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08화 (708/1,007)

33권 17화

"확장 팩이라니. 이거, 투나잇 쇼 에서 최초 공개하시는 건가요?"

"네! 최초입니다."

화제 집중을 위해 확장 팩 개발 까지도 시원하게 공개하는 유재원 이다.

원래 하나의 게임을 쪼개 파는 것을 혐오하는 유재원이다. 더 퍼 시픽만 보더라도 플레이 타임을 따 지면 21세기 중반의 게임들의 2, 3 배는 된다.

그야말로 게임 하나가 태평양 전 체를 다루었으니 볼륨도 상당했고, 마음만 먹었다면 쪼개서 팔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단돈 49달러 에 발매했고, 확장 팩 역시나 제대 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를 통해 더 퍼시픽에서 담지 못했던 일본 제국 의 만행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이를 통해 일본 우경화에 조금이 라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면 제 작비 정도는 얼마든지 웃으며 지불 할 수 있었다.

코난 오브라이언의 투나잇 쇼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녹화되었다.

이와 함께 유재원이 들고 간 서 류 가방은 NBC 의 보도국과 다큐 멘터리 팀에게 넘겼다. 애초에 투 나잇 쇼에서는 꺼낼 생각이 없었던 문서였다.

난징대학살, 731부대, 성노예 등 등 2차 대전의 일본 제국군 범죄에 대해 CIA의 전신인 OSS에서 수집 한 내용이 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한일 기본 조약 체결 때 한국과 일 본 수뇌부의 동향과 이면 합의에 대한 보고서였다.

외교 문서도 있었지만, 탑 시크릿이란 붉은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 힌 CIA의 보고서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면 합의에는 밝혀지면 큰 사달이 날 내용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중 하나만 예로 들자면, 한일 기본 조약 때 보상금조로 받은 3억 달러에 대한 비화였다. 일본은 그 것으로 청구권이 청산되었다고 인 식했고, 한국은 그 돈으로 근대화 의 기틀을 이뤘다는 서사가 이어졌 다.

그런데 사실은 제대로 쓰인 돈은 얼마 되지 않았고, 박정희 대통령 과 그 수뇌부가 챙겨 갔다는 사실 이다. 여기에 덤으로 일본이 차관 의 사용처까지 간섭했고, 그로 인 해 일본 전범 기업에 돈이 돌아갔 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를테면 서울 지하철 1, 2호선 에 도입된 지하철 차량을 미쓰비씨 같은 전범 기업들로부터 샀는데, 그 가격이 최소 3배, 많게는 5배까 지 부풀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렇게 쓰인 돈은 다시 일본 자민당 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야합을 강요한 게 바로 미국이었다.

공산 세력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 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은 한국과 일본을 방파제로 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 화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사 문제로 싸우기만 하니 억지로라도 외교 관계를 회복해 놓아야 했다.

미국의 압력에 반색한 건 일본이 었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 희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에 쉽게 굴복했다.

미국이 귀찮다는 이유로 역사적 맥락을 알아보지도 않고 대충 마무 리 지은 외교 문제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한국과 일본은 특히나 치명적이었다.

해당 문서들이 유재원의 손에 들 어온 건 바로 미국의 기밀해제법 덕이었다.

미국 국립기록물관리처는 기밀해 제법에 따라 매년 엄청난 분량의 비밀 문서를 해제한다. 이름만 들 으면 엄청난 비밀이 풀리는 것 같 지만, 공개되면 세상이 뒤집어질 만한 문서들을 찾는 건 지극히 어 려운 일이다.

게다가 파장이 크게 일어날 내용 은 검정 칠을 해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비밀 해제되는 문서들 의 분량이 엄청났고, 인덱싱도 되 어 있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내용을 추려내고 원하는 걸 찾는 건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그렇지만 유재원에겐 회귀 전의 기억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심지어 그 일을 대신 해 줄 유능한 스페셜 팀도 있었으니, 엘리트 스 나이 퍼처럼 백발백중이었다.

