끝까 지 그 돈을 받아냈다.
그 결과 파란은 파산했고, 모기 업인 KT까지도 휘청거렸다.
그나마 법원에서 KT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고 했기에, KT는 건재할 수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게 주주의 유한 책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당시 네이버는 파란에게 도 밀리는 처지였고, 그걸 계속 두 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일성SDS 는 네이버를 청산해 버렸다.
홍범수는 이찬진이란 동기와 함 께 사내 벤처 네이버를 시작한 사 람이었기에, 회사의 결정에 정이 뚝 떨어졌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일성SDS 를 박차고 나온 홍범수는 그냥 놀았다.
3년을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덕진공대 개교 소식을 듣고 수능을 다시 보았고, 덜컥 합격하고 말았 다.
덕진공대 1회 졸업생 중에 홍범 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특유의 친화력 덕에 20 살 가까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어울릴 수 있었다. 물론 홍범수의 피나는 노력도 상당했다.
더구나 덕진공대의 커리큘럼은 서울대 이상의 난이도였기에 교우관계는 물론 학교 수업에서도 뒤처 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 덕에 한 번의 유급 없이, 졸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는 것처럼 ID 그 룹 인턴 합격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얻어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