엄청난 폭탄을 넘겨받은 NBC였 지만, 역시나 북미 전역을 아우르 는 공중파답게 신중했다.

열심히 교차 검증 후에 문서의 신빙성이 충분히 확인되면 심층 취 재 보도와 다큐멘터리 제작에 돌입 하기로 했다.

유재원도 NBC를 소유하고 있었 지만, 보도 부문에 대해선 자율을 약속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충분히 존중했다.

그 결과, 진주만 공습 추모 행사 를 이틀 남겨 둔 12월 5일에 '진주 만 특집! 부활하는 라이징 선'이라 는 특집 프로그램이 북미 전역에 방송을 탔다.

더 퍼시픽에서 시작되어 투나잇 쇼에 이어, 특별 프로그램까지.

마치 우경화 열차에 탔던 일본을 향해 트리플 콤보 공격이 크리티컬 로 터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서는 진주만 공습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 렸다.

원래는 소박한 행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국의 경우 전몰 병사들을 추념하는 메모리얼 데이 가 5월 30일로 통일되었기 때문이 다.

그렇기에 공습이 있던 12월 7일 보다는 5월 30일이 훨씬 크게 열리 는 행사였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다.

오늘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모인 거물급 인사들의 면면만 보면 그렇 게나 화려할 수가 없었다. 유재원 은 물론이고, 정계의 거물급 인물 들이 모두 자리했다. 그 중심엔 재 선을 마친 앨 고어 대통령이 있었 다.

준비된 연단에 오른 앨 고어 대 통령의 얼굴엔 그야말로 여유가 가 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2004년 미 국 대통령 선거처럼 일방적인 경우는 또 없었으니 말이다. 재선 선거 운동에 들어갈 때부터 지지율이 남 달랐다.

회귀 전 미국은 911을 겪으며 완전히 달라졌다. 급격한 보수화와 함께 세계 최고 선도 국가로서의 프라이드도 사라졌다.

부시 다음으로 오바마를 대통령 으로 뽑긴 했지만, 그 후임이 트럼 프였으니 말 다했다.

이번에도 911은 피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피해의 규모는 반으로 줄었고, 범인인 오사마 빈 라덴을 거의 실시간으로 잡아내면서 과거 와 같은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 다.

확실한 증거가 바로 앨 고어의 재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지율이 너무나 탄탄해서 일방적인 선거가 치러졌 으니 말이다. 재선 모드에 돌입했 을 때 앨 고어의 상대로 공화당에 서 내세운 건 존 매케인 애리조나 주 상원 의원이었다.

둘 사이의 지지율 격차는 무려 20% 이상!

대선 선거에서 이 정도의 지지율 격차라면 시작해 보나마나였다. 오 죽하면 존 매케인도 본인이 적극 나선 건 아니었고, 거의 떠밀리듯 후보에 올라 선거를 치렀으니 말 다했다.

대선이라는 건 정치인들의 궁극 적인 목표지만, 이번 선거만큼은 공화당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앨 고어의 탄탄한 지지율의 비밀 은 바로 경제!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 제 회복 기조는 앨 고어 대에 와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더욱이 이번엔 이라크 전쟁과 같 은 예산의 블랙홀과 같은 참사가 없었고, 셰일 혁명은 보다 빠르게 일어나는 중이었다.

이라크 내전 때문에 중동의 정세 가 흔들리면서 유가가 올랐지만, 미국엔 거의 타격이 없었던 것도 셰일 혁명 덕이었다.

다만 앨 고어 대통령은 셰일 혁 명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는 것이다. 환경론자인 앨 고어 대통령은 지구 온난화 문제와 환경 오염에 대해 관심이 무척이나 지대했다. 그런데 셰일 가스나 오일 개발에는 지하수 남용으로 환경 파괴 논란이 동반되 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수압파쇄법이 가스파쇄 법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지하수 남용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 었고, 중동 문제로 인한 유가 상승 문제가 엮이게 되면서 앨 고어도 셰일 개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 다.

재미있는 건, 셰일 가스 개발로 인한 부작용이 존 매케인의 공격포인트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공 화당 후보가 석유 산업을 공격하는 격인데 앨 고어 대통령에 대해 워 낙 공격할 포인트가 없다 보니 들 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11월 2일에 뚜껑을 열었을 때에 도 이변은 없었다.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에 375 명을 확보해서 163명에 그친 존 매 케인을 압도하며 재선에 성공한 앨 고어였다. 2000년 선거보다 훨씬 숫자가 늘어났으니 앨 고어의 지지 율은 그야말로 탄탄했다.

그런 앨 고?어가 진주만 메모리얼 데이 행사에 참석했으니 그것이 의 미하는 바는 엄청났다. 특히 8월 더 퍼시픽 출시 이후 충격의 연속 이었던 일본은 그로기 상태였는데, 이번 행사로 막타를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행사 후 공개된 사진 중에 앨 고어와 유재원이 나란히 서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언론들은 이를 대 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래 봐야, 바뀌려면 멀었지만."

유재원은 무릎 위 i웍스 노트북 에 띄워진 기사를 보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방금 진주만 메모리얼 데 이 행사가 끝나고서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는데, 인터넷에는 벌써 해당 행사 관련 기사들이 뜨는 중이었다.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였다.

인터넷으로 현장에서 기사를 써서 전송하면, 신문이나 미디어 홈 페이지에 바로 업데이트가 되었다. 그러면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도 실시간으로 포워딩되면서 네티즌들 이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인터넷 기사는 누가 먼저 속보를 띄우냐에 따라 클릭 수가 좌우된다 는 걸, 이제 모든 미디어 회사들이 알고 있었기에 속보 경쟁은 치열했 다.

심지어 보수적인 일본의 신문사 들도 그런 경쟁에 동참했고, 덕분 에 일본에서도 진주만 메모리얼 데이 행사 관련 기사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원은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8월부터 지금까지.

태평양 전쟁 이슈로부터 파생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일본의 태도 변화는 딱히 찾아볼 수 없었던 탓이다.

오히려 일본의 경우 무역 최혜국 대우인 화이트 리스트에 한국을 올 리려다가 무기한 연기하는 등의 불 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우경화에 대한 태도는 딱히 변한 게 없었다.

한국 역시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일본과 날을 세워서 좋을 건 없다 는 식의 반응이 나오고 있는 중이 었다.

다만 아주 반응이 없는 건 아니 었다.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꾸준히 하향 중이었다. 10월 말에는 50% 선이 무너졌고, 11월 말에는 40% 중반까지 떨어졌 다. 이대로 계속 떨어져서 30%에 진입하게 되면 고이즈미 총리의 불 신임으로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아직 일본에서 자민당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 집단이 나타나 는 건 무리였다는 사실이다. 대안 정당으로 꼽히는 건 민주당이지만, 구심점이 없어서 확실한 지지를 받 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일본 민주당도 자세히 보 면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이 차린 정당이었기에, 운 좋게 정 권을 얻는다고 해도 뭔가 대대적으 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유재원도 일본 전체가 개과천선 을 하는 천지개벽을 바라고 더 퍼 시픽과 다큐멘터리를 만든 건 아니 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일본에 갖고 있던 호의적인 이미지에서 거품을 빼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달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꼴도 보기 싫은 욱일기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이 되 어서 이제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혹은 콜라보레이션 아이템으로 나 오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게 제일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거둘 성과는 아직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유재원 일행은 무척이나 삼엄한 경비를 지나서 모처에 안내되었다. 평소라면 어디든 함께했던 경호팀 도 함께하지 못하고 유재원은 김대 석 비서실장하고만 따로 움직여야 했을 정도다. 심지어 마지막 관문 앞에서는 김대석도 함께하지 못했 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러 가 는데, 이리 유난인가 싶지만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

"오! 유 회장! 어서 오게!"

문이 열리자 유재원을 환한 표정 으로 반기는 사람은 바로 앨 고어 대통령이었으니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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